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관련 고전자료 취합
배설(裵楔) 참고자료 모음
★【배설】★, ▲배덕문▲ 표시한 참고문헌:
고대일록,
인명록,
난중잡록,
백사집,
여헌집,
영남의병,
재조번방지 4,
조선조 고사본말
2014년 11월
소설 영화 <명량> 대처 비상대책위원회
성산 성주배씨 서암공파
경주배씨 대종회
★【배설】★(裵楔) : 1551~159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ㆍ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부산 첨사ㆍ진주 목사(晉州牧使)ㆍ밀양 부사를 거쳐 선산 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고대일록. 인명록)
○ 11월 8일 갑자(甲子)
대장(大將) 김면(金沔)이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었고, 성주 가장(星州假將) ★【배설】★(裵楔)은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 1592 고대일록)
○ 12월 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金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金大將) 면(沔)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徐禮元)을 김해(金海)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金睟)가 체직(遞職)되었다.(1○ 4월 17일 병인(丙寅)
★【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1592 고대일록)
○ 2월 25일 을해(乙亥)
★【배설】★(裵楔)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배설】★은 몸을 피하여 도망을 쳤으나, 결국 잡혔다. 스스로 만든 허물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무주(茂朱) 각진(覺眞)의 집에서 묵었다.(고대일록)
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12)
확대원래대로축소
7월 15일(신유) 비
좌목
10-07-15[13] 3차 정사에서 윤치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3차 정사를 하였다. 윤치능(尹致能)을 효릉 영으로, 이문직(李文稷)을 가감역관으로 삼았다. 가감역관 조병찬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초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이 되어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전 현감 홍순학(洪淳學)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금위영 장관들의 사강 때에 유엽전에서 연달아 5순 몰기(沒技)하여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증 이조참판 ▲배덕문▲(裵德文)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병조참판 ★【배설】★(裵楔)에게 병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병조참의 선약해(宣若海)에게 병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충절(忠節)이 뛰어나서 가증(加贈)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군수 이유형(李儒亨)에게 좌승지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학생 이단운(李端雲)에게 사복시 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민수(李敏樹)의 본생 조고비와 증조고비로서 옮겨 시행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형조 참판 이철구(李鐵求)에게 완흥군(完興君)과 영의정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학생 이득훈(李得勳)에게 완창군(完昌君)과 좌찬성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이우태(李宇泰)에게 완춘군(完春君)과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판종정경 이경우(李景宇)의 삼대이다. 고 통덕랑 김이상(金履庠)에게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는데, 전 예조 참의 김학근(金鶴根)의 본생 조고비로서, 이증(移贈)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수사 정수기(鄭壽基)에게 병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정지용(鄭志鎔)의 고비이다.
○ 7월 17일 병오(丙午)
모간(毛看)에 가서 수보(秀甫)의 대상(大祥)에 참석하였다. 그러고는 강군망(姜君望) 형, 박경실 형, 박공간(朴公幹)을 자실(子實)의 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7월 18일 정미(丁未)
서원에 머물면서 부(賦)를 지었다. ○ 산양(山陽)의 박군수(朴君秀)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오후에 정사고(鄭士古)가 서원에 왔다. 해가 기울 무렵에 박공간(朴公幹)이 서원에 왔고, 황혼에 황덕장(黃德璋)이 의령(宜寧)으로부터 서원에 왔다. 황이 말하기를, “통제사 원균이 14일에 배 200여 척을 끌고 나가서, 공산(公山)에서 적을 맞이하여 치고는 영등포(永登浦)에 배를 머물러 두고 있었습니다. 16일 밤에 적이 와서 밤중에 기습하였으나 배를 묶어 두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이 트자 적선이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원균(元均)은 바다에 빠져 사라지고 충청 병사 최호(崔浩)도 죽었습니다. 주사(舟師) 중에서 죽거나 물에 빠진 자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서 포위를 뚫고 나와, 곧바로 한산(寒山)에 다다라 남은 배에다 군사를 싣고 급히 도망하면서 군량과 기계를 전부 태워 버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호라! 우리나라가 의지한 것이 수군(주사)이었는데, 원균이 원래 통어할 만한 인재가 아니었음에도, 갑자기 이순신(李舜臣)을 파직하고 원균으로써 대신하게 했고, 원수 권율(權慄)은 원균을 곤장까지 쳤다. 원균이때문에 성이 나서 급히 군사를 몰아 나가면서 세력의 많고 적음도 고려하지 않고, 계속 바다에 배를 띄워 다 함께 침몰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는 실로 조정의 정책이 마땅함을 잃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수의 방략이 어긋나 날마다 함부로 전투를 벌여 일의 기틀을 크게 잃은 것이다. 원균 같은 자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나랏일을 어찌하며 백성들은 또 어찌 할 것인가! 온 나라 사람이 한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나 놀라 모두 이제 다 죽게 되었구나 하는〔溘然〕생각을 가졌다. ○ ★【배설】★(裵楔)은 몰래 전라도로 도망쳐 전선(戰船)을 팔았다고 한다.(고대일록)
○ 정월(正月) 8일 계해(癸亥)
★【배설】★(裵楔)이 유임되고, 합천(陜川)의 김준민(金俊民)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차하고, 김영남(金穎男)을 군기 정(軍器正)으로 삼는다는 전교가 내려졌다.(1593 고대일록)
○ 12월 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金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金大將) 면(沔)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徐禮元)을 김해(金海)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金睟)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7월 7일 양원이 친히 심유경을 압송하여 차관과 함께 서울로 향하였다.
○ 적의 배가 이달 초부터 잇따라 건너왔다. 원균(元均)이 여러 장수로 하여금 나아가 탐지하게 하고, 8일에 수병(水兵) 여러 장수가 웅천 바다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하여 배 10여 척을 부수었다. 적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므로 퇴진하여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하동에 도착하여 접반사에게 관문(關文)을 보내기를, “제도(諸道) 도순찰사 권율은 왜의 정세에 관한 일로 관문을 보내오. 8일에 수군 여러 장수가 부산 바다에서 시위(示威)하였는데,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이 큰 배 두 척으로 선봉이 되어 웅포(熊浦)에 이르러 갑자기 적을 만나 접전하기를 한참 동안 하였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이 그 수를 헤아릴수 없었소. 왜놈들이 모두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달아나면서 빼앗은 군량 2백여 석을 배와 함께 불태우고, 또 1천여 척이 본토로부터 바다를 덮어 오는데 우리 군사가 가로막으니 적병이 피해 갔소. 운운.” 하였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난중잡록)
9월. 김성일이 좌도로부터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와서 다시 우도 감사가 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성주(星州)에 진을 쳤던 적에게 이미 무계(茂溪)ㆍ현풍(玄風)의 응원이 없어져서 세력이 심히 외롭고 약해졌으므로, 정인홍(鄭仁弘)이 김면(金沔)과 세력을 합쳐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더니, 김준민(金浚民)은 형세가 불편하다 하여 어렵게 여기고 의심하는 빛이 있었으나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모두 진격함이 옳다 하여 드디어 진격하기로 결정하다. 모든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 각기 부대를 정돈하고 수십 리에 둘러 포진하니 군사의 형세가 심히 장하였다. 인홍과 김면이 가평(可坪)에 대진(對陣)하니 성주성(星州城)에서 5리나 가까웠다. 모든 군사가 차례로 전진하여 성문을 포위하고 육박하며 진퇴하고 충돌하며 유인하여 도전하나, 왜적이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철환(鐵丸)으로 방어하였다. 종일토록 진퇴하여도 성을 함락시킬 기구가 없어서 해가 저물자 본진으로 돌아오고, 이튿날에 다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김면이 ★【배설】★(裴楔)을 시켜 부상현(扶桑峴)에 매복을 시켜 개령(開寧)에서 응원하러 오는 적을 방비하게 하다. ★【배설】★이 응낙하고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서생에게 절제(節制)를 받아서 그를 위해 중로에 매복한다는 말인가.” 하고 드디어 가지 않았다. (난중잡록)
24일.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은 인동(仁同)으로 해서 낙동강을 건넌 다음 선산(善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고,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의흥으로 옮겨 함락시키니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김수가 박진(朴晉)과 ★【배설】★(裵楔)에게 선산에 가서 왜적을 정탐하라 했는데, 도중에 죽패(竹牌)를 차고 있는 7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박진 등이 왜적의 무리인가 의심하여, 말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꿇어앉아 왜의 글을 바치는 것이었다. 위쪽에는 크게 영(令) 자 한 자를 썼고, 그 아래에는 잔 글씨로,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며, 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각각 자기 집 일에 힘쓰라. 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한다. 천정(天正) 20년 월 일 습유시중(拾遺侍中) 평의지(平義智).” 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엔 이름까지 적혀 있다. 박진 등이 그들을 포박해 오다가, 졸지에 왜적을 만나자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영남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1592난중잡록)
없어진다면 이는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계사년 7월 15일에 한산도로 나아가 진을 쳐서 적의 해로(海路)를 차단하였다.
이해 8월에는 조정에서 공에게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임시키고 본직(本職)은 처음대로 가지어 수군을 총제(總制)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공은 6년 동안 군중에 있으면서 본도(本道)의 군량 저축이 부족하여 공급해 낼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어염장(魚鹽場)을 크게 열고 둔전(屯田)을 넓게 설치하였으며, 모든 국가에 이롭고 군(軍)에 보탬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마치 기욕(嗜欲)을 따르듯이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달려들어서 털끝만한 것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군량이 여유가 있어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정유년 정월에는 적추 청정(淸正)이 재차 바다를 건너왔는데, 조정에서 공이 그를 맞아 공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게 하고 원균을 대신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공이 서울로 압송되는 길에 남녀 노유(男女老幼)가 모두 길을 가로막고 부르짖어 통곡하였다. 공이 조사를 받음에 미쳐서는 상이 공을 용서하고 백의(白衣)로 강등시켜 원수(元帥)의 진중(陣中)으로 보내서 공으로 하여금 죄를 반성하고 스스로 진력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해 7월에 원균이 과연 패하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공으로 하여금 진주(晉州)에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게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조정에서 다시 공을 통제사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는 군이 막 패한 뒤라서 주선(舟船)과 기계(器械)가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공이 명을 들은 즉시 단기(單騎)로 달려 회령포(會寧浦)에 이르러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을 길에서 만났는데, 이때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겨우 8척이 있었고 또 녹도(鹿島)의 전함 1척을 얻었다. 공이 ★【배설】★에게 진취(進取)의 계책을 물으니, ★【배설】★이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서 스스로 호남(湖南)의 진영 밑에 의탁하여 싸움을 도와서 스스로 진력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는데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 버렸다. 그러자 공이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김억추(金億秋)를 불러 그로 하여금 관할 하의 장수 5인을 소집하여 병선을 수습하게 하고,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전함을 치장해서 군세(軍勢)를 돕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함께 왕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감격하며 두려워하였다.(백사집)
아, 저 옛날 ★【배설】★(裵楔)의 일은 혹 시골 친구들의 비평이 있으나 몸이 막중한 국가의 은혜를 입었으니,이 난리의 때를 당하여 군신간과 붕우간에 털끝만한 간격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곤직(閫職)을 맡은 신하는 변란을 당하면 충성을 다하고, 시골에 거처하면 붕우간에 신의를 지키는 것이니, 어찌 이 때 두 어려운 즈음에 심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공의 친구간의 도리는 다음의 한 가지 일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대구 사람 이창인(李昌仁)이 온 식구를 데리고 공의 아문(衙門)에서 피난하였는데, 공은 봉급을 나누어 구제하여 살렸으니, 하물며 한 마을의 벗에 있어서랴.
적라(赤羅 군위(軍威)의 옛 지명)를 다스릴 때에 사림(士林)들이 전별(餞別)한 서문(序文)이 있으며, 초정(椒井)의 목욕과 선사(仙査)의 유람은 모두 도덕(道德)을 간직한 진유(眞儒)들이었는데 서로 시를 짓고 서문을 지었으니, 이공의 깊은 학문을 알 수 있으며 벼슬살이할 적에 청백함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문장과 무예를 겸하고 도로써 벗들과 사귐은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인데 공은 이것을 모두 실행하였으며, 조정에서 벼슬하고 시골에서 거처할 때에 우뚝 서서 의(義)에 맞게 행동하였다. 이에 간략히 만분의 일을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주D-001]산양(山陽)의 감동 : 산양은 옛날 진(晉) 나라의 상수(向秀)가 살던 곳으로, 상수가 이 곳을 지나다가 이웃 사람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 옛날 일을 회상하여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 여기서는 이 고사를 인용한 듯하나 확실하지 않다.
[주D-002]★【배설】★(裵楔)의 일 : ★【배설】★은 인명으로 보이나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 행록(行錄)은 오탈자가 많으며 내용도 중간이 빠진 부분이 자주 보이는바, 추후에 보충하여 넣은 것인 듯하다.(여헌집. 이규군 관련)
6일에 수군의 여러 장수가 한산에서 바다로 내려가서 적군과 교전하였는데 보성(寶城) 군수 안홍국(安弘國)이 패하여 죽었다. 《일월록》
○ 적군의 배가 그 달 초순부터 잇달아 건너왔다. 원균이 여러 장수에게 나아가 염탐하게 하였다. 수군 여러 장수가 웅천 앞바다에 적군과 만나 싸웠는데 우수사 ★【배설】★(裵楔)이 선봉이 되어서 적선 십여 척을 격파하고 군량 2백여 섬을 빼앗았는데도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였으므로 군사를 물리고 구원병을 청하였다.
○ 권율이 곤양(昆陽)에 도착하여, 원균이 자신은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군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기만 하였다고 전령으로 불러와서 곤장을 치며, “국가에서 너를 높은 벼슬로 대우하는 것이 한갖 편안하게 부귀만을 누리게 해서인가.” 하였다. 그날 밤에 원균은 분한 마음을 품고 물러나와 한산에 이르러 남아서 지키고 있는 군사들까지 쓸다시피 다 거느리고서 급히 부산으로 갔는데 적선 천여 척이 또 나왔다. 원균이 노젓는 군사를 독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군이 파도에 흩어져서 지탱하지 못하는 듯하므로 원균이 기세를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몰랐다. 뱃사람들이 모두, “물마루[水宗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 있는 지점으로 물결이 가장 센 곳]는 벌써 지났고 대마도에 가까워져서 배를 부리기가 불편하니 우리는 살 길이 없다.” 하였다. 원균이 듣고 급히 노를 돌리라고 명령하였으나 배가 역류하는 물길을 넘어선 까닭에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었다. 전라 우수사가 거느린 배 일곱 척이 먼저 동쪽으로 표류하여 흘렀다. 원균이 모든 배를 독촉하여 급히 물러나게 하고 밤낮으로 노를 저어서 겨우 가덕도(加德島)에 도달하였다. 적군은 우리 군사가 형세를 잃었음을 알고는 곧 신ㆍ구(新舊) 전선을 내어 엉크러져 쫓아오므로 우리 군사는 영등포로 물러왔는데 군사들은 땔나무와 물을 다투어 구하였다.그 전날 밤에 적군이 작은 배를 내어 육지로 내려와서 복병을 시켰다가 이때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포성소리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원균 등은 창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급히 배를 저어서 온라도(溫羅島)로 물러났으나 적군이 크게 몰려왔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하늘과 물이 어둡고 처참하기까지 하였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서 의논하기를, “적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일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뿐이다.” 하니, ★【배설】★이, “용맹할 때는 용맹하고 겁을 낼 때는 겁내는 것이 병가(兵家)의 요긴한 전력이오. 부산 바다에서 세력을 잃었고 영등포에서 패전하여 흉적이 벌써 가까이 왔는데 우리 형세는 외롭고 약하기만 하니, 용맹은 부릴 수 없고 겁내는 것만이 쓰일 수 있소.” 하였다. 원균이 성을 내며, “죽고야 말 것이니 너는 여러 말 말아라.” 하였다. ★【배설】★은 자기 배에 돌아와서 자기의 휘하 여러 장수와 함께 비밀히 의논하고 군사를 물리기로 하였다. 한밤중에 적군이 몰래 비거도(鼻居舠)로 하여금 우리 배 사이를 가만히 뚫고 들어와서 형세를 살피고 또 전선 5, 6척으로 우리 배 주위를 살며시 돌아 다녔으나 장수나 군사들이 모두 몰랐다.7월 16일, 날이 밝자 복병선(伏兵船)에 먼저 불이 붙어 격파되니 원균이 크게 놀라서 은밀히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며 불화살을 쏘아서 변을 알렸다. 갑자기 각각 우리 배의 옆에서 적선이 갑자기 뚫고 들어와서 철환이 쾅쾅 떨어지니 군졸들이 낯빛이 변하였다. 원균이 비로소 적의 습격을 깨닫고 쫓아가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여러 군사를 독촉하여 닻을 내리고 접전하도록 하였는데, 형세가 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배설】★은 바라보기만 하다가 퇴각하려 하자 원균이 군관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배설】★이 항거하여 싸움이 한창일 무렵에 관하의 배 열두 척을 거느리고 달아나 버렸다.원균도 힘을 지탱할 수 없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닻을 올리고 흩어져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적군이 쫓아와서 마구 죽이니 원균 등이 다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인의 죽은 자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원균이 본래 살이 쪄서 하루에 술 한 말과 생선 다섯 묶음을 먹었으므로 배가 무거워 걸으면서 싸우는 것을 잘하지 못하였다. 나무 밑에 앉아 쉬다가 적에게 살해당하였다.
○ 이억기(李億祺)ㆍ최호(崔湖) 등은 물에 빠져서 죽고, 전선 백여 척도 모두 함몰되었다.
○ ★【배설】★이 전선을 거느리고 달아났으므로 그 군사들만은 온전하였다. 한산도에 돌아와서 피난가고 남은 백성으로 섬에 살고 있는 자는 적군을 피해 가도록 하고 불을 놓아 막사ㆍ양곡ㆍ군기 등을 모두 태우니, 순신이 모아서 몇 해 동안 쓸 수 있었던 양곡ㆍ병기가 모두 재가 되었다.
○ 적군이 이긴 기세로 서쪽으로 향하니 남해(南海)와 순천(順天)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두치진(豆恥津)에 이르러 뭍으로 내려와서 길게 휘몰아치니 전라도와 충청도가 크게 진동하였다.
○ 권율이 이순신에게 진주에 가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기용되었다.(선조조 고사본말)
○ ▲배덕문▲(裵德文)과 ★【배설】★(裵楔)이 의병을 일으켰다.
○ ▲배덕문▲은, 자는 숙회(叔晦)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명종 계축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군수를 지냈다.
○ ★【배설】★은 덕문의 아들이다.
○ 성주《선생안(先生案)》에 제말(諸沫)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성(固城) 사람이었다. 임진란을 당해서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공격하였는데, 향하는 곳에는 앞을 막는 자가 없어서 곽재우(郭再祐)와 나란히 일컬어졌으나 명성은 오히려 그보다도 높았다. 조정에서 특별히 본주 목사를 제수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죽어서 공명이 크게 드러나지 못했다 한다. 또 소문에는 적군과 진을 마주쳐서 교전할 적에는 용기가 충전하여 수염이 모두 위로 뻗친 것이 흡사 빳빳한 고슴도치 털과 같았으므로 적군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다 한다. 《약천집(藥泉集)》(선조조 고사본말 영남의병)
○ 인홍이 성주에 주둔한 적이 구원병이 없고 형세가 외롭다는 것을 듣고 김면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하였다. 김준민이 형세가 불편하다고 난색을 보이고 성주에서 5리 되는 곳에 나아가 진치고 마구 달려들며 도전하였으나 적이 끝내 나오지 아니하므로 날이 저물어서 도로 돌아왔다. 김면이 ★【배설】★(裵楔)을 시켜 부상현(扶桑峴)에 복병하여 개령(開寧)에서 구원하러 오는 적병의 길을 막으라고 하였더니 ★【배설】★이, “예, 예.” 하고는 나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어찌 서생의 절제를 듣고 저를 위하여 복병을 설치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가지 아니하더니 이날 밤에 성주의 적이 개령에 달려가 위급함을 알려서 개령의 적병이 많이 왔다.우리의 군사는 알지 못하고 바야흐로 성(城)을 공격할 기구를 수리하고 있다가 뜻밖에 갑자기 적병이 이르고 성 안에 있던 적도 성문을 열고 나와 양쪽에서 쳐들어오므로 김면이 급히 말에 오르니 군사는 드디어 달아나 무너졌으나 인홍이 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장수와 사졸들이 붙들어 말에 태우고 나오니 준민이 그 뒤에서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군사가 많이 면할 수 있었으나, 고령의 가장(假將) 손승의(孫承義)는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합천의 군관을 잡아다가 품의(禀議)하지 아니하고 거사한 것을 꾸짖고 장형에 처하였다.(선조조 고사본말)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재조번방지 4(再造藩邦志 四)
○ 그때에 황신(黃愼)이 부산(釜山) 왜영(倭營)에서 국서(國書)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역관(譯官) 이유(李愉)와 박대근(朴大根)을 시켜 국서와 예물을 받들고 가게 하니, 성주(星州)에 이르자, 부사(副使) 박홍장(朴弘長)도 성주로부터 국서와 함께 부산에 이르렀다. 황신 등이 중간 지점에 나가서 공경히 맞이하여 부산에 들어오자, 왜영의 장수 평조신(平調信)과 사고안문(沙古雁門) 등도 5리나 가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 병신년(1596, 선조 29) 8월 4일. 저녁에 배를 타고 평조신과 같이 대마도(對馬島)로 향하였다.
○ 10일. 대마도 부중포(釜中浦)에 도착하였는데,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의 집이 다 그곳에 있다. 평의지는 자기 나라의 국도(國都)에 가 있었으므로, 평조신이 사신 일행을 인도하여 평의지의 객사에 들었다. 객사는 평의지의 집과 겨우 3리 되는 가까운 곳인데, 가사(家舍)가 그다지 화려하지는 못하나, 아주 정결하여 한 점의 티도 없으며, 돗자리는 모두 깁과 비단으로 단을 박고, 석린(石鱗)과 능화(綾花) 무늬의 벽지로 도배하고, 창호(窓戶)는 동석(銅錫)으로 장식하였다. 섬 안의 우두머리인 왜인들이 다 외청(外廳)에 와 있어, 모든 접대하는 예절에 공경을 지극히 하였으며, 음식은 다 우리 나라 것을 모방하여 흰 사발에 흰 죽을 담고 놋 뚜껑을 덮고 수저를 놓아서 올리는 것이었다. 평의지의 아내가 사람을 시켜서 사신에게 말을 전하기를,
“주인이 없을 때에, 큰 손님이 오시니, 아낙들만 있어서 접대하는 예절이 꼴이 아닙니다. 마음에 매우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도주의 아내는 평행장(平行長)의 딸인데, 집안을 잘 다스리며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풀므로, 섬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다. 섬에 사는 늙은 왜인들이 모두 우리 나라의 은혜를 많이 느껴, 사신에게 와서 뵙고 옛일을 말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고, 그 외에 여러 왜인들도 우리 나라의 옛일을 많이 이야기하며 잊을 수 없다고 하니, 우리 나라를 침범한 것은 본래 여러 왜인들이 기쁘게 여겨서 한 것이 아니다. 심유경(沈惟敬)의 중군(中軍)으로 이(李)가 성을 가진 자도 명 나라 황제의 고명(誥命)과 칙서(勅書)를 받들고 이 섬에 와 있으면서 우리 나라 사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15일. 대마도에서 배로 떠났으나 바람이 몹시 일어서 성낸 파도가 꿈틀거리더니, 바다 가운데 이르러서는 닻줄이 거의 끊어지고 배가 곧 기울 듯하고, 돛대 꼭지가 휘어서 물 위에 닿고, 놀란 물결이 산더미같고, 배는 뛰는 말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고, 큰 자라가 물을 뿜어 하늘과 땅이 캄캄하게 어두우니,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낯빛이 변하고, 사공들도 손을 쓰지 못하며 어쩔 줄 몰랐다. 정사(正使) 황신이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서 향을 피우고 바다에 맹세하면서 입으로 글을 읽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이리와 호랑이가 우글거리는 속에 이미 2년이나 부절(符節)을 가졌는데, 교룡굴(蛟龍窟) 위에 또 다시 8월의 뗏목을 탔도다. 내 몸을 버리는 것도 달갑게 여기므로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맹세하노라. 삼가 생각건대, 나 황신은 판탕(板蕩)한 때를 만나서 나라 위해 일할 것을 다짐했도다. 비록 험조(險阻)와 간난(艱難)은 두루 맛보았으나, 주리(州里)와 만맥(蠻貊)에서 두루 행세할 수 있을까? 다만 일편의 단심이 변함 없으니, 저 하늘에 대질해도 부끄러움이 없도다. 4천 리 먼길이나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수고로움을 꺼리랴? 30년 쌓은 공부가 정히 오늘에 와서 힘을 얻도다. 진실로 나라 일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신하된 도리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랴? 곧장 돛을 달고 멀리 일본(日本) 땅으로 가는 길이로다. 만약 사직을 편히 하고 나라에 이로울 일이라면 죽음도 사양치 않으리로다. 혹시라도 왕명(王命)을 욕되게 하고 처신을 잃게 된다면 살아서 무엇하랴. 삼가 바라건대, 성스러운 신령은 이 지극한 정성을 살피소서.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은 하늘도 아시리니, 만약 일념(一念)에 게으름이 있다면 신령은 어서 나를 죽이소서.”
황신이 이 글을 써서 바다 가운데 던지니, 조금 뒤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고요하여 고래 떼들이 멀리 달아났다. 저녁에 일기도(一岐島)에 도착하였는데, 그 섬은 대마도에서 5백 리 떨어진 곳이며, 둘레가 겨우 대마도의 반쯤 되고 주민이 겨우 백여 호이다. 평행장(平行長)이 부장(副將)을 보내서 명 나라 황제의 칙서(勅書)를 이곳에서 맞이하였다.
