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월파검,청록진충도,

自公有花 2014. 9. 3. 09:48

대장군의 칼에는 '청록진충도'靑綠忠刀'라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수술이 달려 한층 위엄이 있었다.

 

칠천포패전이후 장군은 부관에게 이 장군도를 자칭 "月波劍'이라 지칭했다. (구전의 이순신과 배설이야기)

 

 

1, 月波劍

1597년 7월 15일 칠천포에서 도도다카도라 (1556.2.16~1630.11.9) 가토 기요마사 (1562.7.25~1611.8.2) 와키쟈카 야스히루 3대 연합 수군에 포위 기습공격을 받게 되자 배설의 함대는 가토 기요마사 도도 다카도라의 왜군 주력 부대의 포위망을 벗어 나고자 장군진영을  향해 전투를 했다.

 

최호 충청수군들은 겹겹이 도도 다카도라의 왜군에 포위되어 '한마리의 군뱅이가 수만의 개미들에 물리듯'이 왜군들이 선상모두에 새카맣게 몰려 조선 수군을 살상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전라좌수사 이억기가 와키자카 야스히루의 공격을 받아 함대가 불길에 휩싸여 전멸하고 전사하므로 이순신이 1591년부터 전라좌수사로 5년간 한산도에서 양성한 병력이 1597년7월15일 전멸하고 전함도 모두 격침 소실되는 것을 지켜 본 배설장군은 포위망을 뚫고 퇴각명령을 내린다.

 

왜군이 조선수군을 에워싸고 백병전과 화전을 하고 있었기에 분하지만 근접전을 한다면 배설함대는 화전으로 전멸을 피할 수 없어 퇴각했다.(조선함대는 조총을 대비해서 두꺼운 송판으로 갑판을 감쌋기에 불화살에 무방비로 위험했음)

 

와키쟈카 야스하루 수군의 화전으로 칠천포 밤하늘이 시뻘겋게 물들고 배설함대도 화전을 피하느라 전투가 될 수 없었다.왜군이 불 화살공격으로 나왔기에 퇴각하지 않으면 충청 전라 수군처럼 싸우지 못하고 병사들이 몰살할 상황이였다.

 

 

짧은 순간에 충청 전라 수군은 불길에 휩싸였고 경상 우도 수군은 포위망을 뚫고자 도도 가토 지휘부와 교전을 하고 있는 급박한 순간이였다. 역시 대장군 원균답게 화염에 휩싸인 전함에서 대장기를 바다에 던지고  육지로 탈출하게 하므로 조선 수군들은 왜군들을 한명이라도 더 베고 장렬히 전사할 수 있었다.

 

전라 좌수군은 평소 백성들에게 '귀신소굴'로 불릴만큼 백성들이 두려워 했던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는 수군임에도 칠천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함과 함께 화염에 불타고 일부는 바다에 뛰어내려 수장되고 말았다.

 

너무도 안타까운 칠천포 해전이고 칠천포를 끼고 원균대장군을 좌우로 전라 충청수군, 바다 쪽을 경상우도 수군이 배치되어있었는데 순식간에 왜군들의 삼중포위 기습공격이였다.

 

경상 우도군은 적군의 신호탄이  떨어지자 가장 먼저 왜군의 공격을 받았고,  왜군의 포위망을 깨트리는데 집중하는 사이 아군은 왜군의 수에 놀라 포구로 밀려가고 말았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는 사이에 왜군의 포위망은 끝없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물밀듯 밀려 들었다.

 

경상 우도 수군은 삼삼오오 개미처럼 달려드는 왜군을 떨쳐내고 도도군의 장군기를 에워산 함대에 함포공격을 하여 바다 깁숙히 추격해서 6척의 전함이 정면승부를 벌였고, 6척은 도도의 수군 지휘부를 향해 돌진했는데 적군은 서너척의 함선들이 에워싸고 줄을 걸고 왜군들이 기어 올라 오고 있었기에 백병전을 서너차례하고서야 함포를 다잡을 만큼 급박했다.

 

 

2, 도원수 원수,

배설 대장군은 장군도를 빼어 들어"도원수 이놈" "원수"라고 외치며 기어 오르는 왜군의 목을 자르고 또 잘랐다. 부관들은 왜군의 수급이 눈을 끔벅거리는 것을 바다에 던지는 것도 힘겨워 했다.  얼마나 전투가 되었을까,  칠천포를 바라보니 조선수군이 육지로 퇴각하고 배들은 화염에 시뻘걷게 불타고 있었다.

