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영화 역사왜곡 위험수위 넘어, 일본의 역사왜곡과 무엇이 다른가? 이순신장군은 전쟁 중에 단 한척의 배도 건조하지 못하였지만,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기습공격이 9월 14일이 였는 데(자신이 휴가를 보낸 것을 잊고 찾습니다. )배설장군은 칠천향해전에서 3차에 걸쳐 선봉대장으로 활약한 맹장이십니다. 이순신이 거두어간 13척의 함대는 왜군의 3중 포위망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구해내어 이순신에게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신에 목숨을 건 함대를 바로 인계했으니 찾을 만도 합니다.
조선수군 전체와 명장들 비하 폄하는 않타까운 일입니다.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린 배설장군만 폄하한다면 이해하겠습니다.^^
1, 이순신은 까다로운 장군,
왕명에 따르다 전사한 충성심 자체인 원균 이하 장수들 비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의 부장 나아가 부하들 명나라 연합군 장수들마저 까탈스럽게 부족한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장군이 부하들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데 존경심이 있었다면 대단한 부하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난중일기에도 배설이 병 치료차 9월 2일 귀향했다(난중일기 이순신허락)고 되어 있고 , 명량 해전은 왜군의 ...
2, 의도적인 배설장군폄하 왜곡
배설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을 파멸시키고자 육전을 하자는 간신으로 전쟁중 탈영 도망해서 풍신수길 찾아갈듯 나쁜 놈으로 그렸습니다. 돈벌이에 미쳐 역사왜곡 서슴치 않은 영화제작 대박 대박 터지겠더라구요~
왜군은 배설이 병 치료차 귀향하고 난 이후 곧 바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아래와 같이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칠천량 해전 기습당시 왜선 주력공격선 8척이 배설의 공격으로 침몰 했었기에 배설이 병 치료 차 귀향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였습니다.
3, 칠천량해전 원균의 대패(원균이 배설의 충언을 들었다면 대승할 뻔)
“거듭된 조선군의 패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며 재출동을 명했습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 척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유인책에 넘어갔던 원균이 패전하고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데 불만을 품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裵說)은 다음 해전에서도 패전이 분명하다고 보고 원균에게 여러 차례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 배설은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물목이 좁아서 전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원균은 “이대로 패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달이 밝은 것을 이용하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
이억기와 최호 등이 그 싸움에서 자신의 전함과 더불어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배설만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유일하게 전소시키고 휘하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왕명을 어긴 죄 조정의처분울 기다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비변사의 감시 속에 한산도 수군본영에 이르러 방비를 엄히했다. (조정에서도 배설이 수군을 수습하게 해야 한다는 게 중론 ...이였고 죄를 묻자는 의견 없었음)”(출처:사료)
4, 조선수군이 전멸할 뻔,
조선군 장수들이 해상포위 일본 수군의 공격에 위급하자 가까운 육지로 튀었습니다. 왜군은 조선 수군 전멸 할 순간 이였고 육지에도 왜군이 도주하는 병사들을 살육하기위해 매복되어 있었는데 조선군 장수들이 왜선의 포위망에 밀려 얕은 바다로 밀리다가 배에서 탈출 육지로 상륙한 장수들은 전원 전사했습니다.
배설부대의 휘하장병들은 공격해오는 왜선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포위망을 부수고 수심이 깊은 바다로 진격한 후 퇴각했기에 전원 살아날 수 있었든 것입니다. 수군다운 퇴각이니 적군이 추격하지 못했고. 조선수군은 배설의 군대만 남게 되었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고 서남권 해상으로 왜군의 출진을 가로막은 것 이였습니다.
조정에서도 왕명을 거역하고 수군본영으로 퇴각했음을 비변사(헌병대)도 배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수군 통제를 계속하게 했습니다. 분명히 도망과는 다릅니다. 왜놈들이 도망이라고 하면서 왜 추적해서 괴멸시키면 조선반도가 그냥 수중에 들어오는데 고걸 안한 왜군을 바보 취급하는 것입니다.
5, 배설의 퇴각명령을 도주라고하는 왜군들
배설은 원균에게도 깊은 바다 조수가 빠른(진도 명량 한산도) 곳에서 왜적과 싸워야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다고 여러번 말했고 칠천량은 바다가 얕아 조선수군에게 위험하다고했던 것입니다.(사료)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주력부대 3중포위망을 강타하고 왜선 8척을 전소시키며 퇴각한 유일한 장수가 배설 이였고 그의 부하들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데 비해 다른 장수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튀다가 매복 군에 전원 사망했었습니다.(배설이 이를 구할 수 없었든 것은 수심이 얕아 접근이 불가능)
왜군이 조선군을 군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왜군이 추격을 포기하고 한산도 본영을 침공할 엄두를 못낸 것도 배설의 기민한 용병술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파했었기 때문이 였습니다. 배설이 도주했다면 추격해서 괴멸하고 전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에 추적할 엄두를 못냅니다. 추적 않습니다.
칠천량 패전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사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명을 어겨 체포됐든 이순신이 절도사로 부임했음에 가장 기쁘할 사람이 배설입니다. 배설도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렸기에 비변사 선전관 김기식의 감시를 받고 언제 체포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배설은 경상우수사로 배설이 약간 낳은 서열로 활동햇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는 작전을 가르켜 준 배설정군의 공...이 인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7, 임란500년 지난 시점 작가들이 왜놈의 간첩으로 왜곡했습니다.
이순신은 왕명을 어긴죄로 체포되어 사형 당하러 잡혀간 상태에 배설은 왕명도 어기고 군사들을 퇴각시킨 장수로 전공이나 승진을 바랄 위치에 있지 않았고 다른 장수를 시기할 상황도 아니였습니다.
이순신이 당시 칠천량 해전 경험을 배설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배설이 넘겨준 판옥선으로 (이순신을 혁명가처럼 미화해선 곤란) 조선수군이 원균의 실패인 칠천량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명량 노량 해전을 할 수 있었기에 배설은 전승일등공신이 된 것입니다.
병조판서 경상우수사가 왜놈 첩자 였다는 식으로 흥행도 좋지만 역사적 사실 왜곡이 지나칩니다. 원균을 비롯해 당대 전사 장군들의 애국심이 이순신보다 못했겠으며,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병졸들을 신출귀몰하게 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순신이 배설이 넘겨준 판옥선과 병력인수로 역사적 사실이고 명량해전의 밑그림은 칠천량 해전의 배설장군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배설은 이순신에게 군 지휘권을 넘겨준 후 역할도 없는 수군 서열 2위의 참모 상태에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장수로 전란 통에 이순신에게 병력을 온전히 넘겨준 유일한 장수 였습니다.
8, 지울 수 없는 배설의 흔적
임진란 진주성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의 병력과 장비는 배설이 양성한 곳 이며 다른 원균이나 김완 이억기같은 장수들의 부하들은 전멸했음에도 배설휘하의 병력만이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병사들을 살리려고 자신 죽음을 각오하고 왕명에 거부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퇴각명령을 내린 결정을 왜군도 아닌 조국에서 도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단기 필마로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왜군진영을 통과 할 정도로 용맹한 장수가 적군이 무서워 도주한다는 논리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그가 주장한대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한 퇴각임이 분명했든 것입니다. 임진란 내내 3대 대첩의 밑그림이 배설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선조 배설 경상우수사는 청년 시절 의병장인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합천, 진주, 밀양, 선산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공적비가 세워진 분이십니다. 배설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의 병력 대부분 함대대부분이 배설이 전란 통에 넘겨준 것 이였습니다.
40대 중반 경상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많은 공적을 남기셨고, 조선수군이 전패당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전선 12척을 구해내어 조선 수군을 살려서,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조류를 활용할 계책을 제시해 명량 해전의 승리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명장으로 이순신의 병력대부분이 배설이 모아준 병력입니다. 이순신이 임지에서 모은 병력이 거의 없었고 겨우 판옥선 1대도 명량 해전 끝날 때 합류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량 패전후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키며 군사를 조련하여 이순신에 자신이양성한 병력을 인계하고 억울하게 모함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광해 2년(1610) 선무원종 전승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임진왜란 전란 중에 고스란히 병력을 보전하고 12척의 전함을 이순신에게 넘겨주었고 칠천량 해전 대패의 조선수군전멸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부하들을 온전히 보전하기위해 퇴각 명령을 내린 지략 나아가 왜적의 장단점을 파악한 유일한 군대를 지휘하여 명량해전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명량’이라는 영화(전철홍·김민한 감독 극본)와 소설(김호경)에서는 배설 선조가 이순신의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고,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거제 현령 안위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지요 단 배설장군에 대해선 험담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고 왜적의 주둔지를 부관1명을 거느리고 적진을 통과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으로 적장이 감동받고 놀랄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왜적에 매수되어 조선을 죽이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또 다시 배설 장군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조작 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장군도 험담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가들이 500년 지나 매국노 간첩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12척의 전함과 병력 대부분은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 때 양성한 사병과 같은 병력이였었고 전란 중에 잔주성과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충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랏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주성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 잠궈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사 부임을 가로 막았었습니다. 배설장군의 명망에 조정은 역모를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해서 부하들을 대신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는 용맹 앞에 왕이 직접파견한 전투를 참관한 선전관 김기식은 물론 조정 누구도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칠천량서 함께 싸우든 모든 장수가 전사한 후에도 전투를 하면서 퇴각했습니다. 6.25때 일시적으로 퇴각한 국군을 도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후퇴 즉 퇴각명령입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전사하게 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무리한 진군명령인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 후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다가 이순신에게 군권을 인계했습니다. 도주라고 하는 것은 왜구들의 기록입니다.
어명을 어긴 것은 맞지만 ㅡㅡ준비도 되지 않은채 출진하여 어명을 따르다 전사한 여러 아까운 당대의 아까운 장수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혼자 사형받기위해 병사들을 반역죄에서 해방시키는 퇴각명령을 내린 장수가 왕명을 거부했고 온전히 병사들을 지킨 것입니다.
