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로 간 아이들...비운의 배설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항을 재침했습니다. 이어 제 2진 고니시 유키나가 웅천으로 상륙했습니다. 이후 일본군들이 부산항을 기반으로 우후 죽순으로 들어 옵니다 8월 20일 (음 7월8일) 일본의 후속 군병들이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 임진란 때 경상도에 진주하고 있든 2만 병력에 더해 14만 병력이 이미 상륙을 마친 상태입니다.
동인들은 조선 왕조가 망해도 (왜정이 들어도 그 밑에 기생) 세력을 이루고 있었기에 적극적인 전쟁을 회피하고 수세적 관망에 주력했으며 특히 동인(남인)들 중에는 고니시군과는 상당한 우호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김성일이 일본을 둘러보고 전쟁이 없다고 허위보고 한 것도 일본 서군들의 영향에 근거 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 김성일의 장계, 원균은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오자 싸워보지도 않고 전함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원균을 모함합니다.
원균은 1597년 1월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의 삼도수군 통제사 아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왜군의 부산 상륙후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바통을 받아 가장먼저 배설을 차출합니다.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되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이 임란 당시에는 일등공신으로 똑 같았다가 후일 일본의 정한론이 등장하면서 이순신은 성웅이 됩니다.
배설(裵楔)장군은 웅천 전투에서 왜선 600척을 쳐부순 경험이 있었기에, 선조임금의 차출로 원균 부대의 최고 선봉에 투입된 장수 였으나, 왜군들이 장거리 항로를 따라 부산항에 상륙하기 전에(수심이 깊은 곳) 격멸해야 한다는 작전을 주장했으나 조정(원수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이 그땐 3도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군들이 부산상륙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도 이순신은 선조가 북쪽으로 토끼든 말든 한산도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왜군 14만이 출병하는 것을 지켜만 볼것 같은 상황이고 원균이하 많은 장수들이 걱정하게 되고 드디어 왜군이 부산항에 상륙해버립니다.
부랴 부랴 이순신에게 속은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으로 대체 합니다. 원균은 배설에게 선봉을 맞기지요, 배설(裵楔)이 웅천전투에서 몆차례 선봉장으로 전투를 해보았고, 해적으로 양성된 왜군의 근접전에 패배합니다. 따라서 이건 아니다. 왜군을 유인해서 심해에서 함포로 작살 내자고 주장하지만, 권율이 이순신이 파직된데 앙심을 품고 원균을 다그칩니다.
원균은 권율에게 그러면 부산에 있는 적군을 육지에서 공격을 해주라 그러면 바다에서 협공을 하자고 요청합니다. 원균은 3월 29일 장계에 30만 대군을 동원 안골포 가덕도 등에 진주한 왜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권율에게 육군이 먼저 진군 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1만병으로 불가했음)
이에 권율이 니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했으니 1만 병력으로 바다에서 적군을 무찔러라고 독촉합니다. 이건 뭐 죽으라는 명령이 였지요, 이순신을 체포해가고 그의 분신이랄 할만한 이억기를 투입해서 3도 연합수군을 조직한 원균이 고민하면서 부산에 있는 14만 왜군을 치기위해 가덕도에서 출발해서 칠천량에 진을 칩니다.
부산에 진주한 왜군들이 원균의 움직임을 세세히 알고 있었고, 당쟁으로 왜군들에게 원균의 움직임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나라보다 당파와 자기 식구 감싸기가 중요했나 봅니다.
칠천량해전 朝鮮漆川梁海戰 1597년 8월 16일 (음 7월 4일)
칠천도(七川島)는 경상남도 거제시의 섬으로 동경 128°39', 북위 34°59'에 위치하며, 면적은 9.219㎢, 해안선의 길이 25㎞이다.
2000년 1월 1일에는 거제도와 칠천도 연륙교로 연결되었다.멀리서 보면 한개의 섬이 7.000개로 보인다고 칠천도라 하고
거제시에 딸린 60여개의 섬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
부산인근에서 바람과 파도가 세찬데도 권율의 득달에 못이긴 원균은 1만여(전함 200척) 3도 수군 연합함대를 이끌고 9일 12척이 표류 부서지고, 가덕도에서 물을 구하려다 적의 기습을 받아 400명의 군졸을 손실하죠
배설이 선봉으로 나서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습니다.)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습니다.
