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 兵使)로....
1594년 8월 10일 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 兵使)로 삼을 만합니다.”하고 김늑(金玏)이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는 인심을 얻었는데 배설(裵楔)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하였다.
류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신이 곽재우의 사람됨을 보니 성실한 사람입니다.”하고, 김늑(金玏)이 아뢰기를 “왜적을 토벌하는 즈음에 인심을 많이 얻었으므로 능히 그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하고 정곤수(鄭崐壽)가 아뢰기를 “본도의 사람들도 모두 곽재우를 종2품(從二品)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인 병사(兵使)로 삼고자 합니다.”하였다.
12월 3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주(晉州)는 호남과 영남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실로 경상우도의 보장 구실을 하고 새로 진주 목사에 제수된 곽재우도 바로 힘껏 싸우는 장수이니, 배설(裵楔)의 예처럼 조방장(助防將)을 겸해 주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방수(防戍)토록 하며, 또한 본주는 삼가(三嘉)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삼가현의 산성 일도 전처럼 주관하게 하고 그대로 조방장을 겸하여 우도의 군무(軍務)를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선조가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595년 2월 4일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므로 신들도 염려하였으나 대신 거느리게 할 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처럼 아뢰었는데 지금 상교를 받고 보니 극히 윤당합니다.
단 선전관 조광익(趙光翼)이 새로 남쪽 지방에서 와서 비변사에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배설(裴楔)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 합니다.
배설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못했다면 원균(元均)과 선거이(宣居怡)도 다 교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만일 차차로 교대한 뒤에 선거이가 남하한다면 지체될 듯싶습니다. 그러나 선거이로써 대신 거느리게 할 것을 도원수에게 하유하고, 만일 선거이가 미처 내려가기 전에 김응서의 병이 위중하고 대신 거느릴 사람이 없으면 곽재우(郭再祐)가 그대로 잠시 대신 거느릴 만하니, 이 내용을 하서(下書) 중에 아울러 기입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하니, 선조가 따랐다.
[출처] 한산도로 퇴각한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작성자 김민수
1594년 8월 10일 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이 裵楔을 경상우도병사로 천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세속사람들은 유성룡이 배설(裵楔)장군의 후견인이 아닌가, 말하기도 한다.
배설(裵楔)장군과 곽재우는 거병한지 이미 2년에 걸쳐 어느정도 실력이 검증된 상태이다. 곽재우는 먼저 경상의병장 김면의 휘하에 있었고, 배설은 배덕문의병장휘하에서 성주성전투 부상진전투 개령전투 지례전투 계산진 전투까지 참여하였으며, 적장의 수급을 베어 전공을 세워 합천군수로 임명되었다.
곽재우 또한 배설장군이 참여한 전투에 참전하였음을 말할 것도 없고, 이즈음 진주목사를 제수 받는다. 유성룡이 천거 하지않아도 이미 선조는 그림을 그려두고 있다는 느낌이다. 어차피 배설이 경상우도병사로 임명될 상황임에도 유성룡은 곽재우를 더 높이려하고 있다.
어차피 임명될 상황에서 유성룡은 배설을 천거하는 형태를 뛰운 것이다. 이미 다른 대신들도 배설의 능력에 의문을 품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김늑(金玏)이 배설은 수질이 있고,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못마땅하다는 주장을 편다. 유성룡이 당시 전세를 손바닥보듯이 보고 있어 배설을 천거한 것이므로 오히려 전공에 비해 출세가 늦다.
곽재우가 한평생 진주목사까지 밖에 못하였음에도 경상우도 수사 부원수를 두번이나 하였으니 나이에 비해서는 빠른 출세이나, 전투공적으로 보면 과거를 급제한 배설의 실력에 비해서는 출세는 늦은 것이다.