선조가 의심이 만았고 덕망이 있거나 신망이 있는 장수를 군권에서 제외한 내시들에 둘러사여 과거급제자나 고관들만 중시하는 의심병으로 전쟁은 않일어 난다,는 당파를 중용했고 배설은 진주목사당시부터 전쟁대비를 한 고위장수였습니다.
배설이 진주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판옥선건조에 관계하였고 진주의 젊은이들이 조선수군의 기둥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왜군이 진주성함락을 위해 전력을 솓아 붙고 씨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눈 작전울 가르켜준 배설정군의 공이 안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과거급제 후 의병장으로
선조 배설 경상우수사는 청년 시절 의병장인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합천, 진주, 밀양, 선산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공적비가 세워진 분이십니다. 배설없는 이순신이 있을수 없고 이순신의 병력 대부분 함대대부분이 배설이 전란통에 넘겨준 것이였습니다. 패전속에 온전히 병력을 유지한 유일무이한 장수라는 것만봐도 그의 덕망과 지략을 알 수 있습니다.
40대 중반 경상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많은 공적을 남기셨고, 조선수군이 전패당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전선 12척을 구해내어 조선 수군을 살려서,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조류를 활용할 계책을 제시해 명량해전의 승리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명장으로 이순신의 병력대부분이 배설이 모아준병혁입니다. (병력이 대부분 뿔뿔이 흩어질 전란중)이순신이 임지에서 모은 병력이 거의 없었고 겨우 판옥선 1대도 명량해전 끝날때 합류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거의 모든 병사들이 패전시 흩어지는데 비해 배설의 군사들만 흩어지지 않고 이순신에게 인계되었든 것입니다. (이순신이 32세에 무과급제)
배설장군은 칠천량패전후 한산도 수군본영을지키며 군사를 조련하여 이순신계파에 자신이양성한 병력을 인계하고 억울하게 모함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광해 2년(1610) 선무원종 전승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임진왜란 전란중에 고스란히 병력을 보전하고 12척의 전함을 이순신에게 넘겨주었고 칠펀량해전 대패의 조선수군전멸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부하들을 온전히 보전하기위해 퇴각명령울 내린 지략 나아가 왜적의 장단점을 파악한 유일한 군대를 지휘하여 명량해전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명량’이라는 영화(전철홍·김민한 감독 극본)와 소설(김호경)에서는 배설 선조가 이순신의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고,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거제 현령 안위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지요 단 배설장군에 대해선 험담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고 왜적의 주둔지를 부관1명을 거느리고 적진을 통과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으로 적장이 감동받고 놀랄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왜적에 매수되어 조선을 죽이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또 다시 배설 장군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조작 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장군도 험담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가들이 500년 지나 매국노 간첩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12척의 전함과 병력 대부분은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때 양성한 사병과같은 병력이였었고 전란중에 잔주성과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충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라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 습니다.
8,관사와 성문을 걸어 잠궈 백성들이 길을 막다
진주성이 생긴이후 전백성들이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사 부임을 가로 막았었다. 전란통에 이런 풍경은 배설장군의 명망이 조정은 역모를 두려워했다. 칠천량해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해서 부하들을 대신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는 용맹앞에 조정 누구도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칠천량서 함께 싸우든 모든 장수가 전사한 후에도 전쟁을 마지막까지 하면서 퇴각한 정예부대를 지휘했습니다. 6.25때 일시적으로 퇴각한 한국군을 도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배설은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전사하게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무리한 진군명령인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후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다가 이순신에게 군권을 인계했다. 칠천량해전 대패하고 한산도 서남권을 사수하면서 본영을 지킨 것은 도주와는 거리가 멀다. 어명을 어긴 것은 맞지만 ㅡㅡ준비도 되지 않은채 출진하여 어명을 따르다 전사한 여러 아까운 당대의 아까운 장수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혼자 사형받기위해 병사들을 반역죄에서 해방시키는 퇴각명령을 내린 장수가 왕명을 거부했고 온전히 병사들을 지킨 것이다.
선조가 의심이 만았고 덕망이 있거나 신망이 있는 장수를 군권에서 제외한 의심병에다가 전쟁은 안일어난다는 당파를 중용했고 배설은 진주목사당시부터 전쟁대비를 한 고위장수였다는 점 경상우도사 발령에도 한산도에서 전쟁준비를 한 장수였다는 사실이다. 배설이 진주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판옥선건조에 관계하였고 진주의 젊은이들이 조선수군의 기둥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왜군이 진주성함락을 위해 전력을 솓아붙고 씨도 남기지 않고 전부죽였습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난중 일기를 중심으로 (이순신은 왕에게도 두개의 다른 보고서를 올림)명군에는 100명을 /50명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하고)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병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배설과 동행)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순신은 병력을 모으고자 광양 현감 구덕령,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 군수 김희온 등을 얻고 해질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무능한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바빠 적군에게 큰 도움이 될 군기 창고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들의 실책으로 이순신은 많은 병장기와 장편전 등의 피사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순신은 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보성 등 330km를 돌며 신병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많은 전투용 병기들을 거두어들여 최소한 한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 두어야 할 점은, 이 많은 병참품들을 왜군보다 불과 하루 정도 앞질러 이순신이 먼저 거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모조리 왜병들 손에 넘어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선비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병법에 무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한편, 조선 수군의 패잔선 무리가 이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의 척후선단이 추격해 와 보니, 조선의 패잔선단은 겁에 질려 어란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3도 연합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가엾을 정도였다. 이 때까지 일본군들은 도망치는 12척의 선단을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패잔병들의 첫 승전보,,,
8월 28일 오전 6시, 왜선들은 조선의 패잔선들을 잡기 위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순신 제독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조선 해군의 승선원 태반이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들이었고, 그 중에는 물을 무서워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도 올려줘야 했고, 또 실전을 통하여 전투 경험도 쌓게 해주어야 했는데, 마침 일본 척후선들이 불과 8척만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출처:백과사전)
성종릉과 정종릉은 임진년 가을에 파헤쳐졌다.
두 선왕릉이 파헤쳐진 사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경기도사였다.
경기도사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류성용은 지체없이 명 육군 총병관 이여송의 군막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통곡했다.
류성용은 이어 만월대 정자 위로 올라가 능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마를 찧으며 통곡했다.
임금은 행재소 마당에 쓰러져 통곡했다.
임금은 성종묘와 중종묘가 있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고,
명의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 ...
임금은 울음의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래오래 통곡했다.
방향을 바꿀 때 세번씩 절했다.
임금의 방향이 바뀔 때 마다 중신들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통곡했다.
이마를 땅에 찧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중신들은 통곡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08(개정판 25쇄 2009. 7. 28)
임금은 자주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남쪽 바다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슬피 울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차고 푸른 해거름에 소복을 입은 임금은 동헌 마루에 쓰러져 울었다.
의주까지 호종해서 따라온 중신들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임금은 깊이 울었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사무치게 울었다.
아무도 임금의 울음을 말릴 수 없었다.
강 건너로 지는 해가 마루 위로 도열한 중신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중신들은 임금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서울을 버릴 때 임금은 울었다.
임진강을 건널 때 임금은 중신들을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개성을 버릴 때 울었고 평양에 닿았을 때 울었고 평양을 버릴 때 울었다.
하삼도가 서로 내응해서 속히 창의의 군사를 휘몰고 올라오라는 교지를 써서 호남으로 보내고 나서 임금은 또 깊게 울었다.
피난길 의주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임금은 가마를 세우고 남쪽을 향해 또 길게 울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신을 맞아 임금은 길게 울었다.
신하들도 따라 울었다.
임금은 흐느껴 울었고 중신들도 울었다.
명의 구원병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임금은 강가에까지 마중나가 울었다.
환도해서 임금은 종묘의 폐허에 나가 길고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기진하도록 슬피 울었고 길게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뼈가 녹아 흐르듯이 깊었다.
임금의 언어는 장려했고 곡진했다.
임금의 언어는 임금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임금의 언어와 임금의 울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
그때 나는 임금의 언어와 울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24~231(개정판 25쇄 2009. 7. 28)
어전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머리를 들고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이 글자를 아는가?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이순신을 털끌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데 잡아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승정원 비망기 1597년 3월 13일
이순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418~420(개정판 25쇄 2009. 7. 28)
1598년 11월 19일 공의 나이 쉔넷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10,과도한 왜곡은 이순신을 모독하는 것
사실 위에 이순신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인간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문화이고 예술이다. 해외로 수출되어 조선 놈들 하고 비하되고 이순신만을 맥가이버람보로 미화함은 선조들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자 전공다툼으로 도주한 배설을 찾아 참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권율은 명량해전 이후 체포령을 내렸고 배설을 꼭 잡아 죄값을 치루게 해달라 부탁도 했다. 배설은 도주 후 나주 등지에 머물다가 충청도로 숨어들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전란 때 조용히 있다가 전쟁이 끝나니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배설이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고 걱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즉 변란을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다. 배설의 덕망이 높았고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만, 배설은 명예나 지위에 연연한 사대부 고관들과는 달랐습니다.
임진란 당시 이순신에게 온전히 판옥선 12척과 병력을 넘겨준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도 배설이 넘겨준 병력과 전함12척이 구세주 같은 가치가 있다고 한점입니다.
12, 배설장군에 대한 오해
이순신이 먼저 꼬롬하게 배설의 영리를 잡아다 곤정을 치므로서 배설이 낙향을 결심하고 이순신에게 허락을받고 병치료차 곧바로 고향인 선산으로 귀향했습니다. 선산에 있을 때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란중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전공다툼에 희생되신 것입니다.
왜군 진영을 단기필마로 통과해서 고향으로 가는 행동은 살고자 하는 도망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단기필마로 적장의 막사를 향해 돌진한 후 적군들이 손쓸틈 없이 적진을 빠져나가자 적장이 오히려 그 매력에 감동했다고 하는 멋진 장수였습니다.(일본측사료)왜군은 후일 전술로 흉내를 내어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도망자라는 빠가야로 배설의 흉내를 내는 왜군장수들의 행태를 직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전멸할 때 병사들을 보존하면서 이미 왕명을 거역(부하들을 살리고 자신 죽을 각오) 그럼에도 조정은 배설을 대체할 장수가 없었는데 뛰어난 지략과 덕망이 부하들로부터 신망이 높았습니다.
