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만 콩케스트, 배심제 역사,
Normans 북 유럽서 온 데인족, 영국을 바이킹들이 침략했듯이 데인족 일파가 9세기경 블란스를 약탈하였다.
프랑스 왕샤를르는 시달리다 못해 911년 노르만인들에게 북부해안 땅을 넘겨주고 이들의 족장 롤로 Rollo를 노르망디공 에 보해 주었다. Normandy란 지명은 이들 종족의 이름이다.
노르만 정복
1066년 노르만인에 의한 영국정복 사건이다.
노르만디는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인접해 있기에 상당히 빈번한 왕래가 있었고, 에델레드 왕비는 노르만디공의 딸이니까, 이들 사이에 태어난 에드워드 Edward the Cofessor (1040~42)는 바이킹이 영국 왕이 되든 시절 노르만디에서 성장했지요,
데인계 왕인 에드원드 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에드원드가 자식이 없이 죽었지요, 알프래드왕의 마지막 손자인 해롤드 Harold Godwinson 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게 되었지요,
헤롤드는 정치보다는 신앙에 몰두 했든 에드워드왕과 자신의 딸을 억ㅈ비로 결혼시킨 당시 최고 권력자 웨색스 영주 고드원 Godwin 의 아들입니다. 23년을 다스렸든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5일 후손 없이 사망했지요,
그 일로 현인회의 “Witan; the council of royal advisors”는 헤롤드를 만장일치로 새로운 왕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런 결정은 영국 왕위를 노리든 친족간의 대결을 초래했고, 결국 앵글로 색슨 왕조의 숨통을 끝어지게 했습니다.
북쪽의 노르웨이왕 Harald Hardrada 이 영국을 다스렸든 덴마크의 왕 Hardicanute를 계승 해야겠다는 명분으로 영국 땅을 노렸지요, 불란스 영국 해협 건너 제 5대 노르만디 공작 월리엄공이 왕권을 주장하며 영국 정벌의 야심을 드러 냈었었죠,
노르만디공 로베로 Robert와 평민 어머니 Herleva of Falaise와 사이엔 1027년 태어난 로베로가 1035년 죽자 그의 유일한 아들 월리엄이 그의 부친 로베로의 지위를 상속받았습니다.
월리엄은 여러번의 반란을 물리쳤고 1045년 드디어 노르만디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Rm eos 인사권은 인사위원회라는 전대왕의 제도에 속박은 되어 있었지요, 1053년 플랑드르지방의 볼드원 백작의 딸 마틸다와 결혼을 하게 됨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월리엄은 마틸다와 9명의 자식을 두었고 후에 7명이 살아남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중요한 세력을 형성합니다.
프랑스의 한 지방의 영주에 불과했던 월리엄이 1051년 영국을 방문하였고, 에드워드왕의 모친인 엠마가 고모할머니 이고 옛날 에드워드와 해롤드가 자신의 가신으로 있을 때 후하게 친선을 베풀어 이들로부터 왕위를 주겠다는 약속이 있었답니다.
월리엄은 이런 사소한 복을 베풀고 지원을 하여 지지를 얻었으며 심복인 랑프랑 Lanfranc 의 중재로 서약위반에 대한 교황의 지원을 요구하여 영국왕위를 달라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헤이스팅스전투,
월리엄공은 700여 척의 전함 1만여 기병을 동원 해스팅스 서남해안 페븐시에 상륙 작전을감했했으나, 동생 Tostig의 배신으로 노르웨이왕 해롤드의 침공을 받은 영국군이 요크셔의 Stanford Bridge에서 큰 전투를 치른 것으로 천추의 한이 되는 영국군은 240여 척의 군함중 23척만 살아남는 대승을 거두지만 실상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해스팅에서 월리엄의 군대가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해롤드는 대병을 이끌고 남으로 향했으나 영국군은 10월 14일 해스팅 전투에서 월리엄의 군대를 맞이하여 보병대의 방어선이 무너져서 해롤드왕이 전사하게 됩니다. 즉 영국군이 대패하여 전선이 무너지고 도주하게 되었습니다.
월리엄 1세의 즉위
월리엄공은 그해 성탄절을 시작으로 웨스트민트사원에서 영국국왕에 즉위하여 강력한 통치를 시작 할 수 있었습니다.
