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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거북선 12척이 임진왜란을 종전시켰나?(플래툰)

自公有花 2014. 8. 25. 15:20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4~1599.1

임진왜란때  임금과 조정이 무조건 도망다닙니다. 백성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고 백성들이 적 치하에 고통받는다 이런 개념이 없었지요 그러니 적치하에 부역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고 왜군은 전공을 세우려 목도베고 코도베고 귀도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내서 훈장먹고자 합니다. 선조는 도망에 있어 달인이고 로간 뺨칩니다. 중원대륙과 한반도 역사에 이렇게 도망달인이 있습니까,

 

 

 

 

도망자 도망정권답게 은폐에 선수이고 비열하게 위험인물을을 숙청하지요, 뻑하면 백성들 부역자로 몰아서 효수하고  엄청 센 군율로  참수합니다. 명나라 군들은 외국 여행온 점령군 행세 하면서 얘들도 목가지 확보경쟁을 합니다. 관군들도 포상 전공을 다투고 허위보고를 많이들 합니다.  결론은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발발하여 1599년 1월 조명 연합군이 사천성에 입성 함으로서 7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침략 전쟁입니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었나요? 전공은 지들끼리 그냥 못나누고 별별짖을 다합니다.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항을 재침했습니다.  이어 제 2진 고니시 유키나가 웅천으로 상륙했습니다.  이후 일본군들이 부산항을 기반으로 우후 죽순으로 들어 옵니다  8월 20일 (음 7월8일) 일본의 후속 군병들이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 임진란 때 경상도에 진주하고 있든 2만 병력에 더해 14만 병력이 이미 상륙을 마친 상태입니다.

 

 

동인들은 조선 왕조가 망해도 (왜정이 들어도 그 밑에 기생) 세력을 이루고 있었기에 적극적인 전쟁을 회피하고 수세적 관망에 주력했으며 특히 동인(남인)들 중에는 고니시군과는 상당한 우호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김성일이 일본을 둘러보고 전쟁이 없다고 허위보고 한 것도 일본 서군들의 영향에 근거 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5 6 28일 김성일의 장계, 원균은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오자 싸워보지도 않고 전함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원균은 1597년 1월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의 삼도수군 통제사 아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왜군의 부산 상륙후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바통을 받아 가장먼저 배설을 차출합니다.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되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이 임란 당시에는 일등공신으로 똑 같았다가 후일 이순신은 성웅이 됩니다. 

 

 

배설(裵楔)장군은 웅천 전투에서 왜선 600척을 쳐부순 경험이 있었기에, 원균 부대의 최고 선봉에 투입된 장수 였으나, 왜군들이 장거리 항로를 따라 부산항에 상륙하기 전에(수심이 깊은 곳) 격멸해야 한다는 작전을 주장했으나 조정(원수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이 그땐 3도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군들이 부산상륙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도 이순신은 선조가 북쪽으로 토끼든 말든 한산도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왜군 14만이 출병하는 것을 지켜만 볼것 같은 상황이고 원균이하 많은 장수들이 걱정하게 되고 드디어 왜군이 부산항에 상륙해버립니다.

 

 

부랴 부랴 이순신에게 속은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으로 대체 합니다.  원균은 배설에게 선봉을 맞기지요,  배설(裵楔)이 웅천전투에서 몆차례 선봉장으로 전투를 해보았고, 해적으로 양성된 왜군의 근접전에 패배합니다. 따라서 이건 아니다. 왜군을 유인해서 심해에서 함포로 작살 내자고 주장하지만, 권율이 이순신이 파직된데 앙심을 품고  원균을  다그칩니다.

 

 

원균은 권율에게 그러면 부산에 있는 적군을 육지에서 공격을 해주라 그러면 바다에서 협공을 하자고 요청합니다. 원균은 3월 29일 장계에 30만 대군을 동원 안골포 가덕도 등에 진주한 왜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권율에게 육군이 먼저 진군 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1만병으로 불가했음) 

 


 

이에 권율이 니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했으니 1만 병력으로 바다에서 적군을 무찔러라고 독촉합니다. 이건 뭐 죽으라는 명령이 였지요, 이순신을 체포해가고 그의 분신이랄 할만한 이억기를 투입해서 3도 연합수군을 조직한  원균이 고민하면서 부산에 있는 14만 왜군을 치기위해 가덕도에서 출발해서  칠천량에  진을 칩니다. 

부산에 진주한 왜군들이 원균의 움직임을 세세히 알고 있었고, 당쟁으로 왜군들에게 원균의 움직임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나라보다 당파와 자기 식구 감싸기가 중요했나 봅니다.   

 

 

 

 

 

 

 

 

칠천량해전 朝鮮漆川梁海戰  1597년 8월 16일 (음 7월 4일)

칠천도(七川島)는 경상남도 거제시의 섬으로 동경 128°39', 북위 34°59'에 위치하며, 면적은 9.219㎢, 해안선의 길이 25㎞이다.

2000년 1월 1일에는 거제도와 칠천도 연륙교로 연결되었다.멀리서 보면 한개의 섬이 7.000개로 보인다고 칠천도라 하고

거제시에 딸린 60여개의 섬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

 

부산인근에서 바람과 파도가 세찬데도 권율의 득달에 못이긴 원균은 1만여(전함 200척) 3도 수군 연합함대를 이끌고 9일(12척이 표류 부서지고)  가덕도에서 물을 구하려다 적의 기습을 받아  군졸을 손실하고, 배설이 선봉으로 나서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때 입니다.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습니다.(적군은 더 많은 손실이 있었음) 조선전역해역전도의 그림이 그려진 상황입니다.