특히 배설이 진주성을 담당할 때 임지로 부임을 진주백성 남녀노소들이 가로막아 관사와 성문을 열어주지 안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하고(이순신미화에 차용)그런 진주성이 왜군을 막아 처절한 전투를 했다는 것은 역사의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설이 남긴 선정은 진주시민들이 하나로 뭉치게 했다는 점과 이순신에게 인계한 수군이 처절히 싸웠다는 것은 임란당시 배설의 휘하에 충심이 특별한 점이고 덕망이 높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 배설 이였고 그는 목숨에 연연할 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쟁은 전란 중에도 있었습니다.
왕은 왕답지 않게 도망다니고 장수들은 당쟁과 파벌에 줄써기 하고 전란 중에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든 배설장군은 이순신에게 곤장 맞고 죽을 뻔한 부장만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3 문화 예술의 사실존중의무
전쟁은 7년간 진행되고 조선군장수들은 일부이긴 하지만 조선군 패잔병들의 목을 배어 전공을 허위보고하기 예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자신의 병사를 구타해서 사망하면 자살로 허위보고해서 승진하는 장군들과 같습니다.
왜군은 두려워하면서 조선 패잔병이나 난민의 목을 베어 쉽게 전공을 세웠든 당시 세태에 백성들이 배설을 흠모하는 것은 의병장출신으로 백성들과 부하를 아꼈습니다. 이순신도 명량해전에 배설을 찾으며 한탄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 만이 조선의 장수이고 나머지 이순신 부하들과 백성은 사람도 아닌 무저리들이고 이순신이 나라를 지켰으니,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왜구들 역사왜곡을 받아쓰기 수준입니다. 이순신은 죽고 없으니 나라는 일본에 침략은 당연하고 식민지는 당연하다는 논리를 비판없이 대중에게 쇄뇌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판검사 지도층들은 이순신 같은 지도적 위치에 있습니다. 뇌물이나 먹고 성히롱에 미친 상태로 잘못된 판단을 하는 지도자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사실왜곡의 무리한 설정으로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왜곡으로 돈을 버는 것이나 ☆부정부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도자 한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지만 세월호사고의 유병언 회장의 전권비리가 문제되었듯이 우민화는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이순신을 펌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왜곡이 이러하다면 다른 부분의 왜곡도 상당하게 될 것을 좋게 볼수 만 없습니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왕명 거부는 곧 죽음 이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조선수군의 전멸을 막으려 했던 용맹은 알아야합니다. 문화 예술이 사실을 기초로도 얼마든지 흥행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14. 8.15 조각글모음 : 김배영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장군의 임란 활동과 공적
배한동(裵 漢東)*
목차 I. 서론 II. 가계와 생애 III. 임진왜란시의 활동 IV. 정유재란시의 활동 V. 장군대한 모함과 신원 VI. 결론 |
I. 서론
이글은 경상 우수사 신재공 (愼齋公) 배 설(裵楔)(1551 ~1599년) 장군의 임란 전후의 활동과 전투 공적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배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합천, 진주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역임하였고, 임란 시에는 두 차례의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장군은 임란 시 육전과 해전에서 어떠한 활동과 역할을 하였을까. 우선 장군의 공적을 살펴보기 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 임진년(선조 25년) 4월 14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1년 동안 전 국토를 초토화 시킨다. 이에 다급해진 조선은 왕이 의주로 피난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군(援軍)을 간절히 요청 한다. 명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면 자기 나라의 국방이 위태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 한다. 일본은 명의 원군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협상을 요구 하며 왜군을 일단 조선에서 철수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일본은 재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부산포와 울산 일대에 병력을 배치시킨 후 지연전을 펼친다. 동시에 일본은 전투준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전투력을 보강한다. 그 후 일본은 1597년 정유년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보강하여 명과의 협상을 파기한 후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조선에 대한 2차 침략인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감행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 두 번의 전란을 합하여 통상 임진왜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왜적은 공이 살았던 성주 땅까지 점령하여 약탈이 시작되었다. 공은 의병장인 부친인 서암(書巖)을 도와 의병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임란시 해전에서도 배 12척을 구출하여 조선 수군을 살린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그러나 공이 모함에 의해 49 세로 생을 마감함으로서 그의 임란시의 훌륭한 공적까지 묻혀 있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글은 장군의 임란 전후의 행적과 공적을 찾아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기본 목적이 있다.
물론 장군은 사후 11년 되던 1610년(광해2년) 임란 공훈 재 책정 시 원종 1등 공신으로 책록(冊錄)되고, 가선대부 호조판서로 증직되었다. 그후 장군은 후대인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1873년(고종10년)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장군의 억울한 사정은 형식면에서는 서원을 통해 풀리고 해소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군의 임란시의 거룩한 활동과 애국충절은 오해되기도 하고 무책임하게 기술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 동안 잘못 기술되거나, 그동안 오도된 장군에 관련된 임란 활동을 보다 바르고 정확하게 기술하는데 집필 목적이 있다.
이글은 한편으로는 임란이 끝난 지 벌써 7주갑이 되는 시점에서 그동안 묻혀있는 장군에 관한 임란활동 관련 사료를 새롭게 점검하고 발굴하여 장군의 행적을 보완하려고 노력하였다. 장군의 묻혀진 활동과 행적은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징비록, 현무공 실기 등을 철저히 점검하고 고증할 것이며, 오늘의 인터넷의 새로운 자료까지 검색하여 보완할 것이며 그동안 잊혀진 업적과 공적은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라도 보완하려는 것이다. 공의 이같은 임란시의 활동과 공적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뿐 아니라 충훈록(忠訓錄), 동국사(東國史), 경산지(京山誌), 성산지(星山誌), 한려승남 등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글은 2장에서 장군의 가계와 49년의 생애를 조명해보고, 제 3장에서는 그의 임란 초기의 의병 전투 활동과 산성 수축 등 주요 업적을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상론하려고 한다. 4장에서는 정유재란 시 경상우수사로서 장군의 당시 활동을 추적하여 그 공적을 논의하고 보완하기로 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장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왜군의 기습 포위 공격을 받아 작전상 후퇴하면서도 조선 수군을 살린 과정을 철저히 분석하려고 한다. 5장에서는 장군이 임란 전후의 이 같은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패전의 책임과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처벌된 배경과 신원에 의해 장군의 공직이 추증되는 결과 등을 상론하고자 한다. 6장은 결론의 장으로 장군의 임란시의 행적을 통해 학덕과 인품을 평가하기로 한다.
II. 가계와 공직
배설 장군의 활동과 행적을 살펴보기에 앞서 가계와 생애를 조명해보기로 한다. 나아가 장군이 경상우군 절도사로 임명되기 전의 여러 공직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장군의 임란 전후의 활동이 주로 공직생활과 함께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1. 가계와 생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장군은 부친 서암(書巖公) 배덕문(裵德文,贈吏曹判書)선생의 장남으로 태어 나셨다. 자는 중한(仲閑), 호는 신재愼齋), 신와(愼窩), 서강(西岡)이며 성산 배씨(星山裵氏) 진사 공파의 17세(世)이다.
공의 선대는 신라의 금산가리부장 지타(祗沱)공을 득시조(得始祖)라고 하고, 고려 개국 공신 무열공(武烈公) 현경 (玄慶)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고려 3중 벽상공신 휘 위준(位俊)을 1세 시조로 기세(起世)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8백여 성상 30여 세대를 계대승손(繼代承孫)하고 있다. 5세인 흥안(興安) 부원군(仁慶)을 역임한 인경(仁慶)을 성산(星山) 배씨 득관조(得貫祖)로 모시고 있다.
현손 중 8세 진손(晋孫)은 공조판서이며, 그의 삼남 현(俔)은 진사공파 파조(派祖)이시다. 11세 치(絺)는 수군총병마사이고 청백리로 저명하였으며, 이 분의 아들 (萬戶) 윤후(允厚)는 장군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장군의 증조 맹성(孟成)은 부위(副尉)이시며, 조부 주(綢)는 참봉이시고, 부친은 의병장인 서암(書巖) 배덕문(裵德文)선생 이시다. 공의 부친 서암 공은 한성 서윤(漢城庶尹)을 거쳐 여러 고을의 수장을 두루 거치고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시다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공적을 세워 선무원종 이등 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공은 1551년(명종 6) 부친 서암(書巖) 공과 모친 선산 백(善山白氏)씨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4남 1녀 중 장남이며 현 성주군 금수면 광대원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어려서 부터 용력이 출중하였으며, 국량이 과인(過人)이라고 칭송받았다. 어려서 부친 서암 공이 울산 군수로 부임할 때 장군도 함께 갔었는데 수군좌도 절도사 장필무(張弼武)가 공을 보고, 그 그릇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여 글보다 무예를 우선으로 힘쓸 것을 권고 하였다.
공은 1583년(선조 16) 31세에 무과(武科) 별시에 급제하여 1594년 합천 군수직을 시작으로 동래부사, 부산 첨사, 진주 목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밀양 부사, 선산부사직을 두루 수행한다. 공은 1597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직을 수행하면서 부산포 해전, 다대포 해전,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이어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은 칠흑같이 어두운 칠천량 해전의 위기상황에서도 적의 3중 포위 하에서도 배 12척을 수습하여 조선 수군을 살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승리의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장군은 여러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오랜 해상 생활에서 얻은 수질의 악화로 병가를 신청하게 된다.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었듯이, 이충무공(李舜臣)은 수질의 악화로 신청한 장군의 병가를 허가하여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군의 병세가 악화되어 진영으로 귀환치 않자 정인홍(鄭仁弘)등이 조정에 무고하여 1599(선조32. 기해년, 실록 3월 6일자) 음력 10월 16일 화(禍)를 입고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정유재란의 맹장인 장군은 49세로 생을 마감(선조 32, 1599)하고 고향 땅 주현(酒峴)의 유좌(酉座)의 둔턱에 수장(修葬)되었다. 현재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 수름재에 묘소가 있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그의 신도비(神道碑)는 근년에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숭조대(崇祖臺)에 3조 육현과 함께 건립되어 있다. 이곳은 찾은 후손들은 오늘도 공의 찬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여기에서 장군의 후손들에 관하여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장군의 배위 야성 송씨(冶城宋氏)는 충순위(忠順衛) 원(源)의 따님이며 후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장군은 부인 송씨와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군은 부인 송씨가 돌아가자 병조판서 위(瑋)의 따님인 창원 황씨(昌原黃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2 남을 두었다.
