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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장군의 귀향(산적과 비적)

自公有花 2014. 9. 1. 18:15

배설의 귀향

오랜 전쟁으로 왜군들은 지쳐 있었다. 전쟁이란 것이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지루하게 병영을 지키는 것이 대부분으로 일본 풍신수길이 독전을 촉구해서 진주성백성 6만명 대학살로 왜군도 약 2만여 병력이 살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전쟁이 이전과는 다르게 살육전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풍신수길은 전라도에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해 전라도 침략을 명령한다. 이로 촉발된 칠천포 전투에서 조방장 배즙이 전사한다.배설의 함대는 조총난사에 대비하여 두꺼운 송판으로 둘러 싸여 총탄이 들어오지 못하지만 왜선이 서너척씩 둘러싸고 줄을 걸어 기어 오르는 백병전에 취약했던 것이다. 명량해전에서 보듯이( 사상자 2명)

 

전세는 점차 악랄해지고 극악해 진다. 칠천포 전투도 그 중하나였다. 전쟁이 살육전화 하고 있었다. 이런 엄중한 사태에 배설은 노량진에 전함을 매달고 수리를 해서 해전을 준비한다. 그런대 뜻 밖에도 권율은 왕명을 어겨 압송된 이순신을 절도사로 파견하였다.

 

이순신에게 군권을 넘기기엔 너무도 위중한 현실이 였을 것이다. 평소 그의말대로 명량 노량해전을 준비하든 상태였기에 더욱 군권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조선은 끝이구나 생각 되어 분 노 했을 것이다. 기어코 조정이 나러를 말아먹는 구나!

 

때가 어느때 인가 진주성 6만이 학살되고 칠펀량 해전 부산 해전에서 14.000명 의 수군이 살상된 중차대한 시기이고 이제 왜군이 전라도 대학살령이 떨어진 시기이므로 군권을 넘기지 못했다.

 

1, 이순신은 천운의 정치군인

럭비공 풋볼 튀듯이 백의종군 대죄인이 수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나라걱정이든 배설은 8월 3일 원수부가 보낸 사령장을 무시하고 숙배를 거부한다. 군권을 넘길 수 없다. 이순신은 혀를 내두러면서 아무말도 못한다. 왜냐면 이순신이 지휘하든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함선은 모두 전멸했고 배설의 전함수리에도 한푼도 보태 준게 없었기 때문이다.

 

2, 어란진해전[1597년8월26일]

배설은 이순신의 사령장이 도착한 이후에도 전함의 실질 지휘권을 행사 했다. 이순신은 배설과 함께 조력했고 드디어 8월 26일 배설함대가 어란진에서 왜의 정탐선 8척을 격침 시킨다. 12척의 함대가 뿜는 화력에 8척이 전소되고 나머지 배들이 도주한다. 배설은 평소 주장한 전략을 실전에 보여주었다. 이렇게 하는거다. 조정에 실망했다면 적극적으로 나라를 위해 해전을 가르켰을 것이다. 웅천 전투에서 왜선 600척을 부순 경험을 전수한다.

 

3, 이순신은 조정에 승전보고서를 올린다.

어란진 승전은 왜의 수군들에게 서해 진출을 더욱 고심하게 만든다. 전공을 독차지한 이순신에 대해 배설은 실망하게되어 병세는 급격히 나빠진다. 그간 전투의 누적된 피로도 함께했다. 

 

8월 18일

이순신은 배설을 휘어잡기 위해 배설의 수행비서(영리)에게 함대의 배설 장군기를 문제삼아 군율을 어겼다면서 끌어다가 곤장을 치게 하는데 이것은 배설장군에 대한 시위였다.

 

배설은 완전히 무력해져서 수행비서를 데리고 귀향할 것을 결심한다. 배설은 조정도 실코 흠모 하든 진주백성은 전멸했고 애착도 꿈도 없었다.  "이순신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배설은 9월 2일 이순신에게 병치료차 귀향을 고지하자 이순신 잘 됐다는 듯이 허락 한다.

 

전쟁중이라 영내가 가장 안전하고 전국토가 유린된 시기였다. 적군이 사방이 있었기에 나가 돌아 다녀 봤자 죽기 딱이였다. 그래서 허락 했을 것이다. 가긴 어딜가,  바람 좀쉬고 돌아오겠지 이순신은 쉽게 허락했다.

