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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을 패배로 주장한 조정

自公有花 2014. 9. 12. 20:28

칠천량해전 다대포(웅천) 1597.7.8~11사이에 수차 적선 600여척과 피아간 부산 일대에서 교전이 있었고, 양측이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본은 부산일대의 거의 모든 전함들이 결집 조선 수군을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부산해전 6.19 안골포 가덕도 전투포함)

 

 

 

 

 

 

 

 

 

 

원균의 투입된 병선이 약 200척으로 판옥선 척당 승선인원이 60명 정도 총병력 1만여명, 배설의 전함 판옥선 40여척과 장작귀선 12척 약 5.000명, 전라좌수사 이억기 약60여척 5천병력,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 승선인원이 200명, 판옥선은 60명 정원으로 왜선 5척이 사면을 둘러싸고 200명이 기어 오르면 손을 쓸 수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군은 뒷통수에 칼을 맞아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균은 육지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장작귀선을 선두로 하는 배설이 선봉에 설 수밖에 없음, 일본의 세키부네와 아케다를 제앞 하기위함임,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조선수군들은 여러차례 전투를 하면서 손실이 있었고,  추격에 쫒긴 조선함대가 15일 밤 9시경 칠천량해안에  도착했으나, 병졸들은 녹다운으로  지쳐 있었고,  원균은 밤늦게 휘하 제장들을 소집 작전회의를 열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함쳤다

 

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자 이억기 최완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안았다

이억기 최완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우린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했다.

 

 

 

 

 

 

이미 이때 왜군은 수일간의 추격에 약 1.000여 척의 부산 일대 거의 모든  왜군들이 서서히 칠천량을 수겹으로 에워 싸고 몰려들고 있었다. 이날은 짙은 안개와 이슬비로 가시거리가 짧았다.

 

 

 

 

 

 

 

 밤 늦게 왜선 5척이 손살 같이 조선군 영내를 휘젖고 다니면서 조선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손살 같이 쏘다녀도 조선 수군은 닺을 내렸기에 손을 쓸 수 없었고,  병졸들은 지쳐 잠들어 깨지 못해 4척이 전소 되었다. 이것은 부근으로 몰려 오는 왜군들에게 일종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 였었든 것이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병사들은 밤새 화재와 적선의 출몰로 고단해진 새벽녁이 동틀 무렵 신호탄 세발이 울리자 일제히 근접한 1.000여척의 함선들이 삼중의 포위망으로 밀고 들어와서 조선 전함 한척에 왜선 5~6척이 둘러싸고 돛을 눕혀 일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해로가 막혀 포위 된 상황에서 원균이 배를 버리고 춘원포로 육지 상륙을 명령했다. 배설은 원균의 명령을 거부하고 포위망(약 30여척 3.000명 병력 전사)을 뚫어라는 명령을 내린후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이억기와 최호가 전사하자 후퇴 명령을 내려서  서쪽과 반대쪽 동쪽으로 두방향으로 퇴각하게 된다.((실제는 견내량 7척과  5척 대열=탄환이 고갈됨)

 

 

 

 

 

 

원균은 권율의 군대가 육상에서 호응할 것으로 믿고 춘원포로 상륙하였으나 권율의 군대가 아니라 왜군들의 매복군에 당했습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090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선조실록))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대신들: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유성룡(영의정) : 감히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다.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서너겹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남은 장수는 아순신 뿐)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이순신복권 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배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배설이 옳았다는 심증)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조센 끝났다)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순신은 아니다)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명나라 안오니 선조 넌 개털됐다 빨랑 순신임명해라).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선조 : 근자에 모병에 있어 사졸(병력) 지원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민심 이반이 심함)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이 오직 이순신의 복직에만 매달려 대책 자체가 없으며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퇴각했음도 철처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직접 충청 전라에 한척의 전함도 없느냐고 물음에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조는 배설이 도주했다고 보고함에도 배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조우했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배설의 7일간의 청야작전과 남해안 일대 백성들 소개령을 철처히 비밀로 한 권율과 이순신은 첮 장계에서 배설이 전쟁 공포증이 있고 도주중이라고 선조를 기망하는 장계를 올려 권율과 이항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권 시켜 달라고 하고 있다.)

1. (경상우도수사 배설이 도주중에 있어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약 2.000명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전함을 수리함을 얼추 보이는 식으로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배설의 전함이 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 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그러나 선조는 배설을 면직시키지 않고 전쟁 끝날때 까지 중용합니다.

 

 

4, 거북선 12척을 배설이 였바꿔 먹으려했다?

 군대를 접수하기 위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1597.7.23)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3도 수군절도사로 임명을 8월 3일 허락하면서 품계를 한계급 강등해서 경상우도수사 배설과 동급으로 임명하는 묘수를 부립니다. 이에 이순신(권율)은 후일 선조를 속인 것이 발각 될 것을 우려해서 배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라 보입니다.

 

 

5, 배설의 귀향과 탈영보고서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배설의 병가를 허가하고  9월 2일 탈영보고를 합니다.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도사 이순신은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못하게 탈영보고를 합니다.(당시 탈영은 귀대시 군율로 참형당함)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 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조선군이 전사하고 남은 빈배)

 

이순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晋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권율은 매일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배설의 12척의 경상우도병선이 아니라 각기 도주 한것으로 보고함)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살아 남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통제사로 하겠는데 아무도 없으니 이순신을 임명해 달라는 허위보고 배설이 도망한 것은 맞으나 아직은 행방을 모른다고)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권율은 사실은 이순신의 복권을 원하면서 아무나 살아남은자가 있다면  임명하자고 독촉하고 있다.)

