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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自公有花 2014. 9. 5. 14:49

경상 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위상,  

조선 수군은 지금의 해군과는 다른 특수전 병력을 말한다. 특전사 해병대 UDT 와 같은 최정예 병사들로 원균의 육전을 비하하지만, 이들은 육전을 잘 할 수 있는 최정예 병력이였기에 육지로 퇴각한 것이 크게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당시 전시 통사란 육군과 지방수령을 통할 하는 그야말로 막강한 군권으로 조정대신들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권력이고 도관찰사 관군과 의병 삼남의 백성모두를 통할 하는 것으로 정규병력만 약 3~4만을 지휘하는 야전군 총사령관을 말한다.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휘하 병력은 대략 5.000 정도였으나 지방 관군까지 약 4만 이상의 관군 통수권이 있고, 장군도로 언제든지 왕명을 집행하여 도원수 다음의 서열이다. 전시 왕보다 막강한 병력으로 야전군지휘관인  삼도통사들은 영의정 좌의정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성계처럼 마음만 먹으면 이순신 원균 배설장군은 언제든지 조정을 장악하고 왕조를 세울 수 있었든 전란의 시기임으로 선조는 매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균 배설 이순신 장군들은 충신중에 충신이였든 것이다.

 

 

​1.500척의 왜군 함대의 공격으로 생지옥으로 변한 칠천량해전에서 삼중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은 장수가 '배설장군' 으로 오늘날 위중한 시기에 본받아야 할 장수이다. 절대 불리한 상황을 뚫고 나오는 구국정신과 다른 장수에게 군권을 넘기고 미련없이 귀향하는 것은 본받을 만하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스님]

 

 

칠천량해전은 왜군 10만과 함대 천오백여 척을 조선수군 1만 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으로 장수들은 출전을 망설였고 원균은 수적 열세 때문에 육전을 하려고 했다.  조정은 왜군과 육지에서는 전투이 상대가 안되니 해전으로 백병전을 해서 전멸 당하여 왜군에 피해를 입혀라는 것이였다.

 

 

동인조정과 선조는 조선수군이 전멸하든 말든 부산으로 밀려오는 10만 왜군을 육전은 안되니 해병대가 막으라는 것이였다.

왜군에 타격을 입히고 전멸하면 명나라 군졸들이 지켜주리라는 망상 때문이였다. 명군은 조선왕조를 지키려 출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침공을 막기위해 조선군이 가능한 처절한 전투로 왜군들에게 피해를 입혀주길 바랬다.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안았다.(기동력 함포 전함의 크기를 이용 하자는 것)결국 배설장군은 장작귀선에서 일기를 집필 하다가 전쟁이 종전하면서 강강천과 손조방0에 '三分斬死' 삼도에 나누어 졌다.

 

전공을 세우길 학수 고대하든 이순신은 왜군의 부산 상륙까지 중요한 시점에 출병을 하지 않고 숨어 있었고,  그야 말로 귀신소굴 소릴 듣고도 적을 제앞 할 수단과 방법을 찾지 못 했다. 따라서 이억기를 대신 출병시켰으나 전멸을 하고 말았다.

 

칠천량을 해전을 앞두고 동인조정(유성룡)은 이순신을 체포 압송하여 권율막하에 둔다. 칠천량 해전에 전멸이 예측되자 이순신을 빼돌리고 이순신의 분신인 이억기로 대리 출전을 시키게 했다.(모양은 죄인으로 짜고 친 것으로 선조는 동인조정에 끌려다녔다)

 

배설은 왜군의 전멸이 아니라 함포로 타격을 입혀 방어를 하자는 것이였다. 어떻게든 왜군의 의지를 꺽어 철군시키려 풍신수길과 싸우고 있었기에 전멸을 할 수 없었다.

 

칠천량 패전후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첮 장계가 '배설은 패전으로 전쟁공포증에 걸려있다.'면서 사실상 해임할 것을 음해했으나 선조는 배설장군을 경상우도통사에 이순신을 절도사에 임명한 것만 봐도 배설장군이 얼마나 뛰어난 장수 였는지 알 수 있다.

 

배설장군은 왜군의 대장군 선단과 병력 수송선을 저지하려 했었다. 칠천포 해전에서도 도도와 가토의 장군선단을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고, 배에 기어 오른 원수인 왜군의 수급을 수없이 직접 '월파검'으로 베었다.

