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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배설 사실왜곡 이순신 난중일기(동서)

自公有花 2014. 9. 6. 17:15

온 조선 천지에 칠천량패전으로 망연자실 통곡소리가 가득하고 나라에는 절망이 가득한 상태에서 수만명젊은이들을 칠천량패전에서 전멸시킨 배설장군의 회한과 처절한 전투가 느껴지는 한마디로 백마디 변명이 필요 없는 표현입니다. 시문에 뛰어난 장군은 패장으로서 한줄의 이시를 남기고  기록도 남기지 않습니다.  장군의 아들은 과거에 장원하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배설장군의 칠천량패전에 대한 원성을 한마디로 표현한 작품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진솔한 심경을 그린 것입니다. 이 시로 비추어 볼 때 배설장군은 칠천량패전의 장수로서 죽음을 기쁘게 기다린다고 보여집니다.

묻지마라, 더물어 무럿하리, 강산도 반기는데 일부러 죽였겠느냐?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사람들의 눈길도 예전처럼 따뜻하지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변함이 없다. ‘청산아 잘 있었느냐?’

 

그렇게 물은즉 청산을 넘어온 바람이 그의 뺨을 감돌며 그렀노라고 대답해준다. ‘푸른 물아 너도 반갑구나.’ 거침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던 강물이 그 흐르는 물소리로 화답을 해준다. 저렇듯 자연의 산과 물은 다 나를 변함없이 대해주거늘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세상은 그처럼 따뜻하지가 않으니 바다를 누비던 맹장의 가슴이 어찌 불에 타올라 시커멓게 멍들어 가지 않으리.

 

강둑에 푸르른 버드나무들도 예전과 변함없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구나. 여기서 벗들과 술 한 잔 나누던 그 때가 까마득하도다. 밝은 달 아래서 우정을 주고받던 일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여 그 날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조차 흐릿하도다. 다만 버드나무만 그 잎이며 줄기가 같으니 정자에서 달빛서린 술잔을 주고받던 일이 마치 어제인 듯 여겨지누나.”

 

이 시조에는 장군의 패전 후 수질로 인한 요양 길에서 마주친 인심의 메마름과 당시의 회한의 심정이 잘 토로되어 있다. 장군은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쳐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 이르기 까지 수많은 인연은 떠났지만 홀로 병든 몸을 이끌고 그 때를 회상한다.

 

의병장인 부친과 함께한 의병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임금의 행재소에서 합천 군수로 배수 받은 일, 진주 목사로 재임 중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전격 명령을 받지만 주민들의 만류로 부임길이 늦어 졌던 일, 금오 산성 구축 후 그 공로로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로 또다시 발탁되었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떠올랐을 것이다.

 

칠천 량 해전에서 장군의 작전상의 건의는 여지없이 상부로 부터 묵살되어 버렸다. 전쟁에서 처절하게 패하고 병든 몸으로 고향땅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장군의 심정이 이토록 잘 묘사될 수 있을까.

 

 

장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요양 길에 들어섰지만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장군이 과거 육지에서 근무했던 옛 고을을 찾았지만 무심한 인정과 세태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장군의 깊은 뜻은 하늘도 알고 대자연도 알건마는 무심한 인심은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이미 장군을 모함하는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병의 치료를 위한 요양길이 결국 역모로 몰리는 슬픈 운명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아! 당신을 모함하는 당시의 무리들은 무슨 마음 이었던가?

 

나라의 충신( 忠臣)이요, 장군의 고독한 심사를 절제된 언어로 잘 토로하고 있는 이 한글 시조는 오늘날 문학 작품으로도 가치를 지닌 수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앞서 임란 시 신재공(愼齋公) 배설 장군의 활동 공은 의병장인 부친 서암공의 뜻에 따라 일찍부터 두 동생과 함께 의병 전투에서 참여하여 많은 공적을 세운다. 공은 합천군수직을 시작으로 여러 고을의 수장 직을 수행할 시에는 헌신적인 위민봉공(爲民奉公)정신을 발휘하여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진주 목사직에서 경상 우수사로 부임하려고 할 때 주민들이 길을 막아 부임이 늦어진 사실은 왕조실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산부사직을 수행하면서 금오산성을 수축하여 경상도 체찰사의 군사 본영이 되게 하여 왜적의 북상을 막았다. 해전에서는 경상우수사로서 전선의 선봉에 섬으로서 다대포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전소시키고, 조선 수군이 전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전함 12척을 산신히 구해 이순신장군의 명량 해전의 토대가 되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선조대의 우수한 문학성을 보여준 귀한 작품이다.

