카테고리 없음

이순신의 보고서,배설 전함 였 바꿔먹으려 했나

自公有花 2014. 8. 29. 14:01

보통 사람이라면 배설이 '명량' 영화처럼 행동 하겠지요 백이면 백이 그럴 것입니다. 원균과 이순신 사이의 암투처럼 말이죠, 

 눈깔 사탕 하나라도 뺏기면 섭섭하지요, 

 배설잔군은 달라요  함대를 넘겨줍니다.

 

명량 영화 감독이 배설을 매국노 간첩 또는 악당으로 그리는 것,  배설은 전혀 상상이 안되는 장수입니다.  야전군 사령관이 군대도 전함도 12척을 흔쾌히 한 컷에 이순신에게 넘겨 줍니다.  

 

'불멸의 이순신'과 '명량영화' 전투신 일본의 종군화를 근거로 제작했대서 고증에 충실했다고 하는데요 사실 종군화 자체가 배설의 칠천량 해전도로 최근 밝혀졌습니다. 아래는 펌글입니다.

 

 

 

1, 이순신의 거짖된 보고서(왕에게 고의로 보고되지않음)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원수부 권율은 고의로 선조에게 이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음+배설이 단신 도주하고 있고 전함은 모두 격침되었다고 보고함)[7월23일 보고서]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7일간 청야 작전을 감행 남해 주민을 육지로 대피시킴)


2,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1.060명의 병사 뿐이다.배안에는 들어 가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병력)


3, 경상우도수군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권율 이하 비변사에서 배설장군의 보고를 은폐 왕에게 보고하지 않음)
4, 화약 탄환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칠천량서 교전중 탄환이 떨어져 한산도 수군본영에서 충진한 상태에서도 절대부족함)

 

국사책에 120명의 병졸로 배설이 장장 201km를 노량포에 도달할 수가 없음,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 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는 것은 거짖말임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고 전함은 나무로 만들어져 였장수가 가져가지 않음, 당시 어마어마한 전함을 숨길 수 없음 나라를 위해 작전을 하는 배설장군의 전함과 병사들을빼앗고자 허위보고를 하고 이순신을 임명해야 한다고 임명장을 요구함(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배설의 잘난채 하는 모습 기세가 대단하다는 8월 기록이 있음)

 

 

 

 

 

영화 명량의 백병전은 허구라고...?...뉵갑덜을 허시라. [780]궐한 (vkfkd****) 주소복사 조회 134244 14.08.20 22:47

 

 

 

참 희안하다.

 

우리 조선인들 중 상당수들은...국가적 영웅들도 뭔 구실을 대서 깍아 내리는 솜씨가 탁월하다.

뭔 지식나부랭이 좀 있다고...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의 영웅사를 ...극히 일부의 미심적은 사료 나부랭이들을 처 들고서...

과장이니 뭐니... 폄하하는 소질들이 아주 뛰어나다.

 

그 중 임진왜란사  ...

늘 내 미는게 이순신장군의 친필 난중일기 원본내용과 왜놈들 기록들 얘긴데...

과연, 왜놈들이 왜정시기에...조선의 가장 대표적 사서인 조선왕조실록등과...

지들의 가장 수치스런 임진왜란 역사기록 중...가장 사실적인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손을 안 댓다 보이는가...?

 

......................................................................................................................................................

 


*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또 금오(金吾)로 대장을 삼아 20여 추장(酋長)과 군사 50여 만을 거느리고 청정(淸正)ㆍ행장(行長) 등의 두 번째 침범하는 세력을 도왔다. 금오는 이때에 16세였다.<<난중잡록>>

* 8월에 적선이 악양(岳陽)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영남 앞바다 5, 6십 리에 배가 꽉 차서 바라보니 바다가 없는 듯           하였다.

9월에 수가(秀家)가 섬진강(蟾津江)을 경유하여 한산에 들어와서 먼저 천여 척 배로 서해로 향하였다. 《일월록》

 

*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난중잡록>>


 

........................................................................

 

 

일본인이 그린 조선역해전도.
일본 동경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림의 배경은 "명량해전"으로 추정.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1. 자...가운데 조선 판옥선에 개때같이 붙은 일본 군함을 보십시오. 당시 정황은 저러햇을 겁니다.

 
 

2.화질의 좀 엉망이지만 당시 전장의 치열함은 여실히 느낄수 있습니다.

 

 

3. 어라? 뭔가 이상하군요? 우리 사극에서 보면 벙거지에 헝겊데기 달랑 걸치고 나오던 우리 조선 군사들이 모조리 중무장을 하고 있네요.

 


4. 신기전(소리나는 화살)로 적을 겨냥하고 있는 조선군입니다.

   좌하단의 군사는 겁을 먹은건지 짜증을 내는 건지 잔뜩 찌푸렸네요.(주: 신기전이 아니라 일종의 시한폭탄입니다. 죽통에 화약을 채우고 심지를 달아 불타는 시간을 조절한 뒤 화살로 목표물에 맞주면 잠시후 폭발하는 원리임)

 

 

5. 자. 총통의 모습도 보입니다. 실물과 90% 닮지 않았습니까? 상상으로는 힘든 부분이지요.

   헌데 쏘는 방식이 우리가 사극에서 보듯 105mm박격포 쏘는 처럼 쏘는게 아니라 M60처럼 쏘네요.

   흔히 보던 몽고복발형 투구외에 군대 하이바처럼 생긴 철모를 쓴 병사도 보입니다.

   네, 이 투구..우리 사서에서 전 분명 본적있습니다.

 

6. 빨간통을 전지려는 빨란 갑옷의 군사! 파이어뱃입니다. 수류탄 투척병이죠.

   오~ 하단에 벙거지쓴 우리의 포졸 등장! 헌데 역시 갑옷으로 중무장 하고 있습니다.

   헝겊데기 절대 아니라구요.

 

7. 역사스페셜에서 보앗던 무기입니다. 레버를 아래로 당시면 자동으로 화살이 나가죠.

   멤피스벨 폭격기에서 B29 기관총 사수를 연상하게합니다.(주: '수노기'로서 기존의 쇠뇌를 개량해 발사속도를 높인 무기죠.)

 

8. 자 수류탄 투척병이 수류탄 던지고 있습니다. 

   방패를 든 등패수들이 적이 함선에 올라타는 것을 저지하고 잇네요.

   전통 방패외에 등패도 보이고, 우리나라고유의 환도와 중국식의 검도 보입니다.

   오른쪽 병사는 겁먹었네요. 하긴...일본애들이 좀 무섭죠.(주: 수류탄이 아니라 기름통에 불을 붙여 적선에 던지는 것 같군요)


 
 

9. 조총으로 조선군 조준 사격중입니다. 안 맞길 바랍니다. -_-;

 

10. 무식하게 큰 꼬챙이로 조선군을 찔르네요. 조선군들이 날린 화살이 무수히 날아갑니다.

 

11. 어? 조총외에 일본군도 활도 쏘는군요. 그쵸...조총만 쏠순없죠...비교해보십시오.

    일본군 활과 조선군 활이확연히 틀립니다. 상상도 절대 아니란 증거죠.(주: 일본군이 칼을 2개 차고 있는데 이는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세키부네가 거대한 이순신의 판옥선에 근접하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군의 천자총통 포격.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붉은 통의 정체는 질려포통.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   원균이 패한 이후로 이미 한산도의 요새지를 잃은 터라, 순신이 중과부적으로 넓은 바다에서 교전하기가 어려우므로, 물러나 벽파정 아래 좁은 목을 지키면서 형세를 이용하여 의병(疑兵)을 설치하고 있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최소한 호남의 수군들은... 왜놈들 보다 칼싸움이 월등했다면 ...뭔 법에 걸리기라도 한단 건가...?

왜 조선군은 단지 2명만 사망하면 안 돼는 건데...?

