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세월호침몰 맹골수로에 무지
지난 역사이지만 조선수군을 1만여 병사를 하루밤에 수장 전멸시킨 칠천량패전을 돌이켜 보고자 합니다.
왜군은 피란민과 아이들 코와 귀까지 베어 전공을 세우고자 하든 전쟁이였고 조선군 명나라군들도 전공앞에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량대첩에 배를 뛰우다.
이순신장군은 전쟁 중에 단 한척의 배도 건조하지 못하였지만,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조선수군 전체와 명장들 비하 폄하는 않타까운 일입니다.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린 배설장군만 폄하한다면 이해하겠습니다.^^
1, 이순신은 까탈스런 장군,
왕명에 따르다 전사한 충성심 자체인 원균 이하 장수들 비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의 부장 나아가 부하들 명나라 연합군 장수들마저 까탈스럽게 부족한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장군이 부하들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데 존경심이 있었다면 대단한 부하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난중일기에도 배설이 병 치료차 9월 2일 귀향했다(난중일기 이순신허락)고 되어 있고 , 명량 해전은 왜군의 ...
기습공격이 9월 14일이 였는 데(자신이 휴가를 보냄을 잊고 정신없이 찾음.탈영시비를남김) 12척으로 도주한 조선수군을 괴멸시키고자 왜군들은 두달간 총력전쟁준비를 하여 133척의 전함과 200여 척의 수송선단을 출동시킵니다. 패잔병을 추격하는 전투치고는 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칠천량서 배설함대는 모든화력을 퍼붙고 8척은 포탄이 떨어진 상태로 퇴각했습니다. 왜군들은 실탄도 떨어진 패잔군의 12척의 함대를 우섭게 볼수 없었든 것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량해전에서 3차에 걸쳐 선봉대장으로 활약한 맹장이십니다. 이순신이 거두어간 12척의 함대는 왜군의 3중 포위망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구해내어 이순신에게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신에 목숨을 건 함대를 바로 인계했으니 배설장군을 찾을 만도 합니다.
(사진출처:사실왜곡의 명량영화 포스터)
2, 의도적인 배설장군폄하 왜곡
배설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을 파멸시키고자 육전을 하자는 간신으로 전쟁중 탈영 도망해서 풍신수길 찾아갈듯 나쁜 놈으로 그렸습니다. 돈벌이에 미쳐 역사왜곡 서슴치 않은 영화제작 대박 대박 터지겠더라구요~
왜군은 배설이 병 치료차 귀향하고 난 이후 곧 바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아래와 같이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칠천량 해전 기습당시 왜선 주력공격선 8척이 배설의 공격으로 침몰 했었기에 배설이 병 치료 차 귀향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였습니다.
3, 칠천량해전 원균의 대패(원균이 배설의 충언을 들었다면 대승할 뻔)
“거듭된 조선군의 패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며 재출동을 명했습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 척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유인책에 넘어갔던 원균이 패전하고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데 불만을 품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裵說)은 다음 해전에서도 패전이 분명하다고 보고 원균에게 여러 차례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 배설은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물목이 좁아서 전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원균은 “이대로 패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달이 밝은 것을 이용하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포성 3발을 신호로 칠천량을 기습했다.
전에 한 번도 없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아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게다가 주장인 원균이 끝까지 지휘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해 도주했다. 조선 수군은 12척의 배설의 함대만 남고 궤멸하여 퇴각했다.(원균은 직속 상관으로 왕명을 어기자고 한 배설을 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
이억기와 최호 등이 그 싸움에서 자신의 전함과 더불어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배설만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유일하게 전소시키고 휘하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왕명을 어긴 죄 조정의처분울 기다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비변사의 감시 속에 한산도 수군본영에 이르러 방비를 엄히했다. (조정에서도 배설이 수군을 수습하게 해야 한다는 게 중론)” 왕명을 받아 칠천량해전을 감시한 선전관 김식이 조정에 보고(출처 사료)
4, 조선수군이 전멸할 뻔,
조선군 장수들이 해상포위 일본 수군의 공격에 위급하자 가까운 육지로 튀었습니다. 왜군은 조선 수군 전멸 할 순간 이였고 육지에도 왜군이 도주하는 병사들을 살육하기위해 매복되어 있었는데 조선군 장수들이 왜선의 포위망에 밀려 얕은 바다로 밀리다가 배에서 탈출 육지로 상륙한 장수들은 전원 전사했습니다.
배설부대의 휘하장병들은 공격해오는 왜선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포위망을 부수고 수심이 깊은 바다로 진격한 후 퇴각했기에 전원 살아날 수 있었든 것입니다. 수군다운 퇴각이니 적군이 추격하지 못했고. 조선수군은 배설의 군대만 남게 되었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고 서남권 해상으로 왜군의 출진을 가로막은 것 이였습니다.
조정에서도 왕명을 거역하고 수군본영으로 퇴각했음을 비변사 선전관(헌병대) 김식도 배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수군 통제를 계속하게 했습니다. 분명히 도망과는 다릅니다. 왜놈들이 도망이라고 하면서 왜 추적해서 괴멸시키면 조선반도가 그냥 수중에 들어오는데 고걸 안한 왜군을 바보 취급하는 것입니다.
5, 배설의 퇴각명령을 도주라고하는 왜군들
배설은 원균에게도 깊은 바다 조수가 빠른(진도 명량 한산도) 곳에서 왜적과 싸워야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다고 여러번 말했고 칠천량은 바다가 얕아 조선수군에게 위험하다고했던 것입니다.(사료)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주력부대 3중포위망을 강타하고 왜선 8척을 전소시키며 퇴각한 유일한 장수가 배설 이였고 그의 부하들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데 비해 동생이 전사했고, 다른 장수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배를 버리고 육지로 튀다가 매복 군에 전원 사망했었습니다.(배설이 이를 구할 수 없었든 것은 수심이 얕아 접근이 불가능)
왜군이 조선군을 군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왜군이 추격을 포기하고 한산도 본영을 침공할 엄두를 못낸 것도 배설의 기민한 용병술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파했었기 때문이 였습니다. 배설이 도주했다면 추격해서 괴멸하고 전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에 추적할 엄두를 못냅니다. 추적 않습니다.
