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성주성(부상현)전투 패배와 원인분석,

自公有花 2014. 9. 24. 18:54

계사년 1월 성주성 탈환에 성공했다.

김면과 정인홍이 일으킨 의병대와 김성일의 관군 합동작전에도 성주성은 3차례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탈환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성주성은 적군 제 7진 모리 데루모토의 부하 가츠라 모토츠나가 지키고 있었다.

 

 

경상우도 탈환 성주성(부상현)전투 패배원인?

의병들의 기백은 대단했으나,  왜군 상대가 안되는 무기, 군량, 군사력의 수적 열세로 인해 불가피했다.

 


1,성주성 (부상현)전투, 개령전투, 개산진전투, 지례전투 패배,[배설장군]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된 상태였다.(백과사전)

백과 사전에 보심..

 성주성전투, 부상현전투, 개령전투, 개산진전투 지례전투의 패배가 배설 때문이다 라는 구절이 곳곳에 있습니다.^^ 

배설이 임진왜란을 읽으켰다고 할 직전의 징비록 고대일록 기록입니다.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田句沈:官兵衛)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징비록 난중잡록의 거짖말)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김면이 죽은 후 한참 있다가 합천군수가 된다.  즉,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배설이 부친인 의병장을 따라가서 2만여 왜군의 적장 흑전구침의 목을 의병 신분으로 베었다.  물론 이전투에서 의병들은 패했지만, 적장이 살해 되므로서  왜군들이 남으로 퇴각하여  조선 의병군은 패전후 얼마  후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의 무공을 인정받아 직접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횡재소에서 합천 군구를 제수 받았다.  이 때는 이미 김면이 사망한 이후 이다.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배설은 주부(主簿;총부부장)로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였으나,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고 말았다. 모름지기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데, 조경이 패배했으니 군적도 없는 잔병신세로 전락한  배설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하고 있었다. 

 

 

 당시는 신립장군의 병사와 수많은 방어사들의 패배가 전멸이 아닌 군대의 잔병화가 되어있었다. 어차피 중앙정부가 도망다니는 상태로 중앙의 지원이 없는 그야말로 잔병들이 주로 의병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다.  의병이 별도로 어디서 나온것이 아니라 관병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잔병이 되었다가 향병 또는 의병이 되거나 다시 관군에 흡수되어 의병과 관군의 구별이 모호하였다.(양반들이 자신에 노비를 군대로 조직한 의병도 다수 있었음) 

 

 

배설은 조경이 성공했더라면, 바로 다음번 자리가 군수나 현령이 되는 것인데, 조경은 대패하여 일개 잔병이 되고 말았든 것이다. 이에 배설은 지역주민들로 향병을 모아 왜군의 저지를 위해 활동했으나,  그 역할은 미미 했었는데, 김면 정인홍의 의병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히 그 곳에 합류 하게 되었다. 아버지 배덕문이 68세에 성주성에서 거병하자 자연히 합세하게 되어 하나의 약 1500여명의 대 부대를 이루게 된다.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22일(을해) 5번째기사(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은 일본군을 추격전투를 하므로 피해가 상당했다)

선전관 이춘영이 영남 왜적의 동향과 김성일·김면의 죽음을 아뢰다------------

 

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라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욤병이 창궐했다.

 

 

 

2, 성주성(부상진)전투 연구

김면은 만석지기 유생으로 임진란으로 쫄닥 망하게 되자 고령에서 봉기하여 의병도대장에 오른 인물이다. 그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 김면이 당시 북으로진격 서울로 들어 갔더라면 도원수가 되었을 것이나, 김면과 곽재우 정인홍등은 시류를 읽지 못하여 싸나운 왜적을 추격하므로 힘든 일생 고단한 전투였었다.

 

1,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2,조헌을 지원하려고 출병한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일본군들을 성주성 북쪽(부상현)을 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에 대한 1~3차 공격이 모두 실패함, 성주성을 중심으로 개령 지례 개산진전투에 의병들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중부주력군에 맞선 의병들은 그흔적도 없이 전멸했다. 성주성에서 맞닥뜨린 의병들을 대 살육이 저지된 것은 배설의 적장 수급을 벤 공로임에도 이는 인정도 받지 못했고, 패전의 책임은 배설이 떠 맡았든 것입니다.