 

 

4, 구국일념의 의병장들과 귀신소굴

관군들은 대부분 부패 자체였던 혼란한 시기에 백성들은 조정이나 관료들을 불신하였든 시기에 진주성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하여 백성들로하여 애국심을 고취했던 배설장군이였다.

 

백성들은 전란통에 조선군 진영을 '시체굴' '귀신소굴' 이라며 피해 다니든 시절에 의병장들은 백성들의 구세주 였었고 의병장들은 명예도 부귀도 원하지 않고 구국에 일념뿐이였다.

 

칠천포해전에 대패한 조선 수군 패잔병들이 노량진으로 퇴각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자 백성들은 술렁이며 배설함대에 원근의 지원이 쇄도 하면서 온갖유언비어 속에 배설의 패전 함대는  조선의 꺼져가는 등불 같은 것이였다.

 

왕과 조정은 민심을 읽어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면 되었지만 살육전의 중심엔 도망할 곳 없는 백성들의 목숨을 노리는 국제전쟁이 있었다.

 

전공을 세워 출세하고자 하는 외국군과 부패하고 탐욕스런 관군이 백성들의 하나뿐인 목숨을 탈취하고자 혈안이 되어 전란을 부채질하였고 의지 할곳 없는 백성들에겐 일부 조선군 진영을 "시체굴" "귀신소굴"이라 칭했을 정도 이다.

 

이항복은 한산도 이순신의 진영을 "귀신소굴" 이라고 말했으니 조선군장수들의 기세와 오만함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 수 있고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려는 부대는 의병뿐이 였다.

 

 

당시 배설함대는 왜군들보다 배가 크고 높아 왜선들이 가까이 와서 밧줄을 타고 들어 오기전에는 안전했다. 왜선들은 함포라는게 없었고 조총을 빗발처럼 퍼부었지만 두꺼운 송판으로 갑판을 둘러싼 조선수군함대가 가장 안전한곳 이였다.

 

 

노량 명량 해협은 물쌀이세어 200여 수군이 노를 저어 진군한 후 일시에 파도에 떠내려 가면서 왜선들에 함포를 쏘아대는데 반해 왜선들은 엄청난 해류에 떠내려 갈때 우왕좌왕 배를 유지하기도 벅찾고  조선수군의 함포사격의 명중율이 높아 위협자체로 조총을 비오듯 쏘아대도 꿈적 않는 배설의 12척 함대는 6.25때 침략군의 탱크 10배 정도였다고 보면된다.

 

5, 거북선이 피해야 할 것은 근접전뿐,

배설의 함대운영으로 전공을 독차지 하고 싶어 하는 이순신의 배설장군 영리를 끌어다 곤장까지 치게게 된 지휘권 분쟁을 해결하는 길은 장군은 하야 뿐이라는 결심을 하고 수하 장수들에게 단단히 이순신이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을 경계 또 경계할 것을 지시하고 귀향을 하게 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진군 명령을 내려도 함대가 진군하지 않아 혼자 진군했다는 대목이 이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순신은 함대의 객과 같이 전권을 회복한 것은 노량해전에서 퇴각하는 적군의 후미에서 함포를 쏘아 댔든 것으로 수군의 지휘자들은 퇴각하는 적선들을 바라보며 전쟁의 끝에서 부모형제의 원수를 갑고자 모든 화력을 마음 놓고 퍼부으며 울었을 것이다.

 

 

 

6, 왜군들의 철군향수

 

이미 전쟁이 끝났다는데 이순신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으며 7년 전쟁으로 죽으간 동료들을 떠 올리며 미친듯이 퇴각하는 적에게 공세를 취했을 것은 맞으나 근접 백병전은 할 수 없었다. 퇴각하는 적이라 하나 여전히 왜군은 강했고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으로 대치된 전선 언제라도 불을 뿜으면 엄청난 살육전이 되는 상태였다. 왜군도 조선군도 서로를 피하고 싶은 상태에서 배설 대장군의 귀향소문은 왜군들에게 고향과 부모 가족들 생각에 잠기게 했다. 어쩌면 돌아 갈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왜군 진영을 한 없이 슬프게 만들었다.

