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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 망정

自公有花 2014. 9. 21. 12:42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라고하자 이억기 최호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7.15,21;00시경)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함쳤다(원균은 배설보다 11년차 위의 주장이다)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억기 최호등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우린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했다. 원균의 삼도수군이 칠천량 해협에 지쳐서 쉬자고 할 때, 배설은 안된다, 심해로 나가 바다에서 쉬어야 한다면서~~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이순신과 배설의 차이점,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관직에 나가지 않다(전생서주부)가 임진왜란으로 부친인 의병을 시작해서 경상우수사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무과에 계속 떨어지고, 나중 과장에서 말을 타고 시험치다 다리가 부러지죠,(조선에서 최초로 다리부러지고 합격)요행이 유성룡이,,,,,,,, 해서 늦게 관직을 출발하였다.배설은 실력이 출중하고 이순신은 욕망이 출중하고, 두사람은 너무도 다른 캐리어를 가지고 있다.  

 

 

 


이순신이 5년간 먼저 전라좌수사를 해먹고, 삼도 수군통제사가 됩니다. 이에 원균이 자기 아래사람을 임명했다고 동인과 서인간에 싸움이 되어 어쩌 저쩌 하다가 원균이 복귀하고, 이순신이 파면 사형수신세로 압송되죠,

 

이 때 배설은 가장 촉망받는 장수군에 들어있다가  선조와 서인인 원균에 의해 경상우도수사로 차출됩니다. 이에 배설은

배설의 "부산항 상륙 전 왜군 격멸, 또는 심해 유인격파"를 요구했는데, 이순신이 파면된데,,,  권율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동인들 유성룡 비서실장겸 영의정, 참모총장  권율, 국가안전부장겸검찰총장 이원익으로 부터 배설이 견제를 받게 됩니다.  꼼작 못하죠, 정보도 않주죠 단신 도망다닌다 그러죠 지금처럼 핸드폰만 있었다면 배설이 아니라 동인들이 다들 사형됐을 거예요, 

 

칠천량해전서 조선수군이 폭삭망하죠, 사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중과부적이 였죠, 

칠천량해전을 패전이라며, 이들은 배설의 구국적 청야작전을  왕에게 비밀로 하고 이순신을 파견하여, 


 

이순신장군의 8.19일 군사 쿠데타를 하게 됩니다.  

 

 

배설은 병치료를 위해 군권을 넘기고 귀향을 요청하자, 8.30일 허가를 공문으로 줍니다. 이에 배설은 송별회를 하고 9.2일 귀향길에 오릅니다. 9.2일 새벽 병영을 나가자 마자, 동인 군부는 탈영보고를 해버립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죠, 이들은 임금을 속이고 있었거든요, 배설이 야전군사령관이라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거든요,(왕이 배설의 청야작전을 알게되면 모두 3족이 멸함) 선조는 배설을 신뢰했고 신임하였고, 자칮 도원수자리까지도 위협하고 있었거든요,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적들은 2.000여척이 조선에 들어 왔습니다)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배설을 탈영병 도주병으로 왕에게 보고하기에 이르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구요, 전쟁전문가 배설은 이왕 귀향길에 일본군 시마즈 요시히로 적장의 막사를 급습해서 살려줍니다.

일본의 유명한 명장 시마저 요시히로의 전기에 이날 (9.2) 부관 두명과 배설이 적진을 단기 필마로 통과한 훌륭한 무장이라고 하고 있어요, 문제는 다다 시마즈(아들)의 이야기에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세키가하라합전)

 

 

이순신장군의 가족을 왜군들이 살해 햇듯이 당시는 왜군천지 였죠, 그런 시기에 배설을 잡아죽이는건 일본군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죠  그런 시대에 야전군사령관이 귀향해서 안전하게 귀향해서 병치료를 하다가 전쟁 끝나고 2년 뒤에  민심이 흉흉하고 배설의 명망이높아지자 도주와 역모로 몰려 참수됩니다.

 

 

 

시마즈 요시히라는 누구인가?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을 20만 대군을 사천성에서 7.000의 병력으로 대파하고 중국군 8만명을 살해 한 장수죠, 조선군 사망수자는 언급하지 말자구요 중국군 앞에 진을 치고 선봉에 썬 조선군들이 뒤로는 중국군 앞에는 일본군 이였죠,  조선 도공 십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조선과 명나라에서 가장 무서워 한 장수가 시마즈 요시히라, 이 군대가 진격하면 조 명 연합군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요,

 

배설이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사라집니다.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조선 정벌 출병이 차일피일 미루어지죠(여기서 조선전역해전도 같은 종군화가 보내졋었구요 일본은 모두 꼼꼼히 적고 기록해서 조선정세를 알 수 있었어요)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시마즈 요시히라와 가토 기요마사 철군요청서로 (부산 상륙전에 수장될 것이라는 배설장군 이야기가 붙여지죠) 이에야스가 적극 조선 출병을 거부하여 풍신수길의 수하 미쓰나리와 일본내전이 발발하고 철군파 군대들이 승리 했죠, 미쓰나리가 서쪽 오사카에서 영주를 끌어 모으자 군사를 4방면으로 나누어 회군한 뒤 서군을 격파, 에도 막부를 열어 일본과 조선간에는 수백년간의 평화가 찾아 오게 한 주인공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라는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서군에 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결하여 서군이 패배해서 모두 살육되지요, 그런 상태에서 시마즈는 1,500명으로 도쿠가와 본진을 급습하여 유유히 통과하고서 이건 '배설장군에게 배웠다,' 했구요, 문제는 서군이 몰살당하는데 서군편인 시마즈를 가토 기요마사도 공격하는척하고 봐주죠, 아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예 지원을 하고 도와줍니다. 서군진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일본 3대 가문이 됩니다.(철군요청서 때문에 도쿠가와는 황제가 되었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죠) 근데 이순신님은 배설이 도망갔다는데 일본에서는 시마즈요시라 진영을 단신 통과했다고 하니 이거 누구말이 맞는거예요?

 

 

원균장군의 추원포 상륙퇴각명령,

조선수군의 선봉대인 경상우도수군이 원균 사령관의 추원포 퇴각 육지 상륙을 거부한 배설장군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무리 상관이라도 수군의 유리한 아이덴티티를 버리고 육지로 퇴각한다면 정예 특공대라 할 수 없다. 비록 조선 수군이 칠천량서 대패 했지만,  일본군들에게는 대단한 층격을 준 것이다.  전쟁발발 6년 동안 파죽지세의 왜군들과 부산포에서 매일 두달간 원균과 배설함대의 대등한 전투가 칠천량에서 벌어졌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칠천량 해전을 기획 명령을 내린 장수는 원균이 아니라 권율장군이였는데,  그는 쏙빠지고 원균이 패전의 책임을 짊어지고 전사했죠, 만일 승리 했었다면 전공은 누가 차지했겠어요

 

 


오늘날 세월호 희생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도 되지 않고 있었다고,  하고 7시간 보고 여부로 세간에 말이 많은데요, 칠천량해전 패전 후 진도 앞 바다로 장장 200키로를 작전한 배설이 였바꿔먹으려고 함대를 숨겼다고 하고,  7일간 보고를 은폐한 후 이순신이 거북선 12척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 참모총장이라는 작자가 선조가 그렇게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데도  권율은 12일간 배설장군의 작전을 은폐합니다.  

 



난중일기 8.30~9.2 기록


병치료 귀향허가(난중일기) 8.30일, 배설 귀향  9.2일 도망갔다(탈영보고) 9.2일,  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 이순신이였었죠,

귀향한 배설이 돌아 올 수 없게 한 것이죠,  나 같음 너무 좋아 꿈인지 생산지 허벅지를 꼬집어 보겠습니다.^^

 

 

사형수 대역죄인 백의종군  이순신이 전시 전장에 나타났다고,   해병대 야전군 사령관이 품계도 동급인데 '예~예' 하나요,

 부하도 없는데요,  달랑 구라쳐서 3도 수군절도사 품계도 배설과 동급인데요,



 그 취임식(8.19)에 배설이 숙배 않한 것은 당연하죠? 

난중일기에 배설이 숙배를 않했다. 라고 적었는데요,  이순신님이 자신에 신분을  깨닿지 못하고 계시네요,

 

 능력은 안되고,  임금은 쥑인다 그러고,  참 힘드시셨겠네요(네, 않타깝네요)

 

그러니 공부하라 그랬잖아요

실력이 달리니 고생고생에 목숨까지 위험한 고생이죠

 

 

 

 죄인과 사령관은 하늘과 땅차이 신분인데 말입니다.


요즘은 민주화라 인권이 있어 교도소에 사형수가 출소하면 장군들이 '예 예' 한다지만,  예전엔 아닌 걸로 압니다.

근데 명량영화 찍는 사람들 이순신 부하로 그리고, 간첩처럼 몰아서 돈버느라 정신 없죠,,

이순신 장군님을 꼭 빼닮으려는 것인가요,  뭔가요?

 

 

배설이 칠천량서 후퇴한 것을  도망이라 비겁하다 하구요, 동인들 칠천량서 수천명 전사의 죄를 묻겟대요?

근데, 조선군과 명나라 대군이 제대로 일본군하고 싸워나 봤나요?


사천성전투에서 연합군은 7천명 왜군을 만나 8만 명이  전사합니다. 조선군은 포함 않은것 아시죠.

깔린게 백성이고, 무조건 끌어다 쳐넣어 죽든 말든 누가 세지도 않습니다.

 

순천왜성 고니시의 1만 4천군 이덕형 권율 유경 진린과 등자룡 이순신장군님 두달간 포위하고 탈환하셨나요? 시마즈가 대승했다는 소릴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9일동안 도망해서 고니시가 유유히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구요 이때 군량미 3천석을 버리고 무기도 죄다 버리고 도주했는데요, 배설이 10만명 왜군진영을 유린하고 전투중  군량미 200석 빼앗겼다고 원균 곤장  20대 치신 권율장군님 무슨 책임지셨나요,



선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뭐니 뭐니 역적이네 도망이네 해도 배설만한 장수가 없구나!~!

 

 

그래서  선조는  宣武一等功臣 공신에 책록(이순신 배설 원균 권율)  선조임금은 살아 생전 배설장군이 이순신에게 모함 당한 사연을 알지 못하고 탈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배설이 참수된 이후 공을 높이 평가하여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 1605년 배설장군을 宣武一等功臣(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으로서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역모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억울한 누명임을 입증하죠,



그러나 지금 임진왜란 420년이 지난 지금 난중일기와 왕조실록을 보십시요 

 

 

 

명량에서 진을 친 것은 배설이구요,  호랑이 12마리가 좁은 해로를 막으면,  물소 330마리가  앞장서 나올 수 없죠,

앞에 나오면,  격침되는데 누가 서해로 갈 수 있나요.........

 

호남에 가장 먼저 조선수군 전멸을 알리고,  소개령을 내린 것도 배설이지요,  왜군의 호남진출,  한양난입을 지연시키려고 얼마나 430킬로를 항해 했죠, 

 

호남분들 이숭신에 빠지신거 같은데요,

사실은 배설장군이 호남 지키신거를 모르시더라구요,  이숭신께 훅가서 배설이 바톤처치 넘겨 줬다는거도 인정 않더라구요,

 

절대 명량대첩 같은거 하지마라고 당부했겠죠,

왜군은 수가 굉장하다 지키기만하면 된다.  그런거죠 이숭신이 (뒷 다마)골때릴줄은 몰랐겠구요, 어째튼  명량대첩해서 영웅되셨죠,  



이순신 좋습니다. 정신적인 자산으로 만들자구요, 근데 왜 배설을 까냐구요?

 

아마 배설장군이 이순신의 입장이 되었더라고 해도 권율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그래 했을 것입니다.

 전쟁 준비없이 공을 세워야 하는 문신들의 붓끌씨 실록은 훌륭하죠, 누가 팬을 이기겠어요 420년간 누명쓰고 계신 배설장군이 않타깝네요,  실력이 없는 장수들의 모함과 누명쒸우기도 실력은 실력이니까요,,,

 

 


지금부터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를 위한 증인들의 증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경상우도 수군의 이니셜 장작귀선과 배설장군, 출처:조선전역해전도 종군화






1, 칠천량 웅천해전 1597년 7월 8[1597,6~1597, 14]


1597년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에 모여있었다.)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선봉을 세워 배설의 전함 50여척( 5.000병력)이 급습했다.  

 

왜군이 수적 우세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이 불타고 잃었습니다.(적선은 약 30여척이 소실됨) 조선전역해전도는 이때 배설장군의 종군화로 확인되고있다.

 

배설이 3명의 왜장들 길을 막고 600척의 적선과 접전할 때 원균의 3도 연합 수군이 전면전을 해줬어야 했습니다. 그게 아님 지원 사격이든 해상무력 시위라도 해줬어야죠,  그랬더라면 칠천량서 기습도 받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배설 혼자 600척의 적진에 놔두고 구경만 한 조선 수군들의 심정과 공포심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 적군은 10만병력이 상륙하고 있는 중입니다. 간이 부은건지, 미친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7월 8일 하루만에도 배설이 3차례나 적진 돌파를 했다죠? 사실 왜장들이 깜작 놀랄이이죠,  제는 뭐 믿고 저러냐고 겁나죠,  야! 제 상판대기 그려놔라,  꼭 잡아라,  원균의 작전 미스는 이미 이때 나왔구요,  배설군대만 적진에 두고 퇴각하는 것을 봐도 전라좌수군,  충청수군 전쟁준비 안된 것 알만하죠, 



왜군들이 야 제 뭐냐 배설이라고,  야 제 그려서 풍신수길에게 보내자,  이게 종군화입니다. 보세요 전라좌수군 충청군 그림에 있냐구요,  조선전역해전도를 보면은 조선 수군의 비겁함이 느껴져요, 지근에 있든 3도 연합 수군은 뭐했어요,  그게 다 전투도 못해보고 뚱됐잔아요 전멸말이죠,


 

조선백성들이 도륙되고 있는데,  배설이 공격하면 옆에서 응원이라도 해야죠,  냉정하게 구경하고 놀랐겠죠,  그러니 7월 14일 작전회의 때 배설만 심해로 유인하자고 하고 아무도 입 못열었죠,  하기 싫은 전투니 칠천량 포구에 집결하고 있으니,  배설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여차하면 육지로 튈 준비만 하고 있었으니,  배설이 야 깊은 바다로 가자, 내가 저새꺄들 코털을 건드려놨으니 분명 때거리로 몰려 올거다. 고럼 심해에서 깨박내자~("적의 칼날이 목전에 박두했는데,,"배설,)눈물 나네요^^

 

원균이 새벽에 적선 천려척이 오니 추원포로 배를 버리고 퇴각하라는데,  배설이 그걸 따라야 합니까,  그건 도망입니다. 왕명도 어기자고 한 배설이 육지로 튀는 원균을 따라야 하겠어요, 교전을 선택하고,  그리고 50척의 전함 거의 다 읽었죠,  의리 없는 조선 수군들이 전멸하죠 배설이 안구해주고 혼자 살았냐구요,  적진에 있을 때 그들은 구해줬나요?