 

 

 

세월호침몰로 본 명량대첩과 맹골수로 무지,

세월호 재판에서 이준석선장은 관행때문이라고 증언했습니다..결국 일등탈출한 선장답게 세월호 참사는 관행이 저지른 대량참사라고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면 일등탈출한 선장을 따라 앞다퉈 탈출한 죄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고 세월호특별법을 요구하는 시위로 광화문광장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이지만 조선수군을 1만여 병사를 하루밤에 수장 전멸시킨 칠천량패전을 돌이켜 보고자 합니다.

 

                                                     (사진출처:동아일보)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없기를 바랍니다.

 

왜군은 피란민과 아이들 코와 귀까지 베어 전공을 세우고자 하든 전쟁이였고 조선군 명나라군들도 전공앞에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량대첩에 배를 뛰우다.

이순신장군은 전쟁 중에 단 한척의 배도 건조하지 못하였지만,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조선수군 전체와 명장들 비하 폄하는 않타까운 일입니다.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린 배설장군만 폄하한다면 이해하겠습니다.^^

 

1, 이순신은 까탈스런 장군,

왕명에 따르다 전사한 충성심 자체인 원균 이하 장수들 비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의 부장 나아가 부하들 명나라 연합군 장수들마저 까탈스럽게 부족한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장군이 부하들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데 존경심이 있었다면 대단한 부하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난중일기에도 배설이 병 치료차 9월 2일 귀향했다(난중일기 이순신허락)고 되어 있고 , 명량 해전은 왜군의 ...

기습공격이 9월 14일이 였는 데(자신이 휴가를 보냄을 잊고 정신없찾음.탈영시비를남김) 12척으로 도주한 조선수군을 괴멸시키고자 왜군들은 두달간 총력전쟁준비를 하여 133척의 전함과 200여 척의 수송선단을 출동시킵니다. 패잔병을 추격하는 전투치고는 조금 과하지 않습니까? 칠펀량서 배설한대는 모든화력을 퍼붙고 8척은 포탄이 떨어진 상태로 퇴각했습니다. 왜군들은 패잔군의 12척의 함대를 우섭게 볼수 없었든 것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향해전에서 3차에 걸쳐 선봉대장으로 활약한 맹장이십니다. 이순신이 거두어간 12척의 함대는 왜군의 3중 포위망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구해내어 이순신에게 한마디 불평도 없이 자신에 목숨을 건 함대를 바로 인계했으니 찾을 만도 합니다.

 

                                                                   (사진출처:사실왜곡의 명량영화 포스터)

2, 의도적인 배설장군폄하 왜곡

배설장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을 파멸시키고자 육전을 하자는 간신으로 전쟁중 탈영 도망해서 풍신수길 찾아갈듯 나쁜 놈으로 그렸습니다. 돈벌이에 미쳐 역사왜곡 서슴치 않은 영화제작 대박 대박 터지겠더라구요~

왜군은 배설이 병 치료차 귀향하고 난 이후 곧 바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아래와 같이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칠천량 해전 기습당시 왜선 주력공격선 8척이 배설의 공격으로 침몰 했었기에 배설이 병 치료 차 귀향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였습니다.

 

3, 칠천량해전 원균의 대패(원균이 배설의 충언을 들었다면 대승할 뻔)

“거듭된 조선군의 패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며 재출동을 명했습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 척을 이끌고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유인책에 넘어갔던 원균이 패전하고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데 불만을 품고 술만 퍼마셨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裵說)은 다음 해전에서도 패전이 분명하다고 보고 원균에게 여러 차례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 배설은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물목이 좁아서 전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원균은 “이대로 패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달이 밝은 것을 이용하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포성 3발을 신호로 칠천량을 기습했다.