장남인 등암(藤庵)은 장군께서 모함에 의해 비명에 돌아가신 후 그 원한을 학문에만 전념하여 승화하였다. 등암은 평생을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의 제자로서 절제 있는 선비의 법도를 지키면서 생활하여 향내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는 여러 번 벼슬에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로서 생을 마쳤으며 돌아가신 후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장군의 차남 괘재(愧齋) 상호(尙虎)는 인조 2년(1624) 갑자 식년시(甲子式年試)에서 진사( 進士) 2위로 합격하였으나 병으로 요절하였으며 후일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이밖에도 장군의 슬하에는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된 3남 상조(尙藻)와 명천 현령(明川縣令)이 된 4남 상보(尙黼)가 있다.
장군의 장남 상룡(尙龍)이 사재 감정 신인서(愼仁恕)의 따님과 결혼하여 아들 세유(世維)와 승정원 좌승지 세면(世綿) 형제를 두었다. 차남 상호(尙虎)의 아들로는 세안(世安)과 세위(世緯)가 있고, 상조(尙藻)의 아들은 세첨(世僉), 상보(尙黼)의 아들은 세의(世儀)가 있다.
장군의 고손으로는 세유(世維)의 아들 영휘(永徽)와 한휘(翰徽), 경휘(慶徽)가 있으며, 세면(世綿)의 아들인 영휘(永徽)와 중휘(重徽), 석휘(碩徽: 호 謙翁), 용휘(用徽) 및 도휘(度徽) 등이 있다. 이중 석휘(碩徽)는 후일 고조인 배설 장군의 시조를 2편 찾아『가범』에 기록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다.
2. 주요 공직
여기에서는 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 우도수군 절도사로서 공직 활동을 하기까지의 주요 공직 활동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공은 1583년(선조 16) 31세에 무과(武科) 별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공의 초기 공직은 변방으로 기용되었는데, 부임지 마다 모두 치적과 명성을 얻었다.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공은 주부(主簿)로 승진되어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자, 공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 하였다. 그 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공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는데, 이 때 공이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그 후 공은 이러한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왜적이 부산포 일대에서 소란을 피우자 공은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잠시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를)로 발령 받는다. 부산첨사 시에는 왜군의 국경왕래를 차단하였으며, 동래부사 시에는 관할구역을 옛날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치적을 남겼다.
공은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 자문을 보내는 일과 몇 가지 인사 문제를 논하다
“부하(部下)에 발탁할 만 한 자는 없는가?”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兵使)로 삼을 만합니다.”하였다.
공은 곧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는다. 장군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군정을 바로 세워 군의 사기를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완평 이원익(李元翼) 선생이 공을 일컬어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높이 칭송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국의 폐단에 관한 충직한 공의 건의문이 도원수 권율에 의해 문제가 되어 밀양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다시 선산부사로 전출된다.
선산 부사 부임 후 공은 심혈을 기울여 1596년까지 2년에 걸쳐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수축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9정 7택(九井七澤)을 파서 명실공히 체찰사의 군영으로서 손색이 없게 하였다. 금오산 폭포수 위 큰 바위에 선산부사 배설착금오산성구정칠택 (宣祖善山府使裵楔穿金烏山城九井七澤)이라는 큰 글씨는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산성 수축에 관련 상황은 뒤에서 상세히 기술하고자 한다.
공은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게 된다. 부임과 동시에 공은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7월 초 다대포와 부산포 해전에 참여한다. 그 후 칠천량 전투에도 참여하여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일부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전투에서 확보한 배 12척을 인계받았기 때문이다.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오랜 해전의 피로와 선상 생활로 질병이 악화되자 이순신 장군에게 휴가를 신청하고 육지에서 병을 치료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장군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수군 영으로 복귀하는 것이 늦어지자 정인홍 등의 모함에 의해 장군은 체포되었다. 장군은 충청도 일대에서 역모를 꾸민다는 모반죄로 몰려 1599년(선조 32) 10월 14일 향년 49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장군은 이처럼 의병 전투를 통한 혁혁한 전공이 있고, 금오산성 구축을 통해 북상하는 왜적을 막고, 칠천량 해전에서의 12척의 전함을 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비명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어찌 슬프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있으랴.
그러나 공에 대한 모함은 1610년(광해 2년) 신원에 의해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책록되고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다시 유림들의 상소로 고종시에는 2차 신원이 이루어졌다. 공의 임란전후의 혁혁한 활동과 보국충정은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임란 시 공의 주요 공직과 주요 활동과 업적을 정리하여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표1. 배설 장군의 공직활동
년대 |
주요 직책 |
주요활동 |
비고 |
1583선조 16) |
무과 별시 급제 |
변방 방어 활동 주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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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선조25) |
주부(主簿)승진, 가장(假將)으로 활동 |
방어사 조경과 남정, 황간, 추풍령 전투 참전후 향병 규합, 부상진 전투에서 흑전구침(黑甸句沈)제거, 개산 진 전투 평의지 (平義智)격퇴 |
금부채1개, 칼2자루 노획 |
1594(선조 27) |
합천군수, 동래부사, 부산 첨사, 진주 목사 |
의병활동 지원, 해안지역 치안 유지, 주민들에 대한 선정 |
진주거사비 |
1595(선조 28) |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 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 밀양부사 |
좌수영 군기 확립, 군사 사기 함양, 조정에 시국 건의문 상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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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선조 29) |
선사 부사겸 금오산 별장 |
금오 산성 수축, 9정 7택, 혜창 건립, 의병 활동 지원 |
금오산성 사적비 참조 |
1597(선조 30) |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 |
부산포 왜선 8척 전소, 다대포 전투 참전, 칠천포 전투에서 전선 12척 구함, 청야 작전 성공, 거북선 건조 |
수질 악화로 요양 신청 |
1599(선조 31) |
병가에 의한 휴양 중 |
모함에 의한 수배와 처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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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광해 2) |
1차 신원 |
선무 원종1등 공신 책록, 가선대부호조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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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고종10) |
2차 신원 (유림) |
자헌대부 병조판서 증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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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장군의 임진왜란시의 활동
신재 배설공은 1583년(선조16) 무과(武科) 별시에서 호방(虎榜)에 급제하여 변방에서 공직을 시작하였다. 그는 의병장인 부친을 도와 의병 전투에서 지략과 용맹을 발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앞서 본바와 같이 공이 의병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공적을 인정받아 횡재소로 부터 합천군수직을 제수 받았다. 공은 합천 군수를 시작으로 부산 첨사, 동래 부사, 진주 목사, 선산 부사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두루 거쳐 두 차례나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다. 공의 임란 시 활동 중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기전의 활동을 중심으로 공적을 몇 단락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왜적의 북진을 막은 용감한 의병 활동
공은 1583년(선조16) 무과에 급제한 후 주부(主簿)로 승진되었다.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정(南征)에 나섰다. 북상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황간, 추풍령 등지의 격전에서 관군이 패하자, 공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끝까지 대항하여 기이한 전공을 많이 세웠다.
임진란이 나던 그해 초유사(超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공의 전과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임시 장수인 가장(假將)으로 삼아 적을 치게 하였다. 공은 당시 의병장 김면(金沔)에 요청에 의해 부상현(扶桑鎭))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592년 공은 용맹스럽게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였다. 다시 무계(茂溪)에서도 동생 건(楗),과 함께 왜적을 격퇴시키는 공적을 쌓았다.
이처럼 공은 일찍 부터 의병 대장인 부친과 동생 건(楗), 즙(楫)과 함께 여러 의병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주위로 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은 그 공로가 인정되어 임란 시 임금이 임시로 머문 행재소(行在所)에서 1594년 합천 군수 직을 제수받게 된다. 이처럼 공은 공직 초반부터 왜적의 부상을 막는 의병활동을 지원함으로서 많은 공적을 세운 것이다. 특히 부자가 함께한 의병 전투에서 보인 그의 투혼은 임란 사에서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할 가치가 있으며 공의 뛰어난 전술과 용맹은 후일 두 차례나 경상도 수군절도사가 될 자질을 보여주었다. 공은 직접 협동전투를 요청한 여남현 전투에서 동생 건(楗)공을 잃었다. 동생의 전사 소식을 들은 공은 보국충정의 일념으로 더욱 왜적 소탕에 앞장서기를 맹세하였다.
2. 경상우수사의 부임을 가로 막은 진주 주민들
공은 1594년(선조27) 가을 진주 목사로 전근하여 더욱 임무에 충실하였다. 공은 정사를 바르게 펼치고 주민들에게 덕을 베풀어 지역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의 상황은 왜적이 경상좌우도를 점령할 정도로 급박하였다. 공은 진주 목사직을 수행 중 1595년(선조28)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을 받게 된다. 공은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이 다대포 해전의 참패로 탄핵당해 충청절도사로 전임 후 갑자기 경상좌수영을 이어 받게 된 것이다.
공이 수사 발령을 받아 임지로 향할 때 진주 지역민들은 재임 중 베푼 공의 선정을 아쉬워하면서 그의 부임길을 가로 막았다. 공의 부임이 늦어져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이 선조실록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에는 수사 교체에 관한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의 비변사에 보고한 내용이 이를 잘 입증한다.