 

 

나같으면 조선 수군 때려버리고 싶네요,  말 안듯죠 의리 없죠, 죽은 후에도 배설을 혼자 도망 쳐 살았다고 두고 두고 욕먹이고 그러죠,  칠천량 바다가 어캐 생긴지도 모르는 사람들 포위하니 도망쳤다 하는데요,  남북이 꽉힌 바다에요,  다른 장수들은 왜 도망치지 못했겠어요 추원포(고성)로 도망친 원균장군은 왜 죽었냐구요 충신되려구 전사했다구요?



 

칠천량은 앞뒤가 막힌 곳이예요,  갇혀 있다구요,  동서로 1,000여척의 왜군이 삼중포위망이예요,  밀리면 곧 죽습니다.

 그러니 뚫죠 교전명령내리죠  600척 적선 속으로도 돌진 했든 배설인데,  포위망 깨는 것이 힘들었겠죠 누굴 돌볼 입장 아니죠

당장 배설장군이 탄 배에 적군이 5척 포위해서 백병전하느라 아우인 배즙장군이 눈앞에서 전사합니다. 시신을 돌볼 경황도 없이 수많은 적군과 백병전입니다. 화포도 필요없는 상태의 포위망을 깨고 봐야 하니까요,,,



 

뭐 랬어요 왜군들 부산항에 상륙전에 깨자고 그래 얘기 해도 않듯고,  칠천량 피항하자니 지쳣대요,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쳐 쉰답니다.  배설이 총사령관이 아닌게 원통했갰죠,  근데 진도 앞 바다까지 장장 430킬로를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비상상황인데,

 이숭신이 와서 배를 주웠다고 합니다.

 

이제 나라는 끝나겠네요,  이장군 공세우려지 말고 지키기만하소,ㅡ  앞에 나서는 배들만 함포로 때리고, 지키기만하라고, 나 집에 가서 쉬어야 겠다. 전쟁 공포증 걸렸다 그러니  군대 넘겨주려니,  제발 뒷통수만 치지마라 ~ 나이로 보면 8년 위의 흥아죠,

흥아,   나 집에 가는 길에 왜놈들 손좀봐줄 일 있은께,  믿고 병영을 나서자 마자 탈영보고입니까? 쿠데타장군의 비정함에 뭐라겠어요,,

 

 

 

무를 숭상하든 왜군들이 조선에서 배설장군을 무서워 합니다.

칠천량 해전으로 배설은 일본 풍신수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까지 알려지고 존경까지 받게됩니다. 당시 전국토가 유린되어 이순신의 가족들이 왜군에게 학살 되었든 시절입니다. 배설이 얼마나 유명한 맹장 이였는지는 일본 내전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일본에 까지 침략국 장군들로부터 존경받든 용맹이, 죽어 후세에 후손들에 의해 영화로 도망자로 간첩으로 찌질이로 되었습니다.

 

배설없는 이순신 장군의 대첩 가능합니까, 


침략군 3명의 장수와 600척의 왜선단에 50척의 수군으로 공격을 가하자 이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조선해역전도를 그려 당시룰 기록해 둡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대찬성합니다. 그런대 대부분의 미화 스토리들이 배설장군의 기록이라는 사실에 배설장군이 얼마나 억울 하겠습니까,  외국에 영화가 수출되어 조국의 한국인들이 비하되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당시 전쟁에 참여한 장수들을 모두 불러내는 모의 청문회를 하겠습니다.


발제1/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에서   2개월에 걸쳐 제대로 한번 적과 싸운적이 없이,  사천왜성에서 시마즈에 동일원장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9일동안   조명연합군   권율 이순신외   모든 장수들이 도주(퇴각)했다. 군량미 3천석까지 넘겨 주면서, 그것도   젓발이 고니시 군에게 , 사천성서 시마즈의 7천 군사애게 조명연합군   20만이 대패했고 10만명이 전사하고   조명연합군이 도주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배설이 적군 모든 장수들 10만에 돌진 한 것과는 너무도 대비 된다.   일본은 풍신수길 사망으로 물러 간 것이지, 조명연합군이 무서워 물러간게 아니다. 배설의   문양인   장작귀선을   왜군 병사들은 무서워했다.

 


발제2/경상 우도수군이 전함 50척 5천명으로 조선 수군 단독으로 일본 전체 600척 전함과 병사들에게  집중해  무모한 공격을   그것도 두달간 한 장수는 조선에   배설 뿐이 였다..불운하게도   비록   적군들을   상륙전에 공격할 기회를 놓친 것이 배설을 비운의 장수로 만들었다. 일본은 바다에서 두달간 발이 묶여 엄청난 차질을 빚었다. 풍신수길은 12만 대군을 부산포에서 연일 해전을 하러 보낸게 아니라 조선 강토를 점령하라고 보낸 것이 차질이 생겼다. 더구나 이역만리 조선 땅에 첮발을 내딪기도 전에 조선수군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은 일본군이 육지 진출이 제대루 되겟는가,



발제3/조선의 백성들은  왜적을 막아내지 못한 배설을 욕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조선과 명나라의   황제나 선조   대신   장군   누구도 배설을 욕할 자격이 있는 살펴보자,   호남분들이 훅간  이순신님까지   왜군들을 맞아 정면으로 싸운 장수가  어디 있냐구요,  다들 도망다닌게   사실아닌가,  그것도 놀라 순천왜성서  서로 앞다투어   9일간 도망했다. 오직  14만 왜군들을 격멸하고자 도전했고,  조선수군 경상우도수군 단독으로 두 달간  적진을 유린했든  유일한 장수가 배설이였고, 칠천량서  배설의 의견이 묵살되어 실패했다   왜군들이   볼 때   풍신수길의 조선 하삼도 백성 학살 계획에   영향을 미친 장수는 조명연합군이 아니다.



배설장군이 7월   15일 밤 작전회의에서  '우리(조선)의 군사는 외롭고 약하며 겁낼 때는 겁내야 합니다.'  장작귀선 12척과 판옥선 40척으로   600척   적함을 공격은 하지만,  상대는 강하다 못해 중과 부적이죠,    조선수군들은 최선을 다했구요,   임잔왜란 때 20여 일 만에 파죽지세를 어느명장도 막지 못했고, 이여송도 패했었죠,   그것도 10만 왜군이 몰려있는 적진을 유린했기에   정유재란의 대학살극이 좌절되는  원인이 되었고,  모든 왜군들애게 처절한 전투를 보여주었습니다.



전쟁에서 침략군이 유리한 것은 일반적인 현상으로 전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부산포에서   해전은 예상하지 못했든 돌발 변수였고, 전투 선택권이 조선수군이 장악했었다. 이 자체가 중요하다.   침략군들은 여유가 있어 종군화를 그려 적진에 돌려  참고하도록 했었는데,   오히려 이로 인해 조선수군을 두려워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정유재란이나   임진왜란이아 차이가 없고,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먼저 침략원흉 풍신수길부터 한마디 합니다.

평수길/ 나에 명령은 조선 경상 전라 충청 인종청소후 일본서도주민이주 조선(왕의 항복)군대가 뱃멀미를 해가며 부산에 10만이 도착 정박한 상태에서 배설군대의 공격에 두달간 공격받았다.  매일 전투가 벌어지고,  발이 묶였을 때 왜군들의 공포심 언제 어디서 나타나는 조선수군들   "야 이거 이러다 여기 물귀신 되는거 아냐,   두렵지 읺았겠나"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일본 병사들 훅가게한 배설이 조선정벌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평수길/ 죽으면서 한 '가메 배설이 있다.   '임진란 이후 일본에 불은 바람이고 일본 내전의 동기임은 시마즈 요시라가 말한바 있다.

황윤길 /풍신수길 분명침략할 것 입니다 (큰 일났다. 임진란 터진다 서인들이여 전쟁준비를 하라 미친조정이요, 왕이네)




김성일 /절대 풍신수길은 침략 않합니다 유언비어이다. (황윤길이 서인놈이 권력 뺏으려고 어림없다. 전쟁은 터질텐데, 어쩌되겠지, 일단 권력부터잡고보자)


선조대왕/ 선조 절대 항복 못한다. 무조건 36계로 도망하겠다. 갈데까지 가보자 (약소국으로 끈기와 은근은훌륭하다) 풍신수길 임진란 선조를 사로잡아라 (실패) 정유재란 경상 전라 충청 백성 인종청소 하고 일본서도 주민을 이주시켜라 (선조새끼 항복하겠지)


유성룡 / 동인들 권력은 절대 사수 권율 군권탈환 유지  이순신 복권과 삼도수군권장악 고니시 경상 전라 충청 총독희망 동인들과 온건히 교류 정보를 줌,


가토/  하삼도 총독보다 일본귀국후 기회를 잡고싶음


배설/ 침략군 격멸(10만왜군 부산일대 2.000척 적선을 두달간 매일 공격함)칠천량서 원균의 명령으로 실패함,  거북선 12척을 진도로 이동 (호남과 한양으로 왜군이 진격치 못하게 방어기지세움)


원균/ 권율의 육군의 지원이 없어 전쟁 못하겠다. 칠천량서 죽더라도 쉬자.


이순신/ 엄청난 23전 23승,  왜군전체 출병병력보다 많은 왜적 격멸 (희망사항 그러고 싶었다. 사실여부를 떠나   나쁘게 볼건 없e다 )

동일원 /과 이여송/ 중국군 총사령관  일본은 내몰고 총독을 해야지 (동원일 시마즈에게 패한 후 살아서 귀국. 이여송 벽제관서 패배 살아서귀국후 요동총관이 됨)


심유경/ 일본군을 구라치든 뭐든 조선에서 내쫏내겠다 (평수길 요구수용 내땅아니니 남한을 일본에주고 황제 딸도 후궁으로 주겠다.중국에 이쁜 여자 많으니, 달라는대로 해주겠다)


중국황제 /내 딸을 평수길에 주겠다한 심유경 사형시켜라,  이여송 요동총관 (씁새들아 조선땅을 주든 말든 왜 내딸을 거론하냐 내병졸을 동일원이 가 8만명을 죽여. 싸우지 말고, 조선에서 자리만지켜)중국병사들 왜 우리가 왜놈들 칼밥이 되냐 (조선서 맘대로 놀아보자, 절대 전투하면 뒤로 슬슬 물러나야된당, 쉐쉐)



왜군병사들/ 전공을세워 출세하거나 조금 낳은 지위로 잘 먹고 가족부양하게 되은 것(조선 침략은 고사하고 부산 앞바다서 다 수장되는거 야냐)


이원익/ 왜군은 새잡는 조총들고 파죽지세니, 백성들이여 군에 지원해라 밥먹여주고 다한다 (방법이 없네)


조선병사들/ 전란으로 양반들 망해 갈 곳없었는데, 밥먹여주면된다 (새총맞으면 간지러운게 아냐,   다죽더라 병졸짖하면서 밥얻어먹고, 전투하면 최대한 견뎌보고, 여차하면 선조처럼 토끼는거다. 다른 군대로 또 가면된다)


야키 자키 /  나도 조선출병으로 출세 할 수 있으려나 ( 순신형님 왜 나만 가지고 그라요, 부산포에 가면 쟁쟁한넘들 많수다. 내가 1.500명 동원하느라 기둥뿌리 빠진게라   순신햄요 부산으로 가토 잡으로 가시고, 나 서해로 노략질 좀 할랑게 비켜주쇼)




유경/ 동원원이 총독되면 국물있겠지 (20만 동원일 중군이 시마즈의 7천명 왜군에   결멸됐다니 걸음아 나살려라, 전군 전투중지 도망하라 9일간 후퇴)


유생선비들/ 새총들고 오는 왜놈도 못막냐,  배설아 니가 무장이냐?  내가해도 그보단 낮겠다.(나가 글만해서 그러지, 악플 달고 입으로 주둥이까는건 도망이나치는 배설보단 낫다)




의병들 /관군이 과멸되었으니, 저히들이 나서겠다 (전쟁으로 할게 없네, 농사도 못하지, 캠프나 차려 이판에 출세해봐, 나라도 지키고,,,,


일본육군병사들 /조선군은 우릴보면 도망한다더니,   조선상륙 후 뭐부터 챙겨야지 (야 ~저 북소린뭐지. 이거 상륙도 못 해보고 가덕도, 다대포  칠천량 물귀신되는거 아냐? 귀신같이 생긴 저게 '배세루 자바라라고' 난리네, 야 나 집에 갈래, 조선본토 재물보다 내목숨이나 지켜야지)


양호의 병사들 /조선군이 용감하다매, 니들 전쟁이니, 니들이 우리 앞에서 전투해라(조선군들을 앞에세우고, 우린 뒤나 지키련다. 조선군 유성룡아 소잡아 보내라, 고기나 실컷먹다 돌아가야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풍신수길의 조선출병독촉에 ~폐하, 아직 출병준비가 덜되어나이다. 조께 기다려주시요 (고니시 가토가 조선 총독하면 뭐 돌아오나,   소문 다 들었다. 부산항 상륙전에 갱상우수군인가 거북배세루 만나 부산까지 가서 죽을 필요있나, 태풍도 온다든데,   내일도 해가 뜨겠지, 내일로 미루고 또 미루자 )


미쓰나리 /  풍신수길폐하, 도쿠가와를 제가 죽이겠나이다 (도쿠가와 조선정벌이 눈앞에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출졍하나 대일본제국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다. 내 칼맛을 보려주마



고니시/ 조선 동인중신들에게 '가토가 부산에 상륙하니 이순신은 미리 준비했다 죽이시요' (경쟁자 가토를 조선군이 잡게하고. 도망다니는 선조가 양위하면 총독할 것, 대비해서 동인조정에 인심쓰둬야 말들어 먹겠지)


동인들/ 고니시가 정보줬어요 우리동인들 잘하죠 (동인만세)우들은 우수해요 왜장과도 통해요^^ 고럼 고럼 우수하지...