 

부산진포구의 일본 수군은 미리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란작전을 유도했고, 갑자기 풍랑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간신히 가덕도로 돌아왔는데,  일본 병선 500여 척의 추적을 받고 거제도로 항해하다 밤에 보급품을 구하려고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여 약 400명을 잃고, 배를 타고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090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선조대왕과 신하들의 대책,
선조: 아니 척후병도 없었단 말인가?  장거리 운항으로 척후병도 없었다고 합니다. 
  
선조는 하늘이 내린 재앙이니 어쩌 겠는가? 
풍신수길이 바다를 제패해야 한다고 하더니 이를 어쩌나...... 

충청이나 전라도에 
남은 배가 한 두척이라도 없는가? 
신하들: 없는 걸로 압니다. 
그래 "누가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도 장수가 없는가? 

이항복 병조판서에게,  그래도 살아남은 병력이 있는가 묻자 이항복 바다가 좁은 곳이라 살아 남은 병사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하면서 해도를 보여준다.  선조가 해도를 보면서 견내량 고성쪽으로 퇴각한 병사들이 매복군에게 당했단 말이지,

 

왜 경들은 아무 대책도 없는가? 

신들은 아무 대책도 없어서 민망해서(동인들 이순신을 기용하소서 마음속으로 했겠죠)  
  
이항복 병조판서:  넓은 바다라면 혹 살아 남을 수도 있는데 좁은 바다라 거의 매몰되고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유성룡이 알뢴다, 한산이 요충지 인데 필시 왜적에게 넘어 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해와 호남이 위험함을 아뢴다. 
선조도 독촉한다 장수가 없단 말인가? 한산도를 .... 적에 손에 넘어 가면 안되는데,,,적군에 손에 넘어가기전에,,윤두수 외 거의 모든 중신들이 아무 말도 못한다. 

선조는 말한다, 견내량을 통해  한산도 수군본영으로  퇴각할 생각은 왜 못하나
한척의 병선 없이 당했다니 ㅡ
  
사실은 전황 상황 -(속보 )
선조가 한산도로 퇴각하여 수군본영을  수습할  장수가 없느냐고  묻고 있을때

 배설은 6척씩 대열을 유지 한채 동로로 서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왜적함대 포위망을 뚫고 퇴각에 성공하고   견내량을 통과하여 한산도 수군 본영에 도착했습니다. 

왜군들의 추격을 염려한 배설은 무기와 탄약을 모두 충진하고 한산도 주민들을 긴급히 육지로  대피시킨다. 그리고 수군본영과 무기고등의 시설을 소각하고  남해로 퇴각(동인들은 도주라함) 
  
 그후 얼마 안되어 왜군들이 난입하여 미처 대피하지 못한 한산도 주민들의 대학살이 시행되었다.백성들 살육은 보통이고~  
선조임금이 그토록 한산도를 걱정할 때 배설은 선조임금이 조정에서 걱정하든 그 시간에 한산도 소개령을 내리고 무기를 회수하는 '청야작전'을 감했했습니다.

 조정에서 임금스스로 수군이 한산도로 퇴각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하고 울부짖을 당시 배설은 이미 선조임금이 시키지 않아도 그런 역할을 하고 남해로 퇴각하고 있었습니다. 
  
왜군들은 주민들을 악랄하게 입에 담을 수 없도록 남녀 노소 모두 학살 했습니다.(풍신수길이 점령지 주민을 모두 죽이고 일본 서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도록하라고 명했음)  
  
조선 수군은 190척의 전함이 격침되고 불타고 수군 1만여명이 전멸하였습니다. 
 배설의 약 2.400여명의 정병이 퇴각하여 청야 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조선 조정에서 누구도 바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그토록 원하든 걱정을 하는데도 누구도 사실을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탄환을 보내달라는 전보를 올리고,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장장 초인적인 약 430km의  작전이 펼쳐지고 전투준비를 하는데도 서인인 원균의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왕에게 보고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순신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조정에 보고함)대형 전함이 장난감입니까? (요즘 당쟁과 비슷합니다.)

왕을 둘러산 조정이 배설이 단신 도주하여 수군을 수습하는 것으로 보고하고,   동인조정은 전공을 동인들이 독차지 하기 위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할 뿐 국난을 수습하려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고니시와 연통 원균을 패망시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요)

백성들은 왜군에 살육되고,  명군에 치여죽고,  전쟁이란 군기 잡기에 목이 효수되고,  오직 권력을 잡아 역사까지 왜곡하여서라도 권력을 잡고자하는 시대였습니다.

세월호참사 대처가 7시간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국회에서 난리죠,   칠천량 패전은 고의로 선조에게 10일간  보고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고,  역사 왜곡인 선조 실록 자체가 수정에 수정됩니다. 

동인들(남인)과 군 지휘부는 이순신을 남해의 회령포(노량)로 보내 배설의 군대를 인수 한 후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칠천량이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협에 남쪽으로  약 200여 선단이 진을 치니 만일 왜군의 기습이 있게 되면 위험한 곳이 였습니다.

 

배설이 이런 위험성을 예견하고 심해로 나가자고 주장하지만, 사실 원균이하 장수들이 14만 왜군 본거지를 치러 가고 싶지도 않았겠죠, 그러니 설마 하면서 하루 종일 노를 저어 지친 상태로  그냥 진을 칩니다. 왜군들과 내통하든 첩보 받은 왜군들이 야밤에 근접해서(먼저 화전으로 4척에 불이 붙고 신호탄이 세발 발사) 새벽녁에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하였습니다. 