“진주(晉州)의 백성들이 배설(裴楔)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애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
뒤이어 윤선각이 아뢰는 내용도 실록에는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선전관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또한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연이어 실록에는 배설의 부임을 위한 체찰사 파견을 왕에게 건의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배설(裴楔)이 어찌 백성들에게 만류당하여 부임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하자, 이헌국은 아뢰기를, “도원수는 대궐 밖을 전제해야 하는데 임기응변하는 일을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매양 품명(稟命)하는 것으로 규칙을 삼으니, 남쪽 지방의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찰사를 반드시 내려 보내서 진압하게 하고 모든 일도 재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공은 이처럼 진주 목사로 재임 중 짧은 기간이지만 심혈을 기울여 주민들을 보살피고 선정을 베풀어, 온 고을이 내내 평안케 하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멸사봉공의 직무수행를 수행한 공의 치적을 평가할 수 있는 사료이다. 후일 진주 지역민들은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의 업적을 오래도록 기렸다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공은 경상 좌수사로 부임 후 군정을 바로 잡고 창고를 헐어 군병에게 급식하고 함선과 병기를 수리하며 전투에 대비하고, 수군영의 깃발을 교체하여 장졸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완평 이원익(李元翼)선생은 장군을 ‘나라의 간성(干城)’이라고 높이 칭찬 하였다. 공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관할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당시 시국의 폐단을 들어 상소한 것이 도원수 권율의 눈에 거슬려 밀양 부사로 좌천하게 된다.
3. 도체찰사 본영이 되게 한 금오산성 수축(修築)
서기 1595년 (선조28) 당시 영의정 이원익은 밀양부사였던 공을 선산부사로 전보하였다. 당시 남방과 북방의 위급한 형세에 대한 비변사의 대책 논의에서도 당시 금오 산성의 수축 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음을 선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 공이 선산부사로 발탁되고 금오산성 수축의 대장으로 발탁된 배경에는 동강(東岡) 김우옹의 추천이 있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이조판서 김우옹이 시무를 논하면서, ‘만약에 별도로 대장을 두어 융무(戎務)를 총괄하게 한다면, 곽재우, 박진, 배설(裵楔)같은 사람이 적임자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공은 밀양부사에서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전임하여 금오산별장(金烏山別將)직 까지 겸직하여 중요한 방어진지인 금오산성 산성 수축을 서두르게 되었다.
또한 선조실록에는 유성룡이 고향에서 노모를 만나고 돌아와 영남의 정세를 묻자, 금오산성은 배설(裵楔)공이 성을 수축하고 있다는 보고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유성룡이 노모를 만나고 돌아오자 영남의 정세를 묻고 여러 가지 정사를 논의하다
“체찰사가 성주(星州)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던가?”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체찰사의 명령으로 공산 산성(公山山城)을 수축하니 영남 사람들이 모두 공산 산성에 들어가 계획을 펴며, 근일에는 모두 ‘천생 산성(天生山城)을 수축하면 거기에 들어가 웅거할 만하다.’고 하므로 배설(裵楔)로 하여금 이 성(금오산성)을 수축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개 중국 장수들이 늘 ‘이 성을 수축함이 옳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금오산성의 수축과 수성에 관한 임금의 질문과 도체찰사 이원익의 답변과정에서도 장군의 역할은 실록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도체찰사는 왜적의 방비책·기인·방납 등을 책임진 사람이다.
선조께서 “성주 산성(星州山城)은 수축(修築)하여 지키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수축했어도 성 모양이 좋지 않고 ..... 선산(善山)의 금오 산성(金烏山城)은 선산의 수령(守令)인 배설(裵楔)을 장수로 정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은 선산 부사직을 수행하면서 1595년 금오 산성(金烏山城) 중수를 시작하여 1596년에 걸쳐 공사를 완공하였다. 공은 금오산성의 진지를 증축하였을 뿐 아니라 성내에 구정칠택(九井七澤)을 파서 안정적인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곡식과 무기를 보관하는 혜창(惠倉)까지 설치하였다. 이처럼 공은 허물어진 산성을 증축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전략본영이 되게 하였다. 이는 왜군의 북진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진 2. 금오산성과 금오산성 사적비
그 후 금오산성은 조선시대에도 몇 차례 개축되어 오늘날도 산성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공의 이러한 금오산성의 공적을 여대노(呂大老)공은 ‘평일에 공을 간성의 재주 같다고 보았더니 금오산위에 또 하나의 장성(長城)을 쌓아 2중의 요쇄를 구축하였으니, 어찌 진백이( 奏百二)와 같을 뿐인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대노공은 그의 공적을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청풍이 갑옷에 스며들어 심중(心中)의 무지개는
반공(半空)에 가로 질렀다”고 극찬하였다.
이 처럼 공이 수축한 금오산성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전략 본영이 되어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 시에는 왜군의 북진을 막는데 크게 기여하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고 경상도의 군사 본영으로서 역할을 하는데 일조하였다. .
오늘날도 금오산 폭포수 위 도성 굴로 오르는 오른쪽 길옆 바위에는 금동병신(金洞丙申(1595년) 선산부사 배설(善山府使 裵楔)축금오성북공사(竺金烏城北共士) 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금오산성의 기념각에도 선조 병신년 선산부사 배설천금오산성구정칠택<宣祖善山府使裵楔 穿金烏山城九井七澤>이라는 글씨기 현판에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금오산성 사적비는 1991년 공의 12대 손 배기훈(裵基薰)의 후원으로 구미시장 양종득(梁鍾得)이 선산 부사 배설 장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이 비의 글은 김규련이 글을 짓고(撰)하고, 금인석이 글씨를 썼다.(書). 오늘도 1970년 6월 우리나라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금오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산성을 둘러보고, 공의 당시의 공적을 찬탄하고 있다.
사진 3. 금오산 폭포위의 큰 글씨 (1596)
사진 4. 금오산상 사적비 정면 ( 1991년)
(소재지 :경북 구미시 금오산 도립공원 내(內)
IV. 정유재란시의 활동
정유재란은 일본이 1597년 전열을 재정비하여 선단 600여척과 14만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부산포를 침범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3도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은 파직되고 1597년 2월26일 한산도 본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의 재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조정은 원균(元均)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배설 장군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한다. 공이 과거 부산 첨사와 동래부사의 공직경험이 있어 부산포와 다대포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장에서는 장군이 1957년 7월 정유년 부산포 해전을 시작으로 다대포 해전, 칠천량 해전을 거쳐 한산도 본영으로 귀환하기까지의 활동 상황과 공적을 기술하고자 한다. 당시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이 수군통제사 원균 ,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병사 최호
(崔湖)와 함께 출전했던 당시의 출전 상황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4. 정유재란 시 공의 출전 지도
1. 부산포 전투와 왜선 8척 전소
부산포해전은 당시 조정과 도원수 권율 장군의 성화에 못 이겨 원균이 무리하게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한 불가피 전투였다. 당시 삼도 수군통제사 원균 장군은 한산도에서 1차 출정하기 전 왜적이 진주한 안골포부터 육지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장계(狀啓)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 조정과 권율과 군사 지휘 계통은 현지 사정도 모르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고 참전을 독촉하였다. 당시 도원수 권율은 수군통제사 원균의 장계의 부당함과 조정의 지시를 어긴 죄를 들어 원균을 형틀에 묶고 곤장 50대를 때린 사건이 있었다.
이에 수군통제사인 원균은 감정이 몹시 상하지만 무모한 전투임을 알면서도 참전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원균 장군은 1597년 6월 18일 조선 수군을 한산도 본영에서 부산포 앞바다로 출범하도록 명령한다. 그는 배설 경상우수사도 수백 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배설 장군은 부산포 해전의 선봉장으로서 휘하 장병들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부산포와 다대포의 왜적을 격파할 것을 하늘과 조선 조정에 맹서 하였다.
1597년 6월 26일 선조실록에는 조선 수군을 4개부대로 편성하여 왜적에 대항하여 해전에 임하도록 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소개되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부대로 나누되 배설(裵楔)은 경상우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李億祺)는 전라우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며, 최호(崔湖)는 충청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고, 원균(元均)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일개 부대를 만듦으로써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1597년(정유년) 7월7일 원균 장군과 경상우수사인 장군은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나 칠천도, 영등포, 가덕도를 거쳐 다대포(多大浦) 앞 바다에 이른다. 당시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선 600여 척은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선봉장인 공은 왜선 8척이 다대포 앞 바다에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놓치지 않고 용감히 선제공격을 단행하였다. 왜군들은 조선 함대가 갑자기 공격해 오자 전선을 버리고 산으로 일시적으로 퇴각하였다. 공은 이 전투에서 왜선 8척을 모조리 소각시키고 군량미까지 많이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아군은 초기에는 선전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왜군의 위장 전술과 기만전술에 말려 패하고 만다. 결국 부산포 해전에서는 악천후까지 겹쳐 패한 후 원균, 배설, 이억기, 최호 장군은 남은 장병들을 거느리고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복귀 하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수군은 수백 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미 200석, 전선 13척을 잃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원균은 다시 2차 부산포 해전을 결심하게 된다. 출전에 앞선 작전회의에서 배설 장군은 ‘다천(茶川)은 수심이 얕아 싸움에 불리하고 싸우면 패할 확률이 크다’고 건의 하였으나 원수(元帥) 원균은 이를 묵살하고 밤중에 무리한 진군 령을 내린다. 그 결과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 전투는 또다시 패배로 이어졌다. 이에 원균장군은 급히 함대를 수습하여 아군의 진지가 있는 칠전도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왜적의 매복 작전에 걸려 20척의 전선이 파괴 되고 400여명의 수군이 전사 하였다. 이 전투에서도 조선 수군은 제대로 왜군과 전투도 하지 못하고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어 전투 손실을 초래하여 또 다시 수군통제사 원균의 명예는 여지없이 실추 되었다.