 

왜 우리 조상이...난쟁이 왜놈들보다 월등히 칼싸움을 잘하면 안돼는 건데...?

왜 우리 조상들이 세계 어느 해전사에도 없는...전무후무할  기적적인 완승을 거뒀다면 안 돼는 건데...?

 

 

위와 같은 명백한 명량해전의 근접백병전(육박전)기록들이 있음에도...

조선수군은 난쟁이 왜놈들의 칼솜씨가 두려워 ...그저 멀리서 포격전만 해서 명량대첩을 거뒀단

근거없는 유언비어 빠라 살포질을 하는... 대한민국 자칭 먹물쟁이들의 매국적인 여물통들에...

 

아직도 개량하지 않은...우리동네  긍현이네 뒷깐의 묵은 떵물 한 박아지를 퍼 먹였으면 하는...

비통한 심정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출처: 아고라 영화 명량의 백병전은 허구라고...?...뉵갑덜을 허시라. "궐한" 님의 긴글 중간 중략했슴)

 

 

 

 

1, 위의 그림에 "이"라는 깃발은 조선해역전도에 없는 것을 장난으로 누가 그렸구요, 위그림이 '칠천량해전'의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장군은 오래 근무한다고 적군에 알려지지 않죠,

 배설의 전투로 일본왜군들 사이에 배설이 그려집니다. 그들도 침략전쟁이 이래 어려웠다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배설은 왜군들을 후덜덜한 조선의 맹장이였음을 종군화가 증명하구요 요즘도 별만달고 다니는 장군을 '똥별'이라 합니다.

 

 

이순신은 지금으로 치면 관료들 즉 군인에 지원해서 출세해 보려든 장수 였었지요,  배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 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국토가 유린되어도 다른 모든 장군들 처럼 왜군과 접전하는 싸움은 피합니다. 그게 잘 못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지요

 

 

왜군이 무가가 우수하고 수가 많은데 전투를 건다는 것은 거의 죽음이였거든요

원균의 3도 연합함대의 선봉을 선 배설이 칠천량서 드디어 왜군을 공격합니다. 다른 장수들은 왜군을 피해 다닙니다. 그걸 비난해서는 안되지요.  현실이 그랬고 방법이 없어 조선 전국토가 점령 당한 시절이 사실이지요

 

 

절망의 상태에서 배설이 부산 상륙 전에 작살내자 이런 것은 정말 멋진 작전 이였는데 실행이 안되어서 칠천량서 고전합니다.

 

 

왜군들은 3열 종대로 편성되어 철포 (소총)로 1진은 앉고 2진 수그리고 3진은 서서 총탄을 발사하므로 조선군은 왜군 1천명이 공격하면 1만명이라도 상대가 안되었고 도주하기 바쁜 전쟁이였다. 조선은 군병들에게 왜군이 새를 잡는데 쓰는 조총을 들고 다니니 겁낼 것 없다고 징집해서 전장에 내보내다 보니 전장에서 도주가 속출하여 군을 도주한 병사들은 군법이 효수이니 비적이 되거나 산적 또는 의병이 되었습니다.

 

 

 

조선군 장수들은 전쟁준비 없이 전장에 임하려니 군기가 엄청세죠 걸핏하면 백성이나 군졸을 효수합니다. 왜군은 새총을 들고 다니니 겁내지 마라고 해서 전장에 나가보니 마구 죽습니다. 겁나서 도망치면 사정없이 군법을 걸어 죽였지요 왜군은 보면 장수나 병졸이나 도망다니면서 자국 백성이나 힘없는 병졸을 그냥 베어버립니다.

 

 

 

선조가  수군으로 부산 왜군을 치라는 것은 다른 대안이 없는 불가피한 것임에도 이순신은 5년 내내 한산도에 은거하고 왜군을 피하게 되어 조선 국토 백성이 유린되었습니다. 육지든 수군이든 장수들이 왜군을 겁내고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원균의 군대가 왜군을 치겠다고 출정해서 배설이 선봉장으로 웅천에서 치열한 전투를 수차 벌여 피아 간에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죠. 왜군은 육지를 점령해야 하는데 바다에서 해전에 상당히 놀라고 당황했죠 배설이란 명장 앞에 최초로 전쟁이 일방우세가 아닌 전투가 이루어지자 왜군들은 기록하고 그림을 남긴 것입니다.

 

 

 

임진왜란 중에 최초로 조선군이 왜군을 치겠다고 규모의 출병이였죠 이때  배설은 7월 16일 칠천량 패전에서 유일하게 적선을 8척을 격침하고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으며 '불멸의 이순신' 명량' 영화의 전투장면은 일본종군화가의 그림을 참조 했다는데요 이 그림이 최근 배설 '경상우도수군'전투장면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림 속에 경상우도수군 깃발이 최근 확인되어 이순신이 아니라 '배설장군'의 전투장면이구요 

 웅천전투에 도도 가토 야키자키 세장수를 상대로 싸워 전함 20척을 읽은 것만 기록 되어 있는데 이 때 전투 장면으로 추정됩니다. 왜군들의 피해가 너무 크다보니 종군화가들이 그림을 그리지요 10만 왜군 진영에 돌진해서 배 20척 손상되었지만 겁내서 전투를 회피한 장수들 하곤 다르구요, 적선들은 더많이 부셔지고 죽었구요 적장들은 경상우도수군들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그림을 보심 조선수군들이 당당하게 그려집니다. 이때 이미 배설장군은 왜군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칠천량 패전후 동료장군들이 모두 죽은 상태에서 전함12척과 약2.000명의 병력으로 한산도 수군본영과 남해안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노량으로 퇴각해서 방어에 주력합니다. 이때 동인들은 배설의 보고를 은폐하고 선조를 속입니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어릴적)친구로서 수군이 전멸했으니 임명장을 달라고 하고 선조는 9월에나 하는 수 없어 그래합니다.

 

2장  역사의 진실을 위해 여러 자료를 발췌햇습니다.

조선군은 무방비 상태였고, 일본군 철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본군의 기습에 경상좌수영(경상도 동부 해군사령부)과 부산성, 동래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경남일대를 점령한 고니시군(軍)과 가토군(軍)은 조령(鳥嶺)을 넘어, 또 구로다군(軍)는 추풍령을 넘어 상륙 20일만에 한양성을 함락시켰고, 선조임금은 미리 평양으로 피난했다.

한양 점령후 고니시군은 계속 평안도로 진격하여 상륙 60일만에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는 함경도, 고니시는 황해도로 진격하여 전 국토가 일본에 점령당하게 되었다. 임금은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피난하며 명(明)나라에 구원을 청해야 했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강원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갔다가 가토 기요마사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한편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장군은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곧 전선 24척을 출동하여 5월 7일 옥포(玉浦)에서 적선 30여척을 격파했다. 이후 사천(泗川),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 한산도(閑山島)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일본군 후속부대의 유입을 차단했다. 이러한 전공으로 이순신장군은 1593년 8월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승격되었다.

 

 

한편 내륙에서는 명군(明軍)의 개입으로 일본군의 기세가 꺾이자 명일 양국간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일본의 고니시는 명과 화평하자는 의견이었고, 가토는 조선 영토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고니시는 서둘러 명(明)측과 합의하여 양측이 모두 조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고니시와 가토는 본국 큐슈에서 히고국(肥後國, 현 구마모도)을 반반씩 차지하고 있는 관계였는데 이번 전쟁으로 그 반목의 골이 깊어졌다.

 

그 후 약 3년간 전쟁은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1596년 9월 명일 양국간의 최종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다음해 1월 가토군(軍)을 선두로 전면 재침략해 들어왔다. (정유재란) 그 무렵 이순신은 서인(西人)과 원균의 모함으로 선조임금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관직을 박탈당했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패전을 계속하다가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전사했다.

