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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도쿠가와 이에야스 임진왜란 불참의 진실?

自公有花 2015. 5. 22. 06:14

일본 역사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다테 마사무네)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인 마사무네 등이 조선에 왔었다는 증거로 마사무네의 은거소였던 와카바야시(若林) 성(지금의 일본 미야기 형무소 자리) 마사무네가 직접 재건한 "즈이간사"가 참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사무네의 사당이기도 한 즈이호덴(瑞鳳殿)이 소재한 센다이 시 "쓰네가호우(經ヶ峰) 역사 공원"에 조선에서 가지고 돌아왔다는 매화나무 '와룡매(臥龍梅)'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은 빨리 와룡매를 베었어야 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다.

 

성주전투 배세루부대의 부상현 기습 전투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황금 부채의 징표가 표주박 문양이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도요토미 가문이 아니므로 표주박 문양을 사용할 수 없다. 9군 대장이 하시바 히데카츠(일본측 조선왕)도요토미 누나의 아들로 후사가 없었던 토요토미를 이을 조카를 양아들로 쌈았었다.

 

우연에 일치이겠지만, 조선 정벌 수장이 하시바 히데카츠 일행이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스마를 선봉장으로 한양을 접수하고 북진하는 행렬을 일본최대 군벌인 모리 테루모토가 수행했다. 즉. 조선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화려한 의장대를 꾸렸던 것이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도요토미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지략가 였고. 그 수하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과 다테 마사무네가 토요토미 군사 구로다 요시타카와 수행했다.

 

특히 하시바 히데카츠는 직접 자신의 수하 약 1만 4천 병력을 이끌고 북정하고 있었다. 이 부대에 관서 지방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3천 명)가 포함되었으며, 도쿠가야 이에야스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조선정벌이 거의 완수된 상태에 관망만 했을리없다. 나름 기회를 찾고자 관서지방 병력 상당 수를 선발대로 보냈다.

 

 

추풍령 김천일대에 유격전을 하던 배세루부대가 성주 부상현에 매복 복병을 배치한 후 기습 공격을 했다는 점이다.상당한 의장대를 급습하고 4~5명의 무장과 마상대결투를 벌여 구로다 분신이 전사하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부상을 입었다.

 

전시 하시바 히데카츠가 고바야카와 다카게와 9군 대장을 교체한 사실이 이례적인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시바 히데카츠가 매우 중상을 입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배세루가 획득한 황금부채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표주박 상징이 말해준다.도요토미의 양 아들(친 조카) 하시바 히데카츠를 구하려다 구로다 분신이 전사한 것이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부상이 너무도 막중하여 즉위식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한다. 독이 오른 일본군은 진주성 대 학살을 감행하고 구로다 요시타카 일행은 칠천도를 거쳐 일본으로 도주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를 지휘한 이름난 무사 다테 마사무네가 정유재란에 출병하지 않았던 것도 이례적인데 배세루의 무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시바 히데카츠는 칠천도에서 10월 14일 밤 운명하여 시체가 된 후 도요토미에게 돌아갔다.물론 동생을 잃은 구로다 요시타카(간베에)는 도요토미에게 원망을 듣게 되어 은거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는 모두 철군하였다.

 

도요토미는 자신을 이을 하시바 히데카츠의 전사에 낙담하였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들을 대규모로 숙청하였기에 후일 도요토미 몰락과 동시에 반대 진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영이 형성(세키가하라 전투의 원인)이 된다.

 

 

출처 사진은 #명량 영화에서 역적으로 나오는 배설의 모습이다. 아래는 트위트 보기이다.

부산항은 사계절 해수욕장이다. 임진왜란 때 14만 대군을 9개월간 해수욕시킨 배설 경상 우수사 때문에 일본에 4계절 해수욕장으로 알려졌다. 왜곡과 진실

 

부산항은 춘하추동 사계절 해수욕장이다. 임진왜란 때 14만 대군을 9개월간 해수욕시킨 배설 경상 우수사 때문에 일본에서는 4계절 해수욕장으로 알려졌다. 왜곡과 진실

 

도요토미의 조카로서 도요토미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하시바 히데카츠이 늑골 아래에 칼로 베어버린 배설 장군, 도요토미  집안을 망친 것은 일본 내란이 아니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도  카토 기요마사도  아닌 바로 배설이 도요토미 아들 하시바 히데카츠를 조선 왕으로 봉하려는 성주의 부상현에서 죽이고 말았다.

