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추
김억추(金億秋)
생몰년 미상.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무신. 본관은 청주. 자는 방로(邦老). 전라남도 강진 출신. 증병조판서 충정(忠貞)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제주판관·사복시판관 및 진산·순창·초산의 현감을 거쳐,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으로 파천하자, 방어사로서 허숙(許淑) 등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지켰다.
이때의 공으로 일시 안주목사에 발탁되었으나, 허위보고를 하고 군율을 어겼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당하였다. 이후 계속 주사장(舟師將)으로 대동강을 지키다가, 여주목사가 되었으나, 직사(職事)를 잘못 처리하여 교체되었다.
1594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탐비(貪鄙)하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또 교체되었다. 다음해에 다시 만포진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진주목사로 승진되었지만 무능한 무관이 큰 고을의 목민관이 될 수 없다는 대간의 반대로 고령진첨절제사(高嶺鎭僉節制使)로 교체되었다.
1597년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사한 이억기(李億祺)의 후임으로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일시 부장 겸 조방장(副將兼助防將)으로 명나라군에 배속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주로 전라수군절도사로 활약하였으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뒤 밀양부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년)경상좌병사가 되었다가 3년 후에 제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출처:팁)
그러나 이 명랑철쇄설은 근거 살료가 지독하게 부실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에는 철쇄설이 안 나옵니다. 관련 사료는 단2개 그중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51(영조27년)에 나온 이중환의 지리서 택리지입니다.(고등학교 지리시간에 배우죠) 근데 그 내용이 상당히 아슷흐랄 합니다.
해남현 삼주원의 돌맥이 바다를 건너 진도군이 되었다. 수로로는 삼십리인데 벽파정은 바로 그 입구다. 물 속의 돌 맥이 삼주원으로부터 벽파정에 이르기까지 똘(梁)과 같이 가로 뻗혔는데 똘 위와 똘 아래가 뚝 끊여 계단처럼 되었다. 바닷물이 이곳에서는 동으로부터 서로 떨어지는 폭포와 같이 아주 빠르다. 임진년에 왜승 현소가 평양에 이르러 의주에 계신 임금께 글월을 올렸다. "수군 십만 명이 또 서쪽 바다로 하여 올 것입니다. 장차 수륙군이 함께 진군할 텐데 대왕의 수레는 거기서 어디로 가시렵니까?"했다. 그때 왜 수군이 남쪽바다로부터 북으로 올라오므로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 위에 머물러 쇠줄을 징검다리위에 가로 걸고 적을 기다렸다.
왜선이 징검다리 위에 이르러 와서는 쇠줄에 걸려 징검다리 아래로 거꾸러지는데 징검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그 낮은 곳을 보지 못하므로 내려오다가 모두 거꾸러지고 만다. 또 물의 기세가 징검다리에 가까워지면 더욱 급하기 때문에 배가 급류 속에 한번 들어만 가면 다시 돌릴 겨를이 없어 500여 척이 일시에 전몰되고 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명랑해전은 정유년에 일어났는데 저기는 임진년이라 되어있군요. 조선군은 싸우지도 않았고 왜선 500척은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전멸했다고 썻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사료는 명랑해전에 전라 우수사로 참전했던 현무공 김억추의 후손들이 20C 초에 편찬한 현무공 실기 입니다.
상당히 긴 내용인데 명랑해전 부분만 간추리면
1597년 정유재란때에는 김억추가 아니면 이순신을 도울자가 없다. 라고 하여 8월 13일날 전라우수사에 부임한다. 8월 18일에는 병선과 장작귀선을 한곳에 집결시키라는 글을 이순신이 보내오고 김억추는 밤낮으로 전함을 만들고 물속에는 쇠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쇠줄이 너무나 무거워서 움직이기 어려웠으나 김억추는 간만의 차이에 따라 높낮이를 알맞게 조절하였다.
9월 15일 밤 꿈에 어떤 장수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를 모르겠는가? 나는 한나라 장수이던 관운장이다. 왜적의 배에는 갑옷에 두 개의 방울을 매단 대장이 있고 그의 부하 모두가 사람 죽일 마음으로 가득차 있으니 너희들은 바람을 뒤로하고 화살을 쏘아 대기만 하면 이길 것이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였다."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잠을 설치고 날이 밝기 시작할 때인 새벽녘에 왜적의 배 133척이 쳐들어 왔다.
이때 장수들에게 당부하기를 "국가에서 사람을 기르는 것은 오늘 같은 때에 쓰기 위함인데 싸우다가 죽지 않으면 어느 때를 기다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한 뒤에 활을 들고 뱃머리에 올라서서 활을 쏘니 왜적의 장수인 마다시가 물속으로 꼬꾸라지면서 적들의 사기를 꺾었다. 이날 싸움에서 양쪽의 열 손가락 모두가 칼로 베인것처럼 갈기갈기 찢기도록 활을 쏘아 31척을 침몰시키는 승리로 이끄니 "영남을 보전하려면 호남이 완전해야 하고 호남을 잘 지키는 것은 김억추의 꾀에 매달려 있다."라고 이순신은 나라에 보고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뒤에서 구경만 하고 뉴타입 김억추 혼자 원맨쇼 했다고 나옵니다. 이 외에는 해남지역 야사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기록이 공고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다는게 참...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진실이 무언지 알수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