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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을 낼때는 내고 겁낼때는 겁내야.....

自公有花 2014. 9. 21. 12:30

배설은  용력이 출중하였으며, 국량이 과인(過人)하였다. 어려서 약 10세때 부친(德文)이 울산군수로 부임 할 때 공도 함께 갔었는데 절도사 장필무(張弼武)가 공을 보고, 그 그릇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여 글보다 무예를 우선으로 힘쓸 것을 권고 하였다.

1583년(선조 16) 무과(武科) 별시에 급제하여 변방으로 거듭 기용되었는데, 부임해서는 모두 치적의 명성이 있었다.

 

 

선전관 조광익(趙光翼)이 새로 남쪽 지방에서 와서 비변사에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배설(裴楔)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 합니다.

배설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못했다면 원균(元均)과 선거이도 다 교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만일 차차로 교대한 뒤에, 선거이가 남하한다면 지체될 듯싶습니다. 그러나 선거이로써 대신 거느리게 할 것을 도원수에게 하유하고, 만일 선거이가 미처 내려가기 전에 김응서의 병이 위중하고 대신 거느릴 사람이 없으면 곽재우(郭再祐)가 그대로 잠시 대신 거느릴 만하니, 이 내용을 하서(下書) 중에 아울러 기입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선조 60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2월 4일(정미) 3번째기사

선조 66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8월 5일(을사) 1번째기사

남방과 북방의 위급한 형세에 대한 비변사의 대책 논의

선산(善山)의 금오 산성(金吾山城) 및 인동(仁同)의 천생 산성(天生山城)도 형세를 살펴 아울러 요리하여 큰 진(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선조 74권,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4월 2일(무술) 1번째기사

유성룡이 노모를 만나고 돌아오자 영남의 정세를 묻고 여러 가지 정사를 논의하다

 

“체찰사가 성주(星州)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던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대개 그 사람은 애민(愛民)을 위주로 하여 수습하고 무마하는 뜻이 지성에서 우러나오며 자신을 철저하게 단속하고 거처가 숙연합니다. 체찰사의 명령으로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수축하니 영남 사람들이 모두 공산 산성에 들어가 계획을 펴며, 근일에는 모두 ‘천생 산성(天生山城)을 수축하면 거기에 들어가 웅거할 만하다.’고 하므로 배설(裵楔)로 하여금 이 성을 수축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개 중국 장수들이 늘 ‘이 성을 수축함이 옳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원균 장군은 1597년 6월 18일 조선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를 출항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육지에서 조선 수군의 이동을 탐지하여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조선 수군의 공격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전투를 회피 하였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왜 수군의 수륙합동 작전에 의해 안골포와 가덕도 지역에서 별다른 전공도 없이 보성 군수인 안흥국이 전사하는 피해만 입고 한산 본영으로 철수 하였다.

6월18일 1차 부산포 공격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 함대는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을 선봉장으로하여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나 칠천도, 영등포, 가덕도를 거쳐 다대포 앞 바다에 이르렀다. 왜선 8척이 보였다. 왜군들은 조선 함대를 보자 배를 버리고 산으로 도주 하였다. 조선 수군은 힘들이지 않고 왜선 8척을 불태 울 수 있었다. 이에 사기가 충천한 조선함대는 부산포를 향해 계속 공격하였다.

부산만에 접어들자 원균은 왜군의 전선이 대마도에서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균은 부산포 공격을 뒤로 하고 북상하는 왜군의 전선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조선 함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왜 선단은 전투를 회피하고 대마도와 서생포쪽으로 퇴각하였다.

때마침 불어 닥친 풍랑으로 조선 함대가 분산 되고 지휘가 어려워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 풍랑으로 7척의 전선이 풍랑과 조류에 밀려 서생포로 떠 내려가 왜군에게 섬멸 당하였다. (난중일기 7월 16일자에 살아서 탈출한 세남이라는 종의 진술 기록)

이 전투로 13척의 배와 수 백명의 수군이 전사 하였다.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라고하자 이억기 최호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7.15,21;00시경)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함쳤다(원균은 배설보다 11년차 위의 주장이다)

 

 

7월 16일 새벽에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은 주도권을 장악한 왜군과의 치열한 교전에서 휘하의 많은 전선과 장병을 잃어 버린 채, 겨우 12척의 전선과 함께 한산 본영으로 후퇴를 시작 하였다. 한산 본영에 도착한 배설 장군은 주둔지에서 본영을 지키고 있던 장졸들을 집합 시키고, 전투상황을 알려 준 후에 청야 작전을 시작 하였다. 청야작전(淸野作戰)은 선조가 정유재란을 대비하여 장기전을 계획하면서 수령들에게 명령한 작전이다. 한강 이남에서 사태가 불리하게 되면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말 한다.

배설 장군은 왜군에게 유리하게 사용 될 수 있는 양곡이이나, 병기, 막사 등을 불사르고 성안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란 시켰다.

왜군들은 칠전도에서의 승리를 기세로 한산도 본영을 공격하였다. 한산도에서 청야 작전을 전개하며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배설 장군은 왜군이 수백척의 전선과 함께 한산도로 공격해 오자, 한산 본영으로부터 철수하여 회령포로 철수하였다.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함,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는 것은 거짖말임,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음, 당시 어마어마한 전함을 숨길 수 없음 (나라를 위해 작전을 하는 배설장군의 전함과 병사들을빼앗고자 허위보고를 하고 이순신을 임명해야 한다고 임명장을 요구함)세계최초의 잠수함 거북선에 디젤엔진이 없었음,



일명, 거북선 (粧作龜船) 심볼,  요즘 CI과 동일함 420년전에 브랜드를 가진 전함이라 믿으지지 않으나 사실임, 


거북선 (粧作龜船)

일명:거북선으로 알려져 일본군들을 벌벌 떨게한 대형전함으로 승선이원이 약 20명에 이르는 조선 명나라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함으로 '조선전역해전'도 그림처럼 통일된 거북선 문양이 대거 설치되어 있고, 날카로운 킬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보기만해도 공포심을 조장함



한반도 1만년 역사애서 군대와 전함 12척을 숨긴 장군은 없었다. 그것도 철갑선이란 거북선 (장박귀선)을 개눈깔 감추듯이 감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배설장군이다. 3남의 백성들이 임금보다 존경하고 일본의 장수들이 존경하였다고 하는데   그정도의 신출귀몰하니 존경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도망자 배설로 알고 있습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

  

 왜,  청야작전(주민소개령과 한산도 소각)이 필요했나?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1, 대역죄인 백의종군 상태였든 이순신의 등장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배설을 찾아왔습니다.  

 

 

1)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배설의 7일간의 청야작전과 남해안 일대 백성들 소개령을 철처히 비밀로 한 권율과 이순신은 첮 장계에서 배설이 전쟁 공포증이 있고 도주중이라고 선조를 기망하는 장계를 올려 권율과 이항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권 시켜 달라고 하고 있다.)



1. (경상우도수사 배설이 도주중에 있어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약 2.000명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전함을 수리함을 얼추 보이는 식으로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배설의 전함이 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 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임진왜란 420년 만에 조선 왕조실록 난중일기로 본 인간 이순신의 진면목, 배설장군에 대한 오해 이순신은 동급품계의 장군으로 군지휘권은 배설이 행사했음에도 '명량' 영화는 배설장군이 이순신의 부하로 그리고 있습니다.    