 

칠천량이 포위 되어 동서쪽 바다가 막히고 남북은 육지이라 피할 곳이 없는 다급한 원균은 3도 수군에게 견내량을 거쳐 춘원포 방면(통영)으로 고성쪽으로 후퇴하면서 육지로 퇴각할 것을 명령하고 육지로 내립니다. 여기에서 배설은 육지로 상륙을 거부하고 견내량쪽의 왜군들 3중 포위망과 교전하여 포위망을 뚫고 동로로 6척이 서로로 6척이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한산도 수군 본영으로 돌아 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배설(裵楔)군대가 '청야작전'을 하고 왜군들의 서남해 진군을 막기위해 회령포 노량포로 작전을 수행하는 모든 동태가 원수부에 보고되고 감시되고 있음에도 일부러 무시해버리고 조정에는 보고조차 안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원수부가 고의로 군수 지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 2.000명의 정규군이 군수 지원없이 기아 상태에서 약 201km (작전거리 약 430km)를 왜군을 저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밤에는 항해하고 낮에는 전함수리와 주민 소개령을 합니다.

 

백성들이 강강술래로 왜군들을 망봐주고 이게 백성들 군대이지 조정의 군대가 아닙니다. 거의 사병수준이라고 해야 겠죠

 

당시 군제는 전시라 사령관들을 감시하는 비변사가 있어 야전군 사령관들을 일일이 감시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원균이 장악한 원수부에 일선 사령관들의 일일 행동과 전과가 수집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균을 매일 닥달하고 곤장도 칩니다. 도원수가 자신은 전쟁에 나서지 않고 원균보고 나가 죽으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권율의 행주산성 전승보고자체가 믿기 어렵습니다)

 

경상우도수군의 12척의 장작귀선으로 이순신이 왜군의 서남해 진출을 막은 것을 보면 당시 선조와 윤도수가 지지한  원균의 작전이 가능한 것이였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3도 수군연합 함대가 약 200척 이였고 이정도의 전함과 병사로 충분히 14만 왜군의 부산 상륙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 재미있는 이야기 입니다.

이순신과 김성일 유성룡 권율 이원익이 지지하든 일본의 서군 고니시 말입니다. 이 쪽 병력 10만이 일본에서 몰살 당합니다. 조선에선 동인과 남인들이  서인들 탄압을 가혹하게 하듯이 ,,,

 배설은 서인도 아니고 단지 이율곡을 흠모하여 십만 양별설에 영향받아 전쟁 준비를  열심히 하였고  원균에게 발탁 된 죄 였겠지요? 

 

권율이 배설의 함대를 집어 먹고자 이순신을 파견하고 8월 3일 까지 이순신 임명장이 오지 않은 것만 봐도 선조는 이순신의 기용에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권율과 이원익 등이 배설의 보고를 묵살 은폐하고 이순신을 임명하자고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해서 임명된 것입니다. 이순신이 뛰어나서 임명되었다고 어디에 있습니까?

경상우도 수사 배설이 전란 끝날 때까지 유지 된 것으로 보아 허위 보고 앞에서도 선조는 배설의 능력은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풍신 수길이 1598년 사망하자 일본은 두개로 갈라집니다. (세키가하라전투)

[일본의 서군]이시다 지부쇼유 미쓰나리(임진왜란 때 군감으로 참전)'도요토미 가 수호'를 명분으로 전국에서 영주들을 끌어 모아 총 90명에 달하는 제장들이 가담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전원참수 당합니다.

 

고니시 셋쓰노카미 유키나가  천주교도로 유명함. 무역 상의 이유로 조선 출병을 반대했고, 조선의 지리를 잘 알아서 제1군의 선봉장이 됨.귀국 후 미쓰나리 파에 붙지만, 서쪽에 종군하고 있을 때 본국의 거성이 가토 기요마사에게 함락당하고 패하여 참수 당합니다.

 

시마즈 효고노카미 요시히로 (임진왜란 때 4군)사천 전투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여 조선과 명나라군들의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 후 시마즈 가문은 '서부 일본 제일'이라는 평을 얻고 세키가하라 전투 전에는 동군에 가담하려 했으나 거절당해서 서군에 붙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1.500명의 군사로 동군의 진을 정면 돌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배설장군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구키 오스미노카미 요시타카( 해적 출신의 다이묘)임진왜란 전부터 '철이 붙은 배'를 사용하여 수군으로 활약, 해전에 능했습니다. 귀국해서는 '이나바 미치토'라는 영주와 다툼이 생겨 이에야스에게 소송을 냈으나  이에야스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세키가하라 전에서 서군에 붙습니다.

 

우키타 비젠주나곤 히데이에 (히데요시의 충직한 신하이자 미쓰나리의 동지) 임진왜란 때도 활약하지만 권율 장군에게는 패한 적이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약, 본전에서 17.000의 대군으로 서군의 주력이 되지만 와키자카 등의 배신으로 패하여 하치조지마로 유배 당합니다.

 

 

 [일본의 동군] 도쿠가와 나이다이진 이에야스  히데요시가 편성한 16군(조선출병 예비군) 중 일본에 남았던 영주로 조선 출병을 은근히 반대하고 시마즈 요시히로등의 영향을 받아 끝내 조선출병을 하지 않았고,  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미쓰나리가 서쪽 오사카에서 영주를 끌어 모으자 군사를 4방면으로 나누어 회군한 뒤 서군을 격파, 에도 막부를 열어 일본과 조선간에는 수백년간의 평화가 찾아 오게 됩니다.

 

 

가토 가즈에노카미 기요마사  열렬한 불교(법화경) 신자로서, 조선에 2군으로 출진하여 큰 공을 세우지만 미쓰나리 당의 영주들과는 대립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규슈에 남아 고니시의 성을 공격, 함락 시키며 시마즈 가문과의 전투를 준비하지만 서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철군합니다.

 

구로다 가이노카미 나가마사 (히데요시의 책사였던 조스이의 아들) 임진왜란 때는 3군으로 출진합니다. 지략이 있어 중립파 영주들에 대한 공작을 담당한 이에야스의 오른팔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은밀히 움직여 부하들에게 미쓰나리의 최고 가신 '시마 사콘'에게의 저격을 명하여 성공합니다.

