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장군의 최후(요약)
배설장군의 최후(요약)
裵楔 "ベッセル いたい....
풍신수길은 절명순간 왜 배설을 불렀나요....^^
배설장군은 1599년 선조 30 년 향년 49세로 모함에 의해 세상을 하직합니다.
배설장군이 도망자, 비겁자 였거나, 역모가 있었다면, 배설장군의 아들 형제에게 조정에서 관직을 주었겠냐구요, 장남은 끝내 아버지의 역모 연루에 벼슬을 사양했으나. 죽은후 벼슬을 제수 받았구요, 그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받은 고위관직은 다 셀 수 없을 정도 입니다. 얘기하고자 함은 만고의충신답게 배설장군 의 아들 전부가 관직을 받았다는 것이죠,아니 손자들은 영천현령, 또 좌승지(승지 :청와대근무)....
비교가 적절하지는 않으나. 이순신장군님이 당대성웅이시니 이에 비교를 해보죠, 조선340년간 후기에 문과 급제1명이 있었네요^^ 죄송! 무관은 하급관리나 무과출신은 267명이랍니다. 어디까지나 억울한 누명을 밝히고자 할뿐, 훌륭한 이순신장군님 까려고 하는건 절대아닙니다. ^^ 굳 모닝~ 궅이브닝
배설장군이 역모죄로 추포되어 가족도 장례를 겁나서 못하는데요, 경삼감사 한준겸이 현직파직뿐 아니라 3족을 멸할 역적이라는 배설장군을 군졸을 보내서 장례를 치릅니다. 사대부의 장산을 빼앗아 묘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파직당합니다.
얼마나 인품이 좋았으면 자신에 가족목숨까지 걸고 경삼감사까지 내려놓은 장례입니다. 배설이 어떤 인물인가 추정되지요, 미관말직도 중요히 여기든 시절에 역모로 몰린 장수를 장례지냅니다. 관포지교나 금란지교니 하지만 배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은 인물이고 시기 또한 대단히 받은 장수였습니다.
月波亭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ㅡ배설ㅡ
배설은 자신이 쌓은 공이 태산 같아서 죽게 되는데,
이순신장군 난중일기 때문이 아니구요,
또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 명성이 워낙 높아서 백성들이 왕보다 사랑하든 장군으로 '강강술래'를 하면서 까지 도와주는 백성들로 인해 명망 때문에 죽었습니다. 배설장군 스스로도 누굴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문과를 통과할 만한 실력에도 일체 글을 만기지 않고 패장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조정중신들과 사관 문신들은 왜란이 터지자 도망만 다녔고, 따라서 비겁한 조정에 비겁한 왕조, 비겁한 신하들이 빠글 빠글한 조선에서 도망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배설장군은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운 장수입니다.
배설장군은 군부내 알력으로 실각했을 뿐, 도망칠 이유가없었죠, 장군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도망을 칩니까, 온통 적군이 빠글 빠글한 육지 어디서 쉴 수 있냐구요? 이순신 장군님 가족들이 학살된 것 아시죠?
배설의 실제 어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배설 597.7.15 일 (선조실록)
수군에서 공문받아 귀향했으면 탈영이란게 성립할 수 없죠,
유성룡은 비서실장겸 영의정이 되어 변란을 우려하여 징비록이니 뭐니 해서 제딴 나랄 위한답시고, 탈영이네, 역모 도망이네, 비겁자네 하는 것이 이해 됩니다. 나름 다 나라를 사랑한 열정이였죠, 만일 누구라도 배설이름으로 거병한 다면 누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곽재우 기타 장군들처럼 집에가면 그만인 시대였죠,
배문덕 한성서윤 요즘말로 서울시부시장의 장남 배설(楔)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산 부사를 거쳐 경상우수사가 되고, 차남 건(楗)은 의병 활동의 공적으로 선무랑에 제수되고, 3남 즙(楫).과 4남 력(櫟)은 무과에 급제하여 각기 조방장과 훈련원 주부로 3형제가 임란에 자원하였고 3대에 걸친 임진왜란 전투에 참가한 호국의 가문으로 배즙은 칠천량해전서 전사합니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이순신장군 기록)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사형시키기로 수없이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1,성주성 (부상현)전투, 개령전투, 개산진전투, 지례전투 패배와 배설장군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田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배설은 주부(主簿;총무부장)로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였으나,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고 말았다. 모름지기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데, 조경이 패배했으니 군적도 없는 잔병신세로 전락한 배설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하고 있었다.