○ 19일. 낭고야(郞古耶)에 도착하였는데, 곧 관백(關白)이 병정을 점검하는 곳이다. 산위에 성을 쌓고, 성밖에는 삥 둘러 구덩이를 파고서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 구덩이에 채웠으며, 성안에는 5층 대(臺)를 쌓아올려, 그 만듦새가 극히 정교한데, 이는 왜장(倭將) 정성(正成)의 진영(鎭營)이다. 이때에 정성은 국도(國都)에 가 있고, 그 부장이 대신 지키고 있었다. 사신들의 탄 배가 처음 정박할 때에 갯가를 바라보니, 우리 나라 여인이 자주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일행이 모두 주목하여 보았으나 어떤 사람인지 몰랐는데, 가까이 가게 되어 물어보자,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유 정승(兪政丞)댁 여종으로 왜인에게 잡혀와서 있었는데, 중국 사신 밑에 있는 사람이 은(銀)을 치르고 이곳에 저를 데려다두고, 왜경(倭京)에 갔습니다.”
하니, 상하(上下)가 그를 보고 옛 친지를 만난 듯이 반겼다.
○ 윤8월 4일. 사신 일행이 비로소 녹옥도(綠玉島)에 다다라 선수사(善修寺)에서 묵었다.
○ 7일. 선수사에서 말을 타고 배 타는 곳으로 가는데, 절간 곁에 인가가 매우 많았다. 우리 나라에서 잡혀온 사람이 거의 5천여 명이나 되며, 반 이상이 서울 사람인데, 절문 밖에 둘러서서 사신이 문 밖에 나오기를 기다려 배알하고 통곡하며 큰 소리로 ‘아이고 상전(上典)님, 상전님’ 상전은 우리 나라의 방언에 그 주인을 부르던 칭호 하고 외치는데, 그 소리가 극히 처절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고, 어떤 자는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모두 말의 다리를 붙들고 울다가 갯가까지 따라와서, 배를 타고 떠나가는 것을 보느라고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얕은 물속으로 들어와서 무릎까지 빠지는데도 서서 바라보며 통곡하니, 일행 상하가 다 슬펐다. 저녁에 적간관(赤間關)에 배를 대었는데, 이곳은 해로(海路)의 도회지이며, 일명은 하관(下關)이라 한다. 각처로 가는 배가 모두 이곳을 지나서 가게 되는데, 항구의 형세는 극히 험하나 인가가 조밀하며, 해변에는 두 봉우리가 문같이 마주 서고 그 안에 넓은 평야가 있다. 이곳은 수길(秀吉)이 일찍이 명지(明智)와 싸워서 명지를 죽인 곳이다. 서리(書吏)로 있던 오명수(吳命壽)란 자가 임진년에 포로로 잡혀와서 이곳에 있었는데, 이번에 사신 행차의 배가 왔음을 듣고 사신에게 나와 배알하고 고국을 향한 마음과 고향을 생각하는 슬픔으로 말할 적마다 눈물을 흘렸다. 신분은 비록 미천하나 그 마음씨가 가상하였다. 오명수가 또 말하기를,
“김 목사(金牧使)의 따님이 지극 우창지(右倉地)란 곳에 있는데, 역시 고국이 그리워서 조선 사람을 보고자 합니다.”
하니, 사신이 곧 포수(砲手) 한감손(韓甘孫)을 보내어 그 여인이 있는 곳을 찾아보게 하니, 그 여인이 과연 그곳에 있었다. 여인은 머리는 다북같고 낯에는 때가 끼었으며 떨어진 옷에는 이가 많고 얼굴은 여위어서 차마 볼 수 없는데, 여인이 울면서 한감손에게 말하기를,
“왜적에게 잡혀온 이후로 빗질하고 낯 씻은 적이 없으며 늘 빨리 죽기만 원하였으나 죽지 못하였소. 차고 있는 작은 칼을 뽑아서 두 번이나 목을 찔렀으나 또한 죽지 않았으며, 물에 빠지려 하나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소. 왜(倭)를 위하여 물을 길었으니 고생이 견디기 어려웠소.”
하면서 목찌른 곳을 보이는데 과연 칼자국이 있었다. 한감손이 돌아와서 그 실상을 말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 13일. 황신(黃愼) 등이 수도도(水途島)에서 배로 떠나 우창지로 향하였는데, 중국 사신이 왜국 수도에 먼저 가 있었으므로 차관(差官) 왕륜(王倫)을 보내어 중도에서 맞이하고, 왜장 평행장(平行長)ㆍ정성(正成)ㆍ평의지(平義智)ㆍ아리마(阿里麻) 등이 저마다 부장(副將)을 보내어 와서 맞이하여 배에서 내려 본련사(本連寺)에 가서 유숙하였다. 이곳에도 잡혀온 우리 나라 여자가 있어, 왜인 아이를 시켜 글을 보내왔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조선국 사신 일행께 공경히 글을 올립니다. 저는 전 영천 군수(榮川郡守) 김모(金某)의 딸인데, 처음 왜란이 났을 때에 적에게 잡혔으되 죽지 못하고 질긴 목숨이 오늘날까지 이미 5년을 끌어왔습니다. 이제까지 욕을 참고 죽지 않는 뜻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니 꼭 한번 만나보고 이 같은 슬픔을 다 털어놓은 뒤에 죽었으면 한이 없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매양 이러한 심정을 주인 왜(倭)에게 간곡히 빌었더니, 그도 이미 허락하였습니다. 이제 다행히 사신 행차가 마침 이때에 이곳에 오셨으니, 이는 하늘이 돌아갈 길을 터주신 것이며, 곧 제가 재생할 기회입니다. 만번 바라건대, 여러분께서 저의 슬픈 정상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데려가 주신다면 사포(沙浦)에 나가서 기다리겠으며, 혹시 중도에서 좇아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왜인 아이가 이 편지를 올리면서 말하기를,
“김씨가 날마다 울면서 주인에게 본국에 돌아가서 죽게 해달라고 청하니, 주인도 역시 슬프게 여기고 저를 시켜 이 편지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데려가신다면 주인이 돌려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니, 정사(正使)가 역관으로 하여금 답장을 쓰게 하여 데려갈 뜻을 일렀다.
○ 18일. 계빈(界濱)에 도착하니, 평행장과 평의지가 저마다 소장(小將)을 보내서 맞이하고, 두 중국 사신도 와서 황제의 칙서를 바닷가에서 맞이하였다. 중국 사신 심유경(沈惟敬)은 먼저 가정(家丁) 한 사람을 보내와서, ‘일행이 육지에 내릴 때에 풍악을 울리면서 앞에서 인도하여 그치지 않으니, 체면이 없는 일이다.’고 하였다. 사신이 육지에 내려서 황제 칙서를 모시고 중국 사신 양방형(楊邦亨)의 아문(衙門)으로 나아가서 양 천사(楊天使)를 뵈니, 양 천사가 읍하고 당(堂)에 올라가서 배례(拜禮)를 마치고 나서, 웃으면서 황신에게 말하기를,
“끝내 이번 걸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면 왜 우리와 함께 오지 않았소.”
하자, 황신이 대답하기를,
“그때는 아직 국왕의 명령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제야 쫓아왔습니다.”
하니, 양 천사가 말하기를,
“우선 객관에 돌아갔다가 다음날 여가에 다시 만나 이야기합시다.”
하였다. 황신이 물러나와서 부사(副使) 박홍장(朴弘長)과 함께 중국 사신 심유경의 아문에 가니, 심 천사가 양 천사의 아문에서 막 돌아왔다. 두 사신이 배례하기를 청하니, 심 천사가 말하기를,
“이미 양 사신의 아문에서 봤으니, 예를 생략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으나, 황신이 대답하기를,
“양 노야(楊老爺)의 아문에 나가서는 양 노야를 위하여 예를 행하고, 노야의 아문에 와서는 노야를 위하여 예를 행하는 것이니, 지금 예를 올리지 않으면 매우 옳지 않습니다.”
하니, 심유경이 절을 받고, 돌아서서 읍을 하고서 내청(內廳)으로 맞아들여 차를 함께 마시면서, 오는 동안 접대하는 예절들이 어떻더냐고 물었다. 황신이 자세히 대답하고 나서 묻기를,
“심 천사는 근래의 사정이 어떠하십니까?”
하니, 심유경이 대답하기를,
“별로 다른 일은 없고, 다만 황제의 칙서와 조선 사신들을 기다렸는데, 이제 모두 왔으니, 일이 결말이날 터이지요.”
하였다.
황신 등이 물러나와 상락사(上樂寺) 중방(中房)에 들었다. 절은 큰 저자 가운데에 있어서 한 동리를 뻗쳤는데 소위 중방이라고 하는 것은 절 서쪽에 있는데, 기둥과 들보를 모두 전나무로 하고 동석(銅錫)으로 꾸며, 청사(廳舍)가 아주 정결하나, 온돌방이 없고 마루방 뿐이어서, 거기에 거처하자니 처음에는 아주 불편했는데, 오랜 뒤에는 익숙해졌다. 여러 왜인의 말에 의하면, 지난 달 초여드레에 일본 국도 근처의 여러 고을에 지진이 일어나서 없는 날이 없이 계속되어, 관백(關白)의 거처하는 집도 다 허물어졌는데, 관백이 5층 누상(樓上)에 있을 적에 뜻밖에 지진이 일어나서 무너져 내려, 그 안에 있던 궁녀 4백여 명이 다 깔려 죽고 관백만 겨우 면하였다. 두 중국 사신이 들어 있는 집도 무너졌는데, 중국 사신들은 부축되어 나와서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나, 양 천사 밑에 있던 천총(千摠) 김가유(金嘉猷)와 심 천사 밑에 있던 주벽(朱璧) 및 가정(家丁) 4명이 다 죽었다.
또 풍외주(豐外州) 지방에 지진이 더욱 심하였는데, 3~4천 호쯤 사는 어느 큰 마을은 그 땅이 갑자기 빠져서 큰 못이 되어, 산위의 큰 소나무만이 겨우 그 끝가지가 보였으며, 그 마을에 살던 자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빠져 죽은 자가 몇천 명이고, 살아남은 자가 겨우 5~6백 명인데 막 빠져 내려갈 때에 마치 무엇이 들어서 던지는 듯하더니 부지불식중에 이미 봉우리 위에 있게 되어 살아났다고 한다. 사신들이 지나온 곳에도 지진을 치룬데가 있었는데, 산등성이 모두 갈라지고 곳곳에 땅이 빠져서 웅덩이나 못이 되어 있었다. 여러 왜인들의 말에 의하면, 땅이 갈라진 곳에는 모두 팥죽같은 흐린 물이 나왔는데, 그 냄새가 아주 나빠서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하며, 또 털이 비 내리듯한 변이 있었는데, 그 털이 다섯 가지 빛깔이었으며 그것을 갖다둔 집도 있다고 한다. 왜인들이 흔히 말하기를, ‘이는 근고(近古)에 없던 변이니 일본에 앞으로 어떤 변이 있으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홀로 잡혀가 있는 우리 나라 사람 염사근(廉思謹)이 말하기를, ‘일본이 큰 바다 가운데 있어 지진의 변은 옛날부터 있는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니, 염사근은 곧 왜학 생도(倭學生徒)로서, 복건순무어사(福建巡撫御史) 유방예(劉芳譽)가 이른바, 수재(秀才) 염사근이란 사람이다.
이 사람은 그 아비 염해일(廉海逸)이란 사람이 젊었을 때에 친구 한 사람과 형제처럼 친히 지내다가 그 사람이 죽고 자식도 없으며, 그 아내가 아름답고도 젊었는데, 친척이 별로 없고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염해일이 힘을 다하여 초상을 치루어 주니, 그 아내가 그 은혜에 감격하여 친척과 다름없이 대접하였다. 그래서 염해일이 그녀와 몰래 통하게 되어 그 집에 출입하였는데, 매양 그 남편의 궤연(几筵)이 있는 방안의 병풍 뒤에 숨어 있었고, 그 아내는 조석으로 친히 음식을 차려 죽은 남편에게 제를 올리면서 지극히 슬피 울고, 제를 다 지낸 뒤에는 그 자리에서 그 음식을 먹으며 ‘차마 죽은 남편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밥과 국을 가만히 병풍 너머로 염해일에게 주었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대낮에 교합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밤새도록 나오지 않으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살아 있을 때처럼 죽은 남편 곁에서 잔다.’고 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정은 더욱 깊어져서, 뒤에는 거리낌없이 방종하다가, 종들에게 들켜서 법사(法司)에 고발되니, 법사가 그 죄를 다스리고서 놓아주었다. 그래서 부부가 되어 염사근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이 서울에 들어오자 사근이 곧 그 누이동생을 왜장 장성(長成)에게 바쳤는데 장성은 곧 관백이 친히 신임하는 장수로서 창동(倉洞)에 와서 있던 자이다. 염사근이 그 어미와 누이동생을 데리고 장성을 따라서 바다를 건너 일본에 와서 바야흐로 병고관(幷古關)에 살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 나라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 곧 와서 사신을 뵙고서 그 말하는 것이 장황하고 허풍이 많았는데, 겉으로는 고국을 생각하는 체하나, 속으로는 실로 일본을 위하는 것이어서, 그 정상이 지극히 통탄스러웠다. 어느 날 밤에 황신이 집에 돌아갈 징조인 꿈을 꾸고서, 아침에 일어나 시 한 구를 종이에 써서 책상 위에 두었다.
몸은 이미 나라에 바쳤건마는 / 已將身許國
꿈엔 아직 집으로 돌아가누나 / 猶有夢還家
이날 천총(千摠) 왕륜(王倫)이 와서 보고 크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우리 집은 더욱 멀어서, 꿈에도 못 가는구나!”
하였다.
○ 21일. 중국 사신 심유경을 가서 보니, 심유경이 맞아들여서 좌정하고 조용히 대화하였는데, 자기의 전후 사적(事蹟)과 우리 나라에서 박대한 일을 말하면서 자못 한스러운 뜻을 표하였다. 황신이 두세 번 물러가겠다고 청하였으나, 심유경은 번번이 만류하며 황신에게 말하기를,
“이 땅에는 근래에 지진의 변이 없는 날이 없이 일어나, 급히 이곳을 벗어나서 압사(壓死)를 면해야 하겠소.”
하니, 황신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하늘이 일본을 미워하여 이런 변으로써 보여주는 것이므로 조선에는 관계가 없으니, 배신(陪臣)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심 천사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는 하늘이 하는 일이나, 내 신상으로 말하면, 길한 데로 나아가고 흉한 것을 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중국 사람도 역시 죽은 자가 많이 있으니, 삼가야 할 것이오.”
하고, 또 말하기를,
“배신(陪臣)은 여기에 있으면서 별로 일이 없을 터이니, 여가 있는 날이면 자주 와서 이야기합시다.”
하였다. 황신이 작별하고 객관으로 돌아갔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시는 전해지지 않음.
이날 왕 천총(王千摠)이 황신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조선은 이번 전란에 피폐해졌다고는 하나 오히려 부실(富實)하다 할 만하고, 왜국은 겉으로는 부실한 것같으나 속으로는 실상 가난하여, 근래에 공급하는 데에 지쳐서 앞으로 지탱하지 못할 상태인 것같다.”
하였다. 그때에 또 사로잡혀 온 우리 나라 부녀 7명이 오사포(五沙浦) 왜장(倭將) 중세(重世)의 집에 있으면서 각기 편지를 보내왔다. 그중 한 장은 곧 서울에 살던 사대부 집안의 딸의 것인데, 사연이 처절하며 사리에 통달하였으나, 그 죽지 못하고 그 몸을 욕되게 하였으니 아까운 일이다. 그 편지는 이러하였다.
“저는 아무 고을 아무 마을에 사는 성은 아무이며 이름은 아무인 자의 딸입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부모를 따라 피란하였는데, 부모는 매양 저의 손을 잡고 울면서 ‘내가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우리 딸을 어쩔거나?’ 하고는 마주앉아 통곡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못했으나 속은 도려내는 것같았으며, 속으론 생각하기를, ‘살아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할 것이라면, 어찌 빨리 죽지 않고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랴?’ 하였더니, 뜻밖에 적병이 산골짜기를 더욱 급하게 수색하여, 저와 부모는 각기 달아나 숨었는데 하루아침에 독수(毒手)에 잡혀서 스스로 죽지 못하였고, 서로 헤어진 뒤로는 영영 끊어졌으니, 소식인들 어찌 통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여! 하늘이여! 저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저로 하여금 이처럼 애통하고 처참하게 합니까? 부모가 죽었으면 그만이지만, 혹시라도 지금까지 살아 계신다면, 그 연모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어느 때인들 그치겠으며, 천지간에 어찌 이처럼 애통하고 가엾은 일이 있겠습니까? 남의 나라에 붙들려 있은 지 이제 다섯 해인데, 구차히 목숨을 보존하고 스스로 죽지 못하는 것은, 다만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서 우리 부모를 다시 보려는 것, 오직 이 희망뿐입니다.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면 부모가 살던 집이라도 한번 봤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나 밤마다 달이 밝을 때는 하늘을 향하여 축원하며 해와 달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 다시 우리 부모를 뵐 수 있을까? 부모는 지금 어느 곳에 계실까? 이때 부모께서 나를 생각하는 정은 반드시 내가 부모를 사모하는 정과 같을 것이다. 하늘이 반드시 나의 이 뜻을 살펴주신다면 어찌 살아 돌아가서 만나뵐 때가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되어 통신사(通信使)가 명 나라 사신을 따라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니, 이는 내가 다시 살아나는 날이며 하늘의 뜻이 과연 사람의 정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구출하여 주시는 은덕을 입어 우리 고향에 돌아가서 부모와 만나보게 된다면 이는 참으로 나를 낳아준 은혜와 다름이 없으며, 제가 비록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섬길지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겠습니다. 또 들으니, 사로잡혀 온 사람이 이번 사신의 행차에 따라서 돌아가는 자가 많다 합니다. 저는 하나의 버림받은 인간이므로, 고국에 돌아간다 할지라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부모를 한번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니, 그뒤에는 바로 죽어도 마음이 달갑겠습니다. 다행히 저의 불쌍한 정상을 살펴주시기를 천만번 바라는 바입니다.”
일행들이 이 편지를 보고서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고, 눈물까지 흘리는 자도 있었다. 어느 날 4경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소리가 천둥같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였다. 지붕의 기와가 흔들리고 집이 기울어질듯하여 사람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였다. 정사(正使)는 옷을 몸에 감고 방밖에 나와 서고, 군관(軍官)들도 놀라서 잠꼬대하듯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났다. 역관(譯官) 이유(李愉)는 두 손을 공중으로 높이 들고 달음박질로 나갔으니, 집이 넘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역관 이언(李彦)은 달아날 때에 병풍에 깔렸는데, 그는 집이 무너져서 자기 몸 위에 누르는 것으로 여기고, 사지(四肢)를 약간 움직여서 참말 죽는 것인가 아닌가를 살펴보고, 비록 집에 깔리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겠다고 속으로 기뻐하였다 했다. 군관 김경원(金敬元)은 본래 겁이 많았는데, 놀라서 뛰어나올 때에 큰 문을 미처 열 겨를이 없어 작은 들창으로 나왔다. 그 나라 들창에는 모두 동사(銅糸)로 그물같이 짜서 붙였는데, 황급한 때이므로 그리로 튀어나온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자가 이 들창으로 뛰어나왔는지 몰라서 여러 사람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는데, 그 들창에 양가죽 한 조각이 뚫어진 동사 위에 걸려 있었으므로 김경원이 그 구멍으로 나간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는 김경원이 평상시에 양모 갖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관백이 산성주(山城州)에서 중국 사신과 만나려고 하였는데 지진 때문에 관사(館舍)들이 다 허물어졌고 오는 초하루 일본 초하루는 곧 우리 나라의 초이틀이었음 에 오사포(五沙浦)에 와서 중국 사신을 보려 하였다.
○ 29일. 평조신(平調信)이 역관 박대근(朴大根)을 불러서 말하기를,
“평행장(平行長)과 정성(正成)이 관백의 처소로부터 와서 관백의 말을 전하기를, ‘내가 중국과 통하려 하는데 조선이 중간에서 저해하여 사정이 통하지 못하게 되었고, 두 나라가 전쟁한 뒤에는 심 유격(沈游擊)이 두 나라로 하여금 서로 좋게 하려 하였으나 조선이 일본과 화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명 나라에 상주하였고, 또 심 유격이 우리 나라와 마음을 같이 한다 하여 매양 미워하였다. 중국 사신 이종성(李宗誠)이 도망갈 때에도 조선 사람들이 또한 그를 선동하여 도망하게 하였으며, 이번에 중국 사신이 바다를 건너온 지 오래되었는데 조선 사신은 이제야 뒤쫓아오고 또 왕자(王子)도 보내지 않으며, 일마다 나를 속이니 이런 조선 사신은 접대를 하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먼저 중국 사신을 본 뒤에는 조선 사신을 구류해 두고서 병부에 품첩(稟帖)하여 그들이 뒤에 온 까닭을 물은 뒤에 그 사신을 보내겠다.’ 하였소. 큰일이 거의 다 이루어지다가 이렇게 순조롭지 못하니, 나는 매우 근심이 되오. 반드시 이런 뜻으로 사신에게 자세히 고하여 급히 심 천사(沈天使)를 만나 상의하여 잘 말을 해서 관백의 노여움을 풀게 한 뒤에 양 천사(楊天使)와 같이 가서 보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이날 저녁에 평조신이 또 요시라(要時羅)를 보내어 박대근에게 이르기를,
“심 노야(沈老爺)는 내일 이른 아침에 가서 관백을 만나 보려고 행장(行長)과 정성(正成)을 먼저 보내어 이 뜻을 관백에게 말하도록 하였는데, 회보가 온 뒤에 심 천사(沈天使)가 친히 가서 볼 것이오.”
하니, 황신이 박대근을 시키자 박대근은 자기 의사로 대답하기를,
“오늘 낮에 이 뜻을 사신에게 보고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나는 부산서 떠날 때부터 세 가지 계책을 정하였다. 화의(和議)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면 조사(詔使)의 뒤를 따라서 갔다 오는 것이 한 가지요, 화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1년이나 2년을 또는 10년이 될지라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한 가지요, 만일 성을 내어 일이 예측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면 죽는 것도 피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다. 전부터 이미 이런 일이 꼭 있을 것을 짐작했으므로 별로 두려운 생각은 없다. 심 천사(沈天使)도 꼭 가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하는 대로 맡겨두는 것이 좋다.’ 하였소. 이것이 사신의 의사요.”
하였다. 요시라는 이 말을 듣고서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돌아갔다.
○ 9월 1일. 아침에 역관 이유(李愉)를 보내서 심 천사의 아문(衙門)에 가서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심유경(沈惟敬)이 이유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 일을 위하여 오사포(五沙浦)에 가서 관백(關白)을 만나보려 한다. 관백은 별로 다른 뜻은 없을 것이고 다만 너희들이 우리보다 뒤에 왔다고 말하는 모양이나 별일이 있겠는가? 안심해도 된다. 어제 정성(正成)ㆍ행장(行長)ㆍ평조신(平調信) 등이 나 있는 곳에 와서 많은 얘기가 있었으나 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조선에서 온 배신(陪臣)은 앞서 나를 따라 부산(釜山)과 웅천(熊川)에 오래 같이 있던 사람이다. 다른 배신들은 다 두려워하며 감히 왜영(倭營)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나 이 배신은 유독 나서서 나를 따라 왜영에 들어왔다. 이 노야(李老爺)가 뛰어간 뒤에 인심이 흉흉하여 근거없는 말이 많이 떠돌았으되 이 배신은 그런 것을 돌아보지 않고 들어온 것은 너희들도 상세히 아는 일이다. 이번에도 자기 몸은 돌보지 않고 바다를 건너서 왔으니, 본래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이 비록 말로 협박할지라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니 세 왜인이 크게 웃고 갔다. 정성이 또 나에게 말하기를, ‘이는 노야(老爺)의 임무이니, 잘 말해서 해결하여야 합니다. 노야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일이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니, 우리들은 다시 더 힘쓸 여지가 없습니다.’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다시 더 말하지 말라. 내가 이미 조선 일을 관장하고 있으니, 내가 주선하지 않으면 누가 이것을 맡아서 하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하였다. 이날 오후에 행장 등이 관백의 처소로부터 와서,
“관백은 반드시 두 중국 사신을 먼저 보고나서 조선 사신 보기를 허락할 것이다.”
하였다. 평조신이 와서 황신을 보고 말하기를,
“오늘 두 중국 사신이 관백을 먼저 가서 보게 되었는데, 관백은 우리들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부르므로 나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신과 관백이 서로 회견한 뒤에는 조선 일을 의논하게 될 것이니, 내가 반드시 먼저 와서 사신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고, 또,
“심 노야(沈老爺)는 중국의 일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에 관한 일이 만약 결말이 없으면 이 역시 중국의 일도 결말이 없는 것이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날 저녁에 두 중국 사신이 오사포(五沙浦)로 떠났다.
○ 2일 요시라(要時羅)가 와서 말하기를,
“지금 평조신(平調信)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관백이 중국 사신과 서로 만나서 크게 기뻐하였으니, 하루만 더 머무른다면 내일은 반드시 조용히 담화가 있을 것이다. 내가 확실한 말을 자세히 듣고서 즉시 먼저 와서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4일. 두 중국 사신이 오사포(五沙浦)로부터 돌아오고, 평조신도 중국 사신을 따라갔다 와서 박대근(朴大根)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제 심노야(沈老爺)를 두 번이나 보고서 조용히 관백의 노여움을 풀도록 권하라고 말하였으나 심 노야는 이틀 동안 잇달아 관백과 회담하면서도 한 마디도 언급함이 없으니, 나는 매우 개탄하였소. 중국 사람들이 겁이 많아서 관백을 이렇게 두려워하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오. 행장과 정성은 심 노야에게 말하기를, ‘조선 사신의 일에 관해서는 다시 제기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노야가 사신에게 진정서(陳情書)를 써오게 한 다음 노야가 그것을 관백에게 보이고서 말을 만들어 권해 보면 혹 해결될 것같다.’ 하였다 하오.”
하니, 박대근이 말하기를,
“진정서를 내는 일은 사신이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오.”
