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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정月波亭

自公有花 2014. 8. 31. 05:20

온 조선 천지에 칠천량패전으로 망연자실 통곡소리가 가득하고 나라에는 절망이 가득한 상태에서 수만명젊은이들을 칠천량패전에서 전멸시킨 배설장군의 회한과 처절한 전투가 느껴지는 한마디로 백마디 변명이 필요 없는 표현입니다. 시문에 뛰어난 장군은 패장으로서 한줄의 이시를 남기고  기록도 남기지 않습니다.  장군의 아들은 과거에 장원하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배설장군의 칠천량패전에 대한 원성을 한마디로 표현한 작품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진솔한 심경을 그린 것입니다. 이 시로 비추어 볼 때 배설장군은 칠천량패전의 장수로서 죽음을 기쁘게 기다린다고 보여집니다.

묻지마라, 더물어 무럿하리, 강산도 반기는데 일부러 죽였겠느냐?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1597.9.2)

 

 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
綠水ノクス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
あるうれしい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
ジョリ行く
  
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食べた警固
錦江ドゥンヌン編み
昨日ロンガせよ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사람들의 눈길도 예전처럼 따뜻하지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변함이 없다. ‘청산아 잘 있었느냐?’

 

그렇게 물은즉 청산을 넘어온 바람이 그의 뺨을 감돌며 그렀노라고 대답해준다. ‘푸른 물아 너도 반갑구나.’ 거침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던 강물이 그 흐르는 물소리로 화답을 해준다. 저렇듯 자연의 산과 물은 다 나를 변함없이 대해주거늘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세상은 그처럼 따뜻하지가 않으니 바다를 누비던 맹장의 가슴이 어찌 불에 타올라 시커멓게 멍들어 가지 않으리.

 

강둑에 푸르른 버드나무들도 예전과 변함없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구나. 여기서 벗들과 술 한 잔 나누던 그 때가 까마득하도다. 밝은 달 아래서 우정을 주고받던 일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여 그 날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조차 흐릿하도다. 다만 버드나무만 그 잎이며 줄기가 같으니 정자에서 달빛서린 술잔을 주고받던 일이 마치 어제인 듯 여겨지누나.”

 

이 시조에는 장군의 패전 후 수질로 인한 요양 길에서 마주친 인심의 메마름과 당시의 회한의 심정이 잘 토로되어 있다. 장군은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쳐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 이르기 까지 수많은 인연은 떠났지만 홀로 병든 몸을 이끌고 그 때를 회상한다.

 

의병장인 부친과 함께한 의병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임금의 행재소에서 합천 군수로 배수 받은 일, 진주 목사로 재임 중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전격 명령을 받지만 주민들의 만류로 부임길이 늦어 졌던 일, 금오 산성 구축 후 그 공로로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로 또다시 발탁되었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떠올랐을 것이다.

 

칠천 량 해전에서 장군의 작전상의 건의는 여지없이 상부로 부터 묵살되어 버렸다. 전쟁에서 처절하게 패하고 병든 몸으로 고향땅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장군의 심정이 이토록 잘 묘사될 수 있을까.

 

 

장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요양 길에 들어섰지만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장군이 과거 육지에서 근무했던 옛 고을을 찾았지만 무심한 인정과 세태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장군의 깊은 뜻은 하늘도 알고 대자연도 알건마는 무심한 인심은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이미 장군을 모함하는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병의 치료를 위한 요양길이 결국 역모로 몰리는 슬픈 운명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아! 당신을 모함하는 당시의 무리들은 무슨 마음 이었던가?

 

나라의 충신( 忠臣)이요, 장군의 고독한 심사를 절제된 언어로 잘 토로하고 있는 이 한글 시조는 오늘날 문학 작품으로도 가치를 지닌 수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앞서 임란 시 신재공(愼齋公) 배설 장군의 활동 공은 의병장인 부친 서암공의 뜻에 따라 일찍부터 두 동생과 함께 의병 전투에서 참여하여 많은 공적을 세운다. 공은 합천군수직을 시작으로 여러 고을의 수장 직을 수행할 시에는 헌신적인 위민봉공(爲民奉公)정신을 발휘하여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진주 목사직에서 경상 우수사로 부임하려고 할 때 주민들이 길을 막아 부임이 늦어진 사실은 왕조실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산부사직을 수행하면서 금오산성을 수축하여 경상도 체찰사의 군사 본영이 되게 하여 왜적의 북상을 막았다. 해전에서는 경상우수사로서 전선의 선봉에 섬으로서 다대포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전소시키고, 조선 수군이 전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전함 12척을 산신히 구해 이순신장군의 명량 해전의 토대가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선조대의 우수한 문학성을 보여준 귀한 작품이다.

 

 

 

세월호침몰로 본 명량대첩과 맹골수로 무지,

세월호 재판에서 이준석선장은 관행때문이라고 증언했습니다..결국 일등탈출한 선장답게 세월호 참사는 관행이 저지른 대량참사라고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면 일등탈출한 선장을 따라 앞다퉈 탈출한 죄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고 세월호특별법을 요구하는 시위로 광화문광장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이지만 조선수군을 1만여 병사를 하루밤에 수장 전멸시킨 칠천량패전을 돌이켜 보고자 합니다.

 

                                                     (사진출처:동아일보)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없기를 바랍니다.

 

왜군은 피란민과 아이들 코와 귀까지 베어 전공을 세우고자 하든 전쟁이였고 조선군 명나라군들도 전공앞에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량대첩에 배를 뛰우다.