 

 

<임진왜란 전>

- 영의정 유성룡과 어린시절 친했음

- 여진과 접전중이던 함경도에서.. 상사 이일과 사이가 좋지 못해, 파면 당하고 백의종군함

- 그의 재능을 높게 산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발탁하여 전라도 각지에서 군관을 역임

- 임진왜란 전해인 1591년.. 친구 유성룡(당시 우의정)의 추천으로 전라도 수군 절도사에 대발탁됨!

- 공적 없는 이순신의 발탁은, 당시 여진과의 전투에서 공적이 있던 원균 등에 심한 반감을 사게 됨

 

<임진왜란>

- 1952년 4월 임진왜란 발생 이후, 경상도의 수군은 파괴 하였으나, 이순신은 잔존하는 수군을 모아

수차례, 일본선을 격파했다 (옥포해전 등)

- 7월에 들어, 카토, 와키사카 등이 수군을 모아, 이순신에 대항하고 하고자 했음

이순신은 한산도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단독 행동중인 와키사카를 꼬여 격파함

그 후 와키사카를 지원하기 위해 안골포에 정박해 있던 카토의 수군을 격파

- 수송선이었던 일본 수군의 배에 이 때부터 대포를 부설해으며, 해안선에서도 대포를 설치하여 협공함

-> 이후, 이순신의 부산포 공격, 웅천공격 등은 피해만 발생하고, 출전 횟수가 격하게 줄어듬

 

<휴전기>

- 1593년, 그간의 공적으로 이순신은 조선남부 수군의 지휘관으로 출세함

- 이에 갑자기 부하가 된 원균은 부임지를 바꿔달라고 조정에 청원 했으며,

이순신과 서로 폭언을 하는 등 불화가 심각해 짐. 이순신은 일기에서

' 천지간 원균처럼 흉악하고 상식에 벗어난 사람은 없다'고 썻다

- 1954년, 휴전 교섭기에 이순신은 거제도를 격파 했으나, 일본은 해전에 응하지 않고

포대를 설치 하였다.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명나라는 평화 교섭에 방해 된다고 교전을 금지했다.

- 같은 해 9월, 10월에 다시 거제도를 공격해왔으나, 일본은 공격에 응하지 않고 침작하게 대응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대립이 일어나, 이순신이 해전에서 공을 세우려 서두르고 있다며,

비판하고 이원익을 보내 감사를 받게 했음. 이순신은 유임 되었으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짐

 

<정유재란>

- 그 후 전투는 잠잠해졌고, 97년 정유재란시 카토가 도착하는걸 코니시측이 조선에 알려줌

이에, 조정에서는 카토를 공격하라고 이순신에게 명령함

- 이순신은 일본의 수작으로 보고, 단독 판단으로 공격을 하지 않음

- 이것을 항명이라 하여, 이순신은 고문을 받고 일단 사형을 선고 받음. 이후 백의 종군의 기회를 얻음

 

- 이순신의 후임인 원균은 수군 단독의 공격을 꺼려했으나 실행했고, 염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원균을 비롯한 장수가 대다수 죽고 조선 수군은 거의 괴멸 하였다

- 이순신이 재임되었을시 배는 판옥선 12척 뿐이었음

일본군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점령해가던 중, 잔존 수군을 수습하여 퇴각하던 이순신은

물살이 빠른 명량해협으로 일본 수군을 유도, 해협에 돌입한 일부 일본 수군이 격파 됨

그러나, 이순신은 후속 병력에 압도되어 명량해협을 포기하고 그 날 밤 퇴각함.

- 일본군은 계속 밀고 나갔고, 정박지를 잃은 이순신은 전라도 북단까지 후퇴함

- 일본군은 원래계획을 모두 달성하고, 조선 남부 지방에 위성군을 설치하고 전선을 뒤로 밀게 됨

- 이 때,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과 함께 밀고 내려와 고금도에 거점을 마련함

- 58년 7월, 명수군이 오자 이순신은 그 배하에 족속하게 됨

- 9월에 명군과 함께 순천을 공격했으나, 10월까지 막대한 손해만 입고, 이순신은 해상 봉쇄를 풀고

고금도로 후퇴함

- 토요토미 사망후, 코니시는 명과 강화를 맺고 퇴각하려 했으나, 이를 안 명/조선 수군은 봉쇄를 풀지 않고

코니시가 퇴각하는 걸 막았다.

- 이에, 명나라에 항의하여 명수군은 빠졌으나, 이순신은 거절함

- 이에 일본은 시마쯔 등 장수들이 급거 수군을 편성하여 구원하게 됨

- 이순신은 이것을 알고, 명/조선 수군은 순천 봉쇄를 풀고, 시마쯔 수군을 노량 해협에서 맞게 됨

- 노량 해전은 길어졌고, 명/조선군과 일본군 쌍방의 피해가 커짐.

- 이순신은 일본의 총을 맞고 숨졌으며, 코니시는 당초의 계획대로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 이순신의 최후 >

- 한국에서는 대패한 일본군을 추격 중에... 유탄을 맞고... 라고 되어 있으나 역사적 근거는 없음

- 추격이라는 것은 유성룡의 징비록에나와 있을뿐임

- 다른 한국 자료 난중잡록에는 해전이 시작되고 일본 수군은 관음포로 일시 후퇴하고 있었고

이때 일본배 후미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일제 사격을 하여 이순신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 명나라 기록에는 명의 등자룡을 구하려다 죽었다. 일본 자료 정한록에는 작은배로 출정한

등자룡을 구원하려 했으나, 일본군에 둘러 싸여 죽게 되었다 등이 남아 있음

- 한국에서는 영웅화를 너무 한 나머지 스스로 죽었다라는 설, 전쟁에서 살아남아 전쟁후 죽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근거 자료는 없음

 

<평가>

- 원래, 명, 조선, 일본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인물은 아니었음

- 명치유신후 정한론이 대두 되는 시점에 일본, 한국 문학자 연구자에 의해 재평가 됨(1895년)

-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영웅화 시작함. 임시정부의 일부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평가를 계승함

 

<속설과 오해>

- 일본군의 보급 부족을 이순신이 보급로 차단이라는 해석이 많았지만, 큐슈~부산까지의

보급로가 막힌 것도 아니고, 전 기간동안 물자, 인력의 공급은 안정적이었음

- 일본군의 식량 부족은 예상보다  53년 주력군 남하와 일본 본토에서의 보급 개시로 해결함

- 토고 헤이하찌로가 이순신을 존경한다는 발언이 있으나, 공공의 자리에서 그런말 한 적 없음

그의 한국인 지인인 이영개의 발언을 제3자가 듣고 전개한 것으로 역사적 근거 없음

 

 

 

 

 

이순신의 등장과 정한론,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일본사관학교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들은 왕정복고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대륙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7년 3월초 규슈[九州] 출신의 일본인 야도[八戶順叔]가 홍콩에 체류하면서 광둥[廣東]에서 발간되는 〈중외신문 中外新聞〉에 "조선 국왕이 5년에 1번씩 에도[江戶]에 가서 대군(大君)을 알현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 고례(古例)이나 조선 국왕이 이런 예를 폐한 지 오래되므로 일본이 군함 80척을 구입하고 발병(發兵)하여 조선국을 정토할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정한설을 주장하는 기사를 내자, 중국은 조선에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한편 조선에서는 대원군이 1863년 정권을 장악한 후 종래의 교린외교정책(交隣外交政策)을 지양하고 일본도 양이(洋夷)와 일맥상통한다며 척사척양(斥邪斥洋)과 같은 쇄국정책을 전개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뒤 척양정책을 더욱 추진하면서 청에 대해서는 종래와 같이 사대의 예를 지켜 유대를 강화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더욱 배척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해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소[宗義達]를 통해서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 히구치[樋口鐵四郞]를 파견해 서계(書契)와 유신 정부의 국서(國書)를 부산의 조선 관원에게 전했다. 그러나 조선측은 야도의 침공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병인양요 이후 국사가 다망(多忙)하고 질병이 유행이라는 이유로 입국을 거절했다. 더욱이 일본의 서계에 '아방황제'(我邦皇帝)라는 문구와, 새 도장으로 찍은 것에 대해서 시정을 요구했다.