2. 칠천량(漆川樑) 전투와 전선 12척 수습
1597년 7월 14일 가덕도를 지나 영등포를 거쳐 칠천도(漆川島)에 도착한 원균 장군과 예하 지휘관들은 밤을 새며 작전회의를 개최하였다. 원균 장군은 여러 장수를 소집하여 부산포 해전의 패배를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때 원균도 내심으로는 전황이 불리하여 전투할 의사가 없었지만 권율의 명령을 또다시 어길 수 없어 입장을 유보하고 있었다. 이 작전회의에서 경상 우수사 배설 장군은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칠천도는 물이 얕고 협착(狹窄)해서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하니 함대를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자”고 제안 했으나 원균(元均)은 듣지 않고 전투를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우리 수군과 왜적의 수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 수군은 1만5천여 명 남아 있었으며 배는 판옥선 120여척과 협선130여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왜군은 약 14만 여명이 부산으로 입항하여 남해안 일대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600여척의 대 선단을 보유하여 군사의 사기는 충만하였다. 그에 반해 조선 수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며, 수군통제사 원균 장군까지 도원수 권율의 곤장 사건과 부산포 해전의 두 차례 실패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그림6. 칠천량 해전 상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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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예상과 같이 압도적 다수의 왜 수군은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군을 3중으로 포위하고 무차별적인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왜적 대 선단은 7월 15일 비가 내리는 새벽어둠을 이용하여 원균의 주력부대를 집중적으로 총 공격하였다. 왜군의 대포 소리와 조총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선봉장인 배설 장군은 전투 초기에는 지략과 용맹으로 왜적에 강력히 대항하였으나, 전세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처음부터 불리한 이 무모한 전투에서 애석하게도 원균 통제사,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병사 최호 역시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의 상황은 수군 패배에 관한 선전관 김식(金埴)이 왕에게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한 선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으나 남이공의 말을 들으면 배설도 ‘비록 군법에 의하여 나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군졸들을 어떻게 사지에 들여보내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체로 모든 일은 사세를 살펴보고 시행하되 요해처(지세가 자기편에게는 유리하고, 적에게는 불리한 곳)는 고수해야 옳은 것이다. 이번 일은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패배가 있게 된 것이다.”
이 기록은 당시 이 칠천량 전투가 조정에서도 도원수 권율이 원균을 독촉하여 무모하게 감행되어 작전상 실패하였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또한 배설 장군의 칠천량 전투의 부당함을 항의한 내용이 잘 전달되고 있다.
당시 칠천량 해전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배설 장군 중심으로 재현해 본다. 당시 배설 장군은 왜군의 야간기습 공격이 개시되자 치열하게 전투에 임하였다. 포위망이 좁혀오자 장군은 “조선 수군을 살려야 한다. 한산 본영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서 전술상의 후퇴를 결심하게 이른다. 장군은 비겁한 후퇴보다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당일 새벽까지 추격해 오는 왜선의 공격을 차단하기는 어려웠다. 장군은 무모한 전투에서 배와 수군이 전멸하기 보다는 그가 거느린 전력을 보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장군은 왜적의 포위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장군의 이러한 작전상의 후퇴를 일부 문건에서는 패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전황이나 문제의 본질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오기이다.
결국 장군은 왜군의 포위망을 과감히 돌파하여 전선 12척과 조선 수군 120명을 살려서 한산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장군은 적의 끈질긴 공격을 받으면서도 여명을 이용하여 한산 본영으로 후퇴하였다. 그것은 장군이 매일 훈련하던 곳이라 칠천도의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은 시커먼 연기와 함께 붉게 타오르며 침몰하는 조선의 전선을 보면서, 깊은 바다 속으로 붉은 피를 흘리며 수장되어가는 수군을 바라보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이 원균과 함께 참전한 칠천량전투의 참담한 모습은 당시 현지에 갔던 비변사의 보고서에도 아군의 피해 상황과 함께 소상히 기록되고 있다.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고 ....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 요충인 칠천량 전투의 패배는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전투이다. 그러나 공이 칠천 량 해전에서 수습한 전선 12척과 병사 120명은 이순신 장군에게 그대로 인계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 신에게는 아직 배 열두 척이 남아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라는 유명한 명구는 바로 공이 칠천량 전투에서 구해낸 배 12척임은 이미 밝혀져 있다. 만약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한척의 전선도 구하지 못한 채 원균과 함께 전사하고, 한산도 본영이 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면 임란의 전쟁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배 12척과 군사는 이 순신장군의 명량해전의 승리의 초석이 되었음은 여러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공의 칠천량 전투에서 전술적 후퇴는 조선수군을 살렸다고 높이 평가될 수 있다. 특히 공은 한산도로 귀환한 후 한산도본영을 공격하려는 왜적에 대비하여 신속히 청야작전(淸野作戰)을 지휘하였다. 청야작전은 선조가 왜군의 재침략에 대비하여 군사 지휘관에게 내린 일종의 작전 명령이다. 공은 군사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자재를 불태우고 성 안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킨 후 회룡포로 철수하였다. 이 철수 과정에서 배설 장군은 노량진 앞바다에서 조방장인 아우 즙(楫)까지 잃게 되어 더욱 실의에 빠졌다. 장군은 패전의 회한과 동생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3. 장작귀선(粧作龜船) 건조
거북선은 귀선(龜船)이라고도 불리며 왜구의 격퇴하기 위하여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의 일종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에 비해 철갑선으로 실용화 되어 임진왜란 시 전투함(戰鬪艦)으로 해전에서 함대의 선봉이 되어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해전에서는 주로 판옥선(板屋船)이 사용되었으며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부산해전 등 주요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는 소수의 거북선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거북선은 이순신(李舜臣)장군에 의하여 창제된 창제귀선(創製龜船)이라고 알려지고 명랑노량해전에서 활용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시의 상당한 전과를 거둔 거북선의 제원(諸元)이나 제작에 과정에 관해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이라고도 불리는 거북선에 관해서는 그 제작자와 제원 등 기술적인 전승은 이루어 지지 않아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다.
1595년 왕조실록에는 비변사에서 건의하기를 “거북선이야말로 해전에서의 승리에 요긴한 것이고 적이 가장 꺼리는 것이라고 보고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의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아 1595년과 1597년 두 차례 경상 좌도와 우도 수군통제사로 발령받은 배설 장군이 당시의 거북선의 제조 과정에 적극 참여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로인해 거북선은 배설 장군이 제작했다는 주장이 오래 전 부터 제기되었다. 송인호는 현무공 실록(顯武公實錄)을 토대로 ‘배설 경상우수사가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주장 하고 있다.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에도 이 같은 사실이 기록 보존되어 있다.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이 같이 현무공 실록에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승리한 것은 배설장군이 만든 거북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 장군이 진도 해남 간 쇠사슬을 만들어 포구(浦口) 앞 바다를 가로 매어 왜선을 전복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V. 장군에 대한 모함과 신원
앞에서 본바와 같이 임진왜란 시 장군은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1599년 선조 30 년 향년 49세로 모함에 의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그러나 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서거한지 11년 후인 1610 광해 2년에 신원설치(伸寃雪恥)되었다. 장군은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공훈 록에 책록되고, 호조 판서의 공직이 증직되었다.
본장에서는 시 장군이 수질 악화로 요양신청을 하고, 모함에 의해 처벌되는 과정과 신원되는 결과 등을 바탕으로 장군의 행적을 다시 조명해 보기로 한다.
1. 수질 악화 따른 요양 신청과 허가
앞서 본바와 같이 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 시 부산포와 다대포 해전에 이은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장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적군의 포위망을 뚫고 한산도로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오랜 해상 생활과 겹친 전투로 인한 몸은 극도로 지쳐 있었고 수질(水疾)까지 악화되었다.
여기에서 칠천량 해전 후의 수군진영의 혼란한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의 이순신장군은 명령 불복종 등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는 입장이었으며, 배설장군은 잔류 조선 수군을 지휘하는 경상우수사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장군은 칠천량 전투의 패전 후 어느 날 갑자기 이순신 장군의 칠천량 전투에 대한 패전 정보 수집 활동 등에 같은 장수로서 불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난중일기에는 논리상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난중일기 7월 21일(양력 9월2일)자에는 이 순신 장군이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고 울부짖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7월22일(양력 9월3일) 에는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난중일기에는 장군이 도망을 했다고 기록했다가 또 다음날 일기에는 공이 이순신에게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런 정황에서 장군의 숙배 거부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이순신이 정식 수군통제사로 복직하게 되었으니 장군은 왕의 교서에 숙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중일기 정유년 8월 19일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장군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불손한 태도에 대해 이순신 장군의 불편한 심기가 잘 드러나 있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
당시의 장군의 숙배 거부의 정황과 배경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1597년 당시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은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인(罪人)의 몸으로 백의종군하게 된다. 그러나 원균장군의 전사(戰死)로 이순신은 권율장군(權慄將軍)의 명령으로 임시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또한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수군통제사로 복권시키는 대신 품계를 내려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의 혼란을 야기한 측면도 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배설 장군뿐 아니라 전라우수사 김억추 장군과도 상당한 감정상의 충돌이 있었다. 이처럼 장군의 교서 숙배 거부는 후일 이 순신 장군이 배설 장군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숙배를 거부하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후일 도원수 권율에게 장군을 급히 체포할 것을 명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랑해전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함으로서 선조는 두 달 후(後)인 11월 16일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에게 면사첩(免死帖)을 내렸다.
이러한 정황에서 배설 장군은 수질이 악화되자 이순신 장군에게 종을 보내 요양 신청을 하게 된다. 이점도 이 순신 장군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설이 제 종을 시켜서 소지(:자신의 뜻을 밝힌 글)를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해서 조리를 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공의 병가를 허가했음을 재차 난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 ... 배설이 제 종[奴]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장군이 정식으로 신병치료를 위해 휴양을 신청하고 그것을 이순신이 허락하여 육지로 내렸음은 분명하다.
