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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권율 곽재우 배설 김면의 활약상,

自公有花 2014. 9. 26. 15:08

권율 이순신의 전투분석,배설보다 낳았었나?

 

권율장군과 이순신장군님을 깍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서는 사실에 충실한 분석이 필요하다. 임진왜란은 일본군의 부산포침략으로 시작되어 부산포철군으로 끝나는 것이다. 동인(호남동부세력:징비록)들은 임진란을 호남에서 시작해 호남서 끝나는 것으로 하는 시각이다. 

 

사실대로 전사한 분, 하나 하나 개 죽음을 만들 필요가 역사에서 필요한가 자문해본다. 한 사람을 영웅만들기 위해 임란당시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든 모든 장수들에게 낙인보다는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장군들 귀향과 탈영시비 실록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설장군의 귀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패장으로서 배설장군은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으로 살펴 본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을 잘만나야 한다. 임진왜란 대도 그렇다 좋은 장군을 만나 영웅이 되기도 하고 역벅이 되기도 한다. 역사물은 좋은 교훈이 될 듯하다.

 

 

 

난중일기 기록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

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뭍으로 내리자 마자 아직 배설이 선산까지 가지도 못한 상황임에도 당시 당쟁의 피해의식이 이순신장군을 사로잡고 있어 보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탈영보고)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원수부 권율에게 1597.7.23"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하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그 뿐 아니라 선조가 7,22일 이미 칠천량해전의 실패는 권율에게 있다고 정리 했음에도 동인조정중신들과 사관은 이를 거부하고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서인출신 원균으로 책임지우는가 하면 기어코 이순신을 복권시키고 전사자들을 폄해하고 있다.



탈영으로 누명을 쒸워야 할 필요성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병가를 내주고  9월 2일 탈영보고를 하는 이유는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로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있다. 이로 이미 배설제거 계확이 군부주도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말아달라는 것이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이순신이 어차 피 전사하여 영웅이 된 분을 끌어 내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인조정의 기록을 과신 하는 것은 아주 잘못 된 것이다. 동인 조정은 배설을 어떻게든 죽여야 자신들이 살아남는다 따라서 이순신은 귀향을 허락하고 바로 도망으로 권율에게 보고했다. 계획된 정적 제거라고 할 수 있다


 

 

 

 

 

 

 

 

6, 권율의 출세1537(중종 32)~ 1599(선조 32)행주대첩 대승의 명장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은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시기였다. 권율은 계속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한다고 서울로 들어와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왜군들의 철군으로 인해 도원수에 오르게 된다. (권율은 왜군이 의병들과 전투후 남쪽으로 철수 하는 틈을 운좋게 잡아 챌수 있었다.)

 

 

 

어째튼 배설은 성주성 전투로 임진왜란 왜적의 소굴이였든 합천군수가 되고 연이어 진주목사 선산부사 동래부사 등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안골포해전,  가덕도해전, 웅천전투, 등등 부산포 전지역에서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선봉장으로 참여했다.

실제 웅천 전투도 하루에 세번씩 치루어지므로 두달간 실제 거의 매일 작전과 전투와 연결되었다 부산일대 왜군들 본거지 속에서 작전과 전투가 이루어졌다.  두달간 한 전투만 해도 약 20회 이상의 전투가 있었고, 이는  7년간의 이순신장군님의 23전에 비해 결코 작은 전투라 할 수 없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7, 권율의 천량해전 대패

칠천량해전의 패배는 누가 보더라도 권율의 실패작이다. (선조가 공언함)

부산포 공격 칠천량 해전을 기획 입안 한 장수가 권율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륙한 대규모 왜군을 바다에서 공격하라는 것은 권율의 기획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이것은 당시 물정을 모르든 호종 내시들의 요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권율이 서울을 탈환한다고 한 기개에 기대어 부산도 탈환하라는 것이 였을 것이다. 삼척동자도 이런 무모하고 현장을 모르는 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권율이 기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율은 장수는 크녕 군관정도의 인물, 조선의 명장들을 사지로 몰은 국가파탄의 무능한 장수임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권율은 40이 넘어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호조정랑으로 출발 의주목사로 부임받았으나, 국경을 어지럽(중국과교역:역관)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광주목사로 부임받아 의기좋게 서울 탈환을 하겠다고 북진해서 출세하였는데, 호남쪽 왜군은 주력부대가 아니였고, 큰 전투도 없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게 되어 도원수에 오른다.