유성룡이 이순신이나 권율처럼 마음에 두고 천거한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배설은 순수히 실력으로 승진을 하였고, 조정에 연줄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걸핏하면 신세한탄을 하고 배설도 자신과 같이 등용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난중일기, 8월 12일 -
‘그편에 배설의 겁내하던 꼴을 들으니 더해지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권세있는 집안에 아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라고 적고 있는데 1책에서는 8월 13일에 배설이 있는 곳을 알았다고 적고 있는데 2책에서는 8월 12일로 적고 있으며 이 내용은 1책에는 없는 내용으로 다시 일기를 쓰면서 첨가하여 적은 내용이다. 또한 그간 배설의 행적을 보면 이 기록이 얼마나 허무 맹랑한 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배설은 1583년 무과에 급제한 후 주부로 승진하여 1592년 방어사 조경을 따라 북상하는 왜적을 막기위해 남정에 나섰다. 황간,추풍령등지의 격전에서 관군이 패하자 배설은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에 끝까지 대항하여 기이한 전공을 많이 세웠다. 이에 초유사 김성일은 배설의 전과를 높이 평가하여 임시 장수인 가장으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다.
당시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의해 부상현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부상진 전투에서 부친 서암공의 계책으로 적장 흑전구침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에서는 적장 평의지를 격파하였다.그후 무계진전투에서 동생건의부부가 전사하는 전투에서도 적을 격퇴시키는 공적을 쌓았다.
그후 진주목사에서 경상수사로 부임할 때도 진주백성들이 에워싸고 떠나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으며 거사비를 세워서 배설의 업적을 오래도록 기렸다. 배설장군이 경상수사로 부임후에는 군정을 바로잡고 창고를 헐어(혜청) 군병에게 급식하고 함선과 병기를 수리하며 전투에 대비하고 수군영의 깃발을 교체하여 장족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이를 두고 서애 유성룡과 완평 이원익은 장군을 ‘나라의 간성’이라고 높이 평가 하였다. 배설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관할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국의 폐단을 들어 상소한 일로 권율에게 국문을 당하고 밀양부사로 좌천되었다.
그후 다시 선산부사에 임명하여 금오산성을 수축하여 칠정구택을 파고 혜창를 건축하였다가 이순신과 배흥립이 파직될 때 배흥립의 후임으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 볼 때 ’권세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라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이등용될때 유성룡이 인사담당관리 였고 권율이 등용될때는 이항복이 인사담당관이였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야싰꾸리한 관계이다.
어째튼 커닝도 실력이고, 연줄도 실력이고, 낙하산도 실력이니, 이를 탓하지는 않겠으나, 자신들이 그래 등용되다보니 배설도 아첨으로 등용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이순신장군님의 난중일기를 보면 너무 않타까웁다.
유성룡의 탄핵과정을 소상히알고 있던 이순신장군은 거의 실성한 듯이 울부짖고 노량해전서 대과를 올려 어떻게 해보려고 했으나, 끝내 전사를 하시고 말았다. 이날 11월 19일 유성룡이 파면되는 날이였다. 유성룡이 살아서 챙겨주어도 죽을 뻔한 이순신이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을리 없었겠다.
선조31년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서 운명은 이순신장군은 전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유성룡의 그간 임금을 농락한 여죄로 삭탈관직되었고, 이 화는 곧 이순신에게 바로 날라 오게 되어 있었다. 이항복과 권율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이였나 보다.
배설장군은 이순신장군이 전승을 올려 성공하기를 바래서 귀향한 것임에도 끝내 이순신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었어야 만했다. 유성룡의 파면소식도 들었으며, 모든 보직을 내려 놓고 떠난 자신에게 조여오는 칠천량패전 책임문제와 당파싸움의 휘오리를 비켜가지 못했다.
배설장군은 이순신장군이 그나마 명량대첩과 노량해전을 승리한 것으로 조선이 지켜졎다는데는 뿌듯했으리라, 처음 이순신장군을 만났을 때 처럼 좋은 사이로 천국에서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배설장군은 품은 한이 없으니 따뜻이 맞이하여 주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