하자, 평조신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관백을 봉(封)하려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인가? 그 본의가 조선을 구제하려는데 있으니, 조선 일이 순조롭지 않으면 중국 일도 결말이 없을 것인데 심유격이 어찌 이렇게 하고 말겠는가? 이 일을 결말짓고서야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될 것이오. 내가 두 중국 사신을 보고 상의하면 반드시 일이 성취될 것이오.”
하였다. 오시쯤에 왕 천총(王千摠)이 와서 심 유격의 말을 전하기를,
“어제 관백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3~4년 이래로 제법 공로가 있었다. 애초에 내가 중국 조정에 봉해 주기를 청하려고 조선으로 하여금 상주하게 하였으나 조선이 듣지 않았고, 또 길을 빌려서 공물을 통하려 하였으나 조선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는 조선이 나를 매우 업신여긴 것이다. 이때문에 병력을 동원하여 서로 싸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뒤 노야(老爺)가 왕래하면서 화해하기를 힘껏 주장하였으나, 조선은 그것을 불가하다고 극언하였으며, 소서비(小西飛)가 갔을 때에도 중국에 군대를 동원하기를 주청하였다. 심 노야(沈老爺)가 올 때에 조선 사신이 같이 오지 않았고, 양 노야(楊老爺)가 올 때에도 같이 오지 않고 뒤늦게 이제야 왔다. 내가 일찍이 두 왕자를 본국에 돌려보냈는데, 큰 왕자는 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작은 왕자는 와서 사례하여야 할 것인데, 조선에서는 끝내 들여 보내지 않으니 나는 진실로 매우 화가 난다. 이제 조선 사신을 본들 무엇하겠는가? 가든지 있든지 저희들 하는 대로 맡겨두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내가 재차 말하기를 ‘네가 이미 봉을 받았으니 이는 중국의 번국(藩國)이므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된다. 이뒤로는 서로 좋게 지내고 지나간 원망은 생각하지 말라.’ 하였고, 양 노야도 재차 화해할 것을 권하였소. 나는 그가 성이 풀리기를 기다려 다시 잘 일러주어 끝내 일을 완성시키고 돌아갈 것이니 사신은 안심해도 좋소. 내가 이번에 일본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일을 위하여 온 것이니, 만약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에는 내가 배신(陪臣)과 같이 이 땅에 머물러서 반드시 성사되게 할 것이다. 이 뜻을 사신에게 말하라.”
하였다. 중국 사신 양방형(楊方亨)이 또 박의검(朴義儉)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제 관백이 너희 나라에 대한 일을 많이 말하였으나 심 노야가 반드시 잘 처리했을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
하였다.
○ 5일. 아침에 정사(正使)와 부사가 심유경(沈惟敬)의 아문(衙門)에 가니 관백이 중 셋을 보냈는데, 다 관백이 신임하는 자이며, 그중에도 현이(玄以)란 자가 가장 힘을 쓰는 자이다. 세 중이 심유경을 보고서 나가는데 행장(行長)과 정성(正成) 등이 손으로 바짓자락을 걷어올려 두 다리가 드러나게 해서 가마 앞으로 뛰어가서 배웅하되 세 중은 가마 위에서 꼼짝하지도 않고 앉아 있으니, 왜인들이 중을 존경함이 이와 같았다. 사신들이 심 천사에게 보기를 청하였으나 심 천사는 만나주지 않고 역관 이유(李愉)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록 배신(陪臣)을 만나보지는 않았으나 배신이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뜻은 이미 알고 있다. 어찌 반드시 만나보아야 하겠는가? 나의 이번 걸음은 오로지 조선의 일을 처리하려는 것인데, 더구나 배신은 나와 함께 1년이나 같이 지낸 처지라서 다른 사람과 사이가 자별한데, 내가 어찌 버리고 먼저 돌아가서 돌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것은 또한 작은 일이고, 국가의 큰일이 나의 몸에 달렸으므로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배신은 우선 기다리라. 내가 잘 요령껏 처리하여 반드시 일이 되게 할 터이니 안심하고 지나치게 근심하지 말라.”
하니, 황신(黃愼) 등은 그대로 돌아왔다. 저녁에 평조신(平調信)이 사람을 보내서 말하기를,
“심 노야가 관백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행장(行長)과 정성(正成)을 조선에서 철병(撤兵)할 것과 조선 사신을 접견할 것을 허락하라는 일을 가지고 관백의 처소에 보냈으니, 내일 오후에는 회보가 있을 것이오.”
하였다.
○ 6일. 밤중에 평조신이 와서 황신을 보고 말하기를,
“오늘 낮쯤에 행장과 정성ㆍ삼성(三成)ㆍ이장(二長) 등이 오사포(五沙浦)로부터 와서 관백의 말을 전하기를, ‘중국에서는 사신을 보내서 나를 왕으로 봉하니, 영광이기는 하지만 조선이 무례하므로 화의(和議)는 허락할 수 없고 다시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철병(撤兵)할 리가 있겠는가? 중국 사신은 오래 머물러도 무익하니, 내일 배를 타고 떠나감이 좋겠고, 조선 사신도 보내줄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군대를 모아서 올해 안에 조선으로 향할 것이다.’ 하였으며, 또 들으니, 이미 청정(淸正)을 불러서 다시 조선에 쳐들어갈 계책을 의논하였다 하니, 청정이 만약 뜻을 얻게 되면 일이 더욱 난처하게 될 것이므로 행장이나 우리들은 다만 죽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평조신이 또 말하기를,
“내가 관백을 처음 만나보니, 관백이 조선은 어째서 왕자(王子)를 보내지 않느냐고 물으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왕자는 나이 어리고 또 임진년(1592, 선조 25)에 북방에 가서 일처리를 잘못한 탓으로 크게 인심을 잃어서 그 지방 병정들에게 잡혀서 항복까지 했으므로 국왕이 논죄(論罪)하여 멀리 귀양가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다 합니다. 지금 조선에서 일본에 보내온 사신은 그 벼슬 또한 높은 자입니다. 조선에서는 일본을 두려워하여 다 말하기를, 사신이 만약 가게 되면 반드시 죽이거나 또는 잡아두고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여, 모두 싫어하여 피하고 있는데, 이 사신만은 옛날부터 남의 나라 사신을 죽인 나라는 없었으니, 일본이 비록 강하기는 하나 결코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고서, 자청하여 온 것이다.’ 하였더니, 관백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사신을 속히 보고 중국 사신과 같이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고서, 곧 붓을 잡아 사신의 사관을 써서 배정하였는데, 양 천사(楊天使)는 사강(沙康)의 집에, 심 천사(沈天使)는 평수가(平秀嘉)의 집에, 조선 사신은 가하수(賈賀秀)의 집에 들게 하려고 미리 집 수리도 하게 하고 또 서로 만날 날짜도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갑자기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마음이 변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는 관백의 노여움이 폭발하였고 거기에 또 청정(淸正)이 찬조하고 있으므로 큰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에 행장(行長)이 장성(長成)에게 이르기를, ‘나는 3~4년을 두고 이 일을 힘써 주장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배를 찔러 죽을까 한다.’ 하니, 장성이 ‘그럴 것까지야 있나, 우리들 마음 또한 한스러우나 말할 수 없으니 지극히 답답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평조신이 또 말하기를,
“사신이 반드시 사정을 먼저 알아두고자 하니, 만약 내보낼 사람을 정한다면 내가 가벼운 배를 몰래 보내겠습니다. 심 천사(沈天使)와 상의하여 그때 같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황신이 말하기를,
“내가 국왕의 명을 받들고 와서 아직 국서(國書)도 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자, 조신이 말하기를,
“관백이 처음에는 중국 사신을 보고 기뻐하다가 화가 난 뒤로는 또한 빨리 중국 사신을 돌아가게 하니, 사신만이 홀로 머무르고자 하나 어찌 되겠습니까? 내일 내가 사신을 모시고 부산까지 가겠습니다.”
하였다. 관백이 성을 낸 뒤로는 여러 왜인들이 관백이 장차 사신을 잡아 가두고자 한다 하기도 하고, 사신 일행을 다 죽이려 한다 하기도 하고, 사신이 낭고야(郞古耶)에 가면 잡아 갇히게 될 것이라 하기도 하여, 자못 근거없는 뜬 소문이날로 퍼지니, 일행의 마음이 동요되어 두려워하였다. 포로로 잡혀가 있는 사람들도 제각기 들은 말을 와서 전하는데, 그중에 군관(軍官)들과 동향 사람이라는 자가 또 와서 서로 고하여 손을 잡고 울고 있고, 그중에 담이 작고 겁이 많은 자들은 여기저기서 울고만 있었다. 역관들처럼 사정을 잘 아는 자는 동요하지 않으나 군관들은 모두 경상도 사람으로 무지하고 무식하여 일의 형편을 잘 모르므로 이렇게 가벼이 동요한 것이다. 황신이 여러 군관들을 불러서 깨우쳐 주기를,
“너희들은 다 영남 사람이다. 영남 사람들은 첫 번째 임직왜란에 거의 죽었고, 두 번째로는 갑오년(1594, 선조 27) 흉년에 죽었고, 세 번째로는 을미년(1595, 선조 28) 염병에 많이 죽었으니, 너희들이 그때에 죽지 않은 것만도 이미 다행이었다. 가령 너희들이 오늘날 여기서 죽는다 하여도 이는 먼저 죽은 사람들보다는 뒤에 죽는 것이고, 또 기왕 죽으려면 차라리 나라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영광이 아니겠느냐? 하물며 지금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염려도 없는데 어찌하여 이같이 겁을 먹어 나라의 체면을 손상하여 적국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가? 참으로 이런 일이 있다면 먼저 나에게 미칠 것이니, 나도 아직 움직이지 않는데 너희들이 어찌 그렇게 법석을 떠는가? 지금은 우선 용서하나 뒤에 또 이런 행동이 있으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군관들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이 뒤로는 감히 이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염사근(廉思謹)이 장성(長成)의 집에서 와서 사신에게 말하기를,
“어제 장성이 저에게 말하기를, ‘조선 사신은 본래 고관대작으로 있던 사람이 아니니, 정사(正使)는 전에 낭관(郞官)으로 심 유격(沈游擊)을 따라서 부산에 있던 자이다. 관백이 왕자도 오지 아니하고 사신도 벼슬이 낮은 자이므로 더욱 조선의 무례함에 성이 났다.’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신을 찢어 죽이고 일행을 잡아 가두려 하는 것을 자기가 삼성(三成)과 같이 말리기를, ‘이는 사신이 알 바가 아니며 또 옛날부터 남의 나라 사신을 죽인 나라는 없으니, 만약 그렇게 되면 뒷일이 영영 끊어질 것이다.’ 하니, 관백도 그렇겠다고 답하였다. 청정(淸正) 또한 이미 관백에게 하직하고 물러갔는데, ‘만약 행장을 꾸려서 가려면 반드시 빨리 가지는 못할 것이다. 겨울 안에 조선으로 떠나는 것은 정해진 일이고 큰 병력은 명년 2월에나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 8일. 황신 등이 양방형(楊邦亨)의 아문(衙門)에 나가서 건의하기를,
“배신들이 당초에 국왕의 명을 받고 노야를 따라올 적에 한결같이 노야의 지휘를 받고 갔다 오라는 하교가 정녕 귀에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노야께서 떠나려 하신다 하니, 배신들은 또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양 천사(楊天使)는 말하기를,
“나는 오늘이나 내일쯤 배에 오를 것이니, 배신들도 행장을 꾸려서 우리를 따라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황신이 대답하기를,
“배신들이 왕명을 받들고 이곳에 온 것은 관백에게 국서(國書)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만약 왕명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국왕께 회보할 말이 없습니다. 배신이 왕명을 받들고서 일을 옳게 못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죽고자 합니다.”
하였다. 양 천사가 말하기를,
“만약 관백에게 국서를 전하였는데, 관백이 그 국서를 찢어서 던지고 사신에게 욕을 보였다면 죽어도 가하거니와 지금 배신은 국서를 받들고 왔는데 관백이 받지 않으니, 다만 그대로 돌아가서 국왕의 앞에 올리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배신이 우리 일행을 따라왔으니, 우리들이 돌아가면 배신도 역시 따라서 환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니, 이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죽는다는 것은 필부(匹夫)의 용기입니다. 만약 당연히 죽어야 될 경우라면 내가 어찌 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헛되이 죽는 것은 무익하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니, 황신이 말하기를,
“노야는 이미 황제의 칙서를 반포하였고 또 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봉직(封職)한다는 식전(式典)도 전하였으니, 이것으로 중국 조정의 할 일은 이미 마쳤지만 배신 등은 아직도왕명을 전하지 못하고 장차 빈손으로 환국하게 되므로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양 천사는 말하기를,
“중국 조정의 일을 이미 마쳤다고 하지 마오. 내가 이미 황제의 칙서를 전하고 금인(金印)도 주었으나 아직도 감사하다는 표문(表文)이 없으니, 중국 조정의 일도 역시 끝맺지 못한 것이오. 도리어 그대들처럼 아직도 국서를 자기 신상에 완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만도 못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더할 수 없는 치욕을 받은 것이오. 그대들이 비록 이 땅에 10년을 머물러 있는다 해도 일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고 그대들 3백 명이 다 죽는다 해도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우리를 따라 돌아가서 같이 국왕 앞에서 의논하고 중국 조정에 명백히 사연을 상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명백히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큰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 등이 작별하고 물러나와서 또 심유경(沈惟敬)의 아문에 가서 보고 건의하기를,
“배신 등이 국왕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와서 오로지 두 노야(老爺)만 믿는데 이제 일이 이렇게 되어 끝맺지 못하였으니, 배신은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심 천사(沈天使)가 말하기를,
“일의 형편상 돌아가게 되었으니 배신도 역시 이 뜻을 알고서 행장을 꾸려놓고서 기다리시오. 비유한다면 손님이 어느 집 문앞에 왔는데 주인이 영접하지 않는다면 어찌 억지로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관백의 하는 짓이 매우 악독하니 호의로써 대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이 우물 위에 있어야 바야흐로 우물 안의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우리도 같이 우물 속에 있으니,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다만 빨리 돌아가서 이 일을 다사 의논해야 하겠으니, 배신도 따라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황신 등은 하직하고 사관으로 돌아와서 상하가 서로 의논하고 돌아갈 행장을 꾸렸다. 이날 저녁에 평조신이 와서 황신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사신을 모시고 이곳에 왔다가 뜻밖에 관백의 성냄을 만나서 사신이 그저 왔다가 그저 돌아가게 되니, 나는 부끄럽습니다. 이번 일이 이렇게 된 데 대하여 청정(淸正)만이 기뻐할 뿐, 그 밖에 삼봉행(三奉行)이하가 모두 한탄합니다. 이제 들으니, 청정이 관백에게 말하기를, ‘애초에 나의 계교대로 왕자를 돌려주지 않았으면 조선이 우리를 이와 같이 업신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다시 간다면 내가 조선으로 하여금 왕자를 보내어 와서 사과하도록 할 것이고, 조선이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두 왕자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하므로, 관백은 이미 청정 등 5명의 장수를 먼저 가게 하고, 대군(大軍)은 뒤에 바다를 건너간다고 합니다. 사신의 돌아가는 행차가 청정보다 앞서 갈 듯하니, 반드시 본국에 먼저 보고되어 대책을 세울 것입니다마는 청정의 사람됨이 성품이 다른 사람과 다르므로 만약 이런 기미를 알아 더 빨리 가서 교전하려 한다면 형세가 미리 주선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사신이 지금 권도(權道)로 말을 꾸며서 왕자를 보내겠다고 허락하여, 군대의 출동을 늦추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황신이 대답하기를,
“왕자는 결코 올 수 없소. 그대도 우리 나라 사정을 알고 있으니, 우리 국왕께서 왕자를 보내지 않을 것은 그대가 잘 아는 바인데, 이러한 말을 하는가? 또 우리 나라 제도에 왕자는 존귀하기는 하나 다만 국록(國祿)을 먹고 있을 뿐 직책은 관장한 것이 없소. 그러므로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하나도 아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외국에 나가는 일은 그 임무가 지극히 중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나이 젊은 왕자가 사무를 잘 모르는데 어찌 멀리 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소? 이 일을 아무리 말해도 무익하니, 사신은 차라리 여기서 죽을지언정 이런 말을 입으로 낼 수 없소.”
하였다. 평조신이 말하기를,
“나도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으므로 앞서부터 사신에게 감히 말을 못하였습니다. 이 일은 다만 사신만이 감히 입밖에 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조정에 있는 많은 사람도 다 감히 입밖에 내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니, 모름지기 국왕께서 자애심을 참고 은의를 끊어서 백성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나가셔야 이 일이 성사가 될 것입니다. 내가 요즘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봐도 다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만약 관백이 사신을 만나보고 이로 인하여 군대도 철수한다면, 조선에서 1년에 한번이나 또는 2년에 한번씩 사신을 보내고, 예물도 그 수량을 정해서 규례를 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다지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니, 사신이 편의로 허락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황신이 대답하기를,
“일본이 참으로 군대를 철수하고 화의(和議)를 통한다면 우리 나라가 그것을 거절할 것은 없거니와, 해마다 사신을 보내고 예물을 보내는 규례를 정한다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며 사신이 마음대로 허락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해마다 예폐(禮幣)의 수량을 정하려 하는 것은 곧 우리 나라로 하여금 공물(貢物)을 들이게 하자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 욕됨이 더할 수 없으니, 즉 결코 따를 수 없소. 나는 지금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다시는 더 말하지 마오.”
하자, 평조신이,
“나도 역시 부질없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관백이 이미 사신을 대하려 하지 않으니, 이 계책인들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근거없는 뜬소문이 그치지 아니하여, 끌려와서 포로가 되어 이 땅에 와 있는 울산(蔚山) 사람이 동향 출신인 군관(軍官)에게 몰래 말하기를,
“관백이 조선 사신의 일행을 죽이려 하나 그 수가 너무 많으므로 시가(市街)를 더럽힐까 염려하여 병고관(兵古關)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전부 죽인다 하더라.”
하니, 군관들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역관들은 이 말을 듣고서 서로 전하여 이야기하면서 웃었다. 황신이 행수군관(行首軍官)을 불러서 타이르기를,
“일이 순조롭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먼저 죽을 것이다.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나도 너희들과 다를 것이 없다. 나도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이와 같이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기색을 보면 그 말이 참말인지 헛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관백이 우리 나라와 화의를 통하지 않는 것은 왕자를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 우리 왕자가 오기를 원하면서 먼저 사신을 죽인다는 것은 마치 사람을 문으로 들어오기 바라면서 그 문을 닫는 것과 같은 일이니, 이렇게 할 리가 없을 것같다. 그러므로 이는 결단코 거짓말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들의 처지로서는 사신을 죽인다는 것이 지극히 졸렬한 계책이니, 그 흉악하고 교활한 관백이 반드시 이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약 반드시 죽인다면 우리들은 비록 죽을지라도 적의 입장으로 봐서는 매우 무모한 짓이고, 우리 나라 일로 보면 관백이 우리들을 놓아서 돌려보내는 것이 우리들 일행에게는 다행일지 모르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으니 우리 국가에 대한 후일의 근심이 반드시 클 것이다. 너희들도 이러한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군관들이 소리를 같이 하여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이미 놀라고 의혹을 가진 마음이 깊었으므로 속으로는 믿지 않았다. 수길(秀吉)이 우리 나라 사신을 보지도 않고 중국 조사(詔使)도 역시 예로써 접대하지 않고 말씨가 무례하니, 두 중국 사신 및 우리 나라 사신도 초9일에 배를 타고서 떠났다.
사신들의 일행이 병고관(兵古關)에 도착하자, 밤중에 적선(賊船)이 우리 나라 배 곁으로 지나가다가 갑판 위로 올라오면서 풍파를 주의하라고 외쳤다. 일행 군관들은 이들이 우리를 죽이려는 것으로 알고서, 놀라 허둥지둥 일어났는데, 어떤 자는 두 다리를 한쪽 바지 가랑이에 끼우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옷을 거꾸로 입기도 하였으며, 이국로(李國老)란 자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바다로 뛰어들어 가려다가 곁에 사람이 끌어 잡아주어 죽음을 면하였으며, 오직 박의남(朴義男)만이 활을 들어 당기고 앉아서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나은 태세로 있었으나 멍하니 술에 취한 모양같아서 평상시와 같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신이 처음에는 이들이 이렇게 놀라서 법석대는 형상을 몰랐다가 그 다음날에야 듣고서 다시 어떤 사람을 불러 이렇게 하면 무익하고 해만 당한다고 타이르고, 이어 역관을 시켜 두 중국 사신에게 아뢰되 군관을 먼저 본국에 보내서 국왕께 사정을 보고하기를 청하였으나 중국 사신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황신 등이 양방형(楊邦亨)의 배에 나가서 문안을 드리니, 양방형이 사신을 보겠다고 하므로, 황신 등이 절을 하고 일어나서 건의하기를,
“배신들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국서도 전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면서 또 그간 사정도 속히 알려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늦추고 있으니, 심정이 아주 답답하고 절박합니다.”
하니, 양 천사(楊天使)가 말하기를,
“우선 천천히 지나다가 우리와 같이 가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황신이 말하기를,
“소국의 사정은 중국과는 달라서, 앞으로 닥쳐 올 사세가 아주 긴박하니 하루라도 먼저 알려야 하루 빨리 조치할 일이 있으므로 이렇게 급하게 보고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양 천사는,
“그대들이 비록 사람을 먼저 보낼지라도 하루나 이틀 정도 먼저 가는 데 불과할 것이며, 우리 일행도 중도에 지체하지 않겠소. 내가 이미 상주할 글을 초하였으나 심정이 어수선해서 아직 붓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오늘이나 내일쯤 마음을 가라앉히고 써서 보내야 하겠으니, 지금은 아직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중국의 각 아문에서 파견된 관리들과 진 유격(陳游擊)ㆍ왕 천총(王千摠) 등이 다 부산 영중(營中)에 있는데, 만약 배신의 보고가 먼저 가게 되면 반드시 그들이 우리 소식을 묻고, 그들이 다 말하기를 ‘배신의 보고는 왔는데 중국 사신의 보고는 무슨 까닭으로 오지 않나.’ 하고서, 모두 의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보면 일이 순조롭지 아니할 것이므로 배신이 먼저 보고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멀리 타국에 와 있으니, 보고가 조금 늦을지라도 무엇이 해롭겠소?”
하므로, 사신들은 거기서 물러나와 우리 배로 돌아왔다.
○ 10월 10일. 낭고야(郞古耶)에 도착하여 바람에 막혀서 수일을 머물렀는데, 평행장(平行長)이 요시라(要時羅)를 황신이 있는 곳에 보내어 와서 문안을 드렸다. 요시라는 본디 우리 나라 말을 잘 할 줄 알므로 함께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요시라가 말하기를,
“관백이 인심을 많이 잃었고 악한 일을 하고도 고치지 않으니, 3~4년을 더 못 가서 반드시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조선이 만약 계교를 써서 이 동안만 지나간다면, 관백이 죽은 뒤에는 반드시 무사할 것입니다.”
하고, 또,
“관백은 애초부터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민간의 괴로운 사정을 모르는 자가 아닙니다. 본래 미천한 데서 일어났으므로 섶과 쌀을 짊어지고 분주하게 걸어다니는 노고와, 또한 남의 우두머리 된 자가 남에게 모욕을 주면 욕되는 것과 칭찬을 하면 즐거워한다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백성을 괴롭히고 사람을 부리는 것이 이렇게 극심하니, 일본 사람은 대소를 막론하고 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므로 그가 결코 일생을 잘 마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관백 자신도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어서, 매양 ‘내가 일가 조카를 양자로 삼아서 부귀한 지위에 이르게 하였는데도 그 자식이 도리어 나를 해치려 하고 온 나라 사람들도 역시 나를 죽이고자 하니, 내가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내 뜻대로나 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관백의 뜻은 일본 사람은 만약 편하게 그대로 두면 반드시 나라 안에서 일을 만들어낼 것이므로 그들을 수고롭게 해서 잠시도 편하고 조용할 때가 없게 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니, 이를 미루어 보건대 결단코 조선에서 병력을 철수하지 아니할 것이고 반드시 전복(顚覆)한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하고, 또,
“일개 부대가 먼저 전라도로 침입하면 그 참혹함이 반드시 진주(晉州) 전투와 같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방어하는 자가 없으면 그 병력이 충청도로 향할 것인지 경기도로 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전라도로 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도주(島主)의 영이 매우 엄하므로 감히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고는 물러갔다.
○ 22일. 양 천사(楊天使)가 비로소 본국에 사람을 보낼 것을 허락하므로 군관 조덕수(趙德秀)와 박정수(朴廷秀) 등을 보내 전후로 쓴 장계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25일. 중국 사신 이하의 배가 대마도에 도착하고서 바람에 막혀 그대로 머물렀다.
○ 27일. 평조신이 사람을 시켜서 사신에게 청하기를,
“내일 도주가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청하려 하니, 일찍 오시면 고맙겠소.”
하니, 사신이 아프다는 핑계로 사양하였다. 이날 저녁에 평의지(平義智)가 요시라를 보내서 청하기를,
“사신이 본 섬을 지나실 때는 제가 마침 국도(國都)에 갔었기 때문에 영접하는 예를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사신이 다시 이 땅에 머무르시므로, 한번 모시고 담화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일 일찍 와주시면 고맙겠소.”
하였으나, 사신은 또 아프다는 핑계로 사양하였다. 조금 뒤에 요시라가 또 와서 도주의 의사를 전하기를,
“간략하게 음식을 준비하고서 모시고 담화하고자 하니, 제 마음을 살펴주소서. 전일 통신사도 역시 저를 버리지 않고 와주셨습니다. 완고히 거절하지 마소서.”
