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배설은 백성을 받들은 구국영웅이다.

自公有花 2014. 10. 29. 15:30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배설은 주부(主簿;총부부장)로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였으나,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고 말았다. 모름지기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데, 조경이 패배했으니 군적도 없는 잔병신세로 전락한 배설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의 병사와 수많은 방어사들의 패배가 전멸이 아닌 군대의 잔병화가 되어있었다. 어차피 중앙정부가 도망다니는 상태로 중앙의 지원이 없는 그야말로 잔병들이 주로 의병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다. 의병이 별도로 어디서 나온것이 아니라 관병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잔병이 되었다가 향병 또는 의병이 되거나 다시 관군에 흡수되어 의병과 관군의 구별이 모호하였다.(양반들이 자신에 노비를 군대로 조직한 의병도 다수 있었음)

 

 

배설은 조경이 성공했더라면, 바로 다음번 자리가 군수나 현령이 되는 것인데, 조경은 대패하여 일개 잔병이 되고 말았든 것이다. 이에 배설은 지역주민들로 향병을 모아 왜군의 저지를 위해 활동했으나, 그 역할은 미미 했었는데, 김면 정인홍의 의병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히 그 곳에 합류 하게 되었다. 아버지 배덕문이 68세에 성주성에서 거병하자 자연히 합세하게 되어 하나의 약 1500여명의 대 부대를 이루게 된다.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22일(을해) 5번째기사(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은 일본군을 추격전투를 하므로 피해가 상당했다)

선전관 이춘영이 영남 왜적의 동향과 김성일·김면의 죽음을 아뢰다------------

 

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라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욤병이 창궐했다.

 

 

 

2, 성주성(부상진)전투 연구

김면은 만석지기 유생으로 임진란으로 쫄닥 망하게 되자 고령에서 봉기하여 의병도대장에 오른 인물이다. 그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 김면 곽재우 정인홍등은 당시 북으로진격 서울로 들어 갔더라면 도원수가 되었을 것이나, 김면과 곽재우 정인홍등은 시류를 읽지 못하여 싸나운 왜적을 추격하므로 힘든 일생으로 마치게 된다. 

 

1,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적군의 피해는 어디에도 기록조차 없고, 일본측에도 피해사실이 없다.

 

2,조헌을 지원하려고 출병한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일본군들을 성주성 북쪽(부상현)을 임시가장인(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곽재우가 당시 1000명을 신솔하고 있었음, 배설이 향병 1500명을 거느리고 있어 김면 다음의 대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나온다.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에 대한 1~3차 공격이 모두 실패함, 성주성을 중심으로 개령 지례 개산진전투에 의병들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중부주력군에 맞선 의병들은 그흔적도 없이 전멸했다. 성주성에서 맞닥뜨린 의병들을 대 살육이 저지된 것은 배설의 적장 수급을 벤 공로임에도 이는 인정도 받지 못했고, 패전의 책임은 배설이 떠맡았다.

 

성주성 3차 공격은 최대 규모의 의병 2만이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모두실패했다. 1차 때는 일본군은 방어만 했으나,2차 3차에서는 일본군은 공격적으로 공격을 했다. 이 공격으로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였고,당시 조선군들 전투력이 일본군의 백대일 정도 였기에 신립장군의 탄금대에도 일본군의 전사는 극히 미미하여 100여명이내 였고, 조헌군의 전멸에 일본군은 약 10여명의 사망정도 고경명의 전멸에도 3십여명의 일본군이 전자한것으로 추정될뿐이다.

