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총평,구국충정에 대한단상
배설총평, 구국충정의 조선을 살린 비운의장수 秀吉の朝鮮出兵に際し、水軍総督の命を賜り、金団扇および茜の吹貫(ふきぬき)に金瓢箪の馬印を賜る。 大小の船数515艘と艘帥1500余人(『浅野家文書』によれば1000人)を率いて肥州名護屋(佐賀県)に赴き、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히데요시의 한국 출병에 즈음해, 수군총독으로 명을 받아, 금 부채 및 천의 취관(비단나무)에 금 표주박의 馬印을 받는다.[출처:天正記]
'조선출병 일본 졸병들은 이순신은 모르고, 대포를 장치한 철갑선 그러니 거북선만 알았다. 장수들은 거북선으로는 바닷길을 절대로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졸병들은 거북선에 의해 바닷길이 막혀 자신들이 독안의 쥐가 되고 만다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래서는 일본 군의 장수들이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더욱이 풍신수길이 죽자 왜장들도 조선에서 죽을까 두려워했다. 1.배설이 이순신부하였나? 아니다./ 이순신과 배설은 품계가 같은 동급장수로 배설은 야전군사령관 (당시 이순신은 사형수와 같았다.) 2.이순신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나? 아니다. /배설은 왕명에 따른 남해안 소개령을 430킬로작전했고 대형전함 12척은 장난감숨기듯이 할 수 없다. 3.배설이 명량대첩에서 안위의 화살맞아 죽었나? 아니다. /병피료차 대학병원이 없어 집으로 8.30일 공문을 받아 9.2일 배에서 내렸고 이순신은 탈영보고를 했다 4. 이순신의 통제사 임명은 선조가 했나? 7.23일 배설이 1060명의 병력과 12척의 전함이 있음을 권율에게 보고했다. 선조는 배설을 통제사로 임명하려고 하자 120명의 잔병으로 전쟁 공포증으로 배설이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실제 배설은 이순신장군의 권율에게 올린보고서엔 병력이 1.060여 명 이라고 나와있다. 5.권율의 1597.7.28일자 보고서 칠천량서 살아남은 장수를 통제사로 하자는 보고대로 라면 배설이 통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살아만 있다면 선조임금는 통제사로 하겠다고 했다. 배설 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조선 장수로서 대접받는 장군은 설 장군 뿐이다. 특히 가등청정과 시마즈 요시히로로 인해 일본 무인들이 훌륭한 무장으로 설장군의 전략은 일본군들의 존경을 받았다. 당시 동인조정은 배설이 전쟁공포증을 과대 보고하고 단신 도주했다고 속였다. 선조는 하는 수 없어 이순신을 배설과 동급인 통제사로 8월 이 한참지나 사령장을 내린다. 군사적으로 8.19 쿠데타의 성공이다. 권율 유성룡은 전쟁 앞에 군권을 놓지 않으려고 선조를 철처히 기망했다. 이순신의 7.23 보고를 왕에게 숨기고 허위 장계를 7.28 올려 이순신의 복직시키고 배설을 제거하는 군사반란이 성공했다. 한마디로 교통사고 나서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순경과 가해자 몆명이 짜고 한사람에게게 피해자를 가해자 만든 누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순신이 영웅이 된 것은 1895년 일본의 정한론 침략자들의 우상화로 시작되었다. 역사 왜곡은 일본에 의해서 인데 명향영화는 한술 더해 조선은 이순신만 없었으면 일본이 되었을 나라라고 주장하는 시각에서 시작되어 배설이 악당으로 나온다. 그러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끝난 시점에 쒸여진 징비록 고대일록은 전혀 사실과다르게 배설을 도망자로 그려서 사실화하고 있고, 백과사전에 이에 근거해서 왜곡되어 있다. 1, 선조의 도망 뛰어납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4~1599.1이 터지자 임진왜란때 임금과 조정이 무조건 도망다닙니다. 백성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고 백성들이 적 치하에 고통받는다 이런 개념이 없었지요 그러니 적치하에 부역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고 왜군은 전공을 세우려 목도베고 코도베고 귀도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내서 훈장먹고자 합니다. 선조는 도망에 있어 달인이고 로간 뺨칩니다. 중원대륙과 한반도 역사에 이렇게 도망달인이 있습니까, 무조건 튀고 본다.한성-개성-평양-안주-가산-의주 명군 출병후 무조건 굽신거려서 나라뺏기지 않아야한다.
도망자 도망정권답게 은폐에 선수이고 비열하게 위험인물을을 숙청하지요, 뻑하면 백성들 부역자로 몰아서 효수하고 엄청 센 군율로 참수합니다. 명나라 군들은 외국 여행온 점령군 행세 하면서 얘들도 목가지 확보경쟁을 합니다. 관군들도 포상 전공을 다투고 허위보고를 많이들 합니다. 결론은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발발하여 1599년 1월 조명 연합군이 사천성에 입성 함으로서 7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침략 전쟁입니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었나요? 전공은 지들끼리 그냥 못나누고 별별짖을 다합니다.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4, 권율 이순신의 도주(후퇴),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이순신과 권율이 군권을 장악함, 제목은 7일간의 도주라고 했지만, 우리측이니 퇴각이 맞는 말입니다. 퇴각이나 후퇴라고 하니 좀 어려워서 쉬운 우리말로 편의상 도주 또는 도망이라고 하겟습니다. 배설장군의 칠천량해전 퇴각도 도주라고 쉽게 얘기 하잖아요^^ 7, 순천 사천 울산 왜교성 패전, [1598.9.19~11.19]1597년 음력 12월 23일 ~ 1598년 음력 1월 4일 6차례도주 왜성은 이순신장군을 흠모하시는 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라도 순천성은 삼면이 바다로 서쪽만 육지이다. 조명연합군은 약 5만 5천명, 소서행장 (고니시)왜군은 1만4천명이였다. 등자룡 진린 외 조선군 장수들(김완 이영남)이 대부분 등이 참여해서 패배했다. 순천왜성 조명연합군의 총공격, 조명연합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3개 왜성을 동시 전면 공격하여 왜군을 섬멸하자는 작전은 세곳 모두 실패, 1598년 9월 19일우의정 이덕형 도원수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 명나라 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항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내렸다.이 때 모든 조선의 군대가 동원되어 약 30만 병력, 제 1승: 9월 21일 명군의 지원병1만5천명 도착 하고, 해남현감이 적진 공격 왜군 8명 사살 순천성 22일 ~23일 유정은 조선군을 질책 서천만호 한산대장 홍주대장 금갑도만호 회령포 만호 외 조선군장수들 곤장7~15대씩 처결 30일 명군 수군 전함100여척 이순신 합세 10월2일 조명 연합군 총공세 반나절 도중 오하려 왜군들이 밧줄울 타고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 조명연합군 약1.000명 전사(조선수군 사로 첨사 황세득 이청일 외29명 전사)연합군 100보 후퇴 10월 2일 유정은 사천성의 악명높은 시마즈군을 봉쇄한 조명연합군이 중로군 동일원장군이 시마즈 요시라 왜군에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음,(울산성 가토 기요마사 조명연합군 동로군도 후일 패배함) 놀란 조명 연합군은 긴급히 순천왜교성 봉쇄를 풀고, 2일부터 9일 까지 조선 명나라군대는 무기도 버리고 밤낮으로 도주했다. 부유창방면으로 퇴각은 계속되어 9일까지 계속함(조선군 전사200명 부상 600명) 이 퇴각으로 군량미 3천석을 빼앗겼으며, 엄청난 무기들도 빼앗겼음, 결론, 칠천량 전투나 별반차이가 없는 패전임에도 동인들이 단지 보고서를 잘 만든것에 불과함을 알수 있음, 조선군이나 명군이 왜군은 수 명 내외로 사살하고, 왜군은 조명 연합군을 만명단위로 죽임, 이순신과 권율 다합쳐도 배설과는 상대가 안됨을 알수 있다. 배설이 서인인 원균을 만난 것이 비운이였고, 권율의 동인들로 견제 받았음이 조선에 있어 비운이였다. 사천성패전,시마즈 요시로 일시:1598년(선조?)10월1일 지휘관: 조·명연합군-董一元/ 일본-島津義弘 병력: 조·명연합군 수만인~200,000내외/ 일본-7,000내외 전과: 조.