 

 

3, 울똘목

 

칠천포 퇴각으로 경상 우도 수군은 배설장군을 떠나지 않게된다. 패전시 군사들이 흩어짐에도 오히려 수군 지원자들이 천명에 이르럴 만큼 백성들이 몰려왔으나 식량이 없어 돌려보냈다.

 

 

 

장군이 칠천포 해전이후 '청야작전'까지 장장 430km 항해해서 노량포에 배를 매달기까지 줄 곳 바다넘어 산마루에는 보름달이 항로를 따라왔고,

 

 

'항몽전에서 중손장군은 100만 몽고군을 울돌목에서 수장하겠다 했거늘 십만 왜군을 울똘목에서 수장시키지 못하랴!' 왜군에게 한양을 내줄 수 없으니, "어서 빨리 울돌목으로 가자!" 병사들은 울똘목으로 가면 쌀밥과 고깃국이 나오는 신천지가 있는줄 생각했다.  청야작전후 명량해협을 항해하는 조선수군은 기아 상태에서도 "울똘목" 이상향으로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장군의 "월파검"은 장군의 손에서 한시도 떠나지 안았다.

 

히미한 여명 속에서도 가는 곳마다 산 봉우리엔 백성들이 횃불을 밝히며 때로 모여 '强强술래'를 외치고 있었다.(힘내라 힘내라  지고 이겨라,라는 뜻으로 백성들이 대피하여 기회를 보라고 응전하였다.  왕은 전투를 요구했으나 이미 백성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백성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경상 우도군의 마지막 남은 함대가 수리되어 전투를 재기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실제 등대역할을 자처했다.

 

4,강강 술래

 

칠천포~ 진해만 ~통영~ 자란만~ 삼천포 ~남해보리암~ 여수 돌산~보성만~ 완도 ~해남~ 명량 노량진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은 산 봉우리에서 왜군의 추격을 망을 보아주었고 '강강술래'를 외쳤다.

 

벌교에서 꼬막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때도 산 봉우리엔 난민들이 '강강술래' 를 외치며 적이 없다는 것을 신호해 주었고,

 10만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고 장장430km를 기아상태의 수군들이 배설장군이 외치는 "울돌목"만을 생각하면서 항해를 한 것이다.

 

동인 조정은 쌀 한톨 무기하나 지원하지 않았고 '어명'이라는 전투출병 교지 종이 한장으로 수만은 조선군이 불타고 수장되지 안았든가.

 

도주하는 설 장군 일행치고는 너무도 어렵게 도주한다고 봐야한다. 그냥 세월호 선장처럼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면 그만임에도 천신만고의 전투준비를 하면서 조선백성의 대살육을 저지하고자 해상 심해전투를 위한 전투준비를 하였고, 적의 침략기지화된 대마도출신 평의지(히라요시)를 추격 격살하려고 했으나, 합천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함으로 눈앞에 히라요시를 두고 한탄했으며,배설장군은 대마도 수복을 위한 수군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칠천포에서 보름날 밤에 전멸하고 남은 패잔군, 피항하는 월파군들(칠천포패전군)을 향해 백성들이 산봉우리에서 솟불을 지피면서'강강술래'왜치면 수군들의 안전항로를 거국적으로 알려주었고, '명량포'하거나 '노량포'또는 '울똘목'이라고 신호해서 항로를 가르켜주고 청야작전이 실행되어 낮에는 전함을 수리하고 밤에는 항해했었다.

 

 

 

오직 동인들이 차지한 조정 중신들과 사관들만 경상 우도수군 배설장군이 전멸하기를 바랫었다. 이들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전사하지 안은 배설장군을 끝 없이 시기하고 모함했다.

 

 

와카쟈카 야스히로는 퇴각한 조선 경상우도 수군을 추격하지 않는다.

육지에서 조총 앞에 조선군은 왜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왜군 1천명이 진격하면 조선군 1만명이 도주하고 패전하였다. 허세 좋은 관군이 전투가 벌어지면 도망치기 바쁜 상황에서 그래도  마지막 남은 경상 우도 수군은 태풍 앞에 꺼져가는 등불 이였다.

 

삼남의 백성들은 신분 고하를 떠나 십만 왜군의 발을 묶어 주기를 간절히 바래는 "강강술래"를 외치는 절박함을 보고 수군들은 지친 상태에서도 용기를 얻고 울기도 했다. 전사해도 아무런 후회 없을 만큼 칠천포에서 장렬히 싸웠고, 다시 밤을 틈타 명량으로 향하는 기아 상태의 경상 우도수군에게는 백성들의 응원이 칠천포에서 부터 명량해협에 이르기까지 있었다.