이순신장군은 전쟁 중에 단 한척의 배도 건조하지 못하였지만,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조선수군 전체와 명장들 비하 폄하는 않타까운 일입니다.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린 배설장군만 폄하한다면 이해하겠습니다.^^

 

1, 이순신은 까탈스런 장군,

왕명에 따르다 전사한 충성심 자체인 원균 이하 장수들 비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의 부장 나아가 부하들 명나라 연합군 장수들마저 까탈스럽게 부족한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장군이 부하들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데 존경심이 있었다면 대단한 부하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난중일기에도 배설이 병 치료차 9월 2일 귀향했다(난중일기 이순신허락)고 되어 있고 , 명량 해전은 왜군의 ...

기습공격이 9월 14일이 였는 데(자신이 휴가를 보냄을 잊고 정신없찾음.탈영시비를남김) 12척으로 도주한 조선수군을 괴멸시키고자 왜군들은 두달간 총력전쟁준비를 하여 133척의 전함과 200여 척의 수송선단을 출동시킵니다. 패잔병을 추격하는 전투치고는 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칠펀량서 배설한대는 모든화력을 퍼붙고 8척은 포탄이 떨어진 상태로 퇴각했습니다. 왜군들은 패잔군의 12척의 함대를 우섭게 볼수 없었든 것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향해전에서 3차에 걸쳐 선봉대장으로 활약한 맹장이십니다. 이순신이 거두어간 12척의 함대는 왜군의 3중 포위망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구해내어 이순신에게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신에 목숨을 건 함대를 바로 인계했으니 찾을 만도 합니다.

 

                                                                   (사진출처:사실왜곡의 명량영화 포스터)

2, 의도적인 배설장군폄하 왜곡

배설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을 파멸시키고자 육전을 하자는 간신으로 전쟁중 탈영 도망해서 풍신수길 찾아갈듯 나쁜 놈으로 그렸습니다. 돈벌이에 미쳐 역사왜곡 서슴치 않은 영화제작 대박 대박 터지겠더라구요~

왜군은 배설이 병 치료차 귀향하고 난 이후 곧 바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아래와 같이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칠천량 해전 기습당시 왜선 주력공격선 8척이 배설의 공격으로 침몰 했었기에 배설이 병 치료 차 귀향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였습니다.

 

3, 칠천량해전 원균의 대패(원균이 배설의 충언을 들었다면 대승할 뻔)

“거듭된 조선군의 패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며 재출동을 명했습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 척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유인책에 넘어갔던 원균이 패전하고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데 불만을 품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裵說)은 다음 해전에서도 패전이 분명하다고 보고 원균에게 여러 차례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 배설은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물목이 좁아서 전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원균은 “이대로 패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달이 밝은 것을 이용하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포성 3발을 신호로 칠천량을 기습했다.

 

 전에 한 번도 없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아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게다가 주장인 원균이 끝까지 지휘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해 도주했다. 조선 수군은 12척의 배설의 함대만 남고 궤멸하여 퇴각했다.(원균은 직속 상관으로 왕명을 어기자고 한 배설을 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

 

이억기와 최호 등이 그 싸움에서 자신의 전함과 더불어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배설만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유일하게 전소시키고 휘하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왕명을 어긴 죄 조정의처분울 기다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비변사의 감시 속에 한산도 수군본영에 이르러 방비를 엄히했다. (조정에서도 배설이 수군을 수습하게 해야 한다는 게 중론)” 왕명을 받아 칠천량해전을 감시한 선전관 김식이 조정에 보고(출처 사료)

 

4, 조선수군이 전멸할 뻔,

조선군 장수들이 해상포위 일본 수군의 공격에 위급하자 가까운 육지로 튀었습니다. 왜군은 조선 수군 전멸 할 순간 이였고 육지에도 왜군이 도주하는 병사들을 살육하기위해 매복되어 있었는데 조선군 장수들이 왜선의 포위망에 밀려 얕은 바다로 밀리다가 배에서 탈출 육지로 상륙한 장수들은 전원 전사했습니다.

 

배설부대의 휘하장병들은 공격해오는 왜선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포위망을 부수고 수심이 깊은 바다로 진격한 후 퇴각했기에 전원 살아날 수 있었든 것입니다. 수군다운 퇴각이니 적군이 추격하지 못했고. 조선수군은 배설의 군대만 남게 되었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고 서남권 해상으로 왜군의 출진을 가로막은 것 이였습니다.

 

조정에서도 왕명을 거역하고 수군본영으로 퇴각했음을 비변사 선전관(헌병대) 김식도 배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수군 통제를 계속하게 했습니다. 분명히 도망과는 다릅니다. 왜놈들이 도망이라고 하면서 왜 추적해서 괴멸시키면 조선반도가 그냥 수중에 들어오는데 고걸 안한 왜군을 바보 취급하는 것입니다.

 

5, 배설의 퇴각명령을 도주라고하는 왜군들

배설은 원균에게도 깊은 바다 조수가 빠른(진도 명량 한산도) 곳에서 왜적과 싸워야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다고 여러번 말했고 칠천량은 바다가 얕아 조선수군에게 위험하다고했던 것입니다.(사료)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주력부대 3중포위망을 강타하고 왜선 8척을 전소시키며 퇴각한 유일한 장수가 배설 이였고 그의 부하들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데 비해 동생이 전사했고, 다른 장수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배를 버리고 육지로 튀다가 매복 군에 전원 사망했었습니다.(배설이 이를 구할 수 없었든 것은 수심이 얕아 접근이 불가능)

 

왜군이 조선군을 군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왜군이 추격을 포기하고 한산도 본영을 침공할 엄두를 못낸 것도 배설의 기민한 용병술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파했었기 때문이 였습니다. 배설이 도주했다면 추격해서 괴멸하고 전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에 추적할 엄두를 못냅니다. 추적 않습니다.

 

 

6, 칠천량 패전이 이순신을 구해내다.

