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4년(1591) 정월, 일본에 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귀국했다. 이들이 일본으로 향한 때가 전해 3월이니 무려 10개월이나 걸린 노정이었다.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서로 다른 귀국 보고는 4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명하다. 그 내용을 《국조보감》에서 살펴보자.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왜국의 사신 평조신 등과 함께 오면서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불러 보고 하문하니,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상이 하문했다.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는가?”
황윤길이 아뢰었다.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이는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다.
이 기사는 《선조수정실록》과 흡사한데, 다만 《선조수정실록》은 이 기사 뒤에 “대체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모두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 라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라고 덧붙였다. 동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것은 모두 서인이란 이유로 배척했다는 뜻이다.
자는 자무(子茂).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지금의 랴오닝 성[遼寧省] 톄링 현[鐵嶺縣]) 사람이다. 이성량(李成梁)의 맏아들이며, 아버지의 음덕으로 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가 되었다. 1583년(萬曆 11) 산시[山西]의 총병관(總兵官)이 되었으며, 잠시 중앙 관직에 있다가 1587년 선부(宣府)의 총병관을 역임했다. 1592년 닝샤[寧夏]에서 발배족(哱拜族)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독섬서토역군무총병관(提督陝西討逆軍務總兵官)에 천거되었는데, 무신으로서 제독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같은 해 발배족을 토멸하고 그 공적으로 도독(都督)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자, 명나라가 조선을 돕게 되어 그도 군사를 이끌고 동정(東征)에 나섰다(→ 색인 : 임진왜란). 1593년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벽제관(碧蹄館)에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에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뒤 화의를 위주로 사태를 수습하고 그해말에 귀국했다. 1597년에는 요동 총병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토만(土蠻)이 침범하자 그 본거지를 공격했으나 복병에게 기습당하여 전사했다.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の海戦に対して本格的に論ずるのに先立って日本水軍の規模を把握して見る事にする.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派兵された日本軍の規模は陸軍 15万名余水軍 9200人だ多くの日本資料で紹介するある.
倭軍を編成
1582年の本能寺の変で織田信長(1534-82)が倒れた後、倭国の支配者となった豊臣秀吉(1536-98)は、次なる目標とし て「明」の征服を決意。十分な海軍力を持たない秀吉は、1586年から 2000隻の船の建造を始めました。1587年には朝鮮軍の強さを測るため、26隻からなる襲撃部隊を朝鮮南岸に派遣し、朝鮮軍は問題にならないと結論づ けていましたが、朝鮮半島を通り陸路「明」に侵攻する計画を立て、そのために李氏朝鮮を倭国に服属させる交渉を側近の小西行長(?-1600)と対馬の宗 義智(1568-1615)に命令。当時、「明」の冊封体制下にあった朝鮮との交渉が決裂すると、1591/8月に秀吉は「唐入り」を宣言し、一番隊から 九番隊までの9軍団総勢15万8000人からなる朝鮮出兵の軍勢を編成し、大阪城から名護屋城(現・佐賀県唐津市鎮西町名護屋)の前線司令部に旧暦 4/25に出ばりました。
倭軍을 편성
1582년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1534-82)가 넘어진 후, 야마토국의 지배자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98)는, 다음의 목표로서「명」의 정복을 결의.충분한 해군력을 가지지 않았던 히데요시는, 1586년부터 2000척의 배의 건조를 시작했다.1587년에는 조선군의 힘을 측정하기 위해, 26척으로 구성된 습격 부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조선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 짓고 있었습니다만, 한반도를 통해 육로로「명」에 침공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위해 조선을 야마토국에 복속시키는 교섭을 측근의 고니시유키나가(?-1600)와 대마도의 宗 義智(1568-1615)에 명령.당시 , 「명」의 책봉 체제하에 있던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하면, 1591/8월에 히데요시는「당방문」을 선언해, 제일 대로부터 9번대까지의 9 군단 총원 15만 8000명 정도의 한국 출병의 군세를 편성해, 오사카성으로부터 나고야성(현・사가현 카라츠시 친제이쵸 나고야)의 전선 사령부에 음력4/25에 출했다.
