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종전
오랜 전쟁으로 전공을 세워도 이를 인정받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즉 인간살육의 도구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는데 조선의 저항은 날로 거세지고 언제 어디서 복병을 만날지 밤새 안녕의 전쟁으로 웅천전투에서 왜선600척을 쳐부순 명장 휘하의 가공할 무기를 장착한 배설함대를 괴멸하라는 본국의 독촉을 망서리게 된다.
조선 3도 연합 함대가 전멸시킨 것은 수군인데 총사령관 원균의 목을 벤 것은 육군 이였다. 패전한 조선 수군이라지만 경상우도통사 배설의 전함을 놓침으로 왜의 수군은 뭐 하는 수군인가 책망만 듣게 된다.
조선수군 서열 2위 배설 경상우도 통사 함대는 왜군 3대 연합함대가 호언장담만 하고 놓쳤으니 작전은 실패한 것이고 왜군주력함대 8척이 격침되고 수십척이 반파되었음에도 두눈 앞에서 분전을 하다가 사라져버린 것으로 추격할 엄두도 못내었다.
어떻게든 패잔 함대를 괴멸시켜야 왜군의 서해진출과 인천진출이 안전해지기에 정찰선을 보내 뒤져도 오리무중이다. 그러다 어란진에서 8척의 정찰함대가 8월26일 격침된다.
조선 수군은 전멸한 것이 아니라 건재하고 있고 왜군의 서해 진출은 연기된다. 왜군장수들이 서로 선봉을 써서 죽고 싶어하지 않아 지리한 대치와 전쟁준비에만 열중하고 다른 부대가 움직이면 뒤따라가서 적장의 목이나 취해서 공을 세우려 하게 된다. 대살육전이후 조선군의 목은 값이 형편 없어진 것이다.
1, 칠천천포해전 [1597년7월15일]
원균에게 배설은 칠천포해전의 위험성에 누차 수심이 깊은 곳에서 조선군이 유리하다고 공개적을 주장한다. 칠천포 해전을 선조는 특사 (선전관)김식을 파견하자 김식은 원균 대장군의 배에 오르지 않고 배설의 배에 올라 전쟁을 참관하게 된다.
칠천포해전에서 배설이 도주했다는 논리는 왜곡된 것이 분명하다. 조선 수군은 전멸했고 배설함에서 생존한 병사나 장수들이 그래 말할 수 없다. 왕이 파견한 선전관 김식은 천행으로 살아남아 왕에게 사실을 보고 했는데 당시 동인들 조정에서 패전으로 성급히 판단했을 뿐이다.
칠천포해전에서 퇴각한 배설함대는 전투를 위해 노량진에 도착한 것은 한산도 수군본영에서 장장 201km이고 칠천포에서 왕명에 따른 청야작전까지 계산하면 430km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왜군의 서해 공세가 조만간 들이 닦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상태였다.
왜군들은 본국에서 무자비한 설육을 통해 항복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아 칠천포 대살육전을 치런다. 표면적으로는 왜군의 압승이였지만 조선수군들도 장렬히 싸웠기에 왜군의 타격도 만만찬았다. 특히 수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전공은 육지의 매복군에 넘어 갔다.
조선 원정 왜군은 공을세워 본국으로 돌아가는게 꿈이 였는데 끔찍한 살육전으로 점점 살육당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왜군들도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게 된다.
3, 풍신수길의 철군
풍신수길은 조선 원정군에게 대살육을 독촉하고 조선의 항복을 받으라고 독촉하지만 원정군은 조선정복이 불가함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백성들의 저항 의병의 저항으로 조선땅 어디서도 안전이 보장되지 안았다. 배설장군처럼 전공도 싫고 조선정복도 실코 어떻게든 귀국하기만을 청원하게 된다.
왜냐면 오랜전쟁으로 왠만히공을세워도 논공도 보장받지 못했다. 당황하여 어떻게든 종전은 해야겠는데 전쟁의 실익이 전무했다. 나누어줄 것이 없었다.배설장군의 처지를 원정군 장수들은 자신들 모습를 돌아보게 했다.
조선 원정군의 철군 요청이 쇄도하고 왜군의 대량 사망소식으로 풍신수길은 종전협상에 급박하게 내몰리게 된다. 원정 왜군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가고 무모한 전쟁책임론에 풍신수길은 철군협상을 서두러라는 명령을 내려보내다가 지친 풍신수길은 배설의 귀향후 얼마 안되어 1598년 9월 16일 철군요청과 각지의 영지들의 반란으로 시달려 사망하게 된다. 풍신수길의 사망후에도 원정군은 철수를 희망하는 문서들은 속속 도착했다.
명나라와 일본간의 종전 협상은 이루어지고 왜군은 철군을 하게된다. 지긋 지긋한 전쟁이 끝난 것이다. 장군이 그토록 원하든 백성들의 목숨을 목숨바쳐 지키려든 전쟁이 끝났다. 병을 훌훌털고 읽어나고 싶어으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유문(遺文)과 두 편의 시조
月波亭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4,참수
병상에서 칠천포패전 책임에 대한 "月波亭" 이란 시를 남기고 신음하던 중에 권율장군의 수하들에 선산땅에서 부친과 아들이 함께 추포되어 역모 모반죄로 부친과 아들은 방면되고 장군은 참수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귀향길에 종전이 곧 올것이라고 하던 역모모반 혐의로 참수된 배설장군을 경상도 관찰사 경상감사 한준겸이 직접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군졸들을 동원 후하게 장례를 지내준다. 이 혐의로 후일 한준겸은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권된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한준겸은?(1557-162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아버지는 판관(判官) 효윤(孝胤)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주서·전적 등을 역임했다.
1589년 금천현감(衿川縣監)으로 재직하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전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1592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원주목사를 지냈으며, 1595년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이 되었다.
1597년에는 동부승지로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전란 수습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우승지·경기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사도체찰부사(四道體察副使) 등
지방관과 군직(軍職)을 두루 역임하며 전후의 민생안정과 군무수습에 기여했다.
1605년 호조판서를 거쳐 대사헌·한성부판윤 및 함경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함경도관찰사 재직시에는 〈소학〉·〈가례〉 등을 간행·보급했다.
선조 말년 후사문제를 둘러싸고 광해군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자 유영경(柳永慶) 등과 함께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선조의 임종시 유영경·한응인(韓應仁)·신흠(申欽)·허잠(許箴) 등과 함께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았다.
이때문에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다.
이후 대북정권이 계속되면서 1617년에는 충주로 부처(付處)되고, 1621년에는 여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해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크게 일어나 국경수비가 위태로워지자,
이를 방비할 적임자로 뽑혀 유배에서 풀려나고 지중추부사 겸 5도도원수로 임명되었다.
이어 의주로 부임하여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하는 등 여진의 침입에 대비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그의 딸이 인렬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영돈녕부사가 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피난하자, 호위대장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따라 전주까지 갔다. 저서로 〈유천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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