 

성주성 3차 공격은 최대 규모의 의병 2만이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모두실패했다. 1차 때는 일본군은 방어만 했으나,2차 3차에서는  일본군은 공격적으로 공격을 했다. 이  공격으로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성을 나와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였다.  부상진까지 추격을 당한 의병들이 거의 몰살 직전이였었고, 이 때 배문덕 의병장이 부상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반격을 개실했고, 때 마춰 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향해 돌진 몆차례의 칼싸움 끝에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아버지께(의병장) 바침,(배문덕이 적장의 수급을 취했다고도 알려져 있음,)

 

 

경상일대의 전투와 성주성 전투패배를 징비록은 배설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조헌 영규 고경명군대는 일본군의 상대라기 보다 일방적인 살육에 가깝다. 설령 배설이 합천군수라해도 기천의 관병으로 왜군을 막을 수도 없고,당시는 합천군수도 아니였다. 이정도 병력은 경상 우도 모든 관군이 합세해도 막기어려운게 당시 실정이였다.(배설은 이순신이 아니다)

 

성주성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고, 계사년 1월 왜군들은 스스로 자진 철군을 해서 무혈입성을 했다. 성주성 전투는 실패했으나, 성주성은 탈환이 되었다. 왜군이 새를 잡는 조총을 들고 다닌다든 1593년 정월 명나라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수는 22600명 장수는 약 200명 정도이나 실전에서 의병장들이 대거 사망하고 의병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명목만 유지하게 된다.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권율은 끝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서 도원수를 제수 받게 된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장군휘하의 약 1500명의 의병중에 선봉장에 불과하였고, 김면과 정인홍은 약 1500여명의 향병인 배설에게 낙동강가로 가서 금산 이치등지에서 후퇴하는 일본군 약 1만병을 막으라는 명령을 했다.

 

이에 배설은 배덕문장군과 함께 약 1500여명의 향병들에게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견이 낙동강강변의 넓은 분지에서 적을 기다리자고 한다. 그러나 배설은 이미 추풍령전투와 탄금대 전투를 목격한 경험으로 병졸들에게 부상진 험로 계곡에 매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강변에서 아군의 군세를 믿다간 단 한명의 왜적도 공격치 못하고 몰살 당할 조총의 교대연발 사격을 걱정하여 부상현 계곡에 매복을 시킴으로써 화살 시위권으로 적을 유인코자 하였다.

 

드딛어 일본군은 의병들 전선이 무너지자 일제히 일본도를 들고 추격하여 부상진 계곡에까지 들어 왔다. 배설은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리자 계곡에 갇힌 구로다 간베에 흑전구침은 배설과의 칼사움에 패배 목이 달아난자 일본군이 일제히 도주하여 성주성안으로 들어가 1월까지 침거하다 대장을 읽은 일본군들은 1월 밤에 모두 퇴각해 버렸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분기점이 되었고, 이전투로 경상도가회복되는 바. 권율의 행주산성을 공격치 않고 일본군이 퇴각하게 된 것이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병들이나 일본군들은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 신분이였다.

 

정인홍과 김면은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제 2차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12월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의병들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과라면 배설의 적장의 목을 벤 것 뿐이였다.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김면은 슬슬히 只知有國 不知有身(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남기고 병영에서 전사했다.

 

배설이 김면 정인홍 아래에서 이름없는 의병신분이 였으나, 방어사의 부주(총무부장)로서 언제든지 합천군수로 제수 받을 자격이 있었음에도 패잔병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594년 합천군수가 되고 경상우도 일대의 탈환 공로로 늦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다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배설은 진급이 아주 늦은 편이다. 그럼에도 경상지역 고관들은 배설장군의 전공이 배문덕장군의 공이라며, 진급을 반대하는 상소가 많았으며, 자신들도 모르는 전공이라고 하기 까지 하였다.  자신들은 관군이 되어 도망다녔으니, 당연히 전공을 알 수 없었음에도 시기와 모함은 이때도 있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구로다 요시타카가문의 장군도 두개중 하나가 아직도 종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3, 임진침략(일본)상세보기,  1592년 4월 13일 오후 20만 여명의 왜군은 9개 부대로 나누어 시차를 두고 조선을 공격 하였다. 