임진왜란(文禄の役)을 준비하기 위해 병력,병참수송을 위해서 2000척의 배를 준비했다고 한다.
2000척의 배가 모두 건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족함이 있었는지 임진왜란 직전 다시 선박 건조 명령이 하달된다.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
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軍隊輸送のため天正19年(1591)正月20日諸国に船舶の準備を命じた。その内容は
1.東は常陸より南海を経て四国,九州に至る海に沿うた国々,北は秋田酒田より中国に至る,その国の高10万石について大船2艘ずつ用意すべきこと。
2.水手は浦々の家100軒について10人ずつ出させその手その手の大船に用い,若し余りの水手があれば大阪に来るべきこと
3.直轄地は高10万石について大船3艘,中船5艘ずつ作るべきこと。
군대 수송을 위해 덴쇼(연호) 19년(1591) 정월 20일 제국에 선박의 준비를 명했다.그 내용은
1.동쪽은 히타치에서 남해를 거쳐 시코쿠, 큐슈에 이르는 바다에 연해 있는 나라들, 북쪽은 아키타 사카타에서 중국에 이르는, 그 나라의 10만석당 큰 배 2척씩 준비 해야 할것.
2.뱃사공은 포구의 집 100채당 10명씩 내게 한다. 그 손 그 손의 큰 배를 이용한다.약간 남는 뱃사공이 있으면 오사카에 와야 할 일
3.직할지는 10만석당 큰 배 3척, 중선 5척씩 만들어야 할 일.
여기에서 말하는 대선은 널리 알려진 安宅船이다.
1586년 2000척의 선박과 별도로 100척 이상씩의 安宅船과 関船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ここで言う大船は広く知られた 安宅船だ.
1586年 2000艘の船舶と別に 100艘以上ずつの 安宅船と 関船が用意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別冊歴史読本『海の戦国史』「李舜臣率いる無敵の李朝水軍」(小林則子)八十九頁より、秀吉水軍の編成について。典拠は示されてない。
舟手の編成は、次のように十将のもとに合計一万二百人であった。
九鬼嘉隆 千五百人
藤堂高虎 二千人
脇坂安治 千五百人
加藤嘉明 七百五十人
来島兄弟(通総·通之) 七百人
これら主力の五人に加えて、
菅野正影(菅の正陰) 二百五十人
桑山重勝 壱千人
桑山小伝次 壱千人
堀内氏善 八百五十人
若杉伝三郎 六百五十人
前記には「菅野正影(菅ノ正陰)二百五十人」とあるのは、『天正記』には父菅平右衛門達長の名が記されている。また合計人数が次の『天正記』より千人多い のは、桑山重勝·桑山小伝次が夫々千名計二千の兵力とされているが、『天正記』では、桑山藤太·桑山小伝次の二人で千名とされているため。
전기에는「칸노 마사카게 2백오십인」이라고 있는 것은, 「덴쇼기」에는 父菅平右衛門達長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또 합계 인원수가 다음의「덴쇼기」보다 천명 많은 것은, 쿠와노야마중승·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이 각각천명계 2천의 병력으로 되어 있지만, 「덴쇼기」에서는, 쿠와노야마등태·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의 둘이서 천명으로 되어 있기 때문.
『天正記』に記載されたように、淡路岩屋を基地とする菅水軍は菅平右衛門が統率者であった。「田中論文」によれば、文禄元年(1592)七月十七日付と推定される次の秀吉朱印状により、菅平右衛門と子息の和泉·若狭·権之佐の四名は、警固船奉行に任命された。
「덴쇼기」에 기재된 것처럼, 淡路岩屋을 기지로 하는 관수군은 스가다이라 우에몬이 통솔자였다.「타나카 논문」에 의하면, 문녹원년(1592) 7월 17 일자로 추정되는 다음의 히데요시 주인장에 의해, 스가다이라 우에몬과 자식 이즈미·와카사·권지좌의 4명은, 경고선봉행에 임명되었다.