선조 /그래! 고나시는 하늘이 낸사람이다(이번에 순신에게시켜 가토의 목을베자, 신난다. 조선사직이 이제 잘 되어 가는군)



내시/사관   에고 뼈가 녹고 피가마르고(동인과 우리가 남이가, 원균이 고마 죽었네요 드뎌   동인장수가 출전해야지)  
김식 /  전하 원균장군이 전사한것 같습니다 (패전의 책임을 살아남은자에게 물어야 한다)

도도/ 야키자키 야스히로  /가토 / 저 귀신 같은게 조선의 수군이냐 (성가시네 배설아 물러가라, 우린   너하구 해전하려구 일본서 부산까지 온게 아냐, 수송만하고 가야하는디, 성가시네,   너두 순신처럼 영웅되려구 하냐?  빨리 시골로 귀향가거라)


산적두목 /내가 배설장군 따라 전쟁하다 나라꼴이 더러워 그분그만두시니 할 것없어   산적하고 있지. 그런 사이야( 내가 그래도 산적두령인데 부하들이 존중해주겠지)


산적들 /우린 다른 비적들과는 달라요 (배설장군의 부하이지. 산적이 아냐 .때가 오면 큰 난리가 나면 뭐가 될거야)
백수선비들/  임금은 언제 밥벌이할 자리를 주시려나 (문학과 인품은 내가 딱인데. 글공부 평생해도 쓸곳이 없네, 악플이나 달까 좋아 도망자 비겁자 배설이나 십어보자)



전라좌수사 김억추장군 /거북선은 배설장군이 만들어서 숭신형님께 넘겨 줫지라 (명량대첩은 순신이 작픔이 아니여라 내가 한 것인데)
한준겸경상도관찰사 /배설장군 시신 내가 장례지내고 파직되겠소 (배설은 정직하고 유능한 장수요,   맘씨가 착하니 후일 복권도 되고 인조임금의 장인이되겠네요)


나대용과 나주목수들 /애써 거북선 만들어줬다 (세계첨단 전함이다.중국 일본은 못만드는 기술이 있었고, 내가 만들었지라,,ㅁ)


순신님께 훅 가신분, /칠천량 패전후 두달이면 배12척 못 만드겠나 (네 저는 하루에 12척 만들 수 있어요, 종이배를 만들면 되죠 배도 배 나름아닌가요)


토요토미 히데요시 5대로/   조선 정벌로 위대한 대일본 제국만들자 (이에야스 겁쟁이야 조선출병빨랑해라, 시마즈 7천명이조명연합군  20만 대군 격멸했다)


시마즈 요시라 /조선 명나라군 백만이 와도 겁나지 않아요, 이에야스 장군 조선 출병마소,  오지마라 ( 나 배설장군에게 아들과 험께 목달아나서 머리 잊어버릴뻔 했다. 거북이 배를 갖고 이에야스를 맞아주면 조선땅 구경도 못하고 상어밥될거야ㅋㅋ)


명나라 총사령관동일원장군/왜놈들 몰아 내 주겠소(시마즈장군 황제의 병사를 8만명이나 목자르다니 너무하잖소 조선총관 한번 하려고 했는데ㅡ이런 ! 망첫네 ~아호띵!)

도고제독/이순신이 최고여 (나 풍신수길 잘했다고봐, 도쿠가와아에야스가 거북선 무서버 해서 다된 조선정벌 실패 했거든♡배설은 왜 도망만다니냐?)근디 내가 이순신 최고라고 한적은 없어,나를 팔아 먹는 한국인들 그래  그러나 마음은 그래,,,


일본군에 잡힌 조선포로들 / 전쟁은 싫어, 집에 가고파 (야 전쟁이 끝났다는데, 왜 우린 일본가는 배에 잡혀 있나? 조선군들은 전쟁 끝났다니, 이제 전쟁을 시작하려는가 보네,   앗! 우릴공격하나보네요,   고럼 일본끌려가서 노예하는 것보단 조선물귀신 되는게 낳지)

동인 윤지홍/ 드뎌 전쟁은 끝났구려 평화로다 (전란통에 서인들 다 제거 했지롱, 고럼 나라야 밍하든 말든 정적을 제거해야 내 가족들하고 편히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걸 모르시능군, 정말 임진왜란의 승리는 동인이지)



고니시유키나가/ 유성룡 동인노훌륭하므나다 (나가 말이지, 일본서 조선총독한 번 해먹자고 14.000병력을 끌고 왔는데, 시마즈 7천병력이 좀 도와주었다치고 노량해전에서 숭신이 6만명 왜군을 수장시켰다는건 구라같은데~아냐 조선도공들 납치해 가든 중이니 3만9천명은 그런거 아닐까, 여튼 잘 모르겠네, 어찌된 영문인지 숭신형이 구라치겠어 ㅋㅋ)



정한론발표 규수출신 야도/ 조선은 일본이 되는 것이 행복이고, 풍신수길은 위대한 황제여 (일본육사에서 조선의 이숭신을 가르켜야해, 동인들은 일본인 자격이 되지요, 임란 당시 고니시를 흠 모하였지요?   배설 역적중에 역적이다. 일본이노 대업을 망친 이에야스 같은 비겁자다)



가토 기요마사/ 이숭신이노훌륭하므니다. 배설이노 도망자므니다 (배설 너 그면 안된다. 진실을 말해줄까, 사실 우리가 1.000여척 배로 육군을 상륙시키려구 한배에 400~500명 씩 승선해서 부산에 있었잖어,    그때 북치고 난리치며 우리 600여 합선에 공격했지 무섭더라,   이거 다 수장되는거 아닌가 놀랐지, 6~7두달간 너에게 매일 시달리고,  너는 매일 공격하고, 참았지, 병사들에게 모두 엎드리게 해서 은폐하고 수군을 앞세우느라 너에게 당했지,칠천량해전때 육군들은 이미 상륙시킨 후 였구 사실 2.000여 함선이였어 토요토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배세루자바라 그랬지.)



원균 / 전쟁에서 패했다고 욕들 마시요,  패전에 책임은 배설이 받았잖소,  미안하구 이젠 용서해주시구려 (숭신 권율 너히들이 한 사천성   순천성 울산성 전투에 명군까지 수십만 끌어들여 포위하고도 왜군 8명 죽이고 8만명씩이나 피살되냐,   아메리카 인디언과 백인들 싸움 보는 것 같네, 칠천량서 한 전투는 그것보단 훌륭했는데 왜들 욕하냐?


배설 이 친구가 왜적많이 죽였고, 우덜 죽은 장수들도 8명은 넘게 처치했다. 근데 왜 420년간 욕하는지 모르겠다.    순천왜성전투 너들 5만 5천명서 몆명잡았냐? 칠천량서 나가 전사했지만,  성적이 사천성 순천성전투보단 나았네, 권율이친구 배설 배10척 군량미 200석 빼았겨다고 날 곤장 20대나 치더니 순천왜성 군량미 3천석빼았기고 숭신이 곤장쳣냐?)


토요토미히데요리/임진왜란 때 우덜 일본군 20일만에 파죽지세로 의주까지 몰은 풍신수길 아바이 훌륭합니다 (같은 병사로 준비는 더 했는데, 정유재란은 왜군의 공격 속도가 늦어지는 이유가 뭘까?   조선정벌이 성공해야   내가 황제먹는다. 가메 배세루땜시 황제 못먹는거 아냐   불길하네)



황윤길/전쟁준비는 서인이하고 동인은 입으로 전쟁했습니다 (원균 배설이 적선600척을 공격하느라 군량미 200석 빼앗긴 죄를 물어야 한다는 동인들 조정이니 어캐 전쟁을 하나요,  순천왜성 공격에서  이덕형 권율 이순신은 패전해서 군량미 3천석을 빼앗기고 무기마저 빼앗겼는데도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서인들의 전공을 고의로 은폐하고 자신들의 공은 허무맹랑하게 보고해서 출세하려고 했어요 억울합니다)



조선백성 사형수/전쟁통에 먹을게 없어, 조선 군대의 사과 12개를 훔쳐 아이들 먹였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였습니다. (누가 죄를 짖고 싶어 짖냐구요? 나두 한때는 농사마지기 했던넘인데, 왜군들이 농토에 진치고 있으니, 도둑질 해야 했죠, 나라를 침략당한 죄임에도 나에 목을 자른다 합니다   우리가족은 다 죽게 생겼네요, 재판관이 이숭신이 아니라 배설이였음 기대했는데 그분 귀향했으니 감사히 효수되어야지 방법이 없네요)


마다시/저는 이름도 없는 장군인디요,  이름 올려주시니 감사하므다 (정유재란에서 왜군들이 조선군 겁내지 않았어요, 조총의 위력앞에 조선군은 인디언 정도로 취급되었죠, 단지, 조선 수군 '가메 배세루 잇다'거북선이노 병졸들이 무서버했기에 육지진군이 좌절되었고,왜장들도 그랬지만 저는 이숭신님께서 이름을 남게 해주셧네요 감사하무니다)


안휘/이숭신님   최고 최고예요, 근데 저는 배설장군에게 활을 쏜적이 없어요, 아마 감독이 구라치는거 같군요, 오해는 마슈 같은 조선장수들끼리 그럴순 없죠, 저는 이숭신이 아니예요 (저는 명량영화에 배설장군을 쏴죽이는 거로 나올줄 알았어요, 조선군들은 왜군이 오면 명나라군 못지 않게 서로 도망가려는데 정신없었죠, 토끼는데도 명나라군 제들이 앞에서야 된다며 조선군이 뒤에 서게합니다. 즉 요즘 말로하면 관심사병 같은 대우였죠)



일본동부 전현직 군대연합/도쿠가와 이에야스 옛날   얘긴 마슈 우린 쓰나미로 몽땅 거들났소, 그건 옛날 이야기고, 우린 돌파구를 찾고 싶어요, 이웃인 조선을 치려고한 풍신수길이 나쁘다 못하겠소 (백마디 말과 글보다 뭐 당장 살길 열어줘야하지 않나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없었더라면 한국에 이주해서 쓰나미 김박씨 돼었더라면 쯔나민 피했겠죠, 역사에 가정은 금물이므니다)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선조 젖되어 조센 끝났다)



최호충청수군수사/우린 장렬히 전사해서 충신이 되었어요 (판옥선 한척당 충청수군은 약 60명이 였고, 칠천량서 노를 젖고 지쳐 쉬고 있을 때 배설장군이 전투를 하는 것을 구경도하고 해상무력시위도 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닺을 내리고 포구에 정박했다. 왜적이 한척당 200명씩 앞뒤로 올라오니 아무리 무예가 뛰어니도 소용없었시유, 나두 쓰리스타인데 자살하고 싶었겠소   혼자서 다섯명 상대 안됩디다. 일본도가 예리해서 한대 맞고나면 정신이 없이 죽는지 사는지 의식이 없었죠,  어째튼 한명이되든 반명이든 죽일 수 있음 죽이려 했지만 사실 앞에 적과 칼싸움 하는데 뒤에서 옆에서 칼을 날리니 분했어요,  미안하지만 개죽음 병사들께 미안하유)



배즙 경상우도 조방장/저는 배설장군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조방장 입니다. 날씨가 않좋았어요 (배설장군님과 한배에 탓었는데 칠천량의 밤에 안개와 이슬비로 한치 앞도 않보였어요, 장군님의 명령으로 우린 닺을 내리지 않고 대기 상태로 주둔했죠, 왜군들의 기습에 정면 공격했어요, 우리 배에도 5척이 둘러싸고 기어 올랐어요

백병전에서 저는 원없이 적에 목을 베고 전사했죠. 날씨만 좋았다면 더 많이 쳐치할 수있었는데.. 형님만 두고 눈을 못감겠네요   너무 적군이 많았어요   힘이 떨어지자 적군이 제게 칼로 치고 총포를 쏘아대더라구요 6~7명인가 되었죠, 저두 그랬어요 '날씨가 한이로다 나에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마라'하면서 눈감았는데 뭐 그게 잘 못되었나요)


시마즈 요시로 /정유재란 마무리는 노량해전이므니다. 조선수군 대장 이순신, 명나라 수군 부장 등자룡을  전투 한방으로 저승으로 보냈다. 고전에 7천병력으로 조명연합군 20만을 사천성서 10만명을 사살한 후 고니시를 포위한 순천성을 도와주었다. 휴전회담 약속을 저버리고 뒷 통수 까길래 손봐주었죠,   애초 이 전투는 고니시가 일본조정의 명으로 전쟁 끝났다하면서 곱게 철수하는 걸 이순신이 우겨서 마지막 전투를 한판 벌인거다. 이순신은 안해도 되는 전투를 사서 했는데 결과적으로 패해서 물귀신이 되었으니 마지막 꼴이 좀 우습게 되었다.) 그라구 배즙장군 그건 이숭신이 한말 같으므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세키가하라의 패장이다. 당시 요시히로의 후퇴는 ‘시마즈의 전진철수[島津の背進]’(배설장군게 배움)라 칭송 받으며 무명(武名)을 높였다. 요시히로의 무명(武名)은 시마즈의 큐우슈우[九州] 후 손들이 후일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되고 도고 제독도 포함된다. 세키가하라전투에 패하고 살아남은 유일한장수로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철군요청 인연으로 영지를 봉해주고 일본의 3대 가문으로 성장하게 지원해주었다(우리일본에서는 전략적 후퇴를 욕하지 안으므니다)