 

동인조정은 재주는 배설장군이 부리고 공은 이순신이 챙기라는 것이였다. 칠천포 해전에서 장군의 목숨을 구한 것은 천행이였었다.

 

조선수군전멸은 10만 왜군이 서해로 군산 해망포나 제물포로 바로 진격해서 대규모 살육으로 조선이 항복하게 하려고 했기에 배설은 조정의 전멸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서해 해로인 '울똘목'으로 430km를 기아 상태에서 왜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진을 꾸린다.




왜군의 서해진출방어

도주하는 설 장군 일행치고는 너무도 어렵게 도주한다고 봐야한다. 그냥 세월호 선장처럼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면 그만임에도 천신만고의 전투준비를 하면서 조선백성의 대살육을 저지하고자 해상 심해전투를 위한 전투준비를 하였고, 적의 침략기지화된 대마도출신 평의지(히라요시)를 추격 격살하려고 했으나, 합천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함으로 눈앞에 히라요시를 두고 한탄했었다.

 

 

칠천포에서 보름날 밤에 전멸하고 남은 패잔군, 피항하는 월파군들(칠천포패전군)을 향해 백성들이 산봉우리에서 솟불을 지피면서'강강술래'왜치면 수군들의 안전항로를 거국적으로 알려주었고, '명량포'하거나 '노량포'또는 '울똘목'이라고 신호해서 항로를 가르켜주고 청야작전이 실행되어 낮에는 전함을 수리하고 밤에는 항해했었다.

 

 

우리가 10만 대군에 바다에서 적군에 포위 됐다고 할 때 아무리 장군이라고는 해도 두렵지 않겠는가? 칠천량해전에서 최호의 충청군은 배추밭의 "굼뱅이 한마리가 수천마리의 개미에게 잡혀 뜻기 듯이" 왜군들이 새까맣게 충청수군 배에 올라 도륙당하였다.적벽대전에서 조조같은 명장도 제한몸 돌보기 힘들게 탈출함에도 중원과 반도에서 반만년 역사에 이러한 대규포 포위망을 부대단위로 둟고 퇴각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세월호 침몰 때 승객들이 제 한몸 서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욕하지만, 과연 그 런 사태에서 제 한몸 보존하기도 쉽지 않은게 사람이다. 6.25 전쟁 때 국군들이 퇴각하든 것이나, 칠천량 바다에서 3중 포위망은 빈틈이 없고 육지에는 매복군 철처히 포위했든 칠천량 해전 살아서 나온 것 만도 기적이고 천행일 것이다.

 

아순신의 분신인 이억기장군과 전라 좌수영 약 5,000여 명 병력의  전멸은 불가항력 이였다.

 

전함을 몰고 적장의 선단을 격침시키면서 조선수군을 지켜낸 배설장군은 그 공으로 역적에다 간첩으로까지 후세에서 욕을 먹는다. 과연 이순신 이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명량 영화는 무엇을 우리사회에 줄 것인가. 부정부패, 모함, 당쟁, 철면피가 승리하는 사회, 장군들을 모함하고 욕하는 '난종일기'야 말로 패륜이요 해악의 문서 아니겠는가? 얼마나 많은 장군들을 패망하게 했던 것인가, 

 

옳지 않은 명령

칠천포 패장 배설은 '월파정' 시 한수 만 남긴다. 대장부 중에 대장부 월파군의 대장군답지 않은가?

 

근세에 일본제국주의 도고제독이 이순신을 흠모 했다고 하지만 도고야 말로 우리를 식민지배한 원수였다.

 

칠천포 해전은 온당한 왕명이 아니였다. 현지 사정도 모르든 조정의 무능이 였으며 이순신의 분신이라 볼 수 있든 이억기 장군은 화염속에 왜군들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원 수장되고 말았음만 봐도 알 수있다.

 

배설장군은 왜군을 수중전으로 충분히 방어 할 수 있다고 부산항에 도착하기 전에 적군과 전투를 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건의 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칠천포 해전에서 개같이 죽지 않은 것을 원망하는 동인들 조정의 한계였다. 나라가 왜군들 앞에 풍전등화이니 그래 죽을 수 없어 당연히 죽었어야 할 해전에서 살아남았기에 원망을 받았다.

 

 

울똘목에서 왜군의 대량학살을 막고자 천신만고 끝에 수백리를 항해해서 노량포에서 전투준비를 하는 장군을 이순신은 패장으로 도주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공포증에 걸렸다'고 전쟁터의 장수로서 할수 없는 모함과 조정과 장군을 이간하고 경상우도 병력과 전함을 털도뽑지 않고 냉큼 빼앗고자 하였다.

