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의 종류
거북선의 최초기록,
[龜船]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으로서, 1413년(태종 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다.
또, 1415년(태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상소하고 있다.
거북선의 종류는 세종류다.
1,맹선 (각 선단마다 판옥선을 변형시킨 거북선)
2,창제귀선(이순신장군제작)
3,장작귀선(배설 경상좌우수사제작) 손쉽게 대형전함에 장작과 철갑을 두런 형태 공격 선봉 전함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의 일종임을 짐작할 수 있다.
거북선의 기원을 왜구의 침해가 가장 심하던 고려 말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와 같이 이미 고려 말 또는 조선 초부터 거북선이 제조, 사용되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에 의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창제, 실용화되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이순신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創制龜船)’은 1척에서 3척 규모로 임진왜란 초반의 잇따른 해전에서 함대의 선봉이 되어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투옥과 더불어, 이억기장군이 칠천량해전서 전멸하므로 그 자취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후 이분행장에서 나타난 기록과 명나라군의 기록은 대체로 배설이 제작한 장작귀선을 이순신이 운용한 기록이다.
충무공의 행장에 이르기를 ‘공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왜적이 장차 쳐들어올 것을 알고 지혜를 써서 큰 배를 만들어, 배 위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는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하게 하고 그 밖에는 다 칼송곳을 깔았는데 앞은 용머리로, 뒤는 거북꼬리로 되었으며, 총구멍은 전후좌우에 각각 6개씩으로 큰 탄환을 쏘는데, 적을 만나면 거적으로 위를 덮어 칼송곳을 가리고 선봉이 되어 적이 배에 오르려 하면 이 칼송곳 끝에 부딪치며, 와서 덮치려 하면 한꺼번에 총을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지 못하는 일이 없어,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거둔 공적이 심히 많으며, 형상이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으므로 거북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이 장작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강조되고 있다. 당시 조총정도면 철갑선이 아니라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다는점에 있어 배설이 여러척을 장작귀선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즉, 이순신의 창제귀선은 철갑이 주로 이용되어 3척이 건조되었다면, 배설의 장작귀선은 충분히 12척이 건조 될 수 있었다.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에 이르되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충무공이 창제한 배를 가리킴이다. 그런데 모두 아울러, 그 치수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한 것이 없다.
지금의 통제영귀선이 대개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유래된 것이나 역시 약간의 치수의 가감은 없지 않다. 충무공이 이 배를 창제한 곳은 실로 전라좌수영이었는데, 이제 좌수영귀선은 통제영 배의 제도와 약간 서로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제도를 아래에 붙여 써 둔다.
전라좌수영귀선의 치수·길이·넓이 등은 통제영귀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의 머리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2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포혈이 2개, 현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1개씩, 현란 좌우에 포혈이 각각 10개씩, 복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6개씩이며, 노는 좌우에 각각 8개씩이다.”
안설의 뱃머리 부분의 설명에서 “노판은 네 쪽을 이어붙였는데〔蘭版聯四〕”라고 하였으나, 거북선의 그림을 보면 일곱 쪽의 곡목(曲木)을 이어붙인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노판의 제원 설명이 누락되고, “네 쪽을 이어붙였는데……”는 상장(上粧)의 앞쪽 패판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한다. 또 그림을 보면 거북의 머리는 용의 머리로 되어 있다.