일본의 연구자들은 일본 수군의 규모가 9000여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의 일부 학자도 이에 동조하는 듯 하다.
小田原의 반란에는 20000여명의 히데요시의 수군이 참전하고 있다..
일본 내전에서도 20000명 이상의 수군(북조군 제외)이 투입되었는데 10000명의 수군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2000척의 선박을 운용하려면 몇명의 수군이 필요할까?
2000척이 모두 関船이라고 가정하면 2000*50 = 100000
무려 십만명의 병력이 필요하게 된다.
2000척의 선박이 모두 동원되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일단 자세한 것은 뒤로 미루자.
日本の研究者たちは日本水軍の規模が 9000人余りだ粘り強く主張するあり韓国の一部学者もここに同調するようにする.
小田原の反乱には 20000人余りの秀吉の水軍が参戦するある..
日本内戦でも 20000人以上の水軍이 投入されたが 10000人の水軍が投入されたということは変ではないか?
2000艘の船舶を運用しようとすれば何人の水軍が必要だか?
2000艘が皆 関船船だと仮定すれば 2000*50 = 100000 おおよそ十万人の兵力が必要になる.
2000艘の船舶が皆動員されたと思うことができないので一応詳しいことは後に延ばしたところで.
小田原의 반란에 동원된 일본 수군
小田原の反乱に動員された日本水軍
九鬼嘉隆(志摩・鳥羽城主) 一千五百
加藤嘉明(淡路・知志城主) 六百
菅 達長(淡路・客将) 二百三十
脇坂安治(淡路・洲本城主) 一千三百
来島通総(伊代・来島城主) 五百
長宗我部元親(土佐・岡豊城主) 二千五百
羽柴秀長(大和・郡山城主) 一千五百
宇喜多秀家(備前・岡山城主) 一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
이상의 리스트를 살펴 보면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의 병력이 임진왜란에 제외되어 있다.
毛利輝元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자.
以上のリストをよく見れば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の水軍兵力が壬辰の乱に除かれるある.
毛利輝元に対して少しよく見る移ろう.
毛利輝元
文禄元年(1592年)から始まる秀吉の2度の朝鮮出兵にも、主力軍として兵3万を派遣した。これらの功績から慶長2年(1597年)、秀吉より五大老に任じられた。慶長3年(1598年)8月、豊臣秀吉死去の際、臨終間近の秀吉に、遺児の豊臣秀頼の補佐を託された。
모리 데루모토
문녹원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히데요시의 2차례의 한국 출병에도, 주력군으로서 군사 3만을 파견했다.이러한 공적으로부터 게이쵸 2년(1597년), 히데요시로 부터 오대로에 임명되었다.게이쵸 3년(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때, 임종 직전의 히데요시에, 유아의 토요토미히데요리의 보좌를 맡게 되었다.
毛利水軍
天正20年(1592年)から始まる、文禄・慶長の役でも、毛利水軍は朝鮮へ渡海するために主力として駆り出され、九鬼水軍や来島村上水 軍、塩飽水軍を主力とする豊臣水軍や、坊津水軍を主力とする島津水軍とともに、兵站や海上輸送を担い、李舜臣らの朝鮮水軍と海戦を行った。
모우리수군
덴쇼(연호) 20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문녹・게이쵸의 역에서도, 모우리수군은 조선에 항해하기 위해서 주력으로 해 끌려가 쿠키수군이来島村上수군, 염포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도요토미수군이나, 방진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시마즈수군과 함께, 병참이나 해상운송을 담당하고, 이순신등의 조선수군과 해전을 실시했다.
毛利水軍이 임진왜란에 투입된 경과를 설명하는 글에서 여러 수군이 나열되고 있지만 島津水軍의 존재가 새롭게 등장한다.
毛利水軍が壬辰の乱に投入された頃とを説明する文で多くの水軍が羅列されるあるが 島津水軍の存在が新しく登場する.