 

식민지 시대 최대 비겁자 도망자 배설 경상 우 수사 수군 부원수 절도사   왜곡과 진실 바로 명량 영화에서 배설 로 나오는  저 양반이다. 임진왜란의 전쟁사를 호남으로 옮기면서 자연히 적진인 경상도 전투 전체가 왜곡되면서 일본이 임명한 조선 왕을 척살한 배설이 조선 최고의 비겁자로 몰렸다. 왜곡과 진실

일본 입장에서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조선 왕)에 중상을 입히고 간베에 동생을 죽인 배설이 역적임이 분명하다. 진실

 

도쿠가야 이에야스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조선 정벌이 거의 완수된 상태에 관망만 했을리 없다. 나름 기회를 찾고자 관서지방 병력 상당 수를 선발대로 보냈으나 배설에게 괴멸 되었었다. 왜곡과 진실 (한국에서는 도요토미와 이에야스를 거의 바보 수준의 지도자로 평가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발대 약 3천 명(다테 무사무네1.500)명이 하시바 히데카츠 즉위식을 위해 북진하던중 성주부상현서 배설의 1.500명(기병)에 급습당해 대패하고 일본으로 도주했습니다. 왜곡과진실

 

 

웅천 해전에서 활약하는 경상 우수사 조방장 배즙 장군,

 

역사는 반복된다. 추풍령일대에 유격전을 하던 배세루부대가 성주 부상현에 매복 복병후 기습 공격을 했다는 점이다.상당한 의장대를 급습하고 4~5명의 무장과 마상대결투를 벌여 구로다 분신이 전사하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중상을 입었다. 진실

 

 

다테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 에스파냐와 태평양 무역을 하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의 사절 세바스티안 비즈카이노(Sebastián Vizcaíno)의 협력을 받아 갤리온선 산 주앙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 호를 건조했다.(다테 마사무네가 거대한 범선을 만들고자 한 영향을 배세루에서 받았다고 추측 가능함)

 

이에야스의 승인을 얻어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Luis Sotelo)를 사절로 임명해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 등 일행 180여 명을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스파냐 그리고 로마에 파견했다(게이쵸의 견구遣毆사절). 진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이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총대장으로 서군을 거병하자,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영지 58만 석에 다시 49만 석의 영지를 더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편지는 현재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를 보냈었다. 진실

 

도쿠가와의 심복 다테 마사무네는 어릴 적에 앓은 천연두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고하며, 임진왜란 후에 독안룡(獨眼龍)이란 이명을 얻게 되었으며, '도호쿠왕(東北王)' 또는 '오슈의 용'이라고도 불렸다. 즉, 하시바 히데카츠를 수행한 이에야스의 심복도 왕으로 불린 점이다.

 

일본측 조선 왕에 임명받은 하시바 히데카츠(도요토미 양자)는 고니시 카토를 선봉으로 쌈아 임진왜란을 지휘 한양을 점령하자 즉위식을 위해 북진하던 중 에 성주에서 배세루와 대결 중 군사 구로다 분신이 전사하고 자신도 칼상을 입어 구로다 요시타카와 일본으로 귀국하려고 칠천도(거제)에서 10월 14일 밤에 병사하여 하시바 히데카츠의 시체와 구로다 요시타카만이 도요토미에게 돌아 갔다. 왜곡과 진실 배설은 성주성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구로다 요시타카. 다테 마사무네. 하시바 히데카츠를 급습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자 적장들이 북상을 포기하고 남으로 도주했다.

 

 

중과 부적의 12척으로 일본군과 맞서 민족을 지킨 이순신 장군에 대해 억만번 칭송해도 부족하다.

명량 해전 다음 날 이순신 장군은 그곳에서 머나먼 외도(신안군 사토시 도읍)까지 후퇴 할 수 밖에 없었다. (전함을 실지 움직인 것은 배즙 장군과 이응표경상수사) 후일 고금도까지 퇴각했다. 왜곡과 진실

 

 

깨어나는 임진왜란, 일본과 한국의 도주에 대한 민중의식 비교에서 확실하게 다른 민족성이 있다. 우연히 식민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패배에 대한 대응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일본의 전설적인 무사 다테 마사무네는 조선에서 눈 앞에서 하시바 히데카츠가 중상을 입고 구로다 분신이 전사하는 참혹한 사지에서 극적으로 도주했는데도 일본인들이 나고야 장도를 따라가며 환호해주었다. 특히 조선 왕으로 즉위를 위해 화려한 의장대를 이끌었던 다테 마사무네가 TV 사극 드라마에 빠지면 흥행이 안되는 민중의 전설적 장수가 되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조선에 출병하여 도주 한 장수이다.   진실

 

사극 ᆞ드라마 엑스트라 모집

KBS1 인기 사극 징비록 촬영

MBC 화정

JTBC 라스트 등 체험ᆞ용돈벌기 기본 4만원부터 시작 KBS1 징비록 5/18~20 밤 11시30분까지 집결

JTBC 라스트 오후 4시까지 집결

특히 징비록 일본군을 무자비하게 척살하는 기회를 드립니다.