명연합군-30,000~80,000내외 사상자/ 일본-미상 약 400여명 사상, 1598년10월 조선의 사천에서 島津義弘이 이끄는 島津軍7천명이 명군의 장군 동일원이 이끄는 수만의 조·명연합군을 격퇴한 전투로서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설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명군의 수가 3만7천에서 20만까지, 명군의 사망자가 수천에서 8만이라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일본 측 기록>중국측 기록에 8만명 사망으로 되어 있어 이보다 피해가 큰 것으로 추정됨, 1598년 9월 말부터 10월초까지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小西軍), 사천왜성(島津軍), 울산왜성(加藤軍)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 동일원이 이끄는 20만이라 칭하는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했고, 그 후 집결하여 철퇴한 연합군의 島津측에서는 [취한 수급이 3만, 벤 시체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島津義弘은 [鬼石蔓子]라 불리어 무서워했고, 그 武名이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전해졌다. 사천성의 전투에서 명군의 병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패전 측인 명의 기록에서 [전사자 약8만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 8만인이라는 것은 세계사와 비교하여도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패전의 장수는 책임을 물어 처형되는 경우도 있어 전과는 과대히, 손해는 과소히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론^^ 칠천량해전이 결코 패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조선 판옥선들이 왜선 5척에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학살 된 점은 있으나, 기습에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미 권율의 작전 실패로 포위된 상태에서 육지로 퇴각도 하나의 방법이 옳은 것이였음, 그냥 배에서 60여명이 200명을 당할 수 없고, 일방적인 살육이 되기 때문에 육지로 피항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 한 상황이였음, 그러나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일본 군을 공격한 1597년 6월 부터 7.16일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좌절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려주었음, 왜군 병사들에게 막대한 공포심을 조장한 가치 있는 전사이고, 순천왜성, 사천성, 울산성패전에 비해 매우 가치 있었든 전투였음은 일본측 자료가 말하고 있음,,,원균이 30만 대군을 동원했었으도 똑 같았을 것,,,^^ 권율과 이순신 그외 모든 조선군 장수들이 30만 대병을 동원해서 1597 .11~ 1598.11.18일 까지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올린 전과는 가히 부그러울 정도다. 9월 21일 해남 현감이 8명의 왜군을 사살한 것이 큰 공로였고, 하루에 10만 명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왜군이 한번 공격하면 최소 수백에서 수천명 아니 수만명까지 죽어 나간 그야말로 인해 전술이였다. 조선 명나라군은 아무런 전과도 없었다. 아마도 서부개척시대의 백인들과 인디언들간의 전투도 이보단 나았을 것이다. 배설이 부산일대에서 싸운 상대는 이들 찌꺼기 왜군들 하고는 달랐다. 모든 왜장 주력부대와 전투 한데 비해, 왜군 3대 잔병에도 조명연합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권율과 이순신은 사천성 패배 소식만 듣고도 식량 3천석을 버리고 무기까지 모두 놓고 부유창 방면으로 7일간 밤낮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명나라군 뒤에서서 도주에 도주를 했다. 고니시가 평소 자신 혼자서도 조선을 점령할 수 있다면서 조선군이 가토 기요마사를 처치해달라고 한 말이 호언이 아니였었나? 장수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서는 통솔력 부하장병들의 사기진작과 전술전략 및 천문지리를 통달하여야 하고 타이밍도 잘 선택해야합니다.
유문(遺文) 시조
月波亭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16, 누명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역모 모반혐의로 참수 병상에서 칠천포패전 책임에 대한 "月波亭" 이란 시를 남기고, 권율장군의 수하들에 선산땅에서 부친과 아들이 함께 추포되어 역모 모반죄로 부친과 아들은 방면되고 장군은 참수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배설장군의 참수에 경상도관찰사 경상감사 한준겸이 직접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군졸들을 동원 후하게 장례를 지내준다. 한준겸은 조정에서 파직될 것을 알면서 장사를 치르준 후 한준겸은 파직한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여정이란 동인중신들 조정이란 뜻임,) 한준겸은?(1557-162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아버지는 판관(判官) 효윤(孝胤)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주서·전적 등을 역임했다. (출처:백과사전) 칠천량해전//7월16일 새벽에 화재를 보고 몰려온 왜선단을 피해 원균은 칠천도에서 고성현 춘원포로 함대를 이끌고 도주합니다. 불가피 한 상황이였겠죠, 추원포(현재 통영 부근)에 도착하자 함대를 정박하고 대장군기를 바다에 던지고 육지에 내린후 퇴각하려하는데 왜군들의 매복이 있어 전멸을 할 상황이니 한명이라도 더 왜군을 죽이고 죽는 전사를 합니다. 김식의 보고와 선조대왕의 대책 어전회의 조선왕조실록 《선조 090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 6,((선조실록))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대신들: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유성룡(영의정) : 감히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다.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서너겹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남은 장수는 아순신 뿐)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이순신복권 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배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배설이 옳았다는 심증)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조센 끝났다)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순신은 아니다)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명나라 안오니 선조 넌 개털됐다 빨랑 순신임명해라).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선조 : 근자에 모병에 있어 사졸(병력) 지원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민심 이반이 심함)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이 오직 이순신의 복직에만 매달려 대책 자체가 없으며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퇴각했음도 철처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직접 충청 전라에 한척의 전함도 없느냐고 물음에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조는 배설이 도주했다고 보고함에도 배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10,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이름없는 장수들의 사망과 패전이 있었는데요 다 적기도 어렵습니다. 조헌 영규 고경명 조경 동래부사 송상현, 탄금대의 신립장군, 진주성의 김시민장군 등등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역부족의 전투였죠.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함 , 승리한 일본군 14만명은 곧바로 서해로 진출하지 못하고 배설이 진주한 진도에서 대치하면서 전투준비를 60일 간이나 한후 명량대첩이 일어난다.(칠천량해전에서 일본의 피해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1, 대역죄인 백의종군상태였든 이순신의 등장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배설을 찾아왔습니다.