 

난중일기 기록 //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사실 선조는 부득히 이순신의 품계를 강등하여 임명하므로 배설과 동급이 됨에도 자신이 상관인 것처럼 비서실장 유성룡의 빽을 믿고 있음)

 

 8월12일/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군사학적으로 8,19쿠데타성공,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뒷빡치기에 걸려 들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권율에게 탈영보고= 전시 탈영은 군율에 의거 참형임)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이순신은)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배설을 데릴러 가려다 그냥 왔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1, 이순신은 천운의 정치군인

럭비공 풋볼 튀듯이 백의종군 대죄인이 수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나라걱정이든 배설은 8월 3일 원수부가 보낸 사령장을 무시하고 숙배를 거부한다. 군권을 넘길 수 없다. 이순신은 혀를 내두러면서 아무말도 못한다. 왜냐면 이순신이 지휘하든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함선은 모두 전멸했고 배설의 전함수리에도 한푼도 보태 준게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의 잔병을  배설경상우도수군에 합류하라고 지시하자,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렸다. 이와 같이 12척의 전함이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배설이 도주하여 노량에 이르렀다는 암시를 하고 있음, (8.9)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되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이 임란 당시에는 일등공신으로 똑 같았다가 후일 일본의 정한론이 등장하면서 이순신은 성웅이 됩니다.

 

배설(裵楔)장군은 웅천 전투에서 왜선 600척을 쳐부순 경험이 있었기에, 선조임금의 차출로 원균 부대의 최고 선봉에 투입된 장수 였으나, 왜군들이 장거리 항로를 따라 부산항에 상륙하기 전에(수심이 깊은 곳) 격멸해야 한다는 작전을 주장했으나 조정(원수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이 그땐 3도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군들이 부산상륙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도 이순신은 선조가 북쪽으로 토끼든 말든 한산도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왜군 14만이 출병하는 것을 지켜만 볼것 같은 상황이고 원균이하 많은 장수들이 걱정하게 되고 드디어 왜군이 부산항에 상륙해버립니다.

 

부랴 부랴 이순신에게 속은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으로 대체 합니다. 원균은 배설에게 선봉을 맞기지요, 배설(裵楔)이 웅천전투에서 몆차례 선봉장으로 전투를 해보았고, 해적으로 양성된 왜군의 근접전에 패배합니다. 따라서 이건 아니다. 왜군을 유인해서 심해에서 함포로 작살 내자고 주장하지만, 권율이 이순신이 파직된데 앙심을 품고 원균을 다그칩니다.

 

원균은 권율에게 그러면 부산에 있는 적군을 육지에서 공격을 해주라 그러면 바다에서 협공을 하자고 요청합니다. 원균은 3월 29일 장계에 30만 대군을 동원 안골포 가덕도 등에 진주한 왜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권율에게 육군이 먼저 진군 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1만병으로 불가했음)

 

이에 권율이 니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했으니 1만 병력으로 바다에서 적군을 무찔러라고 독촉합니다. 이건 뭐 죽으라는 명령이 였지요, 이순신을 체포해가고 그의 분신이랄 할만한 이억기를 투입해서 3도 연합수군을 조직한 원균이 고민하면서 부산에 있는 14만 왜군을 치기위해 가덕도에서 출발해서 칠천량에 진을 칩니다.

 

 

 

 

 

 

 

 

 

동서 화합을 강조한 배설장군

 

패장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동서 화합만이 나라의 부흥의 근원이다>

동서 양가(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국가에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패장으로서 한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이다.

 

 

강강술래,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월파정月波亭

 

 

곤장을 쳤다” (계사년 6월 18일)난중일기

 

이순신은 엄격한 상사였다. 병선을 수리하지 않은 군관들을 잡아다 곤장을 쳤다.

 

이웃집 개에게 피해를 끼친 토병도 곤장을 쳤다.

 

술병을 훔치다 붙잡힌 종도 곤장을 쳤다.

 

심지어 그 앞에서 “오만을 떨다가” 곤장 70대를 맞은 수군도 있었다.

 

전시에 기강을 잡기 위해서는 지엄한 군율이 필요했다.

 

도망갔다 잡혀 온 군사들이나 여러 차례 양식을 훔친 자, 소를 훔쳐가면서 왜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자들은 가차 없이 목을 베어 효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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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구타로 죽어가는 병사들로 난리인데요

이순신장군님은 백성들도 가차없이 목을 쳐버리므로 주민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답니다.

 

당시는 아버지가 이순신 장군에게 효수되면 그 가족들이 굉장히 감사하고 고맙다고 했나 봅니다.(먹을게 없어 겠죠)

 

이순신장군은 엄격하고 무지 군기가 세어 전라좌수영은 이름 그대로 귀신소굴이라 불리웠다는 이항복 병조판서의 기록이있어요

 

이순신장군이 파직되자 이억기가 전라좌수영에 오르고 원균이 3도 수군 통제사가 되어 칠천량해전에 약 60여 척의 전함과 약5000명의 전라좌수영 병사가 출전해서 7월 16일 제대로 전투도 못하고 전멸합니다. 군기 세다고 이기는 게 아닙니다.

 

요즈음 전방에 군기잡는다고 임병장탈영사건 윤일병구타 사망사건 경기도지사 아들연루 군폭행사건 이순신 장군처럼 엄격한 군율 세우겠다는 것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휘관 명령에 무조건 복종이 전멸을 불러 왔어요

배설장군은 무지 느슨한 군기임에도 전쟁마지막까지 군인들이 용감히 싸웁니다.

 

일본 종군화에 보면 조선 배설경상우도 수군들 얼굴이 밝고 용맹합니다 왜군들이 후덜덜 떱니다. 군대서 아이들 잡는다고 이기는 군대 절대 아닙니다. 세상이 바꿔었어요 구타없는 군대가 되어 막강 군인이 되길 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