 

1,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했습니다.

김식의 보고와 선조와 대신들...

조선왕조실록 《선조 1597/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선조대왕과 신하들의 대책,

선조: 아니 척후병도 없었단 말인가? 장거리 운항으로 척후병도 없었다고 합니다.

선조: 하늘이 내린 재앙이니 어쩌 겠는가?

풍신수길이 바다를 제패해야 한다고 하더니 이를 어쩌나......

 

선조:충청이나 전라도에  남은 배가 한 두척이라도 없는가?

신하들: 없는 걸로 압니다.

선조: 그래 "누가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도 장수가 없는가?

 

이항복 병조판서에게, 그래도 살아남은 병력이 있는가 묻자,

이항복: 바다가 좁은 곳이라 살아 남은 병사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하면서 해도를 보여준다. 선조가 해도를 보면서 견내량 고성쪽으로 퇴각한 병사들이 매복군에게 당했단 말이지,

선조: 왜 경들은 아무 대책도 없는가?

 

신들은 아무 대책도 없어서 민망해서(동인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 있어니 기용하소서 마음속으로...)

이항복 병조판서: 넓은 바다라면 혹 살아 남을 수도 있는데 좁은 바다라 거의 매몰되고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유성룡이 알뢴다, 한산이 요충지 인데 필시 왜적에게 넘어 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해와 호남이 위험함을 아뢴다.

선조: 독촉한다 장수가 없단 말인가? 한산도를 .... 적에 손에 넘어 가면 안되는데,,,적군에 손에 넘어가기전에,,

윤두수 외 거의 모든 중신들이 아무 말도 못한다.

 

선조는 말한다, 견내량을 통해 한산도 수군본영으로 퇴각할 생각은 왜 못하나

한척의 병선 없이 당했다니 ㅡ

 

비변사와 전투상황실 유성룡 권율이외 : 원균은 춘원포로 도주하여 왜군에 포위되었고, 배설은 혼자 겨우 도망쳐 패잔병들인 수군을 수습하고 있아옵니다.

 

3도 수군과 장수들이 전멸하였으니 장수가 없아옵니다. 이제 이순신을 서둘러 3도 수군 절도사로 임명해서 수군을 수습하게 해야 한다는 유성룡의 주장이 있었고, 선조는 이순신이 믿을 수 없는 허위보고를 일쌈는다고 유성룡을 책망하면서,  경과 어릴적 친구라는데 사실인가?

유성룡 : 예 어릴적에 한 동네에 살았는데 명일에 그는 대장이 되는 것이 소원이였습니다.

 

 

2, 선조는 이순신을 믿지 못하여 죽이려다가 달리 방도가 없다는 유성룡의 의견으로 긴급히 임시로 이순신을 품계를 내려 3도수군 절도사 임명을 마지 못해 허락합니다.(배설과 품계가 같음) 

 

 

왕을 둘러산 조정에서  배설이 단신 도주하여 수군을 수습하는 것으로 보고하고, 동인 조정은 전공을 동인들이 독차지 하기 위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할 뿐 국난을 수습하려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백성들은 왜군에 살육되고, 명군에 치여죽고, 전쟁이란 조선군대의 군기 잡기에 목이 효수되고, 오직 권력을 잡아 선조실록의 수정에 수정을 통해서라도 권력을 잡고자하는 시대였습니다.

 

세월호참사 대처가 7시간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국회에서 난리죠, 칠천량 패전은 고의로 선조에게 10일간 보고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고, 역사 왜곡인 선조 실록 자체가 수정에 수정됩니다.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그러나 선조는 배설을 면직시키지 않고 전쟁 끝날때 까지 중용합니다.

 

 

4, 거북선 12척을 배설이 였바꿔 먹으려했다?

 군대를 접수하기 위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1597.7.23)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3도 수군절도사로 임명을 8월 3일 허락하면서 품계를 한계급 강등해서 경상우도수사 배설과 동급으로 임명하는 묘수를 부립니다. 이에 이순신(권율)은 후일 선조를 속인 것이 발각 될 것을 우려해서 배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라 보입니다.

 

 

 

5, 배설의 귀향과 탈영보고서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배설의 병가를 허가하고  9월 2일 탈영보고를 합니다.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도사 이순신은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못하게 탈영보고를 합니다.(당시 탈영은 귀대시 군율로 참형당함)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 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6, 난중일기 기록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

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8월12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이날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입니다.

 

8, 칠천량해전 실제 전황ㅡ

선조가 한산도로 퇴각하여 수군본영을 수습할 장수가 없느냐고 묻고 있을때에 배설은 약 5.000여명의 병력과 약 50척의 전함으로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고자 교전을 통해 40여척의 병선을 일고 약 3.000명의 병력이 전사하면서 적선 8척을 격침시키고 견내량을 통해 정확히 5척 대열과 7척 대열을 유지 한채 동로로 서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왜적함대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여 통과하여 한산도 수군 본영에 도착하는 "청야작전"을 시행 했습니다.

 

 

왜군들의 추격을 염려한 배설은 무기와 탄약을 모두 충진하고 한산도 주민들을 긴급히 육지로 대피시킨다. 그리고 수군본영과 무기고등의 시설을 소각하고 남해로 퇴각(동인들은 도주라함)

 

그후 얼마 안되어 왜군들이 난입하여 미처 대피하지 못한 한산도 주민들의 대학살이 시행되었습니다.

선조임금이 그토록 한산도를 걱정할 때 배설은 선조임금이 조정에서 걱정하든 그 시간에 한산도 소개령을 내리고 무기를 회수하는 '청야작전'을 감했했습니다.

 

조정에서 임금스스로 수군이 한산도로 퇴각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하고 울부짖을 당시 배설은 이미 선조임금이 시키지 않아도 그런 역할을 하고 남해로 퇴각하여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고자 진도 울똘목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왜군들은 주민들을 악랄하게 입에 담을 수 없도록 남녀 노소 모두 학살 했습니다.(풍신수길이 점령지 주민을 모두 죽이고 일본 서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도록하라고 명했음)준비되지 않았든  결국 권율의 잘 못된 전투 기획과 명령으로 조선 수군은 190척의 전함이 격침되고 불타고 수군 1만여명이 전멸하였습니다.

 

 

배설 잔여 병력이  퇴각하여 청야 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조선 조정에서 누구도 바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그토록 원하든 국가 걱정을 하는데도 누구도 사실을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배설은 수 없이 탄환을 보내달라는 전보를 올리고,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장장 초인적인 약 430km의 작전이 펼쳐지고 전투 준비를 하는데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차출되어 원균의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왕에게 보고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순신이 숨겨둔 전함을 크게 호통쳐서 찾았다고 조정에 보고함)대형 전함이 장난감입니까? 

배설장군은 8.19 쿠데타로 실각한 후 병가사직서를 내어 허가 공문을 받아 귀향길에 오릅니다만, 병영을 나가자 마자 탈영보고를 해버린줄 몰랐습니다.

배설은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시마즈 요시히라 군대를 부관 두명과 단기필마로 통과하고 왜장 시마즈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살려주고 사라집니다. "시마즈 내 목이 붙어 있는가?" 목을 만져보죠,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자, (세키가하라 합전 적의본진통과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냇답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출병이 차일피일 미루어지죠,


일본이 300개의 나라로 분열 될뻔 한 일본내전이 발발했고 조선에서 살육을 하든 장수들 대부분이 멸족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일본 내전이 배설때문이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으나  배설의 귀향이 왜군철수로 이으지고 이들이 일본에서 풍신수길에 반기를 들었다.