 

 

배설(ベッセル)裵楔

 2..3.비행선. 첨단적인 우주선, 일본의 세계와 다른 행성 우주의 세계에서 나타난 비행선(배) 거대한 배  

 

 

"조선의 이름 없는 장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분신 구로다 요시타카 다데 무사마네 등)의장대를 급습하여 제 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에 중산을 입혀 전사하게 하였으며, 구로다 분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부산첨사·진주목사·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은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 하여 많은 수의 일본군이 전사하였다." 에도 시대 문학에 많이 등장한 전설적인 조선 장수 ‘에혼 조선군기’ 에서는 ‘세루토스’라는 용맹한 거인 장군으로 변신해서 등장했다.  일본 천황의 연호가 분로쿠(文祿) 이었고, 정유재란 당시에는 게이초(慶長) 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文祿의 役, 정유재란을 慶長의 役 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은 분로쿠(文祿) 원년(1592년)에 일어났고(분로쿠 원년이기도 하지만 덴쇼(天正)20년이기도 합니다 덴쇼에서 분로쿠로 연호가 바뀐것은 12월 8일로 임진왜란 발발 이후지만 통상적으로 임진왜란의 발발은 분로쿠 원년) 정유재란은 게이초(慶長) 2년(1597년)에 일어났다. (일본 사전)

 주)일본에서는 이름 없는 조선의 장수 "세루토스" 설 장군으로 의인화 되어 문학에 있는 장수가 배설이란 주장 보다는 이순신 또는 다른 장수란 주장이 우세하다. 또 명량 영화 흥행으로 한국인 세명 중 한명이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와카자카 보다 뛰어난 장수라는데 이견이 없다.

일본 문학에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인들은 '오랑캐'들이 사는 조선과 '세상의 끝'에서 세루 토스라는 거인을 무찌르는 모험을 하고 돌아온 의리 있는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즉, 많은 일본군이 모두 세루에게 패배했는데 가토 기요마사 만이 세루토스를 무찌르고 일본군을 구해 돌아 왔다는 점에 주안을 둔다면 이는 이순신이 아니라는 것, 배설이라는 주장 이다. 이순신은 시마즈 요시히로의 병사들에게 전사했기 때문에 일본에 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특히 세루 토스라는 일본 고전에 등장하는 인물이 전쟁에 죽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배설 "설"장군이 분명하다. 특히 배설이 일본의 명사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스 =통과 또는 야수)설이라는 일본의 길목을 막고 있던 야수라는 뜻이다. 에도 시대에 일본 문학에 수 없이 등장하는 일본의 가상의 무지막지한 외계에서 온 오랑캐 장수로 불리고 있다.   

 

 

 

일본인이 그린 거북선은 지네 모양?

 

▲ 근세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에 수록된 임진왜란 관련 삽화. 일본인이 상상으로 그린 이 거북선은 실제 형태와 차이가 있지만, 허름한 일본 배 앞에 당당하게 드러낸 위용만큼은 실감나게 묘사했다. 학고재 제공
그림이 된 임진왜란 / 김시덕 지음 / 학고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는 게 힌트다.

시기는 그의 인생 결말쯤에 해당하는 임진왜란. 답이 나왔다. 이순신이 진두지휘한 거북선과 일본 수군의 대결이다. 이게 어떻게 거북선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입증된 (한국인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지만, 거북선의 위용과 그 위압감이 근세 일본인이 그린 삽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게, 묘한 통쾌함을 준다.

이 같은 ‘익숙한 낯섦’은 19세기 중반에 간행된 ‘조선정벌기’에도 나타난다. 전투 중 팔에 맞은 총알을 빼내면서도 태연자약한 이순신의 무사다운 모습. 일본 문헌 속에서도 ‘영웅’으로 묘사된 이순신의 과장된 몸짓과 험상궂은 인상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새롭게 다가온다.