 

 

때는 1597년 7월 보름 지나 칠천포 패전이후 한산도 본영 귀환후 명량해협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이 산 봉우리 곳 곳에서 횃불을 밝히며 '강강술래'를 외치며 패전한 마지막 남은 조선 수군을 자신에 아들들이 타고 있는 것인냥 기리고 응원해주고 있었다.

 

술래잡기에서 "강해져라" "힘내라" 라는 소리가 바다를 항해하는  경상 우도 수군들에게까지 들렸다. 칠천포 전투가 끝나고 지치고 기아상태의 수군들은 백성들로부터 물자를 뺏거나 징발 할 수 없었다.그래서 그들은 벌교에서 꼬막을 잡아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다.

 

조선수군은 기아 상태에서도 힘내어 노를 저어 노량포구까지 도달 한 것이다.

경상 우도수군이 노량포에 도착하여 수리를 하고 있을 때인 7월(23)하순에 이순신과 젊은 장교 서너명이 나타나서 함대의 상황을 둘러 본 후 ('배설은 전쟁공포증에 걸려있다"는 비겁한 도망자라는 뜻으로 해임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린 줄도 모르고) 배설장군은 전의를 다짐하지만, 놀란 조정은 배설을 지휘권에서 배제하고 이순신에게 3도 수군절제사에 사령장을 7월23일자로 소급해서 8월3일 도착시킨다.

 

8월 3일 이순신이 사령장을 보여준다.

격노한 배설은 언제라도 목을 벨듯이 '월파검'을 들어보이며

'그래서 어쩌라구?'

사령장이 왔다고 ....

뭐라 그랬소?

경상 우도통사에서 해임된게 아니요

3도 수군은 장군이 지휘하고,  나는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하겠소.

이순신은 배설장군 해임사령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임금이 내린 장군도는 그자체로 어명이라 여차하여 목이 날아 갈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8월 3일 이순은 사령장을 받았으나 배설장군의 기세에 꺽여  아무 말도 못하고 뜸을 들이다 8월 15일 이분과 이완이 이순신 장군에게 합류하자 취임식은 8월19일에 거행 한다.

 

배설의 기세에 이순은 2주 동안 혀를 내두런다.

여차해서 배설의 '월파검' 맛을 볼 수 없지 않은가?

 

'굴러들어 온 돌이 밖힌 돌 빼낸다지만' 3도 수군이 어디있소?

경상우도 수군뿐이고 수장에서 해임된게 아니요 할 땐 '월파검'의 떨리는 소리마저 요란했다.

8월(18) 하순

이순신은 배설장군에 대한 지휘;권 이양을 요구하는 무언의 시위로 영리(수행비서)에게 사소한 이유로 곤장을 선물한다.

 

이순신은 '어란진승전' 이후 난중일기에 배설의 기세가 가히 오만방자하고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고 기록해 둔다. 

이순신은 왕명이라며 기어코 숙배식을 거행 한다.

8월 19일 숙배식에서 배설은 숙배를 거부하고 이순신만 절한다.

 

 

8.19쿠데타를 품다,

배설장군은 대노하여 숙배식을 거부할 뿐 아니라 조정의 처사에 분노해서 경상 우도통사 해임장이 오기 전엔 통수권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순신은 혀를 차면서 지휘권 승계를 받지 못하고 배설장군에게 지시하고, 배설장군이 수군에게 지시하는 방식으로 절충이 이루어진다.

 

이순신은 조정에서 배설 파면장을 기다려도 파면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영오지 않는다.

난중일기에도 배설장군에게 지시하는 내용이있고,  배설의 위세는 대단해서 불쾌 했다는 기록이 있다.

 

8월 20일(중순)

경상 우도함대에 해남과 순천 벌교 나주로부터 공출미와 식량 이외 악기인 '퉁소' '대금' '꽹과리' 외 '징'이 8개가 공출로 새로이 들어 왔으나 배설장군은  음주가무를 하지 않아서  대장선만 제외하고 골고루 나누어 주어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8월 26일 경상우도 수군은 '어란진 승전'을 하다.  (8월 26일 경상우도 수군은 어란진에서 정찰왜선 8척을 격침시킨다.)

 

어란진 전투에서 징소리와 퉁소 소리에 놀란 왜군 정찰선 8척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조선 수군은 승리에 모두 기쁘했다. 이 전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깃발을 흔든 장수들도 너무 기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5, 김억추장군들에게 군권을 넘기다. 

