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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自公有花 2014. 8. 31. 15:15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이순신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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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라도 어느 촌구석 현감이던 이순신,
권력에 빌붙어 임진왜란 1년전 절라좌수사에 낙하산 공천되지요.
아직 군수 자리도 못 해본 땅강아지 새키를,
그것도 우수사 이억기 처럼 북방 여진족을 격퇴한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함경도에서 패전만 했던 듣보를 수군 절도사에 올리다니요?

임진년 4월, 쓰시마를 떠난 왜군들이 부산진을 향해 들이 닥치자,
화들짝 놀란 경상좌도 수사 박홍이 달아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황급히 절라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요청을 합니다만,
응당 협공했어야 할 이순신은 눈 앞에서 경상 내륙 백성들이 도륙나는 상황에도
준비 미흡을 핑계로 절라도 본진만 지키면서 20여 일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후에 원균과의 공조로 승전을 거듭했어도 전공은 이순신과 그 수하들이 독식하고,

삼도 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은 압도적인 군세에도 불구, 몸사리며 어슬렁거리기만 하다
사헌부, 사간원의 거듭된 탄핵을 받았습니다만 선조는 감싸기만 했죠.
왜군을 섬멸하라는 조정의 출병 명령을 대놓고 어긴 후에야 파직 되지만...
이순신에게 충은 커녕, 상명하복의 군인정신은 없었다고 봐야죠.
북방에서 별 볼일 없던 놈이 해전에선 승률이 좋았던 것도 이유가 있었지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해 질 것 같은 싸움엔 나가지 않았던 겁쟁이 아웃파이터 였으니까요.
원균은 조정을 따르는 도원수 권율한테 곤장 맞아가며 울며 겨자먹기로
출전했다 칠천량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실제, 부관이었던 무의공 처럼 활을 잘 쏘나? 아니면 말을 잘 타나?
무예실력도 형편없던 허당이 함경도에서 징징거리다가 병력 다 털어먹어 곤장 쳐맞고,
어중이 떠중이 돌아 다니다 수군절도사에 제수됐는데 빨은 겁나 좋은
왜란 발발해가 왜군 선봉대가 경상좌수영으로 들어가니,
절라도 짱박혀 있다 뒤늦에 기어 나와 싸우는 척 하고 수군통제사 승진 오예,
판옥선이랑 수군 버프 받아 연승하니 신난당께~~

난중일기에는 소심하게 다른 장수들 뒷다마 까는 내용만 졸라 적어 놓고
선조한테 통제사 못해 먹겠다고 상소해 애꿎은 원균 육지로 전출가게 만들고,
거북선은 니가 발명했냐? 왜 자기가 만든 것처럼 사기침? 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과 내전에서도 써먹은 학익진 특허낸 것처럼 사용하고,

왜란 전까지는 제대로 된 전공 하나 없었던
무능하고 고지식했던 졸장이 명량 감성으로 명장으로 둔갑한 조선 최고의 사기극!
역사라고는 침략만 당해 털리고 남은 게 없으니 고증도 못해
허구헌 날 조선시대, 이숭신 시리즈만 지겹게 방영해 세뇌, 찬양하게 만드는 ㅡㅡ
살아서 욕 쳐먹다 뒤지니까 미개한 국뽕들이 빨아주는 전설적인 거품 ~

이 고숭신 장 전군이 그립습니다 ㅠㅠ(출처:네이버지식인)

 

 

 

아래의 내용은 3일자 네이버 지식인에 ‘이순신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올라가 있는 것이다. 닷새 만에 조회수 50000을 기록했으니 네티즌들의 관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역사연구가인 필자가 그 주를 달아보았다.

 

절라도 어느 촌구석 현감이던 이순신,

권력에 빌붙어 임진왜란 1년전 절라좌수사에 낙하산 공천되지요.

