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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승리원인 장갑선 12척이 99%

自公有花 2014. 11. 11. 18:13

배설은 부산첨사·진주목사·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즉, 경상우수사 5천 정병이 3만 여명의 왜선 600여척을 3차례나 공격해서 영등포로 쫒아 내었다면 이것은 기적이라 하겠으나, 일본군의 유인퇴각으로 봐야하겠죠.

 

사진 출처: 연합뉴스 영화명량의 한 장면입니다.

 

아래는 일본 전함들 의 주요재원입니다.

사실 많이들 아실거라 생각하지만 실제 판옥선과 안택선의 크기 차이입니다 배설의 배들은 다른 조선수군들의 배들보다 규모에서 압도합니다.

 

칠천량에서 기습을 당한 것이니 어쩌겠어요 이순신장군이 거느리든 전라좌수영 전함 50여척과 대포나 기계를 작동할 정병이 전멸하였습니다.

 

절망속에서 회령포에서 배설의 전함12척과 장병 1060명을 보고 벅찬감동을 느껴 임금에게 바로 장계를 뛰웁니다. 저런배라면 감히 왜군들이 우릴 없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왜군들 중에 경상우수영의 배설의 장작귀선은 보기만 해도 후덜덜 떨게 만든 규모의 차이가 있습니다.

 

콜럼부스가 세계일주를 한 배들과 비슷한크기의 12척입니다. 등자룡의 중국배는 배도 아니죠

 

전라좌수영의 판옥선들이 최대 승선인원이 90명입니다. 이에 비해 장작귀선은 승선인원이 약 200명입니다.  그러니 일본배의 두배 가량됩니다.  당시 조선배의 갑절의 크기입니다. 

 

 

후덜덜하군요. 왜 판옥선이 세키부네에 박기만 해도 일본군이 요단강 건넜는지 알것같습니다.

 

실제로 임란당시 일본군과 친밀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을 보면:…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 배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의 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높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배를 압도하였다.

라고 써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8월19일/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장작귀선)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였다..'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0.000 척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2)배세루의  粧作龜船(거북선)

배설의 粧作龜船 (거북선, 경상우수사가 되어 많은 장작귀선을 건조하였다)

보통 조선의 판옥선의 세배정도의 크기에다 두꺼운 장작으로 갑판을 덥고 그 위에 화전을 피하기위해 철판과 병사들의 갑옷을 펼쳐 우피와 함께 지붕에 쒸웠다. 조선해역전도에서 보듯이 경상우도 수군의 장작귀선은 귀두에서 대포가 나오지 않고 귀두 위쪽 갑판부분에 두발의 대포가 보인다. 그리고 귀두도 배의 아래 중간 부분에 돌기형으로 녹청색으로 나와 있어 기능이 없다. 단지 상징성과 시각적인 효과 뿐이다.  

 

확대한 장작귀선의 전면부 그림이다. 측면은 단순히장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날카로운 칼이 보인다.

 

그림 좌측에 장작귀선의 모습이보인다. 일본 수군의 주요 전투 형태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 : 적의 배에 뛰어들어 무기를 들고 싸움)에 대비하여 개발된 돌격 군함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가 그려져 있고,(우피나 갑주의 크기만 함) 그 위에는 날카로운 못과 같은 것들이 꽂혀져 있어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3)배설은 칼과 창 활을 사용하였다.

4)배설은 말을 타고 편전을 쏘았다.

5)배설은 말을 타고 추격하는 무사들에게 투척용 무기를사용하였다. 

특히 배설이 사용한 장작귀선은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좌측에 조금 보이는 배가 장작귀선이다. 그림처럼 대포가 위에 있고, 거북돌기는 아래에 상징적으로 있어 거북 머리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지 않다.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이순신이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름)

 

조선수군들의 전승비결은 뚜껑있는 장갑선 12척 때문임을 포르투칼 선교사들의 여러 기록에 있습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이순신장군이래도 전함이 없었다면 권율장군처럼 행주치마를 타고 날라다닌다고 해도 수만발의 조총 앞엔 승리는 어림 없었겠죠?

 

총알이 이순신장군만은 피해 날라다닌다고 해도, 최소한 대포를 쏠포병과 기계를 움직일 경상우수영 병사들이 남아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