15970년 7월 23일 회령포에서 배설장군이 인솔한 12척의 장작귀선을 바라보고 감격하여 12척에 대한 장계를 뛰우게게 된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과 전함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전멸했기 때문이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위 보고서를 보면 이순신장군이 만든 거북선 창제 귀선과는 확연히 승성인원부터가 다르다. 약 200여명이 탑승한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도 배설의 장작귀선이 동일한 12척임을 알 수 있다. 어떤 배는 크고 작고하지 않고, 12척이 동일함을 보고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물론 이보고서는 권율에게만 보고되고 선조임금에게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정랑 이분(李芬)의〈행록 行錄〉 속에는 그 모습을 후세에 전해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즉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한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6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編茅]으로 송곳[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벼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宣祖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備邊司謄錄, 高麗船戰記(外岡甚左衛門, 1592), 李忠武公全書(尹行恁, 1795), 朝鮮科學史(洪以燮, 正音社, 1946), 李忠武公全書(李殷相 譯註, 1960), 龜船考(崔永禧, 高麗大學校 史學會, 史叢 3, 1958), 龜船考(趙成都, 海軍士官學校硏究報告 2, 1963), 壬辰倭亂後龜船의 變遷過程(金龍國, 學術院論文集人文社會科學篇, 1968), 龜船의 造船學的考察(金在瑾, 學術院論文集, 1974), 龜船의 科學的硏究(浪元植, 國防史學會論文集, 1976), 龜船構造에 대한 再檢討(南天祐, 歷史學報 71, 1976), A Short Note on the Ironclad Turtleboats of Admiral Yi SunSin(Bak, HaeIll, Korea Journal Vol.17 No.1, 1977), 李舜臣龜船의 鐵裝甲과 李朝鐵甲의 現存原型과의 對比(朴惠一, 한국과학사학회지 11, 1979), 李舜臣龜船의 鐵裝甲에 對한 補遺的註釋(한국과학사학회지 41, 1982), 李舜臣龜船(1592)의 鐵裝甲과 慶尙左水使의 鱗甲記錄(1748)에 대한 註釋(한국과학사학회지 71, 1985),
일본측의 당시 기록인 〈고려선전기 高麗船戰記〉, 경상좌수사 이언섭(李彦燮)의
장계내용(1748, 영조 24) 등의 현존 사료(史料)로부터 이 거북선의 구성과 주요기능에 관계되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크기 : 판옥선(板屋船)의 크기와 같다.
일본측의 실전기록인 〈고려선전기〉는 안골포해전 대목에서 "큰 배 중의 3척은
맹선(盲船:장님배. 거북선에 대한 일본측의 별명)이며, 철로 덮여 있고……"라고 쓰고 있다.
경상좌수사 이언섭의 장계는 "이른바 거북선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鱗甲)을 하였고……"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갑이란 철엽(鐵葉)을 비늘 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을 지칭하는 것이다.
척수(隻數) : 〈고려선전기〉에 따르면 1592년의 거북선 수는 3척이었다.
그러나 1595년에는 명(明)에 "수군통제사 이순신은……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 65척을
거느리고라고 통보하고 있으므로 1595년의 거북선수는 모두 5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거북선의 정원 : 거북선의 승무원수는 당시의 판옥선에 준하여 125~130명 정도였다.
돛대 : 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할 수 있어서 접전시에는 돛대의 장비를 보호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돛대를 눕히고, 노(櫓)만으로 추진하였다.
粧作龜船(거북선)
[배설(裵楔,1551~1559]
조선정벌 침략전쟁,
1,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黑田長政과 黑田句沈을 앞세운체 풍신수길은 黑田孝高에게 조선을 정벌할 것을 명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은 약 39세 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금부채에 黑田孝高의 총지휘장군으로 黑田句沈이 동생이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하고 종문에 황금부채가 6.25까지 내려 왔다고 한다.)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
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귀갑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은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되었다.(일본측이 상세히 전황을 알고 있음)
In succession , the person (or soldier ,or general ) reseized many castles such as Seongju , Hapcheon gunsu, Chogye and Euiryeong and then was promoted to a corp commander .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배설(裵楔, 1551~1599)은 조선무관,
5,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햐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배설장군은 1595년과 1597년 두번에 걸쳐 경상 우도수사로 발령받았다. 경상우도 수사 이전에도 진주성 목사로서 지속적으로 장작귀선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배설이 칠천량패전후 멸치잡이 상인에게 배를 팔려고 했다?
비망기(備忘記)로 김홍미(金弘微)에게 전교하였다.
