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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

自公有花 2014. 11. 10. 07:17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일본에서는 관백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

당시의 관백은 히데요시의 친조카인 히데쓰쿠였습니다.

 

고마키 나가쿠테에서 이에야스에게 깨졌던 그 히데쓰쿠입니다.

당시 부장 이케다는 죽고 대장 히데쓰쿠는 도망쳐서 살아 남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히데요시에게 찍혔던 히데쓰쿠가 기사회생한 것은

히데요시의 늦둥이 아들 쓰루마쓰가 요절한 덕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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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한 히데요시는 꼴도 보기 싫은 일본을

히데쓰쿠에게 물려주고 훌훌 떠나려 했습니다.

결심한 히데요시는 조카 히데쓰쿠에게

관백을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으로 물러납니다.

 

히데쓰쿠의 권력은 미완이었습니다. 

인사권 병권같은 실권의 이양은 요원합니다.  

권략의 이양에 두 가지 변수가 등장합니다.

이순신과 히데요리가 히데쓰쿠를 방해합니다.

 

이순신은 히데요시의 일본 탈출을 원천 봉쇄해 버립니다.

히데쓰쿠가 불편해지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첩 챠챠가 느닷없이 임신해서 

히데요시의 두번째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납니다.

 

 

처음에 히데요시는 두번째 아들 히데요리를 냉대했다고 합니다.

챠챠의 외도를 의심했다는 설과

또 다시 요절할까봐 일부러 정을 붙이지 않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수십명의 처첩을 거느리고도 무자식이었던 히데요시가

유독 챠챠에게서만 아들을 봅니다.

이상합니다. 

히데요시의 냉대도 잠깐, 

백일도 지나기 전에 아들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보물이 됩니다.

 

단칸방의 신혼살림처럼 히데요시와 챠챠는

어린 히데요리를 가운데 끼고 누워 잤다고 합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천하인이 처자식과 한 방에서

내천자를 그리고 자는 것은 파격이었습니다.

 

 

 

          불운한 히데쓰쿠

 

 

히데쓰쿠는 밥 맛을 잃어버립니다.

삼촌의 친자식 히데요리가 무서운 경쟁자로 느껴지는 때문입니다.

스트레스에 짓눌린 히데쓰쿠는 방종한 생활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은 임진왜란이 휴전으로 접어든 1593년인데

히데쓰쿠가 관백에서 폐적되는 것은 2년 후인 1595년이었습니다.

히데쓰쿠는 절간에 유폐당합니다.

 

히데쓰쿠 폐적의 표면적 이유는 악정과 난행이었다고 합니다.

길가는 스님을 기분나쁘다고 베어버린 것과

모녀를 함께 첩으로 삼은 것 등을 지적받습니다.

 

 

사람들은 표면적인 이유를 믿지않습니다.

정황상 누가 이익을 보는지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사가 꼬여 심사가 뒤틀린 히데요시가 잔인한 짓을 저지릅니다.

 

히데쓰쿠는 히데요시의 하나뿐인 누나의

또 하나뿐인 아들이었는데 관백에서 쫓겨나 중이 됩니다.

원래 입산해서 중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죄의 댓가를 치룬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룰을 무시해 버립니다.

입산한 히데쓰쿠에게 곧바로 할복 명령이 떨어집니다.

히데쓰쿠의 나이 스물 여덟, 젊은 나이에 찜찜한 죽음을 받았습니다.

가까운 피가 먼 피를 죽인 셈입니다.

 

 

히데요시는 더 잔인해집니다.

히데쓰쿠에 이어 그 처첩과 자녀 39명을 다리 밑에서 처형합니다.

참형을 완료하는데 무려 5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구경하던 백성들은 참혹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연루자를 만들었는데,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히데요시의 망상 때문이었습니다.

가신 절반이 크게 꾸지람을 받습니다. 

불만을 품은 이들은 나중에 히데요리를 배반하고 이에야스편이 됩니다.

 

아들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던 히데요시의 욕심이

도를 지나쳐 아들의 장래까지 뽑아버린 셈입니다.

천하를 요리하던 히데요시도 말년에 이르자

혈육의 정에 빠져서 광기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미츠히데를 물리치자 그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듬해 최대 라이벌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를 시즈가 타케(賎が岳) 전투에서 물리치고 이것을 필두로 적극적인 군사정벌에 나서 전국을 평정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토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굴복시키고 천하통일의 꿈을 완성시킨다. 이때가 1590년이다.

그는 무사로서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워낙 천출이라 쇼오궁(将軍)은 못되고 조정으로부터 캄파쿠(関白)와 다이죠오 다이징(太政大臣)이란 지위를 얻어 정치의 실권을 잡는다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이슬로 떨어져 ​이슬로 사라지는 나의 몸인가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나니와(현재의 오사카)의 일은 꿈 속의 꿈이로다.

향년 62세로 후시미성에서 사망했는데 출세와 인생의 허무함이 잘 담겨있는 사세구를 남겼다.

 

풍신수길 (豊臣秀吉:1536~1598, 8, 18)

 

어느 날 지진으로 키요스성의 토담이 100m 정도 훼손되었다. 노부나가가 즉시 담을 고칠 것을 부하에게 명령했으나 20일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는 이 전국 시대에 적의 공습을 받으면 잠시도 버틸 수 없지〉라며 일부러 노부나가가 들리도록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들은 노부나가는 토오 키치로오(豊臣秀吉)에게 수리를 명했는데 토오 키치로오는 인원수를 두 배로 늘리고 식사와 술을 충분히 준 다음 두 패로 나누어 상금을 걸며 경쟁을 시켰다. 그 결과 3일 만에 끝났다. 노부나가는 이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라[平]씨를 성씨로 사용하였으며 1585년 관백(關白)이 되자 후지와라[藤原]씨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1587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桃山]시대를 열었다. 1588년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 수 하였고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토지를 조사하였다. 농민들은 이제 농사를 짓는 일에만 집중하고 무사가 되거나 다이묘가 되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무사와 농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업기술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시 세금은 쌀로 징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이동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상인들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상인으로 유명했던 가문이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천하를 지배하고 통치권을 행사할 군주가 될 신분이 아니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로 평가되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꾸미고 돋보이게 하였다.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시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대륙 정복으로 오다 노부나가에 집중된 국민들의 존경심과 평가가 자신에게 쏠릴 것으로 기대하였다. 또한 토지를 몰 수 당한 다이묘나 지방 호족세력의 불만이 높아 해외로 관심을 돌리게 할 목적이 있었고, 상업의 발달로 성공한 이들은 해외무역의 필요성 때문에 전쟁에 찬동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교류가 있는 대마도주에게 명하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을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4년동안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나고야[名護屋;현재히젠의 가츠라 지역]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20만 명이 넘는 수군과 육군을 선두로 부산포를 공격하였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쳤다. 승전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중국 정벌의 꿈에 부풀게 되었고 중국 정복 이후의 계획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