 

 

나라의 풍전등화 앞에서 장군들이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함에도 배설장군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한후 귀향하므로 종전카드를 목숨과 바꾸어 조선에서 대학살을 막으려 했다.

 

물론 왕조를 유지하려는 조정과 권력을 유지 하려는 동인들의 침소봉대 전공다툼에 공헌하지 않고 귀향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배설장군보다 서열이 낮고 백의 종군하든 대죄인인 이순신을 절도사로 파견하여 장군의 재주만을 이용하려는 조정과 병력과 전함을 뺏으려는 불편부당한 타락한 처사에 구국의 일념으로 할 도리를 다한후 종전카드로 귀향했다.

 

 

왜군의 철군러시(대장군의 귀향과 졸병의 탈영)

먼저 귀향을 실천하여 보이므로 적군들이 무도한 대살육을 내린 풍신수길에게 저항하고 반기를 들게 시범을 몸소 보여주었다. 비굴하게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대장군 다운 목숨을 조정에 바치는 귀향으로 침략군들이 풍신수길에게 칼을 겨누게 하므로서 대역을 깨닫게 했다.

 

무언의 고도의 정치행위인 "귀향"으로 장군에게 영향받고 깨달음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 등등에 의해 풍신수길은 패망하고 그의 일가와 토요토미히로요리를 비롯한 조선침략 원흉들 십만여 적군들의 씨를 말리게 했다.

 

당쟁과 부정한 정쟁의 와중에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대살육을 방어 하는데 음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순신과 김시민을 영웅이 되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장군은 귀향했다.

 

행주 산성에서 퇴각하는 적군을 방어한 도원수 권율은 퇴각하는 왜군을 전멸한 것이냥, 전공을 포장했기에 배설장군에게 과도한 컴플렉스가 있었다.

 

 

 

해병대 사령관인 최정예 부대의 사령관이든 배설장군이 간악무도한 적진을 돌파하며 에헴하든 시대에 일등병도 이등병도 아닌 이름 없는 백성으로 귀향 한 것이다.

 

전공을 세우려고 조선에 출병한 왜장들에겐 가히 핵폭탄급 충격으로 철군 요청 러시를 불러 온다. 허구 많은 길을 두고 적진을 돌파하므로서 왜군들의 신상을 위협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풍신수길이 조선백성들을 살육하고 백성들과 전투했다면 배설은 풍신수길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후일 풍신수길과 그를 따르든 조선 침략장수들을 세키가하라합전에서 씨를 말리게 했고 풍신수길의 일족들의 배를 가른 것이다. 

 

 

 모함과 음해하는 탐욕스런 장수들의 공격 속에서도 조선 백성이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도록 배설장군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 했던 것이다. 장군을 음해하든 수많은 동인들의 공격에도 단 한마디도 원망이 없었다.

 

 

국난을 수습하고자 하는 장군은 부정한 왕명에 맞서고 당쟁의 산물인 정치군인들의 전공다툼을 거부하고 왜군철군과 일본 내전을 촉발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인 귀향을 실천해 보이므로 마지막 목숨 하나도 값지게 나라에 받쳐 '동서'라는 화합만이 만복에 근원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이순신의 모함으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므로써 조선 수군은 전멸된다. 경상도 우도통사 배설장군이 장작귀선 12척으로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노량포로 들어 오므로써 이순신 장군이 해전사에 남을 명량해전이 성립된다. 

 

 

 

 

 

“칠전량 해전에서 사람단위가 아니라 배 단위로 부대단위로 탈출한 것은 배설장군의 경상 우수영 소속으로 이순신은 배설이 이끌고 온 12척의 선단으로 경상우도수군으로 명량해전에 임했다. 

 

 

 

 

명량해전 당시 병력이 경상우수영 병력만으로 구성됐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12척에 장작귀선을 가동할 수 있을 전문 병력이 있었을 것은 틀림 없고, 배설장군이 장장 약 430K를 항해해서 "울똘목"을 향해 항해 했는데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조선의 두왕자를 왜군에 넘겨주고 작위를 받은 것은 전주출신 국경인이다.)

국난시기에 토적(土賊)과 가왜(왜옷을 입고 도적질하는 적들)는 본질상 차이가 없다.