 

비록 적장이지만 그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풍신수길은 니쁜놈이고 사지에 군데를 내몰고 있다. 이런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 조선수군대장이 귀향했으니 이제 왜군들도 전쟁을 마쳐 집으로 돌아가서 죽어야 겠다는 기대감을 불어 넣었다. 이런 전쟁은 아니다!  

 

9월2일 부관 두명을 거느리고 배에서 내린 배설 장군은 한 필의 말을 타고 삼엄한 왜군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  진영을 통과하게 된다. 배설이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사라집니다.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출병이 차일피일 이순신장군처럼 미루어지죠왜장들은 허를 찔려 조선군이 언제라도 적장을 암살 시해할 수 있다는 무언의 신호를 보낸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왜장은 원균의 뒤를 이은 배설 3도 수군총사령관이 막사를 찾아 온 것으로 화들짝 놀라 나가보니 이미 저만치 먼지를 읽으키며 사라지는 배설장군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 박에 없었다. 부관 두명을 장군은 잡아서 보니 이런 병사들은 이제 잡아봐야 아무짝에도 소용 없었다.  부관들로부터 배설장군이 군권을놓고 고향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왜장은 크게 감명을 받는다.

 

역시 총사령관이다 마음만 먹으면 왜장 목 하나쯤은 그냥 거둘 수 있었을텐데~왜장은 부관들을 풀어준다.

 

전선의 긴장은 높았지만 막상 전쟁에 지친 왜군들은 배설장군이 적장의 막사를 향해 부관을 거느리고 닸아와도 아무도 제지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그만큼 왜군들도 설마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지쳐있었고 자신들 목숨하나 보전 하는 것 외엔 관심이 없었다.

 

 

적장이지만 한없이 부럽게 흠모하게 되고 왜군들의 소원은 귀향이라는 것이다. 조선땅에서 원귀가 될 수 밖에 없는 자신들 처지를 돌아 보는 왜장들과 왜군들은 완전히 전의를 읽게 된다.

 

그들의 로망은 전공도 아니고 부귀명예도 아닌 오직 배설대장군 같은 휴머니즘 멋진 귀향이였다. 단기 필마로 돌아가는 조선수군 대장군의 소문에 왜군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 배설장군을 부러워하는 이런 현상이 전선을 종전으로 내몰고 있었다.  왜군들은 안저나 서나 배설장군의 귀향을 얘기 하면서 철군 희망을 말하고 왜장들도 그렇했다.  평화의 소중함을 깨우친 것이다.  

 

왜장막사를 통과 해서 배설대장군이 귀향했다는 소문은 왜군 진영 전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가뜩이나 무자비한 대살육전이 싫튼 왜군들 틈에 이소문은  센세이션을 읽으킨다. 조선땅에서 살아서 돌아가기 힘들어진 것은 왜군이나 왜장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을 위한 전쟁 살육을 위한 살육에 왜군들도 몸서리 치든차에 적장이 그것도 조선 수군대장이 귀향했다는 소식은 왜장들에게 어떻게든 귀국해야 겠다는 향수병을 자극하게 된다.

 

 

 7, 살육을 위한 살육전화

조선 백성들의 분노와 공포심은 높아져 언제 어디서든 공격받게된 왜군들에게 전후 전공이 보장되 않게 되었음에도 살육전을 독촉받게 되자 전쟁회의론이 퍙배해졌다. 배설정군처럼 우리도 자신의 고향 영지에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죽었으면 좋겠다.  전선은 누가 얼마를 살육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어젠다가 되어버린다.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8, 경상 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위상,  

조선 수군은 지금의 해군과는 다른 특수전 병력을 말한다. 특전사 해병대 UDT 와 같은 최정예 병사들로 원균의 육전을 비하하지만, 이들은 육전을 잘 할 수 있는 최정예 병력이였기에 육지로 퇴각한 것이 크게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당시 전시 통사란 육군과 지방수령을 통할 하는 그야말로 막강한 군권으로 조정대신들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권력이고 도관찰사 관군과 의병 삼남의 백성모두를 통할 하는 것으로 정규병력만 약 3~4만을 지휘하는 야전군 총사령관을 말한다.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휘하 병력은 대략 5.000 정도였으나 지방 관군까지 약 4만 이상의 관군 통수권이 있고, 장군도로 언제든지 왕명을 집행하여 도원수 다음의 서열이다. 전시 왕보다 막강한 병력으로 야전군지휘관인  삼도통사들은 영의정 좌의정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성계처럼 마음만 먹으면 이순신 원균 배설장군은 언제든지 조정을 장악하고 왕조를 세울 수 있었든 전란의 시기임으로 선조는 매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균 배설 이순신 장군들은 충신중에 충신이였든 것이다.