거북선 세계최초 철갑선,

 

 

粧作龜船(거북선)

[배설(裵楔,1551~1559]

 

 

 

 

 

조선정벌 침략전쟁,

1,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黑田長政과 黑田句沈을 앞세운체 풍신수길은 黑田孝高에게 조선을 정벌할 것을 명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은 약 39세 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금부채에 黑田孝高의 총지휘장군으로 黑田句沈이 동생이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하고 종문에 황금부채가 6.25까지 내려 왔다고 한다.)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

 

 

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귀갑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은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되었다.(일본측이 상세히 전황을 알고 있음)


In succession , the person (or soldier ,or general ) reseized many castles such as Seongju , Hapcheon gunsu, Chogye and Euiryeong and then was promoted to a corp commander .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배설(裵楔, 1551~1599)은 조선무관,

 

 

 

 

5,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햐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배설장군은 1595년과 1597년 두번에 걸쳐 경상 우도수사로 발령받았다. 경상우도 수사 이전에도 진주성 목사로서 지속적으로 장작귀선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배설이 칠천량패전후 멸치잡이 상인에게 배를 팔려고 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출처:고대일록)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습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비망기(備忘記)로 김홍미(金弘微)에게 전교하였다.

˝이러한 때에 힘껏 싸우는 장수는 비록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깊이 책할 것 없이 부리는 것이 가하다. 주사(舟師)는 지금 한창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그 형세가 대단히 긴박하다. 그러나 부득이 통제사는 고쳐 차임해야 하겠고 경상 우수사도 갈아야겠다. 권준(權俊)은 또 배흥립(裵興立)을 논박하여 분분하게 안정되지 않으니 반드시 일을 그르치겠다. 수사로 합당한 인물을 속히 의논하여 아뢰라. 지나간 일은 그만이니 지금 국사에 전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조치한다 해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상좌도같은 경우는 주사가 매우 미약하니 상도(上道)의 여러 연해안 고을로 하여금 전선을 제작하고 격군(格軍)을 충당하는 일과, 황해도 역시 솜씨좋은 목수로 하여금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을 많이 제작하는 등의 일을 신속히 조치할 것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2월 7일조.

 

 

1595년 1597년 배설이경상 우도 수사로 재직하면서 거북선 제작을 순조롭게 하는데 비해 경상좌도 수사 배홍립이 능력이 딸린다는 점을 밝히고 힜다. 따라서 왕조실록을 토대로 해석해보면 거북선이 통일된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병영 고을마다 편리한 곳에서 제작하게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설이 칠천량에서 구해낸 장작귀선도 이 때 만들어진 대형전함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 뿐 아니라 모든 병영에 거북선이 제작되었는데, 규모가 적은 판옥선위에 갑판구조라고 보여진다.(이순신장군진영은 60~70명 규모의 판옥선에 갑판을 쒸움)

 

 

 

1597년 7월 23일 이순신의 장계에서 배설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약 200명이라고 밝힌 점, 대부분 조선의 거북선은 규모가 60~70명선의 기존의 판옥선에 지붕과 귀두를 설치하고 대포를 장착한 것으로 최대 승선인원이 130명 이내이다. 그리고 병영마다 형식적으로 한 두대 정도 보유하여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 어려웠다. 반면 배설의 장작귀선은 나주의 목수들이 대거 동원되어 아예 새로 배를 건조 했다. 그 규모가 가히 놀라울 정도로 약 200명 승선한다는 점은 이순신장군이 밝힌 장계에 나와있다.

 

 

임진왜란을 총지휘하고 성주성과 진주성 까지 시찰한 黑田孝高가 돌아가서 만든 귀갑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구로다 요시타카가 배설의 활동에 매우 놀라고 돌아 갔다면, 당연히 배설의 전함인 장작귀선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를 제작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龜甲車(장작귀선에서 모방)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등의 설계에도 黑田孝高가 직접 참여했다. 침략을 위한 일본의 공성전용 병기입니다. 관(棺) 모양으로 만든 큰 궤 속에 돌 등 무거운 것을 채우고, 잘 부서지지 않게 생우피(生牛皮)로 여러 겹을 싸서 사륜거(四輪車)에 얹은 것이다. 갑주(甲胄)를 입은 무사가 이것을 끌고 성을 공격하였다.

사람이 들어갈만한 수레 위에 철판을 깔아놓은 형태, 이 안에 들어가서 성문까지 이동하면 성벽위로부터 날아오는 끓는 물이나 화살, 동맹이 등에 보호 받을 수 있었다. 중국 충차와는 다르게 그냥 보병 수송용 수레였습니다.

龜甲車제작 ,

 

 

 

黑田孝高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등의 설계에도 참여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성(城)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무기.

구로다 요시타카의 귀갑차를 살펴보면 과거 일본의 공성전병기와 다른 점이 세가지가 있다.

1, 철판으로 깔아 놓았다는 점(괘짝 속에돌과 흙을 넣음)

2, 생 우피로 를 여러겹 감쌓다는 점,

3, 甲胄를 입은 무사들이 동원되었다는 점,

 

 

 

 

배설의 粧作龜船 (거북선)

보통 조선의 판옥선의 세배정도의 크기에다 두꺼운 장작으로 갑판을 덥고 그 위에 화전을 피하기위해 철판과 병사들의 갑옷을 펼쳐 우피와 함께 지붕에 쒸웠다는 자연스런 이해가 된다. 멀리서 보면 철갑선으로 보이는 것이나, 갑주를 원료로 우피등이 썩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화전을 방지하기위한 장대에서 물을 퍼서 수시로 뿌려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근접해서 장작귀선을 관찰 했다고 보여진다. 조선해역전도에서 보듯이 경상우도 수군의 장작귀선은 귀두에서 대포가 나오지 않고 귀두 위쪽 갑판부분에 두발의 대포가 보인다. 그리고 귀두도 배의 아래 중간 부분에 돌기형으로 녹청색으로 나와 있어 기능이 없다. 단지 상징성과 시각적인 효과 뿐이다.

확대한 장작귀선의 전면부 그림이다. 측면은 단순히장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날카로운 칼이 보인다.

그림 좌측에 장작귀선의 모습이보인다. 일본 수군의 주요 전투 형태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 : 적의 배에 뛰어들어 무기를 들고 싸움)에 대비하여 개발된 돌격 군함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가 그려져 있고,(우피나 갑주의 크기만 함) 그 위에는 날카로운 못과 같은 것들이 꽂혀져 있어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좌측에 조금 보이는 배가 장작귀선이다. 그림처럼 대포가 위에 있고, 거북돌기는 아래에 상징적으로 있어 거북 머리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지 않다.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외 다수의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이순신이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름)

거북선 (粧作龜船)

일명:거북선으로 알려져 일본군들을 벌벌 떨게한 대형전함으로 승선이원이 약200명에 이르는 조선 명나라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함으로 '조선전역해전'도 그림처럼 통일된 거북선 문양이 대거 설치되어 있고, 날카로운 킬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보기만해도 공포심을 조장함, 당시 명나라 일본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우리나라 주력함대인 판옥선과 동일하게 약 5~60명선이였고, 크기도 비슷하였음, 최근 12척의 병선이 120명으로 201킬로를 항해한 것이 불가사의하여 당시 디젤엔진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철갑선에다 잠수함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 명량일대에 해저 탐사를 현재도 계속하고 있음(학계와 문화계)

裵楔 "ベッセル   いたい....