칠천량 패전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사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명을 어겨 체포됐든 이순신이 절도사로 부임했음에 가장 기쁘할 사람이 배설입니다. 배설도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렸기에 비변사 선전관 김기식의 감시를 받고 언제 체포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배설은 경상우수사로 배설이 같은 서열로 활동햇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는 작전을 가르켜 준 배설정군의 공...이 인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7, 임란500년 지난 시점 작가들이 왜놈의 간첩으로 왜곡했습니다.

이순신은 왕명을 어긴죄로 체포되어 사형 당하러 잡혀간 상태에 배설은 왕명도 어기고 군사들을 퇴각시킨 장수로 전공이나 승진을 바랄 위치에 있지 않았고 다른 장수를 시기할 상황도 아니였습니다.

 

이순신이 당시 칠천량 해전 경험을 배설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배설이 넘겨준 판옥선으로 조선수군이 원균의 실패인 칠천량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명량 노량 해전을 할 수 있었기에 배설은 전승일등공신이 된 것입니다.

 

병조판서 경상우수사가 왜놈 첩자 였다는 식으로 흥행도 좋지만 역사적 사실 왜곡이 지나칩니다. 원균을 비롯해 당대 전사 장군들의 애국심이 이순신보다 못했겠으며,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병졸들을 신출귀몰하게 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배설이 넘겨준 전함이 없다면  명량해전은 크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칠천량 해전의 배설장군의 경험이 소중했습니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군 지휘권을 넘겨준 후 뚜렸한 역할도 없는 수군 서열 2위의 참모 상태에서 병들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장수로 전란 통에 이순신에게 병력을 온전히 넘겨준 유일한 장수 였습니다.

 

                           (사진출처:명량영화- 배설없는 이순신장군의 기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8, 지울 수 없는 배설의 흔적

임진란 진주성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의 병력과 장비는 배설이 양성한 곳 이며 다른 원균이나 김완 이억기같은 장수들의 부하들은 전멸했음에도 배설휘하의 병력만이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병사들을 살리려고 자신 죽음을 각오하고 왕명에 거부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수군본영으로 퇴각명령을 내린 결정을 왜군도 아닌 조국에서 도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단기 필마로 왜군진영을 통과 할 정도로 용맹한 장수가 적군이 무서워 도주한다는 논리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그가 주장한대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한 퇴각임이 분명했든 것입니다. 임진란 내내 3대 대첩의 밑그림이 배설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1) 과거급제 후 의병장으로

 배설 경상우수사는 청년 시절 의병장인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합천, 진주, 밀양, 선산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공적비가 세워진 분이십니다. 배설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의 병력 대부분 함대대부분이 배설이  넘겨준 것 이였습니다.

 

40대 중반 경상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많은 공적을 남기셨고, 조선수군이 전패당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전선 12척을 구해내어 조선 수군을 살려서,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조류를 활용할 계책을 제시해 명량 해전의 승리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명장으로 이순신의 병력대부분이 배설이 모아준 병력입니다. (이순신은 32세에 무과급제)

사실은 이순신이 제작하거나 구한 전함이 한대도 없었고 겨우 판옥선 1대도 명량 해전 끝날 때쯤 합류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량 패전후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키며 군사를 조련하여 자신이양성한 병력을 인계하고 억울하게 모함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광해 2년(1610) 선무원종 전승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임진왜란 전란 중에 고스란히 병력을 보전하고 12척의 전함을 이순신에게 넘겨주었고 칠천량 해전 대패의 조선수군전멸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부하들을 온전히 보전하기위해 퇴각 명령을 내린 지략 나아가 왜적의 장단점과 바다의 물길을 파악한 유일한 지휘자였으며 최초의 승전의 기초인 왜선 8척을 포위망속에서 성공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번 ‘명량’이라는 영화(전철홍·김민한 감독 극본)와 소설(김호경)에서는 배설 선조가 이순신의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고,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거제 현령 안위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단 배설장군에 대해선 험담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고 왜적의 주둔지를 부관1명을 거느리고 적진을 통과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로 적장이 감동받을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왜적에 매수되어 조선을 죽이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또 다시 배설 장군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조작 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장군도 험담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가들이 500년 지나 매국노 간첩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12척의 전함과 병력 대부분은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 때 양성한 사병과 같은 병력으로 임진란중에 진주성대첩과 같이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충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랏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주성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 잠궈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사 부임을 가로 막았었습니다. 배설장군의 명망에 조정은 역모를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해서 부하들을 대신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는 용맹 앞에 왕이 직접파견한 전투를 참관감시한 선전관 김식도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칠천량서 함께 싸우든 모든 장수가 전사한(배설장군의 동생도 전사) 후에도 전투를 하면서 퇴각했습니다.

 

6.25때 일시적으로 서울을 버리고 남으로 퇴각한 국군을 도망이라 탈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후퇴 즉 육군본부 같은 수군본영으로 퇴각명령으로 얼마나 처철한 전투였든지 실탄이 떨어진 반파된 상태로 였습니다. 조선수군 청년들 수만명 전멸을 지켜보면서 치런전투에서 퇴각은 아무도 반기는이 없는 삼남의 백성들에게 피눈물과 절망을 주는 원통함이였습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전사하게 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무리한 진군명령인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 후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다가 이순신에게 군권을 인계했습니다. 도주라고 하는 것은 왜구들의 기록입니다.

(어명을 어긴 것은 맞지만)준비도 되지 않은채 출진하여 어명을 따르다 전사한 여러 아까운 당대의 아까운 장수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혼자 사형받기위해 병사들을 반역죄에서 해방시키는 퇴각명령을 내린 장수가 온전히 병사들을 지킨 것입니다.