6, 칠천량 패전이 이순신을 구해내다.
칠천량 패전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사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명을 어겨 체포됐든 이순신이 절도사로 부임했음에 가장 기쁘할 사람이 배설입니다. 배설도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렸기에 비변사 선전관 김기식의 감시를 받고 언제 체포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배설은 경상우수사로 배설이 같은 서열로 활동햇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는 작전을 가르켜 준 배설정군의 공...이 인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7, 임란500년 지난 시점 작가들이 왜놈의 간첩으로 왜곡했습니다.
이순신은 왕명을 어긴죄로 체포되어 사형 당하러 잡혀간 상태에 배설은 왕명도 어기고 군사들을 퇴각시킨 장수로 전공이나 승진을 바랄 위치에 있지 않았고 다른 장수를 시기할 상황도 아니였습니다.
이순신이 당시 칠천량 해전 경험을 배설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배설이 넘겨준 판옥선으로 조선수군이 원균의 실패인 칠천량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명량 노량 해전을 할 수 있었기에 배설은 전승일등공신이 된 것입니다.
병조판서 경상우수사가 왜놈 첩자 였다는 식으로 흥행도 좋지만 역사적 사실 왜곡이 지나칩니다. 원균을 비롯해 당대 전사 장군들의 애국심이 이순신보다 못했겠으며,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병졸들을 신출귀몰하게 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배설이 넘겨준 전함이 없다면 명량해전은 크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칠천량 해전의 배설장군의 경험이 소중했습니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군 지휘권을 넘겨준 후 뚜렸한 역할도 없는 수군 서열 2위의 참모 상태에서 병들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장수로 전란 통에 이순신에게 병력을 온전히 넘겨준 유일한 장수 였습니다.
(사진출처:명량영화- 배설없는 이순신장군의 기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8, 지울 수 없는 배설의 흔적
임진란 진주성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의 병력과 장비는 배설이 양성한 곳 이며 다른 원균이나 김완 이억기같은 장수들의 부하들은 전멸했음에도 배설휘하의 병력만이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병사들을 살리려고 자신 죽음을 각오하고 왕명에 거부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수군본영으로 퇴각명령을 내린 결정을 왜군도 아닌 조국에서 도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단기 필마로 왜군진영을 통과 할 정도로 용맹한 장수가 적군이 무서워 도주한다는 논리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그가 주장한대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한 퇴각임이 분명했든 것입니다. 임진란 내내 3대 대첩의 밑그림이 배설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1) 과거급제 후 의병장으로
배설 경상우수사는 청년 시절 의병장인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합천, 진주, 밀양, 선산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공적비가 세워진 분이십니다. 배설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의 병력 대부분 함대대부분이 배설이 넘겨준 것 이였습니다.
40대 중반 경상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많은 공적을 남기셨고, 조선수군이 전패당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전선 12척을 구해내어 조선 수군을 살려서,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조류를 활용할 계책을 제시해 명량 해전의 승리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명장으로 이순신의 병력대부분이 배설이 모아준 병력입니다. (이순신은 47세에 무과급제)
사실은 이순신이 제작하거나 구한 전함이 한대도 없었고 겨우 판옥선 1대도 명량 해전 끝날 때쯤 합류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량 패전후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키며 군사를 조련하여 자신이양성한 병력을 인계하고 억울하게 모함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광해 2년(1610) 선무원종 전승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임진왜란 전란 중에 고스란히 병력을 보전하고 12척의 전함을 이순신에게 넘겨주었고 칠천량 해전 대패의 조선수군전멸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부하들을 온전히 보전하기위해 퇴각 명령을 내린 지략 나아가 왜적의 장단점과 바다의 물길을 파악한 유일한 지휘자였으며 최초의 승전의 기초인 왜선 8척을 포위망속에서 성공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번 ‘명량’이라는 영화(전철홍·김민한 감독 극본)와 소설(김호경)에서는 배설 선조가 이순신의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고,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거제 현령 안위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단 배설장군에 대해선 험담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고 왜적의 주둔지를 부관1명을 거느리고 적진을 통과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로 적장이 감동받을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왜적에 매수되어 조선을 죽이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또 다시 배설 장군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조작 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장군도 험담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가들이 500년 지나 매국노 간첩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12척의 전함과 병력 대부분은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 때 양성한 사병과 같은 병력으로 임진란중에 진주성대첩과 같이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충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랏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주성 백성들이 관사문과 성문을 걸어 잠궈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사 부임을 가로 막았었습니다. 배설장군의 명망에 조정은 역모를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해서 부하들을 대신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는 용맹 앞에 왕이 직접파견한 전투를 참관감시한 선전관 김식도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칠천량서 함께 싸우든 모든 장수가 전사한(배설장군의 동생도 전사) 후에도 전투를 하면서 퇴각했습니다.
6.25때 일시적으로 서울을 버리고 남으로 퇴각한 국군을 도망이라 탈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후퇴 즉 육군본부 같은 수군본영으로 퇴각명령으로 얼마나 처철한 전투였든지 실탄이 떨어진 반파된 상태로 였습니다. 조선수군 청년들 수만명 전멸을 지켜보면서 치런전투에서 퇴각은 아무도 반기는이 없는 삼남의 백성들에게 피눈물과 절망을 주는 원통함이였습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전사하게 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무리한 진군명령인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 후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다가 이순신에게 군권을 인계했습니다. 도주라고 하는 것은 왜구들의 기록입니다.
(어명을 어긴 것은 맞지만)준비도 되지 않은채 출진하여 어명을 따르다 전사한 여러 아까운 당대의 아까운 장수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혼자 사형받기위해 병사들을 반역죄에서 해방시키는 퇴각명령을 내린 장수가 온전히 병사들을 지킨 것입니다.
선조가 의심이 만았고 덕망이 있거나 신망이 있는 장수를 군권에서 제외한 내시들에 둘러사여 과거급제자나 고관들만 중시하고 전쟁은 않일어난다,는 당파를 중용했고 배설은 진주목사당시부터 전쟁대비를 한 고위장수였습니다.