 

도도 이즈미노카미 다카토라 시코쿠의 영주로서, 조선에는 수군장으로 참전하지만  여러 차례 패합니다. 히데요시가 병사하기 전 부터 이에야스에게 붙어 충성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오타니 요시쓰구와 교전하지만 패하고,

훗날 오사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조소카베 모리치카에게 패배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대승을 한 일본에 장수들이 배설장군이 자신의 영내를 통과했다 해서 배설의 귀향 모습이 나옵니다. 이순신이 도주했다고 하고 권율이 도망자로 소문 내고서 역모 모반죄로 처형한 배설이 왜군의 적장적진을 통과할 때 부관 두명과 백마가 등장합니다.따라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일본측 사료에서 배설이 동인들에게 누명을 쓴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당시는 전함이든 나룻배든 인력으로만 노를 저어 운행되든 때 입니다. 따라서 왜군들의 배가 출항해서 부산포에 도착하기 전에 지쳐 있을 때  공격해서 괴멸하자는 것은 정확한 정세 분석이고 원균(배설)의 건의가 무리한 것은 전혀 아니였습니다.(배설의 주된 주장)

 

 

싸워 보지도 않고 조선 국토를 방임하고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한 이순신의 출병거부는 군인으로 서는 무책임 한 것이였습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면 전국토가 유린 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제해권의 이미가 없는 상태입니다. 나라 없는 제해권이 있을 수 없었지만, 왜적의 수가 많아서 겁먹은 장수들의 행태는 비난 할 수 없습니다. 누구를 투입해도 그렇게 겁먹게 됩니다.

 

 

전국토가 유린된다면 서남해 제해권을 지배하든 방어하든 어무런 것도 아니며 왜군에 겁을 먹었든 구국의 충정이든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살육을 방기한 것임은 분명합니다.(선조실록선조는 원균이 대패해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 등과 함께 전사한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1597. 7월. 15)에 대해서도 패인이 원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균을 윽박질러 출정을 명령한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栗)에게 있다고 하였다.)

 

 

원균과 배설이 부산상륙 전에 왜군격멸하자는 작전은 충분히 실현 가능하고도 남음에도 그런 기회를 상실 한 상태에서 이순신이 체포되고 원균이 병권을 넘겨받았을 땐 이미 부산영도에 적군이 상륙하고 전쟁준비가 끝난 상태임에도 비변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은 적을 치라고 무리한 요구를 강요했기에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영등포로 항해하느라 노꾼들이 지쳐 있어 기동력을 활용할 수 없는 상태에 적군에게 정보가 넘어가서 공격을 당해 전멸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적군은 생생 날고 기는데다 정보를 흘려준 간첩들이 조정에 있었고,  지친 조선수군이 어떻게 방어가 되겠습니까?

 

더구나 원균의 부산포 수륙양면협공 작전도 권율이 거부했습니다.  당시 왜군의 군수란개념이 없고 약탈전쟁입니다. 선조가 토끼는 것하나로 나라를 지킨 것은 맞습니다만, 제해권 때문에 일본이 물러 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전국각지의  의병들 출몰로 군수가 위협받았겠죠, 집도 절도 없는 난민들이 살고자 왜군들을 괘롭히고 그런 것 아닌가요?

관병들이 일본 상대가 안돼었거든요,

 

적의 숫자가 많은 만큼 수륙 분산 해서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것이 적에게 공포심을 조장해서 유리함에도 권율이 고의로 거부하고 원균의 수군만으로 부산항에 이미 상륙한 적을 수군으로 공격하라는 것 자체가 잘 못된 명령임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배설이 이끌고 온 12척의 판옥선이 조선 수군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선조는 권율과 유성룡 이하 조정의 거센 압박에 의해 1597년 9월 13일 불가피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에 재 임명합니다. 권율의 행주 대첩 이순신의 대첩들은 0하나 더 붙었다고 봐야 합니다. 또 장수 들 참전기록 그것도 요즘 공직자들 오래 근무하면 훈포장 탈 때 공적서 그런거 하고 비슷하리라 봅니다. 

 

선조 임금 자체가 신뢰가 안가고 도망 다닌는데 그 부하들이 그렇지 믿을 게 못됩니다. 솔직히 그냥 우리도 좋은 이순신 같은 영웅 하나 있어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성 따라 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모함하고 투서하고 주위에 뒷다마 까고 그런거는 배우지 않아야 된다는 조건을 달 겠습니다.

 

 

조선전역해전도(朝鮮戰役海戰圖) - 칠천량 해전?

 

 

  명량대첩이 아니라 칠천량 해전?

 


 다음은 두 번째 주장의 글입니다. 그림과 대조해 보면서 생각해 보세요.


  운영자 알림 : 도깨비 뉴스가 지난 2008년 3월과 8월1일, 두 차례 소개했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전역해전도’가 명량해전을 그린 것이 아니라 원균이 왜 수군에 참패한 칠천량 해전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8월1일 기사에서 독자 '밀메냐'님은 "이 그림은 칠전량 해전도이며 플래툰이라는 군사잡지 7월호에서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는 댓글을 올렸습니다. 확인 결과 플래툰 7월호에 김세랑 기자가 쓴 기사였습니다. 그는 지난 3월 도깨비 뉴스에 이 그림이 소개된 뒤 그림의 정체를 추적해 오다 지난 5월 일본 내 이 그림의 소재지를 확인하고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그림을 촬영하고 상세한 내용을 취재했습니다.  
  그는 플래툰에 실린 기사에서 그림에 거북선으로 추정되는 배가 등장하는 점 등 그림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정황을 들어 이 그림은 ‘명량 해전도’가 아니라 ‘칠천량 해전도’ 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도깨비 뉴스는 이 그림과 관련한 기사를 이미 두 차례나 올렸지만 보다 정확한 내용을 알려 드리기 위해 플래툰 및 김세랑 기자로부터 기사를 제공 받아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 다음은 플래툰 7월호에 실린 김세랑 기자의 기사입니다 ▼

  제목 :
화제의 임진왜란 그림, 그 정체를 풀어내다!