아직 군수 자리도 못 해본 땅강아지 새키를,

그것도 우수사 이억기 처럼 북방 여진족을 격퇴한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함경도에서 패전만 했던 듣보를 수군 절도사에 올리다니요?(주1)

 

임진년 4월, 쓰시마를 떠난 왜군들이 부산진을 향해 들이 닥치자,

화들짝 놀란 경상좌도 수사 박홍이 달아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황급히 절라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요청을 합니다만,

응당 협공했어야 할 이순신은 눈 앞에서 경상 내륙 백성들이 도륙나는 상황에도

준비 미흡을 핑계로 절라도 본진만 지키면서 20여 일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주2)

후에 원균과의 공조로 승전을 거듭했어도 전공은 이순신과 그 수하들이 독식하고,(주3)

 

삼도 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은 압도적인 군세에도 불구, 몸사리며 어슬렁거리기만 하다

사헌부, 사간원의 거듭된 탄핵을 받았습니다만 선조는 감싸기만 했죠.(주4)

왜군을 섬멸하라는 조정의 출병 명령을 대놓고 어긴 후에야 파직 되지만...

이순신에게 충은 커녕, 상명하복의 군인정신은 없었다고 봐야죠.(주5)

북방에서 별 볼일 없던 놈이 해전에선 승률이 좋았던 것도 이유가 있었지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해 질 것 같은 싸움엔 나가지 않았던 겁쟁이 아웃파이터 였으니까요.(주6)

원균은 조정을 따르는 도원수 권율한테 곤장 맞아가며 울며 겨자먹기로

출전했다 칠천량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실제, 부관이었던 무의공 처럼 활을 잘 쏘나? 아니면 말을 잘 타나?(주7)

무예실력도 형편없던 허당이 함경도에서 징징거리다가 병력 다 털어먹어 곤장 쳐맞고,

어중이 떠중이 돌아 다니다 수군절도사에 제수됐는데 운빨은 겁나 좋은지

왜란 발발해가 왜군 선봉대가 경상좌수영으로 들어가니,

절라도 짱박혀 있다 뒤늦에 기어 나와 싸우는 척 하고 수군통제사 승진 오예,

판옥선이랑 수군 버프 받아 연승하니 신난당께~~

 

난중일기에는 소심하게 다른 장수들 뒷다마 까는 내용만 졸라 적어 놓고(주8)

선조한테 통제사 못해 먹겠다고 상소해 애꿎은 원균 육지로 전출가게 만들고,

거북선은 니가 발명했냐? 왜 자기가 만든 것처럼 사기침? 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과 내전에서도 써먹은 학익진 특허낸 것처럼 사용하고,

 

왜란 전까지는 제대로 된 전공 하나 없었던

무능하고 고지식했던 졸장이 명량 감성으로 명장으로 둔갑한 조선 최고의 사기극!

역사라고는 침략만 당해 털리고 남은 게 없으니 고증도 못해

허구헌 날 조선시대, 이숭신 시리즈만 지겹게 방영해 세뇌, 찬양하게 만드는 ㅡㅡ

살아서 욕 쳐먹다 뒤지니까 미개한 국뽕들이 빨아주는 전설적인 거품-- (주9)

 

 

이 고숭신 장 전군이 그립습니다 ㅠㅠ

 

 

 

(주1) 시골면장급인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군단장급으로 승진되었다. 이것은 국무총리급인 친구 유성룡 덕택이었다. 당시 조정이 유성룡의 손안에 있었다.

(주2) 이순신은 원균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며 출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운 등 부하들이 ‘이순신이 자신의 영역만을 고집하면 자신들도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이순신이 일본군이 모두 부산에 상륙한 뒤에 어렵사리 출동했다.

 

이순신 연구가인 김종대는, “조선수군이 일본군의 부산 상륙을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북진만은 못하게 할 수가 있었다. 상륙하는 일본군의 뒤쪽을 공격했으면 엄청나게 큰 피해를 입힐 수가 있었다. 그런데 수군절도사들이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보았다.”라고 통탄했다. 이순신을 하늘같이 받드는 사람인 김종대가 그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매도한 것이다.

 

(주3)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가로챈 장계를 조정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원균은, 이순신의 친구인 유성룡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관계로 사실을 바로 밝히는 장계를 올려도 인정받지 못했다. 조정에서 나중에야 그 진실을 알고 이순신을 질책했다.

