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公有花 2014. 10. 8. 04:29

조선 중기 청백리(淸白吏) 장필무(張弼武)

자 료 / 하얀그리움

 

○ 1510년(중종 5)∼1574년(선조 7). 조선 중기의 무신.

○ 자(字)는 무부(武夫), 호는 백야(栢冶). 시호는 양정(襄貞),

○ [무과] 중종(中宗) 38년(154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

○ 본관은 구례(求禮). 군수 장사종(張嗣宗)의 손자로, 충순위(忠順衛) 장근(張謹)의 아들이다. ○ 본관소재지는 전라남도(全羅南道) 구례군(求禮郡), 시조는 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장악(張岳)으로, 도시조인 장정필(張貞弼)의 21세손이다. 《봉성장씨족보(鳳城張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입조할 때마다 수심이 가득하여 왕이 그 까닭을 묻자 태어난 봉성 땅이 생각나서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왕이 즉석에서 봉성(鳳城: 구례의 옛 이름)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봉성군(鳳城君)에 봉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구례(求禮)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 중종 38(1543)년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권지(權知)와 봉사(奉事) 등을 지낸후 ○ 명종 3(1548)년 종사관(從事官)으로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 명종 9(1554)년 온성판관(穩城判官)이 되어 호인(胡人)을 토벌, 왕으로부터 장전초피(長箭貂皮)를 하사받았다.

이어 훈련원 주부(主簿-종6품), 양산군수(梁山郡守-종4품) 등을 지냈다,

○ 명종 19년(1564) 10월 부산진 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3품)가 되었다, 비록 무인(武人)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타고난 성품이 강강(强剛)하여 권력이나 세력을 가진 자를 섬기려 하지 않았다. 군수(郡守)나 현령(縣令)이 된 곳마다 청렴하고 근신하다는 칭송이 있었다,

○ 명종 20년(1565) 제주목사(濟州牧使-정3품)를 거쳐 9월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었다, ○ 선조 1년(1568) 강계부사(江界府使-정3품)가 되어 재임중이던 5월 절도사(平安道節度使)의 위장(衛將)으로 같이 서해평(西海坪)에서 호인(胡人)을 습격하여 그들 취락(聚落)을 불태웠다. 또다시 호인(胡人) 토벌에 공을 세워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 선조 2년(1569)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5월 임금에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에 오르고, 경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간원이 개정(改正)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완강히 거부하고 듣지 않았다. 누차 아뢰자 자급만 낮추도록 하였다.

필무는 사람됨이 청백하고 꼿꼿하여 사람들이 미워하였으나, 상은 그를 특별히 우대하였다.

○ 선조 5년(1572)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고,

○ 선조 6(1573)년 7월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에서 체차 되고, 10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 선수 7년(1574) 9월 1일 졸하였다, 필무는 보통 이상으로 청렴하여 무인(武人)답지 않았고, 또 강직하여 뜻이 높았기 때문에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다. 일찍이 탄식하기를 ‘육진(六鎭)의 병민(兵民)이 계속 유랑하고 도망가는 것은 초피(貂皮)를 진상하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상이 그 지절(志節)을 높이 인정하여 여러 차례 장유(奬諭)를 내렸는데, 죽은 뒤에는 청백리(淸白吏)에 추록(追錄)되었다. 명묘(明廟) 이후 무신으로서 청렴하고 개결한 자로는 필무를 제일로 꼽는다. ○ 선조 36년(1603) 9월 종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뽑은 염근(廉謹)에 뽑혔다,

무인이면서도 역학(易學)에 밝았고, 명종, 선조대의 무인으로서는 가장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죽은 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동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무주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야유사》가 있다. 시호는 양정(襄貞)이다.

 

○ 참고문헌 - 계묘 식년 문무과 방목(癸卯式年文武科榜目),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장필무(張弼武)

자(字)는 무부(武夫), 호(號)는 백야(柏冶), 본관은 구례(求禮),

백야유사(栢冶遺事)(奎15426,奎 15587), 장진익(張振翼)(朝鮮)編.

1冊(56張) 筆寫本 34.2×22.9cm.

서(序) : 송달수(宋達洙), 강시환(姜時煥).

조선중기(朝鮮中期) 무신(武臣)인 백야(柏治) 장필무(張弼武)(1510∼1574)의 행적(行蹟) 등을 수록한 필사본으로 당초에는 후손 진진(桭振) 등이 순조대(純祖代)에 수집, 간행하였고 그뒤 1853년(哲宗)에 재간(再刊)한 것을 복사(復寫)한 것으로 보인다.

역시 무신(武臣)으로 임진왜란때 활약하여 공을 세운 두 아들 의현(義賢)(1533∼1615), 지현(智賢)(1536∼1593)에 관한 행장(行狀) 및 만사(輓詞) 등도 첨부되어 있다.