 

 

김면장군이 배설에게 낙동강변에서 적군 1만여 병을 막으라는 지시가 있엇다고 한다. 또 의병들 중에서도 낙동강가의 넓은 분지로 나가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은 백성들이 가자고 온 정보들을 받고 음식까지 내주면서 소상히 듣고 적을 세세히 관찰한다음 부상진기슭에 매복을 하게 했다. 이는 당시 화살의 시위가 30m 이내 였기에 최대한 일본군을 살상하기 위한 대책이였고, 배설의 군대는 향병으로 병사들이 몰살하게 되면 배설이 책임을 져야 했다. 다른 무책임한 장수나 관군의 장수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성주성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은 성을 나와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였다. 부상진까지 추격을 당한 의병들이 거의 몰살 직전이였었고, 이 때 배문덕 의병장이 부상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반격을 개시했고, 때 마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향해 돌진 몆차례의 칼싸움 끝에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아버지께(의병장) 바침으로 그의 효성이 보인다,(때문에 배문덕이 적장의 수급을 취했다고도 알려져 있음,)

 

 

임진왜란의 전투패배를 징비록은 배설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신립장군, 조헌 영규 고경명군대는 일본군의 상대라기 보다 일방적인 살육에 가깝다. 설령 배설이 합천군수라해도 기천의 관병으로 왜군을 막을 수도 없고,당시는 합천군수도 아니였다. 모든 관군이 합세해도 막기어려운게 당시 실정이였다.(배설은 이순신이 아니다)

 

성주성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고, 계사년 1월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하던 왜장이 전사함으로 왜군들은 스스로 자진 철군을 해서 무혈입성을 했다.왜군은 끝내 성주성참패의 공을 배설에게 주지  않고 자진철군하는 형식을 취했다.  왜군이 새를 잡는 조총을 들고 다닌다든 1593년 정월 명나라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수는 22600명 장수는 약 200명 정도이나 실전에서 의병장들이 대거 사망하고 의병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명목만 유지하게 된다.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북진하여 권율은 끝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서 도원수를 제수 받게 된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장군휘하의 약 1500명의 의병중에 선봉장에 불과하였고, 김면과 정인홍은 약 1500여명의 향병인 배설에게 낙동강가로 가서 금산 이치등지에서 후퇴하는 일본군 약 1만병을 막으라는 명령을 했던 것이다.

 

 

 

이에 배설은 배덕문장군과 함께 약 1500여명의 향병들에게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견이 낙동강강변의 넓은 분지에서 적을 기다리자고 한다. 그러나 배설은 이미 추풍령전투와 탄금대 전투를 목격한 경험으로 병졸들에게 부상진 험로 계곡에 매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강변에서 아군의 군세를 믿다간 단 한명의 왜적도 공격치 못하고 몰살 당할 조총의 교대연발 사격을 걱정하여 부상현 계곡에 매복을 시킴으로써 화살 시위권으로 적을 유인코자 하였다.

 

드딛어 일본군은 의병들 전선이 무너지자 일제히 일본도를 들고 추격하여 부상진 계곡에까지 들어 왔다. 배설은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리자 계곡에 갇힌 구로다 간베에 흑전구침은 배설과의 칼사움에 패배 목이 달아난자 일본군이 일제히 도주하여 성주성안으로 들어가 1월까지 침거하다 대장을 읽은 일본군들은 1월 밤에 모두 퇴각해 버렸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분기점이 되었고, 이전투로 경상도가회복되는 바. 권율의 행주산성을 공격치 않고 일본군이 퇴각하게 중요한 원인 된 것이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병들이나 일본군들은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 신분이였다.

 

정인홍과 김면은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제 2차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12월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의병들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과라면 배설의 적장의 목을 벤 것 뿐이였다.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김면은 슬슬히 只知有國 不知有身(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남기고 병영에서 전사했다.