 

1869년초 일본 기도[木戶孝允]는 대신 산조[三條實美]와 이와쿠라[岩倉具視]에게 "조선을 정벌하면 일본의 국위가 세계에 떨쳐지고, 국내의 인심을 국외로 향하게 할 수 있다"며 정한론을 주장했다. 또한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외교 실패의 책임을 전가시키며, 조선외교교섭권한을 회수하기 위해 외교의 실황을 조사하러 왜관에 파견한 사다 하쿠보[佐田白茅]는 귀국보고에서 정한론의 구체적 건백서(建白書)를 정부에 제출하면서, "조선은 불구대천의 적으로 반드시 정벌해야 하며 정벌하지 않으면 황위(皇威)가 서지 않는다. 30개 대대의 병력만 동원하면 4로(路)로 나누어 공격해 50일 내에 정복이 가능하다.

 

지금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침공을 계획하고 러시아가 호시탐탐하는데 일본이 우유부단하면 기회를 잃을 것이다. 재정면에서도 군사비는 50일 이내 회수가 가능하며, 조선은 쌀·보리 등 곡물이 풍부하고 조선인을 홋카이도[北海道] 개척사업에 전용(轉用)하면 일거양득이다"라며 즉시 출병을 주장했다. 출병안이 나오자 병부대보(兵部大輔) 기무라[木村永敏] 등의 동조를 얻은 기도는 "군대·함선·군자(軍資)·기계(器械)를 미리 준비하여 완급(緩急)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했고, 7월 외무대승(外務大丞) 야나기하라[柳原前光]는 "북은 만주에 연하고, 서는 청과 접해 있는 조선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면 황국보전(皇國保全)의 기초로서 장차 만국경략진취(萬國經略進取)의 기본이 된다. 만약 다른 나라에 선수를 빼앗기면 국사(國事)는 이에 끝난다"며 조선 강점을 주장했다.

 

현직 외무대승(外務大丞)인 마루야마[丸山作樂]는 사다의 출병론에 공명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1870년 12월 "조선국은 황국을 위한 중지(重地)로서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나라가 정복할 것이다. 지금 때를 잃지 않고 속히 군대를 출동시켜 침공하면 반드시 공을 이룰 것이고, 조선이 문명개화한 뒤에는 도저히 정벌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스스로 총지휘관이 되어 결사대를 모집하고 12월 중에 단독으로 조선에 침입하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무렵은 일본 국내가 불안한 때라 참의(參議) 오쿠보[大久保利通] 등은 국내 문제를 선결로 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조선출병을 예상한 준비를 진행했다. 특히 조선 침략에 대한 청의 간섭을 막기 위해 1870년 8월 파견한 야나기하라가 청 직례총독(直隷總督) 이홍장(李鴻章)과 회담하고 다음해 4월 대장경(大藏卿) 다테[伊達宗城]가 전권대사로서 청국대표 이홍장과 청일수호조규상정해관세칙(淸日修好條規商程海關稅則)을 조인했다.

 

1870년 일본 외무성에서는 정식으로 외무소승(外務小丞)인 요시오카[吉岡弘毅]를 사절로 부산에 파견했으나 부산 왜학 훈도(訓導) 안동준(安東晙)은 "우리나라와의 모든 교섭은 소를 통해 정식 경로를 통하여 올 것"을 요구하며 거절했다. 국교정상화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곤란해진 쓰시마 도주는 해결책을 강구하여, 1870년 5월 상순부터 구례의 방식을 취하는 타협안을 내놓아 어느 정도 타결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주일독일대리공사 브란트가 외교교섭을 위해 군함을 거느리고 부산에 입항했다가 거절되자 공포로 위협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배에 역관 등 일본인이 동승한 사실이 밝혀져 조선에서는 반일감정이 격화되었다.

 

 1871년 7월 일본은 400여 년 간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하던 쓰시마 도주에게 세급직권을 박탈하고 대신 외무대승으로 임명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관장하게 했다. 일본에서는 이 사실을 조선측에 알리기 위하여 외무권소승 요시오카, 외무대록(外務大錄) 모리야마[森山茂] 등이 11월 3일 부산 왜관(倭館)에 와서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872년 1월 모리야마, 히로쓰[廣津弘信], 외무성십등출사(外務省十等出仕) 사가라[相良正樹] 등이 왜관에 도착하여 서계를 전달할 것을 청했으나,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해 5월 20일 사가라는 왜관의 왜인은 규정된 지역을 벗어날 수 없고 절차를 밟지 않고는 부사를 만날 수 없다는 규정을 벗어나 왜관 주재 관리들을 이끌고 동래부로 몰려가 부사를 면접하려 했다. 이때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은 이들을 책망하고 왜관으로 돌아가게 하자, 그들은 왜관에 머물던 자들을 모두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당시 일본 조야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호전적인 봉건군벌과 신흥 자본주의 세력을 앞장 세우고 대륙진출의 침략정책을 주장하는 무리가 유력하게 대두되었으며, 이들은 조선이 새로운 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외교 교섭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정한론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굳히고 있었다.

 

 

 정한론이 일본 조야에 파다할 즈음 메이지 유신을 적극 지지해온 사쓰마 군벌[薩摩軍閥]의 거두로 메이지 정부의 참의(參議)인 사이고[西鄕隆盛] 및 이타가키[板垣退助],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副島種臣] 등이 정한론에 가담했다. 일본 정부가 정한론에 따라 강경한 담판을 위해 1872년 9월 외무대승 하나부사[花房義質]를 파견했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갔다. 이때 부산 일대에서 미쓰이[三井] 계통의 상인들에 의한 밀무역 및 암거래가 성행하자 동래부 관헌들은 이들을 단속했는데, 부산 주재 일본 관헌 히로쓰가 이 사실을 일본정부에 상세히 보고함에 따라 일본 조야에서는 정한론이 더욱 고조되어 즉각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1873년 소에지마 등을 청에 파견하여 외교교섭을 한 결과, 청은 조선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낸 뒤 정한론은 절정에 올랐다.

 

당시 우대신 이와쿠라 일행이 유럽 시찰중인 관계로 사이고·이다가키 등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병력의 동원을 주장하여 즉시 출병을 주장했다. 특히 사이고는 우선 자기가 대사(大使)로서 교섭을 시도하고 교섭에 실패하면 출병할 것을 주장함에 따라, 8월에 파견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구미제국의 발달된 자본주의와 근대국가를 보고 귀국한 이와쿠라, 오쿠보[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은 일본국력은 아직 미약하므로 내치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정한론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이 두 파의 논쟁은 10월 24일 시기상조파의 승리로 끝나 칙령으로 조선출병은 무기연기되고,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론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정한론이 일단락된 가운데 조선에서는 1873년 11월 5일 척왜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하면서 쇄국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본은 1874년 조선침략 대신 손쉬운 타이완을 침략했고, 이어 이듬해 조선에 대해 운요호 사건 을 일으킴으로써 정한론을 재등장시켜 무력위협으로 조선을 개항하게 할 것을 결정하고 결국 조선의 개항을 관철했다(→ 색인 : 운요호사건). 정한론은 일본의 대륙팽창정책일 뿐 아니라 일본 국내 사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들은 구미열강을 본떠 조선을 침공하여 열강에 국력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을 구미열강과 맺고 있는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으며, 메이지 유신 후에 배출된 불평사족을 외지전장으로 보내어 불만을 무마하고, 조선침략으로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는 동시에 조선의 자원을 일본으로 반출하고자 했다. 당시 정한론자와 비정한론자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시기에 따라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침략팽창주의자들이었다. 뒤에 정한론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서남전쟁(西南戰爭)의 원인이 되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24일(계묘) 충청도 도적인 송유진·김천수 등을 친국한 공초의 내용