조선을 침공하기 위하여 몇척의 배가 동원되었을까?
크게 3차례에 나누어 일본의 병력이 상륙하게 된다.
朝鮮を侵攻するために何艘の船が動員されただろうか?
大きく 3回に分ける日本の兵力が上陸するようになる.
4月12日 4月1日に小西行長・宗義智率いる第一陣が朝鮮半島へ出兵したのを皮切りに、名護屋を出発した諸隊は壱岐・対馬を経て、釜山浦に上陸。
4月 17日 加藤清正・鍋島直茂・相良頼房の第二軍、釜山浦に上陸。黒田長政・大友吉統の第三軍、毛利吉成等の第四軍、四月十二日、名護屋を出発し、一番隊から四日遅れて四月十七日に朝鮮釜山浦(プサンポ)に上陸
4月27日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等、船団七百艘にて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4월 12일 4월 1일에 고니시유키나가・교의지가 인솔하는 제일진이 한반도에 출병한 것을 시작으로, 나고야를 출발한 제대는 이키・대마도를 거치고, 부산포에 상륙.
4월 17일 가토 기요마사・鍋島直茂・相良頼房의 제2군, 부산포에 상륙.쿠로다 나가마사・오오토모 요시무네의 제3군, 모우리 요시나리등의 제4군, 4월 12일, 나고야를 출발해, 제일 대로부터 4일 지각해 4월 17일에 조선 부산포에 상륙
4월 27 일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등 , 선단 7백척으로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
한일 양국의 기록에서 날짜가 차이나는 이유
韓日 両国の記録で日付が差がある理由
http://blog.naver.com/marich77/40109942911
3차례의 일본군 상륙을 분석해 보면
첫번째 小西行長의 1군이 4월1일 출발 12일에 상륙
두번째 2,3,4군 4월12일 名護屋출발 17일 상륙
세번째 나머지 군이 4월12일 名護屋출발 27일 상륙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日本軍上陸を分析して見れば
一番目 小西行長の 1軍が 4月1日出発 12日に上陸
二番目 2,3,4軍 4月12日 名護屋出発 17日上陸
三番目残り軍が 4月12日 名護屋出発 27日上陸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따라서,일본군의 부산상륙은 병력 수송선이 부산과 名護屋를 왕복하면서 수송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선박을 이용 상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각에 동원된 선박은 500척 이상의 규모였으므로 최하 1500여척으로 이에 동원된 수군은 최하 5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いじめなので,日本軍の釜山上陸は兵力輸送船が釜山と 名護屋を往復しながら輸送したのではないそれぞれ他の船舶を載せる上陸したことを分かる. それぞれに動員された船舶は 500尺以上の規模だったから最下 1500余隻でここに動員された水軍は最下 50000人にのぼることで推算される.
別冊歴史読本『海の戦国史』「李舜臣率いる無敵の李朝水軍」(小林則子)에 기술된 10000여명의 수군은 수송에 가담된 수군을 제외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수전을 위한 순수 전투 병력으로 판단된다.
別冊歴史読本『海の戦国史』「李舜臣率いる無敵の李朝水軍」(小林則子)に記述された 10000人余りの水軍は輸送に加担された水軍を除いたことだ判断される.
言い換えれば水戰のための純粋戦闘兵力と判断される.
일본의 정예 수군은 3차례의 상륙중에서 3번째로 부산포에 접안한다.
이때 동원된 수군이 10000여명이며 1차와 2차에 동원 되었던 수군과는 별개이다.
水軍総督은 九鬼嘉隆였다.
日本の精鋭水軍は 3回の上陸の中で 3番目に釜山浦に接岸する.
この時動員された水軍が 10000人余りで 1次と 2次に動員された水軍とは別個だ.
水軍総督は 九鬼嘉隆だった.