 
얼마 전 인터넷상에서 일본에 있다는 「조선역해전도」라는 그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임진왜란 시기를 배경으로 조선수군과 일본수군간의 해전을 그린 이 그림은 한때 '왜의 종군화가가 그린 명량해전도'로 알려졌었고, 그 치밀한 묘사로 인해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비교의 대상이 되며 화제가 되었다.

  특히 이 그림이 그간 우리가 알고 있거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되던 우리 군사들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막강한 장비와 전투력을 가진 병사들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는데, 바로 그 점이 내게는 오히려 이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본지를 구독하시는 분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본 기자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전통 군사 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거북 배와 판옥선, 이순신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는데, 이 그림은 그동안 공부해온 본 기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장면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이 그림이 화제가 될 당시에는 그 화질이 선명치 않고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던 바, 본 기자는 일단 이 그림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고, 이 그림의 소재에 관해 인터넷에서 얻은 단편적인 기초정보는 이 그림이 일본의 아오키 화랑이라는 곳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과 과거 KBS의 역사스페셜 코너에 잠시 등장한 바 있다는 것,

이 한 가지 단서를 가지고 한국과 일본에 이 그림의 존재를 수소문한지 이틀째, 마침내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는 일본의 아오키 화랑(일본에는 같은 이름의 화랑이 무지 많았다)과 전화통화가 되어 그림의 존재를 확인했고,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지난 5월 14일에 마침내 이 그림을 직접 만지고 볼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 하자마자 도쿄 시내로 도착해 미리 적어놓은 주소를 가지고 찾아간 아오키 갤러리는 도쿄 시내 중에서도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는 긴자 거리 한가운데 있었다. 건물의 2층에 위치한 갤러리는 언뜻 이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현대적인 그림 위주로 채워져 있었고, 주인이신 아오키씨는 백발이 성성한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이셨다. 기자를 보자마자 먼 곳에서 이 그림 한 점을 보기위해 찾아온 것에 대해 고맙다며 손을 잡아끈다. 정작 그림은 이 갤러리에 있지 않다며 버스에 올라 도쿄베이를 지나 한 20분쯤 달렸을까? 마침내 한 빌딩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전체가 창고로 된 이 건물의 작은 방 하나가 바로 조선전역해전도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종이와 비단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보관용 상자를 열자 두 폭으로 접혀진 병풍형의 그림이 나온다. 펼쳐진 그림은 약 100호 정도의 대작으로 미술을 전공한 필자가 보기에도 상당한 수작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전통적인 일본화의 양식을 따르면서 섬세한 필치와 특유의 세밀한 묘사, 박진감 넘치는 구도 등이 아마추어의 그림이나 고졸한 옛 그림과는 달랐으며,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 그림이 겪었던 여정에 비하면 보존상태가 아주 뛰어나서 막 그려 낸듯한 생생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애초 인터넷에서는 이 그림의 진위에 관한 논란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에 떠  돌아다니는 그림은 크기가 아주 작고 화질이 선명하지 못해서 대단히 오래된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고, 반면 옛 그림 치고는 그 묘사나 기법이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 그림은 1940년 전후로 그려진 것으로 화가는 지금은 작고한 [오오타 텐요오- 太田天洋: 1884-1946]라는 유명한 일본의 역사 화가이다.
  그는 도쿄출신의 일본 전통화가로,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구 문전 추천작가'로 활약했으며 주로 역사적인 소재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려 수많은 박물관에 소장되는 등, 일본에서는 그 분야의 대가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이 그림이 이토록 정밀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자신이 뛰어난 역사전문가이었던 데다가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본 측의 조선수군과 조선 선박에 대한 연구 자료를 토대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한말까지도 조선에는 전선이 일부 방치되어 남아있었는데, 이를 최초로 학술적으로 연구한 것은 일본인들이었고, 그 자료는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을 뿐만 아니라 아직 제대로 공개되고 있지 않은 자료가 많다.

  과거 일본 제국 해군에는 이순신 장군을 거의 신격화해서 숭배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그 정점에는 일본 해군 최고의 영웅인 도고 제독이 있다.(올해가 그의 기념비적인 러ㆍ일 해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도고 제독은 생전에 자신은 이순신 제독의 발가락 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공언했고, 러시아와의 전투를 앞두고는 이순신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전투에 들어가서는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과 유사한 '정자 진법'을 사용해 대승을 거둔 장본인이다. 그런 도고 제독 휘하의 일본 제국 해군은 이순신의 연구와 조선수군 및 그 전술에 관한 정보수집에 열을 올린 것은 당연하고, 실제로 이 그림 역시 그런 연구와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나 이 그림이 2차 대전 중 일본 해군성의 의뢰로 그려져 일본 해군의 '수교사(해군 장교 집합소)'에 걸려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무게를 짐작하고 남는다.

  당시 일본군의 모든 물품과 장비들은 미군에 의해 대부분 압수되거나 전리품으로 뺏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그림은 당시 ‘야마모토 켄베에’ 대장의 초상화와 함께 도쿄의 모처로 반출되어 미군에 접수되는 것을 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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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정확한 이름은 [조선전역해전도: 朝鮮戰役海戰圖]이며, 일본 측은 구루지마 해적(수군), 아군은 경상우도 수군이다. 