 

(주4)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하고 삼년간 일본수군과 싸우지 않았다. 선조가 왕자를 이순신에게 보내 ‘나가 싸우라’고 지시해도 이순신이 싸우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가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낮잠만 자는가!’ 하고 탄식했다. 유성룡의 손 안에 있는 선조로서는 이순신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주5) <왜군을 섬멸하라는 조정의 출병 명령을 대놓고 어긴 후에야 파직 되지만>라는 말은 역사적 사실이다.

(주6) 이순신은 한산도, 명량 해전 이외에는 일본 수군과 정면 대결을 벌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안위만 생각해 질 것 같은 싸움엔 나가지 않았던 겁쟁이 아웃파이터 였으니까요.>라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할 수가 없다.

 

(주7) 이순신은 무과 기마술 시험 때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조선시대 통틀어 기마술 시험 때 말에서 떨어진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까지는 워낙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줄 수 있지만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것만은 그래 줄 수가 없다. 이순신은 말도 제대로 탈 줄 모르는 형편없는 무인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스물두 살 때 처음으로 기마술, 궁술을 배웠다. 서른두 살 때 하사관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주8)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자기는 잘했고 남은 잘못했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기는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기가 막힌 것은 오늘날 중학교 국어 책에 난중일기의 그 내용을 올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주9) 이순신이 공을 세운 것은 순전히 원균, 정운, 이억기 덕택이라고 당시 식자들이 말했다. 이순신이 명량해전 때에는 세 사람 없이 승리하기는 했다. 그러나 공훈은 목을 벤 적군의 수효로 평가하는데 명량해전 때는 고작 몇 명의 적군의 목을 베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상을 내리지 않았다. 이순신은 칠년전쟁 내내 승전다운 승전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가 노량해전 때 총사령관인 진린에게 눈물을 흘리며 출전을 간청했다. 당대의 기록에 의거하면 한산도, 부산, 명량 승전 때에는 일본군 많아야 수십 명을 죽였을 뿐이고 노량 승전 때에 비로소 수천 명을 죽였다. 수천 명은 굉장히 큰 공훈인데 조정에서는 물러나는 적군을 죽였으므로 의미가 없다며 그 공훈을 깎아내렸다.(출처:역사연구)

 

이순신의 삼대대첩으로는 명량, 한산도 전투와 부산 또는 노량 전투가 들어지고 있다.

 당대의 기록에 의거하면 명량, 한산도, 부산 승전 때에는 일본군 많아야 수십 명을 죽였고(주1) 노량 승전 때 비로소 수천 명을 죽였으므로 노량 이외에는 대첩이라고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산도 전투가 이순신의 최고 승첩으로 또한 임란 삼대대첩의 하나로 꼽혀진 것은 임진왜란 전쟁의 승패를 갈랐기 때문이었다.(주2)

 

이순신은 당대에는 조선, 일본, 중국에서 평범한 무장으로 여겼다.

그가 죽고 백년 뒤에 조선과 일본에서 그를 재평가하게 되었다.(주3)

오늘날 이순신은 한국에서는 최고의 영웅으로 숭배 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군인들한테는 숭배 받기도 하지만 역사연구가를 포함한 일반인한테는 그저 그런 무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역사연구가들이 이순신을 별로 쳐주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작가가 쓴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책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임란 칠년전쟁 때의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언행을 자세히 다룬 그 책에서 이순신에 관한 것은 한 마디도 없고 조선의병(곽재우)이 무섭다는 말이 있을 뿐이다.(주4)

 

 

권율의 행주, 이순신의 한산도, 김시민의 진주 승전은 임란 삼대첩으로 꼽혀지고 있다.