풍신수길은 절명순간 왜 배설을 불렀나요....^^

 

 

배설장군은 1599년 선조 30 년 향년 49세로 모함에 의해 세상을 하직합니다.


 

배설장군이 도망자,  비겁자 였거나,  역모가 있었다면,  배설장군의 아들 형제에게 조정에서 관직을 주었겠냐구요,  장남은 끝내 아버지의 역모 연루에 벼슬을 사양했으나. 죽은후 벼슬을 제수 받았구요, 그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받은 고위관직은 다 셀 수 없을 정도 입니다. 얘기하고자 함은 만고의충신답게 배설장군 의 아들 전부가 관직을 받았다는 것이죠,아니 손자들은 영천현령, 또 좌승지(승지 :청와대근무)....


비교가 적절하지는 않으나. 이순신장군님이 당대성웅이시니 이에 비교를 해보죠,  조선340년간 후기에 문과 급제1명이 있었네요^^ 죄송! 무관은 하급관리나 무과출신은 267명이랍니다. 어디까지나 억울한 누명을 밝히고자 할뿐,  훌륭한 이순신장군님 까려고 하는건 절대아닙니다. ^^ 굳 모닝~ 궅이브닝

 

 

배설장군이 역모죄로 추포되어 가족도 장례를 겁나서 못하는데요,  경삼감사 한준겸이 현직파직뿐 아니라 3족을 멸할 역적이라는 배설장군을 군졸을 보내서 장례를 치릅니다. 사대부의 장산을 빼앗아 묘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파직당합니다.

 

얼마나 인품이 좋았으면 자신에 가족목숨까지 걸고 경삼감사까지 내려놓은 장례입니다. 배설이 어떤 인물인가 추정되지요, 미관말직도 중요히 여기든 시절에 역모로 몰린 장수를 장례지냅니다. 관포지교나 금란지교니 하지만 배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은 인물이고 시기 또한 대단히 받은 장수였습니다.

 

 

 

 

 

月波亭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ㅡ배설ㅡ

 


배설은 자신이 쌓은 공이 태산 같아서 죽게 되는데, 

이순신장군 난중일기 때문이 아니구요,

또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 명성이 워낙 높아서 백성들이 왕보다 사랑하든 장군으로 '강강술래'를 하면서 까지 도와주는 백성들로 인해 명망 때문에 죽었습니다.  배설장군 스스로도 누굴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문과를 통과할 만한 실력에도 일체 글을 만기지 않고 패장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정중신들과 사관 문신들은 왜란이 터지자 도망만 다녔고, 따라서 비겁한 조정에 비겁한 왕조, 비겁한 신하들이 빠글 빠글한 조선에서 도망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운 장수입니다.

 

 

배설장군은 군부내 알력으로 실각했을 뿐, 도망칠 이유가없었죠,  장군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도망을 칩니까, 온통 적군이 빠글 빠글한 육지 어디서 쉴 수 있냐구요?  이순신 장군님 가족들이 학살된 것 아시죠?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당시에 장수는 사표내면 그만이였구요, 

수군에서  공문받아 귀향했으면  탈영이란게 성립할 수 없죠, 

유성룡은 비서실장겸 영의정이 되어 변란을 우려하여 징비록이니 뭐니 해서 제딴 나랄 위한답시고,  탈영이네, 역모 도망이네, 비겁자네 하는 것이 이해 됩니다. 나름 다 나라를 사랑한 열정이였죠, 만일 누구라도 배설이름으로 거병한 다면 누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곽재우 기타 장군들처럼 집에가면 그만인 시대였죠,

 

 배문덕 한성서윤 요즘말로 서울시부시장의  장남 배설(楔)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산 부사를 거쳐 경상우수사가 되고, 차남 건(楗)은 의병 활동의 공적으로 선무랑에 제수되고, 3남 즙(楫).과 4남 력(櫟)은 무과에 급제하여 각기 조방장과 훈련원 주부로  3형제가 임란에 자원하였고 3대에 걸친 임진왜란 전투에 참가한 호국의 가문으로 배즙은 칠천량해전서 전사합니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이순신장군 기록)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사형시키기로 수없이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1,성주성 (부상현)전투, 개령전투, 개산진전투, 지례전투 패배와 배설장군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田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배설은 주부(主簿;총무부장)로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였으나,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고 말았다. 모름지기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데, 조경이 패배했으니 군적도 없는 잔병신세로 전락한  배설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하고 있었다. 

 

 당시는 신립장군의 병사와 수많은 방어사들의 패배가 전멸이 아닌 군대의 잔병화가 되어있었다. 어차피 중앙정부가 도망다니는 상태로 중앙의 지원이 없는 그야말로 잔병들이 주로 의병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다.  의병이 별도로 어디서 나온것이 아니라 관병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잔병이 되었다가 향병 또는 의병이 되거나 다시 관군에 흡수되어 의병과 관군의 구별이 모호하였다.(양반들이 자신에 노비를 군대로 조직한 의병도 다수 있었음) 

 

배설은 조경이 성공했더라면, 바로 다음번 자리가 군수나 현령이 되는 것인데, 조경은 대패하여 일개 잔병이 되고 말았든 것이다. 이에 배설은 지역주민들로 향병을 모아 왜군의 저지를 위해 활동했으며,  김면 정인홍의 의병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히 그 곳에 합류 하게 되었다. 아버지 배덕문이 68세에 성주성에서 거병하자 자연히 합세하게 되어 하나의 부대를 이루게 된다.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22일(을해) 5번째기사(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은 일본군을 추격전투를 하므로 피해가 상당했다)

선전관 이춘영이 영남 왜적의 동향과 김성일·김면의 죽음을 아뢰다------------

 

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라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욤병이 창궐했다.

 

 

 

2, 성주성(부상진)전투 상황ㅡㅡㅡㅡ

김면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 김면이 당시 북으로진격 서울로 들어 갔더라면 도원수가 되었을 것이나, 김면과 곽재우 정인홍등은 시류를 읽지 못하여 싸나운 왜적을 추격하므로 힘든 일생 고단한 전투였었다.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조헌을 지원하려고 출병한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일본군들을 성주성 북쪽(부상현)을 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에 대한 1~3차 공격이 모두 실패함, 성주성을 중심으로 개령 지례 개산진전투에 의병들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중부주력군에 맞선 의병들은 그흔적도 없이 전멸했다. 성주성에서 맞닥뜨린 의병들을 대 살육이 저지된 것은 배설의 적장 수급을 벤 공로임에도 이는 인정도 받지 못했고, 패전의 책임은 배설이 떠 맡았다.

 

성주성 3차 공격은 최대 규모의 의병 2만이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모두실패했다. 1차 때는 일본군은 방어만 했으나,2차 3차에서는  일본군은 공격적으로 공격을 했고,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성을 나와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였다.  부상진까지 추격을 당한 의병들이 거의 몰살 직전이였었고, 이 때 배문덕 의병장이 부상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반격을 개실했고, 때 마춰 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향해 돌진 몆차례의 칼싸움 끝에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들고 퇴각하게 되었다.(배문덕이 적장의 수급을 취했다고도 알려져 있음,)

 

 

성주성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고, 계사년 1월 왜군들은 스스로 자진 철군을 해서 무혈입성을 했다. 일본군이 적장이 죽고 바로 철수 했더라면 배설의 공이 될 수 있었음에도 자진철수 하여 배설은 적장수급을 취한공만 인정받았다.