 

상이 행궁(行宮)의 편전으로 나아가 죄인을 친국하였다. 제신(諸臣)이 좌정(坐定)하자 대포를 쏘도록 명하고 대신에게 이르기를,

“미리 두사(頭辭)를 만들어 죄인이 뜰로 들어오면 즉시 추국하도록 하라.” 니, 영의정 유성룡이 드디어 두사를 만들어 먼저 죄인 송유진(宋儒眞)을 추국하였다. 송유진은 30세였다. 그의 공초(供招)에, 천일(天日)2323) 이 조림(照臨)하시니 소신이 어찌 감히 반역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겠습니까. 동모자(同謀者)는 많습니다만 적도들이 모여 있는 곳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도(右道)의 적괴(賊魁)는 바로 이산겸(李山謙)인데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난해 3월에 천안(天安)으로 유리되었다가 옛친구 홍근(洪瑾)을 만나 그에게 의지하여 있으면서 소동(小童)들을 모아 학장(學長)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10월 4일 밤, 어떤 사람 셋이서 궁전(弓箭)을 매고 폐양자(蔽陽子)를 쓰고 들어와서는, 전일의 이 진사(李進士)로 지금은 호조 정랑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를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소신을 천안의 가을원(加乙院)으로 끌고 가서는 ‘너는 우리들에 대한 소식을 못 들었는가? 내가 속리산(俗離山)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편지 한 장을 주며 ‘너를 무리를 소모(召募)하는 담당으로 정하는 차첩(差帖)이다.’ 하였습니다. 그뒤 임실(任實)로 도망하여 갔다가 11월에 직산(稷山)으로 돌아와서 다시 홍근을 만났더니, 근이 ‘네가 역모에 참여되었으니 무단히 도망가면 우리 가문은 멸족이 된다.’ 하였습니다.

 

홍근의 아비 응해(應海)는 한 고장의 수 품관(首品官)이었는데 다방면으로 권유하니 홍근이 드디어 스스로 인신(印信)을 만들었고 직산 한 고을의 장정들을 거의 다 수괄(收括)하여 장부에 기록하였습니다. 홍우(洪瑀)는 바로 감사(監司)의 군관(軍官)인데, 홍난생(洪蘭生)과 함께 감사의 명령이라 하고서 남의 말이나 군량·군기(軍器)를 빼앗기도 했습니다. 임기(任琦)는 의병장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저장되어 있는 군기가 많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갔더니 임기는 없고 그의 아들 희지(羲之)가 나와서 만났습니다.

 

소신이 군사를 일으킨 내용을 진술하니, 희지가 울면서 ‘너 또한 유생(儒生)인데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 하였습니다. 소신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으므로 감동되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거기서 장편전(長片箭) 3부(部)를 얻어 개현사(開現寺)로 물러갔더니 거기에는 의병장인 승려 일현(一玄)이 있었습니다.

홍우의 아비 응호(應浩), 난생의 아비 응연(應淵)과 담화하던 중 홍근과 응연이 우연히 전에 박 정자(朴正字)라고 부르던 사람을 오 참봉(吳參奉)이라고 하므로 내가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모름지기 갑오일(甲午日)에 청계산(靑溪山)으로 오라. 너는 역관(譯官)의 아들이니 성중(城中)으로 들여보내어 내응(內應)을 도모하게 하려고 그런다.’ 하였는데 갑오일은 바로 정월 15일입니다.

 

신이 바야흐로 관에 고발하려 하였는데 그 이튿날 나를 자기 집으로 부르더니 방중(房中)에 결박시켜 놓고 또 10인을 유인하여 모두 결박하여 잡아다가 직산 관아에 바쳤습니다. 옥에 갇혀 있을 적에 천석(天錫)이란 자가 있었는데 바로 홍우의 얼형(孽兄)이었습니다. 소신에게 내통하기를, ‘역모가 이미 누설되었으니 당연히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 2∼3백 명의 군사를 보내어 옥을 포위하면 네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탈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만, 마침 감사와 병사가 엄히 가두고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의가 중지되었습니다.

 

정월 5일 아산(牙山) 여라항(汝羅項) 근처에서 말탄 사람 3명이 나를 불러서 ‘우리가 충청도를 총령(總領)하고 있다. 이 일을 맡긴 16인 중에 네가 가장 잔열(殘劣)하다.’ 하고는 광교산(光敎山)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하인(下人)에게 물어보니 노일개(盧一凱)라고 하였습니다. 소신이 ‘직산과 천안에서는 군사를 모을 수가 없다.’고 하였더니, 일개가 ‘우리 아버지가 천안 군수(天安郡守)였기 때문에 천안에 인재가 없다는 것은 내가 일찍부터 알고 있는 바이다.’라고 하고, 격문(檄文)은 이산겸(李山謙)의 글이라고 하였으며, 11월의 체문(帖文)은 바로 홍근이 군사를 일으킬 적에 쓰던 것이고, 기타 이름 없는 통유문(通諭文)에 쓰인 인신(印信)은 속리산의 적괴가 쓰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윤 11월의 체문은 바로 김천수(金天壽)가 지은 것인데 보령(保寧) 이씨(李氏)라고 압서(押署)하였으며, 이미 민망(民望)이 정해졌다는 말은 호조 정랑이라고 일컬은 자가 한 말입니다. 호조 정랑은 성명이 이서(李序)라고 합니다만 그 명자(名字)는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홍근이 시종 적과 동모하였다가 지금 고변(告變)하였으니 어찌 모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홍근에게 물어보면 적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심희수(沈喜壽)가 아뢰기를, 죄인들을 모두 평문(平問)2324) 만 하고 형추(刑推)는 하지 않아도 사실이 드러날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김천수를 국문하였는데, 김천수는 31세였다. 그 공초에, 본래 진천(鎭川)에 살았는데 천안에 유리되어 홍근(洪瑾)의 집에서 걸식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나에게 ‘왜적이 내년 봄에는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므로 내가 의병을 모으려고 하는데 너도 응모하라.’고 하였으나, 내가 ‘나는 본디 무재(武才)도 없고 또 5대 독자라서 응모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홍우(洪瑀)가 또 ‘감사가 군관들로 하여금 각각 10인씩을 모집하게 하였으니 너도 들어가라.’고 하므로 ‘내가 응모한다고 해도 군량만 허비할 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고 대답하니, 나를 위협하여 직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송유진(宋儒眞)이란 자가 창의병(唱義兵)이라 자칭하면서 서기(書記)를 맡고 있었는데 홍우 등과 모였습니다. 나를 위협하기를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 네 몸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서 나를 잡아 두었습니다. 홍근 등이 마을에서 전마(戰馬)와 군량을 약탈하였는데, 나는 단지 두 군데만 따라갔을 뿐입니다. 홍근이 드디어 상의하여 인신(印信)을 위조하기에 내가 ‘명색이 의병이면 스스로 조용히 조처해야지 이렇게 한다면 후환(後患)을 어떻게 할 것인가?’고 늘 나무랐습니다. 정월 7일, 개현사에서 모였는데 홍근 등이 1백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내가 이경천(李擎天)에게 ‘이 일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때 박 정자(朴正字) 또한 5∼6인을 데리고 와서 미륵사(彌勒寺)에 머물러 있었는데, 홍우의 이웃 사람인 신계축(申癸丑)이 불의에 그를 결박하였습니다.