  애초 이 그림을 처음 인터넷 상에서 접했을 때와 일본에서 처음으로 그림을 봤을 때에는 '통제영 거북배'가 등장한다는 점과 전체적인 화면에서 아군의 군세가 너무도 강하고 당당해 보여서 전라좌수군, 특히 이순신 장군 좌선과의 전투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했는데, 우리 수군 배마다 걸려있는 기치에 정확히 '경상우도수군'이라는 명문이 쓰여 있어, 이 그림이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에게 당하는 구루지마 수군’이 아니라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군의 판옥선을 구루지마 수군이 접수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 그림은 애초 인터넷상에서 알려진 것처럼 명량해전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원균이 거북선을 포함한 조선수군 전체를 지휘했던 시기의 유일한 전투인 ‘칠천량 패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은 당시의 일을 있는 그대로 그린 '종군 기록화'로, 일본에서 아무생각 없이 상상력만으로 그려진 '만화 같은 그림'도 아니며, 당대의 뛰어난 역사화가가 임진왜란 기간 중 유일하게 일본 수군이 기를 폈던 칠천량 해전을 배경으로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역사적 지식을 총동원해 재해석한 그림'이라고 하겠다.
  그림이 그려진 의도 자체가 일본해군의 무용을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선전화'라는 점을 굳이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그림은 상당한 고증을 거쳐 그려진 그림이고, 반면 일본에서 그려진 만큼 아군의 묘사에 있어서는 다소 고증이 불분명한 상태로 그려진 부분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은 부분적인 장면의 고증정도를 떠나 대단히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는 분명하고, 그동안 우리 쪽의 민족 기록화 등에서 두리뭉실 넘어간 부분들까지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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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의 소장자인 일본인 아오키씨. 그는 도쿄의 긴자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아오키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 작품을 소장한 이후로 작품의 배경이 된 임진왜란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순신이란 위대한 인물을 알게 되었다고. 아울러 그는 “일본에서는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일본의 해군영웅인 도고 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대단히 숭배했었다”라며 이 작품의 배경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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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급 지휘관으로 보이는 장수. 지휘봉을 들고 전투를 지시하고 있다.
  붉은색 1)두정갑 2)환도와 활을 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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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라도 쉽게 화살을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는 3)'수노기'를 사용하는 병사들. 위쪽에 달린 손잡이를 상하로 움직이면 화살이 발사되는 무기로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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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도를 능숙하게 다루는 환도수. 두정갑을 입고 머리에는 조선시대의 군모인 4)전립을 쓰고 있다. 전립

  에 장식이 없고 평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장수가 아닌 병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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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도리깨인 5)'편곤'을 사용하는 병사.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편곤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타격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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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면장패'를 앞세우고 화살과 화전 등을 발사하는 조선군의 '사후선'.
  이 배는 배의 선미 쪽으로 한국배의 전통적인 키의 모습이 잘 보인다.
  아울러 이 병사들은 일반적인 조선의 각궁과 화전, 수노기가 총동원 되어 당시 조선군의 화살 무기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들이 쏜 화살의 종류도 각기 다른 것이 묘사되어 있다.(날아가는 화살과 적선에 박힌 화살을 보면 폭발하는 '화전'과 일반 활에서 발사되는 '장전', 짧은 화살인 ‘애기살’이 함께 보인다. 애기살은 조선시대 궁시류 중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는 ‘편전’의 화살이자 수노기의 화살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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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수들 사이에서 '화전'을 활에 걸어 쏘는 병사.
  일부 인터넷 상에서는 이것을 6)'신기전'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기전 화살이 아니라 화약통이 달린 '화전'이다.
  방패판 뒤로 등나무를 엮어 만든 둥근 방패인 등패가 보인다.
  앞에 닻줄을 감아올리는 물레가 자리하고 있다.
  갑옷의 색상이 아주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당시 갑옷은 전통적인 오방색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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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과 원방패를 사용하는 장수.
  이 그림에서는 직도인 검과 환도가 뒤섞여 사용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이 오히려 당시 실제 상황에 가깝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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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려포 통, 또는 산화포 통으로 보이는 투석 식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조선수군.
  이 그림에서는 이 장면 외에도 포 통이 많이 보이며, 바로 뒤에는 요즘의 수류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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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을 찍어 걸어 올리는 '사조구'와 창을 쓰는 창수들.
  이 그림에서는 흔히 삼지창이라 부르는 '당파'외에도 다양한 창이 등장한다.  
  아울러 이 그림에서는 갑주를 완전히 다 갖추지 않았어도 대부분 장비를 갖춘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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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의 왼쪽 구석에는 통제영 거북배의 모습이 보인다. 전반적으로 전란 당시의 고증에 충실한 것으로, 등판에 장갑이 되어 있지 않은 대신 무수한 창칼이 솟아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선체 아래쪽에는 귀면을 그려 넣은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게다가 이 그림에서는 판옥선에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귀면이 부조의 형태로 조각되어 있고 거북 배에는 좀 더 입체적인 용두가 달려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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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총통 그림은 판옥선에 탑재되어 있는 것인데, 그림에서는 인물들의 활동상에 초점을 맞추느라 정작 총통은 2문 밖에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이 그림의 화포는 왜 그런지 모두 불랑기포가 장착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눈에 띄는 것은 총통을 동차에 고정해 사용한 것으로 묘사하는 한국 측의 통념과는 달리 모두 화포를 지지대에 거치해 사용하고 있다.(고정식 거치대를 사용했을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진 않지만, 모든 화포가 고정식 거치대에서 운용된 것은 아니었다)
  불랑기포는 당시 조선군에 의해 사용되기는 했지만, 전선에 탑재된 총통은 이미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천. 지. 현. 황의 총통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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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배는 당시 일본수군의 주력선이라 할 수 있는 '세키부네'로, 대장급들이 타는 기함이자 판옥선과 비슷한 급인 '아다케' 보다는 작은 배이다.
  그 크기는 판옥선의 2/3에 채 미치질 못해 당시 판옥선이 얼마나 튼튼한 무적의 함선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실제 판옥선중 큰 것은 30미터를 넘었고, 배 자체도 아주 두꺼운 판재를 사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배로 들이 받는 공격을 포함한 일본의 어떤 공격으로도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 없는 무적의 전함이었기에 당시 일본 수군들은 판옥선을 ‘바다의 성채’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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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판옥선의 선수부분의 모습.
  방패 판에 귀면이 그려져 강력한 분위기를 풍긴다.
  눈여겨 볼 것은 포혈이 위쪽 방패판 뿐만 아니라 1층에도 뚫려있는데, 이것 역시 국내에서도 최근 힘을 얻어 가고 있는 학설로, 실제로 화포는 1, 2층 모두에서 운용 가능했을 것이란 것이다.
  사다리를 걸고 배로 오르려고 하는 일본군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조선수군의 모습이 생생하다.
  이 판옥선에는 특이하게 1층과 2층 갑판 사이에 귀면을 부조형태로 달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이와 비슷한 예로는 '수군조련진도'에 나와 있는 통제영좌선이 비슷한 예라고 하겠지만 수군조련진도에 나와 있는 전선들은 귀면이 모두 선체 아래쪽인 이물비우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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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전원이 전사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수군의 사후선.
  이것은 배의 뒤쪽인 고물 쪽으로 조선배의 특징 중 하나인 큼직한 키가 잘 나타나 있다.
두 자루의 낫 같이 생긴 장비가 눈에 띄는데, 이것은 창처럼 길 다란 장대에 거대한 날을 단 것으로 적을 베거나 찍어 올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장병 검’이다. 장병 검은 한번 휘두르면 숱한 적이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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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키부네에는 특이하게 화포 한 문이 장착되어 있는데, 밧줄을 이용해 공중에 매달아 놓은 상태로 운용을 해 위력이 크게 감소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 역시 고증에 충실한 표현으로 당시만 해도 일본은 화포의 적절한 운용개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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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옥선의 지휘부인 판옥누각.
  바로 이 때문에 판옥선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다른 말로는 '장대'라고도 한다.
  장대는 배의 후미부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장대를 전선의 한 가운데 설치해 놓은 것으로 묘사하는 우리 측의 고증과 다른 부분이다.
  실제로 그동안 재현된 판옥선들은 대부분 장대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어 두 대의 돛대를 눕히기 어렵게 되어 있어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본 기자는 개인적으로 장대는 두 대의 돛 사이에 위치하되 마치 요즘의 항공모함의 아일랜드처럼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것은 판옥선의 개념도라 할 수 있는 「각선도본의 판옥선 그림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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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에서 발행된 일본해군 역사서.
  조선전역해전도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전통적인 역사서에 인용된 것만으로 보아도 이 그림이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만 그려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작가인 오오타 텐요오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이미 전통화 부분의 독보적인 대가였기에 일본 해군 측의 다양한 자료를 참조해 그렸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멀티매니아 호비스트에서 발행하는 월간 PLATOON과 월간 NEO에 실린 기사로 사진과 글에 대한 저작권은 [멀티매니아 호비스트 www.e-hobbist.com]와 취재기자 김세랑에게 있습니다.