하니, 사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의 이번 걸음은 전일 사신의 행차와는 다르다. 지금은 관백에게 국왕의 명령도 전하지 못하고서 지금 사사로이 도주의 잔치에 갈 수 있겠는가? 더우나 몸에 중병이 있으므로 성대한 연회에 갈 수 없으니, 나를 위하여 도주에게 사례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이미 도주의 후의를 받은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심 천사(沈天使)가 이유(李愉)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도주가 잔치를 베풀어 놓고 배신을 청하는데 배신이 아프다는 핑계로 사양하면서 가지 않았다 하니, 배신의 처사가 너무 과격하다. 모든 일에는 떳떳한 법과 임시로 쓰는 권도(權道)가 있는 것이니, 어찌 한결같이 고집만 한단 말인가? 이런 외국 땅에 와서는 권도가 없을 수 없다. 도주가 여러번 청하여도 사신이 가지 않으므로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저는 다시 가서 오라고 청할 낯이 없으니, 원하건대, 노야(老爺)의 덕을 입어서 사신을 오시게 하여 주소서.’ 하니, 사신이 한번쯤 가서 참석해 주어도 그다지 큰 해가 없을 것같다.”
하자, 황신이 이유(李愉)로 하여금 심 천사에게 회보하기를,
“우리 나라가 관백과 강화한 뒤에는 두 나라 신하가 서로 모여 잔치하고 마시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겠으나 이제 관백이 사신을 보지도 않고 사신은 왕명도 전하지 못하였는데, 저들과 서로 모여 잔치하고 술마시는 것은 아주 타당치 못합니다. 노야께서는 비록 지휘하시는 바가 있을지라도 감히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이역 땅에 와서 있자니 조석으로 먹는 것을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받고 있는 것도 낯이 부끄러운데, 다시 무슨 마음으로 잔치에 나가서 즐기겠습니까?”
하니, 심 천사가 웃으며,
“조그마한 일에 큰 고집을 부리는구나.”
하였다. 이날 평의지(平義智)의 집에서는 잔치를 크게 차리고 종일 사신을 기다렸으나 끝내 가지 않았다.
○ 11월 23일. 황신 등이 대마도에서 배로 떠나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바람이 차츰 미약해졌다. 중국 사신의 배는 대포(大浦)에 돌아가서 정박하고, 우리 나라 사신의 배는 뱃사공을 독촉해서 부산으로 향하려는데 길잡이 하는 왜인들이 모두 힘껏 말리기를,
“우리들은 바닷길에 익숙하온데, 바람이 없을 때에 대해를 건넌 적은 없습니다. 만약 날이 저물어서 큰 바람을 만나게 되면 필시 다른 곳으로 표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는데, 우리 나라 훈도(訓導) 김득(金得)만은 말하기를,
“지금 천기를 보건대 반드시 역풍이 없을 것이다. 만약 노를 부지런히 저으면 반드시 부산까지 도착할 것이다.”
하였다. 사공들에게 술과 밥을 배불리 먹여 노젓기를 독촉하여 저물어서야 부산에 도착하였다.
○ 25일. 군관 손의(孫儀)에게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달려가게 하고 황신은 배에서 내려 유격(遊擊) 진운홍(陳雲鴻)과 천총(千摠) 왕이길(王㹫吉)의 처소로 가서 보고 적중(賊中)의 사정을 보고하고 돌아왔다.
○ 12월 7일. 중국 사신들은 대포(大浦)에 있으면서 차관(差官) 양득(楊得)과 전사복(全士福)에게 상주하는 글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서 중국 서울로 달려가게 하였다. 이날 저녁에 행장(行長)과 성정(盛政) 등이 잇달아 바다를 건너왔다. 천총(千摠) 심시무(沈時懋)가 이유(李愉)를 불러서 말하기를,
“심 노야(沈老爺)가 전사복을 시켜서 말을 전하되, ‘배신이 서울에 가면 반드시 조치할 일들이 많을 것이니, 먼저 서울로 가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 뜻을 사신에게 전하라.”
하자, 황신 이하가 이 말을 듣고 행장을 꾸려 떠나려 하였다. 행장(行長)이 황신 등이 서울로 떠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사고안문(沙古雁門)을 보내어 예물을 가지고 와서 바치고서, 만나보기를 청하기를,
“사신이 계신 사관은 너무 번거로우니, 사관 곁에 있는 빈집에서 서로 만납시다.”
하였다. 그래서 행장과 빈집에서 서로 만났다. 행장이 말하기를,
“사신이 먼 곳까지 가셨다가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시니, 나 역시 무안합니다. 관백이 왕자를 처음 돌려보낼 때에, 조선에서 반드시 한 사람을 보내어 사과할 것이라 하였는데, 끝내 들여보내지 않으므로 내가 전날에 심 유격(沈游擊)에게 여쭈였더니, 심 유격이 대답하기를, ‘내가 조선 국왕에게 배신을 보내라고 청하여도 국왕이 오히려 어려운 빛을 보였는데, 하물며 왕자를 보내겠는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나는 또 양 천사(楊天使)에게 가서 말하니, 양 천사는 그저 그렇겠다고만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처음에는, 배신만이 가도 일이 되지 않을까 여겼는데, 이제 관백이 왕자를 보내지 않았다고 성을 내었으니, 역시 우리들도 거짓말을 한 것이 되었습니다. 전일에 중국 사신과 관백이 회견할 때에는 나는 감히 관백을 보지도 못하였거니와, 사신은 모름지기 이 뜻을 국왕께 자세히 진달하여 큰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나는 처음부터 이 일을 주장하여 이제 3~4년이나 되었으므로 반드시 이 일을 성사시키고자 합니다.”
하니, 황신이 대답하기를,
“왕자는 결단코 가서 사례할 리가 없으니 우리들은 국왕 앞에서 이런 말은 입도 열 수 없고, 설령 입을 연다 해도 반드시 되지 않을 것이오. 우리들이 여기 앉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만 빈말이 될 뿐이오. 우리들이 비록 복명은 하지 않았으나 조정의 의사를 이미 알고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오.”
하였다. 행장이 말하기를,
“조선에서 왕자가 일본에 가면 잡아서 유치하고 돌려보내지 않을까 의심하기 때문에 보내지 않는 것이나 결코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관백의 뜻은, 내가 앞서 왕자를 놓아 귀국시켜 주었는데, 조선에서 왕자를 보내서 사례하지 않는 것은 나를 매우 업신여기는 것이니, 왕자가 아니면 비록 조선의 백관이 간다 할지라도 무익할 것입니다. 왕자만 한번 갔다 오면 다시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국왕께서 왕자를 지극히 사랑하실지라도 모름지기 전일에 포로되어 갔을 때의 일을 생각하시고 억만 백성을 위한다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대단히 좋을 것입니다. 나도 사신이 이 말을 입밖에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이 실정을 명백히 진달하시어 빨리 좋은 소식을 나에게 전해 주도록 하십시오. 내가 4~5개월 안에는 큰 병력이 나오지 못하도록 힘쓰겠습니다. 만약 대병(大兵)이 나온 뒤에는 비록 좋은 소식이 온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선에서는 매양 저희들이 임진년의 전쟁을 일으키도록 찬성하였다고 의심하나 관백의 명령을 감히 어길 수 없어서이지, 우리들이 자청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 평의지(平義智) 역시 이 일이 일어난 것을 유감으로 여기니, 평의지는 곧 저의 사위입니다. 나는 더욱 통신을 빨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사신은 조정에 돌아가시면 저의 실정을 아뢰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황신은 대답하지 않고, 각기 사관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길을 떠났다. 황신이 서울에 돌아와서, 전후의 사정을 상세히 진달하고서 적이 다시 나올 뜻을 아뢰니, 임금은 그 노고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가선(嘉善)에 올려 포상하였다. 그뒤에도 왜인의 왕래가 있을 때마다 황신의 안부를 묻고 그를 고려 때의 포은(圃隱 정몽주의 호)에 비교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시는 전해지지 않음.
○ 이때에 두 중국 사신도 바다를 건너 부산에 돌아왔다. 중국 사신 양방형(楊邦亨)은 중국 서울로 먼저 돌아가서 거짓말로 보고하기를, ‘지난해 9월 초2일에 대판성(大阪城)에서 수길의 봉왕(封王)하는 고명(誥命)을 주고 곧 초4일에는 화천천(和泉川)에 돌아와서 있었으나, 수길의 사례하는 표문도 오지 않고 조선에 있는 왜병은 철수하지 않으므로 양방형은 맨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청정(淸正)은 이미 서생포(西生浦)에 와서 주둔하고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조선에서 왕자가 와서 사례를 한 뒤에야 군대를 풀어 돌아가겠다.’ 하고, 또 승장(僧將) 송운(松雲)을 만나보고자 한다 하므로 송운이 청정의 진중(陣中)에 들어가니, 칼과 창을 삼엄하게 나열하고 왜병들이 사면에 빙 둘러쌌으나 송운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조용히 담화를 나누었다. 청정이 묻기를,
“귀국에는 보배가 있소?”
하니, 송운이 대답하기를,
“있소.”
하였다. 청정이,
“어떤 물건이오?”
하니, 송운은,
“당신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소.”
하자, 청정이 크게 웃고 회담을 파하고서 공경히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송운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청정의 말하는 것이 지극히 괴팍하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즉시 배신 정기원(鄭期遠)과 유사원(柳思瑗)을 중국에 보내어 적의 동태를 상세히 아뢰니, 중국 조정에서 듣는 이들이 심유경(沈惟敬)의 간사함에 매우 노하였다. 심유경이 최후에 일본의 표문을 중국 조정에 보냈는데 그 글을 살펴보니, 함부로 써서 공경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고 풍신(豐臣)이라는 도장을 찍었을 뿐이며, 명 나라 연호를 받들어 쓰지 않아서 신하된 예모가 없으므로 보는 사람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심유경은 이에 칙명을 받았다고 칭탁하고 두 나라의 일이 완성되어야 돌아간다고 하고서 영병(營兵) 3백 명을 거느리고 부산에 출입하며 의령(宜寧)과 경주(慶州) 등지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곧 왜국으로 뛰어 들어갈 작정인지 사자(使者)가 수없이 오고 갔으며 그 사이에 무슨 일을 하는지 다른 사람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아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입장을 해명하려 하였다. 우리 나라 재상인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에게 서간을 보내 왔는데, 그 글은 이렇다.
“명 나라 유격(游擊) 심유경은 감히 속마음을 털어 조선국 경림군 각하 대인에게 알립니다. 세월이 빨리 흘러서 지나간 일이 어제 같습니다. 생각하면 왜적이 귀국 땅을 침입하여 바로 평양(平壤)까지 밀고 왔으니, 그때는 팔도강산이 안중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황명(皇命)을 받들고 나와서 왜적의 정세를 탐색하여 기미를 살피면서 그들을 제어하고 무마하였는데, 족하(足下)와 이 체찰사(李體察使)를 난중에서 서로 만나고 평양 중심으로 서북 지방 일대의 백성들이 사방으로 떠돌아 피난살이하며 그 근심과 고생을 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니, 마치 바늘 방석에 앉은 듯하여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릴 수 없는 급박한 상태이므로,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족하도 몸소 그 일을 겪었으니 나의 많은 말을 기다릴 것도 없겠지요. 나는 행장(行長)을 격문으로 불러서 건복산(乾伏山)에서 서로 만나 약속하기를, 다시는 서쪽으로 침입하지 않기로 하여, 행장이 이 명령을 듣고서 감히 넘어서지 못한 지 두어 달이나 되었는데, 그뒤에 우리 나라에서 대병이 오게 되어 평양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설혹 그때에 내가 오지 않았다면 왜적이 조 공(祖公 조승훈(祖承訓))의 패함을 타서 의주(義州)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를 것이니, 평양 한 도의 주민들이 그 해독을 입지 않음이 귀국으로는 다행이었습니다.
왜장 행장은 서울로 물러나와 지켰고, 총병(摠兵) 수가(秀嘉)와 부장 삼성(三成)과 장성(長成) 등 30여 장수들이 병력을 합쳐서 진영을 잇달아 벌이고서 험한 요지를 차지하여 굳건한 그 힘을 깨뜨릴 수 없었으며, 벽제(碧蹄) 전투가 있은 뒤에는 더욱 명군(明軍)이 전진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때 판서(判書) 이덕형(李德馨)이 개성부(開城府)에서 나를 만나보고, ‘적의 형세가 저렇게 확장되고 명 나라 대병은 또 물러가니 서울 탈환은 반드시 바랄 수 없다.’ 하고,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서울은 우리 나라의 근본이 되는 땅이므로 이곳을 탈환해야만 전국 각도의 병력을 부를 수 있는데, 지금 사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장차 어찌 하리까?’ 하였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한갓 서울만 수복한다 해도 한강 이남의 여러 도(道)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사세가 또한 펴나가기가 어려울 형편이오.’ 하니, 이덕형은, ‘서울을 수복한다는 것은 진실로 소망 밖이나 수복만 되면 한강 이남의 지방도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이 스스로 지탱하여 나가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시험삼아 너희 나라와 같이 일하여 서울을 힘써 수복케 하고 아울러 한강 이남의 여러 도(道)까지도 회복하고, 왕자와 배신들도 다 돌아오게 하여 이 나라를 완전하게 하겠소.’ 하니, 이덕형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감격하면서 말하기를, ‘노야가 과연 그렇게 한다면 이 나라를 다시 만들어주는 것이니, 그 공덕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내가 배로 한강에 나갔더니, 왕자 임해군(臨海君) 등이 청정(淸正)의 군영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말하기를, ‘만약 귀국하게 되면 한감 이남의 땅은 어디를 막론하고 네가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하였으나, 나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나는 왜장(倭將)들과 서약하기를, ‘너희들이 왕자를 돌려보내려면 돌려주고 돌려보내기가 싫으면 네 마음대로 살리든지 죽이든지 하라. 그 밖에 더 말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왕자는 귀국의 저군(儲君 세자)이 될 분인데, 내가 어찌 중한 것을 감히 모르겠습니까마는 이런 때를 당해서는 차라리 죽이려면 죽이라고 할지언정 다른 조건의 일은 허락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뒤에 부산에 내려와서는 물자도 가져다 주고 예절을 다해서 여러 모로 왕자에 대하여 마음을 썼으니, 앞서는 그렇게 거만하고 뒤에는 이렇게 공경한 것은 시기에 완급이 있고 일에도 경중이 있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몇 마디 말이 오간 후에 서울에서 왜적은 물러갔고 연도(沿道)의 진영(陣營)에 남겨두고 간 양곡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한강 이남의 여러 도를 다 도로 찾고 왕자와 배신들도 돌아왔으며, 끝내는 일본을 책봉(冊封)한다는 한 가지 일로 그들을 잡아매어 여러 왜병의 우두머리들이 부산 바닷가에서 손을 여미고 3년이나 명령을 기다리면서 감히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관백을 봉한다는 의논이 이루어지게 되어 나는 천자의 명을 받고 서울에서 휴전을 조정하여 다시 족하와 이덕형을 만나서 말하기를, ‘지금 가서 책봉하게 되면 왜병들도 물러갈 것이니, 귀국에서는 이뒤에 여러 가지 처리할 방책을 어떻게 하겠소?’ 하니, 이덕형이 대답하기를, ‘뒷처리에 관한 방책은 저희 나라 군신들의 책임이니, 노야는 마음 쓸 것이 없소.’ 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처음 듣고서 그들의 큰 역량과 큰 식견이 있음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어서 국가의 위대한 한 주춧돌로 알았더니, 지금 와서 그 사실을 조사하여 보면 그의 문장과 공업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나는 이 판서(李判書)를 위하여 애석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부산(釜山)과 죽도(竹島) 같은 여러 왜영(倭營)에는 아직 철병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문책도 하였으나, 기장(機張)과 서생포(西生浦) 여러 곳에는 왜병이 다 철수해서 건너갔고 영책(營柵)도 다 불사르고서 지방관에게 넘겨준 공문도 모두 있었는데, 어찌하여 청정(淸正)이 한번 오자 싸움 한번 있었다는 말도 없고 화살 한 개 쏘았다는 말도 없이 지방관들이 몸만 빠져나가고 고스란히 내주었단 말입니까?
이미 한강 이남은 스스로 지탱해 나가겠다고 하고서 어찌하여 이미 얻은 땅을 이와 같이 다시 잃어버린단 말입니까? 또 뒷처리에 관한 일은 우리 나라의 책임이라 하고서, 어찌 큰 좋은 계책을 들려주지 않고 겨우 궐하(闕下)에서 울부짖는 한 가지 계책밖에는 없는 것입니까? 병법에 이르기를, ‘강하고 약한 것이 서로 당할 수 없고, 많은 수와 적은 수가 대적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귀국의 여러 일 맡은 이에게 책망하자는 것은 아니나, 다만 일러드릴 것은, 여유가 있을 때는 그 근본을 다스리고 급하면 그 끝을 다스리는 것이니, 병정을 조련하고 방비하여 지키는 것과 때를 잘 봐서 무마하며 제어한다는 것은 귀국의 일 맡은 여러분들도 이 원리를 불문에 붙여버릴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서 일본에 갔다 온 이후로 나는 귀국의 왕과 네 번이나 회합했는데, 피차에 문답한 말이 다 가슴속에서 나와서 시의적절하고 털끝만큼도 거짓이나 허위가 없었으므로 국왕의 마음이나 나의 마음이 피차에 거울같이 환했던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말하기를, ‘조선 일이 이만큼 되었으니, 다른 염려는 없다.’ 하였더니, 뜻밖에 귀국의 모신(謀臣)과 책사들이 백 가지로 기지(機智)를 부려서 그 사이에 일이 벌어지게 되어 안으로는 위험한 말을 하다가 중국 조정에 노여움을 격동시키고, 밖으로는 약한 군졸을 가지고 일본과 틈을 만들었습니다.
그중에도 송운대사(松雲大師)의 한 가지 이야기는 또 예법(禮法) 이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달려가서 명 나라를 쳐들어 간다는 말도 있고, 또, 조선의 팔도를 베어 준다기도 하고, 국왕이 친히 바다를 건너가서 항복한다는 등 잠깐 사이에도 두세 가지 말이 나왔으니, 다만 이런 말이 국왕의 진념(軫念)을 움직이게 하고 중국 조정의 대병이 발동하도록 할만한 것만 알 뿐이지 귀국에는 전부 팔도 밖에 없는데 그것을 다 주겠다고 허락하고, 또 국왕이 친히 바다를 건너가서 항복한다고 하면, 귀국의 종묘 사직과 신민들은 다 일본 것이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두 왕자를 데려가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하지 못합니까? 내 생각으로는 삼척 동자라도 결코 이러한 실언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청정(淸正)이 아무리 횡포하다 하여도 이렇게 방자하지 않을 것이며, 또 당당한 명 나라로서 외번(外蕃)을 통솔하는 데 본래 대체가 있어 한번 내리는 은혜와 한번 펴는 위엄도 역시 그 시기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수백 년을 두고 전하여 내려오던 이 속국을 도외시하지는 않을 것이며, 또 약속을 받들지 않는 역적을 그대로 버려두어 우리의 울타리를 노략질하게 하지 않을 것은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나는 일을 잘 살필 줄 모르나 내외(內外) 친소(親疏)의 구별과 순역(順逆) 향배(向背)의 실정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쉽게 알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칙명을 받들어 이 일을 조정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일의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되는 것이 관계가 중한데 감히 귀국 일이라 하여 경멸히 여겨서 힘을 다하지 않겠으며, 또 감히 일본의 횡포를 숨기고 알리지 않겠습니까? 족하는 대체를 깊이 알고 나라 일에도 자세히 알므로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이니, 족하는 나의 평소의 마음을 살펴서 곧 이것을 국왕께 진달하고 아울러 일 맡은 여러 신료들에게도 이 사건의 까닭을 알게 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미 우리 중국 조정을 의지하여 만전의 도모를 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명령을 들어서 길이 끝없는 복을 기원할 일이고 한갓 지나치게 계책을 꾸며 날로 수고롭고 날로 졸렬하게 하지 말기를 지극히 부탁하오며 할 말을 다하지 못하나이다.”
이 글에서 말한 것을 보면 서울 수복 이전의 일은 착착 들어맞아서 고증이 되기도 하나 부산에 내려간 이후의 일들은 그저 지리한 사연과 명료하지 않은 말을 늘어놓아서 스스로 자기 심정을 엄폐하려고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하겠다. 우리 조정에서는 잇달아 배신 권협(權悏) 등을 보내서 급한 정세를 보고하고 곧 출병해 주기를 청하니, 이에 중국 조정의 과신(科臣) 채사목(蔡思穆)ㆍ정여벽(鄭汝壁)ㆍ장문화(張文華)ㆍ오문재(吳文梓)ㆍ여명가(呂鳴珂)ㆍ주공교(周孔敎)ㆍ요문울(姚文蔚)ㆍ장보지(張輔之)ㆍ양응문(楊應文) 등이 전후로 각기 글을 올려서, 일본 관백에 대한 봉전(封典)을 거행하지 말 것, 병부에서 나라 일을 그르쳤다는 것, 총독(摠督)의 잘못한 것 등을 말하여, 그들의 관직을 다 삭탈하고 조선을 구원할 것을 다시 의논하자 하였다. 그중에도 주공교(周孔敎)가 올린 소가 가장 어하고 절실하였으니, 그 소는 이러하다.
“신이 2월 5일에 관전총병(寬甸摠兵) 마동(馬棟)의 당보(塘報)를 접수하니, 그 내용에, ‘왜장 청정(淸正)이 정월 14일에 기선(騎船) 2백여 척을 통솔하고서 이미 조선에 정박하여 기장(機張) 지방에 주둔하고 있다.’ 하였고, 또 어젯밤 누하이고(漏下二鼓)에 들어온 맹양상(孟良相)의 당보에 의하면, ‘왜적이 이미 양산(梁山) 한 고을을 빼앗아 그 태수(太守)를 쫓아내었다.’ 하므로 신은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근심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 기선(騎船)이라는 것은 기병(騎兵)을 태운 배이니 기선이 2백 척이나 된다면 보선(步船)을 알 수 있으며, 청정한 사람의 통솔한 것이 이러하다면 네 사람의 통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왜노(倭奴)의 진의(眞意)가 우리 번방인 조선에 잇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복판에 있는 것같습니다. 신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매우 한심합니다. 다행히 황상(皇上)께서는 하늘이 주신 신무(神武)하신 자품으로 만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어 조정의 신하에게 의논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니, 이는 화를 바꾸어 복으로 만들고 법도를 혁신시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나라를 그르친 신하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충성스러운 말이 쓰일 수 없습니다. 신이 지난해 6월의 정신회의(廷臣會議)에서 내심으로 왜노(倭奴)의 마음이 반드시 변할 것이라 생각하고서 일찍이 사신지책(徙薪之策)을 건의하여 눈물까지 흘려가며 말하였습니다. 일찍이 신의 말을 채택하였다면 거의 방비가 되었을 것인데, 지금에는 토끼를 보다가 개를 돌아다보는 격이어서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석성(石星)의 나라 일을 그르친 죄는 곧 다 헤아릴 수 없거니와, 신은 우선 그중의 한두 가지만 들겠습니다.
석성의 진달에 의하면, 왜인 한 사람도 조선에 머물지 않아야 바야흐로 책봉사(冊封使)를 일본에 보낸다 한 것인데, 지금은 책봉사가 바다를 건너갔다가 왔으나 왜군은 전보다 더함이 있을 뿐 줄지는 않았으니, 이것이 황상을 기망한 첫째입니다. 석성의 보고에 의하면, 청정은 죽었다고 했는데, 지금 청정은 엄연히 병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이것이 황상을 기망한 둘째입니다. 석성의 원래 상주한 글에 의하면, 한번 책봉이 끝난 뒤에 왜적이 조선을 침범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책봉사가 돌아오기도 전에 왜선(倭船) 2백 척이 이미 조선에 정박하여 양산 한 고을을 빼앗았다 하니, 이것이 황상을 기망한 셋째입니다. 옛날부터 대신이 자기 가인(家人)을 왜국 오랑캐에 보낸 일이 없었는데, 지난해 6월에는 석성이 자기 가인인 장죽(張竹)을 몰래 왜영(倭營)에 들어가게 하여 바로 12월까지 있다가 돌아왔는데, 전해 듣건대, 금백(金帛)과 진보(珍寶)가 서로 많이 거래되었으며, 그중의 기관(機關)은 참으로 잘 알 수 없다 하니, 이것이 황상을 기망한 넷째입니다.
12월에는 또 위조된 표문 하나를 과신(科臣) 서성초(徐成楚)에게 보내 왔으나, 서성초가 말하기를, ‘이 표문에는 연 월이 없으니, 위조한 표문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요동 순안사(遼東巡按使) 이효사(李孝思)의 보고에 의하면, ‘원래 사표(謝表)가 없었다.’ 하였으니, 이것이 황상을 기망한 다섯째입니다. 그는 왜적의 사은사(謝恩使)가 온 일이 없음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폐하의 견책이 내릴까 두려워하여 미리 앞질러 속여서 진달하기를,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들어와서 사은하게 하여 소요를 더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전일에 소서비(小西飛)란 자가 왔을 때도 소요만 되지 않았습니까?’ 하였으니, 만약 황상께서 그의 간사함을 통촉하시고 곧 와서 사은하도록 책하지 않았다면 짧은 거짓 표문을 양방형(楊邦亨)의 소매 속에서 가져다가 올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황상을 기망한 여섯째입니다. 왜추(倭酋)가 지금 병력을 일으켜 우리와는 원수가 되었는데, 그는 말마다 속국이라고 거짓 주장하고 있으나, 속국이라 하면서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법은 있을 수 없으니, 이는 누구를 속인 것입니까? 이것이 황상을 기망한 일곱째입니다. 관백의 욕심이 조선의 땅덩이를 차지하자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면서도 거짓 진달하기를, ‘조선이 예문(禮文)을 안 지킨다고 책망하는 것이다.’ 하니, 관백이 조선의 예문을 무엇 때문에 그다지 좋아하여, 10년 동안이나 전쟁 준비로 훈련을 하고, 5년이나 부산에 머물러 지키겠습니까? 이것이 황상을 기망한 여덟째입니다.