 

군 도목(軍都目)은 내가 썼습니다만 체문(帖文)은 내가 압서(押署)한 것이 아닙니다. 송유진이, 가을원(加乙院)에서 지나가는 사람이 주면서 속리산에서 왔다고 하더라고만 말하였습니다. 저들은 평상시 서로 부를 때에 백동(白同)은 황동(黃銅)이라 부르고 대동(大同)은 소동(小同)이라고 불렀으나 도목책(都目冊)에는 그 이름을 바로 썼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괴는 내가 친국하겠으나 그 나머지를 어찌 다 친국할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적장이라고 하는 자를 먼저 들여보내어 추국하게 하라.”

하니,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홍진(洪進)이 아뢰기를,

“오원종(吳元宗)과 유춘복(柳春福)을 먼저 추국해야 합니다."하였다.

 

유춘복을 궐정(闕庭)에 끌어들여 국문하려 하였으나 굶주리고 병이 들어 말을 하지 못하므로 상이 미음죽을 주라고 하였다. 공초(供招)하기를,

“지난해 경상도 방어사가 있는 곳으로 부방(赴防)하였다가 도망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뒤 또 취재 군사(取才軍士)로 은진(恩津)에서 결진(結陣)하기 위해 12월 15일 천안군에서 점열(點閱)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있을 즈음, 한밤중에 박 정자라고 하는 자가 자칭 모속관(募粟官)이라고 하면서 나를 불러내어 이웃에 사는 부자(富者) 정세문(鄭世文)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군량을 빼앗고 나와 정세문의 사위를 아울러 잡아 갔습니다.

 

 그가 송유진·홍난생·홍우·홍근·김응룡(金應龍) 및 이름을 모르는 조(趙)씨 성을 가진 사람과 매양 은밀히 이야기하고 문자를 썼다가는 찢어버리곤 하였기 때문에 적중(賊中)의 제반 일을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인신은 홍근이 위조하였고 적장은 송유진과 홍우였는데 홍근이 창도하였습니다. 송유진이 진짜 괴수이고 유진의 위에 또 오 참봉(吳參奉)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돌격장(突擊將)이 되었는데, 이는 내가 일찍이 의병장 임기(任琦)의 군사가 되어 군공(軍功)으로 판관(判官)이 되었고 황진(黃進)과 성영(成泳)의 진중(陣中)에서도 누차 수급(首級)을 바쳐 용력(勇力)으로 소문이 났었기 때문에 이것이 빌미가 된 것입니다.

 

아산과 직산의 지경에 천우(天雨)·풍산(風山)·풍석(風石)·만억(萬億)·천석(天石) 등 적중(賊中)에 들어가 나와 함께 행동을 같이한 자들이 있습니다. 수원(水原)의 괴수로서 아산과 직산 사이에 사는 자가 있는데 어떤 이는 이충남(李忠男)이라 하기도 하고 충갑(忠甲)이라고 하기도 하고 충세(忠世)라고 하기도 하는데 양반인 것 같았습니다. 홍우가 충남을 군관처럼 대우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유진이 무리를 거느리고 대장이 되었으니 적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호서(湖西) 사이에 소요가 반드시 심할 것이니 속히 진정시켜야 한다. 이산겸(李山謙)이 괴수라는 것이 적의 입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하면 속히 체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그들 가운데 구처(區處)해야 할 자들은 속히 구별(區別), 소방(疏放)하여 힘써 진정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오원종(吳元宗)이 궐정에 들어와 국문하려 할 적에 상이 이르기를,

“저가 만일 의사(醫師)라면 서울에 어찌 아는 사람이 없겠는가.”

하니, 박동량(朴東亮)이 아뢰기를,

“조원(趙瑗)이 창질(瘡疾)이 있을 적에 이 자에게 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지금 보니 바로 그 자입니다.”

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신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초사의 대개는, 보인(保人) 오원종은 나이 41세로 용인(龍仁)에서 생장하였고 서울에 와서 침업(針業)으로 생활하였습니다. 홍근은 서학(西學)2325) 의 거재 유생(居齋儒生)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다가 포도 대장 이일(李鎰)에게 잡혔었는데 내가 즉시 도모하여 석방되었습니다. 내가 지난해 평안도에 들어갔다가 전 승지 조원이 상경할 때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看病)하였고, 시골로 내려간 뒤에는 홍근의 집으로 가서 유숙(留宿)하였습니다. 그때 상인(喪人) 김천수와 송유진이 나에게 ‘이곳 사람들이 의병을 모으고 군량과 기계(器械)를 모으고자 하니 네가 한림(翰林)의 행차(行次)라고 칭하고서 곡물(穀物)을 수록(收錄)하라.’ 하기에, 내가 ‘한림이라 칭할 수 없다.’ 하자, 유진이 ‘그러면 정자(正字)라고 칭하라.’ 하기에, 내가 ‘나는 모르겠으니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였습니다.

 

12월 15일 아산에 있었는데 홍근이 부르기에 다음날 직산의 양전(良田)에 있는 홍근의 집으로 갔더니 근의 아비 응해(應海)가 ‘내가 침을 맞으려 하는데 이웃집에 역질(疫疾)이 있다.’ 하여 드디어 함께 재궁(齋宮)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우립(羽笠)에 말을 탄 자 3인이 있었고 또 말만 타고 있는 자가 30인이 있었으며 잡물(雜物)을 짊어진 자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홍근 등이 이경(二更)에야 비로소 왔는데 내가 놀라 가려고 하니, 근이 손으로 내 목을 잡고 귓속말로 ‘내가 한 말을 네가 전에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 너를 부른 것은 그 일 때문이요 침을 맞기 위한 것이 아니다. 너는 이 기미를 모르겠는가?

 

 사람들이 우리를 적(賊)이라고 한다.’ 하기에, 내가 ‘그렇다면 사람을 죽이는 적인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아니다. 바로 사람을 살리는 적이다.’ 하였습니다. 상세한 내막을 듣고 싶다고 하였더니 ‘국가에서 소인들을 등용하기 때문에 민생이 편안히 살 수가 없다. 어진 수령은 매양 파출당하고 무용지인이 계속 차임되고 있으므로 이제 상언(上言)하고 인하여 궐하(闕下)에 모여 통곡하려는 것이다.’ 하고, 또 ‘너는 수백명의 사람을 모아 나에게 볼모로 맡긴 다음에야 돌아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내가 ‘누가 상경(上京)할 것인가?’ 하니, 유진(儒眞)이 ‘내가 상경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내가 ‘언제 가는가?’ 하니 ‘8일에 군사 2백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와서 9일에 상경한다.’ 하였습니다.

 

내가 아산(牙山)의 조원(趙瑗)에게 가서 즉시 직산(稷山)에 적 1백 70인이 경성을 범하려 한다고 하니, 조원이 매우 놀라 현관(縣官)에게 통지하려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군량(軍糧)·군기(軍器)를 준다고 하면 이 적을 유인할 수 있다.’ 하니, 조원이 ‘그것은 쉽다. 네가 그들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나는 즉시 형 및 알고 지내는 사람 5∼6인을 데리고 양전(良田)으로 갔더니, 홍응해(洪應海)가 ‘내일로 기약했는데 어찌하여 오늘 앞질러 왔는가?’ 하기에, 내가 ‘도적에 대한 소문이 이미 전파되었다.’ 하였습니다. 응해가 ‘홍근 등이 지금 아산의 개현사(開現寺)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홍근 등이 나를 개현사로 오라고 부르므로 올라가 보니 군졸이 전의 배가 되었습니다. 홍근과 유진이 나에게 ‘군사를 모으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기에, 내가 ‘외간에 소문이 파다하여 군사를 모을 수가 없으니, 직접 공세관(貢稅串)으로 가서 모집한다면 군사를 얻을 수 있겠다.’ 하자, 유진이 ‘네가 하는 일은 아이들 장난과 같다. 돌격장이 안다면 너의 목을 벨 것이다.’ 하였는데, 돌격장은 바로 유춘복(柳春福)입니다.