진주성의 젊은이들이 조선수군의 기둥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왜군이 진주성함락을 위해 전력을 솓아 붙고 씨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눈 작전울 가르켜준 배설정군의 공이 안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난중 일기를 중심으로이순신은 왕에게도(두개의 다른 보고서를 올림)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왕 명을 어겼다는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권율 밑에서 종사했던 인연으로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장장 200km를 기적적으로 도주해 온 배설의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거의 반파 상태로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고 무기 실탄이 거의 소진 된 상태였었다.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선조의 명령으로 칠천량해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원균을 감시해야 함에도 배설과 동행)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3도 연합 조선수군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조선수군이 가엾을 정도였다. 일본군들은 도망치는 12척의 선단을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출처:백과사전)
9, 선조의 실록을 봅시다.
성종릉과 정종릉은 임진년 가을에 파헤쳐졌다.
두 선왕릉이 파헤쳐진 사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경기도사였다.
경기도사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류성용은 지체없이 명 육군 총병관 이여송의 군막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통곡했다.
류성용은 이어 만월대 정자 위로 올라가 능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마를 찧으며 통곡했다.
임금은 행재소 마당에 쓰러져 통곡했다.
임금은 성종묘와 중종묘가 있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고,
명의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 ...
임금은 울음의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래오래 통곡했다.
방향을 바꿀 때 세번씩 절했다.
임금의 방향이 바뀔 때 마다 중신들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통곡했다.
이마를 땅에 찧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중신들은 통곡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08(개정판 25쇄 2009. 7. 28)
임금은 자주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남쪽 바다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슬피 울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차고 푸른 해거름에 소복을 입은 임금은 동헌 마루에 쓰러져 울었다.
의주까지 호종해서 따라온 중신들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임금은 깊이 울었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사무치게 울었다.
아무도 임금의 울음을 말릴 수 없었다.
강 건너로 지는 해가 마루 위로 도열한 중신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중신들은 임금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서울을 버릴 때 임금은 울었다.
임진강을 건널 때 임금은 중신들을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개성을 버릴 때 울었고 평양에 닿았을 때 울었고 평양을 버릴 때 울었다.
하삼도가 서로 내응해서 속히 창의의 군사를 휘몰고 올라오라는 교지를 써서 호남으로 보내고 나서 임금은 또 깊게 울었다.
피난길 의주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임금은 가마를 세우고 남쪽을 향해 또 길게 울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신을 맞아 임금은 길게 울었다.
신하들도 따라 울었다.
임금은 흐느껴 울었고 중신들도 울었다.
명의 구원병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임금은 강가에까지 마중나가 울었다.
환도해서 임금은 종묘의 폐허에 나가 길고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기진하도록 슬피 울었고 길게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뼈가 녹아 흐르듯이 깊었다.
임금의 언어는 장려했고 곡진했다.
임금의 언어는 임금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임금의 언어와 임금의 울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
그때 나는 임금의 언어와 울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24~231(개정판 25쇄 2009. 7. 28)
어전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머리를 들고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이 글자를 아는가?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이순신을 털끌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데 잡아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승정원 비망기 1597년 3월 13일
이순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418~420(개정판 25쇄 2009. 7. 28)
1598년 11월 19일 공의 나이 쉔넷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고려의 항몽유적지인 남도산성의 모습입니다. 고려의 삼별초가 몽고군을 몰살시키겠다고 항거한 진도입니다. 진도자체가 물살이 유속이 빠르고 기온은 내륙보다 따듯한 곳입니다.
몽고군수장 계획을 세운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는 실패 했으나 훗날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의 해전대첩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곳이 되었습니다. 울돌목이란 진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말합니다. 그만큼 물길이 사방 파도가 센 곳입니다.
이번 진도 세월호는 진도 남단항구 쪽 조도 앞입니다. 반대로 울돌목 이순신장군의 승전지는 북쪽 육지와 진도가 연결된 곳이고
남도 산성은 진도의 남쪽 조도와 진도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지점 깊숙히 있습니다.
진도 방파제 모습이구요, 앞에 조도가 병풍처럼 가리워져 있는데요,
본래 이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물살이 세차고 파도도 많은 곳입니다. 따라서 진도항은 오목하게 세맨트로 되어 있고,
조도나 그 앞들의 섬들에는 파도가 세차고 바위섬들입니다.
진도항의 석양은 파도와 물소리로 깊은 바다 임을 알려줍니다.
10,과도한 왜곡은 이순신을 모독하는 것
사실 위에 이순신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인간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문화이고 예술이다. 해외로 수출되어 조선 놈들 하고 비하되고 이순신만을 맥가이버람보로 미화함은 선조들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11, 조선왕조실록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자 전공다툼으로 도주한 배설을 찾아 참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권율은 명량해전 이후 체포령을 내렸고 배설을 꼭 잡아 죄값을 치루게 해달라 부탁도 했다. 배설은 도주 후 나주 등지에 머물다가 충청도로 숨어들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전란 때 조용히 있다가 전쟁이 끝나니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배설이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고 걱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즉 변란을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다. 배설의 덕망이 높았고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만, 배설은 명예나 지위에 연연한 사대부 고관들과는 달랐으며 역심을 품은 적도 없었습니다. 칠천량해전에 대패한후 물살이 사나운 노량진 명량까지 장장 200킬로미터를 노를 저어 초인적으로 이동했고 당시 조선수군 전멸 소식에 원근 각지의 백성들이 패잔선을 찾아 장병들의 소식을 듣고자 몰려다닌 것이였습니다.
임진란 당시 이순신에게 온전히 판옥선 12척과 병력을 넘겨준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도 배설이 넘겨준 병력과 전함12척이 구세주 같은 가치가 있다고 한점입니다.
12, 배설장군에 대한 오해
이순신이 먼저 꼬롬하게 배설의 영리를 잡아다 곤정을 치므로서 배설이 낙향을 결심하고 이순신에게 허락을받고 병치료차 곧바로 고향인 선산으로 귀향했습니다. 선산에 있을 때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란중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전공다툼에 희생되신 것입니다.