이 때 해전이 왜군 종군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조선전역해역전도 이라는데 이순신의 명량 해전이라고 속이는게 한국역사입니다. 또 왜군의 피해는 막심했는대도 배설만이 군사를 읽은 걱처럼 보고 됩니다.
부산진포구의 갑자기 풍랑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간신히 가덕도로 돌아왔는데, 일본 병선 500여 척의 추적을 받고 거제도로 항해하다 밤에 보급품을 구하려고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여 약 400명을 잃고, 배를 타고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권율이 기획한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090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선조대왕과 신하들의 대책,
선조: 아니 척후병도 없었단 말인가? 장거리 운항으로 척후병도 없었다고 합니다.
선조는 하늘이 내린 재앙이니 어쩌 겠는가?
풍신수길이 바다를 제패해야 한다고 하더니 이를 어쩌나......
충청이나 전라도에
남은 배가 한 두척이라도 없는가?
신하들: 없는 걸로 압니다.
그래 "누가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도 장수가 없는가?
이항복 병조판서에게, 그래도 살아남은 병력이 있는가 묻자 이항복 바다가 좁은 곳이라 살아 남은 병사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하면서 해도를 보여준다. 선조가 해도를 보면서 견내량 고성쪽으로 퇴각한 병사들이 매복군에게 당했단 말이지,
왜 경들은 아무 대책도 없는가?
신들은 아무 대책도 없어서 민망해서(동인들 이순신을 기용하소서 마음속으로 했겠죠)
이항복 병조판서: 넓은 바다라면 혹 살아 남을 수도 있는데 좁은 바다라 거의 매몰되고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유성룡이 알뢴다, 한산이 요충지 인데 필시 왜적에게 넘어 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해와 호남이 위험함을 아뢴다.
선조도 독촉한다 장수가 없단 말인가? 한산도를 .... 적에 손에 넘어 가면 안되는데,,,적군에 손에 넘어가기전에,,윤두수 외 거의 모든 중신들이 아무 말도 못한다.
선조는 말한다, 견내량을 통해 한산도 수군본영으로 퇴각할 생각은 왜 못하나
한척의 병선 없이 당했다니 ㅡ
사실 실제 전황 상황 -(속보 )
선조가 한산도로 퇴각하여 수군본영을 수습할 장수가 없느냐고 묻고 있을때
배설은 6척씩 대열을 유지 한채 동로로 서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왜적함대 포위망을 뚫고 퇴각에 성공하고 견내량을 통과하여 한산도 수군 본영에 도착했습니다.
왜군들의 추격을 염려한 배설은 무기와 탄약을 모두 충진하고 한산도 주민들을 긴급히 육지로 대피시킨다. 그리고 수군본영과 무기고등의 시설을 소각하고 남해로 퇴각(동인들은 도주라함)
그후 얼마 안되어 왜군들이 난입하여 미처 대피하지 못한 한산도 주민들의 대학살이 시행되었다.백성들 살육은 보통이고~
선조임금이 그토록 한산도를 걱정할 때 배설은 선조임금이 조정에서 걱정하든 그 시간에 한산도 소개령을 내리고 무기를 회수하는 '청야작전'을 감했했습니다.
조정에서 임금스스로 수군이 한산도로 퇴각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하고 울부짖을 당시 배설은 이미 선조임금이 시키지 않아도 그런 역할을 하고 남해로 퇴각하고 있었습니다.
왜군들은 주민들을 악랄하게 입에 담을 수 없도록 남녀 노소 모두 학살 했습니다.(풍신수길이 점령지 주민을 모두 죽이고 일본 서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도록하라고 명했음)준비되지 않았든 조선 수군은 190척의 전함이 격침되고 불타고 수군 1만여명이 전멸하였습니다.
배설의 약 2.400여명의 정병이 퇴각하여 청야 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조선 조정에서 누구도 바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그토록 원하든 국가 걱정을 하는데도 누구도 사실을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탄환을 보내달라는 전보를 올리고,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장장 초인적인 약 430km의 작전이 펼쳐지고 전투준비를 하는데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차출되어 서인인 원균의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왕에게 보고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순신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조정에 보고함)대형 전함이 장난감입니까? (요즘 당쟁과 비슷합니다.)
왕을 둘러산 조정에서 배설이 단신 도주하여 수군을 수습하는 것으로 보고하고, 동인조정은 전공을 동인들이 독차지 하기 위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할 뿐 국난을 수습하려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고니시와 연통 원균을 패망시키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음)
백성들은 왜군에 살육되고, 명군에 치여죽고, 전쟁이란 군기 잡기에 목이 효수되고, 오직 권력을 잡아 역사까지 왜곡하여서라도 권력을 잡고자하는 시대였습니다.