이같은 여덟 가지의 기망한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섯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평양 전투에서 왜병이 이미 물러가서 서울을 지키고 있었으니, 그때는 강화(講和)해도 물러갈 것이요 강화하지 않아도 물러갈 터인데, 그는 심유경(沈惟敬)의 간사한 말을 듣고서 일곱 가지 일을 허락하면서 강화하여 왜적의 술책에 빠져버렸으니, 이것이 첫째 잘못입니다. 앞서 천절(川浙)의 수병(戍兵)을 철수시키지 않았으면 조선은 거의 그 힘을 믿고서 두려울 것이 없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그 병력을 철수하여 왜적에게 잘 보이려고 하였습니까? 지금 조선이 다 전복된 뒤에 와서 먼 데 있는 물로 가까운 불을 끄려 한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둘째 잘못입니다. 바야흐로 이종성(李宗誠)이 직책을 버리고 도망쳐 갈 때에 왜적의 정상이 이미 다 드러났으므로 황상께서 매우 진노하시어 정신(廷臣)에게 명하여 회의하게 하셨으니, 그 의논한 사항이 시행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석성은 끝내 그것을 버리고 시행하지 않고, 일이 급하게 되면 일을 하라고 신칙만 하여 자기 책임이나 때우려고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독부(督府)에서 군량을 청구해도 주지 않고 병력을 청구해도 주지 않고 병력을 청구해도 주지 않으며 명분은 그 일을 신칙한다 하면서 실은 중간에서 못하도록 제어한 것이니, 이것이 셋째 잘못입니다. 왜적의 전쟁 물자 중에 가장 필요한 것이 말인데, 석성이 좋은 말 5백 필을 버려서 왜적의 손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넷째 잘못입니다. 왜변이 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병화를 좋아하는 자라고 지목하고, 왜변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자는 자기를 두둔하는 자라고 기뻐하였으며, 수비할 것을 말하는 자는 장황한 일이라 지목하고 별로 큰일이 없으리라 하면서 눈앞의 일만 보는 자는 안정된 사람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왜놈과 강화하고 책봉한 이후부터 왜적이날마다 병정을 조련하고 무기를 수리하여 예기를 쌓아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우리는 도리어 날마다 병력을 철수하고 군비를 완화하며 손을 모으고서 적을 기다리고만 있으니, 이것이 다섯째 잘못입니다.
이런 여덟 가지 기망한 것과 다섯 가지 잘못이 쌓였으니, 이로부터 우리 동남 방면의 군사진벽(軍事陣壁)에는 겹겹이 일이 많아졌습니다. 폐하께서 석성에게 무엇을 저버리셨기에 석성이 폐하를 이렇게 배반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통탄할 일은 옛 사람의 말에, ‘일을 정성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하면 움직이는 대로 과오를 범하게 되어 그 그르침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비유한다면, 바둑을 두는 자가 먼저 한 점을 잘못 두어도 뒤에 잘 두면 오히려 구제할 수도 있겠는데 만약 두는 것마다 다 그르치고 나면 어찌 승리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석성이 이 정국을 담당한 뒤로부터 잘못한 점이 너무도 많아서 패국이 이미 드러나서 국가의 큰 계책이 거의 그르쳐졌으니,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지금 사직의 안위의 기틀이 이 한 가지 조치에 달렸으니,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고 불에 타는 것을 구하는 것같이 하더라도 때에 미칠까 두려워해야 할 것인데 폐하께서는 어찌 이 기망하는 신하를 아껴서 거듭 국가의 큰일을 그르치려 하십니까? 바라옵건대, 황상께서는 용단을 내리시어 석성을 빨리 처단하라는 명령을 주시고, 문무대신 중에 충성심을 가진 한 사람을 급히 가려서 병추(兵樞)의 일을 대신 관장하게 하여 급히 싸우거나 방비할 일을 다스리게 하시고, 다시 장수를 배치하여 연해변의 어느 곳은 긴요하니 방비해야 하고, 연해(沿海)의 관원은 어떤 자가 청렴하고 용맹이 있어 국방을 맡길 수 있는 자인가를 정하시어 일일이 유의하셔서 다 진작쇄신(振作刷新)하면 내치(內治)가 굳건하게 되고 외모(外侮)도 저절로 근절될 것입니다. 신은 피눈물로써 기도하는 지극한 정성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황제의 비지가 내렸는데, 이르기를,
“상소를 보고서 잘 알았노라. 조정에서 이미 처분하였으니, 물러가서 기다리라.”
하였다. 이때에 양방형(楊邦亨)이 조정 의논이 이미 매우 격하여진 것을 보고 비로소 사실의 전말을 바로 토설하면서 심유경(沈惟敬)에게 죄를 미루고, 아울러 본병(本兵)과 총독(總督)의 편지를 드려 황제에게 보이니, 황제가 심유경이 나라를 팔았는데도 본병은 죄상을 미봉해 주려고 한 것에 크게 노하여 심유경을 체포하게 하였다.
처음에 왜인이 일곱 가지 일을 요구하였으니, 첫째 땅을 베어줄 것, 둘째 왕으로 봉해 줄 것, 셋째 공물을 바치게 해줄 것, 넷째 인장을 보낼 것, 다섯째 곤룡포를 보낼 것, 여섯째 충천관(沖天冠)을 보낼 것, 일곱째 선우(單于 흉노의 추장)가 한(漢) 나라와 한 일처럼 공주와 혼사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는데, 심유경이 그중에 네 가지 일을 숨기고 왕으로 봉할 것, 인장을 보낼 것, 공물을 바칠 것 세 가지 일만 말하였으므로 강화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천자가 비로소 그가 속인 것임을 알고 본병을 크게 책망하니,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상본(上本)하여 변명하고, 총독(總督) 손광(孫鑛)은 군부 책임을 해면시킬 것을 청하였다. 천자가 이에 양방형을 하옥하여 법대로 심문하고, 형부에 신칙하여 구경(九卿)과 과도(科道)를 모아 복의(覆議 자세히 살펴 의논함)하게 하였는데, 그 의논은 다음과 같다.
“만력 25년(1597, 선조 30) 월 일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소대형(蕭大亨) 등은 삼가 아룁니다. 성지(聖旨)를 받들기를, ‘구경(九卿)과 과도(過道) 등의 관원을 회동하여 양방형 등의 일을 복의하고, 이전에 이들 사건의 내용을 양방형이 한 가지도 승인하려 들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일은 이제 석성(石星)의 아뢴바 밀게(密揭)에 의거하여, 너희들이 매양 공동으로 험대(驗對)하면 과연 양방형의 친필(親筆)임을 알아내게 될 것이고, 아울러 이종성(李宗誠)과 신무룡(愼茂龍)을 면대시켜 사실을 구명한 것을 가지고 모두 사실대로 갖추어 아뢰게 하고 우물우물 속이거나 숨기지 못하게 하라.’ 하시고 또, ‘병부 상서 석성이 글을 올려 성지에 변명한 것도 아울러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이에 신들이 삼가 구경과 과도 등의 관원을 모아 일제히 동궐(東闕)에 나아가 양방형ㆍ이종성ㆍ신무룡 등의 서게(書揭) 4본과 양방형의 품게(稟揭) 1본을 계속하여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증험하여 대질하였는데, 양방형이 진술하기를, ‘손 총독(孫總督)이 채단(綵緞)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청정(淸正)이 군사를 끌고 온 것이 반드시 이때문이 아닐 것이다.’ 하고, 양방형이 또 진술하기를, ‘상(賞)을 내리겠다는 게첩(揭帖)은 사실이나 책(冊)을 주고 비단을 내어준 날짜가 같지 않으며, 옥대(玉帶)를 고쳐 만든 것은 심유경이 관계한 것으로 옥대를 만드는 공장(工匠) 주룡(朱龍)을 불러 붉은 가죽띠로 고쳐준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종성은 진술하기를, ‘게첩과 도장을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나 게첩을 준 뒤에 신무룡(愼茂龍)과 양 부장(楊副將)이 청정(淸正) 군문에 돌아가, 소서비(小西飛)가 행장(行長)에게 보고한 편지 초안 각 한 통씩을 부람(附覽)하라는 몇 마디 말은 승인하지 못하겠다.’ 하고, 신무룡에 대해서 공술하기를, ‘손 총독(孫總督)이 신무룡 등만을 보낼 적에 세 통의 편지를 가지고 갔는데, 청정과 행장에게 바다를 건너가라고 타이른 것뿐이고 다른 글이나 예물은 없었고, 그 회답 문서가 손 총독의 처소에 있고 부장(副將)이 뽑은 청정의 세 통의 질문한 기록이라는 것은 각기 승인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양방형이 또 말하기를, ‘사람을 시켜서 대신 쓰게 한 것이고 친필이 아니다.’ 하였는데, 태학사(太學士) 진우폐(陳于陛)가 석성(石星)에게 준 부첩(副帖) 한 통은 그다지 요긴한 것이 되지 못하고, 또 대증할 수 없으므로 심문하기 어렵습니다. 그 외에 신들이 공동으로 참관하다가 동왜(東倭)를 왕에 봉하자는 의논의 시말을 얻었는데 온 조정이 모두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으나 힘써 담당한 이는 석성 한 사람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근원해 보면 정히 군사를 쉬게 하고 군량을 절약하여 속국(屬國)을 보호하려는 데 있고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나 다만 가벼이 세인(細人)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군국(軍國)의 큰 계획을 그르칠 뻔하였습니다. 그래서 본관(本官)이 스스로 말하기를, ‘왕으로 봉하는 일을 마치지 못하여 부탁한 효과가 없자 자주 파면을 청하였으니 자기 자신을 잘 살핀다고 할 수 있으므로 회적(回籍)하여 동사(東事)가 평정된 뒤에 별도로 논의하여 처분함이 합당한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손광(孫鑛)으로 말하면 몸이 국경의 일을 맡았으니, 왜국의 순역(順逆)을 정탐하고 사신의 진퇴를 적당히 헤아리는 것이 또한 맡은 임무입니다. 갑자기 ‘권유하는 칙문을 받들어가는 사신이다.’고 일컬은 것은 나라의 위령(威靈)을 전파하고 왕명을 소중하게 하지 아니한 것이 없는데 교통(交通)하였다거니 속여 유인하였다거니 하여 청정이 다시 온 것을 핑계삼아 손광에게 허물을 미루니, 어찌 얼마 안 되는 네 가지 선물이 문득 이미 봉하여 이루어진 것을 파할 수 있겠습니까? 신등이 되풀이하여 생각하건대, 만에 하나도 반드시 그럴 리가 없으리라는 것을 보증하겠습니다. 양방형은 보잘 것 없는 무변(武辯)이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소인입니다. 바다를 건널 때 우물쭈물 따라갔으니, 죄를 면하기 어려운데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없는 일을 헐뜯어 아뢰었으니, 정상 또한 믿습니다. 또 이제 왜노(倭奴)가 문턱에 침입하여 일이 다급한 형세에 놓였으니, 손광은 곤외(閫外 도성밖. 즉 변방)의 직에 있어 바로 불에 타는 것을 구원하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야 할 때로서 일체 방어하는 일을 책임지고 마음을 다하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지, 문을 닫고 회피하여 일의 기틀을 잃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등이 성지를 받들어 공동으로 물어서, 삼가 허물을 물은 사건을 가지고 사실대로 아뢰고 아울러 양방형ㆍ이종성ㆍ신무룡 등이 친필로 쓴 공사(供詞) 네 통의 글을 함께 어람에 올립니다. 다만 대신의 거취는 조정으로부터 하실 일이므로 신등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성단(聖斷)을 기다릴 뿐입니다.”
성지를 받들었다.
“이 번에 물은 사정에, 너희들이 이미, ‘석성이 마음속으로 군사를 쉬게 하고 군량을 절약하려 한 것이나 다만 세인의 말을 가벼이 들어 나라를 그르쳤으므로 정상이 용서할 만한 것이 있다.’ 하니, 우선 직책을 파면하고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 또, ‘청정(淸正)이 다시 온 것은 손광 때문이 아닌데 이제 그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피한다면 일의 기회를 놓칠까 염려된다.’ 하니, 직책을 파면시키고 회적(回籍)하여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 계요총독(薊遼總督)이 결원된 것은 변방에 오랫동안 지낸 병사(兵事)에 숙달한 사람 몇 명을 모아서 추천해 오라. 양방형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소인이므로 본디 중하게 규명해야 하나 우선 그가 멀리 나가서 수고한 것을 생각하여 직책을 파면하여 영영 서용하지 않겠다. 해부(該部)는 알고 있으라.”
이에 구경(九卿)이 동궐(東闕) 아래 모여서 전 병부 상서 전낙(田樂)으로서 석성을 대신하여 병부 상서로 삼을 것을 추천하였는데, 그때에 전낙은 치사(致仕 나이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고 시골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부임하기 전에는 형부 상서 소대형(蕭大亨)을 잠깐 병부의 사무를 서리하도록 하였다. 또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 형개(邢玠)를 뽑아 추천하여 손광을 대신하여 흠차총독계요보정등처군무 경략어왜 겸이양향 진병부상서 겸도찰원우부도어사(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經略禦倭兼理糧餉進兵部尙書兼都察院右部都御史)삼았다. 개의 자는 □□이요, 호는 곤전(崑田)이니, 산동(山東) 청천부(靑川府) 익도현(益都縣) 사람으로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신미년(1571, 선조 4)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위엄을 배양하고 방책을 결정함에 있어 모두 기무(機務)에 함당하게 하였으며, 모든 군무(軍務)를 한결같이 경리(經理)에게 물어서 하였다.
그 표하(票下)의 장관(將官)으로는 흠차계요군문 관중군사무 통령중협 정왜병마후군도독부첨사(欽差薊遼軍門管中軍事務統領中協征倭兵馬後軍都督府僉事) 고책(高策)이 2천 5백 명을 거느렸는데, 기율이 엄하고 밝아서, 관하의 군졸이 만일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죄주고 재물은 그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며, 주둔하는 지방에는 더욱 신칙하여 지나는 곳마다 조용하였다. 서도독 첨사(署都督僉事)는 대연춘(戴延春)인데, 호는 소천(小泉)으로 섬서(陝西) 영강위(寧羌衛) 사람이다. 중군기고관(中軍旗鼓官)은 원임 수비(原任守備) 장홍제(蔣弘濟)인데 호는 정오(靜吾)로서 절강(浙江) 소흥부(紹興府) 회계(會稽) 사람이요, 기고관(旗鼓官)은 장구경(張九經)이다. 기병좌영 수비참장 체통행사 도지휘첨사(騎兵左營守備參將體統行事都指揮僉事)는 양렴(楊廉)인데, 호는 소근(小芹)이고, 섬서 유덕위(綏德衛) 사람으로 보병 9백 90명을 거느리고, 부총병(副摠兵)은 조승훈(祖承訓)으로 준화보병(遵化步兵) 7천 명을 거느리고, 원임 유격장군(原任游擊將軍) 섭사충(葉思忠)은 호는 앙천(仰川), 절강(浙江) 금화(金華) 의오현(義烏縣) 사람이고, 원임 유격장군(原任游擊將軍) 교일린(喬一麟)은 호는 소재(紹齋)인데 순천부(順天府) 대흥현(大興縣) 사람이고, 원임 지휘사(原任指揮使) 종응괴(宗應魁)는 북직례(北直隷) 밀운위(密雲衛) 사람이고, 기병 지휘사(騎兵指揮使)는 장륭(張隆)인데, 마병(馬兵) 7백 60명을 거느리고, 유격장군(游擊將軍) 동용위(董用威)는 제독(提督) 일원(一元)의 조카로서 오랑캐 군사 9백 명을 거느리고, 영평후부 천총(永平後部千摠) 사천작(斯天爵)은 마병 9백 80명을 거느리고, 좌영 천총(左營千摠) 왕성(王成)은 보병 1천 1백 50명을 거느리고, 대동위관(大同委官) 왕종의(王宗義)는 마병 9백 80명을 거느리고, 요병영 지휘사(遼兵營指揮使) 채중우(蔡仲宇)는 마병 7백 60명을 거느리고, 우영 천총(右營千摠) 이보국(李輔國)은 군사 8백 80명을 거느렸는데 모두 총독을 따른다. 청용관(聽用官) 방발(龐浡)과 이대간(李大諫)ㆍ장언지(張彦池)는 청용관(聽用官)으로 나왔다. 또 요동 포정사(遼東布政使) 양호(楊鎬)를 흠차경리조선군무 도찰원우첨도어사(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로 삼아 위로 총독의 지휘를 품신하고, 아래로는 제독(提督) 이하를 통솔하여 평양에 와서 머무르게 하니, ―호는 창서(蒼嶼)인데 하남(河南) 귀덕부(歸德府) 상구현(商丘縣) 사람이다. 협기(俠氣)가 있어 일을 만나면 용감하게 처리하며, 성품이 또 호탕하여 조그마한 절차에 구애되지 않고 몸가짐을 엄하고 결백하게 하였다― 그 표하 장관은 8명인데
중군부총병 서도독첨사(中軍副摠兵署都督僉事)에 팽우덕(彭友德),
기고관 수비지휘첨사(旗鼓官守備指揮僉事)는 이개선(李開先)인데, 마병 1천 5백 20명을 거느리고,
비어지휘첨사(備禦指揮僉事)는 이봉양(李逢陽)이고,
지휘첨사(指揮僉事)는 유무중(劉武仲)인데 마병 1백 명을 거느리고,
요영친병천총(遼營親兵千摠)은 이승(李勝)인데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통령조병천총(統領調兵千摠)은 이익교(李益喬)인데, 마병 1천 2백 90명을 거느리고,
관전중군(寬典中軍)은 장환연(章煥然), 지휘사(指揮使)는 황응척(黃應惕)이다.
또 도독 마귀(麻貴)를 흠차제독남북관병 어왜총병관 후도독부도독동지(欽差提督南北官兵禦倭摠兵官後都督府都督同知)로 삼아 선대(宣大)의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주재하면서 제장(諸將)을 호령하게 하니, 마귀는 호는 소천(小川)이요, 대동위(大同衛)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회회(回回) 사람으로 용모가 웅장하고 무쇠빛 얼굴에 흰 머리이며 돌아보는 데 위엄이 있어 바라만 보아도 그가 대장임을 알 수 있다. 몸가짐을 간략(簡略)하게 하니, 연로(沿路)의 백성이 편하게 여겼으며, 무릇 화친하자는 의논이 있으면 문득 거절하기를, ‘조정이 화친을 강구하려 한다면 말 잘하는 선비 한 사람으로 충분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들에게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하였겠는가?’ 하였다. 그에게 소속한 총병관(摠兵官) 이하 27명이다.
흠차비왜 우익부총병 원임 도독첨사(欽差備倭右翼副摠兵原任都督僉事) 오유충(吳惟忠)은 보병 4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비왜 우익부총병 원임 도독첨사(欽差備倭右翼副摠兵原任都督僉事) 양원(楊元)은 마병 2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비왜 우익부총병 도독첨사(欽差備倭右翼副摠兵都督僉事) 이방춘(李芳春)은 마병 2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비왜 좌익부총병 서도독첨사(欽差備倭左翼副摠兵署都督僉事) 이여매(李如梅)는 요선이영병(遼宣二營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흠차비왜 좌익부총병 서도독첨사(欽差備倭左翼副摠兵署都督僉事) 해생(解生)은 대동마병(大同馬兵) 2천 명을 거느리고,
협수 원임 부총병(協守原任副摠兵)은 동양정(佟養正)이요,
협수비왜부총병 서도독첨사(協守備倭副摠兵署都督僉事) 이녕(李寧)은 보정영 마병(保定營馬兵) 2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삼둔중우영 유격장군 도독지휘첨사(欽差三屯中右營游擊將軍都督指揮僉事) 우백영(牛伯英)은 계진마병(薊鎭馬兵) 6백 명을 거느리고,
흠차유격장군 도독지휘동지(欽差游擊將軍都督指揮同知) 진우충(陳愚衷)은 연유영마병(延綏營馬兵) 2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 원임 유격장군 도지휘동지(欽差原任游擊將軍都指揮同知) 파귀(頗貴)는 선대마병(宣大馬兵) 3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밀운전영 유격장군 도지휘동지(欽差密雲前營游擊將軍都指揮同知) 시등과(柴登科)는 마병 3천 4백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절직승영병 유격장군 도지휘동지(欽差統領浙直勝營兵游擊將軍都指揮同知) 모국기(茅國器)는 보병(步兵) 3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보정영병 유격장군첨사(欽差統領保定營兵游擊將軍僉事) 이화룡(李化龍)은 마병 2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대동병 유격장군 도지휘첨사(欽差統領大同兵游擊將軍都指揮僉事) 양만금(楊萬金)은 마병 1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선대초모이병 유격장군 도지휘첨사(欽差統領宣大招募夷兵游擊將軍都指揮僉事) 파새(擺賽)는 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삼영둔병 유격장군 도지휘첨사(欽差統領三營屯兵游擊將軍都指揮僉事) 노득공(盧得功)은 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계진영평첨방남북관병 유격장군 서도지휘첨사(欽差統領薊鎭永平添防南北官兵游擊將軍署都指揮僉事) 진인(陳寅)은 보병 4천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광복조병 유격장군 도지휘첨사(欽差統領廣福調兵游擊將軍都指揮僉事) 도관(塗寬)은 마병 8백 50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선부영병 유격장군 도지휘첨사(欽差統領宣府營兵游擊將軍都指揮僉事) 안본립(安本立)은 마병 2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흠차진정영좌영관 도지휘동지(欽差眞定營坐營官都指揮同知) 설호신(薛虎臣)은 마병 3천을 거느리고,
흠차통령절직수병 유격장군 도지휘첨사(欽差統領浙直水兵游擊將軍都指揮僉事) 계금(季金)은 주사(舟師 해군) 3천 3백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남북조병 오군사영참장 도지휘사(欽差統領南北調兵五軍四營參將都指揮使) 노계충(盧繼忠)은 마병 2천 7백 70명을 거느리고,
흠차협수동로참장 도지휘사(欽差協守東路參將都指揮使) 양등산(楊登山)은 마병 1천 2백 명을 거느리고,
흠차통령서로참장 도지휘동지(欽差統領西路參將都指揮同知) 이녕(李寧)은 대동마병(大同馬兵) 2천 6백 40명을 거느리고,
흠차준화영병참장 도지휘첨사(欽差遵化營兵參將都指揮僉事) 진우문(陳愚聞)은 마병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천총(千摠) 섭방영(葉邦榮)은 절병(浙兵)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천총(千摠) 섭조계(葉朝桂)는 보병 3백 명을 거느렸다.
모두 마귀에게 통솔되었다. 그중에 용맹한 장수로 우백영(牛伯英)은 호는 소천(少川)이니, 보안위(保安衛) 사람인데,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었다. 동양정(佟養正)은 임진년(1592, 선조 25)에 파직되어 돌아갔다가 이번에 재물을 바치고 속죄되어 오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그의 청렴한 덕에 감복하여, 그를 위해 1백 50곡(斛)의 쌀로 도와주었더니, 동양정이 모두 은자로 값을 계산하여 돌려주었다. 해생(解生)은 자는 문영(文英)이요, 호는 순천(順泉)으로 선부(宣府) 전위(前衛) 사람이다. 날래고 용맹하며 전투를 잘하여 전진(戰陣)에 나아가면 반드시 먼저 오며, 부하 단속을 매우 엄하게 하고 성품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웠다. 매양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랑캐 군사로서 국가의 과분한 은혜를 입었으나 천승(千乘)의 군왕과 대등한 예절로 대하는 것은 감히 당할 수 없다.”
하고, 접대할 때에는 부복하며 다 마신 뒤에는 절하고 일어나기를 매우 공경히 하였다. 노계충(盧繼忠)은 호는 앙운(仰雲)이며, 절강(浙江) 건주위(虔州衛) 사람이다. 양등산(楊登山)은 자는 개명(愷明)이니, 선부(宣府) 회안위(懷安衛) 사람으로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며 역시 먼저 올랐었다. 파새(擺賽)는 호는 서하(西河), 대동우위(大同右衛) 사람으로 오랑캐 장수 가운데 가장 용맹하고 건강하다. 파귀(頗貴)는 자는 세걸(世傑), 호는 진천(晉川)이니, 선부우위(宣府右衛) 사람으로 용력이 매우 뛰어나서 해생ㆍ양등산ㆍ파새와 더불어 명성이 비등하여 사장(四將)이라 부른다. 시등과(柴登科)는 자는 앙원(仰元), 호는 급천(汲泉)이다. 모국기(茅國器)는 호는 행오(行吾)이니 절강(浙江) 소흥위(紹興衛) 사람으로 무진사(武進士) 출신이다. 이화룡(李化龍)은 호는 뇌문(雷門)이니, 보정 중위(保定中衛) 사람이다. 양만금(楊萬金)은 산서(山西) 태원(太原) 사람이다. 진인(陳寅)은 호는 빈양(賓陽)이니, 절강(浙江) 온주부(溫州府) 금향위(金鄕衛) 사람이다. 계금(季金)은 자는 장경(長庚), 호는 용강(龍崗)이니, 절강(浙江) 태주부(台州府) 송문위(松門衛) 사람이다. 안본립(安本立)은 호는 탁오(卓吾)이니, 광녕(廣寧) 사람이다. 설호신(薛虎臣)은 호는 평계(萍溪)이니, 직례(直隷) 보정부(保定府) 사람이다.