 

 

1~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권율은 끝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서 도원수를 제수 받게 된다. 

 

 

배설이 김면 정인홍 아래에서 이름없는 의병신분이 였으나, 방어사의 부주(총무부장)로서 언제든지 합천군수로 제수 받을 자격이 있었음에도 패잔병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594년 합천군수가 되고 경상우도 일대의 탈환 공로로 늦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다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경상도 우도수사로 임명된 배설은 원균의 선봉장이 되어 부산일 대의 14만 왜군진영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었다. 웅천 전투는 하루에 세번씩 적선 600여척을 쳐부수었다. 이외에도 기덕도해전, 안골포 해전,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칠천량해전, 부산 바다 전체가 전투장으로 변했다. 그러함에도 7월 16일 일본군 1500여 함대의 기습포위망에 걸려 조선수군들이 전멸하게 되자, 12척의 함대에  배설은 부득히 퇴각명령을 내렸다.  

 

권율과 이순신의 벼락 출세에 비해 배설은 진급이 아주 늦은 편이고 실력도 다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경상지역 고관들은 배설장군의 전공이 배덕문장군의 공이라며, 진급을 반대하는 상소가 많았으며, 자신들도 모르는 전공이라고 하기 까지 하였다.  자신들은 관군이 되어 도망다녔으니, 당연히 전공을 알 수 없었음에도 시기와 모함은 이때도 있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구로다 요시타카가문의 장군도 두개중 하나가 아직도 종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병력 2만2천 8백으로 4월18일 부산포에 들어와 언양, 경주,영천, 신령, 군위, 비안, 용궁, 풍진도를 거쳐 문경에서 제 1진을 따라 충주로 공격 했다. 이 두 부대는 5월2일 한강을 건너고, 5월3일 남대문과 동대문을 통해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북상한다는 보고가 날아 들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鳥領) 이남에서 왜군을 방어하도록 지시 하였으나, 4월25일 이일이 지휘하는 부대가 상주에서 패하고, 4월26일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이 지휘하던 문경도 왜군에게 점령 당 하였다. 4월28일에는 도순변사 신립이  8천명의 군사와 함께 충주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역시 패 하였다.

 

 

 선조는 4월30일 밤 2시쯤 소나기를 맞으며 도승지 이항복이 들고 있는 등불을 따라 말을 타고 100여명의 신하와 함께 한양을 빠져 나갔다. 도성과 궁궐은 왜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난민들에 의하여 방화 되고, 파괴 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으며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하였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한양이 점령 당하자 선조는 5월1일 개성부에 도착 했다가 5월7일 급히 평양으로 피난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4월19일 죽도 부근에 상륙 한 후 김해, 창령을 지나 오른쪽 부대는 무계, 성주 방향으로, 왼쪽 부대는 초계, 거창, 지례 방향으로 각각 북상하여 금산에서 합류한 후에 영동, 회덕,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공격 하였다. 

 

제4진인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 병력이 1만여 명이었나 집결이 지연 되고 전선이 부족하여 제 때에 투입 되지 못하고 5월2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 하였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휘하는 4천명의 병력은 선발대로 4월 중순 부산에 상륙해 있었다. 이를 합한 1만4천l 왜군은 창령을 거쳐 현풍에서 머물다가 상주를 지나 한양을 공격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은 약 39세 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고 한다.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은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된 것이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전이였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백성들이그렇게도 원하든 전쟁이 끝났어요<

 

배설장군의 누명과 참수,

1599년 선조 30 년 향년 49세로 모함에 의해 세상을 하직합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3일(갑술)
병조 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 뒤 국내의 변란을 우려하여 아뢰다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비밀히 아뢰기를,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철수하여 돌아간 뒤에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되니,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떠도는 말이라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뜻밖의 사변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은밀히 하유하여 비밀리에 추격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고, 다른 도에도 아울러 유시하여 특별히 기미를 살피게 함으로써 그들이 용납될 것이 없게 하소서.

 

 

다만 나라의 기강이 이미 해이해 졌으니 유시를 내리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심상하게 여길까 몹시 염려될 뿐입니다. 옛사람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반드시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잡게 하였으니 지금도 역시 높은 벼슬과 후한 상을 내린다고 한다면 필시 마음을 다해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모두 적이 물러갔다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신만 구구하게 지나친 우려를 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배설은 세운 공이 태산 같아서 민심이 흉흉하니,  먼저 추포하여 압송하고,  서둘러 전국에 방을 붙이고 현상금을 걸어 포고하고 모든 선무를 다하여라,  현몽과 합세한다면 이는 결코 제압할 수 없을 것이고, 배설은 왕을 버리고 도주한 죄 역적이니,  아뢴대로 서둘러 처리하도록하라,  그 주위에 호종하는 세력이 없도록 도제찰사 권율은 추포 즉시 전국에 방문을 붙이고 서찰을 뛰워 후한 상을 내리도록하라, 
 

 

 

 

 

선조 110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3월 6일(을유)
전 수사 배설이 법에 의해 처형되다
전 수사(水使) 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해석:선산 고향에 은거하고 있든 배설이 추포 된 이후에  외지 망명했다고 하고,  현상금과 산에 출몰하였다는 방문이 나붙습니다. 역적이 였다면 가족을 방면하고 벼슬을 내릴 이유가없습니다. 가짜 배설이 나타날까 두려워 했다고 보여집니다. 유성룡이 제딴 충성한답시고 징비록에 도망자니 비겁자니 해둔걸 보면 요즘 국정원 댓글 충신들 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선조는 배설의 아비가 배덕문임에도 배덕룡으로 아들 이름도  배상룡임에도 배상충이란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아마 불가피한 상황인 것 같고, 배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나봅니다.

 

 

 

14,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조선시대에 역모로 몰려 당대에 복권된 경우가 없다. 보통 70년 ~100년 후에 복권된다는 점에 비추어 이례적일 뿐 아니라, 영의정 유성룡이 직접 선무용 징비록을 지으 선비들에게 배설이 도망자라고 가르친 것 만 봐도 당대 배설의 명망이 중국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배설장군은 공이 태산 같아서 백성들이 왕보다 좋아한 죄로 누명을 쓰고 참수 되었습니다.^^

 

한준겸 경상 감사가 병졸들을 보내 장례를 치러주고, 사대부의 장산을 빼앗아 묘지를 만들고,  가족을도 나서지 못하는 역모로 몰려 참수되는 죄인을 경상감사가 장례를 치릅니다. 

 

그것도 보통사람이 아닌 어마 어마한 경상감사,  3족이 멸할 수 있는 장례를 치르고. 사대부의 땅을 빼앗아 묘지를 쓴다. 그리고 파직됩니다. 요즘도 이런 경우를 볼 수 없죠.

 

얼마나 인간성이 좋았으면 경상감사를 포기하고 역모죄로 처벌 받는 죄인을 호상하겠습니까?   이것 하나만 봐도 배설이 억울히 죽은 것임을 알수 있고, 비겁자니 도망자니 하는 것을 이해할 만합니다. 현직 경상감사가 도망자를 위해 그래할리 있겠냐구요?