1)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이순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12,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晋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권율은 매일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음, 배설의 12척의 경상우도 병선을 보고하지 않고, 칠천량해전 12일 째인 이날도 각기 도주 한 것으로 보고함) 이순신으로 부터 23일 보고를 받은후 5일이 지난 시점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살아 남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통제사로 하겠는데 아무도 없으니 이순신을 임명해 달라는 허위보고 배설이 도망한 것은 맞으나 아직은 행방을 모른다고)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권율은 사실은 이순신의 복권을 원하면서 아무나 살아남은자가 있다면 임명하자고 독촉하고 있다.)
3) 전라좌수사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진주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 목수들이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꽃다운 35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배 즙(裵 楫) 1564년(명종19)에 태어남.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계사년 1월 성주성 탈환에 성공했다.
김면과 정인홍이 일으킨 의병대와 김성일의 관군 합동작전에도 성주성은 3차례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탈환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성주성은 적군 제 7진 모리 데루모토의 부하 가츠라 모토츠나가 지키고 있었다.
경상우도 탈환 성주성(부상현)전투 패배원인?
의병들의 기백은 대단했으나, 왜군 상대가 안되는 무기, 군량, 군사력의 수적 열세로 인해 불가피했다.
1,성주성 (부상현)전투, 개령전투, 개산진전투, 지례전투 패배,[배설장군]
성주성전투, 부상현전투, 개령전투, 개산진전투 지례전투의 패배가 배설 때문이다 라는 구절이 곳곳에 있습니다.^^
배설이 임진왜란을 읽으켰다고 할 직전의 징비록 고대일록 기록입니다.
배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전투에서 왜장의 목을 베어 합천군수가 됩니다.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田句沈:官兵衛)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징비록 난중잡록의 거짖말)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김면이 죽은 후 한참 있다가 합천군수가 된다. 즉,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배설이 부친인 의병장을 따라가서 2만여 왜군의 적장 흑전구침의 목을 의병 신분으로 베었다. 물론 이전투에서 의병들은 패했지만, 적장이 살해 되므로서 왜군들이 남으로 퇴각하여 조선 의병군은 패전후 얼마 후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의 무공을 인정받아 직접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아 횡재소에서 합천 군구를 제수 받았다. 이 때는 이미 김면이 사망한 이후 이다.
배설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배설은 주부(主簿;총부부장)로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였으나,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고 말았다. 모름지기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데, 조경이 패배했으니 군적도 없는 잔병신세로 전락한 배설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하고 있었다.
배설은 조경이 성공했더라면, 바로 다음번 자리가 군수나 현령이 되는 것인데, 조경은 대패하여 일개 잔병이 되고 말았든 것이다. 이에 배설은 지역주민들로 향병을 모아 왜군의 저지를 위해 활동했으나, 그 역할은 미미 했었는데, 김면 정인홍의 의병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히 그 곳에 합류 하게 되었다. 아버지 배덕문이 68세에 성주성에서 거병하자 자연히 합세하게 되어 하나의 약 1500여명의 대 부대를 이루게 된다.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22일(을해) 5번째기사(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은 일본군을 추격전투를 하므로 피해가 상당했다)
선전관 이춘영이 영남 왜적의 동향과 김성일·김면의 죽음을 아뢰다------------
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라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욤병이 창궐했다.
2, 성주성(부상진)전투 연구
김면은 만석지기 유생으로 임진란으로 쫄닥 망하게 되자 고령에서 봉기하여 의병도대장에 오른 인물이다. 그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 김면이 당시 북으로진격 서울로 들어 갔더라면 도원수가 되었을 것이나, 김면과 곽재우 정인홍등은 시류를 읽지 못하여 싸나운 왜적을 추격하므로 힘든 일생 고단한 전투였었다.
1,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2,조헌을 지원하려고 출병한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일본군들을 성주성 북쪽(부상현)을 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에 대한 1~3차 공격이 모두 실패함, 성주성을 중심으로 개령 지례 개산진전투에 의병들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중부주력군에 맞선 의병들은 그흔적도 없이 전멸했다. 성주성에서 맞닥뜨린 의병들을 대 살육이 저지된 것은 배설의 적장 수급을 벤 공로임에도 이는 인정도 받지 못했고, 패전의 책임은 배설이 떠 맡았든 것입니다.
성주성 3차 공격은 최대 규모의 의병 2만이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모두실패했다. 1차 때는 일본군은 방어만 했으나,2차 3차에서는 일본군은 공격적으로 공격을 했다. 이 공격으로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성을 나와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였다. 부상진까지 추격을 당한 의병들이 거의 몰살 직전이였었고, 이 때 배문덕 의병장이 부상진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반격을 개실했고, 때 마춰 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향해 돌진 몆차례의 칼싸움 끝에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아버지께(의병장) 바침,(배문덕이 적장의 수급을 취했다고도 알려져 있음,)
경상일대의 전투와 성주성 전투패배를 징비록은 배설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조헌 영규 고경명군대는 일본군의 상대라기 보다 일방적인 살육에 가깝다. 설령 배설이 합천군수라해도 기천의 관병으로 왜군을 막을 수도 없고,당시는 합천군수도 아니였다. 이정도 병력은 경상 우도 모든 관군이 합세해도 막기어려운게 당시 실정이였다.(배설은 이순신이 아니다)
성주성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고, 계사년 1월 왜군들은 스스로 자진 철군을 해서 무혈입성을 했다. 성주성 전투는 실패했으나, 성주성은 탈환이 되었다. 왜군이 새를 잡는 조총을 들고 다닌다든 1593년 정월 명나라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수는 22600명 장수는 약 200명 정도이나 실전에서 의병장들이 대거 사망하고 의병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명목만 유지하게 된다.
이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북진하든 권율은 끝내 행주산성 파주까지 올라가서 도원수를 제수 받게 된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장군휘하의 약 1500명의 의병중에 선봉장에 불과하였고, 김면과 정인홍은 약 1500여명의 향병인 배설에게 낙동강가로 가서 금산 이치등지에서 후퇴하는 일본군 약 1만병을 막으라는 명령을 했다.
이에 배설은 배덕문장군과 함께 약 1500여명의 향병들에게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견이 낙동강강변의 넓은 분지에서 적을 기다리자고 한다. 그러나 배설은 이미 추풍령전투와 탄금대 전투를 목격한 경험으로 병졸들에게 부상진 험로 계곡에 매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강변에서 아군의 군세를 믿다간 단 한명의 왜적도 공격치 못하고 몰살 당할 조총의 교대연발 사격을 걱정하여 부상현 계곡에 매복을 시킴으로써 화살 시위권으로 적을 유인코자 하였다.