九鬼嘉隆
秀吉の朝鮮出兵に際し、水軍総督の命を賜り、金団扇および茜の吹貫(ふきぬき)に金瓢箪の馬印を賜る。
大小の船数515艘と艘帥1500余人(『浅野家文書』によれば1000人)を率いて肥州名護屋(佐賀県)に赴き、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구키 요시타카
히데요시의 한국 출병에 즈음해, 수군총독으로 명을 받아, 금 부채 및 천의 취관(비단나무)에 금 표주박의 馬印을 받는다.
대소의 선 515척과 副將 1500 여이명(「아사노가 문서」에 의하면 1000명)을 인솔해 히슈 나고야(사가현)로 향해 가,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
제1차 울산성(도산성) 전투
날짜 1597년 음력 12월 23일 ~ 1598년 음력 1월 4일
병력 조선 1만1천여명 명 3만6천명 vs 울산왜성 주둔군 1만6천명 구원병 8만명
조선군 1만여명을 투입
조명연합군
연합군은
동시에 명군은
가토는 전투 초기 자신의 휘하 병력 1만 6천여 명만을 지휘할 수 있었다.
12월 23일
마침내 조명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공세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산성 바깥의 병영성, 언양성이 함락되었으며 가장 가까운 왜성인 서생포 왜성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도산성은 조명연합군의 그물같은 포위를 당했다.
일본의 축성술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오로지 난공불락 하나에만 올인한 방어력을 추구했기 때문.
생각치 못한 고전과 피해에, 연합군 총사령관 양호는 전략을 변경하여 고사작전을 개시한다.
연합군은 성 주변의 우물을 모조리 묻어버리고 태화강의 물줄기를 빈틈없이 봉쇄했다.
가토와 일본군
성 안에 2만에 가까운 일본군에게 먹을 식량과 물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군은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총사령관인 가토는 천에 고인 물을 짜내어 마셨고...
태화강으로 식수조달을 위해 결사대를 보내나..
조명연합군은 결사대를 보는 족족 개발살내서 포로로 잡았다.
이후로 가토는 포위망 돌파를 포기하고 죽기살기 농성으로 전환한다.
한편, 조명연합군은 포위망 유지와는 별개로 공세를 강화했다.
일본군이 언제든지 구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포위만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결국 28일을 기점으로 연합군은 도산성 외성을 함락시키며 가토군을 몰아붙였고, 가토의 일본군은 좁은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결사항전을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성에서 짱박혀있던 일본군 장수들이 일제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6~8만에 달하는 대군이 도산성으로 몰려갔다.
이에 조명연합군도 일본 구원군과 맞서게 하였으나 오랜 시일 전투를 치룬 연합군과 생생한 일본군의 대결은 당연히 일본군이 유리했다.
결국
연합군 지휘부는 공성 포기와 퇴각을 결정, 10여 일에 걸친 전투는 최종적으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다.
기타 이야기..
퇴각하는 연합군과 추격하는 일본 구원군 사이에 자그마한 공방전이 발생한다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은 각 1만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성에서 아사할 뻔한 가토 기요마사는 이후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면서 성내에 수십개의 우물을 파고, 다다미를 고구마줄기로 만들어 유사시 비상식량으로 쓰게끔 하는등 울산성의 뼈저린 전훈을 반영했다.
일시:1598년(선조?)10월1일
지휘관: 조·명연합군-董一元/ 일본-島津義弘
병력: 조·명연합군 수만인~200,000내외/ 일본-7,000내외
전과: 조.명연합군-30,000~80,000내외 사상자/ 일본-미상
전투의 개요
1598년10월 조선의 사천에서 島津義弘이 이끄는 島津軍7천명이 명군의 장군 동일원이 이끄는 수만의 조·명연합군을 격퇴한 전투로서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설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명군의 수가 3만7천에서 20만까지, 명군의 사망자가 수천에서 8만이라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일본 측 기록>
1598년 9월 말부터 10월초까지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小西軍), 사천왜성(島津軍), 울산왜성(加藤軍)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동일원이 이끄는 20만이라 칭하는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했다. 사천은 일본군의 策源地인 부산과 일본최좌익(조선의 서쪽)의 순천왜성, 남해왜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함락하면 서쪽에 있는 일본군과의 연락을 분단시킬 수 있었다. 사천에 주둔하였던 일본 병력은 島津義弘과 島津忠恒이 이끄는 島津軍7천뿐이었다. 宗軍과 立花軍이 援軍을 신청하였으나 義弘은 이 신청을 거절하고 島津家의 군세만으로 조ㆍ명의 대군을 맞아 격퇴하였다.