 

 

선조가 의심이 만았고 덕망이 있거나 신망이 있는 장수를 군권에서 제외한 내시들에 둘러사여 과거급제자나 고관들만 중시하고  전쟁은 않일어난다,는 당파를 중용했고 배설은 진주목사당시부터 전쟁대비를 한 고위장수였습니다.

 

 진주성의 젊은이들이 조선수군의 기둥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왜군이 진주성함락을 위해 전력을 솓아 붙고 씨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눈 작전울 가르켜준 배설정군의 공이 안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난중 일기를 중심으로이순신은 왕에게도(두개의 다른 보고서를 올림)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왕 명을 어겼다는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권율 밑에서 종사했던 인연으로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장장 200km를 기적적으로 도주해 온  배설의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거의 반파 상태로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고 무기 실탄이 거의 소진 된 상태였었다.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선조의 명령으로 칠천량해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원균을 감시해야 함에도 배설과 동행)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3도 연합 조선수군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조선수군이 가엾을 정도였다.  

 

 

 

9, 선조의 실록을 봅시다.

 

성종릉과 정종릉은 임진년 가을에 파헤쳐졌다.

두 선왕릉이 파헤쳐진 사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경기도사였다.

경기도사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류성용은 지체없이 명 육군 총병관 이여송의 군막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통곡했다.

류성용은 이어 만월대 정자 위로 올라가 능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마를 찧으며 통곡했다.

임금은 행재소 마당에 쓰러져 통곡했다.

임금은 성종묘와 중종묘가 있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고,

명의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 ...

 

임금은 울음의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래오래 통곡했다.

방향을 바꿀 때 세번씩 절했다.

임금의 방향이 바뀔 때 마다 중신들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통곡했다.

이마를 땅에 찧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중신들은 통곡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08(개정판 25쇄 2009. 7. 28)

 

임금은 자주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남쪽 바다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슬피 울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차고 푸른 해거름에 소복을 입은 임금은 동헌 마루에 쓰러져 울었다.

의주까지 호종해서 따라온 중신들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임금은 깊이 울었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사무치게 울었다.

아무도 임금의 울음을 말릴 수 없었다.

강 건너로 지는 해가 마루 위로 도열한 중신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중신들은 임금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서울을 버릴 때 임금은 울었다.

 

임진강을 건널 때 임금은 중신들을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개성을 버릴 때 울었고 평양에 닿았을 때 울었고 평양을 버릴 때 울었다.

하삼도가 서로 내응해서 속히 창의의 군사를 휘몰고 올라오라는 교지를 써서 호남으로 보내고 나서 임금은 또 깊게 울었다.

피난길 의주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임금은 가마를 세우고 남쪽을 향해 또 길게 울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신을 맞아 임금은 길게 울었다.

신하들도 따라 울었다.

 

임금은 흐느껴 울었고 중신들도 울었다.

명의 구원병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임금은 강가에까지 마중나가 울었다.

환도해서 임금은 종묘의 폐허에 나가 길고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기진하도록 슬피 울었고 길게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뼈가 녹아 흐르듯이 깊었다.

 

임금의 언어는 장려했고 곡진했다.

임금의 언어는 임금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임금의 언어와 임금의 울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

그때 나는 임금의 언어와 울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24~231(개정판 25쇄 2009. 7. 28)

 

 

어전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머리를 들고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이 글자를 아는가?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이순신을 털끌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데 잡아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승정원 비망기 1597년 3월 13일

이순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418~420(개정판 25쇄 2009. 7. 28)

 

1598년 11월 19일 공의 나이 쉔넷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고려의 항몽유적지인 남도산성의 모습입니다.  고려의 삼별초가 몽고군을 몰살시키겠다고 항거한 진도입니다. 진도자체가 물살이 유속이 빠르고 기온은 내륙보다 따듯한 곳입니다.

 

몽고군수장 계획을 세운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는 실패 했으나  훗날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의 해전대첩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곳이 되었습니다.  울돌목이란 진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말합니다. 그만큼 물길이 사방 파도가 센 곳입니다.

이번 진도 세월호는 진도 남단항구 쪽 조도 앞입니다. 반대로 울돌목 이순신장군의 승전지는 북쪽 육지와 진도가 연결된 곳이고

남도 산성은 진도의 남쪽 조도와 진도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지점 깊숙히 있습니다.

 

 

 

 진도 방파제 모습이구요, 앞에 조도가 병풍처럼 가리워져 있는데요,

본래 이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물살이 세차고 파도도 많은 곳입니다. 따라서 진도항은 오목하게 세맨트로 되어 있고,

조도나 그 앞들의 섬들에는 파도가 세차고 바위섬들입니다.  

 

진도항의 석양은 파도와 물소리로 깊은 바다 임을 알려줍니다.

 

10,과도한 왜곡은 이순신을 모독하는 것

사실 위에 이순신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인간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문화이고 예술이다. 해외로 수출되어 조선 놈들 하고 비하되고 이순신만을 맥가이버람보로 미화함은 선조들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11, 조선왕조실록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자 전공다툼으로 도주한 배설을 찾아 참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권율은 명량해전 이후 체포령을 내렸고 배설을 꼭 잡아 죄값을 치루게 해달라 부탁도 했다. 배설은 도주 후 나주 등지에 머물다가 충청도로 숨어들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전란 때 조용히 있다가 전쟁이 끝나니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배설이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고 걱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즉 변란을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다. 배설의 덕망이 높았고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만, 배설은 명예나 지위에 연연한 사대부 고관들과는 달랐으며 역심을 품은 적도 없었습니다. 칠천량해전에 대패한후 물살이 사나운 노량진 명량까지 장장 200킬로미터를 노를 저어 초인적으로 이동했고 당시 조선수군 전멸 소식에 원근 각지의 백성들이 패잔선을 찾아 장병들의 소식을 듣고자  몰려다닌 것이였습니다.

