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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 미 3국의 법적이해

自公有花 2014. 2. 10. 00:47

민주정치의 비젼 이란?

시민들의 꿈을 모아 실천해 내는 것인데 경제력집중 학벌 등등으로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소수계층을 대표하는 정치란 그 자체가 분열원인으로 반민주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시민들이 정치권의 독과점에 끌려 다니고 엘리트들의 소수를 위한봉사체제로 나라의 발전을 기할 수 없다. 일본으로서는 일본이 식민지통치 수단으로 제공한 식민사법제도를 가진 채 감히 일본 본국 기업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법원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법률가들은 법률은 전문가만이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현재는 너무 일본식민지 통치 수준으로 낙후되어 있어 종사자들의 수준도 국민수준보다 한참 낙후 되어있다.)그러나 법률이란 어려운 것도 전문적인 것도 아니기에 식민지 사법제도를 버리고 국민 대중이 이해 할 수 있는 보편적 타당한 수준으로 사법과 제판제도를 대폭 끌어 올려야 할 것이다.

 

 

국가 권력을 소수만의 독과점에서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일본과 같은 이해가 나오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률은 역사를 심판할 수 없다. 더럽고 지저분한 역사라 해도 법이 이를 바로 펼 권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인도적 긴급조치를 취했었기에 일본인의 피해를 줄여주었었다.


금세기와서 (1982~년) 일본인들과 일본기업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미국정부로부터 배상받을 수 있다. 이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이지 한국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수치스런 과거에 대해 미국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한국을 보호해 주었고 근대화도 시켜주었다는 논리 때문이다. 일본의 책임을 물을려면 먼저 친일 매국노 앞잡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면서 그들의 후손들을 모시고 있으면서 유독 본국인 일본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들을 돌아보라는 오만이 깔려있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전혀 반성할 것이 없고 오히려 근대화시킨 것과 기업인들이 자신들이 세워준 후손이라는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은 스스로 독립국이 될 능력이 없어 보호해줬다'는 역사인식이 있다.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 합방해 친일매국노들을 고용해서 그 국민을 식민생산 노예로 부려먹었고, 한국의 모든 제도와 사법제도를 가르켜 주었기 때문에 그런 사법제도에서  즉 미국식 사법제도를 갖고 있지 아니한 한국의 사법부의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식이다.

 

 

강한 일본을 주장하는 아베의 압력에 스스로 굴복하는가, 아니면 강한 일본과 대결을 할 것인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이해가 이러니 언제라도 판결이 되었든 독도가 되었든 정서적으로도 한국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을 밟아 뭉게고자 할 것이다.

 

 

미국은 전쟁 중 민간인에 대한 배상을 수용하는 법적인 조취를 받아들이는데 반해 일본은 한국법원의 판결을 수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판결로 일본기업에 압류가 된다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한다는 분명한 방침을 세운 것으로 보도 되고 있다,

 

 


한국이 애국적인 민주국가로서 친일매국노 지배를 불식하지 못하고 더욱 심화되어 일본으로서는 한국에 사과할 필요성이 없다는 점과 친일 매국노들이 식민지를 통치했는데 그것들은 그냥 용인하면서 유독 일본에 식민지배를 사과하라는 것은 모순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이 없었다면 한국의 지금경제 정치 사회 지도자들이 없었을 것인데 일본이 잘 지배해준 덕분에 감사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그런 국가에 법관들이 이상한 재판을 하고 일본 기업에 불이익을 준다면 용서 할 수 없다는 시각을 어떻게 해소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주국가를 건설해나가는 과정에 미국과 같은 법질서를 가지고 있다면 판결에 승복하라는 말이 될 것이지만 그것도 아니고 일본이 가르켜준 사법제도의 한계를 벗어난 판결로 국가간의 분쟁은 격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일본기업에 대한 배상판결이 실현될 수 있을지 선언적으로 그칠지는 실행과정을 예의주시해봐야 할 것이다.

 

 

2014. 2.10 배영규 (참고문헌 동아일보도도)

 

 

 

동아일보 보도 내용중 일부 ---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수개월 후, 미국에 살던 일본계 주민들은 모두 수용소로 격리됐다. 남녀노소 구별도 없었고, 미국 시민이냐 아니냐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믿지 못할' 일본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3년에 걸친 수용소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이진 재미 자유기고가

 전 쟁에는 이성과 논리보다 감성과 이기심이 먼저 동원된다. ‘전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잔인한 방법들이 그 가능성을 시험받게 된다.