 

 전에 한 번도 없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아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게다가 주장인 원균이 끝까지 지휘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해 도주했다. 조선 수군은 12척의 배설의 함대만 남고 궤멸하여 퇴각했다.(원균은 직속 상관으로 왕명을 어기자고 한 배설을 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

 

이억기와 최호 등이 그 싸움에서 자신의 전함과 더불어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배설만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선 8척을 유일하게 전소시키고 휘하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왕명을 어긴 죄 조정의처분울 기다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비변사의 감시 속에 한산도 수군본영에 이르러 방비를 엄히했다. (조정에서도 배설이 수군을 수습하게 해야 한다는 게 중론)” 왕명을 받아 칠천량해전을 감시한 선전관 김식이 조정에 보고(출처 사료)

 

4, 조선수군이 전멸할 뻔,

조선군 장수들이 해상포위 일본 수군의 공격에 위급하자 가까운 육지로 튀었습니다. 왜군은 조선 수군 전멸 할 순간 이였고 육지에도 왜군이 도주하는 병사들을 살육하기위해 매복되어 있었는데 조선군 장수들이 왜선의 포위망에 밀려 얕은 바다로 밀리다가 배에서 탈출 육지로 상륙한 장수들은 전원 전사했습니다.

 

배설부대의 휘하장병들은 공격해오는 왜선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포위망을 부수고 수심이 깊은 바다로 진격한 후 퇴각했기에 전원 살아날 수 있었든 것입니다. 수군다운 퇴각이니 적군이 추격하지 못했고. 조선수군은 배설의 군대만 남게 되었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고 서남권 해상으로 왜군의 출진을 가로막은 것 이였습니다.

 

조정에서도 왕명을 거역하고 수군본영으로 퇴각했음을 비변사 선전관(헌병대) 김식도 배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수군 통제를 계속하게 했습니다. 분명히 도망과는 다릅니다. 왜놈들이 도망이라고 하면서 왜 추적해서 괴멸시키면 조선반도가 그냥 수중에 들어오는데 고걸 안한 왜군을 바보 취급하는 것입니다.

 

5, 배설의 퇴각명령을 도주라고하는 왜군들

배설은 원균에게도 깊은 바다 조수가 빠른(진도 명량 한산도) 곳에서 왜적과 싸워야 조선수군이 승리할 수 있다고 여러번 말했고 칠천량은 바다가 얕아 조선수군에게 위험하다고했던 것입니다.(사료)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주력부대 3중포위망을 강타하고 왜선 8척을 전소시키며 퇴각한 유일한 장수가 배설 이였고 그의 부하들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데 비해 동생이 전사했고, 다른 장수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배를 버리고 육지로 튀다가 매복 군에 전원 사망했었습니다.(배설이 이를 구할 수 없었든 것은 수심이 얕아 접근이 불가능)

 

왜군이 조선군을 군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왜군이 추격을 포기하고 한산도 본영을 침공할 엄두를 못낸 것도 배설의 기민한 용병술을 잠재적 위험으로 간파했었기 때문이 였습니다. 배설이 도주했다면 추격해서 괴멸하고 전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에 추적할 엄두를 못냅니다. 추적 않습니다.

 

 

6, 칠천량 패전이 이순신을 구해내다.

칠천량 패전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사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명을 어겨 체포됐든 이순신이 절도사로 부임했음에 가장 기쁘할 사람이 배설입니다. 배설도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명령을 내렸기에 비변사 선전관 김기식의 감시를 받고 언제 체포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배설은 경상우수사로 배설이 같은 서열로 활동햇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는 작전을 가르켜 준 배설정군의 공...이 인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7, 임란500년 지난 시점 작가들이 왜놈의 간첩으로 왜곡했습니다.

이순신은 왕명을 어긴죄로 체포되어 사형 당하러 잡혀간 상태에 배설은 왕명도 어기고 군사들을 퇴각시킨 장수로 전공이나 승진을 바랄 위치에 있지 않았고 다른 장수를 시기할 상황도 아니였습니다.

 

이순신이 당시 칠천량 해전 경험을 배설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배설이 넘겨준 판옥선으로 조선수군이 원균의 실패인 칠천량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거북선으로 개조하고 명량 노량 해전을 할 수 있었기에 배설은 전승일등공신이 된 것입니다.

 

병조판서 경상우수사가 왜놈 첩자 였다는 식으로 흥행도 좋지만 역사적 사실 왜곡이 지나칩니다. 원균을 비롯해 당대 전사 장군들의 애국심이 이순신보다 못했겠으며, 이순신이 하루아침에 병졸들을 신출귀몰하게 했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배설이 넘겨준 전함이 없다면  명량해전은 크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칠천량 해전의 배설장군의 경험이 소중했습니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군 지휘권을 넘겨준 후 뚜렸한 역할도 없는 수군 서열 2위의 참모 상태에서 병들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장수로 전란 통에 이순신에게 병력을 온전히 넘겨준 유일한 장수 였습니다.