일기는 개인의 감정과 회한 등이 뒤엉켜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기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인의 일기는 사료로서의 객관적인 가치를 담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군과 같이 비명에 간자는 말이 없으니 일기는 아직도 사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랑 대첩의 승리는 더욱 이순신을 영웅화하게 되고 그러한 정황에서 역사는 승자 편에 서기 마련이다.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미루어 볼 때 장군의 처벌은 숙배거부로 인한 불손함, 당시 선조의 인사 정책의 혼란, 장군의 수질악화로 인한 미복귀와 함께 장군에 관한모함 등이 더해져 작용한 결과이다.
2. 패전의 책임과 모반죄
임진왜란시 조정은 왜군 침략에 대비한 방비책을 마련하지 못하여 초기부터 패전을 거듭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부산포와 다대포 해전에서의 참패에 대한 책임 문제를 논의한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실록에는 패전 후의 상황에서도 배설 장군이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원균을 비롯하여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金浣)뿐이었습니다. 많은 장수들에게 모두 군법을 시행할 수 없다 해도 원균(元均)은 주장(主將)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율로 처단해야 합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조방장 배흥립(裴興立) 두 장수는 제장의 우두머리였으니 배흥립에게는 우선 군령을 시행하고, 배설은 지금 병선을 이끌고 바다에 있으므로 이 사람까지 제거하면 해로(海路)가 모두 비게 될 것이니 우선 뒷날을 기다려 논의하여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패전 후 생존한 군사와 장군들에 대하여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우고 방비책을 마련해야함에도 장군들에 재한 처벌부터 논의하는 모순된 역사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임란의 패배에 따른 나라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대책이 무리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원균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다대포의 전투뿐 아니라 칠천량 전투에서도 패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당시 조정은 정유재란 후 민심의 동요를 막고 약해진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장군에게 칠천량 전투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처벌하기로 한다. 나아가 수질 악화에 따른 장기 휴양을 역모를 꾸민다는 명분으로 삼아 수배할 것을 결정한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병조 판서 홍여순이 중국군 철수 뒤 국내의 변란을 우려하여 왕께 아뢰는 아래와 같은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중국군이 철수하여 돌아간 뒤에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되니,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裵楔)이 지난 가을에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와 있는데, 현몽(玄夢)과 합세하여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 그의 행적이 이미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이와 같이 장군이 백성을 선동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병조 판서 홍여순의 보고는 정인홍의 모함으로 이어져 용양중인 장군을 선산에서 급격히 체포하기에 이른다.
선조 실록은 1599년(선조 32) 3월 6일 공이 처형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군은 향년 49세를 일기로 ‘도망과 모반’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되기에 이른다. 당시 의병장인 부친과 아들 등암도 한양으로 압송되어 반역 혐의로 국문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실록에는 장군의 장례를 치를 때 경상감사 한준겸이 적극 도왔다고 파직을 청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당시 경상 감사가 장군의 장례를 위하여 산을 빼앗아 장지 마련하고 호상 군을 보내 장례를 치른데 대하여 파직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오호 통제라! 임란을 전후한 장군이 왜적을 소탕한 혁혁한 전공은 어찌한단 말인가. 의병장인 부친을 도와 왜장의 목을 베고, 선산부사로서 북상하는 왜적을 미리 차단하고, 금오산성을 수축하여 도체찰사(都體察使) 의 전략본영이 되게 한 공로는 어찌한단 말인가. 마지막 함흑 속의 칠천량 전투에서 전선 12척을 구하여 조선 수군을 살린 그의 공적은 어찌한단 말인가.
장군에 대한 처벌은 당시의 조정에서 전후의 민심 동요와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응급조치가 초래한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으로 이어 지는 인맥과 원균과 배설, 김억추로 이어지는 수군내의 경쟁과 갈등이 장군의 처벌을 서두른 배경이 되었다면 지나친 판단일까. 더구나 명랑해전에서의 이순신 장군의 통쾌한 승리는 그의 대의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그로 인해 배설 장군의 임란시의 혁혁한 공적마저 역사의 뒤 안으로 묻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신원과 선무 원종 1등 공신 책록
조선조 역사뿐 아니라 해방 후 오늘날의 정치사에도 억울하게 희생자는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는 다행히 재심이라는 구제 절차에 명예가 회복되고 복권되지만 당시의 조선조 봉건 왕조체제 하에서는 그것마저 봉쇄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에서 불의는 정의를 이기지 못한다. 진실은 후대에서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다. 장군에 대한 모함과 억울한 처형은 장군이 돌아가신 후 11년 되던 해에 신원(伸寃)이 이루어 졌다. 역사에서 사필귀정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1610년(광해 2년) 임란공신을 재평가하여 녹훈할 때 공은 선무원종1등공신(宣武原從1等功臣)으로 녹권(錄卷)에 책록 되었다. 또한 장군은 동시에 가선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역사의 교훈이 되살아나는 감격스런 순간이며 아들 등암이 36세에 맞이한 기쁨이다.
1871년(고종 8) 도내 유림들이 상소하여 장군은 자헌대부 병조판서겸지의금부훈련원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事)에 증직되었으며, 도정(都正)) 정교(鄭矯)가 분향문(焚香文)까지 지어올려 장군의 원혼을 달랬다. 이처럼 장군의 임란의 혁혁한 공훈은 다시 나라에서 인정하였다.
결국 장군의 억울함은 이렇게 신원되어 광명을 찾은 것이다. 장군은 빛나는 왕명(王命)이 전후(광해2년, 고종10년)로 거듭 내려 일등 공신과 호조, 병조 판서의 추증되었다. 그로인해 장군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정신은 후세에 까지 전해지니 이는 역사의 대의이며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의 성주 군지에도 ‘맹장(猛將) 배설이 수질(水疾: 오랜 물 생활로 생긴 병)이 있다’는 대목과 함께 ‘신병 치료를 위해 휴가 중’에 모함에 의해 주살(誅殺)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처럼 공의 공적은 후일 바르게 인식되고 사후에 벼슬까지 증직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므로 장군의 그동안 묻혀 져 있던 공적은 임란 사에서도 재평가되고 보충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4. 유문(遺文)과 두 편의 시조
장군은 어려서 부터 유교의 엄격한 가풍을 체득하여 예의범절을 잘 지켰으며, 군막에서도 문장이 해박하고 필법이 정묘하여 주위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불행이도 장군이 일찍 비명에 감으로서 그의 유문(遺文)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유문도 종가에서 전래되다가 전화에 유실되고 현재는 의미 있는 두 글귀가 남아 있다. 공이 남긴 유문(遺文)인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夕陽之門 路東西)와 <양가(兩家)의 좋은 인연이 만복의 근원이다>(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석양의 문밖의 길은 동서로 나누어 있지만, 양가의 좋은 인연으로 혼인으로 이어지고 자손 대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만복의 근원이라는 혼례의 중요성을 도덕 율로 표현한 간결한 글귀이다.
다행히도 수사공의 증손 배 석휘(裵碩徽)가 쓴 『가범(家範)』은 오늘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고조부가 돌아가신 후 124년이 되던 해인 1723년 7월 16일(경종 3년) 성산 배씨(星山裵氏) 『가범(家範)』이라는 제목의 필사본 책 한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는 고조부 되는 수사 공 배설 장군의 시조 2수가 적혀 있다. 이 책을 청계천 고서점에서 습득한 진 동혁 교수는 ’선조 시대의 시조 작품이 전하는 것이 많지 않은데 2수의 시조를 새로 발굴하게 된 것은 큰 다행한 일’이라고 언급하였다.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사람들의 눈길도 예전처럼 따뜻하지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변함이 없다. ‘청산아 잘 있었느냐?’ 그렇게 물은즉 청산을 넘어온 바람이 그의 뺨을 감돌며 그렀노라고 대답해준다. ‘푸른 물아 너도 반갑구나.’ 거침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던 강물이 그 흐르는 물소리로 화답을 해준다. 저렇듯 자연의 산과 물은 다 나를 변함없이 대해주거늘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세상은 그처럼 따뜻하지가 않으니 바다를 누비던 맹장의 가슴이 어찌 불에 타올라 시커멓게 멍들어 가지 않으리.
강둑에 푸르른 버드나무들도 예전과 변함없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구나. 여기서 벗들과 술 한 잔 나누던 그 때가 까마득하도다. 밝은 달 아래서 우정을 주고받던 일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여 그 날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조차 흐릿하도다. 다만 버드나무만 그 잎이며 줄기가 같으니 정자에서 달빛서린 술잔을 주고받던 일이 마치 어제인 듯 여겨지누나.”
이 시조에는 장군의 패전 후 수질로 인한 요양 길에서 마주친 인심의 메마름과 당시의 회한의 심정이 잘 토로되어 있다. 장군은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쳐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 이르기 까지 수많은 인연은 떠났지만 홀로 병든 몸을 이끌고 그 때를 회상한다. 의병장인 부친과 함께한 의병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임금의 행재소에서 합천 군수로 배수 받은 일, 진주 목사로 재임 중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전격 명령을 받지만 주민들의 만류로 부임길이 늦어 졌던 일, 금오 산성 구축 후 그 공로로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로 또다시 발탁되었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떠올랐을 것이다. 칠천 량 해전에서 장군의 작전상의 건의는 여지없이 상부로 부터 묵살되어 버렸다. 전쟁에서 처절하게 패하고 병든 몸으로 고향땅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장군의 심정이 이토록 잘 묘사될 수 있을까.
장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요양 길에 들어섰지만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장군이 과거 육지에서 근무했던 옛 고을을 찾았지만 무심한 인정과 세태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장군의 깊은 뜻은 하늘도 알고 대자연도 알건마는 무심한 인심은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이미 장군을 모함하는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병의 치료를 위한 요양길이 결국 역모로 몰리는 슬픈 운명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아! 당신을 모함하는 당시의 무리들은 무슨 마음 이었던가?