왜군 진영을 단기필마로 통과해서 고향으로 가는 행동은 살고자 하는 도망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단기필마로 적장의 막사를 향해 돌진한 후 적군들이 손쓸틈 없이 적진을 빠져나가자 적장이 오히려 그 매력에 감동했다고 하는 멋진 장수였습니다.왜군은 후일 전술로 흉내를 내어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도망자라는 빠가야로 배설의 흉내를 내는 왜군장수들의 행태를 직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배설이 진주성을 담당할 때 임지로 부임을 진주백성 남녀노소들이 가로막아 관사와 성문을 열어주지 안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하고(이순신미화에 차용)그런 진주성이 왜군을 막아 처절한 전투를 했다는 것은 역사의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설이 남긴 선정은 진주시민들이 하나로 뭉치게 했다는 점과 이순신에게 인계한 수군이 처절히 싸웠다는 것은 임란당시 배설의 휘하에 충심이 특별한 점이고 덕망이 높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 배설 이였고 그는 목숨에 연연할 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쟁은 전란 중에도 있었습니다.
왕은 왕답지 않게 도망다니고 장수들은 당쟁과 파벌에 줄써기 하고 전란 중에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든 배설장군은 이순신에게 곤장 맞고 죽을 뻔한 부장만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일제시대라면 영화명량에 뭐라하지 못했을 것이나 왕명도 어기면서 나라를 구한 충신에게 누명까지 쒸우는 문회인들이 무뢰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13 문화 예술의 사실존중의무
전쟁은 7년간 진행되고 조선군장수들은 일부이긴 하지만 조선군 패잔병들의 목을 배어 전공을 허위보고하기 예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자신의 병사를 구타해서 사망하면 자살로 허위보고해서 승진하는 장군들과 같았습니다.
왜군은 두려워하면서 조선 패잔병이나 난민의 목을 베어 쉽게 전공을 세웠든 당시 세태에 백성들이 배설을 흠모하는 것은 의병장출신으로 백성들과 부하를 아꼈습니다. 이순신도 명량해전에 배설을 찾으며 한탄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 만이 조선의 장수이고 나머지 이순신 부하들과 백성은 사람도 아닌 무저리들이고 이순신이 나라를 지켰으니,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왜구들 역사왜곡을 받아쓰기 수준입니다. 이순신은 죽고 없으니 나라는 일본에 침략은 당연하고 식민지는 당연하다는 논리를 비판없이 대중에게 쇄뇌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판검사 지도층들은 이순신 같은 지도적 위치에 있습니다. 뇌물이나 먹고 성히롱에 미친 상태로 잘못된 판단을 하는 지도자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사실왜곡의 무리한 설정으로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왜곡으로 돈을 버는 것이나 ☆부정부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도자 한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지만 세월호사고의 유병언 회장의 전권비리가 문제되었듯이 우민화는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이순신을 펌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왜곡이 이러하다면 다른 부분의 왜곡도 상당하게 될 것을 좋게 볼수 만 없습니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왕명 거부는 곧 죽음 이였습니다.지금의 시민들과는 다른 천하고 더럽게 여겨지든 아무 힌없는 백성들의 자식인 병사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구하려 했던 용맹은 알아야 합니다.
문화 예술이 사실을 기초로도 얼마든지 흥행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14. 8.15 조각글모음편집 : 김배영규
칠천량해전에서 3중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적선들과 교전 8척의 적함을 전소시키고 전함12대를 구해내어 거의 반파 상태로 언제 적선이 들이 닥칠지 모르고 (퇴각명령은 대역죄인 )므로 물살이 세고 깊은 진도 세월호가 침몰했든 맹골수로가 있는 명량까지 장장 200km를 항해합니다. (도망이라는 소릴들음)배설이 전함을 부산부근에 두었더라면 왕명에 따라 그곳에서 전투를 해야하고 그래되면 승산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파도가 쉴세 없는 먕량 진도 앞 바다에 진을 치므로 배설은 파도에 시달려 병이 듭니다. 도주하면 간단한 일을 왜군을 잘 파악한 배설이 노량과 명량에서 해전을 할 수밖에 없도록(세월호가 침몰했던부근) 울돌목이 있는 부근에 진을 치고 전투준비를 하다 병이 듭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장군도 파견되어 얼마 안되 병을 자주 앍습니다..그만큼 바다가 거치른 곳으로 퇴각해서 야위고 쇄락해 진 배설장군에게 읽어버린 동료장군들과 병사들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삼남의 백성들은 칠천량패전으로 절망속에 통곡의 땅이 되었으니 그의 마음인들 온전할 수 없었겠습니다. 도망간 조선수군 12척의 패잔병을 잡겠다고 왜군 연헙함대는 333척이나 동원 하여 전멸시키려고합니다.
세월호선장이 일등탈출했습니다. 그후 승무원들도 따라서 승객들을 두고 탈출합니다. 누구도 관행을 탈피하지 못하고 탈출하라는 방송한마디면 다 살릴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해경과 정부 고위 관리들이 구조에 있어 괸행이라는 메느리즘에 젖어 승객구조 시기를 놓칩니다. 어쩌면 긴박한 순간에 누구나 허둥거립니다. 한마디 탈출하라는 말 한마디도 그렇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에 음지에서 결과를 떠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장군,(내전을 끝 내고 평화를주다)
배설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배설의 전략에 감명받은 도쿠가와이에야스가의 대승)
왜군은 피란민과 아이들 코와 귀까지 베어 전공을 세우고자 하든 전쟁이였고 조선군 명나라군들도 전공앞에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량대첩에 배를 뛰우다.
이순신장군은 전쟁 중에 단 한척의 배도 건조하지 못하였지만,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조선수군 전체와 명장들 비하 폄하는 않타까운 일입니다.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린 배설장군만 폄하한다면 이해하겠습니다.^^
1, 이순신은 까다로운 장군,
왕명에 따르다 전사한 충성심 자체인 원균 이하 장수들 비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의 부장 나아가 부하들 명나라 연합군 장수들마저 까탈스럽게 부족한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장군이 부하들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데 존경심이 있었다면 대단한 부하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난중일기에도 배설이 병 치료차 9월 2일 귀향했다(난중일기 이순신허락)고 되어 있고 , 명량 해전은 왜군의 ...