 

 

 

  ※ 일러두기 ※

 

1) 두정갑(頭釘甲) : 사극에서 가장 많이 소개되는 갑옷. 놋쇠로 된 못을 박아 만든 갑옷. 둥글게 파진 깃에 가슴 정중에서 합임 하는 모형으로 옆과 등솔 둔부 이하가 터져 있다. 겉감은 붉은색 전이고 속은 무명 세 겹을 누볐으며 하늘색 무문공단으로 안을 받쳤다


2) 환도 : 전통 무기의 도검류 중 하나. 환도는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검류 중 대표적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전투에 사용하는 무기였지만, 그 외에도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할 때나 의식에서의 시위용으로도 환도를 사용하였다.

  도(刀)는 외날에 곡선이며 자루가 길고 칼집이 없는 반면에 검(劍)은 양날에 직선이며 자루가 짧고 칼집이 있는 병기를 말한다.


3) 수노기[手弩機] : 전통무기의 궁시류 중 하나. 수노기는 연노(連弩)의 일종으로 조선 후기에 훈련대장 신헌(申櫶)에 의해 제작되어 사용된 쇠뇌이다. 연노에는 방아쇠를 당기는 간단한 동작 하나로 적에게 한꺼번에 계속해서 화살을 퍼부을 수 있는 연발식과 여러 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다발식이 있다. 수노기는 연발식 쇠뇌의 일종이다.


4) 전립(戰笠 : 모자 - 벙거지) : 조선시대의 모자 중에서 깃털달린 모자.

  조선은 신분에 따라 쓰는 모자가 달랐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모자를 사용했다. 전립은 조선시대 무관이 착용하던 모자이다. 주로 군복차림에 사용하였으므로 전립(戰笠). 붉은 색 전(氈)으로 만든 홍전립(紅氈笠) 주전립이나 댓개비로 만든 죽전립(竹戰笠)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깃털은 용맹함을 상징하며 야외에서 활동을 할 때 쓰는 모자에 주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주로 무신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5) 편곤[鞭棍](타격무기) : 전통무기의 타살무기류 중 하나.
편은 농가에서 사용하는 도리깨를 본 따 제작한 무기이고, 곤은 막대기를 병기로 변용시킨 것이다. 이것은 원래 중국 서쪽 오랑캐들의 무기였으나 한(漢)나라가 이것을 수용해서 더욱 발전시켰다.