 

 

​1.500척의 왜군 함대의 공격으로 생지옥으로 변한 칠천량해전에서 삼중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은 장수가 '배설장군' 으로 오늘날 위중한 시기에 본받아야 할 장수이다. 절대 불리한 상황을 뚫고 나오는 구국정신과 다른 장수에게 군권을 넘기고 미련없이 귀향하는 것은 본받을 만하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스님]

 

 

칠천량해전은 왜군 10만과 함대 천오백여 척을 조선수군 1만 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으로 장수들은 출전을 망설였고 원균은 수적 열세 때문에 육전을 하려고 했다.  조정은 왜군과 육지에서는 전투이 상대가 안되니 해전으로 백병전을 해서 전멸 당하여 왜군에 피해를 입혀라는 것이였다.

 

 

동인조정과 선조는 조선수군이 전멸하든 말든 부산으로 밀려오는 10만 왜군을 육전은 안되니 해병대가 막으라는 것이였다.

왜군에 타격을 입히고 전멸하면 명나라 군졸들이 지켜주리라는 망상 때문이였다. 명군은 조선왕조를 지키려 출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침공을 막기위해 조선군이 가능한 처절한 전투로 왜군들에게 피해를 입혀주길 바랬다.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안았다.(기동력 함포 전함의 크기를 이용 하자는 것)결국 배설장군은 장작귀선에서 일기를 집필 하다가 전쟁이 종전하면서 강강천과 손조방0에 '三分斬死' 삼도에 나누어 졌다고 한다.

 

전공을 세우길 학수 고대하든 이순신은 왜군의 부산 상륙까지 중요한 시점에 출병을 하지 않고 숨어 있었고,  그야 말로 귀신소굴 소릴 듣고도 적을 제앞 할 수단과 방법을 찾지 못 했다. 따라서 이억기를 대신 출병시켰으나 전멸을 하고 말았다.

 

칠천량을 해전을 앞두고 동인조정(유성룡)은 이순신을 체포 압송하여 권율막하에 둔다. 칠천량 해전에 전멸이 예측되자 이순신을 빼돌리고 이순신의 분신인 이억기로 대리 출전을 시키게 했다.(모양은 죄인으로 짜고 친 것으로 선조는 동인조정에 끌려다녔다)

 

배설은 왜군의 전멸이 아니라 함포로 타격을 입혀 방어를 하자는 것이였다. 어떻게든 왜군의 의지를 꺽어 철군시키려 풍신수길과 싸우고 있었기에 전멸을 할 수 없었다.

 

칠천량 패전후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첮 장계가 '배설은 패전으로 전쟁공포증에 걸려있다.'면서 사실상 해임할 것을 음해했으나 선조는 배설장군을 경상우도통사에 이순신을 절도사에 임명한 것만 봐도 배설장군이 얼마나 뛰어난 장수 였는지 알 수 있다.

 

배설장군은 왜군의 대장군 선단과 병력 수송선을 저지하려 했었다. 칠천포 해전에서도 도도와 가토의 장군선단을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고, 배에 기어 오른 원수인 왜군의 수급을 수없이 직접 '월파검'으로 베었다.

 

동인조정은 재주는 배설장군이 부리고 공은 이순신이 챙기라는 것이였다. 칠천포 해전에서 장군의 목숨을 구한 것은 천행이였었다.

 

조선수군전멸은 10만 왜군이 서해로 군산 해망포나 제물포로 바로 진격해서 대규모 살육으로 조선이 항복하게 하려고 했기에 배설은 조정의 전멸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서해 해로인 '울똘목'으로 430km를 기아 상태에서 왜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진을 꾸린다.