드딛어 일본군은 의병들 전선이 무너지자 일제히 일본도를 들고 추격하여 부상진 계곡에까지 들어 왔다. 배설은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리자 계곡에 갇힌 구로다 간베에 흑전구침은 배설과의 칼사움에 패배 목이 달아난자 일본군이 일제히 도주하여 성주성안으로 들어가 1월까지 침거하다 대장을 읽은 일본군들은 1월 밤에 모두 퇴각해 버렸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분기점이 되었고, 이전투로 경상도가회복되는 바. 권율의 행주산성을 공격치 않고 일본군이 퇴각하게 된 것이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의병들이나 일본군들은 일전불사의 대군이 마주하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당시 배설은 배덕문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 신분이였다.
정인홍과 김면은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제 2차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12월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의병들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과라면 배설의 적장의 목을 벤 것 뿐이였다.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김면은 슬슬히 只知有國 不知有身(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남기고 병영에서 전사했다.
배설이 김면 정인홍 아래에서 이름없는 의병신분이 였으나, 방어사의 부주(총무부장)로서 언제든지 합천군수로 제수 받을 자격이 있었음에도 패잔병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594년 합천군수가 되고 경상우도 일대의 탈환 공로로 늦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다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배설은 진급이 아주 늦은 편이다. 그럼에도 경상지역 고관들은 배설장군의 전공이 배문덕장군의 공이라며, 진급을 반대하는 상소가 많았으며, 자신들도 모르는 전공이라고 하기 까지 하였다. 자신들은 관군이 되어 도망다녔으니, 당연히 전공을 알 수 없었음에도 시기와 모함은 이때도 있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구로다 요시타카가문의 장군도 두개중 하나가 아직도 종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3, 임진침략(일본)상세보기, 1592년 4월 13일 오후 20만 여명의 왜군은 9개 부대로 나누어 시차를 두고 조선을 공격 하였다.
제1진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는 700여척의 전선에 병력 1만8천7백 여명을 태우고 4월13일 아침 8시경 대마도의 오우라항(大浦港)을 출발 하였다. 그 날 오후 5시에 부산 앞 바다에 도착하였고, 다음날인 14일 새벽에 부산진성을 공격 하였다. 15일은 동래성을 유린하였고, 양산, 밀양을 거쳐 청도, 대구를 지나 선산과 상주를 공격하고 계속 북상 하였다.
13일 상륙을 마친 왜군들은 14일 부산진성을 침범,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송상현 부사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 송상현은 15일 전투에서 두시간만에 중과부주적으로 전사,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이다.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병력 2만2천 8백으로 4월18일 부산포에 들어와 언양, 경주,영천, 신령, 군위, 비안, 용궁, 풍진도를 거쳐 문경에서 제 1진을 따라 충주로 공격 했다. 이 두 부대는 5월2일 한강을 건너고, 5월3일 남대문과 동대문을 통해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북상한다는 보고가 날아 들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鳥領) 이남에서 왜군을 방어하도록 지시 하였으나, 4월25일 이일이 지휘하는 부대가 상주에서 패하고, 4월26일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이 지휘하던 문경도 왜군에게 점령 당 하였다. 4월28일에는 도순변사 신립이 8천명의 군사와 함께 충주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역시 패 하였다.
선조는 4월30일 밤 2시쯤 소나기를 맞으며 도승지 이항복이 들고 있는 등불을 따라 말을 타고 100여명의 신하와 함께 한양을 빠져 나갔다. 도성과 궁궐은 왜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난민들에 의하여 방화 되고, 파괴 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으며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하였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한양이 점령 당하자 선조는 5월1일 개성부에 도착 했다가 5월7일 급히 평양으로 피난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4월19일 죽도 부근에 상륙 한 후 김해, 창령을 지나 오른쪽 부대는 무계, 성주 방향으로, 왼쪽 부대는 초계, 거창, 지례 방향으로 각각 북상하여 금산에서 합류한 후에 영동, 회덕,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공격 하였다.
제4진인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부대는 병력이 1만여 명이었나 집결이 지연 되고 전선이 부족하여 제 때에 투입 되지 못하고 5월2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 하였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휘하는 4천명의 병력은 선발대로 4월 중순 부산에 상륙해 있었다. 이를 합한 1만4천l 왜군은 창령을 거쳐 현풍에서 머물다가 상주를 지나 한양을 공격 하였다.
제5진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鳥正則) 부대는 병력2만5천으로 제4진에 뒤 이어 상륙 한 후, 제2진인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진출로를 따라 북상 하면서후방 부대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제6진 병력만5천7백명, 제7진 병력 3만명, 제8진 병력 1만명, 제9진 병력 1만1천5백명이 연이어 상륙 한 후방 부대 역할을 하거나 한양으로 이동 하였다. 그리고 1만2천명의 에비 부대가 투입 되어 주로 후방 경계를 담당 하였다.
제3진인 구로다 나가마시(黑田長政) 중부군 부대는 병력1만1천으로 구로다 요시타카의 직할 부대로 조선 침략 일본군을 실질 지휘하고 있었다.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 [1546.12.22~1604.4.19]일본 센코쿠시대 무장겸 다이묘, 부젠노쿠니 나카쓰성주로 간베에(官兵衛) 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젊은 시절부터 친구이자 참모로서 최측근으로 실력자다.구로다 모리타카의(黑田職隆) 장남으로 히메이지에서 태어났다. (출처: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官兵衛는 약 39세 전후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고 한다.
정유재란을 유심히 살펴보심 일본군의 행로가 중부는 비워두고 서남진함을 볼 수 있죠, 성주성 김천등지를 우회합니다. 즉, 한마디로 이순신장군을 찾아가는 일본군이죠, 배설장군을 어캐든 피해가려는 큰 형세가 보이지요,, 왜 그럴까요, 이순신, 유성룡, 당시 동인조정은 일본과 뭔가를 주고 받고 있다는 느낌 여차하면 항복(강화) 이걸로 파면됩니다.
1597년 정유재란 전투
7월 15일 칠천 / 원균 :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야키자키 가토
8월 16일 남원 / 양원 : 우끼다 = 남원함락
8월 17일 황석산성 / 곽준 : 가토오 = 산성 함락
9월 7일 소사 / 해생, 양등산 : 모오리 = 일본장수
4,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정유재란과 배설장군,
정유재란에 앞서 黑田孝高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 기요마사를 통해 출정에 앞서 '성주의 배설장군가의 그 예봉은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습니다. 정유재란에 가토 기요마사외 왜군들은 배설의 성주만 피하면 된다고 했으나, 막상 부산 앞바다에서 결국 배설을 만나게 된 것이니,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전이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왜 이런 전교를 내렸을 까요, 일본군은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병사들을 소모시키지 않는 장군들 간에 결투로 병사들을 합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요, 만일 일본군이 배설장군을 만나 결투로 패배하면 침략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었고, 흑전구침처럼 당할 수 있었죠, 주의를 준 것인지 그내 내막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In succession , the person (or soldier ,or general ) reseized many castles such as Seongju , Hapcheon gunsu, Chogye and Euiryeong and then was promoted to a corp commander .