왜에 부역한 자(부왜자)들은 경상도 만이 아니라 전라도 외에도 전국적으로 있었다.

아래는 그 예다.

 

 

“선조 수정실록 27년 12월 1일

호남·영남·기전(畿甸)의 토적(土賊)을 소탕

병란이 일어난 이후로 토적들이 험지(險地)를 점거하고 도발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부터 남원

회문산(回文山), 장성(長城) 노령(蘆嶺) 등 수십 개 군(郡)의 산골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적괴(賊魁)인 김희(金希)·강대수(姜大水)·고파(高波) 등이 나누어 점거하고 서로 내응하였으므로

관군(官軍)이 토벌에 나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제군(諸君)의 병력이 사방에서

모여 수색 토벌하니 적들이 점차 해산하였으며, 관군이 끝까지 추격하여 주살(誅殺)하자 이에 평정되었다.

 

경기의 경우는 적괴(賊魁) 현몽(玄夢)이 광주(廣州)·이천(利川)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고, 이능(李能)이

양주(楊州)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하였으나 오래도록 평정하지 못했었다. 이에

비변사가 변응성(邊應星)을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성영(成泳)을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삼은 뒤 서로 죽이고

투항하도록 현상금으로 모집했는데, 이능이 먼저 자기의 무리에게 죽음을 당했다. 현몽이 가장 사나웠는데

그의 무리는 항복하거나 흩어졌지만, 현몽은 도망하여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3일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전라도)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 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 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 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선조 30년 11월 12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기를,

“해남(海南)•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무안(務安)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적에게 붙어

사족(士族)의 피난처를 일일이 가르쳐 주어, 거의 다 살륙되었습니다. 해남(海南)의 노직 향리(老職鄕吏)

송원봉(宋元鳳)과 가속 서리(假屬書吏) 김신웅(金信雄) 등은 혹은 좌수(座首)라느니 혹은 별감(別監)

이라느니 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살륙하였으며, ”

 

 

"경상도 장졸에 대한 비판의 경우 원균에 대한 비판을 하는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경상우수영 수군을 비판하는 시각이 드러날 때가 있고 경상도 장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 사례는 전무하다.  원균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경기도 지역이 고향이다. "

이순신의 친구인 류성룡은  동인이었고, 원균을 지지하고 후원한 세력은 서인이였다.

 

“선조 수정 30년 8월1일

적이 안음(安陰)의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다. 현감 곽준(郭逡)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서생포에서 서쪽으로 전라도로 들어와 행장과 함께 남원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원수 이하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였다.”

 

“선조 30년 8월 21일

그런데 남원은 우리 나라 군민(軍民)이 모두 흩어져 도망함으로써 중국 장수로 하여금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혼자서 지키게 하다가 함락당하였습니다. 전주는 흉적이 아직 경내에 이르지 않았으니,

부윤 박경신(朴慶新)은 지극한 정성으로 군민을 개유하여 죽음으로써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겁을 먹어 도망할 계책만 생각하여,

 

“선조 30년 정유 9월6일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 박명현(朴名賢)이 치계(馳啓)하였다.

이달 2일에 적병이 금산(錦山)으로부터 회덕(懷德)·임천(林川)·한산(韓山) 등지에 침입하여 이곳 저곳에 가득 차 불지르고 약탈하였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이 군사를 가장 먼저 일으켰으나 과반수가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며, 이시언(李時彦) 및 신이 거느린 병사들은 모두 내포(內浦) 사람으로서 임천과 한산의 변을 듣고 역시 모두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니,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스럽습니다.”

 

“선조30년 9월 18일

충청 관찰사 정윤우(丁允祐)가 장계(狀啓)하였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의 치보(馳報) 내에 ‘왜적이 보은(報恩)과 직산(稷山) 등처를

침범해 와서 가득 진(陣)을 치고서 중국 병사와 대치해 있다. 내포(內浦) 각 고을에도 모두

왜적이 잔뜩 찼는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졸들은 모두 좌도(江道)로 피난하여 수풀 사이에 숨어버렸으므로 불러 모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변보(邊報)가 통하지 못하고, 또 수령(守令)

등이 간 곳도 까마득히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난중일기 기록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

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8월12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이순신장군이 배설의 귀향 소장을  병치료차 허락했다.(전투준비 완료를 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하고 무조건 남하를 명령했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전투를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全滅ではなく、艦砲打撃を加えて防御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意志折っ撤退させようとシンスギル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負わせた羽柴秀勝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