 

경상 남북도 다합친 전권을 가진 경상감사가 어떤 자리인데요

역모죄인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슬쩍 묻어만 줘도 대단 한 것이라 할 것인데요,  동인조정과 선조임금에게 안된다는 것이죠,

백마디 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죽은 이를 위해 경상감사까지 그만두고 역모죄인이 될 수 있는 장례를 치룹니다. 실제 파직됩니다. 파직된지 수 년 후 한준겸은 인조반정(손자) 거사에 성공합니다. 한준겸(韓浚謙, 1557년 ~ 1627년)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본관은 청주(淸州)로 인조의 장인이다. (출처:백과사전)




한준겸은 한 때 전주로 도피하여 배설장군을 회상하면서 복수를 꿈꿉니다. 그리고 구굉, 구인후 , 최내길, 등이 이흥립과 거사가 성공합니다. 그리고 동인들은 대거 하루에  40명이 참수 되고 귀양 만도 200명 이상이 가게 되는 옥사가 읽어나죠.   결국 동인들도 그래 비참히 죽고 쫒겨나고 맙니다. 역사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죠,ㅡㅡㅡㅡ ^^유성룡 권율 다 날라갑니다. ^^

 

 



정종호는 장군을 삼달덕(三達德)을 구비한 인물. 그는 “ 옛 부터 인신(人臣)이 국가를 위하여 큰 난리를 능히 막을 수 있는 자는 그 지혜(知慧)가 있은 연후에 가히 대책을 세울 수 있고, 그 인(仁)이 있는 연후에 가히 대중을 복종시키고, 그 용기(勇氣)가 있는 연후에 가히 적을 칠 수 있으니 장군은 그것이 겸비한 사람이 장군”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나아가 “장군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먼저 여러 전투에서 용병(用兵)이 귀신과 같았던 점이 지(智)이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보고 혜창(惠倉)을 창립한 것은 인(仁)이며, 싸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비록 죽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용(勇)이 였다”

 

 


 

 

"ベッセル   いた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貧しい農民のせがれから、一躍、天下人に上りつめた男、豊臣秀吉。世界史をひもといても、彼ほどの成功者は少ない。
 立身出世の鑑、庶民の憧れの的として、根強い人気がある(朝鮮半島では、秀吉は極悪人)。私たちが、「これがあったら幸福になれるだろう」と思っているものを、すべて獲得したような人物である。
 しかし、秀吉は、最期に意外な言葉を残している。"ベッセル いたい....

「露とおち 露と消えにし わが身かな 難波のことも 夢のまた夢」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풍신수길의 절명은 (亀)"ベッセル いたい....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는 거북선과 경상우도 수군 裵楔이 얼마나 조선점령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세키보네, 아다케, 보고, 등등의 자신들 전함이름대신 지금도 일본에서는 선박회사들 이름이나 바다의 배들을  ベッセル 라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구로다 요시카는 풍신수길의 오른팔중에 오른팔 젊은 시절 친구였구요 단, 하나 뿐인 책사였지요, 조선의 유성룡보다 더 찐한 풍신수길의 분신이였죠,


 

당시 배설장군이 몰랐든 것인데요,  일본의 전국시대에 풍조를 알았더라면, 배설장군이 일본군에게 물러가라고 하면 그냥 물러갔을 것을 배설장군은 몰랐든 것이죠, 장수 끼리 사움에서 이긴 장수가 몰수패를 받았든 시절을 너무 몰랐든 것이죠,

 

 

 

 

 



 

 

 

이순신장군님이 그래 유명하고 일본이 벌벌 떨었다면 5년간 바다를 지켰는데요,

정유재란은  일본은 거참없이 2000대의 전함과 14만명이 곧바로 부산에 들어 옵니다. 정유재란이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일본이 이순신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쳐들어 오는 것이 뭘 말하는 것이죠?

 

군인이 왜 필요한 거죠?

온 나라가 도륙되는데도 지켜보는게 장군이 할일 인가요? 제가 가장 존경해온 이순신장군님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이 잘 못이였네요,,,아무리 팔아먹을게 없다지만 공과과는 정확히해야죠 선조가 당시 오너이고 나라의 주인인데 이순신은 너무 허위보고를 하고 해서 사형시켜라고 하는데도 동인들은 끝내 거부하고 영웅으로 만듭니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왔던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의 찬성보다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함석헌

 

배설장군은 경상감사 한준겸의 장례를 받았습니다. ^^

권율 이순신의 전투연구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이순신과 권율이 군권을 장악함,

제목은 7일간의 도주라고 했지만, 우리측이니 퇴각이 맞는 말입니다. 퇴각이나 후퇴라고 하니 좀 어려워서 쉬운 우리말로 편의상 도주 또는 도망이라고 하겟습니다. 배설장군의 칠천량해전 퇴각도 도주라고 쉽게 얘기 하잖아요^^


2)명량대첩   1597년9월 18일 (선조 30)에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함, 12척의 전함으로 330척의 적함을 격침시키고, 왜군   18,000명 (노량 해전 6만명)을 격멸한 세계적인 대승, 대선수인 야키자키 야스히로는 일본에서 1500명이 출전하였음, 1597, 9, 2일 배설이 전함에서 내린 날, 귀향하고 2주 뒤인 16일 명량 대첩이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23전에에 23승 격멸한 왜군의 수가 왜군전체 출병 수보다 많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함(영화 명량, 불멸의 이순신을 참조할 것)또 2주만에 탄환을 조달한 기록이 전무함,

 

 

7, 순천 사천 울산 왜교성 패전, [1598.9.19~11.19]1597년 음력 12월 23일 ~ 1598년 음력 1월 4일

 왜성은 이순신장군을 흠모하시는 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라도 순천성은 삼면이 바다로 서쪽만 육지이다. 조명연합군은 약 5만 5천명, 소서행장 (고니시)왜군은 1만4천명이였다. 등자룡 진린 외 조선군 장수들(김완 이영남)이 대부분 등이 참여해서 패배했다.

 

 순천왜성 조명연합군의 총공격,

조명연합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3개 왜성을 동시 전면 공격하여 왜군을 섬멸하자는 작전은 세곳 모두 실패,

 

1598년 9월 19일우의정 이덕형 도원수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 명나라 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항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내렸다.이 때 모든 조선의 군대가 동원되어 약 30만 병력, 

 

제 1승: 9월 21일 명군의 지원병1만5천명 도착 하고,  해남현감이  적진 공격 왜군 8명 사살 순천성 

22일 ~23일 유정은 조선군을 질책 서천만호 한산대장 홍주대장 금갑도만호 회령포 만호 외  조선군장수들 곤장7~15대씩 처결

 

30일 명군 수군 전함100여척 이순신 합세

10월2일 조명 연합군 총공세 반나절 도중 오하려 왜군들이 밧줄울 타고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 조명연합군 약1.000명 전사(조선수군 사로 첨사 황세득 이청일 외29명 전사)연합군 100보 후퇴

 

10월 2일 유정은 사천성의 악명높은 시마즈군을 봉쇄한 조명연합군이 중로군 동일원장군이 시마즈 요시라 왜군에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음,(울산성 가토 기요마사 조명연합군 동로군도 후일 패배함) 놀란 조명 연합군은 긴급히 순천왜교성 봉쇄를 풀고,


2일부터 9일 까지 조선 명나라군대는 무기도 버리고 밤낮으로 도주했다.  부유창방면으로 퇴각은 계속되어 9일까지 계속함(조선군 전사200명 부상 600명) 이 퇴각으로 군량미 3천석을 빼앗겼으며, 엄청난 무기들도 빼앗겼음

 


 

2)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이건 사실 시마즈 본군7천은 이미 철수 하고 잔병으로 6만명 전투상보자체가 의문 스러움)어째튼 우리 이순신이니 자랑스럽게 봅시다.