전라좌수사 이억기/저는 이순신의 모든 것이지라 (사실 분통터졋어요   닺을 내리고 있어 어캐 배를 움직일 수 없더라구요, 배설장군의 심해로 가서 쉬자는 말이 뭉득 떠 오르더라구요,   분하죠 저의 분신인 5천 병사와 전함 60척이 괴멸 되는 것을 제 눈으로 지켜 보게 될줄은 몰랏소

부산항 상륙전에 왜군을 격멸하자는 배설장군의 말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은 것이 후회되요, 우린 가덕도서 오느라 지쳐 스러지기 직전 이였어요, 그러니 왜군들은 바다 건너 노를 저어 왔을 텐데... 그 타이밍을 놓친 거이 한이죠, 하여튼 제가 전사해야 영웅되겠죠, 전사했습니다)



등자룡 명나라 장수//노량 해전 때 이순신이 빌려준 판옥선 2척 중 1척에 휘하에 군사들과 타고 일본군과 전투중  일본군 시마즈 요시히로군졸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당시 70세의 노장(배설장군 귀하가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의 목을 쳤더라면 이순신과 내가 이렇게 죽지 않았을텐데 유감이요, 그 때 목을 왜 날리지 않았소 궁금하요, 후일 우리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그 피해가 보통아니요, 시마즈 가문이 큐수 제일가문으로 청일 중일 전쟁의 원흉이요, 배설장군께서 시마즈 목을 취했더라면 한일합방도 없었을 것이요, 이에야스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시마즈를 치라고 했는데두 가토 기요마사도 하는척하고 시마즈를 도와주고 배설장군이 책임져야하오~ 세숴~ 씁새!)


이완용/1910년 8월 총리대신,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합병, 어전회의를 소집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寺內正毅]의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한일합병의 1등공신 1등 백작과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 15만 원을 받았다(명량영화에 감사드리고,배설장군 덕분에 매국노역을 벗게되어 영광이요, 사실 1597.9.2일 배장군이 시마즈 요시히로를 살려둠으로서 그 후손들이 대포 조선 중화학공업을 해서 조선은 불가항력이였소, 난징 대학살을 보시요, 시마즈가문이 이어진건 배설장군의 책임이요, 난매국노가 아니요, 명량 영화로 이젠 매국노의 자리를 넘겨드리겠소)



난징대학살 주범   마쓰이장군//전범1937년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12~ 1월까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30만이 넘는 중국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난징 인구의 절반(명량영화로 덕보신 이완용선생 고맙소, 사실 시마즈 요시히로 장군의 후손들이 큐슈에서 무기 군수산업을 300년간 발전시켜서 사용한 것뿐, 난징학살의 근본 제공자는 한국인 배설장군이요, 임진란 때 시마즈 요시히로를 왜 목에 칼만 들이대고 살려주었소,


 그로 인해 시마즈 가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으로 일본 근대화 군수산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였소   그게 다 '가메 배세루 이다이' 풍신수길의 유언때문이요,   절대 조선업에 있어 한국에 뒤져서는 안됀다는 시마즈의 유업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소, 난징학살은 우수한 일본의 군수산업의 수요를 위해 불가피했소)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장군// 다들 너무하시네요 (시마즈 요시히로 아들로서 아바이 유업을 승계했스므니다. 1597.9.2 가메 배세루 장군이 우리 아바이 목에 칼침 않해스므니다. 제 목도 안 날려스므니다. 조선 부산 칠천량바다서 가메 배세루장군에 용기에 놀라스므니다. 그러다 육지에서 목날라 갈뻔 했는데, 살려주엇스므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요청해서 일본 들어가니 내전이노 발생해서 우린 풍신수길 편에 서구, 도쿠가와와 전투해써 패햇지만, 우린 그렇구 그런 사이라 살려두고 지원도 받아스므니다. 아마 일본에서 세키가하라에서 패전하고도 지원받고 살려준 가문은 우리밖에 없으므니다. 다 가메 배세루 쇼군 덕분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화 우리가 시켜주엇스므니다)

 

 

 

아베수상/여고생처럼 놀지마라.. (시마즈가의 300년 절취부심 큐슈의 조선 .군수 산업 한국 배고프다해서 근대화시켜주엇스므니다. 조선 중화학 세계시장에노 덤핑치고 이쓰므니다. 정신이 고교생밖에 안되므니 한국이노 싫습므니다.혐한해서 독도노 빼앗고 시프므니다)



필자는 명량영화에 대해서 여러분 어캐해야 하겠습니까?  

국제형사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회부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사건은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겨야 하겠고.

그런대 420년 전 배설장군   사건도 가능한지요?

배설장군이  그냥 도망자로 비겁자로 있어서는 너무 큰 손실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가문에 대적하려면 삼성 현대 같은 기업보다도 정신적으로 일본을 이길수 있는 배설의 정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한국은 역사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신화와 역사를 구별 못하는 것 문제에 문화계까지 그래 놀아나니 일본에 역사왜곡을 말 할 자격이 있을까요?



1)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풍신수길의 절명은 (亀 裵楔)"ベッセル いたい....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이는 거북선과 경상우도 수군 裵楔이 조선침략에 영향을 주었고,  세키보네, 아다케보네, 보고, 등등의 자신들 전함 이름대신 지금도 일본에서는 선박회사들 이름이나 바다의 큰 배들을 "  ベッセル "라고 사용하고 있다.^^ 




동서 화합을 강조한 배설장군 // 패장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동서 화합이 나라의 만복 부흥의 근원이다>

동서 양가(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국가에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패장으로서 한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이다. 일본의 패장과 한국의 패장 문화의 차이가 느껴진다.


 

정유재란 당시 배설장군의 적본진 통과로 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살아려준 시마즈 부자는 이후 일본으로 철군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서다가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대패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 출병 관련공로로 살아남아,  패장 시마즈 요시히라는 320년간 메이지 유신, 정한론, 근대화 산업화의 기수가 되었다. 그리고 끝내 한국을 병합하는데 성공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다스리다.

 

시마즈 가문은  미국에 쫒겨 1945년 해방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을 근대화시킨  큐수일대(조선 대포 군수산업)의 산업의 근본적인 토대는 시마즈 가문이 300년간 읽으킨 배설을 이기겠다는 집념의 결과였다. (시마즈 요시히라 세키가하라합전)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4~1599.1] 일본의 침략,

선조 24년(1591) 일본에 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귀국했다. [10개월 일본기행]《국조보감》

 

 

1, 통신사 황윤길(정사)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왜국의 사신 평조신 등과 함께 오면서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선조가 불러 보고 하문하니,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상이 하문했다.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는가?”

 

황윤길이 아뢰었다.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황윤길의 말마다 김성일은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했다. [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모두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 라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동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것은 모두 서인이란 이유로 배척했다.(출처:선조수정실록)

 

 

2, 이여송의 원병(유정, 동일원,양호)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지금의 랴오닝 성[遼寧省] 톄링 현[鐵嶺縣]) 사람이다.임란시 원병으로 출병 1593년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벽제관(碧蹄館)에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에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뒤 화의를 위주로 사태를 수습하고 그해말에 귀국했다.그 다음해 요동총관이된 이여송은  토만의 반란군과 대적하다 요동서 전사함

 

3, 왜군의 투입규모와 날짜,(세키부네, 아다케, 약 2,000척 +)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の海戦に対して本格的に論ずるのに先立って日本水軍の規模を把握して見る事にする.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派兵された日本軍の規模は陸軍 15万名余水軍 9200人だ多くの日本資料で紹介するある.

 

 

 

거북선 "ベッセル

 

倭軍を編成

1582年の本能寺の変で織田信長(1534-82)が倒れた後、倭国の支配者となった豊臣秀吉(1536-98)は、次なる目標とし て「明」の征服を決意。十分な海軍力を持たない秀吉は、1586年から 2000隻の船の建造を始めました。1587年には朝鮮軍の強さを測るため、26隻からなる襲撃部隊を朝鮮南岸に派遣し、朝鮮軍は問題にならないと結論づ けていましたが、朝鮮半島を通り陸路「明」に侵攻する計画を立て、そのために李氏朝鮮を倭国に服属させる交渉を側近の小西行長(?-1600)と対馬の宗 義智(1568-1615)に命令。当時、「明」の冊封体制下にあった朝鮮との交渉が決裂すると、1591/8月に秀吉は「唐入り」を宣言し、一番隊から 九番隊までの9軍団総勢15万8000人からなる朝鮮出兵の軍勢を編成し、大阪城から名護屋城(現・佐賀県唐津市鎮西町名護屋)の前線司令部に旧暦 4/25に出ばりました。

 

 

倭軍을 편성

1582년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1534-82)가 넘어진 후, 야마토국의 지배자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98)는, 다음의 목표로서「명」의 정복을 결의, 

 이미 히데요시는, 1586년부터 2,000척의 배의 건조를 시작 1587년에는 조선군의 힘을 측정하기 위해, 26척으로 구성된 습격 부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조선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 을 내었다. (文禄の役)을 준비하기 위해 병력,병참수송을 위해서 2000척의 배를 준비했다

 

 한반도를 통해 육로로「명」에 침공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위해 조선을 야마토국에 복속시키는 교섭을 측근의 고니시유키나가(?-1600)와 대마도의 宗 義智(1568-1615)에 명령.당시 , 「명」의 책봉 체제하에 있던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하면, 1591/8월에 히데요시는「당방문」을 선언해, 제일 대로부터 9번대까지의 9 군단 총원 15만 8000명 정도의 한국 출병의 군세를 편성해, 오사카성으로부터 나고야성(현・사가현 카라츠시 친제이쵸 나고야)의 전선 사령부에 음력4/25에 출했다.

 

 

일본의 정예 수군은 3차례의 상륙중에서 3번째로 부산포에 접안한다.

이때 동원된 수군이 10,000여명이며 1차와 2차에 동원 되었던 수군과는 별개이다.

水軍総督은 九鬼嘉隆였다.

日本の精鋭水軍は 3回の上陸の中で 3番目に釜山浦に接岸する.

この時動員された水軍が 10000人余りで 1次と 2次に動員された水軍とは別個だ.

水軍総督は 九鬼嘉隆だった.

 

 

 

九鬼嘉隆

秀吉の朝鮮出兵に際し、水軍総督の命を賜り、金団扇および茜の吹貫(ふきぬき)に金瓢箪の馬印を賜る。

 大小の船数515艘と艘帥1500余人(『浅野家文書』によれば1000人)を率いて肥州名護屋(佐賀県)に赴き、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구키 요시타카

히데요시의 한국 출병에 즈음해, 수군총독으로 명을 받아, 금 부채 및 천의 취관(비단나무)에 금 표주박의 馬印을 받는다.

 

대소의 선 515척과 副將 1,500 여이명(「아사노가 문서」에 의하면 1,000명)을 인솔해 히슈 나고야(사가현)로 향해 가,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참조, 일본 달력과 조선 달력이 다름으로 날짜차이가 있음) [출처:天正記]아고라

 

'조선출병  일본 졸병들은 이순신은 모르고, 대포를 장치한 철갑선 그러니 거북선만 알았다. 장수들은 거북선으로는 바닷길을 절대로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졸병들은 거북선에 의해 바닷길이 막혀 자신들이 독안의 쥐가 되고 만다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래서는 일본 군의 장수들이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더욱이 풍신수길이 죽자 왜장들도 조선에서 죽을까 두려워했다.

 



 

5,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6,칠천량해전 다대포(웅천)

 1597.7.8~11사이에 수차 적선 600여척과 피아간 부산 일대에서 교전이 있었고, 양측이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본은 부산일대의 거의 모든 전함들이 결집 조선 수군을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부산해전 6.19 안골포 가덕도 전투포함)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기타 왜군 본대 왜군 약 10만병 력/ 조선수군 1만여 병력 조선수군 전사 약 6,000명 추정 일본측 미상

 

조선 수군(원균) 총 투입된 병선이 약 200척으로 판옥선 척당 승선인원이 60명 정도 총병력 1만여명, 배설의 전함 판옥선 40여척과 장작귀선 12척 약 5.000명, 전라좌수사 이억기 약60여척 5천병력,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 승선인원이 200명) 판옥선은 60명 정원으로 왜선 5척이 사면을 둘러싸고 200명이 기어 오르면 손을 쓸 수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군은 뒷통수에 칼을 맞아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균은 육지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장작귀선을 선두로 하는 배설이 선봉에 설 수밖에 없음, 일본의 세키부네와 아케다를 제앞 하기 위함임,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다.(적군은 더 많은 손실이 있었음) 조선전역해역전도의 그림 상황,설명

 

결과, 수적으로 역부족인 상태에서 전쟁이 되지 않음, 조선수군 단독으로 일본 침략군들을 저지하려고 한 뜻있고, 가치 있는 전투임에도 당연한 패전을 동인들은 서인을 몰아내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전쟁피해를 부풀려서 대처하고 이순신과 권율이 군권을 잡음, 권율이 기획 명령을 내린 전투로 자신이 책임을 모면하기위해 전쟁결과마저 왜곡했음, 따라서 전투패배후 이순신과 권율의 전투를 살펴보기로함,  

 

1)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이순신과 권율이 군권을 장악함,

2)명량대첩[]   1597년9월 18일 (선조 30)에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함, 12척의 전함으로 330척의 적함을 격침시키고, 왜군   18,000명 (노량 해전 6만명)을 격멸한 세계적인 대승으로 일본 도고제독이 인정했다고 하는데 출처는 불확실함,

 

1597, 9, 2일 배설이 전함에서 내린 날, 귀향하고 2주 뒤인 16일 명량 대첩이 있었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장군은 세계사에 남을 왜군 해전에서 18,000명, 노량 해전 6만명을 격멸함,  그러나 그 상대인 와키자키 야스히로 휘하 전체 총병력이 1.500명이   일본에서 출병하였음, 또 2주만에 탄환을 조달한 기록이 전무함, 이순신장군이 23전에에 23승 격멸한 왜군의 수가 왜군전체 출병 수보다 많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함(영화 명량, 불멸의 이순신을 참조할 것)

 

 

7, 순천 왜교성 패전, [1598.9.19~11.19]

 왜성은 이순신장군을 흠모하시는 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라도 순천성은 삼면이 바다로 서쪽만 육지이다. 조명연합군은 약 5만 5천명, 소서행장 (고니시)왜군은 1만4천명이였다. 등자룡 진린 외 조선군 장수들(김완 이영남)이 대부분 등이 참여해서 패배했다.