기습공격이 9월 14일이 였는 데(자신이 휴가를 보낸 것을 잊고 찾습니다. )배설장군은 칠천향해전에서 3차에 걸쳐 선봉대장으로 활약한 맹장이십니다. 이순신이 거두어간 13척의 함대는 왜군의 3중 포위망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구해내어 이순신에게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신에 목숨을 건 함대를 바로 인계했으니 찾을 만도 합니다.
2, 의도적인 배설장군폄하 왜곡
배설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을 파멸시키고자 육전을 하자는 간신으로 전쟁중 탈영 도망해서 풍신수길 찾아갈듯 나쁜 놈으로 그렸습니다. 돈벌이에 미쳐 역사왜곡 서슴치 않은 영화제작 대박 대박 터지겠더라구요~
왜군은 배설이 병 치료차 귀향하고 난 이후 곧 바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아래와 같이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칠천량 해전 기습당시 왜선 주력공격선 8척이 배설의 공격으로 침몰 했었기에 배설이 병 치료 차 귀향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였습니다.
3, 칠천량해전 원균의 대패(원균이 배설의 충언을 들었다면 대승할 뻔)
“거듭된 조선군의 패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며 재출동을 명했습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 척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유인책에 넘어갔던 원균이 패전하고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데 불만을 품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裵說)은 다음 해전에서도 패전이 분명하다고 보고 원균에게 여러 차례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 배설은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물목이 좁아서 전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원균은 “이대로 패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달이 밝은 것을 이용하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
루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포성 3발을 신호로 칠천량을 기습했다. 전에 한 번도 없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아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게다가 주장인 원균이 끝까지 지휘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해 도주했다. 조선 수군은 12척의 배설의 함대만 남고 궤멸하여 퇴각했다.(원균은 직속 상관으로 왕명을 어기자고 한 배설을 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
이억기와 최호 등이 그 싸움에서 자신의 전함과 더불어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배설만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유일하게 전소시키고 휘하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왕명을 어긴 죄 조정의처분울 기다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비변사의 감시 속에 한산도 수군본영에 이르러 방비를 엄히했다. (조정에서도 배설이 수군을 수습하게 해야 한다는 게 중론 ...이였고 죄를 묻자는 의견 없었음)”(출처:사료)
4, 조선수군이 전멸할 뻔,
조선군 장수들이 해상포위 일본 수군의 공격에 위급하자 가까운 육지로 튀었습니다. 왜군은 조선 수군 전멸 할 순간 이였고 육지에도 왜군이 도주하는 병사들을 살육하기위해 매복되어 있었는데 조선군 장수들이 왜선의 포위망에 밀려 얕은 바다로 밀리다가 배에서 탈출 육지로 상륙한 장수들은 전원 전사했습니다.
배설부대의 휘하장병들은 공격해오는 왜선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포위망을 부수고 수심이 깊은 바다로 진격한 후 퇴각했기에 전원 살아날 수 있었든 것입니다. 수군다운 퇴각이니 적군이 추격하지 못했고. 조선수군은 배설의 군대만 남게 되었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고 서남권 해상으로 왜군의 출진을 가로막은 것 이였습니다.
조정에서도 왕명을 거역하고 수군본영으로 퇴각했음을 비변사(헌병대)도 배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수군 통제를 계속하게 했습니다. 분명히 도망과는 다릅니다. 왜놈들이 도망이라고 하면서 왜 추적해서 괴멸시키면 조선반도가 그냥 수중에 들어오는데 고걸 안한 왜군을 바보 취급하는 것입니다.
5, 배설의 퇴각명령을 도주라고하는 왜군들
배설은 원균에게도 깊은 바다 조수가 빠른(진도 명량 한산도) 곳에서 왜적과 싸워야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다고 여러번 말했고 칠천량은 바다가 얕아 조선수군에게 위험하다고했던 것입니다.(사료)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주력부대 3중포위망을 강타하고 왜선 8척을 전소시키며 퇴각한 유일한 장수가 배설 이였고 그의 부하들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데 비해 다른 장수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튀다가 매복 군에 전원 사망했었습니다.(배설이 이를 구할 수 없었든 것은 수심이 얕아 접근이 불가능)배설이 맹골수로로 반파된 전함으로 430km를 퇴각했습니다. 이곳은 세월호 같은 큰배도 침몰하는 격량의 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결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조용한 해뜨는 바다가 아니라 한반도 삼면 바다중 가장 물살이 싸나운 곳으로 조선수군을 몰아 넣습니다.
왜군이 조선군을 군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왜군이 추격을 포기하고 한산도 본영을 침공할 엄두를 못낸 것도 배설의 기민한 용병술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파했었기 때문이 였습니다. 배설이 도주했다면 추격해서 괴멸하고 전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에 추적할 엄두를 못냅니다. 추적 않습니다.
6, 칠천량 패전이 이순신을 구해내다.
칠천량 패전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사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명을 어겨 체포됐든 이순신이 절도사로 부임했음에 가장 기쁘할 사람이 배설입니다. 배설도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렸기에 비변사 선전관 김기식의 감시를 받고 언제 체포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배설은 경상우수사로 배설이 약간 낳은 서열로 활동햇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는 작전을 가르켜 준 배설정군의 공...이 인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7, 임란500년 지난 시점 작가들이 왜놈의 간첩으로 왜곡했습니다.
이순신은 왕명을 어긴죄로 체포되어 사형 당하러 잡혀간 상태에 배설은 왕명도 어기고 군사들을 퇴각시킨 장수로 전공이나 승진을 바랄 위치에 있지 않았고 다른 장수를 시기할 상황도 아니였습니다.
이순신이 당시 칠천량 해전 경험을 배설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배설이 넘겨준 판옥선으로 (이순신을 혁명가처럼 미화해선 곤란) 조선수군이 원균의 실패인 칠천량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명량 노량 해전을 할 수 있었기에 배설은 전승일등공신이 된 것입니다.