 

이순신의 본군은 노량근처의 관음포에 매복해있었고 19일 새벽에 일본 수군이 노량에 진입하자 관음포에 매복한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해 노량해전이 시작되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후퇴했으며,  노량해전은 해가 뜰때까지도 계속 왜군들의 철군이 계속 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라의 철군하든 병졸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며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조명 연합수군은 많은 포로들을 싯고 퇴각하든 일본 고니시와 고위장교들이 먼저 떠난후 잔병들을 추격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270명, 명군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이 사망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죽음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명나라 등자룡(鄧子龍)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출처:충무공전서).

 

결론, 칠천량 전투나 별반차이가 없는 패전임에도 동인들이  단지 보고서를 잘 만든것에 불과함을 알수 있음, 조선군이나 명군이 왜군은 수 명 내외로 사살하고,  왜군은 조명 연합군을 만명단위로 죽임, 이순신과 권율 다합쳐도 배설과는 상대가 안됨을 알수 있다. 배설이 서인인 원균을 만난 것이 비운이였고, 권율의 동인들로 견제 받았음이 조선에 있어 비운이였다.  

 

 

사천성패전,시마즈 요시로 일시:1598년(선조?)10월1일 

지휘관: 조·명연합군-董一元/ 일본-島津義弘 병력: 조·명연합군 수만인~200,000내외/ 일본-7,000내외 전과: 조.명연합군-30,000~80,000내외 사상자/ 일본-미상 약 400여명 사상,

 

1598년10월 조선의 사천에서 島津義弘이 이끄는 島津軍7천명이 명군의 장군 동일원이 이끄는 수만의 조·명연합군을 격퇴한 전투로서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설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명군의 수가 3만7천에서 20만까지, 명군의 사망자가 수천에서 8만이라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일본 측 기록>중국측 기록에 8만명 사망으로 되어 있어 이보다 피해가 큰 것으로 추정됨,  1598년 9월 말부터 10월초까지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小西軍), 사천왜성(島津軍), 울산왜성(加藤軍)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

 

동일원이 이끄는 20만이라 칭하는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했고, 그 후 집결하여 철퇴한 연합군의 島津측에서는 [취한 수급이 3만, 벤 시체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島津義弘은 [鬼石蔓子]라 불리어 무서워했고, 그 武名이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전해졌다.

 


사천성의 전투에서 명군의 병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패전 측인 명의 기록에서 [전사자 약8만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 8만인이라는 것은 세계사와 비교하여도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패전의 장수는 책임을 물어 처형되는 경우도 있어 전과는 과대히, 손해는 과소히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론^^

칠천량해전이 결코 패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조선 판옥선들이 왜선 5척에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학살 된 점은 있으나, 기습에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미 권율의 작전 실패로  포위된 상태에서 육지로 퇴각도 하나의 방법이 옳은 것이였음, 그냥 배에서 60여명이 200명을 당할 수 없고, 일방적인 살육이 되기 때문에 육지로 피항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 한 상황이였음,

 

 그러나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일본 군을 공격한 1597년 6월 부터  7.16일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좌절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려주었음, 왜군 병사들에게 막대한 공포심을 조장한 가치 있는 전사이고, 순천왜성, 사천성, 울산성패전에 비해 매우 가치 있었든 전투였음은 일본측 자료가 말하고 있음,,,원균이 30만 대군을 동원했었으도 똑 같았을 것,,,^^  


권율과 이순신 그외 모든 조선군 장수들이 30만 대병을 동원해서 1597 .11~ 1598.11.18일 까지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올린 전과는 가히 부그러울 정도다. 9월 21일 해남 현감이 8명의 왜군을 사살한 것이 큰 공로였고, 하루에 10만 명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왜군이 한번 공격하면 최소 수백에서 수천명 아니 수만명까지 죽어 나간 그야말로 인해 전술이였다.


조선 명나라군은 아무런 전과도 없었다. 아마도 서부개척시대의 백인들과 인디언들간의 전투도 이보단 나았을 것이다. 배설이 부산일대에서 싸운 상대는 이들 찌꺼기 왜군들 하고는 달랐다.  모든 왜장 주력부대와 전투 한데 비해, 왜군  3대 잔병에도  조명연합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권율과 이순신은 사천성 패배 소식만 듣고도 식량 3천석을 버리고 무기까지 모두 놓고 부유창 방면으로 7일간 밤낮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명나라군  뒤에서서 도주에 도주를 했다. 고니시가 평소 자신  혼자서도 조선을 점령할 수 있다면서 조선군이 가토 기요마사를 처치해달라고 한 말이 호언이 아니였었나?

 

 

 

 

 

 

 


 원균을 그렇게도 무능하다고 하시는 분들 권율과 이순신의 전투가 원균 보다 나았을 까요?  역부족이 였겠죠?

이제 비난과 도주를 욕하는 맛은 버리고 원균 장수 이하 많은 장수들의 애국심을 본받아 십어보자구요,  

배설장군은 이렇게 깊픈 심해에서 전투를 해보자고 했죠,,,

가뜩이나 중과 부적인데 기습까지 받아 조선 수군은 대패하고 회ㅣ령포로 퇴각합니다.

 

 

용맹을 낼때는 내고 겁낼때는 겁내야  http://blog.daum.net/boq545/11808319

진도 앞 바다까지 장장 430k를 주민 소개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명량해협에 진지를 구축하면서 배설장군은 항몽전투의 선영이 있는 배중손장군의 남도석성에 올라 제사를 지냅니다. 결연한 왜군의 서해진출을 막기로 결심하고 진지를 구축합니다.

그러나 조정과 권율의 비협조로 8.19쿠데타가 읽어 납니다.  그래서 자신에 직분에 최선을 다한후 이순신장군에게 후일을 부탁하고 귀향길에 오릅니다. 당시는 유성룡도 그렇고 이황선생도 그렇고 곽제우 등등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은거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宗義智(임란 전에 입국한 日本 사신)가 공작 두 마리와 조총·창·칼 등을 바쳤는데, 임금께서는 공작은 南陽(남양)의 섬에 날려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軍器司(군기시)에 두게 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보다 40여 년 전, 種子島(종자도)에 들어온 포르투갈 사람들로부터 조총을 얻어 그것을 모델로 국산화에 성공하여 대량생산을 했는데, 명중률에서 당시 세계 제1의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조총을 가지기는 그때가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창고에 처박아 둔 것이다.

 

전쟁에 동원된 장정이 과거준비 위해 試卷 들고 와

1592년 봄, 히데요시는 군사 30만 명을 동원하여 큐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에 本營(본영)을 차리고, 16만 명을 조선 원정에 투입했다. 왜군의 제1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상륙 당일인 4월13일 釜山鎭城을, 4월14일 東萊城(동래성)을 함락시키고 梁山(양산) 방면으로 북상했다.