˝이러한 때에 힘껏 싸우는 장수는 비록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깊이 책할 것 없이 부리는 것이 가하다. 주사(舟師)는 지금 한창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그 형세가 대단히 긴박하다. 그러나 부득이 통제사는 고쳐 차임해야 하겠고 경상 우수사도 갈아야겠다. 권준(權俊)은 또 배흥립(裵興立)을 논박하여 분분하게 안정되지 않으니 반드시 일을 그르치겠다. 수사로 합당한 인물을 속히 의논하여 아뢰라. 지나간 일은 그만이니 지금 국사에 전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조치한다 해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상좌도같은 경우는 주사가 매우 미약하니 상도(上道)의 여러 연해안 고을로 하여금 전선을 제작하고 격군(格軍)을 충당하는 일과, 황해도 역시 솜씨좋은 목수로 하여금 판옥선(板屋船)이나 거북선을 많이 제작하는 등의 일을 신속히 조치할 것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2월 7일조.
1595년 1597년 배설이경상 우도 수사로 재직하면서 거북선 제작을 순조롭게 하는데 비해 경상좌도 수사 배홍립이 능력이 딸린다는 점을 밝히고 힜다. 따라서 왕조실록을 토대로 해석해보면 거북선이 통일된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병영 고을마다 편리한 곳에서 제작하게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설이 칠천량에서 구해낸 장작귀선도 이 때 만들어진 대형전함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 뿐 아니라 모든 병영에 거북선이 제작되었는데, 규모가 적은 판옥선위에 갑판구조라고 보여진다.(이순신장군진영은 60~70~130명 규모의 판옥선에 갑판을 쒸움)
1597년 7월 23일 이순신의 장계에서 배설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약 200명이라고 밝힌 점, 대부분 조선의 거북선은 규모가 60~70명선의 기존의 판옥선에 지붕과 귀두를 설치하고 대포를 장착한 것으로 최대 승선인원이 130명 이내이다. 그리고 병영마다 형식적으로 한 두대 정도 보유하여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 어려웠다. 반면 배설의 장작귀선은 나주의 목수들이 대거 동원되어 아예 새로 배를 건조 했다. 그 규모가 가히 놀라울 정도로 약 200명 승선한다는 점은 이순신장군이 밝힌 장계에 나와있다.
임진왜란을 총지휘하고 성주성과 진주성 까지 시찰한 黑田孝高가 돌아가서 만든 귀갑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구로다 요시타카가 배설의 활동에 매우 놀라고 돌아 갔다면, 당연히 배설의 전함인 장작귀선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를 제작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龜甲車(장작귀선에서 모방)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등의 설계에도 黑田孝高가 직접 참여했다. 침략을 위한 일본의 공성전용 병기입니다. 관(棺) 모양으로 만든 큰 궤 속에 돌 등 무거운 것을 채우고, 잘 부서지지 않게 생우피(生牛皮)로 여러 겹을 싸서 사륜거(四輪車)에 얹은 것이다. 갑주(甲胄)를 입은 무사가 이것을 끌고 성을 공격하였다.
사람이 들어갈만한 수레 위에 철판을 깔아놓은 형태, 이 안에 들어가서 성문까지 이동하면 성벽위로부터 날아오는 끓는 물이나 화살, 동맹이 등에 보호 받을 수 있었다. 중국 충차와는 다르게 그냥 보병 수송용 수레였습니다.
龜甲車제작 ,
黑田孝高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등의 설계에도 참여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성(城)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무기.
구로다 요시타카의 귀갑차를 살펴보면 과거 일본의 공성전병기와 다른 점이 세가지가 있다.
1, 철판으로 깔아 놓았다는 점(괘짝 속에돌과 흙을 넣음)
2, 생 우피로 를 여러겹 감쌓다는 점,
3, 甲胄를 입은 무사들이 동원되었다는 점,
배설의 粧作龜船 (거북선)
보통 조선의 판옥선의 세배정도의 크기에다 두꺼운 장작으로 갑판을 덥고 그 위에 화전을 피하기위해 철판과 병사들의 갑옷을 펼쳐 우피와 함께 지붕에 쒸웠다는 자연스런 이해가 된다. 멀리서 보면 철갑선으로 보이는 것이나, 갑주를 원료로 우피등이 썩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화전을 방지하기위한 장대에서 물을 퍼서 수시로 뿌려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근접해서 장작귀선을 관찰 했다고 보여진다. 조선해역전도에서 보듯이 경상우도 수군의 장작귀선은 귀두에서 대포가 나오지 않고 귀두 위쪽 갑판부분에 두발의 대포가 보인다. 그리고 귀두도 배의 아래 중간 부분에 돌기형으로 녹청색으로 나와 있어 기능이 없다. 단지 상징성과 시각적인 효과 뿐이다.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외 다수의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이순신이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름)
말을 잘 타지 못했든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기전 대부분의 군경력을 육군에서 보냈을뿐, 수군에서 복무한 것은 1580년 6월~1582년 1월 사이 (약 18개월)뿐이다.