병조판서 경상우수사가 왜놈 첩자 였다는 식으로 흥행도 좋지만 역사적 사실 왜곡이 지나칩니다. 원균을 비롯해 당대 전사 장군들의 애국심이 이순신보다 못했겠으며,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병졸들을 신출귀몰하게 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순신이 배설이 넘겨준 판옥선과 병력인수로 역사적 사실이고 명량해전의 밑그림은 칠천량 해전의 배설장군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배설은 이순신에게 군 지휘권을 넘겨준 후 역할도 없는 수군 서열 2위의 참모 상태에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장수로 전란 통에 이순신에게 병력을 온전히 넘겨준 유일한 장수 였습니다.
8, 지울 수 없는 배설의 흔적
임진란 진주성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의 병력과 장비는 배설이 양성한 곳 이며 다른 원균이나 김완 이억기같은 장수들의 부하들은 전멸했음에도 배설휘하의 병력만이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병사들을 살리려고 자신 죽음을 각오하고 왕명에 거부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퇴각명령을 내린 결정을 왜군도 아닌 조국에서 도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단기 필마로 왜군진영을 통과 할 정도로 용맹한 장수가 적군이 무서워 도주한다는 논리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그가 주장한대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한 퇴각임이 분명했든 것입니다. 임진란 내내 3대 대첩의 밑그림이 배설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선조 배설 경상우수사는 청년 시절 의병장인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합천, 진주, 밀양, 선산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공적비가 세워진 분이십니다. 배설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의 병력 대부분 함대대부분이 배설이 전란 통에 넘겨준 것 이였습니다.
40대 중반 경상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많은 공적을 남기셨고, 조선수군이 전패당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전선 12척을 구해내어 조선 수군을 살려서,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조류를 활용할 계책을 제시해 명량 해전의 승리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명장으로 이순신의 병력대부분이 배설이 모아준 병력입니다. 이순신이 임지에서 모은 병력이 거의 없었고 겨우 판옥선 1대도 명량 해전 끝날 때 합류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량 패전후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키며 군사를 조련하여 이순신에 자신이양성한 병력을 인계하고 억울하게 모함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광해 2년(1610) 선무원종 전승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임진왜란 전란 중에 고스란히 병력을 보전하고 12척의 전함을 이순신에게 넘겨주었고 칠천량 해전 대패의 조선수군전멸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부하들을 온전히 보전하기위해 퇴각 명령을 내린 지략 나아가 왜적의 장단점을 파악한 유일한 군대를 지휘하여 명량해전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명량’이라는 영화(전철홍·김민한 감독 극본)와 소설(김호경)에서는 배설 선조가 이순신의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고,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거제 현령 안위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지요 단 배설장군에 대해선 험담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고 왜적의 주둔지를 부관1명을 거느리고 적진을 통과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으로 적장이 감동받고 놀랄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왜적에 매수되어 조선을 죽이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또 다시 배설 장군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조작 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장군도 험담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가들이 500년 지나 매국노 간첩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12척의 전함과 병력 대부분은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 때 양성한 사병과 같은 병력이였었고 전란 중에 잔주성과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충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랏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주성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 잠궈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사 부임을 가로 막았었습니다. 배설장군의 명망에 조정은 역모를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해서 부하들을 대신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는 용맹 앞에 왕이 직접파견한 전투를 참관한 선전관 김기식은 물론 조정 누구도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칠천량서 함께 싸우든 모든 장수가 전사한 후에도 전투를 하면서 퇴각했습니다. 6.25때 일시적으로 퇴각한 국군을 도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후퇴 즉 퇴각명령입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전사하게 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무리한 진군명령인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 후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다가 이순신에게 군권을 인계했습니다. 도주라고 하는 것은 왜구들의 기록입니다.
어명을 어긴 것은 맞지만 ㅡㅡ준비도 되지 않은채 출진하여 어명을 따르다 전사한 여러 아까운 당대의 아까운 장수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혼자 사형받기위해 병사들을 반역죄에서 해방시키는 퇴각명령을 내린 장수가 왕명을 거부했고 온전히 병사들을 지킨 것입니다.
선조가 의심이 만았고 덕망이 있거나 신망이 있는 장수를 군권에서 제외한 내시들에 둘러사여 과거급제자나 고관들만 중시하는 의심병으로 전쟁은 않일어 난다,는 당파를 중용했고 배설은 진주목사당시부터 전쟁대비를 한 고위장수였습니다.
배설이 진주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판옥선건조에 관계하였고 진주의 젊은이들이 조선수군의 기둥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왜군이 진주성함락을 위해 전력을 솓아 붙고 씨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눈 작전울 가르켜준 배설정군의 공이 안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과거급제 후 의병장으로
선조 배설 경상우수사는 청년 시절 의병장인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합천, 진주, 밀양, 선산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공적비가 세워진 분이십니다. 배설없는 이순신이 있을수 없고 이순신의 병력 대부분 함대대부분이 배설이 전란통에 넘겨준 것이였습니다. 패전속에 온전히 병력을 유지한 유일무이한 장수라는 것만봐도 그의 덕망과 지략을 알 수 있습니다.
40대 중반 경상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많은 공적을 남기셨고, 조선수군이 전패당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전선 12척을 구해내어 조선 수군을 살려서,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조류를 활용할 계책을 제시해 명량해전의 승리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명장으로 이순신의 병력대부분이 배설이 모아준병혁입니다. (병력이 대부분 뿔뿔이 흩어질 전란중)이순신이 임지에서 모은 병력이 거의 없었고 겨우 판옥선 1대도 명량해전 끝날때 합류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거의 모든 병사들이 패전시 흩어지는데 비해 배설의 군사들만 흩어지지 않고 이순신에게 인계되었든 것입니다. (이순신이 47세에 무과급제)
배설장군은 칠천량패전후 한산도 수군본영을지키며 군사를 조련하여 이순신계파에 자신이양성한 병력을 인계하고 억울하게 모함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광해 2년(1610) 선무원종 전승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임진왜란 전란중에 고스란히 병력을 보전하고 12척의 전함을 이순신에게 넘겨주었고 칠펀량해전 대패의 조선수군전멸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부하들을 온전히 보전하기위해 퇴각명령울 내린 지략 나아가 왜적의 장단점을 파악한 유일한 군대를 지휘하여 명량해전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명량’이라는 영화(전철홍·김민한 감독 극본)와 소설(김호경)에서는 배설 선조가 이순신의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고,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거제 현령 안위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지요 단 배설장군에 대해선 험담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고 왜적의 주둔지를 부관1명을 거느리고 적진을 통과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으로 적장이 감동받고 놀랄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왜적에 매수되어 조선을 죽이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또 다시 배설 장군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조작 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장군도 험담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가들이 500년 지나 매국노 간첩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12척의 전함과 병력 대부분은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때 양성한 사병과같은 병력이였었고 전란중에 잔주성과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충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라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 습니다.