제1진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는 700여척의 전선에 병력 1만8천7백 여명을 태우고 4월13일 아침 8시경 대마도의 오우라항(大浦港)을 출발 하였다. 그 날 오후 5시에 부산 앞 바다에 도착하였고, 다음날인 14일 새벽에 부산진성을 공격 하였다. 15일은 동래성을 유린하였고, 양산, 밀양을 거쳐 청도, 대구를 지나 선산과 상주를 공격하고 계속 북상 하였다.

 

 

13일 상륙을 마친 왜군들은  14일 부산진성을 침범,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송상현 부사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 송상현은 15일 전투에서 두시간만에 중과부주적으로 전사,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이다.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병력 2만2천 8백으로 4월18일 부산포에 들어와 언양, 경주,영천, 신령, 군위, 비안, 용궁, 풍진도를 거쳐 문경에서 제 1진을 따라 충주로 공격 했다. 이 두 부대는 5월2일 한강을 건너고, 5월3일 남대문과 동대문을 통해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북상한다는 보고가 날아 들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鳥領) 이남에서 왜군을 방어하도록 지시 하였으나, 4월25일 이일이 지휘하는 부대가 상주에서 패하고, 4월26일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이 지휘하던 문경도 왜군에게 점령 당 하였다. 4월28일에는 도순변사 신립이  8천명의 군사와 함께 충주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역시 패 하였다.

 

 

 선조는 4월30일 밤 2시쯤 소나기를 맞으며 도승지 이항복이 들고 있는 등불을 따라 말을 타고 100여명의 신하와 함께 한양을 빠져 나갔다. 도성과 궁궐은 왜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난민들에 의하여 방화 되고, 파괴 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으며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하였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한양이 점령 당하자 선조는 5월1일 개성부에 도착 했다가 5월7일 급히 평양으로 피난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4월19일 죽도 부근에 상륙 한 후 김해, 창령을 지나 오른쪽 부대는 무계, 성주 방향으로, 왼쪽 부대는 초계, 거창, 지례 방향으로 각각 북상하여 금산에서 합류한 후에 영동, 회덕,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공격 하였다. 

 

제4진인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부대는 병력이 1만여 명이었나 집결이 지연 되고 전선이 부족하여 제 때에 투입 되지 못하고 5월2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 하였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휘하는 4천명의 병력은 선발대로 4월 중순 부산에 상륙해 있었다. 이를 합한 1만4천l 왜군은 창령을 거쳐 현풍에서 머물다가 상주를 지나 한양을 공격 하였다.

 

 

제5진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鳥正則) 부대는 병력2만5천으로 제4진에 뒤 이어 상륙 한 후,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진출로를 따라 북상 하면서후방 부대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제6진 병력만5천7백명, 제7진 병력 3만명, 제8진 병력 1만명, 제9진 병력 1만1천5백명이 연이어 상륙 한 후방 부대 역할을 하거나 한양으로 이동 하였다. 그리고 1만2천명의 에비 부대가 투입 되어 주로 후방 경계를 담당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官兵衛는 약 39세 전후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을 유심히 살펴보심 일본군의 행로가 중부는 비워두고 서남진함을 볼 수 있죠, 성주성 김천등지를 우회합니다. 즉, 한마디로 이순신장군을 찾아가는 일본군이죠,  배설장군을 어캐든 피해가려는 큰  형세가 보이지요,, 왜 그럴까요, 이순신,  유성룡, 당시 동인조정은 일본과 뭔가를 주고 받고 있다는 느낌 여차하면 항복(강화) 이걸로 파면됩니다.  

 

 

1597년 정유재란 전투

7월 15일 칠천 / 원균 :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야키자키 가토

8월 16일 남원 / 양원 : 우끼다 = 남원함락

8월 17일 황석산성 / 곽준 : 가토오 = 산성 함락

9월 7일 소사 / 해생, 양등산 : 모오리 = 일본장수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된 것이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전이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왜 이런 전교를 내렸을 까요,   일본군은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병사들을 소모시키지 않는 장군들 간에 결투로 병사들을 합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요, 만일 일본군이 배설장군을 만나 결투로 패배하면 침략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었고, 흑전구침처럼 당할 수 있었죠, 주의를 준 것인지 그내 내막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In succession , the person (or soldier ,or general ) reseized many castles such as Seongju , Hapcheon gunsu, Chogye and Euiryeong and then was promoted to a corp commander .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5,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햐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배설이 칠천량패전후 멸치잡이 상인에게 배를 팔려고 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출처:고대일록)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습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6, 배설은 김면이 죽은후 합천군수가 되었다.^^

