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명량 왜곡과 진실, 세키가하라 전투 (島津の背進)
세키가하라 전투 (島津の背進)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5만 대군에 서군이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순간에 시마즈 요시히로 진영에 ‘배세루’라는 외침이 홀연히 나타났으니, 그 유명한 “적의 본진통과” 이다. 동군 15만 대군의 포위망을 "배세루"를 외치며 이에야스를 공격하자 포위망이 꽁치가 상어를 피하듯이 갈라지는 틈을 돌파하여 자신에 영지로 80여 명이 살아 돌아간다. 칠천 해전에서 14만 대군의 포위에 정면 돌파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는 가토 기요마사 구로가 나가사마가 진을 펼치고 동군에는 모리 테루히토를 총수로, 고니시, 약 10만 군대였다. 토요토미의 오른팔인 구로다 요시타카가 이에야스를 지지하자 서군은 포위되어 패색이 짙어가고 있었다. 일본은 패전하면 스스로 자결하는 상식이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기병을 이끌고 이에야스의 본진을 향해 "베세루"라는 외침과 함께 진격한다. 시마즈는 포위망을 뚫고 자신에 영지로 무사 귀환하여 동군의 모든 장수가 죽음에도 ‘배세루’의 신화로 시마즈는 살아남아 일본의 3대 가문이 되었다. 그를 칭찬하자, “조선의 배세루 쇼군은 단기필마로 적진을 돌파하고 적장을 척살하는데 나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島津の背進)
“‘시마즈의 전진철수[島津の背進]’(배설 장군게 배움)라 칭송받으며 무명(武名)을 높였다. 요시히로의 무명(武名)은 시마즈의 큐우슈우[九州] 후손들이 후일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패배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장수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철군 요청 인연으로 영지를 봉해주고 일본의 3대 가문으로 성장하게 지원해주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 장군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 돌파한다.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엔하위키미러)
나는 먼저 귀향을 실천하여 보여 적군이 무도한 대 살육을 내린 '토요토미'에게 저항하고 반기를 들게 몸소 보여주었다. 비굴하게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대장군(大將軍)다운 귀향을 실천했다. 침략군들이 '토요토미'에게 칼을 겨누게 하려고 인륜을 저버린 대의를 깨닫게 해주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토요토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낸다. 이로써 조선 출병 제16군 나고야에 주둔하던 이에야스 군대는 “배세루의 해결을 전제로”확실하게 출병을 거부하게 된다.
무언의 고도의 정치행위인 취할 수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목을 취하지 않은 무혈귀향"無血歸鄕"으로 깨달음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가토 기요마사는 곧바로 철군 요청서를 '토요토미'에게 보내게 된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정벌의 패배를 시인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철군하고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영리, “정유재란 배설 장군의 “적 본진 통과”로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살려준 시마즈 부자는 이후 일본으로 철군하여, 도쿠가와 에야스에 맞서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대패하고도 살아남았다. 패장 시마즈 요시히라는 320년간 메이지 유신, 정한론, 근대화 산업화의 기수가 되었다. 그리고 끝내 한국을 병합하는 데 성공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다스렸다.”시마즈 가문은 미국에 쫓겨 1945년 해방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을 근대화시킨 규수 일대(조선 대포 군수 산업)의 산업의 근본적인 토대는 시마즈 가문이 300년간 배설 장군을 이기겠다는 집념의 결과였다.
“최정예 15만 대군 속에서 잔병을 규합하여 모리 테루히도의 지휘부 사무라이 5백여 명을 섬멸하고 총사령관 구로다 분신을 단기 필마로 사살하는 조선의 훌륭한 무장 배세루에 비하면 나에 적진 돌파는 장난에 불과하다.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말했다.”