세월호참사 대처가 7시간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국회에서 난리죠, 칠천량 패전은 고의로 선조에게 10일간 보고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고, 역사 왜곡인 선조 실록 자체가 수정에 수정됩니다.
동인들(남인)과 군 지휘부는 이순신을 남해의 회령포(노량)로 보내 배설의 군대를 인수 한 후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칠천량이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협에 남쪽으로 약 200여 선단이 진을 치니 만일 왜군의 기습이 있게 되면 위험한 곳이 였습니다.
배설이 이런 위험성을 예견하고 심해로 나가자고 주장하지만, 사실 원균이하 장수들이 14만 왜군 본거지를 치러 가고 싶지도 않았겠죠, 그러니 설마 하면서 하루 종일 노를 저어 지친 상태로 그냥 진을 칩니다. 왜군들과 내통하든 첩보 받은 왜군들이 야밤에 근접해서(먼저 화전으로 4척에 불이 붙고 신호탄이 세발 발사) 새벽녁에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하였습니다.
칠천량이 포위 되어 동서쪽 바다가 막히고 남북은 육지이라 피할 곳이 없는 다급한 원균은 3도 수군에게 견내량을 거쳐 춘원포 방면(통영)으로 고성쪽으로 후퇴하면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퇴각할 것을 명령"하고 육지로 내립니다. 여기에서 배설은 육지로 상륙을 거부하고 견내량쪽의 왜군들 3중 포위망과 교전하여 포위망을 뚫고 동로로 6척이 서로로 6척이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한산도 수군 본영으로 돌아 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배설(裵楔)군대가 '청야작전'을 하고 왜군들의 서남해 진군을 막기위해 회령포 노량포로 작전을 수행하는 모든 동태가 원수부에 보고되고 감시되고 있음에도 일부러 무시해버리고 조정에는 보고조차 안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원수부가 고의로 군수 지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 2.400명의 정규군이 군수 지원없이 기아 상태에서 약 201km (작전거리 약 430km)를 왜군을 저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밤에는 항해하고 낮에는 전함수리와 주민 소개령을 합니다. 그것도 노를 저어서 말이죠 콜럼부스가 이래 할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강강술래로 왜군들을 망봐주고 이게 백성들 군대이지 조정의 군대가 아닙니다. 거의 사병수준이라고 해야 겠죠
당시 군제는 전시라 사령관들을 감시하는 비변사가 있어 야전군 사령관들을 일일이 감시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원균이 장악한 원수부에 일선 사령관들의 일일 행동과 전과가 수집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균을 매일 닥달하고 곤장도 칩니다. 도원수가 자신은 전쟁에 나서지 않고 원균보고 나가 죽으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권율의 행주산성 전승보고자체가 믿기 어렵습니다)
경상우도수군의 12척의 장작귀선으로 이순신이 왜군의 서남해 진출을 막은 것을 보면 당시 선조와 윤도수가 지지한 원균의 작전이 가능한 것이였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3도 수군연합 함대가 약 200척 이였고 이정도의 전함과 병사로 충분히 14만 왜군의 부산 상륙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 재미있는 이야기 입니다. 이순신과 김성일 유성룡 권율 이원익이 지지하든 일본의 서군 고니시 말입니다. 이 쪽 병력 10만이 일본에서 몰살 당합니다. 조선에선 동인과 남인들이 서인들 탄압을 가혹하게 하듯이 ,,,
배설은 서인도 아니고 단지 이율곡을 흠모하여 십만 양별설에 영향받아 전쟁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그간의 능력으로 선조에게 발탁되어 원균의 오른 팔이 된 죄 였겠지요?
권율이 배설의 함대를 집어 먹고자 이순신을 파견하고 8월 3일 까지 이순신 임명장이 오지 않은 것만 봐도 선조는 이순신의 기용에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권율과 이원익 등이 배설의 보고를 묵살 은폐하고 이순신을 임명하자고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해서 임명된 것입니다. 이순신이 뛰어나서 임명되었다고 어디에 있습니까?