 

도주하는 배설장군 일행치고는 너무도 어렵게 도주한다고 봐야한다. 그냥 세월호 선장처럼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면 그만임에도 천신만고의 전투준비를 하면서 조선백성의 대살육을 저지하고자 전투준비를 한 것이였다.

 

칠천포에서 보름날 밤에 전멸하고 남은 패잔군, 피항하는 월파군들(칠천포패전군)을 향해 백성들이 산봉우리에서 솟불을 지피면서'강강술래'왜치면 수군들은 '명량포'하거나 '노량포'또는 '울똘목'이라고 답해서 항로를 가르켜주고 낮에는 전함을 수리하고 밤에는 항해했었다.

 

 

우리가 10만 대군에 바다에서 적군에 포위 됐다고 할 때 아무리 장군이라고는 해도 두렵지 않겠는가? 칠천량해전에서 최호의 충청군은 배추밭의 "굼뱅이 한마리가 수천마리의 개미에게 잡혀 뜻기 듯이" 왜군들이 새까맣게 충청수군 배에 올라 도륙당하였다.적벽대전에서 조조같은 명장도 제한몸 돌보기 힘들게 탈출함에도 중원과 반도에서 반만년 역사에 이러한 대규포 포위망을 부대단위로 둟고 퇴각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세월호 침몰 때 승객들이 제 한몸 서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욕하지만, 과연 그 런 사태에서 제 한몸 보존하기도 쉽지 않은게 사람이다. 6.25 전쟁 때 국군들이 퇴각하든 것이나, 칠천량 바다에서 3중 포위망은 빈틈이 없고 육지에는 매복군 철처히 포위했든 칠천량 해전 살아서 나온 것 만도 기적이고 천행일 것이다.

 

아순신의 분신인 이억기장군과 전라 좌수영 약 5,000여 명 병력의  전멸은 불가항력 이였다.

 

전함을 몰고 적장의 선단을 격침시키면서 조선수군을 지켜낸 배설장군은 그 공으로 역적에다 간첩으로까지 후세에서 욕을 먹는다. 과연 이순신 이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명량 영화는 무엇을 우리사회에 줄 것인가. 부정부패, 모함, 당쟁, 철면피가 승리하는 사회, 장군들을 모함하고 욕하는 '난종일기'야 말로 패륜이요 해악의 문서 아니겠는가? 얼마나 많은 장군들을 패망하게 했던 것인가, 

 

옳지 않은 왕명,

칠천포 패장 배설은 '월파정' 시 한수 만 남긴다. 대장부 중에 대장부 월파군의 대장군답지 않은가?

 

근세에 일본제국주의 도고제독이 이순신을 흠모 했다고 하지만 도고야 말로 우리를 식민지배한 원수였다.

 

칠천포 해전은 온당한 왕명이 아니였다. 현지 사정도 모르든 조정의 무능이 였으며 이순신의 분신이라 볼 수 있든 이억기 장군은 화염속에 왜군들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원 수장되고 말았음만 봐도 알 수있다.

 

배설장군은 왜군을 수중전으로 충분히 방어 할 수 있다고 부산항에 도착하기 전에 적군과 전투를 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건의 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칠천포 해전에서 개같이 죽지 않은 것을 원망하는 동인들 조정의 한계였다. 나라가 왜군들 앞에 풍전등화이니 그래 죽을 수 없어 당연히 죽었어야 할 해전에서 살아남았기에 원망을 받았다.

 

 

울똘목에서 왜군의 대량학살을 막고자 천신만고 끝에 수백리를 항해해서 노량포에서 전투준비를 하는 장군을 이순신은 패장으로 도주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공포증에 걸렸다'고 전쟁터의 장수로서 할수 없는 모함과 조정과 장군을 이간하고 경상우도 병력과 전함을 털도뽑지 않고 냉큼 빼앗고자 하였다.

 

 

나라의 풍전등화 앞에서 장군들이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함에도 배설장군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한후 귀향하므로 종전카드를 목숨과 바꾸어 조선에서 대학살을 막으려 했다.

 

물론 왕조를 유지하려는 조정과 권력을 유지 하려는 동인들의 침소봉대 전공다툼에 공헌하지 않고 귀향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배설장군보다 서열이 낮고 백의 종군하든 대죄인인 이순신을 절도사로 파견하여 장군의 재주만을 이용하려는 조정과 병력과 전함을 뺏으려는 불편부당한 타락한 처사에 구국의 일념으로 할 도리를 다한후 종전카드로 귀향했다.