2차대전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사용한 전략은 원자폭탄 투하였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원폭에 노출된 사람들과 그들의 2세, 3세가 대를 이어 겪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원폭을 투하했던 미국 공군 또한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실제로 미국인들 가운데는 2차대전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생각처럼 많지 않다. 원폭으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서야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이 달가운 것일 수만은 없다. 그래서 원폭 투하의 당위성 여부는 언제나 미국 논객들의 토론 쟁점이 되어 왔고, 지난 몇 년 동안은 미국 언론들이 원폭 희생자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일제히 조명을 집중시킨 바 있다.

그런데 2차대전 중 미국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부끄러운’ 전략을 사용했다. 훗날 백악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전쟁 중 우리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Our worst wartime mistake)’로 발표되기도 한 이 전략은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사막지대에 세운 수용소로 모조리 격리시킨 일이었다.

얼마 전 국내에도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비상계엄’(원제·The Siege)에서는 아랍인들의 테러가 잇따르자 미국 대통령이 뉴욕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키는데, 과대망상에 빠진 계엄사령관(브루스 윌리스)이 테러범 색출을 위해 뉴욕에 거주하는 모든 아랍계 남성들(미국 국적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을 체포해 임시수용소로 격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영화로 봐도 황당한 일이 2차대전 때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재미 일본인 겨냥한 징고이즘
당시에 나온 ‘민간인 격리 명령서’라는 공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모든 도시와 카운티, 캘리포니아…앞에 명시된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전원 1942년 4월7일 정오까지 추방될 것이다. 어떠한 일본인도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이 공문을 손에 쥔 캘리포니아 지역의 일본인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42년 봄부터 일제히 수용소로 격리됐다. 이에 대한 법적 강제권은 42년 2월19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명한 ‘이그제큐티브 오더 9066(Executive Order 9066)’이었다. 존 드위트(John L. DeWitt) 장군이 총지휘권을 쥐고 실행한 이 법령의 골자는 ‘미국 시민권자, 영주권자를 막론하고 일본계 혈통을 가진 일본인은 모두 격리시킨다’는 것.

발단은 41년 12월7일의 진주만 공습이었다. 워싱턴에 이미 이를 예측한 보고가 들어왔는데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당한 진주만 공습은 미국을 패닉 상태로 빠뜨렸다. ‘니세이’(미국 이민 2세대 일본인들을 일컫는 말)들은 진주만 공습을 그들이 그 후 3년 동안 겪은 수난의 시작으로 본다.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 내의 반(反)일본 감정이 극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듬해 봄 격리되기 시작할 때까지 니세이들은 주유소에서 기름 한 방울도 살 수 없었을 만큼 철저하게 따돌렸다. 주유소와 상점마다 ‘일본인 출입금지(Japs are not wanted)’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잽스(Japs)’란 ‘칭크’ ‘조센징’ ‘깜둥이’ 같은 말들처럼 일본인을 격하시켜 부르는 말이다. 그것말고도 일본인들은 ‘미친 개들(Mad dogs)’, ‘황색 쓰레기(Yellow vermin)’ 등으로 불렸으며, 외국 여행도 전면 금지됐다.

신문들도 법석을 떨었다. 진주만 공습 바로 다음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캘리포니아를 ‘위험지역’이라고 경고하면서 “우리 주변에는 현재 수천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다. 그중 일부는 좋은 미국 시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중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고, 일본의 중요한 무기 역할을 하는 배반자가 있을 수도 있다”고 썼다.

이 신문이 41년 12월8일부터 이듬해 2월23일까지 특집으로 다룬 일본 관련 기사의 제목만 봐도 당시 재미 일본인들이 겪었을 위기감을 실감하게 된다. 즉 ‘잽스들의 배에서 메시지를 보내는 불빛이 보인다’ ‘베이 시티에서 카메라 들고 있는 잽스 검거’ ‘일본인들의 토마토밭, 토마토 꼭지가 우리 해군기지를 겨누고 있다’ ‘잽스, 오는 4월 미국 공격 준비’ 등으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토마토밭까지 의심하고 그들을 스파이로 모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영향력 있는 우익 칼럼니스트였던 웨스트브룩 페글러는 신문 기고를 통해 ‘이열치열 작전’을 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재미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한 뒤 이들 중 100명씩을 골라 총살하는 것으로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감정적인 애국주의, 이른바 징고이즘이 힘을 더해갔다.
출처:동아일보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