[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5,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햐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배설이 칠천량패전후 멸치잡이 상인에게 배를 팔려고 했다?
(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이나, 사실은 이 당시 배설은 7일간의 기적적인 430킬로를 청야 작전을 실행 했습니다. 배를 팔아 먹으려면 울산 서생포나 포항 고래잡이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명량해협으로 갈 이유가 없는 것이죠?
5, 平義智 격파
임진왜란은 한마디로 조선군이 무지막지하게 일본군에 좆기는 전투이고, 매번 전장마다 조선군은 전멸을 햇습니다. 설 장군은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田句沈:官兵衛)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조경이 방어사로 패배하여 적군에 포로가 되었어도 김천등지에서 향병을 규합 끝임없이 유격전을 펼쳐서 일진일퇴를 하므로 임진왜란 지휘부가 북진하지 못하게 괴롭혔고, 스스로도 장군으로 불리기 원하지도 않았다. 오직 백성들의 굶주림에 애처로워하든 일생을 마친 평범한 장수였다. 포로가 된 조경을 유격전으로 구출하기도 하였고,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최초로 유격전에 시달리다가 끝내 구로다 분신이 척살되므로 전국에서 일본군은 비밀리에 퇴각하게되었다.
6, 간베에 흑전구침과 칼사움
배설은 성주로 들어 와서 2만병의 일본군을 부상현으로 몰아 약 700여명의 일본군을 척살하는 과정에 구로다 분신 흑전구침을 목을 베어 배덕문장군께 바치게 됩니다. 이 전투는 패전으로 기록되어 기록이 많지 않으나, 조선군 2만과 일본군 2만이 대치한 대규모의 전투 와중에 부상현에서 일본군 총지휘부를 괴멸시켜 임진왜란이 파탄되어 일본군들 마저 설 장군을 흠모합니다.
설 장군은 배덕문장군과 함께 약 1500여명의 향병들에게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견이 낙동강강변의 넓은 분지에서 적을 기다리자고 한다. 그러나 설장군은 이미 추풍령 전투와 탄금대 전투를 목격한 경험으로 병졸들에게 부상진 험로 계곡에 매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 강변에서 아군의 군세를 믿다간 단 한명의 왜적도 공격치 못하고 몰살 당할 조총의 교대연발 사격을 참작하여 부상현 계곡에 매복을 시킴으로써 화살 시위권으로 적을 유인코자 하였다.
드디어 2만 병력인 일본군은 의병들 전선이 무너지자 일제히 일본도를 들고 추격하여 부상진 계곡에까지 들어 왔다. 설 장군은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리자 계곡에 갇힌 구로다 간베에 흑전구침은 설장군의 칼사움에 패배 목이 달아 나자 일본군이 일제히 도주하여 성주성안으로 들어가 1월까지 침거하고 꼼작 않는다 대장을 읽은 일본군들은 1월 밤에 모두 퇴각해 버렸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분기점이 되었고, 이전투로 경상 우도가 회복되는 바, 권율이 요행히 행주산성을 공격치 않고 일본군이 퇴각하게 한 원인되었다. 이 성주성전투로 조선 전역에서 일본군의 퇴각이 진행되어 전투가 소강되고, 조선군이 곳곳에서 소규모전투에서 승리를 맛보게된다.(일본군이 전투를 피하게 되었다)
7, 중국측 기록,
칠천량해전에서의 배설을 찬미하는 내용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임진록》한자필사본을 중국의 한국어전문가 워이쒸썽(韦旭升)이 표점부호를 찍고 정리하여 출판한 《항왜연의(抗倭演义)》에만 나온다. 우리글 《임진록》들에는 배설찬미가 없다는 점이 특이하고, 배설의 관직과 이름이 한자본에서 틀리게 나온다는 점 또한 우스운데, 어느 고리에서 틀렸는지는 필사본영인본을 보지 못한 이상 판단할 수 없고, 여기서는 중국어로 인쇄된 그대로 인용한다.
“元均独坐船旁,抚臂长叹。俄而战退,了无影迹,或云投降,或云死贼。右水使李亿棋投水而死。左水使裴举与将士数百收其战船,且斗且战,为殊死战。却倭船而出逃走,呼居民急避乱卒。”(《워이쒸썽문집(韦旭升文集)》2卷,中央编译出版社중앙편역출판사 2000년 9월 초판1쇄, 544쪽)
우리 말로 옮기면 대체로 이러하다.
“원균은 홀로 배가에 앉아 팔을 치며 길게 탄식하더니 잠시 후 싸움에서 물러나 자취가 사라졌다. 혹자는 투항했다 하고 혹자는 적들에게 죽었다고고 했다. 우수사 이억기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좌수사 배거는 수백 명 장사들과 함께 그 전선들들 거두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왜선을 물리치고 빠져나와 달아나, 주민들을 불러서 급히 어지러운 군졸들을 피하라고 일렀다.”
민간에서 생겨난 소설들이 민심을 일정하게 반영함을 고려할 때 경상우수사 배설의 행위에 기초해 생겨난 “좌수사 배거”에 대한 묘사 배설장군을 말해준다...중략..(출처:자주민보)
설 장군에 대한 칭송은 중국와 일본 문헌에만 나온다. 조선의 모든 문헌은 설장군을 비겁자 도망자로 낙인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인 풍신수길 보다도 더욱 설 장군을 모욕 비난하고 있다. 물론 유성룡이 말년에 파직당하면서 이순신의 앞날이 위험해지자 이를 막아내고자 무던한 필봉을 휘두런 것은 이해가 된다지만, 역사의 평가인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히라, 구로다 요시타카, 풍신수길 마저도 설 장군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실록의 전후 기록은 모두 허구이다)
8, 유성룡의 평소 어록을 살펴보자,
선조 29년 1596년 4월 2일(무술)1번째기사, 선조가 유성룡에게 하문하다, "배설 제찰사가 성주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든가?"
"대개 그사람은 애민을 위주로하여 수습하고 무마하는 뜻이 지성에서 우러러 나오며, 자신을 철처히 단속하고 거처가 숙연합니다. 배설 제찰사는 (대구팔공산)공산산성을 수축하니 영남 사람들이 모두 공산 산성에 들어가 계책을 펴며, 근 일에는 전생산성을 수축하여 거기에 들어가 웅거할 만하다고 하므로 이 성을 수축하게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장수들도 이 성을 수축함이 옳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 장군은 영남의 우상이고 기개였다.고 하고 있다. 대구가 대구답게 공산산성을 축조하여 임진왜란의 피란민을 대거 수용했음과 배설이 제찰사로 전권을 행사했음을 논하고있다.