 

임진란 당시 이순신에게 온전히 판옥선 12척과 병력을 넘겨준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도 배설이 넘겨준 병력과 전함12척이 구세주 같은 가치가 있다고 한점입니다.

 

 

12, 배설장군에 대한 오해

이순신이 먼저 꼬롬하게 배설의 영리를 잡아다 곤정을 치므로서 배설이 낙향을 결심하고 이순신에게 허락을받고 병치료차 곧바로 고향인 선산으로 귀향했습니다. 선산에 있을 때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란중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전공다툼에 희생되신 것입니다.

 

왜군 진영을 단기필마로 통과해서 고향으로 가는 행동은 살고자 하는 도망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단기필마로 적장의 막사를 향해 돌진한 후 적군들이 손쓸틈 없이 적진을 빠져나가자 적장이 오히려 그 매력에 감동했다고 하는 멋진 장수였습니다.왜군은 후일 전술로 흉내를 내어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도망자라는 빠가야로 배설의 흉내를 내는 왜군장수들의 행태를 직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배설이 진주성을 담당할 때 임지로 부임을 진주백성 남녀노소들이 가로막아 관사와 성문을 열어주지 안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하고(이순신미화에 차용)그런 진주성이 왜군을 막아 처절한 전투를 했다는 것은 역사의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설이 남긴 선정은 진주시민들이 하나로 뭉치게 했다는 점과 이순신에게 인계한 수군이 처절히 싸웠다는 것은 임란당시 배설의 휘하에 충심이 특별한 점이고 덕망이 높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 배설 이였고 그는 목숨에 연연할 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쟁은 전란 중에도 있었습니다.

 

왕은 왕답지 않게 도망다니고 장수들은 당쟁과 파벌에 줄써기 하고 전란 중에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든 배설장군은 이순신에게 곤장 맞고 죽을 뻔한 부장만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일제시대라면 영화명량에 뭐라하지 못했을 것이나 왕명도 어기면서 나라를 구한 충신에게 누명까지 쒸우는 문회인들이 무뢰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13 문화 예술의 사실존중의무

전쟁은 7년간 진행되고 조선군장수들은 일부이긴 하지만 조선군 패잔병들의 목을 배어 전공을 허위보고하기 예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자신의 병사를 구타해서 사망하면 자살로 허위보고해서 승진하는 장군들과 같았습니다.

 

왜군은 두려워하면서 조선 패잔병이나 난민의 목을 베어 쉽게 전공을 세웠든 당시 세태에 백성들이 배설을 흠모하는 것은 의병장출신으로 백성들과 부하를 아꼈습니다. 이순신도 명량해전에 배설을 찾으며 한탄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 만이 조선의 장수이고 나머지 이순신 부하들과 백성은 사람도 아닌 무저리들이고 이순신이 나라를 지켰으니,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왜구들 역사왜곡을 받아쓰기 수준입니다.

 

이순신은 죽고 없으니 나라는 일본에 침략은 당연하고 식민지는 당연하다는 논리를 비판없이 대중에게 쇄뇌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판검사 지도층들은 이순신 같은 지도적 위치에 있습니다. 뇌물이나 먹고 성히롱에 미친 상태로 잘못된 판단을 하는 지도자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사실왜곡의 무리한 설정으로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왜곡으로 돈을 버는 것이나 ☆부정부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도자 한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지만 세월호사고의 유병언 회장의 전권비리가 문제되었듯이 우민화는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이순신을 펌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왜곡이 이러하다면 다른 부분의 왜곡도 상당하게 될 것을 좋게 볼수 만 없습니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왕명 거부는 곧 죽음 이였습니다.지금의 시민들과는 다른 천하고 더럽게 여겨지든 아무 힌없는 백성들의 자식인 병사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구하려 했던 용맹은 알아야 합니다.

 문화 예술이 사실을 기초로도 얼마든지 흥행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14. 8.15  조각글모음편집 : 김배영규

 

칠천량해전에서 3중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적선들과 교전 8척의 적함을 전소시키고 전함12대를 구해내어 거의 반파 상태로 언제 적선이 들이 닥칠지 모르고 (퇴각명령은 대역죄인 )므로 물살이 세고 깊은 진도 세월호가 침몰했든 맹골수로가 있는 명량까지 장장 200km를 항해합니다. (도망이라는 소릴들음)배설이 전함을 부산부근에 두었더라면 왕명에 따라 그곳에서 전투를 해야하고 그래되면 승산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파도가 쉴세 없는 먕량 진도 앞 바다에 진을 치므로 배설은 파도에 시달려 병이 듭니다. 도주하면 간단한 일을 왜군을 잘 파악한 배설이 노량과 명량에서 해전을 할 수밖에 없도록(세월호가 침몰했던부근) 울돌목이 있는 부근에 진을 치고 전투준비를 하다 병이 듭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장군도 파견되어 얼마 안되 병을 자주 앍습니다..그만큼 바다가 거치른 곳으로 퇴각해서 야위고 쇄락해 진 배설장군에게 읽어버린 동료장군들과 병사들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삼남의 백성들은 칠천량패전으로 절망속에 통곡의 땅이 되었으니 그의 마음인들 온전할 수 없었겠습니다. 도망간 조선수군 12척의 패잔병을 잡겠다고 왜군 연헙함대는 333척이나 동원 하여 전멸시키려고합니다.