'장군이 알다시피 경상 우도 12척의 전함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건조한 것이요'

 

'동인 조정이 전공을 세우고자 눈이 멀었고, 어린 순신장군이 공에 목말라 하니 언제적에게 전함을 읽게 될지 모르오'

 

'백병전과 화전을 피해 함포로 왜적을 격침해야 하오'

 

이순신장군 함에는  대장기 두개와 북을 넘겼으니 군권은 장군이 맡아주시오, 심신 당부한다.

장군 전쟁중에 적군 앞에서 자화자찬의 일기를 꾸미는 장수는 처음보았소,  후일 영웅이 되실 장수이니 장군이 지켜주어야 겠소,

 

전쟁이 끝나면 자화자찬 '난종일기'는 막을 내릴 것이요,

 

장군은 하야를 밣히며 순신이 후일 성웅이 될 제목이니 전함에 지휘권을 맏겨 전사하거나 전함을 소실시키지 않토록 밀명을 내린다.

 

어린 아해 명령을 듣는 척하고선 수군 작전은 김억추에게 명한다. 이순신에게는 신나게 칠 북과 깃발 두개를 장군영에 곶아 주었다. 이로서 이완과 이분은 명량 노량 해전 내내 장군기를 흔들 수 있었다.  이장군은 난중에도 수시로 쓸 난중일기가 유일한 유히거리로 있었다.

 

경상우도의 수군은 나름 지휘권과 신호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운명이 장군에게 달렸소'

'칠천포에서 전사하는 쉬운 길을 두고 나라의 존망과 서벌 대학살이 염려되어 퇴각명령을 내린 것을 잊지마시오'

 

 

귀향 송별식 9월 2일

이순신에게 병치료를 허락 받은 배설장군은 비단 도포를 입고 평소 하지 않든 목도리를 휘날리며, 부관 한명과 수행비서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힌 후에 제장과 9명의 부관들에게 모주 술을 한잔 씩 따라 주고 '월파검'을 차고 단기필마에 올라 귀향길에 오른다.

 

9월 2일 배설장군은 일본군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 진영 적장의 막사를 향해 꺼리낌없이 돌파한다. 적장의 막사에 이르기까지 왜군은 아무도 제지할 엄두를 못낸다. 워낙 당당해서 앞길을 막으면 언제라도 단칼에 '월파검'에 베일 듯한 태도는 장비가 '청룡은월도'를 치켜들고 나아가는 모습에 비해 부족 함이 없는 당당함에 넉을 읽고 왜군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길을 비켜나게 된다.

 

시마즈 요시히로 왜장과 아들은 이런 배설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른다.

이윽고 적장 막사 앞에서 부관을 두고 배설의 말은 큰소리로 울면서 그 대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먼지를 읽으키며 통과해서 사라진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는 넉을 읽고 순간적인 상황에 당황하다 요시히로 부자는 서로 '요시히로 내목이 붙어 있는가?'부관을 추포하여 영문을 물어본 후 '배설장군 귀향 ~정말 훌륭하다' 감명을 받은 요시히로는 감사의 뜻으로 부관들을 풀어 고이 보낸다. 

그리고 철군요청서를 풍신수길에게 뛰우게 된다.

 

 

선산 배골에 도착한 배설장군은 앞 마당의 큰 배나무 아래에서 경삼감사의 영접을 받았는데 감사가 난중에 '장군 어인일이요'하고 묻자 배설장군이 말한다. "전쟁은 끝났소"

조선이 전쟁에서 이겼소, 이제 곧 왜군들은 철군하게 될 것이요,

경삼감사의 시국걱정 앞에 장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전쟁은 끝났소,  종전 절차만 남았소,

그러니 군인이 할일이 무었이 있겠소?

'귀향해서 병치료나 하여 조정(동인들)에 목을 진상 하여야 해야 겠소,' 

 '병든 목을 나라에 바칠 수 없어 귀향해서 치료하여 조정에 바치려하오,'

 

장군의 말을 들은 경상감사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무말도 못하고 경상감사는 고개만 끄덕였다.(군문을 휴가차 나오자 마자 탈영보고됨을 알고 있었음)

밤은 깊어 달도 어두운데,  오랜 고목의 배나무 아래 백마의 모습만 햐얕게 보이고 스산히 낙엽만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말이 필요할까?

선 산 땅 고향으로 선비 배설은 무거운 대장군을 이렇게 내려 놓고 훌훌 날아갈 듯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백마의 방울소리와 찌르르기 소리가  간혹 가을이 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전쟁은  1598년 끝났다. 풍신수길은 지치고 병들어 병사한다.