 

                           (사진출처:명량영화- 배설없는 이순신장군의 기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8, 지울 수 없는 배설의 흔적

임진란 진주성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의 병력과 장비는 배설이 양성한 곳 이며 다른 원균이나 김완 이억기같은 장수들의 부하들은 전멸했음에도 배설휘하의 병력만이 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병사들을 살리려고 자신 죽음을 각오하고 왕명에 거부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수군본영으로 퇴각명령을 내린 결정을 왜군도 아닌 조국에서 도주라고 하고 있습니다.

 

단기 필마로 왜군진영을 통과 할 정도로 용맹한 장수가 적군이 무서워 도주한다는 논리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 그가 주장한대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한 퇴각임이 분명했든 것입니다. 임진란 내내 3대 대첩의 밑그림이 배설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1) 과거급제 후 의병장으로



 배설 경상우수사는 청년 시절 의병장인 부친 서암 공을 도와 의병으로서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합천, 진주, 밀양, 선산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거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공적비가 세워진 분이십니다. 배설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의 병력 대부분 함대대부분이 배설이  넘겨준 것 이였습니다.

 

40대 중반 경상 좌도와 우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며 많은 공적을 남기셨고, 조선수군이 전패당한 칠천량 해전에서도 천신만고 끝에 전선 12척을 구해내어 조선 수군을 살려서, 이순신 장군에게 해상조류를 활용할 계책을 제시해 명량 해전의 승리의 토대를 마련한 자랑스러운 명장으로 이순신의 병력대부분이 배설이 모아준 병력입니다. (이순신은 32세에 무과급제)

사실은 이순신이 제작하거나 구한 전함이 한대도 없었고 겨우 판옥선 1대도 명량 해전 끝날 때쯤 합류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배설장군은 칠천량 패전후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키며 군사를 조련하여 자신이양성한 병력을 인계하고 억울하게 모함에 의해 돌아가셨지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광해 2년(1610) 선무원종 전승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자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임진왜란 전란 중에 고스란히 병력을 보전하고 12척의 전함을 이순신에게 넘겨주었고 칠천량 해전 대패의 조선수군전멸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부하들을 온전히 보전하기위해 퇴각 명령을 내린 지략 나아가 왜적의 장단점과 바다의 물길을 파악한 유일한 지휘자였으며 최초의 승전의 기초인 왜선 8척을 포위망속에서 성공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번 ‘명량’이라는 영화(전철홍·김민한 감독 극본)와 소설(김호경)에서는 배설 선조가 이순신의 시해 사건의 주모자이고,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거제 현령 안위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인물은 모두 결함이 있거나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단 배설장군에 대해선 험담이 없는 유일한 분이시고 왜적의 주둔지를 부관1명을 거느리고 적진을 통과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로 적장이 감동받을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왜적에 매수되어 조선을 죽이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또 다시 배설 장군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보다 더 나쁜 역적으로 조작 하였습니다. 즉 이순신장군도 험담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가들이 420년 지나 매국노 간첩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12척의 전함과 병력 대부분은 배설이 진주성목사로 있을 때 양성한 사병과 같은 병력으로 임진란중에 진주성대첩과 같이  배설이 양성한부대의 충성심이 독보적으로 남달랏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주성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 잠궈 배설장군의 경상우도사 부임을 가로 막았었습니다. 배설장군의 명망에 조정은 역모를 두려워했을 정도입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해서 부하들을 대신 스스로 목숨을 버릴려는 용맹 앞에 왕이 직접파견한 전투를 참관감시한 선전관 김식도 죄를 논하지 못했습니다. 칠천량서 함께 싸우든 모든 장수가 전사한(배설장군의 동생도 전사) 후에도 전투를 하면서 퇴각했습니다.

 

6.25때 일시적으로 서울을 버리고 남으로 퇴각한 국군을 도망이라 탈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후퇴 즉 육군본부 같은 수군본영으로 퇴각명령으로 얼마나 처철한 전투였든지 실탄이 떨어진 반파된 상태로 였습니다. 조선수군 청년들 수만명 전멸을 지켜보면서 치런전투에서 퇴각은 아무도 반기는이 없는 삼남의 백성들에게 피눈물과 절망을 주는 원통함이였습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전사하게 된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무리한 진군명령인 왕명을 거부하고 퇴각 후 한산도 수군본영을 지키다가 이순신에게 군권을 인계했습니다. 도주라고 하는 것은 왜구들의 기록입니다.