 

장군의 말년은 슬슬하고 외로운 병마와의 귀향이였으며  전쟁이 끝나고 전공다툼으로 벌어진 역모죄로 참수 됩니다. 그러나 경상도관찰사 한겸직이 파직을 각오하고 시신을 수습 장례를 치루어 줍니다.(실제 경상도관찰사 한겸직은 파직됨) 죽음에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향토문화대전

[정의] 경포호수 안에 있는 팔각 누정. [개설] 1958년 기해생(己亥生) 동갑계원 28명이 건립하였다. 월파정 위에 새 모양이 세워져 있다. [명칭유래] 월파정이...

 

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장군,(내전을 끝 내다)참고자료:엔하키위크

배설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배설에 감명받은 왜장의 대승)

서기 1600년(케이쵸慶長 5년) 음력 9월 15일에 일본 미노 국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 현 후와군 세키가하라마치)에서 벌어진 전투. 일본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모리 테루모토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 간 내전이 귀결된 결전이다. 이 전투에서 승자에게는 향후 260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권한이, 패자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력규모도 양군 총합 17만 명을 웃도는데다가 향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큰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가 진행된 시간은 고작 3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는 동군과 서군 간 벌어진 일련의 내전행위를 총칭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며, 전투는 중앙뿐만 아니라 도호쿠, 호쿠리쿠, 큐슈 등 일본 전국에서 벌어졌다.


 

전투 결과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향후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고 조선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호전되는데다가 여러 다이묘들이 실각하거나 전봉되는 등의 정치적 의미는 대단히 크고 중요하다. 세키가하라 합전(合戰), 동서합전이라고도 부른다. 워낙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라서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세키가하라'라고 하면 일종의 '중대한 승부처'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 사건 등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쓰인다. 창작물에서도 가끔 "여기가 우리의 세키가하라야!"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시기적으로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종전한지 2년만에 일어난 일이라 임진왜란 때 조선에 주둔했던 왜군 수장들도 다수 참전했다.[1] 고니시와 가토처럼 임진왜란 때도 서로 반목하고 경쟁하곤 했지만 이제는 진짜 적이 된 것이다. (출처:엔하키미러)





여대로는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으며 여러 전설을 남겼는데, 당시가 아니라 400년이 지나서 실현 되고 있음은 정말 놀랄 일이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금오동천(金烏洞天),배설(善山府使)의 산성수축기념석각(山城修築紀念石刻), 누정(樓 亭) 백운재(白雲齋), 경파정(景坡亭), 금오정(金烏亭), 대관정(大觀亭), 취영정(聚英亭), 진덕정(進德亭), 긍운정(肯雲亭)....

 

1, 조선왕조는 전주本 섬진강氣運

조선 왕조는 전통적으로 전주 이씨라는 것으로 호남을 우대 하고 정신적인 지주로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도 호남 동부 세력인 동인들이 주도하여 국난에 대처 했다. 임진 왜란 이후로 영남의 인재들이 본격적으로 발탁 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호서세력(유성룡, 권율, 이순신,) 조선을 주도 했었다.

 

 

 2,금오산황지전설의 유래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영남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금오산의 황지 때문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세계를 다스릴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즉 중국의 숭산과 금오산이 황지의 터임에도 물이 없어 활원이 안된다는 뜻에서 9정 7택을 조성하여 만 백성들에게 큰 덕이 미치게 했다.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데서 금오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풍수설도 많은 산이어서 특히 왕이 태어날 운세라는 금오산 중국과 일본을 먹여 살릴 대혜를 베풀 세계를 이끌 황제가 조선 땅에서 태어나게 해달라는 큰 덕을 외치는 소리는 지금 이시간에도 쉬지 않고 있고 지난 420년 간 흘러 내렸었다. 정상부에는 용샘(龍泉)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지못한 애절한 건설이 깃든 용샘이다.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320년 이 지난 시점인 고종은 1873년  종묘에서 “배설 병조판서 가중하는 “해원식”의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림에게 반포했다.

 

배설 장군은 1873년(고종 10년)에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중한다. 조선 왕조가 진 빛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나 끝내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게 강간 살해되어 시신이 강제로 화장되고 말았었다.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19년 후인 고종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했고,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






3, 구국의 정신 배설 본받기(고종)대원군의 노력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영일동맹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일제에게 치외법권을 내세우며 저항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결국 벌금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한양에서 양화진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장례행렬과 연해주 만주 미국에서 성금을 보내어 비문을 만들다.

         * 배설 묘비문(장지연)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일제만행으로 깍아버린 비문)


재판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향년 37세에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눈엣가시인 그의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후에 언론인 성금으로 그 묘비 옆에 조그만 비석으로 비문을 복원하였다.



 임진 왜란의 배설이 역적이거나 탈영병이라면 고종 황제가 영국인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국난 앞에서 고종황제가 배설의 이름을 부활시킨 것만 보더라도 일제의 역사 왜곡 임을 알 수 있음에도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조롱하고 있으니, 조금 지식인이라고 하면 영남 의병장 배설을 비난하는 누워서 침뱉는 이 어리썩음을 어찌하겠는가?


배델(E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지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영국 언론인이다. 한국명은 배설(裵說)이다. 그는 같은해 7월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과감히 비판하여 국민의 의분을 북돋워 배일사상을고취시켰다.

 

 

 

일본의 침략행위를 지상(紙上)에 폭로했다. 일본은 영국인으로서의 치외 법을 이용하여 배일론(排日論)을 앞장서서 이끄는 이 신문을 억압하기 위해 영국정부에 외교공작을 펴 그의 국외추방을 꾀했다.

 

 

 

그 때문에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에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의 재판에 회부되어, 상하이에서 3주간 금고형을 받았고, 1909년 서울에서 죽었다.대한매일신문의 위력을, 안중근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이렇게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운의 고종황제는  고심한 후 배설이란 이름을 내렸다. 비운의 장수 배설처럼 꺼져가는 대한 제국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였다. 잊혀 진 배설 장군에게 고마움의 신원이 고종의 손으로 추가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의 풍전등화 앞에서 배설장군의 은혜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었다.