8,관사와 성문을 걸어 잠궈 백성들이 길을 막다
진주성이 생긴이후 전백성들이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사 부임을 가로 막았었다. 전란통에 이런 풍경은 배설장군의 명망이 조정은 역모를 두려워했다. 칠천량해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해서 부하들을 대신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는 용맹앞에 조정 누구도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칠천량서 함께 싸우든 모든 장수가 전사한 후에도 전쟁을 마지막까지 하면서 퇴각한 정예부대를 지휘했습니다. 6.25때 일시적으로 퇴각한 한국군을 도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배설은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전사하게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무리한 진군명령인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후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다가 이순신에게 군권을 인계했다. 칠천량해전 대패하고 한산도 서남권을 사수하면서 본영을 지킨 것은 도주와는 거리가 멀다. 어명을 어긴 것은 맞지만 ㅡㅡ준비도 되지 않은채 출진하여 어명을 따르다 전사한 여러 아까운 당대의 아까운 장수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혼자 사형받기위해 병사들을 반역죄에서 해방시키는 퇴각명령을 내린 장수가 왕명을 거부했고 온전히 병사들을 지킨 것이다.
선조가 의심이 만았고 덕망이 있거나 신망이 있는 장수를 군권에서 제외한 의심병에다가 전쟁은 안일어난다는 당파를 중용했고 배설은 진주목사당시부터 전쟁대비를 한 고위장수였다는 점 경상우도사 발령에도 한산도에서 전쟁준비를 한 장수였다는 사실이다. 배설이 진주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판옥선건조에 관계하였고 진주의 젊은이들이 조선수군의 기둥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왜군이 진주성함락을 위해 전력을 솓아붙고 씨도 남기지 않고 전부죽였습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난중 일기를 중심으로 (이순신은 왕에게도 두개의 다른 보고서를 올림)명군에는 100명을 /50명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하고)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병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배설과 동행)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순신은 병력을 모으고자 광양 현감 구덕령,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 군수 김희온 등을 얻고 해질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무능한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바빠 적군에게 큰 도움이 될 군기 창고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들의 실책으로 이순신은 많은 병장기와 장편전 등의 피사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보성 등 330km를 돌며 신병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많은 전투용 병기들을 거두어들여 최소한 한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 두어야 할 점은, 이 많은 병참품들을 왜군보다 불과 하루 정도 앞질러 이순신이 먼저 거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모조리 왜병들 손에 넘어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선비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병법에 무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한편, 조선 수군의 패잔선 무리가 이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의 척후선단이 추격해 와 보니, 조선의 패잔선단은 겁에 질려 어란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3도 연합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가엾을 정도였다. 이 때까지 일본군들은 도망치는 12척의 선단을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패잔병들의 첫 승전보,,,
8월 28일 오전 6시, 왜선들은 조선의 패잔선들을 잡기 위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순신 제독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조선 해군의 승선원 태반이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들이었고, 그 중에는 물을 무서워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도 올려줘야 했고, 또 실전을 통하여 전투 경험도 쌓게 해주어야 했는데, 마침 일본 척후선들이 불과 8척만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출처:백과사전)
9, 선조의 실록을 봅시다.
성종릉과 정종릉은 임진년 가을에 파헤쳐졌다.
두 선왕릉이 파헤쳐진 사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경기도사였다.
경기도사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류성용은 지체없이 명 육군 총병관 이여송의 군막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통곡했다.
류성용은 이어 만월대 정자 위로 올라가 능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마를 찧으며 통곡했다.
임금은 행재소 마당에 쓰러져 통곡했다.
임금은 성종묘와 중종묘가 있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고,
명의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 ...
임금은 울음의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래오래 통곡했다.
방향을 바꿀 때 세번씩 절했다.
임금의 방향이 바뀔 때 마다 중신들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통곡했다.
이마를 땅에 찧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중신들은 통곡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08(개정판 25쇄 2009. 7. 28)
임금은 자주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남쪽 바다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슬피 울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차고 푸른 해거름에 소복을 입은 임금은 동헌 마루에 쓰러져 울었다.
의주까지 호종해서 따라온 중신들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임금은 깊이 울었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사무치게 울었다.
아무도 임금의 울음을 말릴 수 없었다.
강 건너로 지는 해가 마루 위로 도열한 중신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중신들은 임금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서울을 버릴 때 임금은 울었다.
임진강을 건널 때 임금은 중신들을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개성을 버릴 때 울었고 평양에 닿았을 때 울었고 평양을 버릴 때 울었다.
하삼도가 서로 내응해서 속히 창의의 군사를 휘몰고 올라오라는 교지를 써서 호남으로 보내고 나서 임금은 또 깊게 울었다.
피난길 의주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임금은 가마를 세우고 남쪽을 향해 또 길게 울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신을 맞아 임금은 길게 울었다.
신하들도 따라 울었다.
임금은 흐느껴 울었고 중신들도 울었다.
명의 구원병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임금은 강가에까지 마중나가 울었다.
환도해서 임금은 종묘의 폐허에 나가 길고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기진하도록 슬피 울었고 길게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뼈가 녹아 흐르듯이 깊었다.
임금의 언어는 장려했고 곡진했다.