1071년 두차례의 귀족반란을 제압하면서 영국 전역을 장악하여 노르만디 지지파들이 영국의 지배계층이 되도록 지원하였습니다. 이로서 해롤드 에드워드 왕의 앵글로 색슨왕조를 단절시키고 월리엄노르만 왕가가 확실히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월리엄은 확실한 세금징수 철처한 세무조사로 토지대장과 농민의 토지 가축의 세심한 조사로 영국을 확실하고도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원체 철처한 월리엄 1세의 제도로 인해 그의 사망 후에도 영국은 그 영향으로 봉건제도가 계승 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월리엄의 통치는 1200년까지 영국 왕실과 프랑스에 많은 토지를 사유하게 했으며, 그들은 대륙인 프랑스를 모체로 생활 근거지로 생각 했었습니다. 후 세대들도 프랑스에서 주로 생활근거로 삼았습니다. 헨리 1세는 재임 35년 중 17년을 프랑스에서 살았지요, 실제는 프랑스에 3~4년식 살았습니다.
배심제를 들러리로 생각하는 한국 판사들,
월리엄 공은 영국 점령후 재판제도에 있어 영국 전통을 그대로 유지 했습니다. 프랑스와는 다른 영국의 전통적 재판제도가 그대로 행사 되었습니다. 영국의 배심원제도는 훼손 되지 않고 역사적 명맥을 이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그 영역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배심제는 단순한 배심제가 아니라 이런 전통적인 역사적인 가치가 남아있는 매우 중요한 제도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역사적 전통을 내포한 매우 치밀하고 역사성이 있어 월리엄 공이 영국을 통치한 이후 약 330년 간 아니 그 이상 지금까지 내려오는 배심제를 문제 삼는 나라는 한국 법관들뿐라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통치 재판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한국에서 배심제는 들러리로 세워지고 있는 듯 하다.
심지어 전원 무죄 평결에 판결은 "판사가 하는 것" 이라며 유죄를 주었어요, 얼마나 우리가 재판을 했다고 배심제를 무시하는 지 기가 찹니다. 일제의 침략 식민지 때 재판제도를 존중하면서 재판권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330년간 지배하면서도 배심제를 무시하지 않은 월리엄공입니다. 배심제는 존중할 만한 제도입니다.
국제사법재판소 ICJ
멩키에르및 에크레오의 암초에 대한 영국, 프랑스간의 영유권 분쟁,
“1951년 12월 5일에 국제 사법법원에 소송이 제기되어 1953년 11월 17일에 영국이 승소한 사건이다.
영국의 주장은 이 섬에 대한 원시적 근원의 취득이 1066년 노르만디 공에 의한 영국정복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정복에 의해 이 섬이 해협 안에 있던 여러 섬과 함께 노르만디 공국에 통합되었으며 이 통합은 프랑스왕 필립 아 우구스투스가 대륙 노르만디를 점령한 1204년까지 계속되었고 필립왕의 해협 내 여러섬의 점유기도는 실패하였으므로 여전히 영국이 보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영국은 이 섬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해협 내 여러섬을 관할 하고 있는 저지(Jersey)섬의 법원이 1826년부터 1921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형사재판권을 행사하였다는 사실, 1820년 경에는 저지섬의 주민이 이 섬의 가옥에 건 립한 가옥에 대해 과세를 물었다는 사실, 1875년의 영국 국고 지불 명령서에 서 지정한 해협 내 여러 섬의 항국에 이 섬이 포함되었다는 사실등을 주장하 며 이 섬에 의한 실효적 점유에 의한 권원을 주장한다.