 

 

사로병진작전,

1)순천왜성 조명연합군의 총공격,

조명연합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3개 왜성을 동시 전면 공격하여 왜군을 섬멸하자는 작전은 세곳 모두 실패하고 왜군은 유유히 약탈한 재물 (포로)들을 싯고 철군을 종료했다. 1598년 8월 17일 후미성에서 풍신수길이 전쟁중 절명하자 5대로 (5봉행)이 철군을 결정하게 되자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 작전 울산성 사천성 순천성을 동시 공격하기로 했다.

 

1598년 9월 19일우의정 이덕형 도원수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 명나라 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항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후 고니시에게 강화회담 요청공문 발송, '양 진영중간에서 호위병만 데리고 만나자, 나온다면 마중나가겠다' 하자 풍신수길 사망으로 고니시 동의함,

 

20일 고니시는 호위병10명으로 회담장으로 나옴,  이때 유정은 회담장 십여리에 음식을 즐비하게 하였으며, 회담장 양측에 장사들을 배치하고, 왕문헌에게 유정의 복장으로 위장, 백한남은 권율로 위장 전라순찰사 황산이 직접 고니시를 영접하게 명령하며,  비둘기 20마리로 고니시가 오면 날리라고 시킴, 이윽고 고니시 일행이 해룡창에 도착하자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명군들은 대포를 쏘아대고 매복병들이 튀어 나오자 고나시는 놀라 되돌아가는데  왜군들 기병 구원병이 튀어나와 실패함

 

21일 명군의 지원병1만5천명 도착 하고,  해남현감이  적진 공격 왜군 8명 사살 순천성 포위함 

22일 ~23일 유정은 조선군을 질책 서천만호 한산대장 홍주대장 금갑도만호 회령포 만호 외  조선군장수들 곤장7~15대씩 처결

 

30일 명군 수군 전함100여척 합세

10월2일 조명 연합군 총공세 반나절 도중 오하려 왜군들이 밧줄울 타고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 조명연합군 약1.000명 전사(조선수군 사로 첨사 황세득 이청일 외29명 전사)연합군 100보 후퇴

 

10월 2일 유정은 사천성의 악명높은 시마즈군을 봉쇄한 조명연합군이 중로군 동일원장군이 시마즈 요시라 왜군에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음,(울산성 가토 기요마사 조명연합군 동로군도 후일 패배함) 놀란 조명 연합군은 긴급히 순천왜교성 봉쇄를 풀고, 한밤중에 부유창방면으로 퇴각은 계속되어 9일까지 계속함(조선군 전사200명 부상 600명) 봉쇄기간중에도 왜군은 자유로이 돌아다니는가하면 총을 쏘아대기도 하고, 이 퇴각으로 군량미 3천석을 빼앗겼으며, 엄청난 무기들도 빼앗겼음, 이 군량미는 조선의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굶주리며 수래와 등짐으로 짊어지고 조달 했었든 것들였다.

 

고니시는 힌바탕에 가운데 붉은 그림을 그려넣은 깃발에 '부족한 군량미와 무기를 보내주어 대단히 감사하므니다' 라는 깃발을 길 곳 곳에 걸어 놓고 유유히 철수 했다. 조명연합군 전함 30여척이 격침되고 왜군도 40여척이 격침소실되었다. 시마즈는 사천성에서 많은 재물들(포로와 도공들)을 가지고 순천성과 합세 일본으로 돌아갔다.(출처:왜교진병일록1598) 이순신은 권율과 함께 수륙 합동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였으나 6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다.

 

2)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일단 병력을 순천 왜교성 앞으로 보내 조선군이 다시 왜교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시마즈는 중로군 동일원장군과 조명연합군을 대파한 후 요시토모의 군대와 함께 300~5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으로 고니시를 구원하려고 했다.

 

이순신의 본군은 노량근처의 관음포에 매복해있었고 19일 새벽에 일본 수군이 노량에 진입하자 관음포에 매복한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해 노량해전이 시작되다. 시마즈는 이순신을 포위섬멸하려 했다. 고니시는 순천 왜교성을나서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앞을 가로막는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을 유유히 뚫고 나가는데도 순천왜교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후퇴했으며,  노량해전은 해가 뜰때까지도 계속 왜군들의 철군이 계속 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라의 철군하든 병졸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며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조명 연합수군은 많은 포로들을 싯고 퇴각하든 일본 고니시와 고위장교들이 먼저 떠난후 잔병들을 추격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270명, 명군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이 사망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죽음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명나라 등자룡(鄧子龍)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출처:충무공전서).

 

결론, 칠천량 전투나 별반차이가 없는 패전임에도 동인들이  단지 보고서를 잘 만든것에 불과함을 알수 있음, 조선군이나 명군이 왜군은 십명 내외로 사살하고 왜군은 조명 연합군을 만명단위로 죽임, 이순신과 권율 다합쳐도 배설과는 상대가 안됨을 알수 있다. 배설이 서인인 원균을 만나것이 비운이였고, 권율의 동인들과 함께 하지 못한게 비운이다.  

 

 

3) 제1차 울산성(도산성) 전투

날짜 1597년 음력 12월 23일 ~ 1598년 음력 1월 4일 병력 조선 1만1천여명 명 3만6천명  울산왜성 주둔군 1만6천명,

 

 

12월 23일 마침내 조명연합군의 총공세를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산성 바깥의 병영성, 언양성이 함락되었으며 가장 가까운 왜성인 서생포 왜성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도산성은 조명연합군의 그물같은 포위를 했다.  연합군 총사령관 양호는 전략을 변경하여 고사작전을 개시한다. 연합군은 성 주변의 우물을 모조리 묻어버리고 태화강의 물줄기를 빈틈없이 봉쇄했다.

 

 

가토와 일본군 성 안에 2만에 가까운 일본군에게 먹을 식량과 물이  없었다.  28일을 기점으로 연합군은 도산성 외성을 함락시키며 가토군을 몰아붙였고, 가토의 일본군은 좁은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결사항전을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자료 약6~8만에 달하는 대군)도산성으로 피항했다.

 

조명연합군도 일본 구원군과 맞서게 하였으나, 오랜 시일 전투를 치룬 연합군과 일본군의 대결은 일본군이 유리했다.  연합군 지휘부는 공성 포기와 퇴각을 결정, 10여 일에 걸친 전투는 최종적으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다.

 

 

4) 사천성패전,시마즈 요시로 일시:1598년(선조?)10월1일 

지휘관: 조·명연합군-董一元/ 일본-島津義弘 병력: 조·명연합군 수만인~200,000내외/ 일본-7,000내외 전과: 조.명연합군-30,000~80,000내외 사상자/ 일본-미상 약 4,000여명 사상,

 

1598년10월 조선의 사천에서 島津義弘이 이끄는 島津軍7천명이 명군의 장군 동일원이 이끄는 수만의 조·명연합군을 격퇴한 전투로서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설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명군의 수가 3만7천에서 20만까지, 명군의 사망자가 수천에서 8만이라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일본 측 기록>중국측 기록에 8만명 사망으로 되어 있어 이보다 피해가 큰 것으로 추정됨,  1598년 9월 말부터 10월초까지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小西軍), 사천왜성(島津軍), 울산왜성(加藤軍)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

 

동일원이 이끄는 20만이라 칭하는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했고,  사천은 일본군의 策源地인 부산과 일본최좌익(조선의 서쪽)의 순천왜성, 남해왜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함락하면 서쪽에 있는 일본군과의 연락을 분단시킬 수 있었다. 사천에 주둔하였던 일본 병력은 島津義弘과 島津忠恒이 이끄는 島津軍7천뿐이었다. 宗軍과 立花軍이 援軍을 신청하였으나 義弘은 이 신청을 거절하고 島津家의 군세만으로 조ㆍ명의 대군을 맞아 격퇴하였다.

 

 

 

그 후 집결하여 철퇴한 연합군의 島津측에서는 [취한 수급이 3만, 벤 시체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島津義弘은 [鬼石蔓子]라 불리어 무서워했고, 그 武名이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전해졌다.

 

[繪本太閤記]의 기록

회본태합기에는 사천성(사천고성)을 수비한 것은 伊勢兵部少輔定正(貞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사천신성은 新塞城이라 했다. 또한 [鬼ㆍ島津]이 아니고 [?(파)ろしのしまんず] 라고 기술하고 있다. 명군의 병력은 4만여 이고, 島津軍의 병력은 義弘의 5천, 忠常의 1천, 伊勢兵部少輔定正의 3백 합계 6,300여명이고, 취한 명군의 수급은 3만 여로 기술하고 있다.

 

 

 

사천성의 전투에서 명군의 병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패전 측인 명의 기록에서 [전사자 약8만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 8만인이라는 것은 세계사와 비교하여도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패전의 장수는 책임을 물어 처형되는 경우도 있어 전과는 과대히, 손해는 과소히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천전투에 앞서 8월18일 이미 豊臣秀吉이 사망했지만 이를 숨기고 10월 15일부로 일본군에게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島津家가 이 사천전투에서 명군을 격퇴함으로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탈출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한 11월18일의 노량해전에서 小西軍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이 전투를 세계전투 사에서도 비교될 만한 일본의 전설적인 승리의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10월2일, 董一元은 오전 6시30분경 사천왜성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오전 9시경 中路軍은 목책까지 진군하여 화살과 총탄을 우박처럼 발사했다. 드디어 中路軍의 一隊가 성문을 깨고 담을 넘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공격군의 200m 후방에 거치돼 있던 城門 파괴용 대포가 과열에 의해 파열하면서 그 불꽃이 날아가 화약상자에 옮겨 붙음으로써 연쇄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明兵들이 공세를 멈추고 도주하려고 했다.

 

기회를 포착한 왜병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돌격, 백병전에서는 예리한 일본도가 위력을 발휘,  主將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본대를 이끌고 달려 나와 도주하는 明軍을 추격, 中路軍의 선봉장 모국기는 敵의 主將 요시히로(島津義弘)까지 출성하자 성 안의 수비가 엷을 것으로 판단, 一枝軍(일지군)을 이끌고 바로 성문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가  시마즈 타다나가(島津忠長)가 100騎를 이끌고 사천왜성과 明兵 사이로 뛰어들었다.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 부대도 가세했다. 이때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 부대는 中路軍의 후미에 있던 輜重(치중)부대를 향해 화살과 철포를 발사했다. 後陣의 대소동에 놀란 모국기 부대는 사천읍성 방면으로 도주했다. 한편 董一元 직속의 4,500騎는 영춘왜성과 사천읍성 사이의 石橋(석교) 前面에 최후 방어선을 치고 전세의 逆戰(역전)을 꾀했다. 그러나 가와카미 히사토모(川上久智)의 부대가 달려 나와 中路軍은 붕괴되어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며 합천 삼가까지 수일을  도주했다. 

 

 

결론^^

칠천량해전이 결코 패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조선 판옥선들이 왜선 5척에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학살 된 점은 있으나, 기습에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미 권율의 작전 실패로  포위된 상태에서 육지로 퇴각도 하나의 방법이 옳은 것이였음, 그냥 배에서 60여명이 200명을 당할 수 없고, 일방적인 살육이 되기 때문에 육지로 피항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 한 상황이였음,

 

  그러나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일본 군을 공격한 1597년 6월 부터  7.16일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좌절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려주었음, 왜군 병사들에게 막대한 공포심을 조장한 가치 있는 전사이고, 순천왜성, 사천성, 울산성패전에 비해 매우 가치 있었든 전투였음은 일본측 자료가 말하고 있음,,,,,,^^  

 

 

 

 

 

 

 

3, 칠천해전(漆川海戰)

조선수군은 7월 8일 웅천전투에서 이기고  14, 15일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연거푸 패했다. 8월 20일 (음 7월8일) 일본의 후속 군병들이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 임진란 때 경상도에 진주하고 있든 2만 병력에 더해 14만 병력이 상륙을 마친 상태였다.   

 

칠천량해전 다대포(웅천) 1597.7.8~11사이에 수차 적선 600여척과 피아간 부산 일대에서 교전이 있었고 양측이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본은 부산일대의 거의 모든 전함들이 결집 조선 수군을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

 

조선수군들은 여러차례 전투를 하면서 손실이 있었고,  추격에 쫒긴 조선함대가 15일 밤 9시경 칠천량해안에  도착했으나, 병졸들은 녹다운으로  지쳐 있었고,  원균은 밤늦게 휘하 제장들을 소집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함쳤다

 

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자 이억기 최완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4,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억기 최완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우린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했다.

 

이미 이때 왜군은 수일간의 추격에 약 1.000여 척의 부산 일대 거의 모든  왜군들이 서서히 칠천량을 수겹으로 에워 싸고 몰려들고 있었다. 이날은 짙은 안개와 이슬비로 가시거리가 짧았다.