당시 선조임금의 정무에서 논하는바를 살펴보자, 선조 28년 1595년 2월 8일 신해 6번째기사,
이헌국이 아뢰기를,,"도원수 권율은 대궐 밖을 전제해야 하는데, 임기 응변하는 일은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매양 품명(명령받는 일)하는 것으로 규칙을 삼으니, 남족지방의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제찰사를 반드시 내려보내 진압하고 모든 일을 재결토록해야 할 것이며,... 배설이 백성들에게 만류당하여 경상우도수사에 부임하지 못 할리가 없습니다."선조에게 아뢰다. 이미 배설은 조선 최고의 대장으로 호칭되고 실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남지역에서 배설은 군권과 재정을 총괄하는 독자적인 대장으로 행사하는 유일한 장군이 되었죠. 원균과 이순신이 권율의 명령따라야 하는 군권만 가진 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선조29년 2월16일 판서 김우웅 시무를 논함, 상차,
"장수가 많으면 명령이 나오는 곳이 많아 제장과 열읍이 일정하게 다르는 곳이 없게 되니, 이것이 끝내 패망하게 되는 원인입니다.(주역) 만약에 별도로 대장을 두어 융무 (군무+ 재정=요즘말로 전시계엄사령관 ) 단순히 군무만담당하는 장군이라면 백성을 위무 할 수도 없고 식량이나 재정이 있을 리 없는데 반해 배설은 일정부분 독자적인 재정권을 권율의 지휘없이 행하게 하자는 시무를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 권율의 군권을 위협하고 있다.
선조임금 일행이 도망중에 평양에서 백성들의 폭동으로 병조판서 홍여순의 뼈가 부러질 정도의 민심이 흉흉했을때였다. 전쟁터인 경상도에서 배설이 민정을 얼마나 잘 수행했으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뭉치게했다. 그러니 이순신이나 권율처럼 백성의 목을 베지 않아도 될 정도의 선정의 정치를 미리펼쳤다.군부를 총괄하게 한다면 곽재우 배설 같은 사람이 적임자 일 것입니다. 여기서도 배설장군은 권율의 지휘를 받지 않고 군무와 재정을 총괄하게함을 주장하고 있고 실제 그러 했기에 혜청을 설립 빈민을 구제 할 수 있었다.
선조임금 일행이 도망하다가 평양에서 폭동이 읽어나 병조판서 홍여순이 뼈가부러지는 일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폭동 반란이 있었는데, 반해 왜군이 득실거린 경상도에 가장많은 일본군이 있었음에도 의병에 지원하고 결사항전하게 배설이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호남의병까지도 경상도로 들어오게 권장책을 펼친 것이다.
3일 굶어면 도둑질 않는 사람이 없다라는 임진왜란으로 전국적인 크고 작은 민란과 폭동이 있었다면, 경상도는 의병들이 벌때처럼 읽어난 것이 비교가 된다. 권율이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을 사지로몰면서 휘하장수들(배설)이 이에 따를릴 없음도 예견하고 있었다. 일본군을 기어코 싸워 이겨서 축출하려는 배설이 사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은 너무도 뻔했기때문이다. 배설을 음해한 홍여순이 진도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무뢰배 백성들의 지게짝대기로 맞아죽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쟁당시는 배설은 용맹한 충신으로 기록되나, 전쟁이 긑나고 본격적으로 유성룡이 탄핵되자 징비록으로 배설을 무능한 도망자로 그리게 되고 이에 필사본이 고대일록 등등의 기록에서 배설이 도망자로 그려졌다. 이는 전혀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이다.(배설의 기록은 전쟁중의 기록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11, 조선수군 전멸 기획 조선군지휘부,
조선수군전멸이라는 참담한 기습을 당한 상태에서 일본군은 10만 왜군이 서해로 군산 해망포나 제물포로 바로 진격해서 대규모 살육으로 조선이 항복하게 하려고 했기에 배설은 조정의 전멸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서해 해로인 '울똘목'으로 430km를 기아 상태에서 초스피드로 진군 왜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방어진을 꾸린다.
12, 일본군의 서해진출 제지,
도주하는 설 장군 일행치고는 너무도 어렵게 도주한다고 봐야한다. 그냥 세월호 선장처럼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면 그만임에도 천신만고의 전투준비를 하면서 조선백성의 대살육을 저지하고자 해상 심해전투를 위한 전투준비를 하였고, 적의 침략기지화된 대마도출신 평의지(히라요시)를 추격 격살하려고 했으나, 합천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함으로 눈앞에 히라요시를 두고 한탄했으며,배설장군은 대마도 수복을 위한 수군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칠천포에서 보름날 밤에 전멸하고 남은 패잔군, 피항하는 월파군들(칠천포패전군)을 향해 백성들이 산봉우리에서 솟불을 지피면서'강강술래'왜치면 수군들의 안전항로를 거국적으로 알려주었고, '명량포'하거나 '노량포'또는 '울똘목'이라고 신호해서 항로를 가르켜주고 청야작전이 실행되어 낮에는 전함을 수리하고 밤에는 항해했었다.
임진왜란 총지휘자가 구로다 요시타카 임에도 선조임금과 그 신하들은 평의지가 사신으호 온 후 풍신수길이 평의지의 사촌 평수길로 끝까지 알았다고 한다. 평의지가 대단한줄알았고, 일부 동인들은 그기다 항복하고자 내심 소서행장과 교류하든 시기에 ♡ 일본군장군 목을 벤 배설장군이 원수였다. 항복도 못하게 적의 원성을 사게힌 배설이 임진왜란 망친 대가로 역적으로 몰렷다.
정유재란 일본군 14만이 경상우도 성주성을 회피하게 하였고, 풍신수길이 호남으로 침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라는 명령도 설장군의 430km 청야작전과 백성소개령으로 호남으로 침략한 일본군에게 잿더미만 안겨주어 결국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설장군이 가는 곳에 백성들 목숨이 지켜졎고 일본군은 잿더미만 노획하게 하여 침략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면서 백성들을 구해내는 기적이 일어났다.
13,일본군의 기습속에서도 교전선택,
우리가 10만 대군에 바다에서 적군에 포위 됐다고 할 때 아무리 장군이라고는 해도 두렵지 않겠는가? 칠천량해전에서 최호의 충청군은 배추밭의 "굼뱅이 한마리가 수천마리의 개미에게 잡혀 뜻기 듯이" 왜군들이 새까맣게 충청수군 배에 올라 도륙당하였다.적벽대전에서 조조같은 명장도 제한몸 돌보기 힘들게 탈출함에도 중원과 반도에서 반만년 역사에 이러한 대규포 포위망을 약 2천 여명의 병사들을 퇴각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세월호 침몰 때 승객들이 제 한몸 서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욕하지만, 과연 그 런 사태에서 제 한몸 보존하기도 쉽지 않은게 사람이다. 6.25 전쟁 때 국군들이 퇴각하든 것이나, 칠천량 바다에서 3중 포위망은 빈틈이 없고 육지에는 매복군 철처히 포위했든 칠천량 해전 살아서 나온 것 자체만으로도 조선은 국운이 다한 것이 아니였다. 이순신장군분신인 5년간 양성한 전라좌수군 이억기장군과 전라좌수영 약 5,000여 명 전 병력과 창제귀선과 전함전부의 전멸은 불가항력 이였었다.
