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장군은 세월호선장처럼 배를 버렸음 어캐되나
도망하려면 세월호 선장처럼 배를 버리면되죠.. 백성들위해430k를 주민소개령을 내리며 항해해습니다♥ 진주목사시절 관사의 식량창고를 열어 혜창을열어 당시가장큰 고통인 백성의 굶주려 죽는 것을 예방하였습니다. 진주성전투 결사항전하였든 이유가있었죠ㅡ 백성들이 혜창을 통한 백성구제의 말없는 보답이 애국심으로 나타났습니다.지켜볼 가치있는 조선을위해 혜창을 열었고 나라를 지키고자 고심했었죠
정랑 이분(李芬)의〈행록 行錄〉 속에는 그 모습을 후세에 전해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즉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한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6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編茅]으로 송곳[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벼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위에 인용한 이순신의 장계 내용 및 이분의〈행록〉,
그리고 일본측의 당시 기록인 〈고려선전기 高麗船戰記〉, 경상좌수사 이언섭(李彦燮)의
장계내용(1748, 영조 24) 등의 현존 사료(史料)로부터 이 거북선의 구성과 주요기능에 관계되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크기 : 판옥선(板屋船)의 크기와 같다.
②용두 : 뱃머리에 용두(龍頭)를 설치하여 용의 아가리를 통하여 대포를 쏘았다.
또 사각(射角)의 조정이 가능하였다[仰放玄字……].
③철첨 : 거북의 등처럼 만든 귀배판(龜背板)에는 철첨(鐵尖:쇠송곳)을 꽂아 적병이 배 위로
오르는 것을 막았다. ④포의 수 : 포혈(砲穴)은 좌우 각 현(舷)에 6개, 용두에 1개, 선미(船尾)에
1개가 있어, 모두 14문이 사용되었다.
⑤포의 종류 :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의 각종 총통을 장비했으며, 실전에서는
탄환 이외에도 대전(大箭:큰화살)을 많이 발사하였다. ⑥철갑 : 철로 덮어 많은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도 적의 공격, 특히 화공(火攻)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일본측의 실전기록인 〈고려선전기〉는 안골포해전 대목에서 "큰 배 중의 3척은
맹선(盲船:장님배. 거북선에 대한 일본측의 별명)이며, 철로 덮여 있고……"라고 쓰고 있다.
경상좌수사 이언섭의 장계는 "이른바 거북선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鱗甲)을 하였고……"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갑이란 철엽(鐵葉)을 비늘 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을 지칭하는 것이다.
⑦척수(隻數) : 〈고려선전기〉에 따르면 1592년의 거북선 수는 3척이었다.
그러나 1595년에는 명(明)에 "수군통제사 이순신은……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 65척을
거느리고라고 통보하고 있으므로 1595년의 거북선수는 모두 5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⑧정원 : 거북선의 승무원수는 당시의 판옥선에 준하여 125~130명 정도였다.
⑨돛대 : 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할 수 있어서 접전시에는 돛대의 장비를 보호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돛대를 눕히고, 노(櫓)만으로 추진하였다.
16세기 이후 성장해온 사림 세력은 1567년 선조 즉위 후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이들은 명종 때 윤원형(尹元衡)의 척신정치가 빚어낸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폐단을 시정하고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척신정치의 잔재 청산방법을 둘러싸고 심의겸(沈義謙)을 중심으로 한 선배사류와 김효원(金孝元)을 중심으로 한 후배사류 사이에 의견대립이 나타났다. 1575년경 김효원의 이조전랑(吏曹銓郞) 제수를 심의겸이 반대하면서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어 심의겸을 지지하던 소수의 선배사류들은 서인(西人)으로, 김효원을 지지하던 다수의 후배사류들은 동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인은 처음부터 서인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모였기 때문에 그 구성원의 성분, 학문적 전통, 정치인식, 사회경제적 기반이 매우 다양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경상좌도에 기반이 있던 유성룡(柳成龍)·김명원(金命元)·김성일(金誠一)·우성전(禹性傳)·이경중(李敬中)·한준겸(韓浚謙)·정경세(鄭經世), 조식(曺植)의 문인으로서 경상우도에 기반이 있던 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산해(李山海)·이발(李潑), 이황과 조식의 양쪽 문하에 드나들던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김효원, 그리고 이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거나 인척 관계에 있던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허엽(許曄)·홍진(洪進)·정여립(鄭汝立)·홍여순(洪汝諄)·송응개(宋應漑)·정지연(鄭芝衍)·유영경(柳永慶) 등이었다. (출처:백과사전브리테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