장필무(張弼武)의 자(字)는 무부(武夫), 호(號)는 백야(柏冶), 본관은 구례(求禮),

부사직(副司直) 근(謹)의 아들, 영동(永同) 출신.

1543년(中宗 38)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권지(權知)와 봉사(奉事) 등을 지낸후

명종 3(1548)년 종사관(從事官)으로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명종 9(1554)년 온성판관(穩城判官)이 되어 호인(胡人)을 토벌, 왕으로부터 장전초피(長箭貂皮)를 하사받았다.

훈련원주부, 양산군수(梁山郡守) 등을 거쳐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 등을 지내고

선조 1(1568)년江界府使가 되어 또다시 호인(胡人) 토벌에 공을 세워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어 경상도, 함경도병마절도사(慶尙道·咸鏡道兵馬節度使) 등을 지냈다.

명종(明宗)과 선조(宣祖)때의 가장 청렴 결백한 무인(武人)으로 알려져 죽은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선조(宣祖)는 그를 인견(引見)한 후 서찰(書札)을 내려 청근(淸謹)한 것은 훌륭하나 성격이 과격하다고 경계를 당부하기도 했었다.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되었고, 영동(永同)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무주(茂朱)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시호(諡號)는 양정(襄貞)이다,

장자(長子)인 의현(義賢)의 자(字)는 선숙(宣叔), 호(號)는 오유정(五柳亭), 일명(一名) 응현(應賢)이다,,

명종 19(1564)년 무과(武科)에 급제, 만호(萬戶), 해남현감(海南縣監) 등을 지내고 선조 15(1582)년 부령부사(富寧府使)로서 니탕개(尼蕩介)의 침입을 막고 이를 토벌하는데 성공,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북우후(北虞侯)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호군겸조방장(副護軍兼助防將)에 임명, 순찰사(巡察使) 어득수(魚得洙)와 함께 지례(智禮), 무주(茂朱) 등의 왜적을 막았다.

선조 26(1593)년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고 그뒤 장흥부사(長興府使),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 등을 지냈다.

죽계서원(竹溪書院)과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차자(次子) 지현(智賢)의 자(字)는 명숙(明叔), 호(號)는 삼회(三회), 선조 23(1590)년 신립(申砬)의 부장(部將)이 되었으며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의 평정에 공을 세워 평난원종공신(平難原從功臣)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 으켰고 경상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에게 용맹을 인정받아 그의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듬해 부하 수천명을 거느리고 황간(黃澗)의 추풍령에서 왜적을 요격하던중 금산(錦山) 방면에서 공격해온 왜장(倭將) 흑전장정(黑田長政)군사의 협공을 받아 전사했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되었다, 죽계서원(竹溪書院)과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책머리에 송달수(宋達洙)의 구례장씨유사서(求禮張氏遺事序)(1853년) 와 장씨사적(張氏事蹟), 포음선생행적(圃蔭先生行蹟), 상서공행적(尙書公行蹟), 판윤공사적(判尹公事蹟), 안동묘향사문(安東廟享祀文), 송계선생행적(松溪先生行蹟), 암곡선생행적(巖谷先生行錄), 사효재기(四孝齋記) 등 장필무(張弼武)의 선조(先祖)에 관한 행적 등, 책끝에는 6대손 진익(振翼)과 현(絃)의 사적추록(事蹟追錄)과 사간(司諫) 강시만(姜時煥)의 병무구보유사서(丙戌舊譜遺事序)(1826년)가 수록되어 있다.

{1}柏冶公遺事;柏冶張先生實蹟, 行狀(承旨 林希茂狀), 宣廟朝賜祭文, 永同花巖書院奉安時祭文(宋時烈製), 春秋享祀祝文, 茂朱竹溪書院奉安時祭文(參判 李德英製), 春秋享祀祝文, 祭龜巖先生李禎文(遺稿), 過張通判家憶先將軍有感(林白湖), 大夫咸鏡北道兵馬節度使張公謚狀(漢城判尹 兪最基狀), 後自警學問編(夢窩金先生所著), 神道碑文(右贊成 宋換箕撰)등.

{2}五柳亭遺事;五柳亭張先生實蹟, 行狀(鄭蘊狀), 祭文, 輓詞(郡守 李時立 등 3수), 春秋享祀祝文등과

{3}三회堂遺事;三회堂張先生實蹟, 行狀(趙涑狀), 輓詞(鄭蘊輓), 永同花巖書院奉安時祭文(霽月堂宋先生製), 春秋享祀祝文, 秋風殉節碑文(宋換箕撰), 崇禎後三甲子仲春立碑日祭文, 同日下壇祭文, 黃澗縣秋風陣日記(縣監 鄭善復亂中所記)등.(출처:하얀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