역사 왜곡의 근거가 된 전후 사료들보기,
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12) 7월 15일(신유) 비 좌목
10-07-15[13] 3차 정사에서 윤치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3차 정사를 하였다. 윤치능(尹致能)을 효릉 영으로, 이문직(李文稷)을 가감역관으로 삼았다. 가감역관 조병찬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초자하였는데, 조관으로서 나이 80이 되어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전 현감 홍순학(洪淳學)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금위영 장관들의 사강 때에 유엽전에서 연달아 5순 몰기(沒技)하여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증 이조참판 ▲배덕문▲(裵德文)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병조참판 ★【배설】★(裵楔)에게 병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증 병조참의 선약해(宣若海)에게 병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충절(忠節)이 뛰어나서 가증(加贈)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군수 이유형(李儒亨)에게 좌승지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학생 이단운(李端雲)에게 사복시 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민수(李敏樹)의 본생 조고비와 증조고비로서 옮겨 시행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형조 참판 이철구(李鐵求)에게 완흥군(完興君)과 영의정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학생 이득훈(李得勳)에게 완창군(完昌君)과 좌찬성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이우태(李宇泰)에게 완춘군(完春君)과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판종정경 이경우(李景宇)의 삼대이다. 고 통덕랑 김이상(金履庠)에게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는데, 전 예조 참의 김학근(金鶴根)의 본생 조고비로서, 이증(移贈)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수사 정수기(鄭壽基)에게 병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정지용(鄭志鎔)의 고비이다.
○ 7월 18일 정미(丁未)
서원에 머물면서 부(賦)를 지었다. ○ 산양(山陽)의 박군수(朴君秀)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오후에 정사고(鄭士古)가 서원에 왔다. 해가 기울 무렵에 박공간(朴公幹)이 서원에 왔고, 황혼에 황덕장(黃德璋)이 의령(宜寧)으로부터 서원에 왔다. 황이 말하기를, “통제사 원균이 14일에 배 200여 척을 끌고 나가서, 공산(公山)에서 적을 맞이하여 치고는 영등포(永登浦)에 배를 머물러 두고 있었습니다. 16일 밤에 적이 와서 밤중에 기습하였으나 배를 묶어 두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이 트자 적선이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원균(元均)은 바다에 빠져 사라지고 충청 병사 최호(崔浩)도 죽었습니다. 주사(舟師) 중에서 죽거나 물에 빠진 자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은 일이 글렀음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서 포위를 뚫고 나와, 곧바로 한산(寒山)에 다다라 남은 배에다 군사를 싣고 급히 도망하면서 군량과 기계를 전부 태워 버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호라! 우리나라가 의지한 것이 수군(주사)이었는데, 원균이 원래 통어할 만한 인재가 아니었음에도, 갑자기 이순신(李舜臣)을 파직하고 원균으로써 대신하게 했고, 원수 권율(權慄)은 원균을 곤장까지 쳤다. 원균이때문에 성이 나서 급히 군사를 몰아 나가면서 세력의 많고 적음도 고려하지 않고, 계속 바다에 배를 띄워 다 함께 침몰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는 실로 조정의 정책이 마땅함을 잃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수의 방략이 어긋나 날마다 함부로 전투를 벌여 일의 기틀을 크게 잃은 것이다. 원균 같은 자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나랏일을 어찌하며 백성들은 또 어찌 할 것인가! 온 나라 사람이 한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나 놀라 모두 이제 다 죽게 되었구나 하는〔溘然〕생각을 가졌다. ○ ★【배설】★(裵楔)은 몰래 전라도로 도망쳐 전선(戰船)을 팔았다고 한다.(고대일록)
○ 정월(正月) 8일 계해(癸亥)
★【배설】★(裵楔)이 유임되고, 합천(陜川)의 김준민(金俊民)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차하고, 김영남(金穎男)을 군기 정(軍器正)으로 삼는다는 전교가 내려졌다.(1593 고대일록)
○ 12월 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金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金大將) 면(沔)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徐禮元)을 김해(金海)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金睟)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7월 7일 양원이 친히 심유경을 압송하여 차관과 함께 서울로 향하였다.
○ 적의 배가 이달 초부터 잇따라 건너왔다. 원균(元均)이 여러 장수로 하여금 나아가 탐지하게 하고, 8일에 수병(水兵) 여러 장수가 웅천 바다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하여 배 10여 척을 부수었다. 적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므로 퇴진하여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이때에 도원수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하동에 도착하여 접반사에게 관문(關文)을 보내기를, “제도(諸道) 도순찰사 권율은 왜의 정세에 관한 일로 관문을 보내오.
8일에 수군 여러 장수가 부산 바다에서 시위(示威)하였는데,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이 큰 배 두 척으로 선봉이 되어 웅포(熊浦)에 이르러 갑자기 적을 만나 접전하기를 한참 동안 하였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왜놈이 그 수를 헤아릴수 없었소. 왜놈들이 모두 배를 버리고 상륙하여 달아나면서 빼앗은 군량 2백여 석을 배와 함께 불태우고, 또 1천여 척이 본토로부터 바다를 덮어 오는데 우리 군사가 가로막으니 적병이 피해 갔소. 운운.” 하였다.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난중잡록)
○ 성주(星州)에 진을 쳤던 적에게 이미 무계(茂溪)ㆍ현풍(玄風)의 응원이 없어져서 세력이 심히 외롭고 약해졌으므로, 정인홍(鄭仁弘)이 김면(金沔)과 세력을 합쳐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더니, 김준민(金浚民)은 형세가 불편하다 하여 어렵게 여기고 의심하는 빛이 있었으나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모두 진격함이 옳다 하여 드디어 진격하기로 결정하다. 모든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 각기 부대를 정돈하고 수십 리에 둘러 포진하니 군사의 형세가 심히 장하였다. 인홍과 김면이 가평(可坪)에 대진(對陣)하니 성주성(星州城)에서 5리나 가까웠다. 모든 군사가 차례로 전진하여 성문을 포위하고 육박하며 진퇴하고 충돌하며 유인하여 도전하나, 왜적이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철환(鐵丸)으로 방어하였다. 종일토록 진퇴하여도 성을 함락시킬 기구가 없어서 해가 저물자 본진으로 돌아오고, 이튿날에 다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김면이 ★【배설】★(裴楔)을 시켜 부상현(扶桑峴)에 매복을 시켜 개령(開寧)에서 응원하러 오는 적을 방비하게 하다. ★【배설】★이 응낙하고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서생에게 절제(節制)를 받아서 그를 위해 중로에 매복한다는 말인가.” 하고 드디어 가지 않았다. (난중잡록)
24일.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은 인동(仁同)으로 해서 낙동강을 건넌 다음 선산(善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고,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의흥으로 옮겨 함락시키니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김수가 박진(朴晉)과 ★【배설】★(裵楔)에게 선산에 가서 왜적을 정탐하라 했는데, 도중에 죽패(竹牌)를 차고 있는 7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박진 등이 왜적의 무리인가 의심하여, 말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꿇어앉아 왜의 글을 바치는 것이었다. 위쪽에는 크게 영(令) 자 한 자를 썼고, 그 아래에는 잔 글씨로,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며, 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각각 자기 집 일에 힘쓰라. 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한다. 천정(天正) 20년 월 일 습유시중(拾遺侍中) 평의지(平義智).” 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엔 이름까지 적혀 있다. 박진 등이 그들을 포박해 오다가, 졸지에 왜적을 만나자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영남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1592난중잡록)
[주D-002]★【배설】★(裵楔)의 일 : ★【배설】★은 인명으로 보이나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 행록(行錄)은 오탈자가 많으며 내용도 중간이 빠진 부분이 자주 보이는바, 추후에 보충하여 넣은 것인 듯하다.(여헌집. 이규군 관련)
6일에 수군의 여러 장수가 한산에서 바다로 내려가서 적군과 교전하였는데 보성(寶城) 군수 안홍국(安弘國)이 패하여 죽었다. 《일월록》
○ 적군의 배가 그 달 초순부터 잇달아 건너왔다. 원균이 여러 장수에게 나아가 염탐하게 하였다. 수군 여러 장수가 웅천 앞바다에 적군과 만나 싸웠는데 우수사 ★【배설】★(裵楔)이 선봉이 되어서 적선 십여 척을 격파하고 군량 2백여 섬을 빼앗았는데도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였으므로 군사를 물리고 구원병을 청하였다.