이억기, 최호, 전라 충청 수군이 7.16일 전멸하고 60~130명선의 전함이 모두 소실된 후,
경상우수사 배설의 장작귀선이 200명 승선 인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것이 웅천 600여 적선을 하루 세차례나 공격할 수 있었든 주 무기였다는 사실이다.
거북선 장작귀선에 대한 결론.
당시 거북선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일본의 조총을 막아내기 위해 고안된 전함으로 각 병영마다 제작하고 있었다. 명령인 만큼 대충 하는 척 하여 판옥선에다 나름 의 지붕을 쉬운 것이므로 승선인원이 100명이하이다. 그러나 배설의 장작귀선은 진주성 목사당시 부터 고안 제작된 대규모의 전함 승선200명 이였다고 보여진다. 왕조실록에도 배설이 전쟁준비나 일을 못한다고 한 점이없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대규모 전함을 나주의 목수들(무뢰배)과 진주 주민이합동으로 건조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배설장군은 1595년과 1597년 두번에 걸쳐 경상 우도수사로 발령받았다. 경상우도 수사 이전에도 진주성 목사로서 지속적으로 장작귀선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순신장군이 장계에 배 12척에 대단히 충격받아 자신감을 보인 점과 이순신장군이 제작한 창제귀선은 규모가 작은데 반해 승선인원이 200명이라는 것은 보통 당시의 거북선에 비해 세배정도 된다. 가히 충격적인 규모이다.
또 한 명량대첩 후에 이순신의 오른팔인 김억추장군이 배설의 전함때문에 승리했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김억추장군의 전함보다 규모가 월등히 큰 규모의 장작귀선임을 말하는것이다. 보통의 배라면 그렇게 기록을 남길 이유도 없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당시 동양의 최고의책사였음에 장작귀선을 모방 귀갑차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장작귀선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이며 동시에 함포를갖춘 전함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의 실패를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물어, 미워한 만큼 임진왜란의 모든 성패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실패 였고, 절대적인 영향은 장작귀선 거북선이라고 할 수 있다.
잘 못 알려진 배설의 최후 http://blog.daum.net/boq545/11808315
2014.10.12
거북선의 최초기록, [龜船]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으로서, 1413년(태종 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20701^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5696405^256485113^board^article^%EA%B1%B0%EB%B6%81%EC%84%A0%EC%B6%95%EC%A0%9C^257K9p5_wbK0Z0UWkV
제 4 6 회 여수 거북선 축제 2012. 5. 3(목) ~ 5. 6(일) (4일간) 이순신 광장및 여수시 일원 개막행사, 봉수재현, 통제영길놀이, 전라좌수군 출정식 둑제, 총통발사및 불화살 시연, 각종행사및 부대행사 어린이의...
20701^http://www.ezday.co.kr/bbs/view_board.html?q_id_info=1150&q_sq_board=3658784^186557801^board^article^%EA%B1%B0%EB%B6%81%EC%84%A0%EC%B6%95%EC%A0%9C^25wxm9A3TJjt7GaQpM제 46회 여수 거북선 축제 2012, 5. 3(목) ~ 5, 6일(4일간) 이순신 광장및 여수시 일원 개막행사, 봉수제현, 통제영길높이, 전라 좌수군 출정식 둑제, 총통발산및 불화살 시연, 각종체험및 부대행사 어린이와 함께...