(어명을 어긴 것은 맞지만)준비도 되지 않은채 출진하여 어명을 따르다 전사한 여러 아까운 당대의 아까운 장수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혼자 사형받기위해 병사들을 반역죄에서 해방시키는 퇴각명령을 내린 장수가 온전히 병사들을 지킨 것입니다.

 

 

선조가 의심이 만았고 덕망이 있거나 신망이 있는 장수를 군권에서 제외한 내시들에 둘러사여 과거급제자나 고관들만 중시하고  전쟁은 않일어난다,는 당파를 중용했고 배설은 진주목사당시부터 전쟁대비를 한 고위장수였습니다.

 

 진주성의 젊은이들이 조선수군의 기둥이였을 것이라는 추론으로 왜군이 진주성함락을 위해 전력을 솓아 붙고 씨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배설장군을 여지없이 폄하, 매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는 장면 앞에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찬신만고 끝에 판옥선12척을 구해 거북선으로 개조해 남해안 조류를 이용하눈 작전울 가르켜준 배설정군의 공이 안정되어 전승일등공신 병조판서(국방부장관)에 제수되었습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난중 일기를 중심으로이순신은 왕에게도(두개의 다른 보고서를 올림)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왕 명을 어겼다는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권율 밑에서 종사했던 인연으로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장장 200km를 기적적으로 도주해 온  배설의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거의 반파 상태로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고 무기 실탄이 거의 소진 된 상태였었다.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선조의 명령으로 칠천량해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원균을 감시해야 함에도 배설과 동행)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3도 연합 조선수군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조선수군이 가엾을 정도였다.  

 

 

 

9, 선조의 실록을 봅시다.

 

성종릉과 정종릉은 임진년 가을에 파헤쳐졌다.

두 선왕릉이 파헤쳐진 사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경기도사였다.

경기도사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류성용은 지체없이 명 육군 총병관 이여송의 군막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통곡했다.

류성용은 이어 만월대 정자 위로 올라가 능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마를 찧으며 통곡했다.

임금은 행재소 마당에 쓰러져 통곡했다.

임금은 성종묘와 중종묘가 있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고,

명의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 ...

 

임금은 울음의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래오래 통곡했다.

방향을 바꿀 때 세번씩 절했다.

임금의 방향이 바뀔 때 마다 중신들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통곡했다.

이마를 땅에 찧고 주먹으로 땅을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중신들은 통곡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08(개정판 25쇄 2009. 7. 28)

 

임금은 자주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남쪽 바다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슬피 울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차고 푸른 해거름에 소복을 입은 임금은 동헌 마루에 쓰러져 울었다.

의주까지 호종해서 따라온 중신들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임금은 깊이 울었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사무치게 울었다.

아무도 임금의 울음을 말릴 수 없었다.

강 건너로 지는 해가 마루 위로 도열한 중신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중신들은 임금의 울음이 스스로 추슬러질 때까지 임금을 따라 울었다.

서울을 버릴 때 임금은 울었다.

 

임진강을 건널 때 임금은 중신들을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개성을 버릴 때 울었고 평양에 닿았을 때 울었고 평양을 버릴 때 울었다.

하삼도가 서로 내응해서 속히 창의의 군사를 휘몰고 올라오라는 교지를 써서 호남으로 보내고 나서 임금은 또 깊게 울었다.

피난길 의주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임금은 가마를 세우고 남쪽을 향해 또 길게 울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신을 맞아 임금은 길게 울었다.

신하들도 따라 울었다.

 

임금은 흐느껴 울었고 중신들도 울었다.

명의 구원병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임금은 강가에까지 마중나가 울었다.

환도해서 임금은 종묘의 폐허에 나가 길고 구슬픈 울음을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임금은 기진하도록 슬피 울었고 길게 울었다.

임금의 울음은 뼈가 녹아 흐르듯이 깊었다.

 

임금의 언어는 장려했고 곡진했다.

임금의 언어는 임금의 울음을 닮아 있었다.