 

 

 

 

 

1597월 18일 정미(丁未)칠천량해전에 관한 김완의 해소실기

 

서원에 머물면서 부(賦)를 지었다. ○ 산양(山陽)의 박군수(朴君秀)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오후에 정사고(鄭士古)가 서원에 왔다. 해가 기울 무렵에 박공간(朴公幹)이 서원에 왔고, 황혼에 황덕장(黃德璋)이 의령(宜寧)으로부터 서원에 왔다. 황이 말하기를, “통제사 원균이 14일에 배 200여 척을 끌고 나가서, 공산(公山)에서 적을 맞이하여 치고는 영등포(永登浦)에 배를 머물러 두고 있었습니다. 16일 밤에 적이 와서 밤중에 기습하였으나 배를 묶어 두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이 트자 적선이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원균(元均)은 바다에 빠져 사라지고 충청 병사 최호(崔浩)도 죽었습니다. 주사(舟師) 중에서 죽거나 물에 빠진 자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서 포위를 뚫고 나와, 곧바로 한산(寒山)에 다다라 남은 배에다 군사를 싣고 급히 도망하면서 군량과 기계를 전부 태워 버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호라! 우리나라가 의지한 것이 수군(주사)이었는데, 원균이 원래 통어할 만한 인재가 아니었음에도, 갑자기 이순신(李舜臣)을 파직하고 원균으로써 대신하게 했고, 원수 권율(權慄)은 원균을 곤장까지 쳤다. 원균 이 때문에 성이 나서 급히 군사를 몰아 나가면서 세력의 많고 적음도 고려하지 않고, 계속 바다에 배를 띄워 다 함께 침몰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는 실로 조정의 정책이 마땅함을 잃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수의 방략이 어긋나 날마다 함부로 전투를 벌여 일의 기틀을 크게 잃은 것이다. 원균 같은 자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나랏일을 어찌하며 백성들은 또 어찌 할 것인가! 온 나라 사람이 한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나 놀라 모두 이제 다 죽게 되었구나 하는〔溘然〕생각을 가졌다. ○ 배설(裵楔)은 몰래 전라도로 도망쳐 전선(戰船)을 팔았다고 한다.

 

 

 

전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을 부장으로 삼았다. 지례에 웅거해 있던 왜적을 습격하여 종들을 대대적으로 많이 잡았는데, 배설(裵楔)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다 섬멸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도망쳤다. 또 정인홍과 약속하고 성주(星州)의 왜적을 공격하여 양군이 합세해서 포위하였다. 왜적이 개령(開寧)으로부터 와서 지원하자, 배설을 시켜 그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배설이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군사들이 왜적의 구원병을 보자 크게 무너졌다. - [난중잡록]-<의병장 조경남>이 선조 15년(1585)부터 인조 15년(1637)까지의 일을 기록함

 

 

배설(裵楔) : 1551~159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ㆍ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부산 첨사ㆍ진주 목사(晉州牧使)ㆍ밀양 부사를 거쳐 선산 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백과사전)

 

 

○ 4월 17일 병인(丙寅)

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 1556-?)이 지은[고대일록]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 재주는 있게 마련이다. 동인들 유성룡은 징비록으로 서인출신 장수는 비겁하고 졸장이고 동인은 위대하고 용맹했다는 글을 쓰서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는 징비록을 남겼다.  사실 이순신은 정상적으로 과거에 통과 할 수 없는 자격미달의 무관으로 보였으나 타고난 모함에 명수 구라에 있어 출중한 재주가 있었고, 결국  성웅에 반열에 올랐다.

 

현대 사회에 꼭배워야 할 처세술이 이순신이다. 능력이 없다면 커닝도하고 유성룡의 줄을 대어 기어코 늦깍이로 과거를 과장에서 말에서 떨어지고도 조선 최초로 과거를 통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인생살이에 잘사는 것 만큼 중요한게 또 있을까? 수단 방법 안가리고 모함과 허위 전승보고를 할 만큼 비서실장겸 영의정 유성룡을 꽉 잡고,  죽을 고비도 살아남는 처세술은 정말 대단하다.