또 흠차정칙요양등처 해방병비 산동안찰사(欽差整勅遼陽等處海防兵備山東按察使) 소응궁(蕭應宮)으로 그 군사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소응궁은 호는 관복(觀復), 남직례(南直隷) 소주부(蘇州府) 상숙현(常熟縣) 사람으로 갑술년(1574, 선조 7)에 진사가 되었다. 또 흠차관리비왜양향 호부산동청리사 낭중(欽差管理備倭糧餉戶部山東淸吏司郞中) 동한유(董漢儒)로서 그 군량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동한유는 호는 의대(誼臺), 직례(直隷) 대명부(大名府) 사람으로 기축년(1589, 선조 22)에 진사가 되었다. 또 흠차분수요진동녕도 대관방해도사 하남포정사우참의(欽差分守遼鎭東寧道帶管防海道事河南布政司右參議) 장등운(張登雲)과 흠차찬획군무 병부직방사 원외랑(欽差贊畫軍務兵部職方司員外郞) 양위(楊位)로 그 군무(軍務)를 찬획(贊畫)하게 하였다. 장등운은 호는 호우(浩宇), 산동(山東) 연주부(兗州府) 경양현(慶陽縣) 사람으로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신미년(1571, 선조 4)에 진사가 되었고, 양위는 호는 금계(錦溪), 하남부(河南府) 여령(汝寧) 사람인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경진년(1580, 선조 13)에 진사가 되었다
이해(1592, 선조 25) 5월 9일 저녁 때 제독 마귀(麻貴)가 요양(遼陽)에 당도하고, 18일에 압록강을 향하여 동쪽으로 떠나니 군사가 1만 7천 명이었다. 제독이 군사가 강을 건널 것을 제청(題請)하니, 경리는 소(疏)를 올려, 사천(四川)과 절강(浙江)에서 군병을 모집할 것과 아울러 계ㆍ요ㆍ선ㆍ대ㆍ산ㆍ섬(薊遼宣大山陝) 등지의 군사를 징발할 것을 청하고, 또 조선은 오직 한산(閑山) 해군이 조금 억셀 뿐이라 하여 다시 복건(福建)ㆍ오송(吳松)의 해군을 징발하고, 또 유정(劉綎)을 독려하여 천한(川漢)의 군사 6천 7백 명을 거느리고서 기다리다가 후일에 원병을 계속할 것을 청하니, 전후 징발한 통수(統數)가 14만 2천 7백 여명이었다. 그때에 마 제독이 은밀히 보고하기를,
“선대(宣大)의 군사가 먼저 왔으니, 왜군의 대비가 없는 틈을 타서 곧장 바로 부산을 빼앗아 그 예기를 꺾자.”
하니, 경락은 말하기를,
“바로 부산을 빼앗게 되면 행장(行長)을 사로잡을 수 있고 청정(淸正)을 쫓아낼 수 있으니, 이는 기묘한 계책으로 형편상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제독이 이에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는데, 양원(楊元)은 충주(忠州)로 달려가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은 남원(南原)을 지키게 하고, 모국기(茅國器)는 성주(星州)에 머물게 하고, 진우충(陳愚衷)은 전주(全州)에 진치게 하였다. 그래서 양원 등이 6월에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양원은 충주가 잔파(殘破)되었으므로 오유충과 지역을 바꾸어 남원을 지켰다.
○ 7월. 마 제독(麻提督)이 압록강을 건너 벽제(碧蹄)까지 달려와서 생각하기를,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1천 4백 리이고, 남원과 충주도 모두 거리가 수백 리나 되어 형편이 달려가 무찌르기 어려우며, 또 행장은 부산에 진치고 있고, 청정은 서생포(西生浦)에 진치고 있으니, 만약 부산을 쳐부수려면 육로로는 반드시 양산(梁山)을 경유하여야 하는데 양산의 서북쪽에 높은 재가 있어 겨우 말이 다닐 만하고 지극히 험하며, 남쪽에는 삼랑(三浪)의 큰 강이 있어 김해(金海)와 죽도(竹島) 두 곳으로 바로 통하여 모두 인후(咽喉)같은 요새이므로 왜구가 반드시 굳센 군사를 매복하였을 것이다. 수로로는 반드시 거제(巨濟)ㆍ가덕(加德)ㆍ안골(安骨) 세 곳을 경유하여야 하는데 이곳도 또한 인후같은 요새이므로 적선이 계속하여 주둔해 있고 오직 거제만이 아직 왜병이 주둔하고 있지 않으니, 이를 먼저 점거하여야 할 것이나 한번 양산(梁山) 땅이나 삼랑강(三浪江)을 지난 뒤에 왜구가 수군ㆍ육군 각기 한 부대씩 양산의 동서쪽 요새지에 지키고 있으면 우리 군사는 응원군을 보내서 구할 수 없고, 더욱이 기장(機張) 등지의 왜병이 동쪽으로부터 오게 되면 더욱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청정을 치려 한다면 육로로는,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는 동래(東萊)와 기장을 경유하여야 하고,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경주(慶州)ㆍ울산(蔚山)을 경유하여야 하는데, 이 길은 동남은 큰 바다이고, 서북은 산과 잿길이며, 또 논이 많아서 보병만 사용할 수 있다. 수로로는,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장기(長鬐)ㆍ감포(甘浦)ㆍ개운(開雲)을 경유하여야 하는데, 장기는 왜병의 수책(水柵)이 아주 외롭고 약하므로 믿을 데는 바다밖에 없으나 수전(水戰)은 불리하므로 반드시 정규군을 쓰되 모름지기 동서에 각각 수군 한 부대씩 배치하여 그들의 돌아보는 것을 견제하게 하고 또 기병(奇兵)을 써서 육로에서 충돌하게 하며, 따라서 남원의 한 부대는 전라도를 방어하고, 대구(大丘)의 한 부대는 경상도를 방어하게 하고, 또 한 부대로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주둔하게 하되, 의령(宜寧)이나 진주(晉州)같은 곳을 중견(中堅)으로 삼은 뒤에 두 길로 수병을 나누어 부산과 기장을 향하여 동서로 일제히 쳐들어가는 것, 이것이 딱 들어맞는 계책이나 군량이 부족하여 가벼이 거행하기 어려울 것같다.’ 하여, 이에 황제에게 소를 올리니, 황제는, ‘경리와 상의하여 토벌할 것을 도모하라.’고 유시하였다.
이때에 태학사(太學士) 장위(張位) 또한, 개성과 평양 두 곳에 개부(開府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서쪽으로는 압록강과 여순에서 오는 군사를 접응하게 하고, 동쪽으로는 서울과 조령(島嶺)의 후원이 되게 하며, 산의 쇠붙이를 불리어 군용에 충당하게 하고 남녘의 장수를 구원하여 왜적을 방어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우리 나라에 선유(宣諭)하였다. 이에 그 불편한 사정과 연유를 아뢰었는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세 곳에 도읍이 있으니, 한성ㆍ개성ㆍ평양으로서 이제 모두 잔파(殘破)되었고, 도읍하고 있는 한성 또한 가시덤불을 제거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행세로는 전라ㆍ경상 두 도(道)를 중하게 여기는데, 경상도는 문호(門戶)요 전라도는 창고로서 경상도가 없으면 전라도도 없어지는 것이요, 전라도가 없어지면 비록 다른 도가 있다 할지라도 끝내 의뢰하여 근본으로 삼을 데가 없게 되므로 이것이 곧 왜구가 반드시 침략하려는 바요, 우리는 반드시 지키려는 바입니다. 왜구가 만일 전라도를 점거하게 된다면 멀리는 서해의 일대에, 가깝게는 진도(珍島)와 제주(濟州)가 모두 왜적의 소굴이 되어 세로 가로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하루나 이틀이면 압록강에 도착할 수 있으니, 즉 개성이나 평양을 견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구가 육로로 평양까지 오고 또 수로를 따라 전라도를 범하고 돌아서 서해로 나오려는 것을 다행히 수군이 한산도에서 막아냈습니다. 이제 왜구가 경상 좌우도에 점거하고 있는데 부산과 서생포가 그 소굴이 되고 대마도와 부산 사이 바닷길 수백 리가 양도(糧道)가 되고 있으니, 경상도의 요해처(要害處)를 가리어 군량은 쌓아놓고 때때로 날랜 군사를 내어 기회를 살펴 쳐부수어서 그 세력을 쭈그러들게 하고, 또 편리한 군함과 정예로운 군사로 해상에 출몰시켜서 그 뒤를 요격한다면 조금 성공함이 있을 것이거니와, 만일 개성이나 평양에 둔전을 설치한다면 토지가 높고 메말라서 끝내 남방만 못할 것입니다.”
성지를 받드니,
“해당 부(部)가 알아서 하라”
하였다. 병부에서 회주(回奏)하기를,
“두 곳에 둔전하는 것은 계책이 매우 불편합니다.”
하여, 그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그때에 총병 양원 등이 각기 임지로 가서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협공할 기세를 만들었다. 한강 이남은 남원이 호남과 영남의 사이에 있어서 성이 제법 견고하고 완전하였는데, 총병 낙상지(駱尙志)가 일찍이 무너진 곳을 보축(補築)하여 지킬 수 있는 곳이 되었고, 성밖에 교룡산성(狡龍山城)이 있어 여러 사람이 그곳에서 지키려 하니, 양원은 생각하기를, ‘본성을 지킬 만하다.’ 하고, 이에 한 길은 더 높이 쌓고 성밖에 참호를 파며, 참호 안에 또 양마장(羊馬墻)을 쌓고 포(砲) 구멍을 많이 뚫어서 성문에는 대포 2~3문을 설치하여 밤낮으로 감독하여 한 달 남짓만에 대략 완성되었다. 양 경리가 이에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차례로 강을 건너서, 경리는 평양에 주둔하고 제독 이하는 서울에 주둔하였다. 먼저 가등주계두(加藤主計頭)청정(淸正)임 가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우리 나라 해군을 두려워하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을 꺼려서 간첩을 풀어 그를 제거하고자 하니, 평행장(平行長)이 그의 장수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김응서(金應瑞)의 진영에 왕래하면서 은근한 의사를 표시하게 하고, 또 청정과 화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게 하였다.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우리 대장 평행장이 말하기를, ‘이번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모두 청정 때문이므로 내가 매우 그를 미워한다. 아무 날에 청정이 바다를 건너와서 아무 섬에 유숙할 것이다.’ 하는데, 조선 사람은 수전을 잘하므로 만일 바다 가운데서 요격한다면 이길 수 있을 터이니, 기회를 잃지 마시오.”
하니, 김응서가 이를 믿고 그 일을 치계(馳啓)하였다. 조정이 그렇게 여기고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는 기회를 잃을 수 없다 하여, 여러번 아뢰어 청하니, 상이 대신 및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부르고 또 황신(黃愼)을 불러 다방면으로 의논하였다. 상이 황신에게 묻기를,
“행장과 청정 두 적이 과연 이같이 틈이 생겼겠는가?”
하니, 황신이 대답하기를,
“두 적이 비록 서로 원수일지라도 왜적의 우두머리가 명령한 것이므로 다르고 같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또 예로부터 기모비계(奇謀祕計)가 적인에게서 나와 우리에게 이익이 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황신의 말을 옳게 여겨 유성룡(柳成龍)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말이 정히 옳은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는데, 좌우 신하들이 요행히 혹시라도 성공될까 하여, 황신을 보내서 살펴보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이순신에게 전진을 독촉하여 바다 가운데서 요격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황신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경을 보내려 하나 오래 수고한 데에는 어찌할까?”
하니, 황신이 대답하기를,
“임금의 명령인데 무슨 수고로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조회가 파하자 곧 떠났다. 황신이 해외(여기서는 일본 사행(使行)을 말함)로부터 돌아와서 미처 그 어머니를 뵙지 못하였으나 또한 싫어서 꺼리는 빛도 나타내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여러 군사를 위문한다고 명목을 붙였으나 실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청정을 사로잡으라 한 것이었다. 황신이 이순신에게 달려가서 은밀히 조정의 의견을 알리니, 이순신이 말하기를,
“바닷길이 험난하고 적이 반드시 여러 곳에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니, 배를 많이 거느리고 간다면 적이 알지 못할 리 없고, 배를 적게 거느리고 가다가는 도리어 습격을 당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실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청정이 과연 그 섬에 왔으니 실은 행장과 의논하여 파리한 군사로써 우리를 유인한 것이었다. 요시라가 또 김응서에게 말하기를,
“청정이 이제 이미 육지에 내렸는데, 조선이 어찌하여 바다 가운데서 쳐부수지 않았습니까?”
하고, 거짓으로 애석해하는 체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모두 이순신을 탓하고, 대간(臺諫)에서는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며, 전 현감(縣監) 박성(朴惺) 또한 상소하여 이순신을 목베어야 한다고 극언하니, 드디어 의금부 도사를 보내서 잡아오고 원균을 대신 통제사로 삼았다. 상이 오히려 보고된 것이 모두 진실하지 못할 것을 의심하여 성균 사성(成均司成) 남이신(南以信)을 보내어 한산도에 가서 염탐하게 하였더니, 남이신이 역시 아뢰기를,
“청정이 7일 동안 바다 위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가 만일 갔더라면 잡아올 수 있었는데, 이순신이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므로, 이에 옥에 가두고 대신에게 죄를 의논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명장이므로 죽여서는 안 되며, 군기(軍機)에 관해 이롭고 해로운 것은 멀리 앉아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니, 그가 나아가지 않은 것은 반드시 의미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후일에 공을 세우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을 한 차례 고문하고 사형을 감하여 삭탈관직하고 충군(充軍)하였다. 이순신의 늙은 어머니가 아산현(牙山縣)에 있었는데, 이순신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고 근심하여 죽었다. 이순신이 옥에서 나와 아산에 들려 성복(成服)을 마치고 곧 도원수의 막하로 가서 종군(從軍)하니, 사람들이 듣고 모두 슬퍼하였다. 당시 조정에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의논의 갈라짐이 더욱 심해져서 서인(西人)은 원균(元均)을 편들고, 동인(東人)은 순신을 편들어 서로 공격만 하고 군대 일은 생각 밖에 버려두었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원균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부임하게 되자 그의 법령을 다 바꾸고 사납고 강퍅한 것으로 일삼으니, 군심(軍心)이 원망하고 분해하여 술을 즐겨 취해 주정하고 성내며, 형벌이 법도가 없어 호령이 행해지지 않았다. 이때에 평행장(平行長)이 또 요시라(要時羅)를 보내서 김응서(金應瑞)를 속여 말하기를,
“왜선(倭船)이 아무 날에 더 오게 되었으니 조선 해군이 요격하면 좋을 것이오.”
하니, 김응서가 그 말을 믿고 원수(元帥)에게 말하여, 원균에게 진격할 것을 재촉하니, 원균이 비록 그 형세가 어려운 것을 알기는 하나, 이미 이순신의 머뭇거리던 것을 모함하였으므로 어떻게 말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겨 다만 전함을 모두 거느리고 전진하여 요격할 태세를 취하였다. 해안에 있던 적이 우리 나라 군사가 노를 저으며 조수를 타고 나오는 것을 굽어보고 서로 연락을 취하였다. 원균이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니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고 날도 어두워 캄캄하며, 배를 정박할 곳도 없는데 멀리 바다를 바라보면 왜적의 배가 무수히 왔다 갔다 하였다. 원균이 모든 군사에게 전진하여 싸울 것을 독촉하니,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이 힘써 간언하기를 갑자기 싸워서는 안 되고 또 섬 사이 물이 구비쳐서 배가 다니지 못하니, 다른 곳으로 진을 옮김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원균이 모두 듣지 않자 ★【배설】★은 이에 사사로이 자기가 거느린 배의 부하들에게 엄하게 경계하면서 변고를 기다리다가 왜적이 침범하여 오는 것을 보고 항구를 벗어나 도망하자 하였다.
원균이 북을 울리며 나아가기를 끊임없이 재촉하니, 배 가운데 사람들이 한산도에서부터 쉴 새 없이 종일 노를 저어왔고, 또 주리고 목마르며 피곤하여 배를 운전할 수 없으며, 여러 배가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여 앞으로 나갔다가 물러나야 하는데, 왜적이 피로하게 만들려고 우리 배와 서로 가까이 와서는 번번이 거짓으로 피하여 달아나고 싸움을 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이 몹시 불어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내려가서 간 방향을 알지 못하니 원균이 간신히 나머지 배를 수습하여 가덕도(加德島)에 돌아왔다. 군사들이 목이 말라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구하려 할 즈음에 왜병이 섬속에서 튀어나와 엄습하여, 장수와 군사 4백여 명을 잃어버렸으므로 원균이 할 수 없이 거제(巨濟) 칠천도(漆川島)로 후퇴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고성(固城)에 있다가 원균이 아무 소득이 없다 하여 불러다가 곤장을 치고 다시 나아가기를 독촉하였는데, 원균이 군중으로 돌아와 홧김에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워 자니, 모든 장수가 만나보고 일을 의논하려 하여도 되지 못하였다. 밤중에 왜적의 배가 와서 습격하니, 우리 군사는 크게 무너져버리고 원균은 해변까지 도망하여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 달아나려 하나 몸이 살찌고 둔하여 소나무 아래 앉아서 휴식할 적에 좌우의 부하들이 흩어져서 왜적에게 살해되니, 그날이 8월7일이다. 이를 증명하는 시가 있다.
전해 이르기를 동쪽 나라 왜적이 / 傳道扶桑寇
하뢰(한의 장군 명호)의 군사를 몰래 요격하니 / 潛邀下瀨師
병선은 갑자기 물에 빠지고 / 戈船俄渰死
도호엔 패전한 여시(輿尸 패전하여 수레로 시체를 실음)뿐이라네 / 都護摠輿尸
한 나라 장수가 월을 능히 벨 수 있는데 / 漢將能誅粵
주 나라가 기산(주의 처음 도읍)에 도읍할까 두렵네 / 周居恐邑岐
밤중에 일어나 앉아 눈물 흘리는데 / 中宵坐垂淚
근심하는 이 마음 누가 알리 / 憂憤有誰知
이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는 배에서 몸을 물에 던져 죽고 군수(郡守) 안홍국(安弘國)은 총알에 맞아 죽었으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은 그의 전선을 거느리고 달아나서 한산도에 이르러 불을 놓아 막사와 양곡과 군기(軍器)를 태워버리고 섬속에 머물러 살아남은 백성을 옮겨 적을 피해 가도록 하였다. 한산(閑山)이 패하자 적이 이긴 기세를 타서 서쪽으로 향하니 남해(南海)와 순천(順天)이 차례로 함몰되고 두치진(斗恥津)에 이르러 육지로 내려와 몰려나오니 호남과 호서가 크게 진동하였다.
관전보총(寬典堡摠) 마동(馬棟)이 비보(飛報)하기를, ‘청정의 군사가 이미 호남ㆍ호서로 향하였다.’ 하고, 왜선 2백 척이 잇달아 기장(機張) 등지에 둔치고 있다는 사실을 연이어 비보하니, 황제가 경략(經略)에게 명하여 심유경을 체포하게 하였다. 그래서 경략이 심유경을 위문한다 속이고 가만히 붙잡고자 하여, 양원(楊元)에게 부탁하여 먼저 군사를 교체한다고 가탁하고서 심유경이 있는 곳에서 붙잡으려 하였다. 왜병이 육지에 내려 점점 내륙을 향하여 이동하게 되어서는 심유경이 더욱 두려워하고, 또 석 사마(石司馬 석성(石星))가 파면되고 대군을 또 내보낸다는 말을 듣고 이에 군사를 이끌고 의령(宜寧)으로 나아가서 행장(行長)의 말대로 몰래 왜국으로 달아나려 하니 평조신(平調信)이 과연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맞이하였다. 양원이 그 사실을 듣고 단기(單騎)로 단계(丹溪)에 들어가 심유경을 덮쳐 붙잡아 중국 조정으로 묶어 보냈는데, 심유경이 많은 재물로써 산동 안찰사(山東按察使) 소응궁(蕭應宮)에게 뇌물을 주고 글을 올려 자기를 구원해 주기를 바랐다. 소응궁이 이에 글을 군문(軍門)에 보내니, 경리가 생각하기를, ‘유경이 다른 일이 없음을 보증할 만하다.’ 하여, 초안을 가지고 상주하자, 형 군문(邢軍門)이 보고 크게 괴이히 여겨 소응궁의 글로써 아뢰었다. 소응궁이 군문찬획(軍門贊畫) 양위(楊位)와 정응태(丁應泰)를 보내서 심유경을 힘껏 구해주려고 하니, 그 글은 이러하다.
소응궁은 아룁니다. 심 유격(沈游擊)의 일에 대하여는 제가 청정이 장수 계인(啓仁 중의 이름으로 유정(惟正))과 왕래한 서찰을 조사해 냈는데, 이는 조선이 예전에 관백(關白)에게 사사로이 통정한 적이 있었으므로 관백이 하례할 것으로써 그를 책망하면서 왕자와 배신을 보낼 것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조선 사람은 하나도 나랏일을 담당함이 없어 번번이 처분을 듣지 않고, 아울러 배신으로도 가려 하지 않아서 그 임금을 어리석게 만들어서 중국의 귀를 막히게 하고, 또 중국을 어리석게 하여 왜노들과 싸우게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군량이 있으면서 일부러 숨겨두고 재물이 있으면서 일부러 버려서 우리 나라로 하여금 천 리나 떨어진 곳에 군량을 보내게 하였으나 3군이 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문하(門下)께서 그 정상을 살피신다면 반드시 심유경을 불쌍히 여기고 조선을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일에 여러번 제대(制臺)에 알리면서 문하에 아뢰지 않은 것은 제대에서 조용히 처리하여 조정 의논에까지 이르러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지 말도록 하려 함이었는데, 뜻밖에 다시 근일의 상소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세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는데, 저는 도리어 심경만 보전하려고 이미 보장(保狀)을 제대와 경원(經院)에 갖추어 내었습니다. 만일 만회할 수 없다면 제가 마땅히 구원하러 갈 것이고 이제 의논할 것은 그 후임입니다. 다행히 문하께서 한가지로 일하시기를 함께 기약하셨으니, 한번 존귀하신 분부를 빌려 처결하소서. 왜적에게 다른 뜻이 없고 심유경도 별다른 정상이 없으며, 저 다른 사람의 말은 모두 아무 근거 없는 것입니다.
요동 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가 듣고 소응궁을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하여 회적(回籍)하고, 심유경을 금의위(錦衣衛) 옥에 가두었다. 천자가 또 명하여 상서(尙書) 석성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석성은 자는 공신(拱宸), 호는 동천(東泉)이며,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이다. 가정(嘉靖) 기미년(1559, 명종 14)에 진사가 되고 융경(隆慶) 무진년간에 급사중(給事中)으로서, ‘밤새도록 술마시는 것을 절제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많은 나랏일에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간언을 받아들이는 길을 넓히지 않을 수 없으며, 참소하는 말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극간하니, 황제가 크게 노하여 조정에서 곤장을 치고 관직을 삭탈하게 하고서 오봉루(五鳳樓)에 올라 가만히 곤장치는 자를 살펴보고 중조(中朝)의 문지기에게 급사(給事)의 종인(從人)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친구 부랑(部郞) 목문희(穆文熙)가 석성이 곤장을 맞아 죽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먼저 백제수(白緹帥)처럼 차리고 자기 겨드랑이로 석성을 끼고 나오니 문지기들이 모두 꾸짖으므로 목문희도 한편 꾸짖으며 한편 끼고 나와서 석성이 겨우 죽지 않게 되었다. 왕가빈(王嘉賓)이 상소하여 구원하려 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이 〈속오자편(續五字篇)〉을 지었으니, 그 시는 이러하였다.
석생이 예전에 올린 소장이 / 石生昔抗章
하늘을 부여잡고 별을 움직였네 / 攀天動星辰
꽃다운 명성 온 세상에 퍼졌는데 / 芬芳一世間
뉘라서 가까이하지 않을 수 있으랴 / 誰能不見親
사귐은 모름지기 만절을 의논하고 / 論交須論晩
재주는 모름지기 참다움 논하는 것 / 辨才須論眞
가슴 속 한번 서로 헤쳐보니 / 肺腑一相披
세상엔 그런 사람 다시 없어라 / 灼然世無人
미앙궁 성대함은 / 未央鬱造霄
그대의 훌륭함에 힘입었네 / 賴子表嶙峋
개연히 장수 흐르는 곳 생각하니 / 慨然念漳流
세상에 드문 보배 없어지도다 / 淪沒連城珍
만력(萬曆) 초기에 와서 드디어 석성이 크게 쓰이니, 온 세상이 그 풍채를 우러러보았고, 문장과 절행이 있고 풍도가 우뚝하여 한번 보아도 대인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임진년(1592, 선조 25)에 여러 사람의 의논을 힘써 물리치고 군사를 보내와서 구원해 준 석성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에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모두 제사지냈다.
처음에 심유경은 본래 하나의 무뢰한이었는데 석성이 잘못 그의 차관식병(借款息兵 공을 바치게 하고 전쟁을 중지함)하자는 유세에 빠져 본의는 비록 나라를 위한 것이나 자기 주장으로 굳혀 드디어 온 나라 사람의 말에 맞서면서 군비를 절감한다는 핑계로 싸움터의 군사를 다 거두어들였다. 소인에게 의지하여 성공하려 하였으니,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 국왕의 책봉하러 간 사신이 너무 오래 걸리므로 역시 조금은 의심이 나서 심복을 보내서 정탐하게 하였다가 다시 말을 꾸미는 데 마음이 헛갈려 스스로 무엇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황제에게 아첨하려고 진기로운 구슬과 거위털로써 동창관교 (東廠官校)의 사실 누설을 막으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늙어서 하늘이 그의 넋을 빼앗아간 것이다. 심유경은 소인이므로 무슨 짓인들 못하랴? 일찍이 요진독무(遼鎭督撫)의 말처럼 이런 무리를 파면시켜 보내고 유정(劉綎)과 오유충(吳惟忠) 등의 방수(防戍)를 다 거두지 않았던들 또한 어찌 잘못된 사실을 속이기에 이르렀겠는가? 대신이 나랏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는 오직 공정하고 사심이 없어야 될 뿐이니 어렵도다. 이때에 중국 조정에서 석성을 두둔하는 사람은, 심유경이 왜국과 접촉한 소식을 의심하여 석성의 죄를 늦추려 하고, 심유경을 두둔하는 사람은 심유경의 평양에서의 공을 거짓 칭찬하여 스스로 그 죄를 늦추려 하였다.