임금의 언어는 임금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임금의 언어와 임금의 울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
그때 나는 임금의 언어와 울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24~231(개정판 25쇄 2009. 7. 28)
어전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머리를 들고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이 글자를 아는가?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이순신을 털끌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데 잡아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승정원 비망기 1597년 3월 13일
이순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418~420(개정판 25쇄 2009. 7. 28)
1598년 11월 19일 공의 나이 쉔넷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10,과도한 왜곡은 이순신을 모독하는 것
사실 위에 이순신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인간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문화이고 예술이다. 해외로 수출되어 조선 놈들 하고 비하되고 이순신만을 맥가이버람보로 미화함은 선조들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11, 조선왕조실록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자 전공다툼으로 도주한 배설을 찾아 참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권율은 명량해전 이후 체포령을 내렸고 배설을 꼭 잡아 죄값을 치루게 해달라 부탁도 했다. 배설은 도주 후 나주 등지에 머물다가 충청도로 숨어들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전란 때 조용히 있다가 전쟁이 끝나니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배설이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고 걱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즉 변란을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다. 배설의 덕망이 높았고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만, 배설은 명예나 지위에 연연한 사대부 고관들과는 달랐습니다.
임진란 당시 이순신에게 온전히 판옥선 12척과 병력을 넘겨준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도 배설이 넘겨준 병력과 전함12척이 구세주 같은 가치가 있다고 한점입니다.
12, 배설장군에 대한 오해
이순신이 먼저 꼬롬하게 배설의 영리를 잡아다 곤정을 치므로서 배설이 낙향을 결심하고 이순신에게 허락을받고 병치료차 곧바로 고향인 선산으로 귀향했습니다. 선산에 있을 때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란중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전공다툼에 희생되신 것입니다.
왜군 진영을 단기필마로 통과해서 고향으로 가는 행동은 살고자 하는 도망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단기필마로 적장의 막사를 향해 돌진한 후 적군들이 손쓸틈 없이 적진을 빠져나가자 적장이 오히려 그 매력에 감동했다고 하는 멋진 장수였습니다.(일본측사료)왜군은 후일 전술로 흉내를 내어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도망자라는 빠가야로 배설의 흉내를 내는 왜군장수들의 행태를 직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전멸할 때 병사들을 보존하면서 이미 왕명을 거역(부하들을 살리고 자신 죽을 각오) 그럼에도 조정은 배설을 대체할 장수가 없었는데 뛰어난 지략과 덕망이 부하들로부터 신망이 높았습니다.
특히 배설이 진주성을 담당할 때 임지로 부임을 진주백성 남녀노소들이 가로막아 관사와 성문을 열어주지 안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하고(이순신미화에 차용)그런 진주성이 왜군을 막아 처절한 전투를 했다는 것은 역사의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설이 남긴 선정은 진주시민들이 하나로 뭉치게 했다는 점과 이순신에게 인계한 수군이 처절히 싸웠다는 것은 임란당시 배설의 휘하에 충심이 특별한 점이고 덕망이 높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 배설 이였고 그는 목숨에 연연할 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쟁은 전란 중에도 있었습니다.
왕은 왕답지 않게 도망다니고 장수들은 당쟁과 파벌에 줄써기 하고 전란 중에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든 배설장군은 이순신에게 곤장 맞고 죽을 뻔한 부장만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3 문화 예술의 사실존중의무
전쟁은 7년간 진행되고 조선군장수들은 일부이긴 하지만 조선군 패잔병들의 목을 배어 전공을 허위보고하기 예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자신의 병사를 구타해서 사망하면 자살로 허위보고해서 승진하는 장군들과 같습니다.
왜군은 두려워하면서 조선 패잔병이나 난민의 목을 베어 쉽게 전공을 세웠든 당시 세태에 백성들이 배설을 흠모하는 것은 의병장출신으로 백성들과 부하를 아꼈습니다. 이순신도 명량해전에 배설을 찾으며 한탄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 만이 조선의 장수이고 나머지 이순신 부하들과 백성은 사람도 아닌 무저리들이고 이순신이 나라를 지켰으니,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왜구들 역사왜곡을 받아쓰기 수준입니다. 이순신은 죽고 없으니 나라는 일본에 침략은 당연하고 식민지는 당연하다는 논리를 비판없이 대중에게 쇄뇌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판검사 지도층들은 이순신 같은 지도적 위치에 있습니다. 뇌물이나 먹고 성히롱에 미친 상태로 잘못된 판단을 하는 지도자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사실왜곡의 무리한 설정으로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왜곡으로 돈을 버는 것이나 ☆부정부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도자 한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지만 세월호사고의 유병언 회장의 전권비리가 문제되었듯이 우민화는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이순신을 펌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왜곡이 이러하다면 다른 부분의 왜곡도 상당하게 될 것을 좋게 볼수 만 없습니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왕명 거부는 곧 죽음 이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조선수군의 전멸을 막으려 했던 용맹은 알아야합니다. 문화 예술이 사실을 기초로도 얼마든지 흥행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14. 8.15 조각글모음 : 김배영규
칠천량해전에서 3중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적선들과 교전 8척의 적함을 전소시키고 전함12대를 구해내었어나 거의 반파 상태로 언제 적선이 들이 닥칠지 모르고 (퇴각명령은 대역죄인 )므로 물살이 세고 깊은 진도 세월호가 침몰했든 능골수로가 있는 명량까지 장장 430km를 항해해서 수리에 들업갑니다. 배설이 전함을 부산부근에 두었더라면 왕명에 따라 그곳에서 전투를 해야하고 그래되면 승산이 없았습니다.
이처럼 파도가 쉴세 없는 먕량 진도 앞바다에 진을 치므로 배설은 파도에 시달려 병이 듭니다. 도주하면 간단한 일을 왜군을 잘 파악한 배설이 명량에서 해전을 할 수박에 없도록 세월호가 침몰했던 울돌목이 있는 부근에 진을 치고 전투준비를 하다 병이 듭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장군도 파견되어 얼마 안되 병을 자주 앍습니다..그만큼 바다가 매정하고 세찬 곳까지 적을 끌어 들이고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