그동안 일본 근세의 외전을 통해 일본인의 관점에서 본 임진왜란을 소개한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가 이번에는 일본 문헌에 수록된 삽화로 임진왜란을 논한다. 책은 17∼19세기 일본의 목판화와 채색화 300여 점을 국내 최초로 선보이며, 전근대 동아시아와 한반도를 바라보는 근세 일본인들의 관점을 보여준다. 또 삽화가 어떤 역사적 전개를 보이며 생산됐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김 조교수는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편찬할 때 ‘징비록’(懲毖錄·조선 중기의 학자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통사이자 회고록)을 많이 참고했는데, 여기에는 거북선의 구체적인 (거북과 관련한) 모양이 언급되지 않는다. ‘에혼다이코기’의 삽화는 일본 배를 압도했던 조선수군의 배를 상상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책에서 소개하는 삽화들은 전쟁 자체의 실상을 밝히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일본인들이 조선과의 전쟁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근대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인식과도 상통하는 훌륭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특히 일본의 임진왜란 삽화의 변천을 시대별로 구분한 1장과, 일본인이 그린 불굴의 조선인들을 소개한 6장이 눈길을 끈다. 전 세계적으로 마니아를 보유한 우키요에(浮き世繪·에도시대 풍속화)나 일본의 목판 인쇄술과 출판 시장에까지 관심이 있다면 1장에서 지적인 충만감을 얻을 수 있다.

다양한 계급의 독자층을 위해 방대한 양의 삽화가 그려졌던 이유, 숨 막히는 에도막부 체제 아래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적 수요가 증가한 것 등 시대적 배경을 꼼꼼하게 짚어낸다. 6장에서는 일본인이 주목한 조선의 영웅을 만날 수 있다. 김 조교수는 “1800년에 간행된 ‘에혼 조선군기’는 일본 문헌 가운데 유일하게 윤흥신에 주목했다”면서 “‘다대포 전투에서 윤흥신이 전사하다’는 ‘징비록’의 짧은 기사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삽화가 매우 흥미롭다”고 전했다.

그러나 모두 ‘징비록’과 비슷한 건 아니다. 함경도로 진입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저지하려다 패하고 달아난 한극함(?∼1593)을 ‘징비록’에선 호의적으로 그리지 않지만 ‘에혼 조선군기’ 권 5에서는 ‘세루토스’라는 용맹한 거인 장군으로 변신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출처:문화일보)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외 다수의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이순신이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름)

 

출처:조선해역전도이 그림  

거북선 (粧作龜船)

일명:거북선으로 알려져 일본군들을 벌벌 떨게한 대형전함으로 승선이원이 약200명에 이르는 조선 명나라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함으로 '조선전역해전'도 그림처럼 통일된 거북선 문양이 대거 설치되어 있고, 날카로운 킬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보기만해도 공포심을 조장함, 당시 명나라 일본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우리나라 주력함대인 판옥선과 동일하게 약 5~60명선이였고 크기도 비슷하였음,

일본 대하 드라마 공영방송 NHK의 ‘간베’는 전국시대의 천하통일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도요토미는 이에야스 간베에, 히데카츠에게 조선을 영지로 내리는 문서를 작성, 배세루에게 패배하는 구로다전사 진실

일본전사 조선역,에 근거 일본군은 1번부터 9번까지의 본대와 예비대, 그리고 기타 부대를 합해 28만 1,840명 1,고니시 유키나가 18,7000명 2,가토 기요마사 22,800명 8,모리 데루모토 30,000명 9,우키다 히데이에 10,000명

 

조선 남부에 '왜성'을 쌓았는데, 일본의 전설적 무사 다테 마사무네는 공사가 면제되었음에도 도요토미로부터의 자금 지급 없이 적극적으로 축성에 참가했다. 눈 앞에서 간베에 동생이 배설에게 전사하자 정유재란에는 나고야에서 출병하지 않았다. 진실도요토미는 "세상에 두려운 자가 둘 있으니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쿠로다이다. 토쿠가와는 그래도 온화한 사람이지만 쿠로다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알 수 없는 자이다."라고도 말했다. 도요토미가 두려워 한 그 두 장수는  배세루를 무서워 했기에 살아 남아 일본의 패권을 거머 잡았다. 진실

 

일본NHK의 2014년 대하드라마가 구로다 간베에는 주인공이다. 임란 제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조선을 영지로 받음)와 부상현 마상 칼싸움도중 배설의 칼어 구로다 분신 전사, 간베에 왼쪽다리 부상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하시바 히데카츠는 전사한다.   진실 율곡이 젊은 시절 성주 영암서원에 강사로 있으면서 소년 배설은 그와 인연을 맺고  율곡선생은 노경린의 딸과 연애나 하면서 소년 배설에게 칼싸움이나 가르친 것이다. 배설이 김성일을 스승으로 삼았더라면 역사에 영웅이 될 수 있었으나, 배설은 율곡과 영암서원 한서원 등등 율곡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