 

 밤 늦게 왜선 5척이 손살 같이 조선군 영내를 휘젖고 다니면서 조선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손살 같이 쏘다녀도 조선 수군은 닺을 내렸기에 손을 쓸 수 없었고,  병졸들은 지쳐 잠들어 깨지 못해 4척이 전소 되었다. 이것은 부근으로 몰려 오는 왜군들에게 일종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 였었든 것이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병사들은 밤새 화재와 적선의 출몰로 고단해진 새벽녁이 동틀 무렵 신호탄 세발이 울리자 일제히 근접한 1.000여척의 함선들이 삼중의 포위망으로 밀고 들어와서 조선 전함 한척에 왜선 5~6척이 둘러싸고 돛을 눕혀 일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해로가 막혀 포위 된 상황에서 원균이 배를 버리고 춘원포로 육지 상륙을 명령했다. 배설은 원균의 명령을 거부하고 포위망(약 30여척 3.000명 병력 전사)을 뚫어라는 명령을 내린후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이억기와 최호가 전사하자 후퇴 명령을 내려서  서쪽과 반대쪽 동쪽으로 두방향으로 퇴각하게 된다.((실제는 견내량 7척과  5척 대열=탄환이 고갈됨)

 

원균은 권율의 군대가 육상에서 호응할 것으로 믿고 춘원포로 상륙하였으나 권율의 군대가 아니라 왜군들의 매복군에 전멸 당했다(동인들 허위 보고, 배설의 12척이 약 2.000명 그 외 김완 등등의 수천 명의 병사들이 살았고, ( 투입된 병선이 약 200척으로 판옥선 척당 승선인원이 60명 정도였으므로 이들이 추원포까지 길게 육지로 상륙하여 일본의 매복군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 남은 병력이 다수 있었고, 배설의 전함 판옥선 40여척과 약 2400명의 병사를 전사, 조선수군의 주력 판옥선 190여척 대부분이 소실되였다. 배설의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 승선인원이 약  2400명은 살아 남았고, 판옥선은 60명 정원으로 왜선 5척이 사면을 둘러싸고 200명이 기어 오르면 손을 쓸 수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군은 뒷통수에 칼을 맞아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균은 육지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5, 조선왕조실록 《선조 090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6,((선조실록))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대신들: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유성룡(영의정) : 감히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다.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서너겹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남은 장수는 아순신 뿐)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이순신복권 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배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배설이 옳았다는 심증)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조센 끝났다)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순신은 아니다)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명나라 안오니 선조 넌 개털됐다 빨랑 순신임명해라).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선조 : 근자에 모병에 있어 사졸(병력) 지원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민심 이반이 심함)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이 오직 이순신의 복직에만 매달려 대책 자체가 없으며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퇴각했음도 철처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직접 충청 전라에 한척의 전함도 없느냐고 물음에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조는 배설이 도주했다고 보고함에도 배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10,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함  ,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 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는 것은 거짖말임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음, 당시 어마어마한 전함을 숨길 수 없음 (나라를 위해 작전을 하는 배설장군의 전함과 병사들을빼앗고자 허위보고를 하고 이순신을 임명해야 한다고 임명장을 요구함)세계최초의 잠수함 거북선에 디젤엔진이 없었음,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1, 대역죄인 백의종군상태였든 이순신의 등장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배설을 찾아왔습니다.  

 

 

1)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배설의 7일간의 청야작전과 남해안 일대 백성들 소개령을 철처히 비밀로 한 권율과 이순신은 첮 장계에서 배설이 전쟁 공포증이 있고 도주중이라고 선조를 기망하는 장계를 올려 권율과 이항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권 시켜 달라고 하고 있다.)


1. (경상우도수사 배설이 도주중에 있어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약 2.000명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전함을 수리함을 얼추 보이는 식으로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배설의 전함이 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 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그러나 선조는 배설을 면직시키지 않고 전쟁 끝날때 까지 중용합니다.

 

 

4,) 거북선 12척을 배설이 였바꿔 먹으려했다?

 군대를 접수하기 위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1597.7.23)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3도 수군절도사로 임명을 8월 3일 허락하면서 품계를 한계급 강등해서 경상우도수사 배설과 동급으로 임명하는 묘수를 부립니다. 이에 이순신(권율)은 후일 선조를 속인 것이 발각 될 것을 우려해서 배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라 보입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

 

5) 배설의 귀향과 탈영보고서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배설의 병가를 허가하고  9월 2일 귀향하자 마자 도망했다고(탈영보고) 합니다.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도사 이순신은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못하게 합니다.(당시 탈영은 귀대시 군율로 참형당함)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 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조선군이 전사하고 남은 빈배)

 

이순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12,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晋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권율은 매일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음, 배설의 12척의 경상우도 병선을 보고하지 않고, 칠천량해전 12일 째인 이날도 각기 도주 한 것으로 보고함) 이순신으로 부터 23일 보고를 받은후 5일이 지난 시점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살아 남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통제사로 하겠는데 아무도 없으니 이순신을 임명해 달라는 허위보고 배설이 도망한 것은 맞으나 아직은 행방을 모른다고)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권율은 사실은 이순신의 복권을 원하면서 아무나 살아남은자가 있다면  임명하자고 독촉하고 있다.)

 

 

 

 

 

 

 

 

13, 난중일기 기록 //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사실 선조는 부득히 이순신의 품계를 강등하여 임명하므로 배설과 동급이 됨에도 자신이 상관인 것처럼 비서실장 유성룡의 빽을 믿고 있음)

 

 8월12일/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뒷빡치기에 걸려 들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권율에게 탈영보고= 전시 탈영은 군율에 의거 참형임)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이순신은)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배설을 데릴러 가려다 그냥 왔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1) 이순신은 천운의 정치군인

럭비공 풋볼 튀듯이 백의종군 대죄인이 수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나라걱정이든 배설은 8월 3일 원수부가 보낸 사령장을 무시하고 숙배를 거부한다. 군권을 넘길 수 없다. 이순신은 혀를 내두러면서 아무말도 못한다. 왜냐면 이순신이 지휘하든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함선은 모두 전멸했고 배설의 전함수리에도 한푼도 보태 준게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의 잔병을  배설경상우도수군에 합류하라고 지시하자,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렸다. 이와 같이 12척의 전함이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배설이 도주하여 노량에 이르렀다는 암시를 하고 있음, (8.9)
 

14,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15, 배설장군이 해전에 투입된 계기,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군들이 부산상륙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도 이순신은 선조가 북쪽으로 토끼든 말든 한산도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왜군 14만이 출병하는 것을 지켜만 볼것 같은 상황에 왜군이 부산항에 상륙해버립니다.

 

부랴 부랴 이순신에게 속은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으로 대체 합니다. 선조와 원균은 배설에게 선봉을 맞기게 됩니다.  해적으로 양성된 왜군의 근접전에 패배합니다. 따라서 이건 아니다. 왜군을 유인해서 심해에서 함포로 작살 내자고 주장하지만, 권율이 이순신이 파직된데 앙심을 품고 원균을 다그쳐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1) 진주성 선산 등지에서 전쟁준비를 해왔고, 섬진강을 주무대로 배설장군은 경상우도 전함 장작귀선 12척의 건조에 사비를 투입했다는 기록도 있고, 나주의 나대용일가에 기술을 가져와서 전함을 건조했습니다.  배설이 양성한 병력이 최정예로 전란중에 충성심이 특별했습니다.

 

 

 

2)배설장군의 귀향(탈영으로 누명쒸움)

 풍신수길을 위해서 살육병기로 파병된 10만 왜군들과 시마즈 요시히로 가토 기요마사의 적진을 통과하고  왜장을 살해하지 않았다.  조선주둔군들에 영향을 끼쳐서 일본에 내전이 촉발 조선 진출 장수들 대부분과 풍신수길 일족이 멸족되었다. 조선야전군사령관이 대살육전을 앞두고 귀향했다.

 

 

3)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진주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 목수들이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4)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장군,(내전을 끝 내다)참고자료:엔하위키미러

배설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16, 누명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주및 역모 모반혐의로 참수

병상에서 칠천포패전 책임에 대한 "月波亭" 이란 시를 남기고, 권율장군의 수하들에 선산땅에서 부친과 아들이 함께 추포되어 역모 모반죄로 부친과 아들은 방면되고  장군은 참수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배설장군의 참수에 경상도관찰사 경상감사 한준겸이 직접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군졸들을 동원 후하게 장례를 지내준다. 한준겸은 조정에서 파직될 것을 알면서 장사를 치르준 후 한준겸은 파직한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준겸은?(1557-162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아버지는 판관(判官) 효윤(孝胤)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주서·전적 등을 역임했다. (출처:백과사전)

 

 

 

1) 일본을 후덜덜 떨게한 배설장군'조선의 훌륭한 무장 이므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조선 도공 십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조선과 명나라에서 가장 무서워 한 장수가 '시마즈 요시라' 입니다. 이 군대가 진격하면 조선군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요

 

배설이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사라집니다.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출병이 차일피일 이순신장군처럼 미루어지죠

 

배설장군에게 하마터면 수장될 뻔한 가토 기요마시와 배설장군에게 목이 달아 날 뻔한 시마즈 요시하라가 풍신수길에게 철군요청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출병 제16 군 보충대에 철군요청서를 보냅니다 (종군화와 부산 상륙 전에 수장될 것이라는 배설장군 이야기가 붙여지죠) 이에야스가 적극 조선 출병을 거부하여 풍신수길의 수하 미쓰나리와 일본내전이 발발하고 배설장군을 흠모하든 철군파 군대들이 승리 했습니다.

일본의 도쿠가와 나이다이진 이에야스는 일본에 남았던 영주로 조선 시마즈 요시히로등의 영향을 받아 끝내 조선출병을 하지 않았고, 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결국 철군요청으로 쇄락해진 1599년 풍신수길은 절명합니다.

 

 

1)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풍신수길의 절명은 (亀)"ベッセル いたい....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이는 거북선과 경상우도 수군 裵楔이 얼마나 조선침략에 영향을 미친 것,  세키보네, 아다케, 보고, 등등의 자신들 전함 이름대신 지금도 일본에서는 선박회사들 이름이나 바다의 배들을  ベッセル 라고 사용하고 있다.) 당시 왜군 선박의 조선인들이 "배설 잡바라" 고 했다고함,  

 

 

 

17,유문으로 남긴 시조 '월파정' -東西-


묻지마라, 더물어 무럿하리, 강산도 반기는데 일부러 죽였겠느냐?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여기서 진강이란 섬진강을 말하고 나주의 목수들이 장작귀선을 건조한 곳으로 추정된다.



 

 

동서 화합을 강조한 배설장군

 

패장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동서 화합만이 나라의 부흥의 근원이다>

동서 양가(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국가에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패장으로서 한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이다.

 

 

7, 칠천량해전의 영웅 배즙(裵 楫)처절한 전사,

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꽃다운 35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배 즙(裵 楫) 1564년(명종19)에 태어남.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8, 임진왜란

선조  임금은 무조건 도망, 백성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고, 백성들이 적 치하에 고통받는다 이런 개념이 없었지요. 그러니 적치하에 부역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고, 왜군은 전공을 세우려 목도베고 코도베고 귀도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내서 훈장먹고자 합니다. 선조는 도망에 있어 달인이고 로간 뺨칩니다. 도망에 달인이였습니다. 

 

 

도망자 도망정권답게 은폐에 선수이고 비열하게 위험인물을을 숙청하지요, 뻑하면 백성들 부역자로 몰아서 효수하고  엄청 센 군율로  참수합니다. 명나라 군들은 외국 여행온 점령군 행세 하면서 얘들도 목가지 확보경쟁을 합니다. 관군들도 포상 전공을 다투고 허위보고를 많이들 합니다.

 

 

9,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의 가장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18, 배설장군에 대한 자료

 

일본에서 용맹으로 존경받은 배설 [1]
부산포 웅천해전과 배설장군 [1]
이순신장군과 배설장군의 누명
명량대첩 3대 허구성 [1]
이순신의 3대 거짓말,지록위마
이순신의 권모술수를 배워라! [3]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자료출처: 아고라, 백과사전, 선조실록, 왕조실록,난중일기, 엔하 위키미러 기타)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월파정月波亭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9, 예수가 12제자가 있었다면,  12척의 전함이 조선을 살렸습니다.

20, 7일의 기적, 칠천량해전을 수습하고 430km를 백성들을 살리려 대피시킵니다. 

21, 악명 높은 왜장들을 단기필마로 제앞해서 철군으로 일본 내전을 촉발시킵니다.

22,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으로 왔을 때, 그를 품고 단신 쿠데타를 포용했습니다.


 

 

출처: 선조실록, 고도일지, 난중일기,백과사전, 블로그게시판, 아고라, 지식인, 일본측자료, 기타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외 다수의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이순신이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름)

 

 

거북선 (粧作龜船)

일명:거북선으로 알려져 일본군들을 벌벌 떨게한 대형전함으로 승선이원이 약200명에 이르는 조선 명나라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함으로 '조선전역해전'도 그림처럼 통일된 거북선 문양이 대거 설치되어 있고, 날카로운 킬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보기만해도 공포심을 조장함, 당시 명나라 일본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우리나라 주력함대인 판옥선과 동일하게 약 5~60명선이였고 크기도 비슷하였음, 최근 12척의 병선이 120명으로 201킬로를 항해한 것이 불가사의하여 당시 디젤엔진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철갑선에다 잠수함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 명량일대에 해저 탐사를 현재도 계속하고 있음(학계와 문화계)

 


거북선 (粧作龜船) 심볼 요즘 CI과 동일함 420년전에 브랜드를 가진 전함이라 믿으지지 않음,

거북선 (粧作龜船)방패

 

 

 

 

 

3, 왜군의 투입규모와 날짜, (임란과 정명가도는 생략)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の海戦に対して本格的に論ずるのに先立って日本水軍の規模を把握して見る事にする.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派兵された日本軍の規模は陸軍 15万名余水軍 9200人だ多くの日本資料で紹介するある.