 이로서 조선의 백성들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은 백성들이 승리 했으나 조정에는 전공 다툼으로 혼란했다. 배설장군의 군공을 인정하면 진주성 대첩과 명량대첩 노량해전까지 동인들의 전공은 여지  없이 무너져야만했다.  동인들과 사관들은 배설의 공을 하나의 붓으로 깍고 또 깍은 후에 역모 모반죄로 추포 하기에 이르른다. 아해의 '난종일기'에 대장군이 탈영을 했다는 기록 때문이였다.

 

이윽고 '난종일기' 에 배설이 도주 했다는 내용을 문제삼아 동인조정의 중신들은 역모 모반죄로 참수 하기로 한다. 이에 추포되어 장군은...

 

6,역모모반 누명으로 참수

선조 실록은 1599년(선조 32) 3월 6일 공이 처형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군은 향년 49세를 일기로 ‘도망과 모반’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되기에 이른다 참수된다. 낙하산을 즐겨 타는 동인들은 전쟁은 할 줄 몰랐으나,  전공을 차지하는데는 선수중에 선수 였다. 그들이 전쟁을 유발했기에 더욱 그랬다.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에 영향받아 구국에 일념으로 최선을 다한 배설장군은 1599년 3월 6일  강원도 오죽헌이 있는 이율곡사당을 향해 삼배를 올린후 참수대에 올라 참수 된다. 아들과 아버지가 이를 지켜 보고 일가친척들이 지켜보지만 역모죄라 3족이 멸하는 중죄라서 아무도 시신을 수습치 못하였다. 

 

7,경상관찰사 장례

 

경상감사 한준겸이 시신을 거두어 사대부의 의례로 장례를 지내준다.

비록 동인들에게 역모 모반죄로 참수되지만 경상감사의 영으로 대장군의 예로 영면 한 것이다.

 

놀란 조정은 경상감사 한준겸을 탄핵하고 파직을 강행한다.

 

패장 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양가(兩家)의 좋은 인연이 만복의 근원이다>(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석양의 문밖의 길은 동서로 나누어 있지만, 양가의 좋은 인연으로 혼인으로 이어지고 자손 대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만복의 근원이라는 혼례의 중요성을 도덕 율로 표현한 간결한 글귀이다.

장군은 칠천포 해전의 패장으로서 이 두편의 시만 남기고 일체의 시문을 남기지 않아 21편의 젊은시절 유문이 전해지고 있다.

 

 

 

 

배즙(1560~1599)꽃다운 39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장군은 부친 서암(書巖公) 배덕문(裵德文,贈吏曹判書)선생의 장남으로 태어 나셨다. 자는 중한(仲閑), 호는 신재愼齋), 신와(愼窩), 서강(西岡)이며 성산 배씨(星山裵氏) 진사 공파의 17세(世)이다.

 

 

 

 

 

미국이 강대국은 우연이아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로스알데 힐이라는 작은 마을에 요한이라는 집배원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마을 부근의 약 50마일의 거리를 매일 오가며 우편물을 배달해왔다.

 

어느 날 요한은 마을로 이어진 거리에서 모래먼지가 뿌옇게 이는 것을 바라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이 길을 오갔는데, 앞으로도 나는 계속 이 아름답지 않은 황폐한 거리를 오가며

남은 인생을 보내겠구나'

 

 

요한은 정해진 길을 왔다갔다 하다가 그대로 인생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황막감을 느낀것이다.

풀,꽃한송이 피어 있지 않은 황폐한 거리를 걸으며 요한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그러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그것이 매일 반복된다고 해서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그래, 아름다운 마음으로 내 일을 하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게 만들면 되지 않은가!"

 

 

그는 다음날 부터 주머니에 들꽃 씨앗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우편배달을 하는 짬짬이 그 꽃씨들을 거리에 뿌렸다.

그 일은 그가 50여마일의 거리를 오가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요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우편물을 배달하게 되었다.

그가 걸어다니는 길 양쪽에는 노랑, 빨강, 초록의 꽃들이 다투어 피어났고 그 꽃들은 지지 않았다.

 

해마다 이른 봄에는 봄꽃들이 활짝 피어났고 여름에는 여름에 피는 꽃들이, 가을이면 가을 꽃들이 쉬지 않고 피어났던 것이다.

 

그 꽃들을 바라보면 요한은 더 이상 자기의 인생이 황막하다고 여기지 않게되었다.

50여 마일의 거리에 이어진 울긋불긋한 꽃길에서 휘파람을 불며 우편배달을 하는 그의 뒷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이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