이때에 한산도의 패전한 보고가 이르자 온 나라가 다 놀랐다. 그래서 상이 비변사(備邊司)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고 물으니, 뭇 신하가 당황하여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과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조용히 아뢰기를,
“이는 원균의 죄입니다. 오직 이순신을 기용하여 통제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좇고, 권율(權慄)도 역시 편의로써 이순신으로 하여금 가서 남은 군사를 수습하게 하였다. 왜적이 바야흐로 사방에 가득한데 이순신이 군관 한 사람을 데리고 경상도로부터 전라도에 들어가는데 밤낮으로 잠행(潛行)하여 간신히 진도(珍島)에 도달하여 군사를 모아 적을 막으려 하나 적병은 이미 남원을 향하였다. 원수(元帥) 이하가 소문만 듣고 달아나면서 각처의 산성에 들어가 지키고 있는 자에게 각자 흩어져 가 난리를 피하라고 전령하였으나 오직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창녕(昌寧) 화옥산성(火玉山城)에 들어가서 죽기로써 지킬 것을 기약하였는데, 왜적이 산 아래에 이르러 형세가 까마득하고 성안에 사람이 조용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쳐다보고 공격하지 않고 가버렸다.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은 황석산성(黃石山城)에 들어갔는데, 전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이 또한 성중으로 들어오니, 백사림은 무인이므로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적병이 성을 공격하자, 하루는 백사림이 먼저 도망가니 모든 군사가 궤멸되었다. 적이 성으로 들어오니 곽준은 그 아들 이상(履祥)ㆍ후상(厚祥)을 모두 죽였다. 곽준의 딸은 유문호(柳文虎)에게 시집갔었는데, 유문호가 왜적에게 사로잡히자 곽씨가 이미 성밖에 나갔다가 그의 남편이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종에게 이르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살아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남편도 잡혔으니 내가 살아 무엇하겠느냐?”
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전 함안 군수(咸安郡守) 조종도(趙宗道)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대부(大夫)로 지냈으니, 도망치는 무리들과 함께 초야에서 죽을 수는 없고, 죽는다면 마땅히 명백하게 죽을 것이다.”
하더니, 처자를 거느리고 성중으로 들어가서 시를 지었다.
공동산 밖에서는 사는 것이 기뻤지만 / 崆峒山外生猶喜
순원성 안에서는 죽어도 영광이네 / 巡遠城中死亦榮
그런데 이때에 와서 드디어 곽준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이순신이 진도(珍島)에 오니, 배와 기계가 쓸어버린 듯이 남은 것이 없었는데, 마침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이 전선(戰船) 8척을 거느리고 왔으며, 또 녹도(鹿島)의 전선 1척을 얻었다. 이에 ★【배설】★을 속여 나아가 싸울 계책을 말하니, ★【배설】★이 말하기를,
“일이 급박하니,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서 호남 진영(湖南陣營)을 택하여 싸움을 도와 공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엿으나, 이순신이 듣지 않으니, ★【배설】★이 이에 배를 버렸다. 그래서 이순신이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김억추(金億秋)를 불러 관하의 제장(諸將) 다섯 사람을 소집하게 하고 병선(兵船)을 수습해서 모든 장수에게 분부하여 전함같이 꾸며서 군세(軍勢)를 돕게 하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함께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사생을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기를 어찌 아낄 것이냐?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광이 될 것이다.”
하니, 모든 장수가 감복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에 이순신이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일어나서 두 번째 변방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는데, 영남과 호남의 모든 군영이 다 왜적의 보금자리가 되어 행장은 육로에서, 의지(義智)는 수로(水路)에 있으면서 계획을 세우고 정예한 군졸을 비축하여 우리의 흠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순신이 혼자서 쇠잔한 군사로 13척의 전선(戰船)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 주둔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위태롭게 여기되 밤낮으로 엄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에 달빛이 낮과 같은데 이순신이 갑옷 입은 채로 북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앉아서 옆에 있는 사람을 불러 소주를 가져오라 하여 한 잔을 마시고 모든 장수를 앞에 불러놓고 말하기를,
“오늘밤 달빛이 매우 밝다. 왜적의 꾀가 간사스러움이 많아서 달이 없을 때라면 본래 우리를 습격하겠지만 달이 밝아도 또한 와서 습격할 듯하니, 경비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호각을 불어 모든 배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모든 배에 전령하여 척후를 세우고 변을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후에 초탐선(哨探船)이 왜적이 온다고 급히 보고하니 이순신이 호령하여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에 달이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기울어 반쪽은 어두컴컴한데, 무수한 적석이 컴컴한 곳을 따라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에 중군(中軍)이 화포를 놓고 고함을 지르자 모든 배가 호응하니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일시에 조총을 쏘아대어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이순신이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적이 드디어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 달아나니 여러 장수가 모두 탄복하여 귀신같이 여겼고 이순신 또한 우수영(右水營) 명량(鳴梁) 바다 가운데로 회군하였다.
날이 밝아서 바라보니 적선 5~6백 척이 바다를 덮어 올라왔다.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원래 수전(水戰)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로서 바야흐로 서해(西海)를 침범하고자 하여 그 세력이 지극히 크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순신은 적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힘으로 싸워 이기기는 어려우므로 꾀로써 격파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배를 타고 피난하던 호남 지방 사람들이 모두 순신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피란온 배로 하여금 차례차례로 물러가서 늘어세워 포진하게 하여 의병(疑兵)을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게 하고, 이순신은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바로 나오니, 적은 이순신이 배를 정비하여 나오는 것을 보고, 각자 노를 저으며 북을 울리고 소라를 불면서 용기를 내어 곧장 나오는데 깃발과 망대(望臺)가 바다 가운데 가득하니, 우리 군사가 보고 실색하였다.
이때에 아침 조수가 바야흐로 물러갈 때여서 항구에 물살이 거세었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는데 바람이 빨라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바로 적의 앞을 충돌하니, 적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였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순신이 모든 배를 독려하여 잇달아 진격하여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순신이 돛대를 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니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므로 이순신 또한 진을 보화도(寶花島)로 옮겼다. 이때에 이순신이 이미 전사(戰士) 천여 인을 얻었는데 군량이 부족될까 걱정하여 해로 통행첩(海路通行帖)을 만들고 영을 내리기를,
“삼도(三道 전라ㆍ충청ㆍ경상)의 연해에서 공사선(公私船) 간에 통행첩이 없으면 간세(奸細)로 논하고 통행할 수 없다.”
하니, 이에 피난하여 배를 타고 온 자가 모두 통행첩을 받게 되었는데, 이순신이 배의 대소의 차에 따라 쌀을 바치고 통행첩을 받아가게 하되 큰 배는 석 섬, 중간 배는 두 섬, 작은 배는 한 섬으로 하니 피란온 사람들이 모두 재물과 곡식을 싣고 바다로 들어왔으므로 쌀을 바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통행하는 데 금법이 없는 것을 기뻐하여 열흘 동안에 군량 만여 섬을 얻었다. 또 백성을 모집하여 구리와 쇠를 운반하여 대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일마다 모두 마련되자, 원근의 피난하는 사람들이 가서 의지하였다. 이순신이 막사를 만들어서 판매해서 살게 하니 섬안에서는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한산도 여러 장수가 패전할 때에 각자 도망하였는데 이순신이 날마다 그 막하 비장을 보내서 여러 섬에 알리니 장사(壯士)들이 구름같이 모여 군사의 형세가 크게 떨쳤다. 이때 조정에서 또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군사 6~7천 명을 징발하여 강탄(江灘)을 나누어 지키게 하니, 조신(朝臣)들이 다투어 피난갈 계책을 드리는데, 지사(知事) 신잡(申磼)이 아뢰기를,
“어가는 영변(寧邊)으로 거둥하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병사(兵使)가 되었을 때 영변의 일을 자세히 아옵는데, 가장 급하게 걱정되는 것은 간장이 없는 것이니 만일 미리 마련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계속 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전해 듣는 사람이 비웃기를,
“신불합장(辛不合醬 신일(申日)에 장 담그기를 꺼린다는 말로 잡의 성이 신씨(申氏)이므로 조롱하는 말)이라.”
하였다. 조정에서 도원수 권율을 부르자, 권율이 빨리 달려 입조(入朝)하니, 상이 놀라서 이르기를,
“남쪽에 적의 세력이 바야흐로 성한데, 어찌하여 갑자기 입조하는고?”
하자, 권율이 대답하기를,
“분부가 계셨습니다.”
하니, 옆에 모시고 있던 사람이 아뢰기를,
“적병이 이미 핍박하여 왔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한강을 끊어 지키고자 하여 불러온 것입니다.”
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한강을 끊어 지키는 일을 오로지 권율에게 책임지우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8월 13일. 왜적이 곧장 남원(南原)을 공격하니 성중에 사는 백성은 도망하여 흩어지고 양 총병(楊摠兵)이 홀로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에 있었다. 총병이 격문을 보내 전라 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을 불러 같이 지키자고 하니 광양 현감(光陽縣監) 이춘원(李春元)과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가 잇달아 왔다. 김경로는 전주에 있었는데, 남원이 위급함을 듣고 길을 갑절이나 걸어 전진하니, 장사(壯士) 임사미(林士美) 등이 모두 따랐다. 그래서 교룡산(蛟龍山) 아래로부터 바로 들어가는데 사기가 제법 웅장하였다. 이날에 적의 선봉 백여 명이 성밑에 이르러 조총을 쏘다가 조금 뒤에 그치고 진지 사이에 모두 흩어져 엎드려 있으면서 삼삼오오로 왔다갔다 하므로 성위의 사람이 승자포(勝字砲)로 쏘았다. 왜의 대진(大陣)은 먼 곳에 있으면서 때로 유격병을 교대로 내어 교전하게 하였는데, 진각(陣脚)이 엉성하기 때문에 포를 쏘아도 맞히지 못하고 성을 지키는 군사가 이따금 총알에 맞아 죽었다. 왜병 한 사람이 성밑에 와서 성위의 사람을 불러 말할 것을 요구하므로 총병이 가정(家丁) 한 사람을 시켜 통사를 데리고 왜적의 진영에 가서 왜적의 글을 가지고 오니, 싸움할 것을 약속하는 글이었다.
○ 14일. 왜병이 삼면을 둘러싸고 진을 치고서 총과 포로 전날처럼 번갈아 공격하였다. 이보다 먼저 성 남문 밖에 민가가 조밀하였는데 적이 올 때쯤 하여 총병이 모두 불지르게 하였으나 돌담과 흙벽만은 남아 있으므로 적이 와서 담과 벽 사이에 의지하여 제 몸을 가리고 총을 쏘아 성위의 사람이 많이 맞았다.
○ 15일. 왜적의 무리가 성밖의 잡초와 논 가운데의 벼를 베어 큼직하게 무수히 묶어 담과 벽 사이에 쌓아놓은 것을 바라보았으나 성중에서는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그때에 유격장군(游擊將軍) 진우충(陳愚衷)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있었는데, 남원의 군사가 날마다 구원 오기를 바랐으나 오래 되어도 오지 않으므로 군졸의 마음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날 저녁 때 성첩을 지키는 군사가 군데군데 머리를 맞대고 귀엣말로 속삭이면서 말 안장을 준비하여 도망하려는 빛이 있었다.
밤에 왜진 중에서 떠드는 소리가 크게 일어나 서로 응답하는 것이 무슨 물건을 운반하는 모양이었는데 일면으로 포들을 성을 향하여 어지럽게 쏘니, 나는 탄환이 성위에 우박처럼 몰려와서 성위의 사람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밖을 내다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루 이틀이 지나자 떠드는 소리가 그쳤는데, 풀단으로 호(壕)를 평평하게 메워버렸고, 또 양마장(羊馬墻) 안팎에 수두룩하게 쌓아 잠깐 사이에 성과 가지런하게 되니, 뭇 왜적이 짓밟고 성에 오르자, 이에 성중이 크게 어지러워지고 왜적은 드디어 성으로 들어왔다. 우리 군사들이 남문 밖 안마당을 지키는 자가 모두 허둥지둥 성으로 들어오니 성위에는 사람이 없어지고 다만 성안 여러 곳에 불난 것만 보이므로 북문으로 달려가니, 명 나라 군사가 모두 말을 타고 문을 나가려 하는데, 문이 굳게 닫혀서 쉽게 열 수 없고 말발은 묶어 세운 듯이 길거리를 메웠다. 조금 있다가 문이 열리자, 군사와 말이 다투어 문을 나가니, 성밖에 있던 왜병이 두세 겹으로 에워싸고 저마다 요로를 지키다가 긴 칼을 뽑아 마구 치니, 명 나라 군사는 머리를 숙여 칼을 받을 뿐인데, 마침 달이 밝아서 벗어난 자가 몇 명 못 되었다. 총병(摠兵)은 가정(家丁) 두어 사람과 말을 달려 튀어나가서 겨우 몸만 살았는데, 어떤 사람은, ‘총병임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달아나게 한 것이다.’ 한다. 전라 병사 이복남(李福男)ㆍ남원부사(南原府使) 임현(任鉉)ㆍ조방장 김경로(金敬老)ㆍ광양 현감 이춘원(李春元)ㆍ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등이 모두 죽으니 그날이 8월 18일이다. 뒤에 이지봉(李芝峯 이름은 수광(睟光))이 시를 지어 조상하였다.
고성에 피비 날던 옛일을 생각하니 / 憶昔孤城血雨飛
서생은 겹겹 포위 깨뜨릴 힘 없었네 / 書生無力破重圍
지금 남은 자리엔 가을 풀만 쓸쓸한데 / 至今遺跡空秋草
눈물은 석양의 나그네 옷 적시도다 / 淚入斜陽濕客衣
남원이 함락되자 전주 이북은 와해되어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전주에는 진우충(陳愚衷)이, 충주에는 오유충(吳惟忠)이 있어, 각각 요새지를 지켰는데, 전주는 남원과 백여 리에 떨어져 있어 형세가 서로 협공할 수 있었다. 진우충이 처음에 진주에 이르니, 한 말의 양식도 없었는데, 10리 밖 산채 속을 찾아보자, 쌀과 콩이며 활과 살이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는 우리 나라의 군사에게 시달리는 것이 왜적보다 심하므로 백성들이 고을 안에 두려고 하지 않아서이고, 멀리 산골에 저장하는 것은 왜적이 왔을 때 도리어 적의 도움이 될까 두려워함이었다. 남원에서 급한 사정을 알리고 구원해 주기를 청했으나 진우충은 겁이 나서 군사를 내보내지 않다가 남원이 이미 패망해서 고을 백성들이 다투어 달아난다는 것을 듣고 성을 버리고 도망치니, 경리가 사실을 아뢰고 잡아다가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감사충군(減死充軍 죽음을 감면하고 군졸에 충당함)하였다. 경리의 접반사인 이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경리에게 말하기를,
“이제 적이 또 경기 지방을 핍박하니, 만일 한강을 한번 건너게 되면 한강 서쪽에는 다시 손 쓸 곳이 없습니다. 이제 바로 달려간다면 미칠 수 있을 것이오.”
하니, 경리가 그렇게 여겨 평양으로부터 길을 재촉하여 빨리 달리니, 군리(軍吏)가 가볍게 나아가지 말기를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드디어 9월 3일에 서울에 들어와 제독과 모든 장수를 불러 싸우지 않은 사실을 책망하고, 제독 이하 여러 장수들과 서울의 남산에 올라가 군사를 벌여 포진하니, 호령이 엄하고 치밀하였다. 제독이 계책을 정하여 정예한 마병을 선발하여 맞아 싸우도록 하고, 밤에 각 영(營)에서 정예 장정 2천 명과 날랜 장수 15명을 가려 뽑아서 해생(解生)ㆍ우백영(牛伯英)ㆍ양등산(楊登山)ㆍ파귀(頗貴)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천안으로 보냈는데, 모든 장수들이 알지 못하였다.
○ 7일. 해생 등 네 장수가 천안(天安)과 직산(稷山) 사이에서 왜적을 만났는데, 왜적이 모두 흰 옷을 입었으므로 중국 군사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여겨 처음에는 준비를 하지 않다가 적이 총을 쏘자 비로소 알아차리고 세 장수가 일시에 말을 타고 진격하니, 적이 휩쓸려 달아나는데, 화살에 맞거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중국 군사가 싸워서 31수급을 베었는데, 파귀(頗貴)가 손수 3수급을 베었고, 양등산(楊登山)과 해생(解生)이 각기 손수 2급수씩 베어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경리가 각 영의 군사를 내어 한강가에 진을 치게 하고, 또 파새(擺賽)를 보내어 2천기를 거느리고 후원하게 하였는데, 파새가 빨리 달려가다가 진위(振威)와 직산(稷山) 사이에서 적을 만나 네 장수와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64수급을 베고 적장을 쏘아 맞히니, 적이 모두 도망하여 바다로 돌아갔다. 뒤에 정승 장유(張維)가 시 세 수를 지어 기념하였는데, 이러하다.
왕사(중국 군사)가 섬 오랑캐 쳐부수던 일 생각하니 / 憶昔王師破島夷
전군의 돌격장은 용사들 거느렸네 / 前軍突將領熊羆
싸울 적 묻은 피는 강 언덕에 남았는데 / 至今戰血川原染
그날의 떨친 위명 초목도 아는도다 / 當日威名草木知
만마의 말발굽으로 사기 먼저 꺾으니 / 萬馬攢蹄先奪氣
왜적이 목 바치매 봉시 일찍 하였다네 / 長鯨授首早封尸
동정이 기공 세운 제일 가는 곳인데 / 東征第一奇功地
서생이 이를 위해 비 세우는 일 빠뜨렸구나 / 却欠書生爲勒碑
삼한을 다시 살린 기이한 공 세웠는데 / 三韓再造擅奇功
열 번 싸워 나쁜 기운 깡그리 없어지네 / 十戰妖氣一掃空
못된 왜적 한 놈인들 남게 할 수 있으랴 / 狡虜豈容留片甲
승산이 원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리로다 / 勝算知是出元戎
싸움터 구름 들판 덮으니 갠 날도 캄캄한데 / 陣雲壓野晴猶黑
도깨비불 숲에 의지해도 차가워서 붉지 않구나 / 鬼火依林冷不紅
필마로 옛일을 애도하니 먹구름 흩어졌는데 / 匹馬弔古陰雲罷
가을 바람에 칼에 기대니 무지개 토하듯 하네 / 秋風倚劍氣吐虹
어양의 돌격병이 천둥과도 같아서 / 漁陽突騎若雷霆
북 한번 울려 치니 기세는 막을 길 없네 / 一鼓雷霆勢建瓴
전쟁이 오래 되어 살기 품고 있으니 / 長有風雲含殺氣
탐욕 많은 왜적들로 하여금 길이 황제를 두려워하게 하도다 / 永令蛇豕讋皇靈
나쁜 기운 사라지니 해변엔 경보 없으나 / 氛消海徼仍無警
냇물엔 피가 들어 비린내 풍긴다네 / 血入川流尙帶腥
동토(조선)는 이제 와서 농사 짓기 평온하니 / 東土至今耕鑿穩
백년의 큰 업적이 단청에 비치리 / 百年勳業照丹靑
이날에 경리와 제독이 상에게 강가에 나와 보기를 청하니, 상이 그대로 좇아, 동작진(銅雀津)을 건너 높은 언덕에 올라 형세를 살피는데, 경리와 제독이 청하기를, ‘마음속에 계책이 있으니, 배신 한 사람을 차관과 함께 수원(水原)에 가서 적의 형편을 정탐하겠습니다.’ 하므로, 상이 체찰사 종사관(體察使從事官) 한준겸(韓浚謙)에게 가도록 하였다. 이때에 민심이 흉흉하고 송구하여 성중의 사서인(士庶人)이 하나도 없고 조정의 모든 신하들도 피난짐을 걸머지고 섰었는데 직산에서 승전한 소식이 이르자, 서울이 조금 안정되었다. 참장(參將) 팽우덕(彭友德) 등이 또한 왜적을 청산(靑山)까지 추격하여 수급 1백 16을 얻으니, 군사의 위세가 더욱 떨쳤다. 경략이 이에 랑중(郞中) 동한유(董漢儒)를 옮겨 의주(義州)에 주둔하게 하고, 또 소문내기를,
“남북의 수륙병(水陸兵) 70만 명을 징발하여 금방 이를 것이고, 복건(福建)ㆍ광동(廣東)ㆍ절강(浙江) 등의 수병(水兵)이 바로 일본에 도착하리라.”
하니, 왜적이 소문을 듣고 드디어 감히 나오지 못하고 행장은 물러가 순천(順天)에 주둔하고, 심안돈오(沈安頓吾)는 물러나 사천(泗川)에 주둔하였으며, 청정(淸正)은 물러가 울산(蔚山)에 주둔하니, 연해의 수십 고을을 다시 왜적이 점유하게 되었다. 경리가 군문(軍門)에 공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먼저 청정을 공격하여 적의 왼팔을 끊어야 한다.”
하였다.
○ 11월 3일. 경략(經略)이 압록강을 건너서 경리와 함께 나아가 무찌를 것을 의논하고, 징발된 선(宣)ㆍ대(大)ㆍ연(延)ㆍ유(綏)ㆍ절(浙)ㆍ복(福)의 군사를 모두 모아 3대로 나누어 3협(三協)을 만드니, 왼편은 이방춘(李芳春)이요, 오른편은 팽우덕(彭友德)이요, 가운데는 고책(高策)으로, 모두 부총병(副摠兵)으로서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전진하여 쳐부수게 하였다. 심태현(沈太玄 호(號)) 조환(朝煥 이름) 백함(伯含 자(字))이 여러 장수에게 보낸 시 네 수가 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대장을 임명하여 병권을 맡게 하니 / 漢拜壇場制閫專
장성은 벌여 있고 군막 높이 휘날리네 / 河魁列宿幙高懸
내려 오는 우격에 일천 군중 모여들고 / 從天羽檄千群集
비껴 있는 누선은 백장을 끄는도다 / 橫海樓船百丈牽
동편에 봉화불 일어나니 적의 침범 놀라운데 / 烽起東偏驚豕突
북궐로 출사하는 이 잇달았네 / 冠彈北闕半蟬聯
뒤에 타면 부질없는 수고임을 알므로 / 亦知後乘空勞載
웅비가 꿈속에서 헤매지 않는 듯하여라 / 不似熊羆入夢中
삼성이 북으로 달아나 싸움은 벌어지니 / 參孤走北陣雲開
황금대 자주 쌓아 장수 재목 뽑는구나 / 屢築黃金選將材
스스로 천병(川兵)을 맡아 잔각을 떠나는데 / 自典川兵離棧閣
변방 군사 다시 뽑아 돈대를 내려오도다 / 更挑邊卒下墩臺
날뛰는 오랑캐는 모두 무뢰배인데 / 縱橫羯虜都無賴
출몰하는 왜적은 이리 떼뿐이라네 / 出沒鯨夷祗狼猜
몇 번이나 장수 되어 요동 건너가서 철권에 올렸더뇨 / 幾拜渡遼書鐵券
공연히 전골만 찬 재에 장사하게 하도다 / 空令戰骨葬寒灰
차가운 호각 소리에 변방의 지루함 쫓아내는데 / 吹角寒聲逐塞長
해마다 병마는 요동으로 건너가네 / 年年兵馬渡遼陽
현도 변방 컴컴하니 거축(수레바퀴의 굴대)이 깊어지고 / 玄菟塞墨深車軸
압록강 모래 누르니 칼집을 장식하도다 / 鴨綠沙黃飾劍裝
표기장군은 한가하여 사냥함을 뽐내는데 / 驃騎自誇閒羽獵
중국 군사는 왜적 쓸어낼 계책이 없다네 / 天兵無計掃攙搶
궁지에 몰린 왜적은 전단의 계책 쓰는데 / 封鯨盡發田單策
척계광과 같은 장군 어떻게 얻을손가 / 安得將軍戚繼光
여러 고을의 호마는 거여목에 살쪘는데 / 列郡胡駒苜蓿肥
여황은 물에 모여 겹겹 포위에서 싸우는구나 / 艅艎水集戰重圍
어서로 장수 보내니 남북으로 나뉘고 / 魚書遣將分南北
간소로 논병하니 시비가 있도다 / 諫疏論兵有是非
여순(旅順)의 마초 흩날리니 바닷달 컴컴하고 / 旅順蒭飛鯨月暗
도산(島山)의 군사 격파하니 전쟁구름 희미하네 / 島山軍破陣雲微
진중(珍重)한 여러분은 동주(銅柱)에 공을 표했는데 / 諸君珍重標銅柱
흉적 제거하느라 위엄 함부로 손상하지 마시오 / 莫爲除凶浪損威
천자가 다시 경략에게 상방검(尙方劍)을 주어 그 일을 소중하게 하였다. 경략이 장군 마귀로 하여금 경리 및 좌우 사람들과 협동하여 충주(忠州) 조령(鳥嶺)에서 안동(安東)을 향하여 경상도로 나아가 오로지 청정을 공격하게 하면서, 행장이 서면에서 와서 구원할까 두려워하여, 중협(中協)으로 하여금 의성(義城)을 향하여 동쪽으로 구원하게 하고, 좌우 양협(兩協)으로 전라도 사이의 험한 곳을 지키게 하고, 또 3협(三協) 중에서 마병 1천 5백 명을 골라 조선 군사와 함께 천안(天安)ㆍ전주(全州)ㆍ남원(南原)을 경유하여 내려오면서 크게 기와 북을 벌이고 순천(順天) 등지를 공격한다고 속여서 행장을 견제하게 하니, 육로는 대강 준비되었으나, 해군만은 자주 격문을 보내도 진군하지 않았다. 경리가 대군을 거느리고 잇달아 진군할 적에 스스로 수하의 용맹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가벼운 복장으로 달려서 조령(鳥嶺)을 통과하니, 12월 8일이고, 마 제독 이하 여러 장수의 거느린 바가 합하여 4만 4천 8백 명이었다. 제독이 문경(聞慶)에 이르러 삼로(三路)의 대장을 불러 비밀리 군무(軍務)를 의논하는데 도원수 권율도 앉아 있었다. 제독이 가만히 말하기를,
“중국 군사가 울산(蔚山)에 도착하면 원수(元帥)도 수군으로 하여금 전선(戰船)을 정비하여 포수(砲手)를 많이 싣고 앞바다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사기를 돕게 하오.”
하니, 권율이 한결같이 그 말대로 하였다.
○ 18일. 경리가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접반사 이덕형(李德馨)에게 이르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정탐을 잘하지만 조선 사람의 편이(便易)함만 못하니, 내가 초군(哨軍) 송호한(宋好漢)과 전창(田倉)을 보내어 조선 사람들과 도산(島山)에서 염탐시키려 하오.”