○ 권율이 곤양(昆陽)에 도착하여, 원균이 자신은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군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기만 하였다고 전령으로 불러와서 곤장을 치며, “국가에서 너를 높은 벼슬로 대우하는 것이 한갖 편안하게 부귀만을 누리게 해서인가.” 하였다.
그날 밤에 원균은 분한 마음을 품고 물러나와 한산에 이르러 남아서 지키고 있는 군사들까지 쓸다시피 다 거느리고서 급히 부산으로 갔는데 적선 천여 척이 또 나왔다. 원균이 노젓는 군사를 독촉하여 배를 전진시키니 적군이 파도에 흩어져서 지탱하지 못하는 듯하므로 원균이 기세를 타고 전진하여 그칠 줄을 몰랐다.
뱃사람들이 모두, “물마루[水宗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 있는 지점으로 물결이 가장 센 곳]는 벌써 지났고 대마도에 가까워져서 배를 부리기가 불편하니 우리는 살 길이 없다.” 하였다. 원균이 듣고 급히 노를 돌리라고 명령하였으나 배가 역류하는 물길을 넘어선 까닭에 노를 저어도 소용이 없었다. 전라 우수사가 거느린 배 일곱 척이 먼저 동쪽으로 표류하여 흘렀다. 원균이 모든 배를 독촉하여 급히 물러나게 하고 밤낮으로 노를 저어서 겨우 가덕도(加德島)에 도달하였다.
적군은 우리 군사가 형세를 잃었음을 알고는 곧 신ㆍ구(新舊) 전선을 내어 엉크러져 쫓아오므로 우리 군사는 영등포로 물러왔는데 군사들은 땔나무와 물을 다투어 구하였다.그 전날 밤에 적군이 작은 배를 내어 육지로 내려와서 복병을 시켰다가 이때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포성소리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원균 등은 창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급히 배를 저어서 온라도(溫羅島)로 물러났으나 적군이 크게 몰려왔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하늘과 물이 어둡고 처참하기까지 하였다.
원균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서 의논하기를, “적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일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뿐이다.” 하니, ★【배설】★이, “용맹할 때는 용맹하고 겁을 낼 때는 겁내는 것이 병가(兵家)의 요긴한 전력이오. 부산 바다에서 세력을 잃었고 영등포에서 패전하여 흉적이 벌써 가까이 왔는데 우리 형세는 외롭고 약하기만 하니, 용맹은 부릴 수 없고 겁내는 것만이 쓰일 수 있소.” 하였다. 원균이 성을 내며, “죽고야 말 것이니 너는 여러 말 말아라.” 하였다.
★【배설】★은 자기 배에 돌아와서 자기의 휘하 여러 장수와 함께 비밀히 의논하고 군사를 물리기로 하였다. 한밤중에 적군이 몰래 비거도(鼻居舠)로 하여금 우리 배 사이를 가만히 뚫고 들어와서 형세를 살피고 또 전선 5, 6척으로 우리 배 주위를 살며시 돌아 다녔으나 장수나 군사들이 모두 몰랐다.7월 16일, 날이 밝자 복병선(伏兵船)에 먼저 불이 붙어 격파되니 원균이 크게 놀라서 은밀히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며 불화살을 쏘아서 변을 알렸다.
갑자기 각각 우리 배의 옆에서 적선이 갑자기 뚫고 들어와서 철환이 쾅쾅 떨어지니 군졸들이 낯빛이 변하였다. 원균이 비로소 적의 습격을 깨닫고 쫓아가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여러 군사를 독촉하여 닻을 내리고 접전하도록 하였는데, 형세가 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배설】★은 바라보기만 하다가 퇴각하려 하자 원균이 군관을 시켜 잡아오게 하니 ★【배설】★이 항거하여 싸움이 한창일 무렵에 관하의 배 열두 척을 거느리고 달아나 버렸다.원균도 힘을 지탱할 수 없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닻을 올리고 흩어져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적군이 쫓아와서 마구 죽이니 원균 등이 다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인의 죽은 자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원균이 본래 살이 쪄서 하루에 술 한 말과 생선 다섯 묶음을 먹었으므로 배가 무거워 걸으면서 싸우는 것을 잘하지 못하였다. 나무 밑에 앉아 쉬다가 적에게 살해당하였다.
○ 이억기(李億祺)ㆍ최호(崔湖) 등은 물에 빠져서 죽고, 전선 백여 척도 모두 함몰되었다.
○ ★【배설】★이 전선을 거느리고 달아났으므로 그 군사들만은 온전하였다. 한산도에 돌아와서 피난가고 남은 백성으로 섬에 살고 있는 자는 적군을 피해 가도록 하고 불을 놓아 막사ㆍ양곡ㆍ군기 등을 모두 태우니, 순신이 모아서 몇 해 동안 쓸 수 있었던 양곡ㆍ병기가 모두 재가 되었다.
○ 적군이 이긴 기세로 서쪽으로 향하니 남해(南海)와 순천(順天)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두치진(豆恥津)에 이르러 뭍으로 내려와서 길게 휘몰아치니 전라도와 충청도가 크게 진동하였다.
○ 권율이 이순신에게 진주에 가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기용되었다.(선조조 고사본말)
결론 ,
배설은 실제 전쟁사에 있어서는 구국에 영웅이다. 일본군이 서해진출이 좌절된후 육로인 호남으로 들어 가면서 청양작전으로 군량미를 얻지 못하자 일본군은 직접 들판에 나가서 추수를 하기 까지 하므로서 아군으로부터 피해를 곳곳에서 입게 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의 종전을 앞당긴 배설장군의 청야작전 덕분이였다. 비록 비운에 장수로 영웅이 되진 못했으나, 그 역할에 있어 구국의 영웅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