 

 

 

 

 

8,곽재우의 귀향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임진왜란의 발발로 의병으로 활동,

곽재우는 경상의병 좌장으로 활동하여 그 공적으로 1575년 진주목사에 까지 임명된 명장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주성을 버리고 2000여 명과 함께 화왕산으로 들어가 이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의병들이 왜군의 상대가 안되었음 보여준 적절한 예로 그 후 진주성목사로서 계모의 호상을 핑계로 울진으로 귀향하였다. (왜군이 만만하면 진주목사인 그가 성을버리고 귀향했겠는가) 조정에서 수차 불렀으나, 끝내 거부하고 울진에서 지냈다. 곽재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의병과 장수들이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은 경우 귀향해서 살았다.

 

 

 

권율 이순신의 전투를 좀 봅시다.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이순신과 권율이 군권을 장악함,



2)명량대첩   1597년9월 18일 (선조 30)에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함, 12척의 전함으로 330척의 적함을 격침시키고, 왜군   18,000명 (노량 해전 6만명)을 격멸한 세계적인 대승, 대선수인 야키자키 야스히로는 일본에서 1500명이 출전하였음, 1597, 9, 2일 배설이 전함에서 내린 날, 귀향하고 2주 뒤인 16일 명량 대첩이 있었다. 

또 2주만에 탄환을 조달한 기록이 전무함, 이순신장군이 23전에에 23승 격멸한 왜군의 수가 왜군전체 출병 수보다 많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함(영화 명량, 불멸의 이순신을 참조할 것)

 

 

7, 순천 사천 울산 왜교성 패전, [1598.9.19~11.19]1597년 음력 12월 23일 ~ 1598년 음력 1월 4일

 왜성은 이순신장군을 흠모하시는 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라도 순천성은 삼면이 바다로 서쪽만 육지이다. 조명연합군은 약 5만 5천명, 소서행장 (고니시)왜군은 1만4천명이였다. 등자룡 진린 외 조선군 장수들(김완 이영남)이 대부분 등이 참여해서 패배했다.

 

 순천왜성 조명연합군의 총공격,

조명연합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3개 왜성을 동시 전면 공격하여 왜군을 섬멸하자는 작전은 세곳 모두 실패,

 

1598년 9월 19일우의정 이덕형 도원수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 명나라 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항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내렸다.이 때 모든 조선의 군대가 동원되어 약 30만 병력, 

 

제 1승: 9월 21일 명군의 지원병1만5천명 도착 하고,  해남현감이  적진 공격 왜군 8명 사살 순천성 

22일 ~23일 유정은 조선군을 질책 서천만호 한산대장 홍주대장 금갑도만호 회령포 만호 외  조선군장수들 곤장7~15대씩 처결

 

30일 명군 수군 전함100여척 이순신 합세

10월2일 조명 연합군 총공세 반나절 도중 오하려 왜군들이 밧줄울 타고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 조명연합군 약1.000명 전사(조선수군 사로 첨사 황세득 이청일 외29명 전사)연합군 100보 후퇴

 

10월 2일 유정은 사천성의 악명높은 시마즈군을 봉쇄한 조명연합군이 중로군 동일원장군이 시마즈 요시라 왜군에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음,(울산성 가토 기요마사 조명연합군 동로군도 후일 패배함) 놀란 조명 연합군은 긴급히 순천왜교성 봉쇄를 풀고,


2일부터 9일 까지 조선 명나라군대는 무기도 버리고 밤낮으로 도주했다.  부유창방면으로 퇴각은 계속되어 9일까지 계속함(조선군 전사200명 부상 600명) 이 퇴각으로 군량미 3천석을 빼앗겼으며, 엄청난 무기들도 빼앗겼음(흔히 7일간의 도주라고 말할 수 있으나 아군이므로 퇴각이라함)

 


 

2)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이건 사실 시마즈 본군7천은 이미 철수 하고 잔병으로 6만명 전투상보자체가 의문 스러움)어째튼 우리 이순신이니 자랑스럽게 봅시다.


 

이순신의 본군은 노량근처의 관음포에 매복해있었고 19일 새벽에 일본 수군이 노량에 진입하자 관음포에 매복한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해 노량해전이 시작되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후퇴했으며,  노량해전은 해가 뜰때까지도 계속 왜군들의 철군이 계속 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라의 철군하든 병졸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며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조명 연합수군은 많은 포로들을 싯고 퇴각하든 일본 고니시와 고위장교들이 먼저 떠난후 잔병들을 추격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270명, 명군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이 사망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죽음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명나라 등자룡(鄧子龍)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출처:충무공전서).

 

결론, 칠천량 전투나 별반차이가 없는 패전임에도 동인들이  단지 보고서를 잘 만든것에 불과함을 알수 있음, 조선군이나 명군이 왜군은 수 명 내외로 사살하고,  왜군은 조명 연합군을 만명단위로 죽임, 이순신과 권율 다합쳐도 배설과는 상대가 안됨을 알수 있다. 배설이 서인인 원균을 만난 것이 비운이였고, 권율의 동인들로 견제 받았음이 조선에 있어 비운이였다.  