그 후 집결하여 철퇴한 연합군의 島津측에서는 [취한 수급이 3만, 벤 시체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島津義弘은 [鬼石蔓子]라 불리어 무서워했고, 그 武名이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전해졌다.
[繪本太閤記]의 기록
회본태합기에는 사천성(사천고성)을 수비한 것은 伊勢兵部少輔定正(貞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사천신성은 新塞城이라 했다. 또한 [鬼ㆍ島津]이 아니고 [?(파)ろしのしまんず] 라고 기술하고 있다. 명군의 병력은 4만여 이고, 島津軍의 병력은 義弘의 5천, 忠常의 1천, 伊勢兵部少輔定正의 3백 합계 6,300여명이고, 취한 명군의 수급은 3만 여로 기술하고 있다.
사천성의 전투에서 명군의 병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패전 측인 명의 기록에서 [전사자 약8만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 8만인이라는 것은 세계사와 비교하여도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패전의 장수는 책임을 물어 처형되는 경우도 있어 전과는 과대히, 손해는 과소히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천전투에 앞서 8월18일 이미 豊臣秀吉이 사망했지만 이를 숨기고 10월 15일부로 일본군에게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島津家가 이 사천전투에서 명군을 격퇴함으로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탈출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한 11월18일의 노량해전에서 小西軍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이 전투를 세계전투 사에서도 비교될 만한 일본의 전설적인 승리의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 10월2일, 董一元은 오전 6시30분경 사천왜성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오전 9시경 中路軍은 목책까지 진군하여 화살과 총탄을 우박처럼 발사했다. 드디어 中路軍의 一隊가 성문을 깨고 담을 넘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공격군의 200m 후방에 거치돼 있던 城門 파괴용 대포가 과열에 의해 파열하면서 그 불꽃이 날아가 화약상자에 옮겨 붙음으로써 연쇄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明兵들이 공세를 멈추고 도주하려고 했다.
기회를 포착한 왜병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돌격했다. 백병전에서는 예리한 일본도가 위력을 발휘했다. 主將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본대를 이끌고 달려 나와 도주하는 明軍을 추격했다. 中路軍의 선봉장 모국기는 敵의 主將 요시히로(島津義弘)까지 출성하자 성 안의 수비가 엷을 것으로 판단, 一枝軍(일지군)을 이끌고 바로 성문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이것을 본 시마즈 타다나가(島津忠長)가 100騎를 이끌고 사천왜성과 明兵 사이로 뛰어들었다.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 부대도 가세했다. 이때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 부대는 中路軍의 후미에 있던 輜重(치중)부대를 향해 화살과 철포를 발사했다. 後陣의 대소동에 놀란 모국기 부대는 사천읍성 방면으로 도주했다. 한편 董一元 직속의 4,500騎는 영춘왜성과 사천읍성 사이의 石橋(석교) 前面에 최후 방어선을 치고 전세의 逆戰(역전)을 꾀했다. 그러나 가와카미 히사토모(川上久智)의 부대가 달려 나와 中路軍은 붕괴되어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며 합천 삼가까지 도주했다.
순천 애교성전투(9.19~11.19) 삼면이 바다로 서쪽만 육지이다. 조명연합군은 약 5만5천명 소서행장 (고니시)왜군은 1만4천명이였다. 등자룡 진린 외 조선군 장수들(김완 이영남)이 대부분 등이 참여해서 패배했다.
사로병진, 조명연합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3개 왜성을 동시 전면 공격하여 왜군을 섬멸하자는 작전은 세곳 모두 실패하고 왜군은 유유히 약탈한 재물 (포로)들을 싯고 철군을 종료했다.