 

동행하였던 한 사람이 유인하러 왔다는 말을 누설하였기 때문에 그 다음날 새벽에 나를 잡으려 하였습니다. 8일 오경(五更)에 짙은 안개가 사방에 잔뜩 끼었으므로 내가 드디어 공세관으로 도망하여 가서 유인해 내지 못하게 된 이유를 말하였더니, 조원이 ‘신창 현감(新昌縣監)이 차사원(差使員)2326) 으로 공세창(貢稅倉)에 와 있으니 네가 가서 이 서간(書簡)을 전하라.’ 하였습니다. 내가 즉시 가서 현감을 만났더니 즉시 나를 불러 물어보고는 바로 첩정(牒呈)을 지어 병사(兵使)에게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9일 해미(海美)로 가서 바치니 병사가 나를 불러 물어보고는 즉시 서목(書目)을 만들어 회답하였습니다. 12일에 신창에 이르러 그 서목을 바치고 공세관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적들에게 잡혔습니다. 이 적들은 청계산(淸溪山)에서 왔다고도 하고 가야산(伽倻山)에서 왔다고도 했는데, 적괴는 바로 홍응해·홍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조원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조원이 바야흐로 궐하(闕下)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적이 이른바 청계산이다, 가야산이다 한 것은 허장 성세로 사람들을 공동시키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이산겸(李山謙)이 괴수라고 하지만 송유진이 진짜 괴수이다.”하였다. 이산겸을 잡아 가두었다는 서장(書狀)을 입계하고, 이조 판서 김응남(金應南)과 승지 장운익(張雲翼) 등이 아뢰기를,“이른바 적괴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 잡혔으니 국가의 다행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산겸이 일찍이 의병장이었으므로 용렬한 사람이 아닐 듯하여 뜻밖의 환란이 있을까 두려웠는데, 이제 체포하였으니 진실로 다행이다.”하였다.

 

 장운익이 아뢰기를,“이수지(李綏智)도 잡혔다니 다행한 일인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고 또 적의 입에서 거론되지도 않았습니다.”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이수지는 매우 잔열(殘劣)한 사람이라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역적 가운데 드러난 자는 이미 모두 친국하였다. 그 나머지는 내가 다 국문하기가 어려우니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오랫동안 전좌(殿坐)하시어 주야로 친국하시는 것은 미안한 일이니 나머지는 밖에서 추국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당(賊黨) 가운데 이름을 바꾼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적과 이름이 같은 자도 있을 것이니 체포할 때 소요가 일까 염려된다.”하니, 판중추부사 최흥원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하였다.

 

 상이 홍우·홍근 등을 궐정으로 불러 들여 하문하기를,“너희들이 이미 역도(逆徒)들을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당초 적중(賊中)에 들어갔던 것은 추론(追論)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적괴와 적정(賊情)을 솔직하게 말하라. 시종(始終)의 곡절을 듣고 싶다. 유진 위에 또 괴수가 있는가? 두 개의 인신(印信)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는 찾아내었으나 다른 하나는 없는데 어느 곳에 두었는가?”하니, 홍우가 아뢰기를,“신이 적중으로 들어가기 전의 일은 모릅니다. 인신 하나는 송유진이 만들었지만 또 하나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중에는 달리 왕래한 사람이 없었고 오직 박 정자(朴正字)라고 칭하는 자가 늘 산에서 왔다고 하면서 빈번히 왕래했습니다. 이른바 서목(書目)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사람들을 위협하여 따르게 하는 것을 일삼고 있었으니 저들 스스로 말을 만들고 스스로 답변하는 것인지를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이산겸에 대해서는 의병(義兵)의 일로 인하여 그 명자(名字)는 들었으나 왕래하면서 서로 내통했느냐의 여부는 실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노일개(盧一凱)도 모르겠습니다. 대개 유진의 흉측한 정상은 그 군사가 10명이면 1백 명이라고 하고 1백 명이면 1천 명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신이 홍우·홍난생·홍응기(洪應沂)와 서로 모의를 하여 체포하였습니다.”하였다.출처:[태백산사고본】

 

 

 

 

선조 : 우리나라는 행장(小西行長)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 장군)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었다.

윤두수 : 이순신은 왜구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로 나가 싸우기에 싫증이 낸 것입니다. 임진년 정운이 죽을 때에도 절영도에서 배를 운행하다가 적의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산해 : 이순신은 정운과 원균이 없었으므로 해서 그렇게 체류한 것입니다.

김응남 : 정운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 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대게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 정언신이 항상 정운의 사람됨을 칭찬했습니다.

 

선조 :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벨라고 한 것이겠는가. 단지 배를 시위하여 해상을 순회하는 것 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제 도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시위할 약속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한참 한숨을 쉬다가) 우리나라는 이제 끝났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산해 : 인심을 책려하고 수군을 정돈하여 장래를 도모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1)

 

1월27일[무오/3월14일] 「실록」에서

선조 : 전라도 등은 전혀 방비하고 있지 않다. 한 사람도 수군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판중추부사 윤두수 :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산도에 물러나 지키고 있어 이번 대계(大計)를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대소 인신(人臣)이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지중추부사 정탁 : 이순신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선조 : 이순신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계미년 이래 사람들이 모두 거짓되다고 하였다. 이번에 비변사가 “제장과 수령들이 호령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비변사가 그들을 옹호해 주기 때문이다. 중국 장수는 못하는 짓이 없이 조정을 속이고 있는데, 이런 습성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두 답습하고 있다. 이순신이 부산 왜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는데, 영상(領相)이 이 자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랬을 리가 없다.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영의정 유성룡 : 이순신은 한 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평일에 대장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선조 : (이순신이란 자는) 글을 잘 아는가?

유성룡 : 성품이 강의(强毅)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正憲)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과람합니다.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집니다.

 

선조 :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우상(右相)이 내려갈 때에 말하기를, “평일에는 원균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되고, 전시에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좌의정 김응남 : 수군으로서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릴 수 없습니다.

유성룡 :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상당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원균은 토담집을 지어 놓고 몸소 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고 합니다.

선조 : (원균을) 수군의 선봉을 삼고자 한다.

김응남 : 지당하십니다.

 

영중추부사 이산해 : 임진년 수전을 할 때, 원균과 이순신이 서서히 장계하기로 약속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밤에 몰래 혼자서 장계를 올려 자기의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균이 원망을 품었습니다.

윤두수 : 이순신을 전라충청통제사로 삼고, 원균을 경상통제사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선조 : 원균이 만약 적의 소굴로 직접 침입하면 누가 당하겠는가?

김응남 : 모름지기 어사를 보내 그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조 : 문신(文臣)으로 특별히 어사를 정해 그간의 사정을 살피게 해야한다.

윤두수와 김응남이 함께 : 이순신은 조용한 사람인 듯한데, 다만 속임수가 많고 전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조 : 원균의 일을 급히 조처하라!

 

병조판서 이덕형 : 원균을 처음 수전에 보낼 때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이에 이르렀습니다. 근래 변방 장수의 일을 보건대, 이운룡은 도적 한 두 명을 보면 나아가서 싸우지 않고 단지 글월[文報]만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평시같았으면 어찌 그의 몸에 벌이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원균을 (전라)좌도로 보내는 것이 무방합니다.

선조 : 좌도로는 보낼 수 없다.