당시는 신립장군의 병사와 수많은 방어사들의 패배가 전멸이 아닌 군대의 잔병화가 되어있었다. 어차피 중앙정부가 도망다니는 상태로 중앙의 지원이 없는 그야말로 잔병들이 주로 의병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다. 의병이 별도로 어디서 나온것이 아니라 관병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잔병이 되었다가 향병 또는 의병이 되거나 다시 관군에 흡수되어 의병과 관군의 구별이 모호하였다.(양반들이 자신에 노비를 군대로 조직한 의병도 다수 있었음)
배설은 조경이 성공했더라면, 바로 다음번 자리가 군수나 현령이 되는 것인데, 조경은 대패하여 일개 잔병이 되고 말았든 것이다. 이에 배설은 지역주민들로 향병을 모아 왜군의 저지를 위해 활동했으며, 김면 정인홍의 의병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히 그 곳에 합류 하게 되었다. 아버지 배덕문이 68세에 성주성에서 거병하자 자연히 합세하게 되어 하나의 부대를 이루게 된다.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22일(을해) 5번째기사(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은 일본군을 추격전투를 하므로 피해가 상당했다)
선전관 이춘영이 영남 왜적의 동향과 김성일·김면의 죽음을 아뢰다------------
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라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욤병이 창궐했다.
2, 성주성(부상진)전투 상황ㅡㅡㅡㅡ
김면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 김면이 당시 북으로진격 서울로 들어 갔더라면 도원수가 되었을 것이나, 김면과 곽재우 정인홍등은 시류를 읽지 못하여 싸나운 왜적을 추격하므로 힘든 일생 고단한 전투였었다.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조헌을 지원하려고 출병한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일본군들을 성주성 북쪽(부상현)을 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에 대한 1~3차 공격이 모두 실패함, 성주성을 중심으로 개령 지례 개산진전투에 의병들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중부주력군에 맞선 의병들은 그흔적도 없이 전멸했다. 성주성에서 맞닥뜨린 의병들을 대 살육이 저지된 것은 배설의 적장 수급을 벤 공로임에도 이는 인정도 받지 못했고, 패전의 책임은 배설이 떠 맡았다.
성주성 3차 공격은 최대 규모의 의병 2만이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모두실패했다. 1차 때는 일본군은 방어만 했으나,2차 3차에서는 일본군은 공격적으로 공격을 했고,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성을 나와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였다. 부상진까지 추격을 당한 의병들이 거의 몰살 직전이였었고, 이 때 배문덕 의병장이 부상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반격을 개실했고, 때 마춰 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향해 돌진 몆차례의 칼싸움 끝에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들고 퇴각하게 되었다.(배문덕이 적장의 수급을 취했다고도 알려져 있음,)
성주성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고, 계사년 1월 왜군들은 스스로 자진 철군을 해서 무혈입성을 했다. 일본군이 적장이 죽고 바로 철수 했더라면 배설의 공이 될 수 있었음에도 자진철수 하여 배설은 적장수급을 취한공만 인정받았다.
1~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권율은 끝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서 도원수를 제수 받게 된다.
배설이 김면 정인홍 아래에서 이름없는 의병신분이 였으나, 방어사의 부주(총무부장)로서 언제든지 합천군수로 제수 받을 자격이 있었음에도 패잔병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594년 합천군수가 되고 경상우도 일대의 탈환 공로로 늦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다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경상도 우도수사로 임명된 배설은 원균의 선봉장이 되어 부산일 대의 14만 왜군진영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었다. 웅천 전투는 하루에 세번씩 적선 600여척을 쳐부수었다. 이외에도 기덕도해전, 안골포 해전, 다대포해전, 영등포해전, 칠천량해전, 부산 바다 전체가 전투장으로 변했다. 그러함에도 7월 16일 일본군 1500여 함대의 기습포위망에 걸려 조선수군들이 전멸하게 되자, 12척의 함대에 배설은 부득히 퇴각명령을 내렸다.
권율과 이순신의 벼락 출세에 비해 배설은 진급이 아주 늦은 편이고 실력도 다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경상지역 고관들은 배설장군의 전공이 배덕문장군의 공이라며, 진급을 반대하는 상소가 많았으며, 자신들도 모르는 전공이라고 하기 까지 하였다. 자신들은 관군이 되어 도망다녔으니, 당연히 전공을 알 수 없었음에도 시기와 모함은 이때도 있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구로다 요시타카가문의 장군도 두개중 하나가 아직도 종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병력 2만2천 8백으로 4월18일 부산포에 들어와 언양, 경주,영천, 신령, 군위, 비안, 용궁, 풍진도를 거쳐 문경에서 제 1진을 따라 충주로 공격 했다. 이 두 부대는 5월2일 한강을 건너고, 5월3일 남대문과 동대문을 통해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북상한다는 보고가 날아 들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鳥領) 이남에서 왜군을 방어하도록 지시 하였으나, 4월25일 이일이 지휘하는 부대가 상주에서 패하고, 4월26일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이 지휘하던 문경도 왜군에게 점령 당 하였다. 4월28일에는 도순변사 신립이 8천명의 군사와 함께 충주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역시 패 하였다.