1598년 8월 17일 후미성에서 풍신수길이 전쟁중 절명하자 5대로 (5봉행)이 철군을 결정하게 되자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 작전 울산성 사천성 순천성을 동시 공격하기로 했다.
1598년 9월 19일우의정 이덕형 도원수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 명나라 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항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했다.
그후 고니시에게 강화회담 요청공문 발송'양진영중간에서 호위병만 데리고 만나자, 나온다면 마중나가겠다' 고니시 동의
20일 고시시는 호위병10명으로 회담장으로 나옴 이때 유정은 회담장 십여리에 음식을 즐비하게 하였으며 회담장 양측에 장사들을 배치하고, 왕문헌에게 유정의 복장으로 위장 백한남은 권율로 위장 전라순찰사 황산이 직접 고니시를 영접하기로
비둘기 20마리로 고니시가 오면 날리기로 시킴, 이윽고 고니시 일행이 해룡창에 도착하자 비둘기가 날아오르자 명군들은 대포를 쏘아대고 매복병들이 튀어 나오자 고나시는 놀라 되돌아가고 왜군들 구원병이 튀어나와 실패함
21일 명군의 지원병1만5천명 도착 하고 해남현감 적진 공격 왜군 8명 사살 순천성 포위
22일 ~23일 유정은 조선군을 질책 서천만호 한산대장 홍주대장 금갑도만호 회령포 만호 조선군장수들 곤장7~15대씩 처결
30일 명군 수군 전함100여척 합세
10월2일 조명 연합군 총공세 반나절 도중 오하려 왜군들이 밧줄울 타고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 조명연합군 약1000명 전사(조선수군 사로 첨사 황세득 이청일 외29명)연합군 100보 후퇴
10월 2일 유정은 사천성의 악명높은 시마즈군을 봉쇄한 조명연합군이 중로군 동일원장군이 시마즈 요시라 왜군에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음,(울산성은 가토기요 마사 조명연합군 동로군도 후일 패배함)
긴급히 순천왜교성 봉쇄를 풀고 한밤중에 부유창방면으로 퇴각은 계속되어 9일까지 계속함(조선군 전사200명 부상 600명) 봉쇄기간중에도 왜군은 자유로이 돌아다니는가하면 총을 쏘아대기도 하고 이퇴각으로 군량미 3천석을 빼앗겼으며 엄청난 무기들도 빼앗겼음, 이 군량미는 조선의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굶주리며 수래와 짊어지고 조달 했든 것들이였다.
고니시는 힌바탕에 가운데 붉은 그림을 그려넣은 깃발에 '부족한 군량미와 무기를 보내주어 대단히 감사하므니다' 라는 깃발을 길 곳곳에 걸어 놓고 유유히 철수 했다. 조명연합군 전함 30여척이 격침되고 왜군도 40여척이 격침소실되었다.
시마즈는 사천성에서 많은 재물들(포로와 도공들)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출처:왜교진병일록1598)
순신은 권율과 함께 수륙 합동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였으나 6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다.
히데요시가 후지성에서 사망하였는데 고니시나 가토등은 모두 그의 가신이었기에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선출병 거부 동부 보충대)를 상대해야 하는 급박한 상태였습니다.
일본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을 경우엔 본국으로부터 보급도 못 받고 조선땅에서 죽을 위기였습니다.
1598년 11월 18일에 일단 병력을 순천 왜교성 앞으로 보내 조선군이 다시 왜교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시마즈는 중로군 동일원장군과 조명연합군을 대파한 후 요시토모의 군대와 함께 300~5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으로 고니시를 구원하려고 했다.