경상우도 수사 배설이 전란 끝날 때까지 유지 된 것으로 보아 허위 보고 앞에서도 선조는 배설의 능력은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풍신 수길이 1598년 사망하자 일본은 두개로 갈라집니다. (세키가하라전투)
[일본의 서군]이시다 지부쇼유 미쓰나리(임진왜란 때 군감으로 참전)'도요토미 가 수호'를 명분으로 전국에서 영주들을 끌어 모아 총 90명에 달하는 제장들이 가담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전원참수 당합니다.
고니시 셋쓰노카미 유키나가 천주교도로 유명함. 무역 상의 이유로 조선 출병을 반대했고, 조선의 지리를 잘 알아서 제1군의 선봉장이 됨.귀국 후 미쓰나리 파에 붙지만, 서쪽에 종군하고 있을 때 본국의 거성이 가토 기요마사에게 함락당하고 패하여 참수 당합니다.
시마즈 효고노카미 요시히로 (임진왜란 때 4군)사천 전투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여 조선과 명나라군들의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 후 시마즈 가문은 '서부 일본 제일'이라는 평을 얻고 세키가하라 전투 전에는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거절당해서 서군에 붙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1.500명의 군사로 동군의 진을 정면 돌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배설장군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구키 오스미노카미 요시타카( 해적 출신의 다이묘)임진왜란 전부터 '철이 붙은 배'를 사용하여 수군으로 활약, 해전에 능했습니다. 귀국해서는 '이나바 미치토'라는 영주와 다툼이 생겨 이에야스에게 소송을 냈으나 이에야스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세키가하라 전에서 서군에 붙습니다.
우키타 비젠주나곤 히데이에 (히데요시의 충직한 신하이자 미쓰나리의 동지) 임진왜란 때도 활약하지만 권율 장군에게는 패한 적이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약, 본전에서 17.000의 대군으로 서군의 주력이 되지만 와키자카 등의 배신으로 패하여 하치조지마로 유배 당합니다.
[일본의 동군] 도쿠가와 나이다이진 이에야스 히데요시가 편성한 16군(조선출병 예비군) 중 일본에 남았던 영주로 조선 출병을 은근히 반대하고 시마즈 요시히로등의 영향을 받아 끝내 조선출병을 하지 않았고, 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 미쓰나리가 서쪽 오사카에서 영주를 끌어 모으자 군사를 4방면으로 나누어 회군한 뒤 서군을 격파, 에도 막부를 열어 일본과 조선간에는 수백년간의 평화가 찾아 오게 됩니다.
배설장군에게 하마터면 수장될 뻔한 가토 기요마시와 배설장군에게 목이 달아 날 뻔한 시마즈 요시하라가 풍신수길에게 철군여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출병 제16 군 보충대에 철군요청을 보냅니다 (부산 상륙전에 수장될 것이라는 배설장군 이야기가 붙여지죠) 이에야스가 적극 조선 출병을 거부하여 풍신수길의 수하 밌나리와 일본내전이 발발하고 배설장군을 흠모하든 철군파 군대들이 승리 했습니다.
정유재란 때도 유성룡은 허위보고로 1만명의 조선 병사들을 적군의 총알받이로 수장시켰습니다. 전투다운 전투로 싸우다 전사가 아니라 일방 전멸하도록 허위보고와 임금을 기망했지요
오늘날 세월호 희생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도 되지 않고 있었다고 하고 7시간 보고 여부로 세간에 말이 많은데요
칠천량해전패전후 진도 앞 바다로 장장200키로를 작전한 배설이 였바꿔먹으려고 함대를 숨겼다고 하고 7일간 보고를 은폐한 후 이순신은 배설이 숨겨둔 장작귀선 12척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
7시간 보고가 안된 것은 약과죠 해병대 사령관인 배설군대가 비서실장하고 참모총장격인 권율장군이 보고를 은폐했는데 장장 7일간입니다. 국회에서 특별법으로 조사도 않하고 이순신과 유성룡 권율의 말만 듣고 선조는 속았든 것입니다.