명량 대첩의 진실은 호남의 제해권을 포기하여 조선 백성 10만여 명을 납치되었으며, 조선 수군이 심해로 철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엄청난 사람이 죽었으며 코베기로 오사카에 코 무덤이 생기게 한 역사적 진실이다. 최소한 배설이 어란진 해전에서 일본 수군 8척을 격침할 때까지는 약탈은 불가능 했었다. 칠천 해전 이후부터 코를 베어 염장하는데, 중국. 인도를 정벌하겠다던 토요토미의 군대가 초라하게 조선인 납치마저 불가능해지자 코 베기를 한 사실은 역사에 남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중국과 인도를 통일하려던 야망가로서 “조선의 배설장군과는 전투를 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배설 군대를 피해 도주한 쿠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라 같은 장수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적을 피해 도주한 자국에 장수에게 잘했다고 포상을 한 토요토미의 전략가다운 모습과 자국장수의 목을 베려고 미쳐 날뛴 대왕이 있었다. 임진왜란에는 조선군의 머리를 베어 약탈한 도자기와 일본으로 보냈었으나 정유재란에 해로가 봉쇄되자 토요토미는 조선군의 코를 베어 소금에 염장하였다가 철군할 때 운송하게 허락하여 오사카의 코 무덤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 수군의 해로 봉쇄가 없었다면 부피를 줄이고 장기 보관하는 코 영수증이나 코 무덤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대 상황이 일본이 광둥. 절강. 산동으로 가지 않고 조선으로 "정명 가도"를 요구함은 일본은 중국을 점령할 언어 소통 수단이 안 돼 있었다. 이에 반해 조선의 양반들은 광범위하게 중국과 소통할 학문에 열공하고 있었다. 일본의 무력은 중국을 지배하는 데 충분하였지만, 통치할 언어 소통의 문제를 조선의 협조로 해결하지 않으면 중국 정벌은 불가능한 현실이 있었고, 민족의 운명을 명나라에 맡긴 무책임한 주권을 포기한 조선 지도층에게 두려워 말라고 포로로 잡힌 두 왕자를 풀어주어 환심을 사려고 했으며 배설장군 휘하에 있던 사명대사를 국빈으로 대우해주었다. 그러나 끝내 조선 지도부는 책임 있는 자세를 포기했다.
거대한 집단최면인 육법(유령)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대왕도 대신도 관료도 각자의 위치에서 유령이 주인이고 사람은 바지에 불과했다. 누구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문제에 빠져있었다. 그 유령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않고 일본군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은 의병의 활동에서 보여준다. 의병(민중)의 열망은 희망이 있는 조국으로의 구국 열망을 기초로 하였으나 그들은 거대한 기득권 관료에 의해 모두 역모로 몰려 죽고 말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하여금 조선 출병을 거부하게 한 직접적인 동기가 "조선 수군으로 부산 상륙전에 전멸할 수도 있다“는 해로 봉쇄이다.
배설 장군은 단기 필마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적진을 기습하여 '토요토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정유재란에 일본 본토 백성의 주 대화가 "배설이 본격적으로 달려드니 우리 일본군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고, 얼마 안 가 모두 죽을 거야. 가토 기요마사도 고니시 유키나가도 부산항에 포위되었다고 하는데 살아남지 못할 거야" “모리 테루히토 대로가 5만 군을 두고 은밀히 조선을 혼자 탈출하였다고 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절대 부산항으로 출진하지 않을 거야”라는 세 가지 대화였었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전활동에 나서 승리하게 되고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구로다 나가사마는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부산항에서 고립된 일본군은 ‘배세루’가 일본 본토를 출격하는 두려움의 악몽으로 가토, 시마즈, 고니시 모리는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베세루’는 연안용 함정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남미대륙을 횡단한 대항해용과 같은 것이다. 조선 수군이 칠천 기습을 당하지 않았다면 광양 망덕포구에서 ‘배세루(장작귀선)’는 계속 건조되어 오사카와 나고야는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며, 세계 최대의 조선 선박 건조항구가 ‘큐슈’가 아니라 ‘광양항’이 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