 

 

사천성패전,시마즈 요시로 일시:1598년(선조?)10월1일 

지휘관: 조·명연합군-董一元/ 일본-島津義弘 병력: 조·명연합군 수만인~200,000내외/ 일본-7,000내외 전과: 조.명연합군-30,000~80,000내외 사상자/ 일본-미상 약 400여명 사상,

 

1598년10월 조선의 사천에서 島津義弘이 이끄는 島津軍7천명이 명군의 장군 동일원이 이끄는 수만의 조·명연합군을 격퇴한 전투로서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설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명군의 수가 3만7천에서 20만까지, 명군의 사망자가 수천에서 8만이라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일본 측 기록>중국측 기록에 8만명 사망으로 되어 있어 이보다 피해가 큰 것으로 추정됨,  1598년 9월 말부터 10월초까지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小西軍), 사천왜성(島津軍), 울산왜성(加藤軍)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

 

동일원이 이끄는 20만이라 칭하는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했고, 그 후 집결하여 철퇴한 연합군의 島津측에서는 [취한 수급이 3만, 벤 시체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島津義弘은 [鬼石蔓子]라 불리어 무서워했고, 그 武名이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전해졌다.

 


사천성의 전투에서 명군의 병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패전 측인 명의 기록에서 [전사자 약8만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 8만인이라는 것은 세계사와 비교하여도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패전의 장수는 책임을 물어 처형되는 경우도 있어 전과는 과대히, 손해는 과소히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론^^

칠천량해전이 결코 패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조선 판옥선들이 왜선 5척에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학살 된 점은 있으나, 기습에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미 권율의 작전 실패로  포위된 상태에서 육지로 퇴각도 하나의 방법이 옳은 것이였음, 그냥 배에서 60여명이 200명을 당할 수 없고, 일방적인 살육이 되기 때문에 육지로 피항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 한 상황이였음,

 

 그러나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일본 군을 공격한 1597년 6월 부터  7.16일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좌절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려주었음, 왜군 병사들에게 막대한 공포심을 조장한 가치 있는 전사이고, 순천왜성, 사천성, 울산성패전에 비해 매우 가치 있었든 전투였음은 일본측 자료가 말하고 있음,,,원균이 30만 대군을 동원했었으도 똑 같았을 것,,,^^  


권율과 이순신 그외 모든 조선군 장수들이 30만 대병을 동원해서 1597 .11~ 1598.11.18일 까지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올린 전과는 가히 부그러울 정도다. 9월 21일 해남 현감이 8명의 왜군을 사살한 것이 큰 공로였고, 하루에 10만 명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왜군이 한번 공격하면 최소 수백에서 수천명 아니 수만명까지 죽어 나간 그야말로 인해 전술이였다.


조선 명나라군은 아무런 전과도 없었다. 아마도 서부개척시대의 백인들과 인디언들간의 전투도 이보단 나았을 것이다. 배설이 부산일대에서 싸운 상대는 이들 찌꺼기 왜군들 하고는 달랐다.  모든 왜장 주력부대와 전투 한데 비해, 왜군  3대 잔병에도  조명연합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권율과 이순신은 사천성 패배 소식만 듣고도 식량 3천석을 버리고 무기까지 모두 놓고 부유창 방면으로 7일간 밤낮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명나라군  뒤에서서 도주에 도주를 했다. 고니시가 평소 자신  혼자서도 조선을 점령할 수 있다면서 조선군이 가토 기요마사를 처치해달라고 한 말이 호언이 아니였었나?

 

 

 

 

 

 

 


 원균을 그렇게도 무능하다고 하시는 분들 권율과 이순신의 전투가 원균 보다 나았을 까요?  역부족이 였겠죠,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7일간의 기적의 항해기록^^

http://blog.daum.net/boq545/?t__nil_login=myblog

 

 

 

이순신 장군의 훌륭함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한 인물을 영웅화 신격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폄하한다면 이는 또 다른 역사왜곡 이며,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영화가 문화라는 이유로 실존인물들을 모두 비하 폄해하고 임진왜란이란 백성들에게 가해진 고통 자체를 왜곡하게 될 우려가 크다.

 

임진왜란은 부산포 침략으로 시작해서 부산포 철군으로 끝나는데 이순신을 신격화하자고 다른 모든 전사자들을 비하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전투는 부산에서 서울축으로 이루어졌고 희생도 많았음에도 마치 전사자들이 무능하고 비겁한 것으로 동인들(호남동부세력)이 낙인찍어 둔 것은 역사서술에 있어 미숙함을 여실히 드런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