남해안 부산 일대는 격전지 입니다. 당시는 최 전방이였죠 전함을 숨길 곳이 어디 있으며 구해 숨겨서 뭐핮니까,
세월호 선장처럼 배를 버리고 도주하면 되는데요 오직 나라를 위해 장장 430킬로를 항해한 배설장군을 120명서 전함12척을 이동시켰다니요 배설이 코럼부스입니까, 당시에 거북선이 디젤엔진이 탑재되았든가요 9월2일 배설이 하선하고 16일 명량해전인데요 포병이 급조될 수 있느냐구요,
더구나 5년간 왜군을 피해다니든 이순신이 2주만에 명량작전에 성공한 것은 난중일기에도 신선이 꿈에 계시 했다고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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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꽃다운 35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배 즙(裵 楫) 1564년(명종19)에 태어남.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장군은 부친 서암(書巖公) 배덕문(裵德文,贈吏曹判書)선생이다. 성산 배씨(星山裵氏) 진사 공파의 17세(世)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공의 선대는 신라의 금산가리부장 지타(祗沱)공을 득시조(得始祖)라고 하고, 고려 개국 공신 무열공(武烈公) 현경 (玄慶)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고려 3중 벽상공신 휘 위준(位俊)을 1세 시조로 기세(起世)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8백여 성상 30여 세대를 계대승손(繼代承孫)하고 있다. 5세인 흥안(興安) 부원군(仁慶)을 역임한 인경(仁慶)을 성산(星山) 배씨 득관조(得貫祖)로 모시고 있다.
현손 중 8세 진손(晋孫)은 공조판서이며, 그의 삼남 현(俔)은 진사공파 파조(派祖)이시다. 11세 치(絺)는 수군총병마사이고 청백리로 저명하였으며, 이 분의 아들 (萬戶) 윤후(允厚)는 장군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장군의 증조 맹성(孟成)은 부위(副尉)이시며, 조부 주(綢)는 참봉이시고, 부친은 의병장인 서암(書巖) 배덕문(裵德文)선생 이시다. 공의 부친 서암 공은 한성 서윤(漢城庶尹)을 거쳐 여러 고을의 수장을 두루 거치고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시다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공적을 세워 선무원종 이등 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1, 거북선과 백병전
칠천포 해전에서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은 배설장군을 도와 조방장으로 활약하다 칠천포해전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배설함대는 왜군적선들과 근접 또는 왜군들이 배설의 함대위로 기어 올라 왔고 조방장 배즙은 이들과 백병전으로 전사했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이 그림에 경상우도 수군이란 깃발이 국내에 전재 되면서 이순신의 깃발로"李" 로 조작 유통되고 있음(분명히 경상 우도수군깃발)
배즙 장군의 지휘 모습이 그려진 칠천량해전의 종군화
배즙 장군과 조선 경상 우도수군의 전사하고 남은 전멸전사 한 후 빈 배와 무기들의 모습(치열한 전투임을 보여줌)
조선 수군들이 일본 선단에 전혀 뒤지지 않는 전투 장면이고 왜군들 표정이 바짝 얼어 붙어 있음에도 조선수군들 기세가 대단함
이순신의 영화에 전투장면으로 고증되고 있으나 사실은 2007년 플래툰지에 경상우도 수군의 전투장면으로 확인되었음
왜군들은 중요 전투에만 종군화를 남겼다. 그러므로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의 그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내 동인들의 훈포장 전사로 추정된다.
배설의 함대 규모는 12척당 수군 200명 정도로 2.400여 명으로 추산 되고 배즙을 포함 전사자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설함대는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조총탄환이 비오듯이 온다 해도 전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명 거북선이란 소릴 듣는다. 갑판이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화전에 취약하고 근접전에 취약했다.
이순신 보고서에도 노량포구에서 보니 전함수리를 하는데 척당 90명 정도로 보인다고 했으므로 오견상 보이는 병력도 1.000명이 넘고 나머지 병력은 선상수리를 한 것으로 보아 배설의 병력은 2.000여 명으로 봄이 타당하다.(전공을 축소하려든 도인조정기록)
이순신보고서에 눈에 보이는 병력이라고 한점이고 대체로 항구에 정박하여 수리하고 있는 배에 승선 병력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순신 미화를 위해 배설의 잔병이 120명이라는 교과서 내용은 말도 안됀다.전함은 시스템으로 가동되므로 장장 201키로를 120명이 운항했다면 배설은 남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보다 유능한 세계적인 선장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순신이 대역죄인 백의종군하든 (1597년7월 23일자 보고서) 1060명 가량의 병력이라했음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칠천포해전에서 한산도 청야작전까지 감안하면 배설함대는 장당 430km를 운행한 것이 되는데 디젤엔진이 있는 페리호도 아닌데 척당10명서 노를 저어 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싸웠으나 왜군 수적인 우세로 전멸가까운
패전을 했다. 그러나 왜군 입장에서 보면 전왜군이 삼중포위망이 뚫렸다는 사실과 배설함대 경상우도 함대가 유유히 퇴각했으므로 승리치곤 꺼림칙하다. 또 왜군이 속수무책으로 8척이 격침소실 되고 수십척의 배들이 파괴되었다.