구국의 간절한 염원처럼 배델은 비운의 언론인으로 목숨 건 투쟁으로 비운 속에 운명했다. 한 영국인이 배설장군의 분신이 되어 부귀공명을 버리고 비운으로 명멸해갔다. 한 이방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토요토미 각하는 "다 된밥에 재뿌린 베세루"자나 깨나 베세루 조심합시다. 일본 고등검찰 수뇌부와 테라우치 총독의 배설에 대한 컴플렉스는 광적이었다. 끝 내 파란 눈의 영국인은 비운으로 죽고 말았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속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항일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준 배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 한마디 
  "내 눈으로 조선의 독립과정을 보고싶다.. 날 한국에 묻어달라!"  그의 죽음에 애도의 물결이 양화진 묘소까지 인산인해로 애통해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4, 금오산 皇地의 역사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

 

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금오산성 사적비>



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5, 금오산 성 북문 '큰 은혜'를 뜻하는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출처: 오마이뉴스 정만진)





6, 대혜폭포(명금폭포)

경북 구미의 대혜폭포는 금오산 중턱인 400m지점에 있는 높이 28m의 큰 폭포이다.대해폭포는 명금폭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명금이라는 이름은 금오산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폭포소리가 우창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혜라는 이름도 이 폭포수가 구미로 글러들어 구미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는 큰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배설이 일본군 제 4 6 7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비축한 곳이다. 그로 인해 조선 의병 2만 명과 관군 3만 명을 먹여 살린 ‘혜창’이 있어 피란민들도 합세하여 살아 난데서 유례한다. 이 대혜폭포는 폭포 자체도 웅장하지만 폭포 주변의 절벽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 경치 또한 아름답다.



일제시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오카기키 테츠로(일본어: 岡崎哲郎おかざきてつろう) 경북도지사 가 대혜폭포를 방문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그 즉시 석공들과 일본스님들을 불러 바위에 “명금폭” 이라고 새기게 했다. 그 이후로 이폭포를 “명금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금이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는 뜻임에도 일부 관광객들은 명금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처럼 "명금폭" 금오산에 토요토미의 눈물이 떨어진다는 뜻임에도 일제시대에 애써 명금폭포라고 불렀다.


아래 사진에 어디에도 폭포란 말이 없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은 오졸한 서생(書生)이어서 일을 초창하여 경영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듯하니,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먼 곳의 일을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체찰사에게 물어서 그 회보를 기다린 뒤에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배설(裵楔)에게 전적으로 맡겨 조치하게 하여야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皇地 금지오산성 大惠問(북문) “배달민족에 큰 은혜”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이란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을 살린데서 유례한다. 대혜문에서 20분 폭포의 "물 떨어지는 소리가 皇地 금오산의 울음소리" 皇地를 울린다. 이 땅에 백성을 바라보고 운다는 뜻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고, 이는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온 천하를 다스릴 “皇地”로 ‘대혜폭포’로 불린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문과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 백성들과 영남의병 2만과 관병 3만을 먹여 살린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배설은 내성(內城) 안 곳곳에 왜적과 장기 항전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아홉 우물과 말들을 위한 일곱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를 타고 부산까지 흘러간다.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지점에 정암'솟바위(鼎巖)라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금오산의 물이 들어 온다면 ' 이 바위 십리 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큰 부자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는데, 전설대로 금오산성을 배설이 중수한 이후에 이 곳 부근에서 나라의 여러 재벌들과 수많은 중소 기업들 의령의 삼성의 이병철, 진양 지수의 엘지, 함안의 효성, 벽산, 동양 나일론 등등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생겼났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를 축으로 하든 시대에 상상도 꿈도 못꿀 전설이 오늘날 현실이 된 것은 수많은 고난과 피흘린 대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경남의 사람들이 금오산 대혜폭포의 물을 병에 받아 가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명나라군 대장 이여송이 직접 구미 금오산 지맥을 칼로자른 용우뜸에 칼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여대로가 배설이 축성한 #금오산성을 본후 놀라면서 사람이 아닌 신기라면서 "반공을 가로질러 성을쌓았으니 진백이와 시황제가 흉내낼 수 없으리라"란 구절 이로인해 조선의 금오산 황제출현 전설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7, 영남시대의 전설의 주인공 여대로

 여대로(呂大老)[1552~1619]는 김천시 구성면에서 태어남,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을 이루려는 뜻이 남달랐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정구(鄭逑)·장여헌(張旅軒)·정경세(鄭經世) 등과 교의(交誼)를 맺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여대로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하였지만 만나지 않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피해 버렸다고 한다.

 

정암진 전설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여대로란 도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곽재우 장군를 보좌한 배설의 아들 등암 자장의 역할에 고무되어 예측한 전설이하는 주장과 여씨 시조가 정암진 부근에 있는데서 미래의 환영을 투시했었을까? 어째튼 기업인들은 이러한 전설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옛날부터 인물은 지령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도 “거의 나라가 없어진 지 달(月)이 넘었다”사실 조선은 망해 없어져 버린 것이었음에도 금오산을 기축으로 영남의병의 봉기와 장기 항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8, 금오산성 국방 전략요충지는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 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泗溟大師)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朝鮮佛敎通史 上篇)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의 샘과 일곱의 못을 팠다고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흔적이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중 영남 보장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선조 29년(1596) 11월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 충청 . 경상도 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상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

 

路)의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宣祖實錄 卷 82)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병신년(1596)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宣祖實錄 卷 82 )

 

