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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향병과 유격전,

自公有花 2014. 11. 12. 15:26

추풍령전투-

방어사 조경1592년 4월 17일

왜군 중부 주력군 구로다 나가마사와 교전 추풍령전투 조경군대 대패하고 조경이 생포되었다.  배설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전생서 주부(총무부장)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군수가 되었다.

 

 

 

 

 

5, 향병과 유격전

1)민생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정규군의 전원 전멸하여 왜군과 맞설 군대가 없어지자 조선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싸워야했고,  수십만 명의 왜군과 명나라 군인들이 말과 소를 싸들여 도축해 먹으로  그들을 먹이고 입혀야 했던 민중의 초근목피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 지는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의병이 아닌 향병을 양성하여 군수의 보급을 차단하며 적과대항했습니다.

 

2)식량의 약탈 유격전

고니시와 가토는 신바람나게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점령하여 선조에게 농반진반 어디로 갈꺼냐고 협박까지 해놓았는데.. 정작 가진군량 다 먹고났는데도 보급이 안오는 겁니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군량을 보내줘야 했는데, 여기에 왜장이 크게 당황하여 성화같이 보급독촉을 하였으나, 남쪽에서 오는건 보급이 불가하다는 전령뿐, 군사들이 슬슬 배고파 먹을것 강도질을 하러 다니니게 되었습니다.

 

배설과 (3)개산포전투,

 김면이 현풍의 상산강에서 황응남을 비롯한 의병 30여명이 왜군 80여 명을 사살하고, 군수물자등 보물 등을 가득 실은 배2척을 나포했다. 배설은 개산포 전투에서 적을 종횡무진 교란하였다. 개산포 전투 이후 끈질기게 군수보급 왜군들을 추격 군수품을 약탈하는 소규모 전투를 계속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식량을 실은 짐바리 말부대는 한양까지 가는동안 길에서 기습을 당하고 야영하다 야습을 당하고,  산에서 산적을 만나고,  들에서 의병을 만나.. 마을에 들어가면 청야작전으로 쥐새끼 하나 없는 잿더미 뿐이고, 어디선가 곽재우등 의병이나타나 불질러 홀랑 다 태우고.. 사료에 따르면 부산에서 출발한 1.000섬의 군량이 한양에 제대로 도착한것이 1백섬에 불과했다고 하니, 얼마나 차질이 심했는가를 알수 있읍니다.

 

왜군들이 의병이나 산적의 근거지를 토벌하고자 했으나, 의병이나 산적이 성이 없었기 때문에.. 토벌하러간 왜군 소부대가 헛탕치고 돌아오다 기습을 당해 전멸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나타났읍니다. 특히 추풍령 황간 김천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진격하지 못하고 유격전에 시달렷습니다. 왜군은 임진년 5월이후 8할이상이 굶어가며 싸움을 했읍니다. 각종 실록,사료에 '왜군은 도적떼와 같이 먹을것을 빼앗고 인육을 먹었다' 라는 기록이 남은건 이때문입니다. 

 

 

 

 배설과 (7)지례전투, 1592.7.29~

 의병장 김면은 군사적 요충지인 지례에서 1.600여명의 적과 싸 워 소탕하고 지례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배설은 주로 일진 일퇴를 거듭하면서 왜군의 식량과 군수품을 약탈하여 경북부부지역에 공수하는 유격전을 하였다.

 

오오사카에서 공수된 아끼바리 쌀과 생선들을 수송하든   모리테루히토 가쓰라 구로다 나가마사의 가토와 고니시에게 보내려든 군량의 탈취하여 심지어 경북북부지역에 임진왜란 전에는 보리밥도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전란중에 안동지방까지 간 고등어와 기른진 오사카쌀밥을 먹었다고 할 정도로 배설이 종횡무진 활약하여 왜군들 진영은 오롯시 아침저녁에 연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굶주리든 수송대가 철수하였고,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것이다.

 

 

3)왜군 지휘부섬멸

 

(2)무계전투,1592,6,6

 정인홍이 손인갑이승과 합세해 야밤을 틈타 공격했으나 실패하였으나,배설의 유격대가 새벽에 왜병의 군막을 급습하여 왜군진영을 불태우고 압박하여 낙동강으로 내몰았으며, 많은 군량과 무기들을 회수 의병들에 지급되었다. 배설의 면밀한 유격전의 급습에 큰의미가 있었다.

 

 

성주성 부상현전투 1592.6~1593.1.16

군수 지원을 맡은 중군의 무사들이 모두 죽어나가다가 끝내 장수인 구로다 분신마저 죽게 되자,  모든 일본군 장수들이 배설을 두려워했다. 반대로 일본군졸들은 죽이지 않는다고 알려졋기에 왜군들에 존경을 받아 적진을 종횡무진했다고 한다. 배설이 추풍령 황간 김천 성주 무계진에서 유격전을 펼쳐 왜군들로부터 노획한 군량미들은 일본오사카에서 운송된 것들로 이 지역향병들에 나누어 졋고 전시임에도 이지역은 쌀밥에 생선이 올라왔다는 당시 등암의 기록이 있다.

(그 만큼 일본군들은 식량을 빼앗기고 굶주렸죠, 7일 간의 도주라불리는 유정 권율 이순신이 순천왜성전투에서 식량 3천석을 빼앗긴 것하곤 대조적입니다.)   