프랑스의 주장
프랑스는 노르만디공이 프랑스 왕의 가신이었으며, 해협 내 여러 섬은 933년 이래 프랑스 왕의 봉토로서 관리되었으며, 1202년에 영국 왕 John은 프랑스 법원의 판결에 의해 노르만디 전체를 포함하는 프랑스 왕의 봉토로서 그가 보유하고 있는 전 토지를 몰수당하였다는 점을 들어 섬에 대한 고유의 권원을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이 섬의 수로측량, 1861년 이래 75년 동안의 조명과 부표의 관리, 1838년의 수상과 공군상의 시찰 등을 바탕으로 실효적 점유에 의한 권한을 주장하였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
이에 대한 국제사법법원의 판결은 "중요한 것은 중세기에 있었던 사건으로부터 간접적 추정이 아니고, 이 섬의 점유에 직접 관계되는 증거이다. 또 이 섬에 대한 수로측량 조명 및 부표의 관리, 수상 및 공군상의 시찰, 수력발전계획 등의 사실은 프랑스가 이 섬에 대한 유효한 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에 불충분하다"는 판결로 영국이 승소하게 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프랑스의 역사적 정통성 주장보다는 영국이 취해온 치밀한 실효적 행정절차의 증거를 중시했다.
프랑스가 이런 조치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던 것을 영유권 포기라고 판단했다.
독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우리 판사들에게 맏길 수 있을까요, 일본이 한국 사법제도를 존중해 줄까요?
재판이란 양 당사국이 존중하지 않는 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전쟁과 같은 대결이지요, 재판에 불만으로 대구 지하철희생있었지요, 남대문 불탓지요, 석궁으로 판사를 응징했지요, 재판결과 이를 수용 하지 않는 당사자들의 대응은 자연법적으로 형사범과는 다릅니다. 의거라고 할까, 저항권이라고 할까, 어재튼 한국에서 사법권이 이들을 단죄하여 평생 가두어 두고 국가가 부양하고는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이는 사법 저항이고 정의를 위한 저항권일 수도 있지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헨리 1세
플랜태져넷(앙주)왕조를 시작한 헨리 2세(r. 1154-1189)는 그의통치 기간의 대부분을친가인 프랑스에 체류했으며 태어난 곳과 죽은 곳이 모두프랑스였다. 그는 어머니의 혈통에따라 영국왕겸 노르만디공작이 되었으며, 아버지로부터는 백작(Count of Anjou)을 이어받아 앙주(Anjou)와 메인(Maine)을 차지하고, 나아가서 Eleanor of Aquitaine과 결혼하여 남부프랑스의 Poitou, Guienne, Gascony를 병합하였으니, 그는 당시프랑스왕보다 더 넓은 프랑스의 땅을소유했던 것이다. 또 한 헨리 1세를 빼고 헨리 4세에이르는왕들이 모두왕비를 프랑스에서데려왔다는 사실만 보아도 영국왕들이 얼마나 유럽대륙 지향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영국궁정과상류층에서프랑스어가얼마나득세했겠는가를가히짐작하고도남는다. 영국에 있어서의 공적생활은 모두 프랑스어로 행하여졌으며 프랑스의 문화가우세하였고 프랑스인과의 접촉이 계속되었다.
프랑스어는 영어어휘의 성격형성에 결정적 영향을끼친 언어이다. 프랑스어의 침투가없었다면 영어는 게르만언어로서의 특징을 유지 했을 것이지만, 프랑스어의 침입으로 영어는 고대영어 이래로 가지고 있던 게르만어적 색채에 로맨스어적인 요소가 가미된 언어가 되었다.
월리엄의 노르만디 정복 이후에 영국의 재판제도를 그대로 보호 하였으며 당사자 결투와 배심제를 그대로 승계하였었다. 그로 인해 영미국가들의 사법전통이 배심제로 정착 되었으며 영미국 국가들은 정복지에 가능한 사법제도를 존중하는 구조에 정치적인 제도만 수용하는 체제를 당연시 한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조선총독부령(일제침략정당화사법)을 해방 후에 그대로 존속 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군의 주둔과 사법제도는 불리되는 것으로 보았든 것이다. 미국을 축으로한 연합국의 보호아래에 식민지 지배구조의 한국 사법전통이 존중되었었다. 즉,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 법관들이 법정에 당사자의견을 완전 무시하고 판결한다든가, 변호인의 진술만 인정하는 법관위주의 재판제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 연표입니다.
120~140 하드인안 성 건설
375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이 시작,
410 로마군 브리타니아로부터 철퇴
550 잉글로 색슨족이 켈트족을 정복
563 성 콜롬바, 스코트랜드의 아니오나 섬에서 그리스도교 포교를 시작함.