 

 

倭軍を編成

1582年の本能寺の変で織田信長(1534-82)が倒れた後、倭国の支配者となった豊臣秀吉(1536-98)は、次なる目標とし て「明」の征服を決意。十分な海軍力を持たない秀吉は、1586年から 2000隻の船の建造を始めました。1587年には朝鮮軍の強さを測るため、26隻からなる襲撃部隊を朝鮮南岸に派遣し、朝鮮軍は問題にならないと結論づ けていましたが、朝鮮半島を通り陸路「明」に侵攻する計画を立て、そのために李氏朝鮮を倭国に服属させる交渉を側近の小西行長(?-1600)と対馬の宗 義智(1568-1615)に命令。当時、「明」の冊封体制下にあった朝鮮との交渉が決裂すると、1591/8月に秀吉は「唐入り」を宣言し、一番隊から 九番隊までの9軍団総勢15万8000人からなる朝鮮出兵の軍勢を編成し、大阪城から名護屋城(現・佐賀県唐津市鎮西町名護屋)の前線司令部に旧暦 4/25に出ばりました。

 

 

倭軍을 편성

1582년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1534-82)가 넘어진 후, 야마토국의 지배자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98)는, 다음의 목표로서「명」의 정복을 결의, 

 이미 히데요시는, 1586년부터 2,000척의 배의 건조를 시작 1587년에는 조선군의 힘을 측정하기 위해, 26척으로 구성된 습격 부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조선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 을 내었다. (文禄の役)을 준비하기 위해 병력,병참수송을 위해서 2000척의 배를 준비했다

 

 한반도를 통해 육로로「명」에 침공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위해 조선을 야마토국에 복속시키는 교섭을 측근의 고니시유키나가(?-1600)와 대마도의 宗 義智(1568-1615)에 명령.당시 , 「명」의 책봉 체제하에 있던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하면, 1591/8월에 히데요시는「당방문」을 선언해, 제일 대로부터 9번대까지의 9 군단 총원 15만 8000명 정도의 한국 출병의 군세를 편성해, 오사카성으로부터 나고야성(현・사가현 카라츠시 친제이쵸 나고야)의 전선 사령부에 음력4/25에 출했다.

 

 

임진왜란 직전 다시 선박 건조 명령이 추가로 하달된다.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

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軍隊輸送のため天正19年(1591)正月20日諸国に船舶の準備を命じた。その内容は

 1.東は常陸より南海を経て四国,九州に至る海に沿うた国々,北は秋田酒田より中国に至る,その国の高10万石について大船2艘ずつ用意すべきこと。

 2.水手は浦々の家100軒について10人ずつ出させその手その手の大船に用い,若し余りの水手があれば大阪に来るべきこと

 3.直轄地は高10万石について大船3艘,中船5艘ずつ作るべきこと。

군대 수송을 위해 덴쇼(연호) 19년(1591) 정월 20일 제국에 선박의 준비를 명했다.그 내용은

 1.동쪽은 히타치에서 남해를 거쳐 시코쿠, 큐슈에 이르는 바다에 연해 있는 나라들, 북쪽은 아키타 사카타에서 중국에 이르는, 그 나라의 10만석당 큰 배 2척씩 준비 해야 할것.

 2.뱃사공은 포구의 집 100채당 10명씩 내게 한다. 그 손 그 손의 큰 배를 이용한다.약간 남는 뱃사공이 있으면 오사카에 와야 할 일

 3.직할지는 10만석당 큰 배 3척, 중선 5척씩 만들어야 할 일.

 

 대선은 널리 알려진 安宅船이다.

1586년 2.000척의 선박과 별도로 100척 이상씩의 安宅船과 関船이 준비되었다.

ここで言う大船は広く知られた 安宅船だ.

1586年 2000艘の船舶と別に 100艘以上ずつの 安宅船と 関船が用意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別冊歴史読本『海の戦国史』「李舜臣率いる無敵の李朝水軍」(小林則子)八十九頁より、秀吉水軍の編成について。典拠は示されてない。

舟手の編成は、次のように十将のもとに合計一万二百人であった。

 

九鬼嘉隆 千五百人

藤堂高虎 二千人

脇坂安治 千五百人

加藤嘉明 七百五十人

来島兄弟(通総·通之) 七百人

 

これら主力の五人に加えて、

菅野正影(菅の正陰) 二百五十人

桑山重勝 壱千人

桑山小伝次 壱千人

堀内氏善 八百五十人

若杉伝三郎 六百五十人

 

前記には「菅野正影(菅ノ正陰)二百五十人」とあるのは、『天正記』には父菅平右衛門達長の名が記されている。また合計人数が次の『天正記』より千人多い のは、桑山重勝·桑山小伝次が夫々千名計二千の兵力とされているが、『天正記』では、桑山藤太·桑山小伝次の二人で千名とされているため。

전기에는「칸노 마사카게 2백오십인」이라고 있는 것은, 「덴쇼기」에는 父菅平右衛門達長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또 합계 인원수가 다음의「덴쇼기」보다 천명 많은 것은, 쿠와노야마중승·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이 각각천명계 2천의 병력으로 되어 있지만, 「덴쇼기」에서는, 쿠와노야마등태·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의 둘이서 천명으로 되어 있다.


『天正記』に記載されたように、淡路岩屋を基地とする菅水軍は菅平右衛門が統率者であった。「田中論文」によれば、文禄元年(1592)七月十七日付と推定される次の秀吉朱印状により、菅平右衛門と子息の和泉·若狭·権之佐の四名は、警固船奉行に任命された。

「덴쇼기」에 기재된 것처럼, 淡路岩屋을 기지로 하는 관수군은 스가다이라 우에몬이 통솔자였다.「타나카 논문」에 의하면, 문녹원년(1592) 7월 17 일자로 추정되는 다음의 히데요시 주인장에 의해, 스가다이라 우에몬과 자식 이즈미·와카사·권지좌의 4명은, 경고선봉행에 임명되었다.

 

 

4, 일본 정규 전함을 운용하는 수군의 규모가 9.000여명이였다.(웅천전투에는 육상병력이 10만명 포함 11만명이 해전에 유사시 투입가능했다.) 小田原의 반란에는 20.000여명의 히데요시의 수군이 참전하고 있다. 일본 내전에서도 20.000명 이상의 수군(북조군 제외)이 투입되었고, 2.000척의 선박을 운용 2000척이 모두 関船이라고 가정하면 2000*50 = 10.0000 십만명의 병력이 필요하게 된다.

日本の研究者たちは日本水軍の規模が 9000人余りだ粘り強く主張するあり韓国の一部学者もここに同調するようにする.

小田原の反乱には 20000人余りの秀吉の水軍が参戦するある..

日本内戦でも 20000人以上の水軍이 投入されたが 10000人の水軍が投入されたということは変ではないか?

2000艘の船舶を運用しようとすれば何人の水軍が必要だか?

2000艘が皆 関船船だと仮定すれば 2000*50 = 100000 おおよそ十万人の兵力が必要になる.

2000艘の船舶が皆動員されたと思うことができないので一応詳しいことは後に延ばしたところで.

 

 

小田原의 반란에 동원된 일본 수군

小田原の反乱に動員された日本水軍

 

九鬼嘉隆(志摩・鳥羽城主) 一千五百

加藤嘉明(淡路・知志城主) 六百

菅 達長(淡路・客将) 二百三十

脇坂安治(淡路・洲本城主) 一千三百

来島通総(伊代・来島城主) 五百

長宗我部元親(土佐・岡豊城主) 二千五百

羽柴秀長(大和・郡山城主) 一千五百

宇喜多秀家(備前・岡山城主) 一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의 병력이 임진왜란에 제외되어 있다.

毛利輝元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자.

以上のリストをよく見れば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の水軍兵力が壬辰の乱に除かれるある.

毛利輝元に対して少しよく見る移ろう.

 

毛利輝元

文禄元年(1592年)から始まる秀吉の2度の朝鮮出兵にも、主力軍として兵3万を派遣した。これらの功績から慶長2年(1597年)、秀吉より五大老に任じられた。慶長3年(1598年)8月、豊臣秀吉死去の際、臨終間近の秀吉に、遺児の豊臣秀頼の補佐を託された。

모리 데루모토/ 문녹원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히데요시의 2차례의 한국 출병에도, 주력군으로서 군사 3만을 파견했다.이러한 공적으로부터 게이쵸 2년(1597년), 히데요시로 부터 오대로에 임명되었다.게이쵸 3년(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때, 임종 직전의 히데요시에, 유아의 토요토미히데요리의 보좌를 맡게 되었다.

 

毛利水軍

天正20年(1592年)から始まる、文禄・慶長の役でも、毛利水軍は朝鮮へ渡海するために主力として駆り出され、九鬼水軍や来島村上水 軍、塩飽水軍を主力とする豊臣水軍や、坊津水軍を主力とする島津水軍とともに、兵站や海上輸送を担い、李舜臣らの朝鮮水軍と海戦を行った。

모우리수군/덴쇼(연호) 20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문녹・게이쵸의 역에서도, 모우리수군은 조선에 항해하기 위해서 주력으로 해 끌려가 쿠키수군이来島村上수군, 염포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도요토미수군이나, 방진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시마즈수군과 함께, 병참이나 해상운송을 담당하고, 이순신등의 조선수군과 해전을 실시했다.

 

毛利水軍이 임진왜란에 투입된 경과를 설명하는 글에서 여러 수군이 나열되고 있지만 島津水軍의 존재가 새롭게 등장한다.

毛利水軍が壬辰の乱に投入された頃とを説明する文で多くの水軍が羅列されるあるが 島津水軍の存在が新しく登場する.

 

 

 3차례에 나누어 일본의 병력이 상륙하게 된다.

朝鮮を侵攻するために何艘の船が動員されただろうか?

大きく 3回に分ける日本の兵力が上陸するようになる.

 

4月12日    4月1日に小西行長・宗義智率いる第一陣が朝鮮半島へ出兵したのを皮切りに、名護屋を出発した諸隊は壱岐・対馬を経て、釜山浦に上陸。

4月 17日     加藤清正・鍋島直茂・相良頼房の第二軍、釜山浦に上陸。黒田長政・大友吉統の第三軍、毛利吉成等の第四軍、四月十二日、名護屋を出発し、一番隊から四日遅れて四月十七日に朝鮮釜山浦(プサンポ)に上陸

4月27日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等、船団七百艘にて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4월 12일    4월 1일에 고니시유키나가・교의지가 인솔하는 제일진이 한반도에 출병한 것을 시작으로, 나고야를 출발한 제대는 이키・대마도를 거치고, 부산포에 상륙.

4월 17일     가토 기요마사・鍋島直茂・相良頼房의 제2군, 부산포에 상륙.쿠로다 나가마사・오오토모 요시무네의 제3군, 모우리 요시나리등의 제4군, 4월 12일, 나고야를 출발해, 제일 대로부터 4일 지각해 4월 17일에 조선 부산포에 상륙

4월 27 일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등 , 선단 7백척으로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

 

 

 

3차례의 일본군 상륙을 분석,

첫번째  小西行長의 1군이 4월1일 출발 12일에 상륙

두번째  2,3,4군 4월12일 名護屋출발 17일 상륙

세번째  나머지 군이 4월12일 名護屋출발 27일 상륙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日本軍上陸を分析して見れば

一番目 小西行長の 1軍が 4月1日出発 12日に上陸

二番目 2,3,4軍 4月12日 名護屋出発 17日上陸

三番目残り軍が 4月12日 名護屋出発 27日上陸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일본군의 부산상륙은 병력 수송선이 부산과 名護屋를 왕복하면서 수송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선박을 이용 상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각에 동원된 선박은 500척 이상의 규모였으므로 최하 1,500여척으로 이에 동원된 수군은 최하 5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いじめなので,日本軍の釜山上陸は兵力輸送船が釜山と 名護屋を往復しながら輸送したのではないそれぞれ他の船舶を載せる上陸したことを分かる. それぞれに動員された船舶は 500尺以上の規模だったから最下 1500余隻でここに動員された水軍は最下 50,000人にのぼることで推算される.

 

 

 

일본의 정예 수군은 3차례의 상륙중에서 3번째로 부산포에 접안한다.

이때 동원된 수군이 10,000여명이며 1차와 2차에 동원 되었던 수군과는 별개이다.

水軍総督은 九鬼嘉隆였다.

日本の精鋭水軍は 3回の上陸の中で 3番目に釜山浦に接岸する.

この時動員された水軍が 10000人余りで 1次と 2次に動員された水軍とは別個だ.

水軍総督は 九鬼嘉隆だった.

 

 

 

九鬼嘉隆

秀吉の朝鮮出兵に際し、水軍総督の命を賜り、金団扇および茜の吹貫(ふきぬき)に金瓢箪の馬印を賜る。

 大小の船数515艘と艘帥1500余人(『浅野家文書』によれば1000人)を率いて肥州名護屋(佐賀県)に赴き、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구키 요시타카

히데요시의 한국 출병에 즈음해, 수군총독으로 명을 받아, 금 부채 및 천의 취관(비단나무)에 금 표주박의 馬印을 받는다.