 

 

왜군의 철군러시(대장군의 귀향과 졸병의 탈영)

먼저 귀향을 실천하여 보이므로 적군들이 무도한 대살육을 내린 풍신수길에게 저항하고 반기를 들게 시범을 몸소 보여주었다. 비굴하게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대장군 다운 목숨을 조정에 바치는 귀향으로 침략군들이 풍신수길에게 칼을 겨누게 하므로서 대역을 깨닫게 했다.

 

무언의 고도의 정치행위인 "귀향"으로 장군에게 영향받고 깨달음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 등등에 의해 풍신수길은 패망하고 그의 일가와 토요토미히로요리를 비롯한 조선침략 원흉들 십만여 적군들의 씨를 말리게 했다.

 

당쟁과 부정한 정쟁의 와중에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대살육을 방어 하는데 음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순신과 김시민을 영웅이 되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장군은 귀향했다.

 

행주 산성에서 퇴각하는 적군을 방어한 도원수 권율은 퇴각하는 왜군을 전멸한 것이냥, 전공을 포장했기에 배설장군에게 과도한 컴플렉스가 있었다.

 

 

 

해병대 사령관인 최정예 부대의 사령관이든 배설장군이 간악무도한 적진을 돌파하며 에헴하든 시대에 일등병도 이등병도 아닌 이름 없는 백성으로 귀향 한 것이다.

 

전공을 세우려고 조선에 출병한 왜장들에겐 가히 핵폭탄급 충격으로 철군 요청 러시를 불러 온다. 허구 많은 길을 두고 적진을 돌파하므로서 왜군들의 신상을 위협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풍신수길이 조선백성들을 살육하고 백성들과 전투했다면 배설은 풍신수길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후일 풍신수길과 그를 따르든 조선 침략장수들을 세키가하라합전에서 씨를 말리게 했고 풍신수길의 일족들의 배를 가른 것이다. 

 

 

 모함과 음해하는 탐욕스런 장수들의 공격 속에서도 조선 백성이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도록 배설장군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 했던 것이다. 장군을 음해하든 수많은 동인들의 공격에도 단 한마디도 원망이 없었다.

 

 

국난을 수습하고자 하는 장군은 부정한 왕명에 맞서고 당쟁의 산물인 정치군인들의 전공다툼을 거부하고 왜군철군과 일본 내전을 촉발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인 귀향을 실천해 보이므로 마지막 목숨 하나도 값지게 나라에 받쳐 '동서'라는 화합만이 만복에 근원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이순신의 모함으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므로써 조선 수군은 전멸된다. 경상도 우도통사 배설장군이 장작귀선 12척으로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노량포로 들어 오므로써 이순신 장군이 해전사에 남을 명량해전이 성립된다. 

 

“칠전량 해전에서 사람단위가 아니라 배 단위로 부대단위로 탈출한 것은 배설장군의 경상 우수영 소속으로 이순신은 배설이 이끌고 온 12척의 선단으로 경상우도수군으로 명량해전에 임했다. 

 

명량해전 당시 병력이 경상우수영 병력만으로 구성됐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12척에 장작귀선을 가동할 수 있을 전문 병력이 있었을 것은 틀림 없고, 배설장군이 장장 약 430K를 항해해서 "울똘목"을 향해 항해 했는데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조선의 두왕자를 왜군에 넘겨주고 작위를 받은 것은 전주출신 국경인이다.)

국난시기에 토적(土賊)과 가왜(왜옷을 입고 도적질하는 적들)는 본질상 차이가 없다.

왜에 부역한 자(부왜자)들은 경상도 만이 아니라 전라도 외에도 전국적으로 있었다.

 

 

 

아래는 그 예다.

 

 

“선조 수정실록 27년 12월 1일

호남·영남·기전(畿甸)의 토적(土賊)을 소탕

병란이 일어난 이후로 토적들이 험지(險地)를 점거하고 도발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부터 남원

회문산(回文山), 장성(長城) 노령(蘆嶺) 등 수십 개 군(郡)의 산골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적괴(賊魁)인 김희(金希)·강대수(姜大水)·고파(高波) 등이 나누어 점거하고 서로 내응하였으므로

관군(官軍)이 토벌에 나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제군(諸君)의 병력이 사방에서

모여 수색 토벌하니 적들이 점차 해산하였으며, 관군이 끝까지 추격하여 주살(誅殺)하자 이에 평정되었다.

