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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음으로 굽은 곳을치다.

自公有花 2014. 2. 1. 20:37

「백제는 오만으로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 위태해졌다. 신라는 신뢰와 충절로써 살아 있다. 우리의 정직으로써 적의 굽은 것을 쳐서 이겨야 한다」

 

 

「정직으로써 적의 굽은 것을 쳐서 이긴다」(以我之直擊彼之曲)이란 이 말을 기자는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김유신은 둘째 아들 원술(元述)이 전투에서 지고도 살아서 돌아오자 문무대왕에게 참형에 처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는 원술과의 부자(父子)인연을 끊는다. 김유신이 죽었을 때는 조문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만나려고 했지만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미 과부가 된 나는 아들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원술은 선군(先君)에게 아들노릇을 못했으니 난들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

 

 

원술은 입산을 하고 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군이 전장에서 불리해지면 자주 쓰는 자살 공격법이 소개되어 있다. 백제와의 결전이 된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장군 품일(品日)은 16세 된 아들 궁창(宮昌)을 적진으로 돌격, 전사케 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올렸다.

 

그 전에 김유신은 백제군과의 싸움에서 불리해지자 비녕자(丕寧子)는 장교를 불러 도와달라고 말한다.

 

비녕자는 「지금 많은 병사 중에서 특별히 내게 부탁하니 나를 알아주시는구나.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해야겠다」라면서 적진으로 돌격, 전사한다. 이렇게 남의 자식들을 죽음으로 내몬 김유신으로서는 자기 아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원칙을 적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한 통일 원동력으로서의 정직, 신뢰, 충절일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 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제(고귀한 자의 의무)」를 실천했던 시대는 신라통일기가 유일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했던 신라지도층의 명예욕과 사생관(死生觀)을 특별히 배워야 할 사람들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三國史記 김유신 열전 부분은 전하고 있다.

 

<고종: 『어찌하여 新羅(신라)마저 정벌하지 아니하였는가?』蘇定方: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래사람들은 그 윗사람을 父兄(부형)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가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애국심과 義理(의리)로써 똘똘 뭉친 나라 - 이것이 新羅가 삼국통일을 하고 唐과 맞서 自我(자아)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요사이 式으로 번역하면 「대통령과 정치인과 국민들이 단결한 나라이므로 大國(대국)의 힘을 믿고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干城(간성)이요 임금의 爪牙(조아·어금니)로서 승부의 결단을 矢石(화살과 돌) 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天道(천도)를 얻고 가운데로는 人心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하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김흠순, 김인문 두 장군에게 김유신이 충고하는 내용)

 

 

출처:정의일류국가추진본부

출처:조갑제 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