20701^http://www.ezday.co.kr/bbs/view_board.html?q_id_info=724&q_sq_board=3659653^186625854^board^article^%EA%B1%B0%EB%B6%81%EC%84%A0%EC%B6%95%EC%A0%9C^25jOLAM2wH-bASsaWB고운님이시여 바다사랑 나라사랑 꿈과 낭만 희망과 행복이 살아숨쉬는 마음의 연안 많이 사랑해주시고 고운님들의 답답한 마음 확풀고 가시길 기원합니다 현시각 거북선 축제중 건강하시고 안전한 여행 기원합니다
20701^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S101&articleId=34260^78554256^board^article^%EA%B1%B0%EB%B6%81%EC%84%A0%EC%B6%95%EC%A0%9C^25VvnecjVBkar4-7Ex갱상도 쪽 남해바다를 가면 거북선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런데 ㅎㅎㅎ 그 거북선 근처에 사꾸라가 심어저 있고 ㅎㅎ 심지어 진해에서는 사꾸라 축제를 하면서 거북선을 차량에 제작해서 퍼레이드를 하더라.. 사꾸라 도로로...
모습은 축제를 클라이맥스로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출입이 불가능한 해군사관학교, 해군진해기지사령부가 군항제 기간에만 개방되는 점도 관심을 끈다. 축제 기간에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및 거북선 관람...
14일부터18일까지 통영에 한산대첩축제라고 1년에한번씩인가 ? 하는건데욤통영이 거북선으로유명해서 거북선싸움같은거재연도하고 야시장열리는데... 집왔어요 !하트폭죽!!!꺄오 ~~ 느무이뻤어욤♥, ,탈,통영한산대첩축제,
생겨났다.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축제만 해도 충남 아산 성웅이순신축제, 경남 통영 한산대첩축제, 전남 여수 거북선축제 등 9개나 된다. 영화 축제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본떠 20여개로 늘었고 쌀 축제는 이천·당진 등...
738억원이 투입되는 장좌지구 14만평에는 중소형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가 들어설 예정이다. 지난 일 경남도는 '거북선을 찾아라' 출범식을 가졌다. 400여년전 건조됐던 거북선을 바다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 야심찬 도전장...
통영을 대표하는 문학가인 김춘수의 '꽃' 시비가 있네요. 존재에 대한 강렬한 표현은 지금봐도 참 좋습니다. 거북선 축제 준비가 한창인 통영항을 지납니다. 통영 해안로에서 동피랑길이 나오면 동피랑으로 오르는 길이...
없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이는 "李恒福曰 我國戰船 上設板屋 周以防牌 用夫一百餘名儼然 爲一少城堡”라는 기록에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거북선 비선 , ,해남, 진도, 명량대첩축제,
서로 아~ 이래서 서울 촌놈들은 안돼! 라던지 개그코드로 사용해서 그런지 지역감정 안생기드라 전라도 경상도 배틀중에 제일 어이없던게 축제 배틀 니네 여수 거북선 축제는 가보고 말하냐! 이런 드립 주고받음
촉촉히 적시며 구름사이로 밝은 태양 바다와 육지을 비춰주니 함평 나비. 완도 청해진 장보고 . 여수범선및 거북선 축제 힘차게 열어가는 행복 주말의 사랑.정 행복이 넘치는 삶속에 수많은 사람들 가족과 친지 연인과...
가져온걸로 압니다. 요즘 명량 인기가 대단하죠. 입장료는 성인 2천원입니다. 개인적으로 거북선보다 판옥선 좀더 좋았습니다. 해마다 한산도축제를 하는데 지난주에 끝이 난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행사를 못봐서...
예원 등축제 전래동화등은 괜찮았지만 추억의 놀이등은 발전기 문제인... 장군 동상도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추석 연휴 때는 들어가지 못했던 세종 이야기와 충무공 이야기도 들려봤습니다. 거북선 내부 [...
제 46회 여수 거북선 축제 2012년 5월 3일 (목) - 2012년 5월 6일 (일) 이순신 광장및 여수시 일원 통제영길놀이 5월 3일 오후 6시 30 분 시민회관 - 이순신 광장 * 주요 행사 민족의 태양 성웅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