나라의 충신( 忠臣)이요, 가문의 명조(名祖)인 배설 장군의 이 유작 시는 조용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장군의 고독한 심사를 절제된 언어로 잘 토로하고 있는 이 한글 시조는 오늘날 문학 작품으로도 가치를 지닌 수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VI. 결론
우리는 앞서 임란 시 신재공(愼齋公) 배설 장군의 활동과 공적을 조명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공은 의병장인 부친 서암공의 뜻에 따라 일찍부터 두 동생과 함께 의병 전투에서 참여하여 많은 공적을 세운다. 공은 합천군수직을 시작으로 여러 고을의 수장 직을 수행할 시에는 헌신적인 위민봉공(爲民奉公)정신을 발휘하여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진주 목사직에서 경상 우수사로 부임하려고 할 때 주민들이 길을 막아 부임이 늦어진 사실은 왕조실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산부사직을 수행하면서 금오산성을 수축하여 경상도 체찰사의 군사 본영이 되게 하여 왜적의 북상을 막았다. 해전에서는 경상우수사로서 전선의 선봉에 섬으로서 다대포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전소시키고, 조선 수군이 전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전함 12척을 산신히 구해 이순신장군의 명량 해전의 토대가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장군의 임란시의 혁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배설 장군은 1599년 49세로서 생을 마감한다. 오랜 해상 생활에서 얻은 수질로 인한 요양을 도망으로 간주되고, 역모라는 모함까지 당하여 처벌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장군의 억울함은 광해 10년 장군이 돌아가신지 11년 만에 소원이 이루어진다. 선무 원종 일등 공신으로 추증되고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다. 결론적으로 장군의 임란 전후의 공적과 활동에 관한 자료를 보완하고 재정리하면서 얻은 장군의 학덕과 인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으면서 이글을 마무리 하기로 한다.
첫째, 장군은 여러 전투에서 전술 전략적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였으며, 상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충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꿋꿋한 무인의 기계를 볼 수 있다. 수군절도사 장필무 선생이 장군이 어릴 때 무인 기질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장군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 공직 수행중 시국의 폐단에 관한 건의하다 권율의 눈에 벗어나 밀양 부사로 좌천된 적도 있다. 또한 부산포 해전과 칠천량 해전을 앞둔 시점에서의 전술적 대비책에 관한 장군의 용감한 건의는 권율에 의하여 좌절되었지만 선조실록에는 상세히 기록되어 올바른 평가를 받고 있다. 장군이 칠천량 해전을 앞둔 시점에서 무리한 전투의 강행을 반대한 입장은 전쟁의 패배라는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 있다.
둘째,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용장으로서 재직 중의 위민봉사의 활동과 전술적 상항 판단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장군이 남긴 유문과 시조 두 편은 장군의 문인으로서의 학덕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장군이 진주 목사로 재임 중 다시 수군절도사로 발령받았을 때 진주 시민들이 길을 막아 부임이 늦어진 실록의 예화는 그의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푼 목민관의 자세를 여실히 증명한다. 장군은 수군절도사로서 마지막 칠천량 전투에서 왜적의 3중 포위망을 뚫고 배 12척 까지 수습하여 한산본영으로 귀환한 업적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배 12척이 없었다면 이순신의 명량 해전의 승리도 이끌지 못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셋째, 장군의 인품은 지인용을 겸비한 장군으로 평가될 수 있다. 장군의 군의 비문을 쓴 정종호는 장군을 삼달덕(三達德)을 구비한 인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는 “ 옛 부터 인신(人臣)이 국가를 위하여 큰 난리를 능히 막을 수 있는 자는 그 지혜(知慧)가 있은 연후에 가히 대책을 세울 수 있고, 그 인(仁)이 있는 연후에 가히 대중을 복종시키고, 그 용기(勇氣)가 있는 연후에 가히 적을 칠 수 있으니 장군은 그것이 겸비한 사람이 장군”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나아가 “장군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먼저 여러 전투에서 용병(用兵)이 귀신과 같았던 점이 지(智)이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보고 혜창(惠倉)을 창립한 것은 인(仁)이며, 싸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비록 죽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용(勇)이 였다”고 세기고 있음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장군의 임란시의 위업은 일방적으로 기술되거나 오도되어서 안 되며 함부로 평가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부 자료에는 아직도 장군의 행적을 폄하하거나 오도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글이 장군에 대한 그간의 오해와 편견을 불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앞으로 장군의 임란시의 행적과 위업은 학술적으로도 반드시 재조명·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란 공훈 록에는 장군의 혁혁한 활동과 업적은 상세히 기록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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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석 옮김, 난중일기, 믿음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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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정만진, http://blog.naver.com/clean053 배설 장군은 어찌되었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늘이 내린 비운의 장수(출처:한국인 (판) 2012.01.12 22:26 조회3,050 )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5년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활약함
황간전투에서 패하며 향병들을 모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에 임한다
그리하여 승진의연속을 하며 1597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취임하게 됨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엄청난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마침 이때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을 공격하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지형적으로 불리하고 이중간첩인 요시라의 계략에 속지않고
어쩔수없이 어명을 거절하게 되어 하옥되고 그 자리는 원균이 올라가게됨
원균은 당시 일본의 주둔지인 부산을 치기로함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다.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육지로 도망간 조선수군들은 휴식을 취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에 거의 전멸하게됨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 배흥립장군 최호장군은 전사하게 되고 김완(조방관)장군은 일본에 포로로 붙잡힘(나중에 탈출함)
물론 원균도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게됨
경상좌수사 배설장군만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12척의 배를 이끌고 부대를 이탈하고 도망을 간다.
이로써 조선 삼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로 진출하게됨
이때 겨우살아나온 김식에게서 패전보고를 받고 선조는 크게놀라 백의종군하고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구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을 수습함
여기서 배설장군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탈영을 한것인가 후퇴를 한것인가 의문점이다.
사실 배설장군은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듣지않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한산도로 가서
군량·무기·군용자재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대피시킴
이로써 4,5년 동안 피와 땀으로 이룩한 한산진의 철통 요새는 하루아침에 아군의 손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칠천량해전 조선수군이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패배한 유일한 해전
이순신장군은 전선을 모두잃고 향병들을 모아 다시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도중 배설장군이 12척의 배를 숨겨놓았다는 정보를 얻은 이순신은 배설장군을 찾아가 전선을 어디에 두었냐고
하여 배설장군은 그 위치를 알려주고 이순신 밑으로 들어가게되는데
그 12척의 배가 바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판옥선이다.
만약 배설장군이 명령을 끝까지 완수하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면 그 12척의 배도 산산조각이 났을것이다.
물론 그 배위에 타있던 병사들까지도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명언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판옥선 12척으로 왜군의 333척의 이르는 군인을 막아낸 엄청난 해전 그러나 그곳에서도 배설장군은
12척의 배로 어떡해 333척을 막느냐면서 또 다시 탈영을 하게되어 결국 권율에게 잡혀 처형당함
난 배설장군이 잘했다는게 아니라 배설장군이 정말 충성스러운 장군이였으면 어쩔까 한다
333척이 아무 방해도 받지않고 서해로 진출해서 도상하여 서울로 들어왔다면 역사가 바뀔것인데..
시도는 좋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을 구한 비운의 장수 배설장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사진출처: 명량영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에 의해 조선 수군이 괴멸될때...(출처:아고라 토론방감자바스 (gamj****)
이분이 칠천량에서 12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도주한다음...
(사진출처: 명량영화)
근데 판옥선 12척 빼돌렸던 배설...(출처:글쓴이:베르나도트 )
이사람 아니었으면...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다시 시작하려 했을까???
역사인물 재조명 "배설장군을 아시나요?"(출처:글슨이:덕게 ) 하늘이 내린 비운의 장수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5년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활약함 황간전투에서 패하며 향병들을 모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에 임한다 그리하여 승진의연속을 하며 1597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취임하게 됨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조선시대 각 도 수군을 총지휘하기 위하여 두었던 정3품 외관직 이라는
엄청난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마침 이때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을 공격하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지형적으로 불리하고 이중간첩인 요시라의 계략에 속지않고 어쩔수없이 어명을 거절하게 되어 하옥되고 그 자리는 원균이 올라가게됨
원균은 당시 일본의 주둔지인 부산을 치기로함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다.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육지로 도망간 조선수군들은 휴식을 취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에 거의 전멸하게됨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 배흥립장군 최호장군은 전사하게 되고 김완(조방관)장군은 일본에 포로로 붙잡힘(나중에 탈출함) 물론 원균도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게됨 경상좌수사 배설장군만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12척의 배를 이끌고 부대를 이탈하고 도망을 간다. 이로써 조선 삼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로 진출하게됨
이때 겨우살아나온 김식에게서 패전보고를 받고 선조는 크게놀라 백의종군하고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구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을 수습함
여기서 배설장군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탈영을 한것인가 후퇴를 한것인가 의문점이다. 사실 배설장군은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듣지않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한산도로 가서 군량·무기·군용자재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대피시킴 이로써 4,5년 동안 피와 땀으로 이룩한 한산진의 철통 요새는 하루아침에 아군의 손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칠천량해전 조선수군이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패배한 유일한 해전
이순신장군은 전선을 모두잃고 향병들을 모아 다시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도중 배설장군이 12척의 배를 숨겨놓았다는 정보를 얻은 이순신은 배설장군을 찾아가 전선을 어디에 두었냐고 하여 배설장군은 그 위치를 알려주고 이순신 밑으로 들어가게되는데 그 12척의 배가 바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판옥선이다.
만약 배설장군이 명령을 끝까지 완수하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면 그 12척의 배도 산산조각이 났을것이다. 물론 그 배위에 타있던 병사들까지도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명언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판옥선 12척으로 왜군의 333척의 이르는 군인을 막아낸 엄청난 해전 그러나 그곳에서도 배설장군은 12척의 배로 어떡해 333척을 막느냐면서 또 다시 탈영을 하게되어 결국 권율에게 잡혀 처형당함
난 배설장군이 잘했다는게 아니라 배설장군이 정말 충성스러운 장군이였으면 어쩔까 한다 333척이 아무 방해도 받지않고 서해로 진출해서 도상하여 서울로 들어왔다면 역사가 바뀔것인데.. 시도는 좋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을 구한 비운의 장수 배설장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
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장군,(내전을 끝 내고 평화를주다)
배설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배설의 전략에 감명받은 도쿠가와이에야스가의 대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