6) 신기전[神機箭] : 조선시대에 제작된 로켓 화기. 고려시대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 화기는 주화(走火)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1448년(세종 30) 여러 화기의 개량 때 신기전으로 바뀌었다.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에 의하면 대·중·소 신기전과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이 있었는데, 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은 규모는 비슷하나 약통과 발화통의 위치와 구조가 다르다고 했다. 대신기전에는 대신기전 발화통이 부착되어 있으며, 산화신기전은 대신기전 발화통을 사용하지 않고 지화(地火)와 발화(發火)를 묶어 넣어 사용했다. 중신기전도 소발화(小發火)라는 폭발물을 사용한 데 반해 소신기전은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문종 때 화차가 발명된 뒤 화차를 발사틀로 하여 신기전을 발사했다. 사정거리는 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은 1,000m 이상, 중신기전은 150m, 소신기전은 약 100m 정도로 보인다. (출처:전라좌수영 여수)

 

보십시요, 일본 그림입니다. 이순신이 어디있나요? 

경상우도수군이 얼마나 처참하게 왜군들과 싸우는지 경상우도 수군은 배설에서 새로이 다른 장수가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임진란 진주성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의 병력과 장비는 배설이 양성한 곳둘이며 다른 원균이나 김완 이억기같은 장수들의 부하들은 전멸했음에도 배설휘하의 병력만이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병사들을 살리려고 자신에게 사형이 떨어짐을 알고도 왕명에 거부하고 칠천량해전에서 퇴각명령을 내린 결정을 도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단기 필마로 왜군진영을 통과 할정도로 용맹한 장수가 적군이 무서워 도주한다는 논리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그가 주장한대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한 퇴각임이 분명했든 것입니다. 임진란 내내 3대대첩의 밑그림이 배설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배설장군은 경상우도 전함 장작귀선 12척의 건조에 사비를 투입했다는 기록도 있고 나주의 나대용 찾아가서 기술을 가져 설계로 전함을 건조했다는 것이 있습니다.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때 양성한 사병과같은 병력이였었고 전란중에 잔주성과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츙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라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1594년 8월 10일 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 兵使)로 삼을 만합니다.”

 

12월 3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진주(晉州)는 호남과 영남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실로 경상우도의 보장 구실을 하고 새로 진주 목사에 제수된 곽재우도 바로 힘껏 싸우는 장수이니, 배설(裵楔)의 예처럼 조방장(助防將)을 겸해 주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방수(防戍)토록 하며, 또한 본주는 삼가(三嘉)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삼가현의 산성 일도 전처럼 주관하게 하고 그대로 조방장을 겸하여 우도의 군무(軍務)를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선조가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595년 2월 4일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 선전관 조광익(趙光翼)이 새로 남쪽 지방에서 와서 비변사에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배설(裴楔)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 합니다. 배설이 아직까지 부임하지 못했다면 원균(元均)과 선거이(宣居怡)도 다 교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만일 차차로 교대한 뒤에 선거이가 남하한다면 지체될 듯싶습니다. 그러나 선거이로써 대신 거느리게 할 것을 도원수에게 하유하고, 만일 선거이가 미처 내려가기 전에 김응서의 병이 위중하고 대신 거느릴 사람이 없으면 곽재우(郭再祐)가 그대로 잠시 대신 거느릴 만하니, 이 내용을 하서(下書) 중에 아울러 기입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하니, 선조가 따랐다.

 

 

 

일본측 기록을 살펴보면  1854년 부터 이순신을 부각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전에 이순신 기록이 전무하고 반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정부 창립과 맞물려  세키가하라전투에서부터 배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조 일 해상전투 민화나 기록물에 이순신이 아니라 경상우도 수군이 무섭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위에 그림에도 경상우도 수군입니다.  동인조정과 남인들은 계획적으로 권력을 잡기위해 배설을 모함하고 누명을쉬운 것이 분명합니다.

 

 

 

선조는 당시 비적들과 산적들이 곳곳에 들끌자 배설이 여기에 주장이 될까 염려하여 역모 모반죄를 쒸우고 권율의 의견에 동참합니다.  그 만큼 배설의 명망이 높았다는 사실이고 역모모반죄에 있어 그 가족들을 방면 한 것을 보면 역모 모반 가능성있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고 보입니다.

 

 

 

 

어째튼 이순신 같은 영웅 하나쯤 있어야 하는 것은 맞는데 왕조나 독재시대의 사고로 배설장군 폄하는 아니다. 회사에서 싫컷 일해두거나 과수원에서 일해둔 곳에 나타나서 자신이 했다고 보고하고 저새끼 썩은 사과만 땃어 라고 고자질 해서 잘 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입장이고 여차하면 뒷다마 까고 유전무죄 조작질하고 그런 세태이니 누가 뭐라고 하겠어,  원균도 그렇고 이익기장군도 그렇고 당대의 인물들 폄하는 생각해봐야 겠다.  

 

 

 

 

 

 이순신이 노량포로 경상우도함대에 나타나서 원수부에 올린 장계에 얼추 눈에 보이는 배설의 병력이 약 1060명 쯤 된다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이로 볼때 군인이 병력을 이렇게 보고 할 수 있나 할 정도입니다. 이는 축소 보고라 할 수 있고 배설이 도망하고 있다고 보고한다는 점으로 배설의 병력은 최소 2.000~ 2.400명으로 추정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국사책의 240명이라는 것은 조정의 역사 왜곡으로 사실과는 다릅니다.  원균을 역적으로 만들듯이 배설을 역사에서 지워야 동인조정중신들이 세세 손손 누리는 것 때문이 였다고 보여집니다.

 

 

 

난중일기 기록 (이순신이 직접 쓴 기록입니다.)

 

난중일기 기록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

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8월12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이순신장군이 배설의 귀향 소장을  병치료차 허락했다.(전투준비 완료를 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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