하니, 이덕형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군중에 항복해 온 왜인 여문여(呂文余)가 있는데, 영리하여 마음속에 깊은 꾀가 있습니다. 만일 은자로 후하게 상을 주어, 송호한과 함께 데리고 가되 경주(慶州)에 이르러 머리를 깎이고 왜인의 옷을 입히고 적의 진영으로 들여보내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경리가 그대로 좇았다.
○ 20일. 경주에 나아가 주둔하니,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쳐 바람처럼 빠르고 천둥처럼 치니, 여러 장수가 말은 하지 않으나 두려워서 덜덜 떨므로 명하여 말에 죽을 먹이고 칼을 갈아 용기를 북돋우어 다투어 적의 머리를 바치도록 하고, 경리가 여러 장수를 불러 나아가 공격할 방책을 의논하였다.
○ 21일. 여문여(呂文余)가 적의 진중으로부터 돌아와서 소매 속에서 한 장의 그림을 내어놓으니, 도산(島山)ㆍ태화(太和)의 적의 소굴을 그린 것인데, 병졸의 다소(多少)와 청정과 희팔(喜八) 등의 소굴도 모두 있으므로 경리가 크게 기뻐하며, 붉은 글씨로 진군할 세 길을 도면 위에 표시하여 여러 장수에게 보였다.
○ 22일. 모든 군사를 파견하는데, 좌협(左協) 이방춘(李芳春) 등은 왼편 길로, 중협(中協) 고책(高策)은 가운데 길로, 우협(右協) 팽우덕(彭友德)은 오른편 길로 진격하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은 양산(梁山)을 지키고, 동정의(董正誼)는 남원(南原)으로 가게 하며, 노계충(盧繼忠)의 군사 2천 명은 서강(西江)에 주둔하면서 다만 물길을 막게 하였다.
○ 23일. 아침에 경리는 다만 통역관 송업남(宋業男) 등과 앞서 가니,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이 따라갔다. 밤중에 제독이 먼저 울산에 도착하니 적의 성루와는 60리 떨어졌다. 제독이 양등산(楊登山)ㆍ파새(擺賽)ㆍ파귀(頗貴)를 불러 묻기를,
“너희들 중에 누가 선봉이 되겠느냐?”
하니, 세 장수가 서로 앞서기를 다투므로 제독이 파새로 선봉으로 삼고 양등산을 다음으로 삼으니, 파새는 기뻐하나 양등산은 성이 나서 주먹으로 치기까지 하려 하였다. 파새는 정예로운 친병(親兵) 천여 명을 거느리고, 양등산은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차례로 떠났다. 날이 샐 무렵에 파새가 적진에 육박하여 화전(火箭)으로 쏘니 적병이 나와 막으므로 파새가 군중에서 즉시 손수 수급 넷을 베었고, 양등산은 근처에 와서 주둔하며 성원하였는데, 파새가 거짓 물러나니 왜적이 쫓아오므로 파새가 군사를 돌려 양등산과 군사를 합쳐 공격하여 4백 6십여 수급을 베고 적의 소장(小將) 한 사람을 사로잡았다. 경리와 제독이 이르러 적의 보루가 얼마 뒤에 서로 보이는 곳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 24일. 삼협(三協)이 함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좌군(左軍)은 반구정(伴鷗亭)의 적의 소굴을 에워싸고 중군(中軍)은 병영의 길에서 바로 왜적의 군막을 충돌하고, 우군(右軍)은 태화강(太和江)의 적진을 에워쌌다. 경리가 몸소 갑옷을 입고 전투를 감독하니, 모든 군사가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기운을 내어 공격하였다.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고 화전(火箭) 수백 대가 서로 접응하여 함께 날라가서 바람은 거세고 화세는 맹렬하여 적의 군막을 마구 태우니, 검은 연기가 공중에 가득하였다. 승세를 타서 반구정(伴鷗亭)과 태화강(太和江)의 두 소굴을 빼앗으니, 남은 적은 살기를 도모하여 달아나 도산(島山)으로 들어갔다. 중국 군사가 바야흐로 수급을 모으는 사이에 적은 이미 도산으로 들어가 보전하였는데, 형세가 아주 험하여 쉽게 함락할 수 없었다. 경리가 보병을 지휘하면서 마군(馬軍)으로 하여금 8영으로 나누어 잇달아 주둔시켜 지키게 하고, 또 절병(浙兵) 한 진영으로 하여금 강변을 나누어 끊어서 수로(水路)로 오는 적을 막게 하였다. 경리가 제독과 도산 북쪽 높은 봉우리에 올라 전투를 감독하므로 이덕형 등이 그 사례를 표하니, 경리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조그마한 승리이오. 우리가 서생포와 부산에 있는 적을 쳐 없앤 것을 본 뒤라야 그 기쁨을 말할 수 있소.”
하였다.
○ 25일. 3협의 진격하는 군사를 독려하다가 지체한 자 두 사람을 잡아 목베고, 또 맨 위에 있는 자 한 사람을 잡아 왼편 귀를 베니, 온 군사가 모두 스스로 분발하여 성의 동쪽까지 육박하였으나 적의 방비가 아주 튼튼하고 성 또한 굳고 험하여 먼저 오른 자는 나오지 못하고 밖에 있는 군사 또한 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유격(游擊) 진인(陳寅)은 큰 탄환에 맞아 들것에 메여 서울로 돌아오고, 군졸이 비록 개미떼처럼 달라붙어서 쳐다보면서 공격하였으나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초록빛 옷을 입고 흰 기를 쥐고 있는 적 한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호령하므로, 항복한 왜인에게 물어보니, 곧 청정이라 한다. 날이 기울자 오랜 싸움에 군사가 피로하다 하여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었다. 경리와 제독이 물가로 달려가서 적선(敵船)의 행세를 보다가 이덕형을 불러 말하기를,
“많은 땔나무를 준비하여 내일 성을 공격할 때 쓰게 하시오. 이 적이 비록 소굴에 웅거하고 있으나 성안에 물과 양식이 없고 또 우물도 말랐으니 오래지 않아 자멸할 것이오.”
하였다.
○ 26일. 또 이덕형을 불러 말하기를,
“항복한 왜인들이 계교를 내어 성을 무너뜨리려 하니 시험삼아 지켜보시오. 다만 이 성이 극히 높고 험하여 우리 군사가 많이 상할 터이니 이것이 걱정이오. 중국 군사는 오늘 사면으로 에워싸고 움직이지 않으며, 풀을 베고 양식을 준비하게 하여 쉬도록 하겠으니, 그대의 나라 군사는 항복한 왜인들과 마른 나무와 애패(挨牌 진영 앞에 세워 화살을 막는 것)를 가지고 화공(火攻)하고, 또 성밑의 우물을 메워 적으로 하여금 물을 길어갈 수 없게 하시오.”
하니, 이덕형이 권율과 여러 장수로 더불어 모두 목책 안 흙담 사이에 들어가 각각 군사를 모두 성밑에 다다르게 하였는데, 적의 탄환이 비오 듯 하여 애패를 꿰뚫고 들어와서 사상자가 매우 많으므로 할 수 없이 회군하였다. 이때 적의 배가 남강(藍江)에 떠 있고, 또 가까운 바다로 나오려 하는데 중국 군사가 화전을 많이 쏘아 적의 배 한 척이 포에 맞아 부서지고, 나머지 배는 포구 밖으로 나갔다. 적 한 명이 군전(軍前)에 나와 항복하므로 은을 상주고 붉은 비단을 걸고 좋은 말에 태워 적에게 보이게 하였더니, 그뒤로 나와서 항복하는 자가 서로 이어지자, 청정이 성문을 엄하게 지키고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 27일. 큰비가 내렸는데, 이때에 남강(藍江)에 있던 적의 배가 해안 가까이 왔다가 절병(浙兵)의 포탄에 맞고 물러갔다. 적 두어 명이 장대에 글을 꽂고 기(旗)를 들고 성을 내려오므로 경리가 가져다 보니, 청정의 부장(副將)이 거짓으로 우리 나라의 병사(兵使) 성윤문(成允文)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그 글에,
“청정은 서생포(西生浦)에 있어 돌아오지 못하였고, 다만 소장(小將) 등이 여기에 있는데, 만약 조선의 장관(將官) 한 사람을 보내서 나와 함께 서생포에 가서 강화하게 되면 두 나라의 사람이 많이 죽게 되지는 않을 것이오.”
하였다. 경리가 돌려보내며 타이르기를,
“청정이 만일 와서 항복한다면 성안에 가득한 사람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마땅히 조정에 아뢰어 벼슬을 주고 상을 후하게 내릴 것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통역관과 중국 군사 한 사람을 시켜 영전(令箭 군령을 전하는 화살)을 주어 나오게 하고, 또 통역관 박대근(朴大根) 및 항복한 왜인 월후(越後)를 시켜 성밑에서 불러 타이르게 하니, 적이 대답하기를,
“싸우려면 싸울 것이고 화해하려면 화해할 것이니, 한쪽을 터놓아 우리가 성을 나가도록 해주고, 또 장관(將官)을 보내면 화해하는 일을 의논하겠소.”
하였다. 적이 성안에 물이 없어 밤마다 성밖에 나와 물을 길어 가는데 우리 나라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가 그의 부하 항복한 왜인을 시켜 우물 근방에 매복하였다가 와서 물긷는 왜인을 번번이 잡아오게 하자, 하룻밤에 잡은 것이 매우 많으니, 경리가 붉은 비단 한 필과 백금 5냥을 상주었다.
○ 28일. 비가 그치지 않으니, 군중이 춥고 굶주려서 싸울 마음이 없었다.
○ 28일. 서풍이 크게 불어 날씨가 혹독하게 추우므로 화구(火具)를 많이 준비하여 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총알이 비오듯 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경리가 진영으로 돌아와 모든 군사로 하여금 초방(草房 풀을 엮어 바람과 추위를 막게 한 것)을 만들어 놓고 둘러싸 진을 쳐서 오래 머무를 계책을 하게 하였다. 제독이 한쪽을 터놓아 적으로 하여금 달아날 수 있게 하고 요로에 복병하였다가 맞아 공격할 것을 청하니, 경리가 듣지 않았다. 이때에 중국 조정에서 흠차어왜 감찰요해 조선등처 군무감찰어사(欽差禦倭監察遼海朝鮮等處軍務監察御史) 진효(陳效)를 보내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흠차제독 어왜총병중군 도독부 좌도독태자태보(欽差提督禦倭摠兵中軍都督府左都督太子太保) 동일원(董一元)으로서 응원을 계속하게 하였다.
진효(陳效)의 자는 충보(忠甫), 호는 민록(岷鹿), 서천(西川) 성도부(成都府) 정사현(井砂縣) 사람으로 만력 경진년(1580, 선조13)에 진사가 되었다. 이때에 와서 명을 받고 동정(東征)의 공죄(功罪)를 감사하러 원임 통판(原任通判) 심사현(沈思賢)ㆍ경력(經歷) 반가언(潘嘉言)ㆍ중군 지휘(中軍指揮) 양재단(梁材斷)ㆍ종사관(從事官) 혜우(惠虞)ㆍ천총(千摠) 구양소(歐陽紹)와 이연(李鳶) 등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가 경리가 도산(島山)을 에워싸고 있음을 듣고 구양소와 이연 등을 나누어 보내어 제로(諸路)의 싸움을 감독하게 하고, 진효도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다.
동일원(董一元)의 호는 소산(小山), 선부(宣府) 전위(前衛) 사람이다. 이때에 와서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수비하게 된 것이다. 방시신(方時新)은 유격(游擊) 방시춘(方時春)의 아우인데, 좌영(左營)하여 수비(守備)하고, 섭사의(葉思義)의 자는 원재(元宰), 호는 효천(效川)이니, 절강(浙江) 금화위(金華衛) 사람으로 잇달아 압록강을 건너왔다.
왜적이 두 번째 침입할 때에 관백 수길(秀吉)이 임진년에 진주(晉州)에서 패전한 것을 분하게 여겨 모든 우두머리에게 명령하되, 바다를 건넌 후에 우리 나라의 남녀를 사로잡아 코도 베어 소금에 절였다가 말[斗]과 섬[石]의 분량으로 바치라 하였는데, 수길이 조사해 본 뒤에 그 나라 북녘 들 대불사(大佛寺) 근방에 버려 큰 언덕을 만들게 하니, 이는 극히 악랄한 짓을 마음대로 하여 위엄을 세우려고 하기 위해서였다. 또 우리 나라 사람을 많이 써서 길잡이로 삼았는데 그중에는 본국을 사모하는 자도 더러 있었으니, 임피(臨陂) 사람 박춘(朴春)같은 자는 재인(才人 남자무당)으로서 스스로 의병에 모집되어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적에게 사로잡혀 오랫동안 적진 중에 있으면서 공을 쌓아 장수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적의 선봉이 되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렸는데 박춘이 전라도로 향하기를 원하였으니, 그 뜻은 예전에 살던 곳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여기 저기서 싸움하다가 곧바로 임피 옛집에 이르러보니, 이미 거친 빈터가 되었으므로, 박춘이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언서(諺書)로 그 주춧돌에 쓰기를,
“나는 이 집 주인 박춘이다. 적이 나에게 천 명의 군사를 주어 선봉이 되게 하였으므로 내가 이로 인하여 본국으로 투항하여 돌아오려 한다.”
하고, 마음속에 한 가지 계교를 생각하기를, ‘내가 우리 나라 사람으로 포로로 잡혀 왜병이 된 사람을 영솔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내가 거느린 천 명의 군사 중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 잡혀 왜병된 사람이 3분의 2나 되었다. 이때 성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의 처소에서 몰래 몰래 서로 약속하되, 만일 우리 나라 군사를 만나게 되면 포로로 잡혀 왜병 된 사람으로 함께 약속한 자와 한꺼번에 투항하자.’ 하고, 싸우며 올라왔으나 하나도 만나지 못하므로 본국의 군사가 달리는 곳에서 여러 날 동안 머뭇거렸으나 처음 계획한 대로 할 수 없자 통곡하면서 돌아갔다 한다. 그때에 전라도 옥야(沃野)에 사는 재인(才人) 임세붕(林世鵬)의 딸이 나이가 10살 남짓한데, 역시 사로잡혀 와서 박춘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어둑어둑할 때 왜병졸이 모두 흩어지고 박춘이 홀로 두어 왜인과 있더니, 홀연히 우리 나라 말로 서로 말하기를,
“여기가 전주의 옥야인가?”
하니, 두 왜인이 대답하기를, ‘그러하다’ 하자, 박춘이,
“마당(麻堂)ㆍ기운(氣運)ㆍ세붕(世鵬)들이 살아있을 수 있을까?”
하였다. 임세붕의 딸이 곁에 있다가 듣고서 마음 속으로 괴이하게 여기기를, ‘이 사람은 왜인인데 어떻게 우리 나라 말을 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우리 아버지의 이름자를 알 수 있는가? 하물며 마당과 기운은 모두 우리 아버지와 한때 이름난 재인인데, 왜국 장수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마음에 매우 의심스럽고 괴상하게 여겼으나, 박춘이 왜국의 장수가 될 줄은 알지 못하였다.
밤이 되자 가만히 그 딸에게 묻기를,
“너는 어디 사람이냐?”
하니, 딸이 대답하기를,
“내가 옥야(沃野) 재인 임세붕의 딸입니다.”
하였다. 박춘이 놀라면 말하기를,
“너희 부모가 잘 있느냐?”
하니, 딸이 말하기를,
“아버지는 원수의 진중에 있고 홀로 어머니와 내가 숲속에 숨었다가 한때 사로잡혔는데, 적이 어머니는 죽이고 나는 살려주었습니다.”
하였다. 박춘이 불쌍하게 여겨 탄식하며 한숨지었다. 수일이 지나 회군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임세붕의 딸을 말에 태워 박춘의 말 앞에 있게 하더니, 해남에 이르러 배를 탈 적에 박춘이 소매 속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어 딸에게 주며 이르기를,
“이제 너를 놓아 돌려보내니 이 글을 갖다가 너희 아버지에게 꼭 주라.”
하고, 왜병 한 사람을 시켜 복병한 곳까지 호송하게 하니, 세붕의 딸이 드디어 벗어나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옥야에 이르러 그 편지를 아버지에게 주니, 편지 가운데 말한 바도 역시 전일 주춧돌에 쓴 사연과 같은 것이었고, 이어서 안에 밀봉한 한 장의 편지도 박춘의 아비에게 전하였는데, 그 아비가 사실이 누설되어 누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일체 숨긴 까닭에 온 이웃의 재인도 감히 말을 내지 못하였다 한다.
만력 24년 병신 8월부터 25년 정유 12월에 그치니, 통틀어 계산하면 2년이다.
[주D-001]8월의 뗏목 : 《박물지(博物志)》에 “해마다 8월에는 뗏목이 오가는데 실기(失期)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뗏목을 타고 은하수에 갔다는 설화에서 나온 말이니, 즉 바다를 건너서 먼 나라에 간 것을 말함이다.
[주D-002]주리(州里)와 만맥(蠻貊) : 《논어(論語)》〈위령공편(衛靈公篇)〉에, “말이 충신하고 행동이 독경스러우면 비록 만맥의 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비록 주리라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니 즉 말과 행동이 충신(忠信)하고 공경하면 자기 고장이나 먼 오랑캐 나라에서도 다 잘 지낼 수 있다는 말이다.
[주D-003]삼봉행(三奉行) : 일본 관백(關白)의 보좌역(輔佐役)으로 중요한 직책을 가진 직명임.
[주D-004]누하이고(漏下二鼓) : 누하(漏下)란 물시계를 말하는 것이고, 이고(二鼓)는 물시계에서 누수가 떨어지면 시각을 알아서 북을 치는 법으로 이경(二更)을 말한다.
[주D-005]사신지책(徙薪之策) : 사신지책은 즉 곡돌사신(曲突徙薪)의 준말인데 화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방비한다는 말임. 《사기》〈곽광전(霍光傳)〉에, “어느 과객(過客)이 주인더러 말하기를, ‘연돌(煙突)을 구부정하게 고치고 섶을 옮기시오. 그렇지 않으면 화재가 있을 것이오.’ 하였는데 주인이 응하지 않더니 그뒤에 과연 불이 났다.” 하였음.
[주D-006]선우(單于)가 …… 한 일 : 한 고제(漢高帝)가 흉노(匈奴) 묵특선우(冒頓單于)를 치다가 평성(平城)에서 포위되자 진평(陳平)의 계교로 공주와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화친하여 풀려나왔다. 뒤에 서민의 딸을 공주라 속여 혼인하였음.
[주D-007]충군(充軍) : 죄를 지은 벼슬아치를 군역에 편입시키거나 죄를 지은 평민을 천역군(賤役軍)에 편입시키는 형벌의 일종.
[주D-008]광양 현감 이춘원(李春元) : 원문에는 “전라병사 이복남…… 광양 현감 이춘원ㆍ접반사 정기원 등이 모두 죽었다.”라고 되었는데, 이복남 등은 모두 그때 죽었으나 이춘원은 임진왜란 때 남원을 포위하여 왜적과 싸운 일은 있어도 죽지 않고 그후 1634년(인조 12)에 죽었음.
[주D-009]우격(羽檄) : 긴급히 군을 징집하려 할 때 사용하는 새깃을 붙인 격문.
[주D-010]백장(百丈) : 배를 끄는 데 쓰는 도구의 하나. 대를 쪼개어 노끈으로 엮었음.
[주D-011]황금대 (黃金臺) : 중국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의 역수(易水) 가에 있는 대(臺)를 이름. 전국 시대 때 연 소왕(燕昭王)이 여기서 천금을 가지고 천하의 현사(賢士)를 불렀음.
[주D-012]잔각(棧閣) : 산골짜기와 절벽 따위에 널빤지를 놓아 선반처럼 만든 길. 위(魏)의 등애(鄧艾)가 촉한(蜀漢)을 칠 적에 군사가 마각(馬閣)에 와서 길이 험하여 더 나아갈 수 없자 수레를 매어달고 말을 묶어 잔각(棧閣)을 만들고서야 강유(江油)로 통할 수 있었다 한다.
[주D-013]전단(田單)의 계책 : 전단(田單)은 전국 때 제(齊) 나라 사람. 연(燕) 나라가 제 나라를 쳐서 제 나라의 70여 성이 함락되고 거(莒)와 즉묵(卽墨)만이 함락되지 않았는데, 전단이 장수가 되어 연 나라의 대장 악의(樂毅)를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내쫓고 그 대신 다른 장수가 오게 한 다음 밤에 화우(火牛 소의 꼬리에 불을 붙여 적진으로 들여보냄)를 사용하여 공격하여 함락된 70여 성을 회복하였음.
[주D-014]척계광(戚繼光) : 명(明) 나라의 명장. 군대 훈련을 잘하고 기율이 아주 엄하여, 전투에 임하여 뒤를 돌아본다 하여 자기 아들을 즉시 목베었다. 명 세종(明世宗) 때 왜구를 평정하여 위엄을 떨쳐 사람들이 척가군(戚家軍)이라 불렀음.
[주D-015]어서(魚書) : 즉 어부(魚符). 부절(符節)과 같은 것. 나무나 구리에 고기처럼 새겨 나누어 가졌다가 부합하여 증빙하는 자료로 삼음. 총관(總管)이나 자사(刺史)에게 나누어줌.
[주D-016]동주(銅柱) : 한(漢)의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평정하고 구리 기둥을 세워 공을 표하고 왔음.
[주D-017]상방검(尙方劍) : 상방(尙方)은 한(漢) 나라 때 설치한 소부(小府)의 관속으로 임금의 일용에 쓰는 물건의 보관을 맡음. 상방검은 임금이 쓰는 칼.
○ 성주의 주부(主簿) ★【배설】★(裵楔)이 본 주의 가장(假將)이 되어 군사 수백 명을 모아 복병을 매설하여 왜적의 통로를 차단하고 목 벤 수효가 퍽 많아 포상되어 합천 군수로 승진하였다. 그의 부친 전 군수 ▲배덕문▲(裵德文) 역시 왜적에 붙좇은 중[僧] 찬희(贊熙)를 잡아 목 베어 상으로 판사(判事)의 직을 받았다. 그때 찬희는 성주의 왜적에 붙좇아 들어가서 판관(判官)이라 가칭하고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난중잡록)
○ 경상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상동(上同) 운운.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본도(영남)의 사세와 적의 기세가 쇠하였는지 왕성한지 어떠한 줄을 알지 못하였더니, 근자에 들은즉, 우도 감사(右道監司) 김수(金睟)가 용인에서 패하여 물러갔고, 좌도 감사(左道監司) 김성일이 진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싸우지 않고 도망한 죄로 참형(斬刑)을 당하여 박진이 충성스럽고 용감하다 하여 이각을 대신하였고, 우병사(右兵使) 조대곤이 노쇠하여 양사준(梁士俊)으로서 대신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이 좌도 수사(左道水使)가 되었다 하니, 그들이 각기 본도로 돌아가서 힘을 써서 한 일이 있는가 모르겠다. 좌도에는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에는 진주 등 몇 고을이 아직 보전되었다 하니 이것이 사방 십 리 되는 땅이나 군사 일려(一旅)보다 낫지 않겠는가. 본도는 백성이 신실하고 후하며 본시 충의가 많으니 너희 다사들이 진실로 서로 분려(奮勵)한다면 반드시 회복의 바탕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이다. 들은즉, 정인홍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일(郭)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ㆍ노흠(盧欽)ㆍ곽재우ㆍ권양(權瀁)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모집함이 이미 많았다 하고 ▲배덕문▲(裵德文)은 이미 적승(賊僧) 찬희(贊熙)를 죽였다 하니, 본도의 충의가 오늘날에도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믿겠도다. 하물며 곽재우는 전술이 비상하여 적을 죽인 것이 더욱 많았으되 공을 조정에 아뢰지 않는다 하니, 내가 더욱 기특히 여기노라. 내가 그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이로다. 호남에도 또한 전 부사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의 병마 2만과 더불어 나아와 수원에 머무르면서 바야흐로 경성을 회복하도록 도모하고, 그의 부하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로와 육로로 달려와서 행재(行在)에 아뢰는데, 내가 그의 아룀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려 한편으로는 위로되고도 슬펐다. 이제 양산숙 등이 군중(軍中)으로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그로 하여금 전하여 이르게 하노니,(난중잡록)
○ ▲배덕문▲(裵德文)과 ★【배설】★(裵楔)이 의병을 일으켰다.
○ ▲배덕문▲은, 자는 숙회(叔晦)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명종 계축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군수를 지냈다.
○ ★【배설】★은 덕문의 아들이다.(조선조 고사본말)
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12)
확대원래대로축소
7월 15일(신유) 비
좌목
10-07-15[13] 3차 정사에서 윤치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3차 정사를 하였다. 윤치능(尹致能)을 효릉 영으로, 이문직(李文稷)을 가감역관으로 삼았다. 가감역관 조병찬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초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이 되어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전 현감 홍순학(洪淳學)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금위영 장관들의 사강 때에 유엽전에서 연달아 5순 몰기(沒技)하여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증 이조참판 ▲배덕문▲(裵德文)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병조참판 ★【배설】★(裵楔)에게 병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병조참의 선약해(宣若海)에게 병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충절(忠節)이 뛰어나서 가증(加贈)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군수 이유형(李儒亨)에게 좌승지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학생 이단운(李端雲)에게 사복시 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민수(李敏樹)의 본생 조고비와 증조고비로서 옮겨 시행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형조 참판 이철구(李鐵求)에게 완흥군(完興君)과 영의정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학생 이득훈(李得勳)에게 완창군(完昌君)과 좌찬성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이우태(李宇泰)에게 완춘군(完春君)과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판종정경 이경우(李景宇)의 삼대이다. 고 통덕랑 김이상(金履庠)에게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는데, 전 예조 참의 김학근(金鶴根)의 본생 조고비로서, 이증(移贈)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수사 정수기(鄭壽基)에게 병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정지용(鄭志鎔)의 고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