그런데 일본 측 기록에 의거하면 한산도의 패배 때 피해가 미미하고 행주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전한 전투이고 진주 패배 때에만 수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점에서 본다면 임란 칠년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는 한산도, 명량 전투가 아니라 양차 진주성 전투였다. 이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 측이 패배했지만 그 규모는 세계사적으로 큰 것이었다.(주5)

 

이 전투 때 일본군이 진주성의 백성 수만 명을 몰살시켰다.(주6) 그래서 그때까지 일본군에게 호의적이던 조선의 상민들이 그들로부터 돌아섰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자기 나라로 물러난 것이었다.(주7) 그렇다면 이차 진주성 전투야말로 임진 칠년전쟁의 승패를 가른 전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1) 구미 해군사관학교 교재에서 한산도 전투를 세계 사대해전의 하나로 쳐주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의심스러운 것이 아무리 의의가 크다고 하더라도 고작 적군 수십 명을 죽인 승전을 사대해전에 넣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2) http://blog.naver.com/yukin48/50191010511

 

(주3) http://blog.naver.com/yukin48/50191010511

 

칠년전쟁 당시와 그 후 백년간 일본인들에게 이순신은 무명의 인물이었다. 유명한 인물은 김시민(진주목사)이었다.

 

조선인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진주성 전투의 의미를 더 잘 알았던 것 같다. 임란 백년 후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일컬어지는 유명한 극작가가 김시민을 비록 악역이지만 주연으로 한 극작품을 내놓았다. 그 후로도 역시 악역이지만 김시민을 주연으로 한 극작품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 작품들에서 진주목사(김시민)는 한결같이 조선 충신 장군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모쿠소(김시민) 관은 일본 근세문학의 심층에 각인되었다.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경향미디어 刊)》

(주4) http://blog.naver.com/yukin48/220011843960

 

(주5)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294196&qb=7KeE7KO87ISxIOyghO2IrA==&enc=utf8§ion=kin&rank=7&search_sort=0&spq=0

 

 

 

​이차 진주성 전투는 중세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다. 그런데도 한국의 역사연구가들은 진주성 전투에 전혀 주의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이순신이 숨어 있다가 나타나 일본군 배 몇 척을 부수고 몇 명을 죽인 보잘것 없는 전투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순신의 스물세 번 승전 가운데 스물한 번 승전은 아무것도 아니고 명량해전은 전국(戰局)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국지적 전투이고 한산도해전은 이순신 해군이 압도적 전력으로 일본 해군 소부대를 유린한 작은 전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도, “일차 진주성 전투 때에 자신들이 패하여 수만 명을 잃었고 이차 진주성 전투는 승리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패배한 전투”라고 말하고 있다.

(주6)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복귀하자 백성들이 그에게로 몰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군들이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코를 베거나 잡아갔다. 남해안의 조선인들로서는 이순신에게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백성들이 그가 나타나면 달아나 숨었다. 왜냐하면 이순신이 부하들이고 백성이고 간에 모두 인정사정없이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그들은 그의 본거지인 한산도에 ‘귀신소굴’이라는 명칭을 붙여놓았다(이항복 기록).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하고 삼년간 아무런 공훈도 세우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주7) 당시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는 일본의 군대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http://blog.naver.com/yukin48/50191010511

 

​일본군이 조선민중이 자신들로부터 돌아선 관계로 견뎌낼 수가 없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간 것이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294196&qb=7KeE7KO87ISxIOyghO2IrA==&enc=utf8§ion=kin&rank=7&search_sort=0&spq=0

 

전쟁에서는 인민의 마음을 잃은 편이 패하게 되어있다. 히데요시는 임진년 조선 침공에 나서는 부하들에게 ‘조선인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조선인은 무자비하게 도륙시켰지만 그 명령을 대체적으로 따랐다.

조선천민들은 이씨왕조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뒤집혀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천민들은 새 통치자가 일본군이 되던 누가 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불과 두달만에 평양까지 점령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런 조선 정황 덕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을 움직이는 자는 천민들이 아니라, 비록 그들에 비하면 소수지만, 선비들이었다.

 

조선민중의 저항으로 일본군이 궁지에 빠지게 되자 히데요시 조정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공포에 빠져 복종하게 만들려고 진주성 육만여 인민을 학살시켰다. 진주성 초토화는 이 전쟁에서 히데요시의 최대 악수이고 사무라이 집단 한계의 발로였다. 진주인민 학살 후 조선천민들의 마음이 히데요시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 진주성 전투 후 히데요시 조정은 사실상 몰락의 길에 들어서버렸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히데요시는 발악적 방책으로 전라도 인민 학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조선민중의 마음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경향미디어 刊)》

출처 : http://blog.naver.com/yukin48/220094360207 (출처:역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