선조는 4월30일 밤 2시쯤 소나기를 맞으며 도승지 이항복이 들고 있는 등불을 따라 말을 타고 100여명의 신하와 함께 한양을 빠져 나갔다. 도성과 궁궐은 왜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난민들에 의하여 방화 되고, 파괴 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으며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하였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한양이 점령 당하자 선조는 5월1일 개성부에 도착 했다가 5월7일 급히 평양으로 피난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4월19일 죽도 부근에 상륙 한 후 김해, 창령을 지나 오른쪽 부대는 무계, 성주 방향으로, 왼쪽 부대는 초계, 거창, 지례 방향으로 각각 북상하여 금산에서 합류한 후에 영동, 회덕,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공격 하였다.
제4진인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 병력이 1만여 명이었나 집결이 지연 되고 전선이 부족하여 제 때에 투입 되지 못하고 5월2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 하였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휘하는 4천명의 병력은 선발대로 4월 중순 부산에 상륙해 있었다. 이를 합한 1만4천l 왜군은 창령을 거쳐 현풍에서 머물다가 상주를 지나 한양을 공격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은 약 39세 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고 한다.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은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된 것이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전이였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백성들이그렇게도 원하든 전쟁이 끝났어요<
배설장군의 누명과 참수,
1599년 선조 30 년 향년 49세로 모함에 의해 세상을 하직합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3일(갑술)
병조 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 뒤 국내의 변란을 우려하여 아뢰다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이 비밀히 아뢰기를,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철수하여 돌아간 뒤에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되니,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떠도는 말이라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뜻밖의 사변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은밀히 하유하여 비밀리에 추격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고, 다른 도에도 아울러 유시하여 특별히 기미를 살피게 함으로써 그들이 용납될 것이 없게 하소서.
다만 나라의 기강이 이미 해이해 졌으니 유시를 내리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심상하게 여길까 몹시 염려될 뿐입니다. 옛사람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반드시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잡게 하였으니 지금도 역시 높은 벼슬과 후한 상을 내린다고 한다면 필시 마음을 다해 고발하거나 체포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모두 적이 물러갔다고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데, 신만 구구하게 지나친 우려를 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배설은 세운 공이 태산 같아서 민심이 흉흉하니, 먼저 추포하여 압송하고, 서둘러 전국에 방을 붙이고 현상금을 걸어 포고하고 모든 선무를 다하여라, 현몽과 합세한다면 이는 결코 제압할 수 없을 것이고, 배설은 왕을 버리고 도주한 죄 역적이니, 아뢴대로 서둘러 처리하도록하라, 그 주위에 호종하는 세력이 없도록 도제찰사 권율은 추포 즉시 전국에 방문을 붙이고 서찰을 뛰워 후한 상을 내리도록하라,
선조 110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3월 6일(을유)
전 수사 배설이 법에 의해 처형되다
전 수사(水使) 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해석:선산 고향에 은거하고 있든 배설이 추포 된 이후에 외지 망명했다고 하고, 현상금과 산에 출몰하였다는 방문이 나붙습니다. 역적이 였다면 가족을 방면하고 벼슬을 내릴 이유가없습니다. 가짜 배설이 나타날까 두려워 했다고 보여집니다. 유성룡이 제딴 충성한답시고 징비록에 도망자니 비겁자니 해둔걸 보면 요즘 국정원 댓글 충신들 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선조는 배설의 아비가 배덕문임에도 배덕룡으로 아들 이름도 배상룡임에도 배상충이란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아마 불가피한 상황인 것 같고, 배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나봅니다.
14,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조선시대에 역모로 몰려 당대에 복권된 경우가 없다. 보통 70년 ~100년 후에 복권된다는 점에 비추어 이례적일 뿐 아니라, 영의정 유성룡이 직접 선무용 징비록을 지으 선비들에게 배설이 도망자라고 가르친 것 만 봐도 당대 배설의 명망이 중국 일본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배설장군은 공이 태산 같아서 백성들이 왕보다 좋아한 죄로 누명을 쓰고 참수 되었습니다.^^
그것도 보통사람이 아닌 어마 어마한 경상감사, 3족이 멸할 수 있는 장례를 치르고. 사대부의 땅을 빼앗아 묘지를 쓴다. 그리고 파직됩니다. 요즘도 이런 경우를 볼 수 없죠.
얼마나 인간성이 좋았으면 경상감사를 포기하고 역모죄로 처벌 받는 죄인을 호상하겠습니까? 이것 하나만 봐도 배설이 억울히 죽은 것임을 알수 있고, 비겁자니 도망자니 하는 것을 이해할 만합니다. 현직 경상감사가 도망자를 위해 그래할리 있겠냐구요?