 

성주성 부상현 전투를 보시면, 왜군의 기병은 칼이나 창 하나만 들고 일껏 달려와서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서' '창을 잡고 또는 칼을 뽑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는데, 이에 배설이 적장의 수급을 단칼에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또 한 부상현 계곡에 매복한 향병들의 쏜 활에 왜군이 무수히 맞아 죽었습니다. 전쟁에는 지고 있었지만, 최초로 유격전투로 왜군이 패배하고 있었든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의병출신인 배설이 경상우도 수사가 되면서 경상도 의병들의 사기는 충전했고, 곳곳에서 의병들은 리를 거머쥡니다.

 

왕이 도망다니고 중아의지원이 없는 전장처레서 부임하면 식량창고(혜창)를 가장먼 저 수리하여 약탈한 식량을 채워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왜군이 빠글 빠글한 점령지 부산첨사에 까지 오를 정도로 식량남을 왜군 수송대를 약탈하여 왜군들이 힘들게 문경 새재까지 군량을 수송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맹장이였고, 실제 김천 추풍령전투를 성공적으로 하였기에 합천군수에 제수 되었습니다.

 

 

 

6, 구로다 분신 척살(임진왜란 분기점)

1)조경의 군관출신의병(1592년 4월 17일 추풍령전투 패배)

조경이 방어사로 패배하여 적군에 포로가 되었어도 김천등지에서 향병을 규합 끝임없이 유격전을 펼쳐서 일진일퇴를 하므로 임진왜란 지휘부가 북진하지 못하게 괴롭혔고, 배설은 백성들의 굶주림에 애처로워하든 일생을 마친 평범한 무장이였다. 포로가 된 조경을 유격전으로 구출하기도 하였고,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최초로 유격전에 시달리다가 끝내 구로다 분신이 척살되므로 전국에서 일본군은 비밀리에 퇴각하게되었다.

 

2)배설은 도망자 비겁자

추풍령 김천 일대에서 4월17일 부터 1593년 1월 16일 약 9개월간 향병으로 식량약탈을 위한 유격전에 돌입, 왜군들이  배설은 도망자다라고 왜칠 때도 개의치않고 김천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임진왜란 지휘부가 북진하지 못하게 향병을 모아 괴롭혔고, 조선을 구하기만 한다면 명예와 비난을 내려 놓은 오직 구국에 일념으로 행동한 장수였다

 

조총교대연발 부대가 배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 벌어졌읍니다. 먼저 기세좋게 기마무사가 뛰어나갑니다. 한데, 놀랍게도 배설은 도망을 갑니다. '저런 비겁한 배설녀석!' 하고 쫓아가는데 배설이 말위에서 뭔가 꼬무적거리더니 짧은 뭔가가 날아와 꽂힙니다. 기마무사는 모두 죽거나 부상당하였습니다. 

 불쌍한 조총교대연발 왜군부대는 근거리에서 구경하다가 자신들의 지휘무사들이 모두 눈앞에서 죽음을 보고 두려워 적진의 본진으로 도망갔습니다.

 

배설은 왜군부대를 만나면 도주하는 척 했기에, 일본의 무사들이 말을 타고 삼~사명이 말을 타고 칼을 들고 소리지르며 추격하게 되면, 조총 사격거리를 벗어 나자마자 배설은 돌변하여  칼로 추격하는 무사들을 베어버렸고, 이에 놀라 도주하는 무사는 추격활로 죽였습니다. 심지어 왜군들에게는 "배설의 얼굴을 보게되면 틀림없이 죽는다"고 알려졌다. 중견 무사들이 추격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왜군들은 정처없이 성을 지키기만했다.(왜군의 소대 중대 대대규모에 모두 조총보병으로 이루어져 지휘무사(사라이)들은 5~6명만 말을 타고 지휘함에 이들을 격멸했다)

 

 

추풍령 전투 이후 경상도 의병들이 모두 이렇게 왜군을 일방유린했습니다. 따라서 왜군이 빠글 빠글 한 적진에 수령으로 배설을 임명하였다가 경상우도 수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결국 성주성도 1593년 1월 중순 일본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철군해서 배설에게 공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왜군들은 철군을 합니다.

 

유격전의 공로로 배설이 합천군수를 시작으로 동래(송상현의 전사지) 진주(김시민의 전사지)목사 부산첨사 처럼, 배설의 부임지는 왜군치하 점령지가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곽재우장군 같은 경우 부임하지 않기도 했든 곳들 입니다. 권율의 부임지하곤 영 딴판으로 적군을 몰아내고 민정을 수습해야 하는 곳들임에도 성공적으로 수복하고 부임하였습니다. 왜장들 사무라이 무사들의 독촉에도 왜군병사들이 배설을 피해 도주하여 전투가 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원정군 1592년12월, 이여송이 구원군이 들어와서 올린 1593년 1월 평양전투와 권율의 행주대첩(1593.2.12)은 구로다 분신의 척살로 왜군들이 대거 남하 때문이였고,  전열을 가다듬은 왜군에 벽제(碧蹄) 1593.1.27 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하여 이여송은 겨우 목숨만 유지해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