 

 

 

 

배설이 김면 정인홍 아래에서 이름없는 의병신분이 였으나, 방어사의 부주(총무부장)로서 언제든지 합천군수로 제수 받을 자격이 있었음에도 패잔병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594년 합천군수가 되고 경상우도 일대의 탈환 공로로 늦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다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배설은 진급이 아주 늦은 편이다. 그럼에도 경상지역 사대부들은 배설장군의 전공이 배문덕장군의 공이라며, 진급을 반대하는 상소가 많았으며, 자신들도 모르는 전공이라고 하기 까지 하였다. 자신들은 관군이 되어 도망다녔으니, 당연히 전공을 알 수 없었음에도 시기와 모함은 이때도 있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구로다 요시타카가문의 장군도 두개중 하나가 아직도 종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북상한다는 보고가 날아 들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鳥領) 이남에서 왜군을 방어하도록 지시 하였으나, 4월25일 이일이 지휘하는 부대가 상주에서 패하고, 4월26일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이 지휘하던 문경도 왜군에게 점령 당 하였다. 4월28일에는 도순변사 신립이 8천명의 군사와 함께 충주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역시 패 하였다.

 

선조는 4월30일 밤 2시쯤 소나기를 맞으며 도승지 이항복이 들고 있는 등불을 따라 말을 타고 100여명의 신하와 함께 한양을 빠져 나갔다. 도성과 궁궐은 왜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난민들에 의하여 방화 되고, 파괴 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으며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하였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한양이 점령 당하자 선조는 5월1일 개성부에 도착 했다가 5월7일 급히 평양으로 피난 하였다.

 

 

임짐왜란을 총지휘한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4월19일 죽도 부근에 상륙 한 후 김해, 창령을 지나 오른쪽 부대는 무계, 성주 방향으로, 왼쪽 부대는 초계, 거창, 지례 방향으로 각각 북상하여 금산에서 합류한 후에 영동, 회덕,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공격 하였다.

제4진인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부대는 병력이 1만여 명이었나 집결이 지연 되고 전선이 부족하여 제 때에 투입 되지 못하고 5월2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 하였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휘하는 4천명의 병력은 선발대로 4월 중순 부산에 상륙해 있었다. 이를 합한 1만4천l 왜군은 창령을 거쳐 현풍에서 머물다가 상주를 지나 한양을 공격 하였다.

제5진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鳥正則) 부대는 병력2만5천으로 제4진에 뒤 이어 상륙 한 후,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진출로를 따라 북상 하면서후방 부대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제6진 병력만5천7백명, 제7진 병력 3만명, 제8진 병력 1만명, 제9진 병력 1만1천5백명이 연이어 상륙 한 후방 부대 역할을 하거나 한양으로 이동 하였다. 그리고 1만2천명의 에비 부대가 투입 되어 주로 후방 경계를 담당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官兵衛는 약 39세 전후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고 한다. 

 

구로다 요시타카외 구로다 간베에라 불린 사람은 두명이 있엇구요, 그러다 성주성 부성현전투에서 일본군 700여명이 죽고 구로더 간베에 흑전구침이 전사한후 일본에서 구로다 간베에라는 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조선정벌에서 죽은 구로다 흑전구침 간베에 때문입니다. 구로다 요시타카도 조이스칸으로 호를 바꿉니다. 간베에는 조선서 비참히 죽었죠

 

조선정벌의 전투의 패배보다 동생인 흑전구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더 구로다 요시타카의 가슴을 찢었다. 간베에의 마음은 참담했다. 자신의 피와 같은 1천 명의 병력대부분인 약700여명을 잃은 참담함과 자신의 동생이 전사했다는 비보 들으니 순간적으로 앞이 캄캄해졌다. 호위 군병들을 물리친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등청정의 등을 손으로 두드리며 분노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한다.

 

 

정유재란을 유심히 살펴보심 일본군의 행로가 중부는 비워두고 서남진함을 볼 수 있다, 성주성 김천등지를 우회합니다. 즉, 한마디로 이순신장군을 찾아가는 일본군이죠, 배설장군을 어캐든 피해가려는 큰 형세가 보이지요,, 왜 그럴까요, 이순신, 유성룡, 당시 동인조정은 일본과 뭔가를 주고 받고 있다는 느낌, 여차하면 항복 밀약의 느낌이(강화)고 이로 유성룡은 탄핵 파면되었죠?

