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그러나 그 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했다. 그러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해 8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당하자, 고향 경북 현풍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었으며 이로써, "천강~홍의장군"이라 불리우며,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여러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으나, 김덕령 등의 의병장이, 무고로 희생되는 것과 영창대군의 죽음을 보고서는 벼슬을 여러번 사퇴하였다.
선조 20년 1587년 8월 과거시험인 향시에 14세의 나이로 등암 자장은 합격한 후 선조 28년 1594년 곽재우의 최측근 참모가 되어 곽공, 사봉, 김천택등과 함께 화왕산성을 수호하엿는데, 이 때 김천택은 전사하고 맙니다. 등암 자장과 김천택은 동향 출신이였죠, 화왕산성서 용맹을 떨친 등암자장이 바로 배설장군의 장남 배상룡(1574-1665)입니다.
1592년 8월 22일 등암 자장은 배설장군과 함께 곽재우를 만나고부터 등암 자장은 곽재우를 그림자처럼 참모 역할과 조정의 교류에 제문이나 문서를 총괄 맡아 하면서 전투에도 참여 하였습니다. 이에 배덕문 할아버지가 아무리 전쟁이지만, 3대가 모두 전투에 참여하면 가문은 어떻게 되느냐고 강력히 만류하기도 했지만, 등암 자장(배상룡)은 곽재우곁에서 참모역할을 했습니다.
배설장군은 합천군수 선산군수, 동래 현령, 진주목사, 경상좌도, 경상우도 수사를 거치면서 모종의 협의나 심부름 같은 관의 지원 같은 것에 등암자장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의병들의 병참이나 무기의 조달 같은 주로 무과가 아닌 문과관계를 맡아 보았다고 하고 1597년 7월 7일 에는 광양항에서 장작귀선을 건조하는 배설장군을 찾아가서 면답하기도 합니다.
이 때 성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배설은 성주로 들어 와서 2만병의 일본군을 부상현으로 몰아 약 700여명의 일본군을 척살하는 과정에 흑전구침을 목을 베어 배덕문장군께 바치게 됩니다. 이 전투는 패전으로 기록되어 기록이 많지 않으나 조선군 2만과 일본군 2만이 대치한 대규모의 전투 와중에 부상현에서 일본군 총지휘부가 괴멸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