 

이순신의 연일 연승 23전 23승 대로라면 조선 출병 왜군들 씨가 말러야 하는데,  전장에서 왜군은 건재하다 못해 날고 긴다. 왜 그럴까, 요즘 공직에서 엉터리 보고서로 돌아가는 관료사회의 폐단과 같이 동인들의 희망사항과는 별개로 조선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재미 있는 징비록 난중잡록 고대일기 같은 것으로 배설을 십으면서 희망을 읽지 않았다면 배설은 악역을 소화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배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9월 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정경운의 '고대일록'中 부록 '인명록'>

배설(裵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ㆍ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출처:고대일록 )

 

 

 

 

 

 

6, 배설에 관한 선조실록 사실

배설은 1583년(선조 16) 31세에 무과(武科) 별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공의 초기 공직은 변방으로 기용되었는데, 부임지 마다 모두 치적과 명성을 얻었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공은 주부(主簿)로 승진되어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1592.7월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자, 공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 하였다. 그 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공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는데, 이 때 공이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김면의 지원을 합천군수로서 거부했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될 수 없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합천군수가 되는 사람이 합천군수로 지원을 않해서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의병들이 패배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배설은 적장의 목을 벤 공로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본래 의병들이 왜적과는 상대가 안돼었으며,  가장 규모가 큰 곽재우의 의병이 약 1,000명으로 (많았을 때가 2200명)의병들 스스로 2만 이네, 3만이네 하는 데,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이고,  왜군들이 의병을 두려워 하지는 않았으나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한 점은 있고, 배설이 실제 합천군수라고 해도 2만 왜병을 저지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 후 공은 이러한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왜적이 부산포 일대에서 소란을 피우자 공은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잠시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를)로 발령 받는다. 김면이 죽은 후 한참 있다가 합천군수가 된다.

 

 산첨사 시에는 왜군의 국경왕래를 차단하였으며, 동래부사 시에는 관할구역을 옛날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치적을 남겼다. 공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7, 배설은 중국에도 알려진 명장이였다.

중국에 자문을 보내는 일과 몇 가지 인사 문제를 논하다. “부하(部下)에 발탁할 만 한 자는 없는가?”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兵使)로 삼을 만합니다.”하였다.

 

공은 곧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는다. 장군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군정을 바로 세워 군의 사기를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완평 이원익(李元翼) 선생이 공을 일컬어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높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국의 폐단에 관한 충직한 공의 건의문이 도원수 권율에 의해 문제가 되어 밀양부사로 좌천되었다.

 

배설은 부정부패 문제를 임금에게 탄원하여 조정대신들로 부터 일찍이 미움을 받았다. 그것은 구국적 판단이였고, 그로 인해 권율과는 악연을 맺는다. 그후 칠천량 패전으로 선조가 경상우수사인 배설을 중용할 기미를 보이자 권율이 계획적으로 배설을 제거 한 것이다.  배설이 중용되면 동인들 전체가 위험해 지기 때문에 도망만 다니든 문신과 내시들 동인들 동인의 선비들이 모두 가세해서 배설을 악의적으로 모함한 것이다.

 

 

백과 사전과 여러 문헌에 선조 실록이나 왕조실록이 아닌 유성룡의 징비록에 근거한 아류 소설인 고도일기 난중잡록 같은 수많은 서적에 이런 엉터리 모함이 계획적으로 유통될 수 있었든 것도 동인들의 장난이였다. 요즘 말로 국정원의 댓글 사건과 유사한 것이다. 영의정겸 비서실장인 유성룡이 나라를 위해 죽은 배설을 무서워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8, 선조실록 기록

선조38년 2월 4일 (정미)
회계하기를,
“이일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므로 신들도 염려하였으나 대신 거느리게 할 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처럼 아뢰었는데, 지금 상교를 받고 보니 극히 윤당합니다. 단 선전관 조광익(趙光翼)이 새로 남쪽 지방에서 와서 비변사에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배설(裴楔)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 합니다. 배설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못했다면 원균(元均)과 선거이도 다 교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3일(갑술)
병조 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 뒤 국내의 변란을 우려하여 아뢰다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비밀히 아뢰기를,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철수하여 돌아간 뒤에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되니,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떠도는 말이라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뜻밖의 사변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은밀히 하유하여 비밀리에 추격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고, 다른 도에도 아울러 유시하여 특별히 기미를 살피게 함으로써 그들이 용납될 것이 없게 하소서.