 

 

 

 

1597년 정유재란 전투 일보군의 배설부대 회피 진격로 보기,

7월 15일 칠천 / 원균 :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야키자키 가토

8월 16일 남원 / 양원 : 우끼다 = 남원함락

8월 17일 황석산성 / 곽준 : 가토오 = 산성 함락

9월 7일 소사 / 해생, 양등산 : 모오리 = 일본장수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평의지가 사신으로 등장하면서 임진왜란 내내 선조는 풍신수길을 평수길로 알았습니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 이전에 24척의 전함으로 남해안을 침투 한 후 조선의 경계를 살피고 만전의 전투준비를 했습니다. 구로다 요시타카도 흑전구를 분신처럼 믿었고, 풍신수길도 조선정벌을 의심하지 않았죠, 일본도와 조총을 보심 조선보다는 월등한 무기체계이고, 전함의 기동력도 조선에 비해 월등합니다. 그런 일본군 지휘부가 배설의 유격전에 대패 한것입니다.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된 것이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전이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왜 이런 전교를 내렸을 까요, 일본군은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병사들을 소모시키지 않는 장군들 간에 결투로 병사들을 합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요, 만일 일본군이 배설장군을 만나 결투로 패배하면 침략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었고, 흑전구침처럼 당할 수 있었죠, 주의를 준 것인지 그내 내막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In succession , the person (or soldier ,or general ) reseized many castles such as Seongju , Hapcheon gunsu, Chogye and Euiryeong and then was promoted to a corp commander .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10) 8월18일 (양력 9월28일)

회령포에 갔는데, 수사 배설이 배멀미를 핑계대기 때문에 보지 않았다. 그 포구 관청에서 잤다.

정유2책

늦은 아침에 바로 회령포에 간즉, 배설이 배멀미를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으나 다른 장수들은 보았다.

11) 8월19일 (양력 9월2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아니했다. 그 건방진 태도가 말 할 수 없었기에 그 영리를 곤장 때렸다. 회령포 만호 민정봉이 그 전선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란인 위 덕의들에게 준 죄로 곤장 20대를 쳤다.

정유2책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교유서에 숙배케 했다. 배설은 교유서에 예를 받들지 않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이방과 영리를 붙들어다가 곤장을 때렸다. 회령포 만호 민 정 정붕은 위 덕의들에게서 술과 음식을 얻어먹고 전선을 사사로 내준 까닭에 곤장 20대를 때렸다.

(출처; 서암공파 난중일기 해석)

 

 

 

최초의 임진왜란 방어사 신립장군의 위엄,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敵에게 나라를 내주는 것과 마찬가지,충주전투를 앞두고 신립도 尙州전투 신립장군에 관련한 징비록의 기록이다. <4월27일 초저녁에 신립은 군관 한 사람으로부터 "적군이 이미 새재를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중략) 신립은 전날 저녁 정보를 제공한 군관을 불러 "어찌 그런 요망스런 정보를 제공해서 군사들을 동요하게 하느냐"고 꾸짖고는 목을 베어 죽였다. 이어 그는 임금에게 "적병은 아직 尙州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는 장계는 올렸다. 그런데 적은 이미 10리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승패는 兵家의 常事이나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법이다.(징비록)

 

이순신장군은 백성들에게 엄격한 법치의 모범을 보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령에 기일(期日)을 어기거나 근무를 태만히 한 자에게는 반드시 체벌을 가했다. 체벌만이 아니다. 1594년 7월3일에는 각 배에서 여러 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7월26일에는 도망간 군사 세 명을 처형했다."군사를 싣고 도망간 죄로 막동이라는 자를 효수했다"(8월26일). "격군으로 도망하다 붙잡혔기에 목을 베어 내다 걸었다"(1596년 7월16일). "헛소문 낸 배꾼 두 사람을 목을 베 효시했다"(8월25일). 힘없는 백성이라도 단순 체벌에 그치지 않고 목숨을 빼앗아 위엄을 세운장수이다.

