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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自公有花 2014. 9. 1. 07:50

동북아시아 평화와 임진왜란 

일본은 300개의 봉건 제국들이 신무기인 조총이 서양에서 전래되어 풍신수길이 일본통일을 이루게된다. 300개 국의 통일에 대한 논공행살으로 인한 무장들의 반란이 잠재되어 있었고 전전 300여개 국가의 귀족들이 통일국가에 적응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잉여된 과도한 병력을 합리적으로 소진 시킬 필요가 있었다.

 

1, 정명가도(征明假道)

풍신수길은 전국 각지의 무장들의 반란을 억제할 마땅한사수단이 없었다. 따라서 대명전쟁을 통하여 통일국가를 유지하려고 조선에 길을 비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정세는 갑자기 토일국가를 이룬 일본외 막강한 군사력에 비추어 기정사실화된 요청이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왜구들이 통일국가를 이루어 전쟁준비를 하는데 길을빌려 준다는 것은 일본에 복속되는 것을 말하고 대명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것으로 풍신수길에 항복을 뜻하는 것, 중국 진출에 조선군이 앞장서게 됨을 허락하지 않고 반대를 하게 된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불가피한 희생이 였다. 비밀리에 이율곡등 군부 일부에서 전쟁준비를 하게 되고 배설장군은 경상도 진주를 근거지로 합천 한산등지에서 군사양성과 전함을 건조 성벽의 정비를 하게 된다.(전쟁이 불시침략이아님)

 

임진왜란은 풍신수길의 야망인 "정명가도"가 거부됨에 따른 불가피한 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려는 전쟁으로 발발되었으며 이미 조선에서 상당한 전쟁준비가 되어있어 7년 전쟁을 버티게 된 것이다. 또 한 임진왜란은 대명정벌을 반대해서 조선이 중국을 대리해서 치른 전쟁인 만큼 명나라의 참전을 굴욕적으로 볼 수 없음에도 선조는 명나라의 구원에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 명에 속국화를 진행시켰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은 조선정벌의 목표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풍신수길의 우려 대로 전쟁실패의 책임으로 일본은 내전이 일어난다. 조선에 진출한 왜군들은 조선민중의 저항으로 점령을 포기하고 철 수 하게 된다. 일본군은 원정군으로 일본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게 된다.

 

배설은 진주성을 근간으로 경남일원의 백성들을 위문하는데 모든 것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관군의 창고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고 백성들도 의병장출신인 배설을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배설은 불운 하게도 이런 선무활동으로 인해 경계되고 군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원균의 휘하에서 칠천량 전투참패의 책임만 떠맏게 된다. 특히 그가 정성을 다한 진주성은 6만여 주민이 전원 몰살 당해 그를 기리든 사람들이 모두 죽는 참극을 지켜보게 된다.

 

점령이 장기화 되면서 왜군들도 전쟁 회의론이 생기게 된다. 아무 이유없는 살육이 7년간 지속되고 이러 한 시기에 배설은 일부 지역이긴해도 왜군이 점령할 엄두를 못내도록 예봉울 겨누고 있었다.

 

왜장들의 허를 찌르므로 그들의 신상에 극도의 압축된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비록 칠천량패전에서도 왜의 수군을 8척 격침하므로 서해를 통해 서울로 진출하려든 계획을 방어한다. 왜구의 전멸이 아니라 방어에 주력했다. 이러한 노력이 왜군에 먹혀 들어 침공을 지연 시키고 철군으로 이어지는 물꼬를 틀어 왜군의 철수로 이어진다.

 

배설은 칠 천량패전에서 퇴각하지만 매서운 맛을똑똑히 보여줬으며 이 전투에 왕명을 받은 선전관 김식이 동행했으므로 엄밀히 말해 왕명을 거부했다고 볼 수 없음에도 당쟁으로 전공을 왜곡하고 끝내 모반죄를 쉬어 참수되는 하늘이 조선백성들에게 내린 비운의 장수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