이순신의 본군은 노량근처의 관음포에 매복해있었고 19일 새벽에 일본 수군이 노량에 진입하자 관음포에 매복한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해 노량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마즈는 이순신을 포위섬멸하려 했습니다. 고니시는 순천 왜교성을나서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앞을 가로막는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을 유유히 뚫고 나가는데도 순천왜교성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후퇴했으며 노량해전은 해가 뜰때까지도 계속 왜군들의 철군이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라의 철군하든 병졸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며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조명 연합수군은 많은 포로들을 싯고 퇴각하든 일본 고니시와 고위장교들이 먼저 떠나고 잔병들을 추격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든 것이였습니다.
조선군 270명, 명군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이 사망했습니다.
충 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깜짝 놀라며 슬퍼했을까? ‘선조실록’은 이순신이 전사한 지 닷새 뒤인 11월 24일 밤, 이 정보를 명나라 군대 쪽에서 입수한 승정원이 급히 왕에게 보고했다고 기록한다. 소식을 들은 왕은 “오늘은 밤이 깊었다”며 “내일 승정원이 알아서 하라”고만 한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딘가 귀찮아하는 기색까지 보인다.
며칠 뒤 명나라 장수 형개(邢?)가 왕 앞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애석해 할 때도 선조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더니 명나라 등자룡(鄧子龍)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출처:충무공전서).
조선 땅의 일본 졸병들은 이순신은 모르고 대포를 장치한 철갑선 그러니 거북선만 알았다. 장수들은 거북선으로는 바닷길을 절대로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졸병들은 거북선에 의해 바닷길이 막혀 자신들이 독안의 쥐가 되고 만다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래서는 일본 군의 장수들이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중 각 해전에서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여 조선 수군이 완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즉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부산해전 등 주요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이었다. 그때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底板) 길이 50~55척, 탑승인원 130명 정도로 파격적으로 컸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크기가 점점 커져 정조 때는 통제사가 탑승하는 통영상선(統營上船)이 저판 길이 90척, 일반 판옥선이 저판 길이 70척 정도였고 탑승인원도 160명 내외로 늘었다. 그이후 판옥선은 전선(戰船)으로 개명되었다.
세키부네(일본어: 関船)는 아타케부네보다 작은 중형의 전투함이며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주력 전투 함선이다. 이를 관선으로 부르는데, 관선(세끼부네)은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군선(보통 노수가 40개 이상)으로서 요즈음의 순양함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 대체적인 크기는 배 길이 기준 36~69.5척 정도였는데 임란 당시에는 대략 36척 정도였다.[1]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선수재가 특징이고, 보통 노는 30~60개 정도로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하나씩 젓는 그다지 큰 배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선들은 대개 조선 군선보다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해전에서 참패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기간중에 세키부네의 규모가 커져서 조선 조정에서 걱정하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세키부네는 바다의 관문인 해협을 지키는 배라는 뜻으로, 지방 영주 또는 해적들이 어선이나 상선에게서 통과세를 받거나 노략질하던 속도가 빠른 배에서 유래되었다. 두꺼운 나무기둥 및 판재로 측면이 단단히 방호되는 판옥선과 달리, 일본의 군선은 측면이 반드시 목재로 방호되는 것은 아니어서 신쇼인 모형처럼 대나무 한 겹으로 측면을 가리거나 심지어 그런 것도 없이 천막으로 둘러쳐져 있는 경우도 있다. 판옥선이 메인 데크 위에 추가로 설치된 단단한 상자 안에 격군과 전투원(사부를 제외한 포수)들을 몰아넣어 보호하는 것이 건조 컨셉인 반면, 세키부네의 상부 구조물은 2층 위라는 높은 위치에서 사격 혹은 적선에 건너가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했다.출처백과사전
김수창제주지검장 음란행위로 경찰에 체포, 제주지검장 검찰의 현실인식을 잘보여주는 것 같다. 경찰이 잘 봐주지 않았다고 괴심히 생각하는 검찰의 인식이 잘 못이다.
음란행위 를 한 사실이 경찰조사에서 밣혀졎다면, 제주지검장 응분의 책임져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경찰을 괴심히 할일은 아니다. 검찰이 스스로를 바로해야 한다.
검찰이 누명쒸우고 사건조작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