 

권율의 주특기는 '전하 우리 장군의 목을 베시옵소서,였다.

수시로 백성들인 도망병을 즉결처분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 되었다가 이후 재기용도면서 다시금 관직에 오르게 되는데,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재차 도원수에 제수 되었다. 이로 볼때 권율은 최초 부임지에서 부정부패문제로 파면되었었고, 후일 조정에 보고 없이 군문의 죄를 물어 효수를 많이 했다고한다. 배설이 권율의 부정부패 문제로 상소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익에 매우 민감했던 권율의 처세술을 뛰어났었다. 임진왜란 전후에도 전하 우리 장수의 목을 베시옵소서에 앞장서서 국가기강을 세우려 했다.

 

 

이순신 장군과 배설은 다르다.

배설은 백성을 무장시켜 조선 최초의향토상비군을 만들어 전투력을 배가시키고자 백성을 위무하고 혜청을 열어 주민의 굶주림을 어떻게든 해결해주므로서 주민들의 절대적지지를 받았다. 백성의 목을 쳐서 위엄을 세우기보다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의 수급을 베어와서 아버지에게 바치는 다감다정한 효자의 모습이 군인으로서는 부적합 인물이였는지는 몰라도 인간미가 철철 흐르는 우리시대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대장군을 내려 놓고 단기필마로 고향으로 가면서까지 왜군 적장의 막사를 급습하여 시마즈 요시히라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고국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배설장군은 만고의 충신이요 효자로서 살다가 영면한 장군,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고 최선을 다한 인물이 배설장군의 참 모습이다. 배설은 백성들이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가져오면 음식을 내주고 직접 그들을 만나 적을 관찰한 유일한 조선군 장수 였고, 일본군들을 정뮤재란 내내 배설장군의 향병 만을 피해 다녔었다. 배설이 수군사령관이 된후에도 일본군은 배설의 패잔병선을 쫒아가지 못했다.

 

 

IMF 극복당시 전국민이 금모으기 하고 민간 상사들이 나서서 극복되자 경제 관료들이 훈장타고 자신들 몫으로 슬적 돌려 놓았지 않은가, 아이엠에프의 원인은 민간인들이 모두 책임지고 수습은 경제관료들이 했다고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잘 되고 있다. 지금이나 예나 뭐 가다를까, 국난이 터지면 백성들이 해결해야 하고 해결되면 관료들 몫의 훈장이 남발되다가 후일 기록이 역사가 된다. 그게 우리 민족의 뿌리이다.

 

 

엄청나게 잘난 선비들이 일본군 우섭게 알았든 시건방진 민족 자존이 드높았으니 총앞에선  일본군에게는 도망만 다니든 문신들(유성룡과 권율)은 역사 왜곡의 종결자다. 배설이 임진왜란 총지휘자의 목을 베자 철수한 것을 일본군이 행주치마와 주먹돌이 무서워 도망갈 정도라면서  전국토가 유린되나, 배설이 구로다 간베에 흑전의 목을 베어서 임진왜란은 종점을 향하고 일본군은 퇘각함에도 끝내 의병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설의 공은 인정하지 못 한다. 역사는 도망자로 만들고 훈장과 상패는 공무원 관료들이 챙긴 우리 민족 문화의 뿌리의 참 모습이다. 

 

 

IMF 어캐 수습되었나,  경제 관료 몆명서 수습했다는 역사이다.  임진왜란 이순신장군의 대승이 조선을 구했다, ^^  아량이 많은 백성들이 많이 죽어 전염병으로 일본군도 많이 죽자 철군하였다고도 하죠, 어째튼 국난은 극복되엇으니, 후일 일본에 식민지가 되죠, 너무도 잘난 민족 일본시키들 우섭게 압니다. 그래서 식민지 되어 많이 갖다바치고 나라 유지했죠, 그러나 지금도 일본 쯤은 우섭게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