경상 남북도 다합친 전권을 가진 경상감사가 어떤 자리인데요
역모죄인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슬쩍 묻어만 줘도 대단 한 것이라 할 것인데요, 동인조정과 선조임금에게 안된다는 것이죠,
백마디 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죽은 이를 위해 경상감사까지 그만두고 역모죄인이 될 수 있는 장례를 치룹니다. 실제 파직됩니다. 파직된지 수 년 후 한준겸은 인조반정(손자) 거사에 성공합니다. 한준겸(韓浚謙, 1557년 ~ 1627년)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본관은 청주(淸州)로 인조의 장인이다. (출처:백과사전)
한준겸은 한 때 전주로 도피하여 배설장군을 회상하면서 복수를 꿈꿉니다. 그리고 구굉, 구인후 , 최내길, 등이 이흥립과 거사가 성공합니다. 그리고 동인들은 대거 하루에 40명이 참수 되고 귀양 만도 200명 이상이 가게 되는 옥사가 읽어나죠. 결국 동인들도 그래 비참히 죽고 쫒겨나고 맙니다. 역사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것이죠,ㅡㅡㅡㅡ ^^유성룡 다 날라갑니다. ^^
정종호는 장군을 삼달덕(三達德)을 구비한 인물. 그는 “ 옛 부터 인신(人臣)이 국가를 위하여 큰 난리를 능히 막을 수 있는 자는 그 지혜(知慧)가 있은 연후에 가히 대책을 세울 수 있고, 그 인(仁)이 있는 연후에 가히 대중을 복종시키고, 그 용기(勇氣)가 있는 연후에 가히 적을 칠 수 있으니 장군은 그것이 겸비한 사람이 장군”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나아가 “장군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먼저 여러 전투에서 용병(用兵)이 귀신과 같았던 점이 지(智)이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보고 혜창(惠倉)을 창립한 것은 인(仁)이며, 싸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비록 죽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용(勇)이 였다”
"ベッセル いた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貧しい農民のせがれから、一躍、天下人に上りつめた男、豊臣秀吉。世界史をひもといても、彼ほどの成功者は少ない。
立身出世の鑑、庶民の憧れの的として、根強い人気がある(朝鮮半島では、秀吉は極悪人)。私たちが、「これがあったら幸福になれるだろう」と思っているものを、すべて獲得したような人物である。
しかし、秀吉は、最期に意外な言葉を残している。"ベッセル
「露とおち 露と消えにし わが身かな 難波のことも 夢のまた夢」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풍신수길의 절명은 (亀)"ベッセル
(이는 거북선과 경상우도 수군 裵楔이 얼마나 조선점령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세키보네, 아다케, 보고, 등등의 자신들 전함이름대신 지금도 일본에서는 선박회사들 이름이나 바다의 배들을 ベッセル
당시 배설장군이 몰랐든 것인데요, 일본의 전국시대에 풍조를 알았더라면, 배설장군이 일본군에게 물러가라고 하면 그냥 물러갔을 것을 배설장군은 몰랐든 것이죠, 장수 끼리 사움에서 이긴 장수가 몰수패를 받았든 시절을 너무 몰랐든 것이죠,
이순신장군님이 그래 유명하고 일본이 벌벌 떨었다면 5년간 바다를 지켰는데요,
정유재란은 일본은 거참없이 2000대의 전함과 14만명이 곧바로 부산에 들어 옵니다. 정유재란이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일본이 이순신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쳐들어 오는 것이 뭘 말하는 것이죠?
군인이 왜 필요한 거죠?
온 나라가 도륙되는데도 지켜보는게 장군이 할일 인가요? 제가 가장 존경해온 이순신장군님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이 잘 못이였네요,,,아무리 팔아먹을게 없다지만 공과과는 정확히해야죠 선조가 당시 오너이고 나라의 주인인데 이순신은 너무 허위보고를 하고 해서 사형시켜라고 하는데도 동인들은 끝내 거부하고 영웅으로 만듭니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왔던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세상의 찬성보다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함석헌
배설장군은 경상감사 한준겸의 장례를 받았습니다. ^^
참고로 홍여순은 배설을 밀고로 탄핵하였으나,
홍여순(洪汝諄. 1547-1609) 홍여순이 진도유배지에서 맞아죽었다. 홍여순은 음흉하고 교활하여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평생 부정한 방법으로 권세가에 붙어 남을 해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아귀(餓鬼)나 야차(夜叉)같은 것이였다. 좋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어 임금(선조)과 동궁(광해) 사이에 불화를 일으킬 계획을 하였으니, 그 사이의 흉악하고 참혹한 짓은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아, 예로부터 신하로서 남의 나라를 흉악한 해독을 한 자가 많았으나 끝까지 자신을 보전한 자가 거의 없었고 보면,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화를 준다는 설이 과연 빈말이 아니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광해 1년2월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