 

 

다만 나라의 기강이 이미 해이해 졌으니 유시를 내리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심상하게 여길까 몹시 염려될 뿐입니다. 옛사람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반드시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잡게 하였으니 지금도 역시 높은 벼슬과 후한 상을 내린다고 한다면 필시 마음을 다해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모두 적이 물러갔다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신만 구구하게 지나친 우려를 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110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3월 6일(을유)
전 수사 배설이 법에 의해 처형되다
전 수사(水使) 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조선시대에 역모로 몰려 당대에 복권된 경우가 없다. 보통 70년 ~100년 후에 복권된다는 점에 비추어 이례적일 뿐 아니라, 영의정 유성룡이 직접 선무용 징비록을 지으 선비들에게 배설이 도망자라고 가르친 것 만 봐도 당대 배설의 명망이 중국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이 5년간 먼저 전라좌수사를 해먹고, 삼도 수군통제사가 됩니다. 이에 원균이 자기 아래사람을 임명했다고 동인과 서인간에 싸움이 되어 어쩌 저쩌 하다가 원균이 복귀하고, 이순신이 파면 사형수신세로 압송되죠,

 

이 때 배설은 가장 촉망받는 장수군에 들어있다가  선조와 서인인 원균에 의해 경상우도수사로 차출됩니다. 이에 배설은

배설의 "부산항 상륙 전 왜군 격멸, 또는 심해 유인격파"를 요구했는데, 이순신이 파면된데,,,  권율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동인들 유성룡 비서실장겸 영의정, 참모총장  권율, 국가안전부장겸검찰총장 이원익으로 부터 배설이 견제를 받게 됩니다.  꼼작 못하죠, 정보도 않주죠 단신 도망다닌다 그러죠 지금처럼 핸드폰만 있었다면 배설이 아니라 동인들이 다들 사형됐을 거예요, 

 

칠천량해전서 조선수군이 폭삭망하죠, 사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중과부적이 였죠, 

칠천량해전을 패전이라며, 이들은 배설의 구국적 청야작전을  왕에게 비밀로 하고 이순신을 파견하여, 


 

7, 이순신장군의 8.19일 군사 쿠데타를 하게 됩니다.  

 

 

배설은 병치료를 위해 군권을 넘기고 귀향을 요청하자, 8.30일 허가를 공문으로 줍니다. 이에 배설은 송별회를 하고 9.2일 귀향길에 오릅니다. 9.2일 새벽 병영을 나가자 마자, 동인 군부는 탈영보고를 해버립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죠, 이들은 임금을 속이고 있었거든요, 배설이 야전군사령관이라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거든요,(왕이 배설의 청야작전을 알게되면 모두 3족이 멸함) 선조는 배설을 신뢰했고 신임하였고, 자칮 도원수자리까지도 위협하고 있었거든요,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적들은 2.000여척이 조선에 들어 왔습니다)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당쟁은 왜적보다 더한 증오감이 있었다.
동인 김성일 유성룡 정여립 이외 약 2.000여명으로 호남 동부권을 중심하는 세력으로 1589년 (선조 23년) 정여립 모반사건인 기축옥사로 약 1.000명이 옥사하는 조선시대 최대 사화가 정철에의 주도로 이루어졋다. 그후 살아 남은 유성룡 김성일 동인세력은 서인 출신 원균이 패배함을 기회로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철은 기축옥사후 1592년 건저의 사건으로 몰락하고 서인세력은 다시 소외되고 동인인 이원익 유성룡은 남인세력으로 분화 권력을 유지하였다. 참고로 정철 이이 이황은 서인계열의 세력이다. 

 

 

 

 권율의 출세1537(중종 32)~ 1599(선조 32)행주대첩 대승의 명장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은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시기였다. 권율은 계속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한다고 서울로 들어와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행주대첩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도원수에 오르게 된다. (권율은 왜군이 의병들과 전투후 남쪽으로 철수 하는 틈을 운좋게 잡아 챌수 있었다.)
 
