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公有花 2014. 10. 8. 04:01

김시민장군은 1554년(이조 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장군의 관향은 안동(安東, 구안동김씨)이며 자는 면오(勉吾)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과거급제 및 관직근무 동향

 

 

 

 

장군은 25세때인 1578년(선조 11년)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급제하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제수 받아 봉직하였다.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軍紀)는 해이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쓸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 이를 본 장군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소관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됩니다.」라고 건의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리니 망언이로다.」하면서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사리를 따져 재차 간곡히 건의 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장군은 올바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군모를 벗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사직서를 써서 던져 버린후 훌훌히 일어서서 나왔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해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1583년 이탕개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군기(軍器)시 판관(判官)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진주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군은 부임하여 행정의 공명정대함이 먹줄과 같았고 덕의(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 하나 백성들은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그 활약상

 

 

 

장군이 진주판관에 부임한지 1년후인 1592년(선조25년) 임진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 대행에 임명된 장군은 병기를 수리하고 성지를 구축하는 한편 수성군을 모집하여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했다. 장군은 모집된 수성군에게 맹훈련을 시켰음은 물론 병기와 자재를 정비하고 양곡을 비치하였는데 염초 510근 제조 및 총통 170여자루를 제작하였다.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왜적은 바로 호남지역을 휩쓸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장군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나가 사랑암 부근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이 공로로 1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정식으로 임명됨).

 

 

 

9월에는 진해에서 왜군장수 평소태(平小泰)를 생포하여 의주 행재소에 보내 조정의 사기를 높여 주었으며(이로인해 경상우병사에 임명), 연이어 고성, 창원까지 진격하여 왜군을 무찌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김시민 장군이 최고로 활약한 진주대첩

 

 

 

왜군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세만회를 위해 이를 일거에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藤元郞), 평조신(平調信)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 제1차 진주성전투는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

 

 

 

한편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병이라기 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최강·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로 3개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시민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장병위에 군림하기 보다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하였다.이와 같이 장군의 실천궁행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쓰고 싸우게되었다.

 

 

 

장군은 소수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싸움에 있어 필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성밖에 있는 아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야간을 이용해 화살 등 무기를 몰래 반입하였다.

 

- 성밖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금 산발적인 적 측후방공격 및 교란작전, 횃불시위 등을 전

 

개하여 아군의 사기진작 및 적군의 혼란을 유도하였다.

 

-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을 하도록 하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다.

 

- 야간에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하여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 차대전, 현자총통, 질려포, 비격진천뢰, 화약등 당시 조선군의 신식무기를 적절히 활용하였다.

 

- 왜군에게 잡혀있다 탈출한 민간인들을 통해 적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적의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 성민들로 하여금 돌·기와·집단 등을 가져와 투척하게 하는 등 민·관·군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제1차 진주성전투는 의병들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은 김시민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술, 그리고 진주성내의 모든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3만의 왜병중 2만여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전란사에 3대첩의 하나로 찬연히 기록되기 되었다.

 

 

 

기여도

 

 

 

진주대첩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켜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과 호서를 온전히 보전하는데 기여하였을 분 아니라, 의주까지 피난을 간 선조임금을 비롯한 대소신료 및 조선 육군과 의병들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또한 왜군으로 하여금 남방에 강력한 조선군이 있어 전역을 확대하지 못하게 하고 조선군을 더 이상 깔보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의 효과를 창출하였다.

 

 

 

 

 

김시민 장군의 사망

 

 

김시민장군은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인 10월 9일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중 죽은체 하고 숨어 있던 왜병의 저격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치료받다가 며칠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장군의 사망일자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리는데 음력 10월 18일(임진잡록)과 12월 26일(족보)이 있다. (규명 필요)

 

 

 

그후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을 높이사 선조때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상락군에 추록하였으며, 숙종때에는 정1품인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였다.

 

 

 

 

 

김시민 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

 

김시민장군은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에 진몰(陳沒)하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훈련원 판관 재직시 낡고 녹슨 병기(兵器)와 해이된 군기(軍紀)를 보고 일조유사시 국가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상관인 병조판서에게 충심으로 이의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자 분연히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자신의 정당한 의사를 밝히고 관철시키려 한 올곧은 선비정신이 뛰어났으며

 

 

 

위난에 처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함에 있어 병사와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등 솔선수범하였고

 

 

 

3,800명의 적은 군사로 8배에 가까운 왜병 3만여명을 맞아 다양한 전략전술로 적을 격퇴시킨 위대한 군사 전략가였으며

 

 

 

전투가 소강상태였으나 적의 저격 등 위험이 농후한 상황에서 예하장수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장을 둘러보며 부하장병들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케 한 것은 위험을무릎쓰고 맡은바 소임을 완수하려는 투철한 사명의식과 책인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것이며

 

 

 

또한 총탄에 맞아 쓰러져서도 싸워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는 등 국가와 임금에 대한 애국충절의 정신이 남달랐던 것이다. (출처:지식인)

 

1592년 음력 6월 이후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어떻게든지 하삼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장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전란 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진주성은 앞은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은 험준한 형세로 석벽을 높이 쌓아 올린 매우 견고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간주하고서 공략을 명령했다.

 

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왜군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성내에는 진주 牧師

목사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해 결전을 준비했고 성외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끄는 경상도 의병들이 왜군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다가 주위의 민가를 모조리 불 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마구 쏘아대면서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다. 왜군에 맞서 성내에 있던 조선 관군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로써 대항한 데다가 임계영과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 2천여 명이 성외에서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홍의장군 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왜군을 혼란에 빠뜨린 데다가 피리를 불면서 왜군을 심리상 불안케 했으나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승리가 점차 목전에 다가오는 중 진주 목사 김시민이, 왜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주성을 공격한 지 이레 만인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 왜군은 퇴각하였고 마침내 백성과 관군과 의병이 일치단결해 항전해 진주성을 방어했으나 이 공방전의 주역인 김시민은 치료받았지만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그만 순국한다. 향년 39세였다.

 

이 제1차 진주성 공방전은 진주대첩으로서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 하나로서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하게 한 전략상 중요한 승리였다.(워키백과사전)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尼湯介)가 회령(會寧)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沙郞巖)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해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죽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출처:브리태니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