597 성 아우구스티누스, 잉글랜드으 캔트 왕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
603 캔트 왕, 런던에 세인트 폴 대성당 건설
731 비드 영국민족 교회 사
787 바이킹의 영국 침입
871 웨섹스 왕, 엘프리드 즉위
10세기 후반 잉글랜드 왕국이 거의 통일단계에 접어 듬
1016 데인족의 잉글랜드 정복
1066~1154 노르만 왕조 월리엄
1066 헤이스팅스 전투. 노르만디공기욤이 윌리엄 1세 로 즉위하다
1086 잉글랜드의 국제조사서 작성
플랜타지네 완조 1154~1399
1154 앙주백작, 앙리가 헨리 2세로 즉위
1167 옥스퍼드 대학 창립
1170 성 토머스 베케트 켄터베리 사워에서 암살되었다.
1204 존왕, 조르만디 영토를 빼앗기다.
1215 존와의 마그나 카르타(시민의 자유 권리를 인정하는 칙허권)에 서명하다
1233 케임브리지 대학 창립
1265 시몬 드몽포르 의회 소집 영국 하원의 기초가 됨
1277 에드워드 1세 웨일즈를 정복
1295 모범의 회 소집
1314 바노크번의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격파하다
1328 스코트랜드 국왕 승인
1337-1453 백년전쟁
1340 <<캔트배리 이야기>>의 저자이며 영시의 아버지인 초서 탄생
1341 영국 의회 이원제시작
1381 와트 타일러의 봉기
랭커스터 왕조 1399~1461
1399 헨리4세 즉위
1411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 창립
1455~1485 장미 전쟁 (흑장미 랭커스터 집안과 백장미의 요크 집안)
요크 왕조 1461~1603
1485 랭커스터 집안의 헨리, 요크 집안의 공주와 결혼하여 헨리7세로 즉위
1509 헨리8세 즉위
1528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 시작
1534 영국국교회 성립
1536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통합
1558 엘리자베스 1세 즉위
1564 세익스피어 출생
1587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처형되다
1588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
초기 스튜어트 왕조(1603~1649)
1603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
1605 화약 음모 사건(왕과 국회를 파괴하려고 한 Guy Fawkw의 음모 실패)
1620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필그림 파더스는 메이 플라워 호르 타고 미국으로 이주
1625 찰스 1세 즉위
1628 권리청원
1642 청교도 혁명
공화정 1649-1653
1649 찰스 1세 처형당하다. 올리버 크롬웰 공화정 포고.
1653-1660 호국경체제
1658 올리버 코롬웰 죽음.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다.
1660-1714 후기 스튜어트 왕조
1660 왕정복고,찰스2세 즉위
1665 런던에 페스트 유행
1666 런던 대화재
1676 그리니치 천문대 설립
1679 인신보호령 성립
1685 뉴턴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1688 명예혁명
1689 윌리엄(윌리엄 3세)과 메리 2세가 부부로 즉위
1694 잉글랜드 은행 창립
1707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하여 Great Britain 탄생
1714-1917 하노버 왕조
1715 자코바이트의 바란(제임스 스튜어트 왕위를 주장)
1726 스위프트(걸리버 여행기)
1745 자코바이트의 바란(제임스의 아들 보니 프린스 찰리가 패배하여 프랑스로 망명)
1755 존슨 영어사전
1759 대영박물관 개관
1763 파리 조약과 7년 전쟁 등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다툼이 일단 종결됨
18세기 중옆 산업혁명 시작
1775-1783 미국독립 전쟁
1801 아일랜드 병합, 그레이트 브리튼 &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성립
1805 트라팔가 전투에서 넬슨 제독 프랑스군을 격파.
1815 워털루 전투에서 넬슨 제독 프랑스군을 격파
1830 리버풀-맨체스타 철도 완성
1831 런던 지하철 건설 개시
1837 빅토리아 여왕 즉위
1839 우편제도 실시.
1842 차티스트 운동,남경조약 체결, 홍콩 획득
1845 아일랜드 기아발생
1851 제1회 만국박람회 런던에서 개최
1859 다윈의 종의 기원
1877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임
1914-1918 제1차 세계대전
출처: 지식인, 기타 조각지식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