 
 
어째튼 배설은 성주성 전투로 임진왜란 왜적의 소굴이였든 합천군수가 되고 연이어 진주목사 선산부사 동래부사 등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권율의 천량해전 대패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누가 보더라도 권율의 실패작이다. (선조가 공언함)
부산포 공격 칠천량 해전을 기획 입안 한 장수가 권율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륙한 대규모 왜군을 바다에서 공격하라는 것은 권율의 기획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것은 당시 물정을 모르든 호종 내시들의 요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권율이 서울을 탈환한다고 한 기개에 기대어 부산도 탈환하라는 것이 였을 것이다. 삼척동자도 이런 무모하고 현장을 모르는 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권율이 기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율은 장수는 크녕 군관정도의 인물, 조선의 명장들을 사지로 몰은 국가파탄의 무능한 장수임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권율은 40이 넘어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호조정랑으로 출발 의주목사로 부임받았으나, 국경을 어지럽(중국과교역:역관)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광주목사로 부임받아 의기좋게 서울 탈환을 하겠다고 북진해서 출세하였는데, 호남쪽 왜군은 주력부대가 아니였고, 큰 전투도 없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게 되어 도원수에 오른다. 
  
  
  
  
 
곽재우의 귀향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임진왜란의 발발로 의병으로 활동,
곽재우는 경상의병 좌장으로 활동하여 그 공적으로 1575년 진주목사에 까지 임명된 명장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주성을 버리고 2000여   명과 함께 화왕산으로 들어가 이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의병들이 왜군의 상대가 안되었음 보여준 적절한 예로 그 후 진주성목사로서 계모의 호상을 핑계로 울진으로 귀향하였다. (왜군이 만만하면 진주목사인 그가 성을버리고 귀향했겠는가) 조정에서 수차 불렀으나, 끝내 거부하고 울진에서 지냈다. 

 

 

9,백과사전은 선조실록이나 왕조실록을 무시하고 징비록에 의존한다.
"1592년 9월, 배설은 합천 군수였을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이 성주성 공격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무시해 아군이 크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배설은 아래와 같은 어록을 남긴다. 당시 김면은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임명된 상태였다.(백과사전)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되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즉,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배설이 부친인 의병장을 따라가서 2만여 왜군의 적장 흑전구침의  목을 의병 신분으로 베었다. 물론 이전투에서 의병들은 패했지만, 적장이 살해 되므로서 왜군들이 남으로 퇴각하여 조선 의병군은 패전후 얼마 후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무공을 인정받아 직접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횡재소에서 합천 군구를 제수 받았다. 이 때는 이미 김면이 사망한 이후 이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배설은 김면이 죽은 후 합천군수가 되었다.
더구나 김면은 당시 의병장이고 배설은 주부였으나, 추풍령전투에서 패배한 관군으로 의병(향병)으로 성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물론 당시 전시라 합천군수로 가장(임시)으로 임명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의병중에 승리하면 너에게 합천군수를 주겠다는 초유사 김성일의 말 한마디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수십명의 의병이 2만의 왜병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했다면, 배설이 장비나 관우정도 되는 장수가 아니다. 더구나 철포로 중무장한 왜군들이 퇴각하는 것을 수명의 의병이 무슨 수로 막는다는 것인가, 그나마 왜장의 목을 벤것만도 대단한 전공으로 선조가 합천군수를 제수 했다. 
 
전쟁에 있어 침략군의 중심과 방어의 중심을 보지 않고,  동인들은 호남을 중심으로 보고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징비록에 의존 실록(사관도 동인들임)을 무시하고 침략 왜군의 주침략로를 방어한데 인색하게 기술하고 있다. 한 인물이 일본과 한국에서 정반대의 인격을 갖는 배설장군은 당대에 삼남의 백성들의 우상이였고, 의병들의 질투의 대상이였든 것은 분명하고,  왕조를 위협할 민심과 역모를 우려한  위험인물로 영의정겸 비서실장 유성룡이 스스로 징비록을 집필해서 배설을 도망자로 전국민에게 알려야 할 만큼 급박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