김수 : 서성이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고서 두 사람이 화해하도록 하였는데, 원균이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네에게 다섯 아들(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을 말함)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의 분해하는 불평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덕형 : 군사 일은 반드시 조리가 있어 마치 그물에 벼리가 있는 것과 같이 연후에야 두서(頭緖)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전라도의 일은 매우 문란합니다.2)

윤두수 : 신이 선거이, 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영등포에 진을 치고 적과 싸우도록 했더니, 장문포에 진을 쳐 있는 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치고 있는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원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만 하고 있으면서 후원할만한데도 끝내 와서 구원하지 않았으니, 역시 오는대로 격파해야 합니다. 원수(元帥)가 길에서 왜적 대여석 명을 만났다고 하는데, 적이 만약 원수가 고단(孤單)함을 알았다면 말할 수 없이 되었을 것입니다. 체찰사 역시 간약(簡約)한 사람인데, 행동을 경솔히 해서는 안됩니다. 지난번에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을 이미 헌의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을 임금께서도 이미 통촉하시고 계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하고 있으니 행장이 지휘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정탁 :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선조 :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원균으로 대신해야 하겠다. 명나라 장수 이제독 이하가 모두 조정을 기만하지 않는 자가 없더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걸 본받는 자가많다.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와 안위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비록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이산해 :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선조 : 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졸들이 보고 본받기 때문이다.

유성룡 :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선조 : 경성(京城) 사람인가?

유성룡 : 그렇습니다. 성종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만호로 천거했습니다.

 

선조 : 글을 잘 하는 사람인가? (두번째 질문임)

유성룡 :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에 이순신이 정헌이 되고, 원균이 가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늘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선조 : 그 때에 원균이 그의 동생 원전을 보내 승전을 알렸기 때문에 그런 상이 있었다.

유성룡 :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 했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선조 :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조산만호로 있을 때, 김경눌(金景訥) 역시 녹둔도에 둔전하는 일로 마침 그곳에 있었는데, 이순신과 김경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순신이 밤중에 호인(胡人) 하나를 잡아 김경눌을 속이니, 김경눌은 바지만 입고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김경눌은 허술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위태로운 곳에서 계엄을 하지 않았고, 이순신은 같은 변방 장수로서 서로 희롱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일찍이 들었다.

 

이정형 : 이순신이 거제로 들어가 지키면 좋은 줄은 알지만, 한산도는 선박을 감출 수 있는 데다가 적들이 물깊이를 알 수 없고, 거제도는 그 만이 비록 넓기는 하나 선박을 감출 곳이 없을 뿐 아니라, 또 건너편 안골의 적과 상대하고 있어 들어가 지키기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한 듯합니다.

선조 : 체찰사가 이순신과 원균에게 분부한 일이 있으면 비록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이순신은 그런대로 면종(面從)하지만, 원균은 노기를 내어 청종(聽從)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그의 공을 빼앗겨서인가? 원균을 좌도수사에 임명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진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정형 :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용납하지 못할 형세입니다.

 

김수 : 원균은 매양 이순신이 공을 빼앗았다고 말했습니다.

덕열 :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아 권준의 공으로 삼으면서 원균과 상의하지 않고 먼저 장계한 것입니다. 그 때에 왜선 안에서 여인(女人)을 얻은 사실을 탐지하고는 곧장 장계했다고 합니다.

 

선조 : 전라도는 중국 사신을 지지하느라 주사와 격군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모두 이순신만을 책할 수 없다.

김수 : (부산 왜영을) 불태우는 일은 이순신이 처음에 안위와 밀약하였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불사르니 이순신이 도리어 자기의 공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윤두수 : 이순신과 원균을 모두 통제사로 삼아 서로 세력을 협조토록 해야 합니다.

선조 : 비록 두 사람을 나누어 통제사로 삼더라도 반드시 조절하여 절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움에 나가는데 이순신은 물러나 구하지 않는다면 사세가 어려울 것이다.

 

김응남 : 그렇게 한다면 이순신은 중죄로서 처해야 합니다.

선조 :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해야 한다. 원균은 오늘 정사(政事)에서 해야 하는가?

이정형 : 원균을 통제사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으니, 경솔히 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합니다.

 

1월28일[기미/3월15일] 「실록」에서

비망기로 유영순(柳永詢)에게 전교했다.

“우리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수군 뿐인데,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의 중한 임무를 맡고서 마음대로 속이고 적을 토벌하지 않아 청정으로 하여금 안연히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바야흐로 적과 진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우선 공을 세워 효과를 거두게 해야 한다. 나는 평소 경의 충용을 알고 있어 이제 경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삼노니 경은 더욱 책려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 우선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씻고 해적을 다 섬멸하여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훈공이 종정(鐘鼎)에 새겨지게 하라. 경은 공경히 하라. 이것을 원균에게 하유하라” 하고 원균에게 전달했다.

 

 

선조52년,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6월26일 (계유) 1번째 기사

적의 형세, 순변사 이일의 교체 문제, 금군과 수문장에 대한 일, 봉공의 일을 논하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호남은 민심이 본디 나쁩니다. 토적이 봉기하여 혹 왜적에 붙거나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산골짜기에 꽉 차있게 되면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안정시키는 일은 오직 방백(方伯) 에게 달렸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성룡은 유성룡을 이야기한다. 1594년이면 임란이 한참 전개가 되고 있던 시점중에 선조 임금에게 "전라도 애들이 왜군에 붙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는 상소를 아뢰고 있는 중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서애 유성룡은 "약무호남 시무국가"를 가장 먼저 제창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조차도 전라도 인심의 더러움을 선조임금에게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로 전라도 사람들의 골 떄림은 당시에도 골칫거리였다.

 

 

 

1.국경인의 함경도 회령에서의 왕자 납치 후 왜군에 팔아넘긴 사건 (국경인은 전라도 전주 사람으로서 탐관오리의 전형이었던 인물이다.- 선조 임금의 두 왕자가 함경도에서 의병을 모집을 하는데 국경인에게 나포당해서 왜군에게 팔려버렸다.)

 

2.형대원의 순창관군 반란사건-선조임금의 어가를 호위하라던 어명을 거부하고, 대뜸 반란을 일으켜서 조선왕조를 대상으로 창질을 했던 대표적인 사건. 특정 지역의 관군이 이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3.이몽학, 송유진의 반란사건-한명은 전라도 사람이요, 다른 한명은 전라도에서 산적들과 연합을 해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서 역시 임진왜란 반란사건에서 매우 큰 사건이었다. 이로 인하여 전라도가 자랑하는 유일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은 선조 임금이 직접 친국을 하여 정강이뼈를 모조리 부러뜨려 죽여버리기도 했다. 전라도의병활동의 참 실상인 것이다.

 

4.정여립의 기축옥사-정여립은 전라도 전주 사람으로서 당시 서인과 동인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조선조정에서 서인(기호학파의 전신)에서 활동을 하다가 동인(영남학파)세력에 붙은 대표적인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신의없음을 두고 선조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고 조정에서 쫓아내버렸는데, 그런 그가 전주로 내려가 행한 말이 "천하공물론"이었다. 즉, 천하는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요, 누구라도 왕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을 지껄이고 다녔다는 것이다.

 

흔하게 정여립 모반사건이라고 말하는데에는 그가 천하공물론을 지껄였다는 팩트자체가 부정이 되지 않는데서 연유가 되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호남 선비2천여명이 선조 임금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최대 사화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3년전, 그러니까 서기력으로 1549년에 일어난 일이겠다.

 

 

 

 

조선에서 퇴각한 고니시와 가토는 구마모토로 돌아가서 그 때 일본에서는 죽은 히데요시의 아들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간에 이른바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아들 편에 서고, 가토는 신흥세력 도쿠가와 편에 섰다. 1600년 고니시는 이 전투에서 가토의 칼에 맞아 죽었다. 약관 42세였다.

 

가토는 구마모토의 대영지(大領地)를 모두 부여받고, 곧 구마모도성(城)을 쌓기 시작했다. 성은 1607년 완성되었으나 1611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3군 대장 구로다는 정유재란때 다시 조선침략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일찍 귀국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때 이에야스편에 전공을 세워 후쿠오카를 영지로 부여받았다. 세 장수중에 가장 오래 살다가 1623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월파정月波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