삼중 해상포위망을 깨트리고 나온 배설의 함대가 가장전쟁준비가 잘된 상태였기에 8척의 왜군 주력함대를 격침소실 시켰으며 왜군에 가한 충격은 상당했으리라는 것 침몰되진 안았으나 파손시킨 적함은 3십척 이상되 었으리라는 것이다.
배설함대는 탄략이 부족해서 쏘아 댈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했다. 여기서 퇴각에 있어서도 동쪽 해상로로 6척이 서똑쪽해상로로 6척이 나누어 퇴각하여 탄환이 떨어진 전함이 앞서고 탄환이 있는 전함이 뒤에서 호위하면서 퇴각하므로 적함이 추격시 협공이 가능 하게 퇴각해서 한상도 수군 본영으로 .안전하게 퇴각 한 것은 높이 평가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칠천포 전투에는 패했지만 왜의 수군이 연합 기습공격으로 얻은 실익은 없다는 점이다. 조선군 총사령관은 육지로 나가서 매복 육군에게 공도 빼앗기고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수군 주력함대는 만만찮은 매운 맛을 보여줬으므로 왜군은 추격을 하지 못한다.
역으로 생각해서 칠천포에 포위된 포위망을 깨트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며 깨트러진 왜군의 피해는 적지 안았다.
풍신수길은 잔병까지 괴멸시키라고 하지만 함포를 장착한 배설함대의 가공할 무기와 빠른 기동력 높은 갑판 이런 함대의 우수함에다 배설이 깊은 수심에서 전투를 하자고 한점으로 왜의 수군은 앞서 나서지 못한다. 앞서 나서다간 함포의 사격을 받으면 대장선이라해도 상어의 밥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2, 신에게는 12척의 거북선이 있아옵니다.
오직 잡을 수 있는 것은 근접해서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거나 불화살로 소실 시키는 이외엔 대책이 없다
조총을 비오듯 쏘아대도 배설함대 인에는 한발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12척이라고는 해도 가공할 화력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신에게는 아직 배 열두 척이 남아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왜 그러면 격침에서 8척이 자주 등장하는가? 배설함대 8척에만 함포가 장팍되고 나머지 4척은 다른 용도가 있었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배설함대가 30척의 적선을 격침시텼다고 한다면 적어도 4회에 걸친 진격과 퇴각이 있는 교전이라야 한다.더욱이 수백척의 함선을 격침시켰다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명향 영화처럼 백병전을 하게 되면 거북선함대의 승율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난중일기에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진격명령에 다른 함선이 겁먹어 따르지 안는다고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함대의 지휘관들이 나름 이순신의 근접전투를 견제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치의 밀림도 없는 당당한 조선수군들의 용맹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당시는 이와 유사한 흑백의 그림들이 왜군들 내부에 돌림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 출병 제 16군의 조선출병 거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됨
3,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사진 자료출처: 다음아고라)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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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검,청록진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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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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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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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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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장군의 귀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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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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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앞 바다 세월호 참사의 글입니다.
아이들이 죽어 가는데 잠이오는지요.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가는데 잠이오는지요.
제아무리 불러봐도
제아무리 불러봐도
목이 터져라 불러봐도.
아무도 나서주질 않네.
엄마 우리 죽는거야.
엄마 우리 어떻게 해야되.
엄마 우리 영영 이별인가
엄마 나 살고싶어
엄마 나 살려줘.
어두운 바다 차가운바다.
친구들은 하나둘 잠드는바다 엄마 나도
엄마나도 잠들면 영영 깨워 나지 못할까봐 두려워.
엄마 아빠 가만히 있으라 해서 가만히 있었어 .
어른들이 미워
나어떻해 옆에 친구가
하느님품으로 간것같아.
엄마 .아빠 나 살고싶어.
엄마.아빠 나 잘할께 .
엄마.아빠 나 살고 싶단 말이야.
엄마 나도 잘시간인가봐.
엄마 사랑해 아빠사랑해.
눈물을 머금으면서 글을 쓰노라니 무능한 정부에
심한 분노를 느낍니다.
노래 제목은
나 살고 싶어.
출처:박기문 하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