선조 30년(1597) 1월,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원익도 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상주목사 정기룡이 감사대장군을 겸하여 상주진영하 9개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목사 이수일과 함께 이 성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이곳 본영을 중심으로 하여 그 후 여러 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니 그중에서도 정기용이 인근 28개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내려가서 1만2천명의 적을 전멸케 한 고령전투는 금오산성이 전략본영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한 큰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을 삼송유고(三松遺稿 卷之一)에서 짐작할 수 있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선조39년(1606)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축성금오시일기(築城金烏時日記) 三松遺稿卷之二에 의하면 4월부터 공가를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고 한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일꾼 연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 밖의 문루(門樓.西門), 포루(砲樓.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어졌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선조39년 병오년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1,730보(步)나 되었다. 그후 30년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출처:사이버금오산)


한국인들이 일본 관광중에 꼭 한번 정도 가보는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구마모토산성이 바로 임진왜란에 울산에서 배설의 금오산성과 대치하면서 연구하여 금오산성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안에 우물을 24개나 만든 유일한 산성이기도 하다. (구마모토산성의 母성)  

 

 








 

1, 조선 침략을 총지휘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句沈이 성주성(부상현) 전투에서 배설의 칼을 맞고 목이 달아나서 사망하자 장남인 黒田長政에게 부젠 나카츠에 12만5천석의 영지를 하사받아 물려주었으며, 동생의 죽음으로 간베에 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조스이칸(如水軒)이란 호를 사용하다가 말년 임진란 실패로 미쓰나리와 불화로 풍신수길의 미움을 받게되자 조이스엔코(如水圓淸)라는 호로 바꾸어 나카쓰 성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정유재란 때 배설의 粧作龜船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龜甲車)등을 설계하기도 했다.(배설의 장작귀선을 모방한 거북마차를 개발 전투에투입하려고 했음)

 

임진왜란을 총괄 기획 입안한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나가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제 1등공신 위로써 지젠노쿠니 후쿠오카(福岡) 52만 3천석을 영지로 하사받아 흑전구침을 애통해 하면서, 장남 흑전장장정에게 물려주고 일체 정치를 떠나 은거하다 59세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출진하여 사망한 黑田句沈官兵衛는 구로 요시타카의 동생이다. 실제 가문의 계승자 였으나, 성주성전투에서 배설과의전투에서 전사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하고 불구의 귀신이되고 말았다.

 

(흑전구침은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는 중군의 장군이였다. 가토 기요마사와 평의지 등이 모두 지휘를 받았다.)平義智는 일본 조선간의 사신이였으며 공격 선봉이였음, 임진왜란 당시 일본측 협상 담당자였든 平義智와 黒田長政이 黑田句沈:官兵衛을 호위하고 있었다. 배설은 黑田句沈의 목을 베고 추격하여 무계진까지 추격했다. 

 

戎武大將 水軍節度使兼副元帥[ Bea seal, or soldier ,or general]裵楔,水軍節度使兼副元帥 )배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아 이순신과 함게 근무하였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일본측의 임진왜란 15만 8천 대군중에 약 5만 명이 굶주려 죽은 일본측 기록과 인육을 식량으로 사용할 정도가 될 정도로 배설에게 식량을 강탈 당한 사실이다. 당시는 경상도가 남북이 없이 하나였고,  금오산을 반경으로 영남 병사들  5만을 살린 것이 결국은 일본의 군량 때문이었다고한다.^^ 









1,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2, 1차 진주성 외곽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세루'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쫒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횄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녂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3, 진주성 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세루'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시무상주'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4, 진주성 대첩 대승으로 배설이 진주목사에 임명.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참고자료)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조실록> (출처: 명량 왜곡과 진실 미출판부분 공개자료)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몆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군님의 명령은 받았다고 보입니다.


 

 

 

 

 

 

 

 

5,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경상도방언)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가토의 심복 가토상월의 전사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과 남하 명령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버드나무와 매화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버드나무와 매화나무의 거대한 옹이는 조총의 총알을 흡수하는 특별한 신축성이 있어 조총을 무력화 했기때문에 일본군은 매화나무 고목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아기나무들만 일본으로 훔쳐간 것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6, 일본군이 이해하지 못 한 전투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 체격은 160센티 정도 왜군들 평균 체격은 140센티 이하 추정)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全滅ではなく、艦砲打撃を加えて防御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意志折っ撤退させようとシンスギル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負わせた羽柴秀勝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일본의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명량 노량 한산도대첩이 아니다, 양차 진주성 전투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설에게 패배한 일본은 전력을 다해 2차 침공을 했고 결국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 군사적으로 큰 규모의 희생이 있었다. 하시바 히데카츠의 사망으로 격분한 일본군이 이성을 읽고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민초들이 설에게 몰려갔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어쩌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부상진전투에 부상당한 하시바 히데카츠가  퇴각하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 진주성 전투가 임진왜란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


1228일 갑인(甲寅)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황윤(黃潤)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평양(平壤)ㆍ경성(京城)의 적들은 여전히 온통 가득 차서 득실거리고 있으며, 죽산(竹山) 등지의 적들과 서로 연락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 ★【배설】★(裵楔)을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고, 김시민(時敏)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삼고, 김 대장(大將) ()을 경상도 도대장(都大將)으로 삼고, 서예원()을 김해()에 유임시키며, 성천지(成天祉)를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삼는다는 전교(傳敎)가 있었다. ○ 호서(湖西)의 의병(義兵)이 와서 개령(開寧)을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김수()가 체직(遞職)되었다.(1592 고대일록)



 

 




일제의 역사 왜곡만행,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진주대첩 배설 거사비가 홰손 된 것도 이 당시 이다.

근데 궁금하요?

배설 장군의 행적과 진주성 거사 비문을 깍아버리는 만행을 보면 도망자 배설에 대한 일제의 만행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