4월17일엔 제2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부산에 상륙하여 慶州 방면으로 북상했다. 4월19일에는 제3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김해성을 함락시켰다.

4월17일 이른 아침, 왜군의 침입을 처음 알리는 경상좌수사 朴泓(박홍)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왜군이 대거 침입하자 좌의정 류성룡은 戰時 軍政을 총지휘하는 都體察使(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조정은 맹장으로 이름난 李鎰(이일)을 巡邊使(순변사)로 삼아 출전을 명했다. 다음은 징비록의 관련 기록이다.

 

<李鎰이 서울에 있는 날쌘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가고자 하여 兵曹(병조)에서 선별한 문서를 가져와 보니, 모두 여염이나 시정에 있는 白徒(백도: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胥吏(서리)와 儒生(유생)이 반수나 되는지라, 임시로 점검하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試卷(시권: 과거 때 글을 지어 올리는 종이)을 들고 있으며, 서리들은 平頂巾(평정건: 두건)을 쓰고 있어서 군사 뽑히기를 모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만 뜰에 가득할 뿐이었고, 보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李鎰이 명령을 받은 지 사흘이 되도록 떠나지 못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李鎰을 먼저 가게 하고, 별장 兪沃(유옥)을 시켜서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가도록 하였다.>

李鎰이 경상도에 당도했을 때 이미 현지의 지방군은 무너진 상태였다. 그는 尙州에서 겨우 관군·의병 800명을 수습하여 北川邊(북천변)을 끼고 고니시 부대의 北上을 막아 보려 했으나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했다. 징비록은 그때의 패인에 대해 『수십 보밖에 나가지 못하는 활로 수백 보를 나르는 조총을 당해낼 수 없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李鎰의 전술적 실수를 지적했다. 다음은 징비록의 관련 대목이다.

 

<이일은 북천변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도 척후병을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왜군이 이미 尙州 남쪽 20리 지점인 長川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일은 敵情(적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開寧(개령: 지금의 김천) 사람 하나가 달려와서 적들이 가까이 왔다고 보고했다. 그런 제보자를, 이일은 『軍心을 문란하게 했다』고 되레 목을 베었다. 얼마 뒤에 왜군의 척후가 접근하여 이일의 군진을 엿보았지만, 개령 사람이 당한 끔찍한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 사실을 이일에게 알리지 못했다. 왜군의 기습을 받은 이일은 말을 버리고 갑옷까지 벗어던진 채 머리를 풀고 알몸으로 도주했다. 대장이 달아난 가운데 왜군의 포위망에 빠진 우리 군사들은 몰살당했다.>

 

 

 

조정에서는 전방으로 먼저 내려간 순변사 李鎰의 뒤를 받쳐 주기 위해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소문난 申砬(신립)을 都巡邊使(도순변사)로 삼아 출전시켰다. 신립은 忠州로 내려가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습했지만, 그 수는 겨우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종사관 金汝山勿(김여물)은 충주 남쪽 100리 지점인 요충지 鳥嶺(조령=새재)을 지킬 것을 신립에게 헌책했다.

 

그러나 신립은 達川江(달천강=달래강)을 등진 彈琴臺(탄금대) 앞에 진을 쳤다. 병사를 일단 死地에 빠뜨려 물러날 수 없도록 한 다음에 분발시켜 이긴다는 楚漢戰(초한전)의 명장 韓信의 배수진을 흉내 낸 것이다. 징비록은 지형을 잘 이용하는냐 못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면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적이 尙州에 있을 때 신립과 이일이 먼저 兎遷(토천)과 새재(조령)의 몇십 리 사이에 활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매복시켜 적이 아군의 수를 헤아릴 수 없게 했더라면 능히 적을 막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장수들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 험한 요새를 버려둔 채 평지에 나와 싸웠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敵에게 나라를 내주는 것과 마찬가지』

충주전투를 앞두고 신립도 尙州전투 때의 이일처럼 척후병을 내보내지 않았다. 다음은 충주전투 때의 신립과 관련한 징비록의 기록이다.

<4월27일 초저녁에 신립은 군관 한 사람으로부터 『적군이 이미 새재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중략) 이튿날 아침, 신립은 전날 저녁 정보를 제공한 군관을 불러 『어찌 그런 요망스런 정보를 제공해서 군사들을 동요하게 하느냐』고 꾸짖고는 목을 베어 죽였다. 이어 그는 임금에게 『적병은 아직 尙州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는 장계는 올렸다. 그런데 적은 이미 10리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징비록에선 『장수라면 200리 밖으로 척후를 배치하여 적의 움직임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승패는 兵家의 常事이나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신립이나 이일은 匹夫之勇(필부지용)은 있었지만 將帥(장수)감은 아니었다.

 

양산-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를 거쳐 북상한 고니시 軍과 기장-울산-영천-군위를 거쳐 북상한 가토 軍은 문경에서 합류하여 3만8000명의 軍勢를 이뤄 새재를 넘었다. 丹月驛에 진출한 왜군은 지금의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 자리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신립 軍이 진을 친 탄금대 앞 벌판을 내려다본다.

신립은 왜군이 보병인 만큼 탄금대 앞 벌판으로 끌어들여 騎兵(기병)으로 먼저 짓밟고 이어 보병으로 공격하겠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탄금대 앞 벌판은 지금도 그렇지만 벼가 무성하게 자라고 잡초까지 우거진 습지대로서 騎兵戰에는 매우 불편한 지형이었다.

 

왜군은 두 방향으로 먼저 공세를 취했다. 일대는 산을 타고 동쪽으로, 다른 일대는 달래강을 끼고 서쪽으로 몰려왔다. 신립은 두 번이나 기병에 의한 타격을 시도했으나 말발굽이 수렁에 빠져 기동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왜군이 지닌 조총의 유효 사거리는 활보다 수배에 달해 접근전을 전개할 수 없었다.

오랜 戰國시대에서 단련된 왜군은 射擊(사격)과 機動(기동), 즉 野戰에 강했다. 조총은 단발 화승총이긴 했지만, 왜병은 교대사격에 숙달하여 연속사격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신립은 달래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징비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곧 그 나라를 적에게 주는 것과 같다.>

어디로 蒙塵할 것인가

신립 軍의 패보가 도성에 도달한 다음날인 4월30일 선조는 피란길에 오른다. 5월1일 개성에서 宣祖는 蒙塵(몽진)의 방향에 대해 몇몇 대신들에게 묻는다. 다음은 「선조수정실록」의 관련 기록이다.

<도승지 李恒福(이항복)은 『義州에 가서 御駕(어가)를 멈추고 있다가 만약 궁경에 빠져서 힘이 다 없어지고 八道가 적에게 모두 함락된다면 즉시 明나라 조정에 가셔서 사태의 위급함을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해원부원군 尹斗壽(윤두수)는 『북도(함경도)는 군사가 강하며, 함흥과 鏡城은 모두 천연적으로 생긴 험준한 땅이니 鐵嶺(철령)을 넘어 북방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배설은 큰 소리로 팔을 걷어 붙치며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하니 칠천량포구 정박은 불가하니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원균은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니 더는 말을 말거라'라고 호통쳤다.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선조는 김식의 보고를 받고서는 모든 대신들이 입계한 가운데 배설이 했다는 위의 말을 몆전이나 되뇌이고 있었다. (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