 

대소의 선 515척과 副將 1,500 여이명(「아사노가 문서」에 의하면 1,000명)을 인솔해 히슈 나고야(사가현)로 향해 가,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참조, 일본 달력과 조선 달력이 다름으로 날짜차이가 있음) [출처:天正記]아고라





거북선 (粧作龜船) 조선군들이 사방 에워싼 왜군들에게 살육당하는장면,

거북선 (粧作龜船) 조선수군 판옥선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  거북선에 승선한 사람은 보이지 않으나 판옥선들은 백병전을 하고 있음,

 

판옥선은 임진왜란중 각 해전에서 일본의 수군과 대등한 조선의 주력함대 였다.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부산해전 등 주요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이었다. 그때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底板) 길이 50~55척, 탑승인원 60명정도 였다. 후에 점점 규모가 크지는 경향을 보였다. 칠천량해전에 동원된 조선 수군 약 200척은 전함당 약 50명이 탑승한 것으로 전체 병력 약 1만명이 투입되었다.   약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이 투입되었고 승선 인원은 척당 약 200여명으로 상당히 규모가 큰 전함이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 다시 선박 건조 명령이 추가로 하달된다.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

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軍隊輸送のため天正19年(1591)正月20日諸国に船舶の準備を命じた。その内容は

 1.東は常陸より南海を経て四国,九州に至る海に沿うた国々,北は秋田酒田より中国に至る,その国の高10万石について大船2艘ずつ用意すべきこと。

 2.水手は浦々の家100軒について10人ずつ出させその手その手の大船に用い,若し余りの水手があれば大阪に来るべきこと

 3.直轄地は高10万石について大船3艘,中船5艘ずつ作るべきこと。

군대 수송을 위해 덴쇼(연호) 19년(1591) 정월 20일 제국에 선박의 준비를 명했다.그 내용은

 1.동쪽은 히타치에서 남해를 거쳐 시코쿠, 큐슈에 이르는 바다에 연해 있는 나라들, 북쪽은 아키타 사카타에서 중국에 이르는, 그 나라의 10만석당 큰 배 2척씩 준비 해야 할것.

 2.뱃사공은 포구의 집 100채당 10명씩 내게 한다. 그 손 그 손의 큰 배를 이용한다.약간 남는 뱃사공이 있으면 오사카에 와야 할 일

 3.직할지는 10만석당 큰 배 3척, 중선 5척씩 만들어야 할 일.

 

 대선은 널리 알려진 安宅船이다.

1586년 2.000척의 선박과 별도로 100척 이상씩의 安宅船과 関船이 준비되었다.

ここで言う大船は広く知られた 安宅船だ.

1586年 2000艘の船舶と別に 100艘以上ずつの 安宅船と 関船が用意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別冊歴史読本『海の戦国史』「李舜臣率いる無敵の李朝水軍」(小林則子)八十九頁より、秀吉水軍の編成について。典拠は示されてない。

舟手の編成は、次のように十将のもとに合計一万二百人であった。

 

九鬼嘉隆 千五百人

藤堂高虎 二千人

脇坂安治 千五百人

加藤嘉明 七百五十人

来島兄弟(通総·通之) 七百人

 

これら主力の五人に加えて、

菅野正影(菅の正陰) 二百五十人

桑山重勝 壱千人

桑山小伝次 壱千人

堀内氏善 八百五十人

若杉伝三郎 六百五十人

 

前記には「菅野正影(菅ノ正陰)二百五十人」とあるのは、『天正記』には父菅平右衛門達長の名が記されている。また合計人数が次の『天正記』より千人多い のは、桑山重勝·桑山小伝次が夫々千名計二千の兵力とされているが、『天正記』では、桑山藤太·桑山小伝次の二人で千名とされているため。

전기에는「칸노 마사카게 2백오십인」이라고 있는 것은, 「덴쇼기」에는 父菅平右衛門達長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또 합계 인원수가 다음의「덴쇼기」보다 천명 많은 것은, 쿠와노야마중승·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이 각각천명계 2천의 병력으로 되어 있지만, 「덴쇼기」에서는, 쿠와노야마등태·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의 둘이서 천명으로 되어 있다.


『天正記』に記載されたように、淡路岩屋を基地とする菅水軍は菅平右衛門が統率者であった。「田中論文」によれば、文禄元年(1592)七月十七日付と推定される次の秀吉朱印状により、菅平右衛門と子息の和泉·若狭·権之佐の四名は、警固船奉行に任命された。

「덴쇼기」에 기재된 것처럼, 淡路岩屋을 기지로 하는 관수군은 스가다이라 우에몬이 통솔자였다.「타나카 논문」에 의하면, 문녹원년(1592) 7월 17 일자로 추정되는 다음의 히데요시 주인장에 의해, 스가다이라 우에몬과 자식 이즈미·와카사·권지좌의 4명은, 경고선봉행에 임명되었다.

 

 

4, 일본 정규 전함을 운용하는 수군의 규모가 9.000여명이였다.(웅천전투에는 육상병력이 10만명 포함 11만명이 해전에 유사시 투입가능했다.) 小田原의 반란에는 20.000여명의 히데요시의 수군이 참전하고 있다. 일본 내전에서도 20.000명 이상의 수군(북조군 제외)이 투입되었고, 2.000척의 선박을 운용 2000척이 모두 関船이라고 가정하면 2000*50 = 10.0000 십만명의 병력이 필요하게 된다.

日本の研究者たちは日本水軍の規模が 9000人余りだ粘り強く主張するあり韓国の一部学者もここに同調するようにする.

小田原の反乱には 20000人余りの秀吉の水軍が参戦するある..

日本内戦でも 20000人以上の水軍이 投入されたが 10000人の水軍が投入されたということは変ではないか?

2000艘の船舶を運用しようとすれば何人の水軍が必要だか?

2000艘が皆 関船船だと仮定すれば 2000*50 = 100000 おおよそ十万人の兵力が必要になる.

2000艘の船舶が皆動員されたと思うことができないので一応詳しいことは後に延ばしたところで.

 

 

小田原의 반란에 동원된 일본 수군

小田原の反乱に動員された日本水軍

 

九鬼嘉隆(志摩・鳥羽城主) 一千五百

加藤嘉明(淡路・知志城主) 六百

菅 達長(淡路・客将) 二百三十

脇坂安治(淡路・洲本城主) 一千三百

来島通総(伊代・来島城主) 五百

長宗我部元親(土佐・岡豊城主) 二千五百

羽柴秀長(大和・郡山城主) 一千五百

宇喜多秀家(備前・岡山城主) 一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의 병력이 임진왜란에 제외되어 있다.

毛利輝元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자.

以上のリストをよく見れば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の水軍兵力が壬辰の乱に除かれるある.

毛利輝元に対して少しよく見る移ろう.

 

毛利輝元

文禄元年(1592年)から始まる秀吉の2度の朝鮮出兵にも、主力軍として兵3万を派遣した。これらの功績から慶長2年(1597年)、秀吉より五大老に任じられた。慶長3年(1598年)8月、豊臣秀吉死去の際、臨終間近の秀吉に、遺児の豊臣秀頼の補佐を託された。

모리 데루모토/ 문녹원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히데요시의 2차례의 한국 출병에도, 주력군으로서 군사 3만을 파견했다.이러한 공적으로부터 게이쵸 2년(1597년), 히데요시로 부터 오대로에 임명되었다.게이쵸 3년(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때, 임종 직전의 히데요시에, 유아의 토요토미히데요리의 보좌를 맡게 되었다.

 

毛利水軍

天正20年(1592年)から始まる、文禄・慶長の役でも、毛利水軍は朝鮮へ渡海するために主力として駆り出され、九鬼水軍や来島村上水 軍、塩飽水軍を主力とする豊臣水軍や、坊津水軍を主力とする島津水軍とともに、兵站や海上輸送を担い、李舜臣らの朝鮮水軍と海戦を行った。

모우리수군/덴쇼(연호) 20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문녹・게이쵸의 역에서도, 모우리수군은 조선에 항해하기 위해서 주력으로 해 끌려가 쿠키수군이来島村上수군, 염포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도요토미수군이나, 방진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시마즈수군과 함께, 병참이나 해상운송을 담당하고, 이순신등의 조선수군과 해전을 실시했다.

 

毛利水軍이 임진왜란에 투입된 경과를 설명하는 글에서 여러 수군이 나열되고 있지만 島津水軍의 존재가 새롭게 등장한다.

毛利水軍が壬辰の乱に投入された頃とを説明する文で多くの水軍が羅列されるあるが 島津水軍の存在が新しく登場する.

 

 

 3차례에 나누어 일본의 병력이 상륙하게 된다.

朝鮮を侵攻するために何艘の船が動員されただろうか?

大きく 3回に分ける日本の兵力が上陸するようになる.

 

4月12日    4月1日に小西行長・宗義智率いる第一陣が朝鮮半島へ出兵したのを皮切りに、名護屋を出発した諸隊は壱岐・対馬を経て、釜山浦に上陸。

4月 17日     加藤清正・鍋島直茂・相良頼房の第二軍、釜山浦に上陸。黒田長政・大友吉統の第三軍、毛利吉成等の第四軍、四月十二日、名護屋を出発し、一番隊から四日遅れて四月十七日に朝鮮釜山浦(プサンポ)に上陸

4月27日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等、船団七百艘にて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4월 12일    4월 1일에 고니시유키나가・교의지가 인솔하는 제일진이 한반도에 출병한 것을 시작으로, 나고야를 출발한 제대는 이키・대마도를 거치고, 부산포에 상륙.

4월 17일     가토 기요마사・鍋島直茂・相良頼房의 제2군, 부산포에 상륙.쿠로다 나가마사・오오토모 요시무네의 제3군, 모우리 요시나리등의 제4군, 4월 12일, 나고야를 출발해, 제일 대로부터 4일 지각해 4월 17일에 조선 부산포에 상륙

4월 27 일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등 , 선단 7백척으로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

 

 

 

3차례의 일본군 상륙을 분석,

첫번째  小西行長의 1군이 4월1일 출발 12일에 상륙

두번째  2,3,4군 4월12일 名護屋출발 17일 상륙

세번째  나머지 군이 4월12일 名護屋출발 27일 상륙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日本軍上陸を分析して見れば

一番目 小西行長の 1軍が 4月1日出発 12日に上陸

二番目 2,3,4軍 4月12日 名護屋出発 17日上陸

三番目残り軍が 4月12日 名護屋出発 27日上陸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일본군의 부산상륙은 병력 수송선이 부산과 名護屋를 왕복하면서 수송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선박을 이용 상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각에 동원된 선박은 500척 이상의 규모였으므로 최하 1,500여척으로 이에 동원된 수군은 최하 5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いじめなので,日本軍の釜山上陸は兵力輸送船が釜山と 名護屋を往復しながら輸送したのではないそれぞれ他の船舶を載せる上陸したことを分かる. それぞれに動員された船舶は 500尺以上の規模だったから最下 1500余隻でここに動員された水軍は最下 50,000人にのぼることで推算される.

 

 

 


 

 

裵楔"ベッセル

 

 

세키부네(일본어: 関船)는 아타케부네보다 작은 중형의 전투함이며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주력 전투 함선이다. 이를 관선으로 부르는데, 관선(세끼부네)은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군선(보통 노수가 40개 이상)으로서 요즈음의 순양함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 대체적인 크기는 배 길이 기준 36~69.5척 정도였는데 임란 당시에는 대략 36척 정도였다.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선수재가 특징이고, 보통 노는 30~60개 정도로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하나씩 젓는 그다지 큰 배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선들은 대개 조선 군선보다 크기가 비슷했고, 이에 조선 수군이 매우 불리 했다. 때문에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기간중에 세키부네의 규모가 커져서 조선 조정에서 걱정하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정유재란 때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에 비해 장작귀선은 장작으로 된 단단한 상자 안에 격군과 전투원(사부를 제외한 포병)들을 몰아넣어 보호하는 것이 중요한 키포인트였다. 일본도 이러 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전시라 급조 하기 어려웠다. [출처백과사전



 

 


 

 

2, 무관으로 입신,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 임진년(선조 25년) 4월 14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군수가 되었고, 부산첨사, 진주목사, 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선봉을 세워 약 50여 척과 병사 약5,000명 으로 약 600여척의 적함과 수 만명의 적들을 공격하였다. 조선해역 전도는 이 전투장면으로 확인되고 있다.(플래툰)

 

 배설장군에 대해서 더보기,,,,,,,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자료출처: 아고라, 백과사전, 선조실록, 왕조실록,난중일기, 엔하 위키미러 기타)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배설 경상 우수사 신재공 (愼齋公) 배 설(裵楔) 1551년(명종 6)∼1599(선조 32). 배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1, 의병장인 부친을 따라 군공을 세웠고,  

합천, 진주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시에는 두 차례의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별시무과에 급제해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선조임금의 차출로 원균 부대의 최고 선봉에 투입된 장수 였으나, 왜군들이 장거리 침략인 부산항에 상륙하기 전에(수심이 깊은 곳) 격멸해야 한다는 작전을 주장했으나 끝내 조정(원수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

 

 배설 // 칠천량서 패전해서 백성 여러분께 죄송해서 사표내고 도망쳐서 백성으로 숨어 지내고 싶었습니다.

숭신이 형아가 왜적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여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셔요 (백성들께 부끄럽습니다. 난 장군할 능력이 안돼요, 모과나무나 심고, 병이나 고쳐 건강한 목을 바치려구요, 동서로 갈라져 당쟁하는 더러운 조정이니,   나 한 몸 깨끗한 목을 바치려하오)

 조선 3도 연합 함대는 1997년 7월 16일 밤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따라서 배설은 그 패전의 책임을 지려고 평생 단 하나의 시조 '월파정'만 남겼다.

 이런 얕튼 바다에 진을 치면 안된다는 배설의 지론이 먹히지 않았다, 그만큼 조선군사들이 두달간의 전투로 피로에 지쳐 있었다. 특히 배설장군은 거의 매일 적군을 쫒아 다녔다,  경상우도수군은 가장 지쳐 있었으나 끝내 칠천량서 40여척의 전함과 3000여 병사를 전사하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고 원통한 일이였다,,,,



 이런 심해에서 쉬고 싶었다. 갈매기와 더불어 밤을 새고 싶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배설장군의 희망은 고스란히 선조 실록에 남아 있다.


배설장군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의 병치료를 받았으며, 평생 한편의 시조를 남기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2년후 동서인간의 당쟁으로 희생되셨다.  


유문으로 남긴 시조 '월파정' 

묻지마라, 더물어 무럿하리, 강산도 반기는데 일부러 죽였겠느냐?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여기서 진강이란 섬진강을 말하고 나주의 목수들이 장작귀선을 건조한 곳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