 

경기의 경우는 적괴(賊魁) 현몽(玄夢)이 광주(廣州)·이천(利川)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고, 이능(李能)이

양주(楊州)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하였으나 오래도록 평정하지 못했었다. 이에

비변사가 변응성(邊應星)을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성영(成泳)을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삼은 뒤 서로 죽이고

투항하도록 현상금으로 모집했는데, 이능이 먼저 자기의 무리에게 죽음을 당했다. 현몽이 가장 사나웠는데

그의 무리는 항복하거나 흩어졌지만, 현몽은 도망하여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3일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전라도)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 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 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 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선조 30년 11월 12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기를,

“해남(海南)•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무안(務安)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적에게 붙어

사족(士族)의 피난처를 일일이 가르쳐 주어, 거의 다 살륙되었습니다. 해남(海南)의 노직 향리(老職鄕吏)

송원봉(宋元鳳)과 가속 서리(假屬書吏) 김신웅(金信雄) 등은 혹은 좌수(座首)라느니 혹은 별감(別監)

이라느니 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살륙하였으며, ”

 

 

"경상도 장졸에 대한 비판의 경우 원균에 대한 비판을 하는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경상우수영 수군을 비판하는 시각이 드러날 때가 있고 경상도 장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 사례는 전무하다.  원균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경기도 지역이 고향이다. "

이순신의 친구인 류성룡은  동인이었고, 원균을 지지하고 후원한 세력은 서인이였다.

 

“선조 수정 30년 8월1일

적이 안음(安陰)의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다. 현감 곽준(郭逡)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서생포에서 서쪽으로 전라도로 들어와 행장과 함께 남원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원수 이하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였다.”

 

“선조 30년 8월 21일

그런데 남원은 우리 나라 군민(軍民)이 모두 흩어져 도망함으로써 중국 장수로 하여금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혼자서 지키게 하다가 함락당하였습니다. 전주는 흉적이 아직 경내에 이르지 않았으니,

부윤 박경신(朴慶新)은 지극한 정성으로 군민을 개유하여 죽음으로써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겁을 먹어 도망할 계책만 생각하여,

 

“선조 30년 정유 9월6일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 박명현(朴名賢)이 치계(馳啓)하였다.

이달 2일에 적병이 금산(錦山)으로부터 회덕(懷德)·임천(林川)·한산(韓山) 등지에 침입하여 이곳 저곳에 가득 차 불지르고 약탈하였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이 군사를 가장 먼저 일으켰으나 과반수가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며, 이시언(李時彦) 및 신이 거느린 병사들은 모두 내포(內浦) 사람으로서 임천과 한산의 변을 듣고 역시 모두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니,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스럽습니다.”

 

“선조30년 9월 18일

충청 관찰사 정윤우(丁允祐)가 장계(狀啓)하였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의 치보(馳報) 내에 ‘왜적이 보은(報恩)과 직산(稷山) 등처를

침범해 와서 가득 진(陣)을 치고서 중국 병사와 대치해 있다. 내포(內浦) 각 고을에도 모두

왜적이 잔뜩 찼는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졸들은 모두 좌도(江道)로 피난하여 수풀 사이에 숨어버렸으므로 불러 모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변보(邊報)가 통하지 못하고, 또 수령(守令)

등이 간 곳도 까마득히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난중일기 기록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

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8월12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이순신장군이 배설의 귀향 소장을  병치료차 허락했다.(전투준비 완료를 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월파정月波亭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세루'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쫒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횄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녂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주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세루'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시무상주'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제1차 진주성 대첩이 승리했으니 포상이 내려집니다.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조실록> (출처: 명량 왜곡과 진실 미출판부분 공개자료)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몆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군님의 명령은 받았다고 보입니다.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하고 무조건 남하를 명령했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전투를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全滅ではなく、艦砲打撃を加えて防御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意志折っ撤退させようとシンスギル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負わせた羽柴秀勝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