임금의 언어와 임금의 울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

그때 나는 임금의 언어와 울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224~231(개정판 25쇄 2009. 7. 28)

 

 

어전회의에서 임금(선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찌 이순신이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기세를 부리며 기슭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나라는 이제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적의 진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니,

이제 가토의 머리를 들고와도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이 글자를 아는가?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

이순신을 털끌만치도 용서해 줄 수 없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끌어안고 섬 속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달려와도 산모퉁이 하나 지키지 않았습니다.

............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청컨데 잡아와 국문하여 죄상을 밝히시옵소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의 죄목은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승정원 비망기 1597년 3월 13일

이순신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 칼의 노래(김흔 장편소설)

- p 418~420(개정판 25쇄 2009. 7. 28)

 

1598년 11월 19일 공의 나이 쉔넷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척이 도주했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다.

 

고려의 항몽유적지인 남도산성의 모습입니다.  고려의 삼별초가 몽고군을 몰살시키겠다고 항거한 진도입니다. 진도자체가 물살이 유속이 빠르고 기온은 내륙보다 따듯한 곳입니다.

 

몽고군수장 계획을 세운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는 실패 했으나  훗날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의 해전대첩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곳이 되었습니다.  울돌목이란 진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말합니다. 그만큼 물길이 사방 파도가 센 곳입니다.

이번 진도 세월호는 진도 남단항구 쪽 조도 앞입니다. 반대로 울돌목 이순신장군의 승전지는 북쪽 육지와 진도가 연결된 곳이고

남도 산성은 진도의 남쪽 조도와 진도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지점 깊숙히 있습니다.

 

 

 

 진도 방파제 모습이구요, 앞에 조도가 병풍처럼 가리워져 있는데요,

본래 이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물살이 세차고 파도도 많은 곳입니다. 따라서 진도항은 오목하게 세맨트로 되어 있고,

조도나 그 앞들의 섬들에는 파도가 세차고 바위섬들입니다.  

 

진도항의 석양은 파도와 물소리로 깊은 바다 임을 알려줍니다.

 

10,과도한 왜곡은 이순신을 모독하는 것

사실 위에 이순신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인간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문화이고 예술이다. 해외로 수출되어 조선 놈들 하고 비하되고 이순신만을 맥가이버람보로 미화함은 선조들 모독이라고 생각됩니다.

 

 

11, 조선왕조실록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자 전공다툼으로 도주한 배설을 찾아 참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권율은 명량해전 이후 체포령을 내렸고 배설을 꼭 잡아 죄값을 치루게 해달라 부탁도 했다. 배설은 도주 후 나주 등지에 머물다가 충청도로 숨어들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전란 때 조용히 있다가 전쟁이 끝나니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배설이 무뢰배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고 걱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즉 변란을 일으킬 조짐이 보인다는 뜻이다. 배설의 덕망이 높았고 따르는 부하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만, 배설은 명예나 지위에 연연한 사대부 고관들과는 달랐으며 역심을 품은 적도 없었습니다. 칠천량해전에 대패한후 물살이 사나운 노량진 명량까지 장장 200킬로미터를 노를 저어 초인적으로 이동했고 당시 조선수군 전멸 소식에 원근 각지의 백성들이 패잔선을 찾아 장병들의 소식을 듣고자  몰려다닌 것이였습니다.

 

임진란 당시 이순신에게 온전히 판옥선 12척과 병력을 넘겨준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도 배설이 넘겨준 병력과 전함12척이 구세주 같은 가치가 있다고 한점입니다.

 

 

12, 배설장군에 대한 오해

이순신이 먼저 꼬롬하게 배설의 영리를 잡아다 곤정을 치므로서 배설이 낙향을 결심하고 이순신에게 허락을받고 병치료차 곧바로 고향인 선산으로 귀향했습니다. 선산에 있을 때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란중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전공다툼에 희생되신 것입니다.

 

왜군 진영을 단기필마로 통과해서 고향으로 가는 행동은 살고자 하는 도망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단기필마로 적장의 막사를 향해 돌진한 후 적군들이 손쓸틈 없이 적진을 빠져나가자 적장이 오히려 그 매력에 감동했다고 하는 멋진 장수였습니다.왜군은 후일 전술로 흉내를 내어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빠가야로 라고 하면서 도망자라는 빠가야로 배설의 흉내를 내는 왜군장수들의 행태를 직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배설이 진주성을 담당할 때 임지로 부임을 진주백성 남녀노소들이 가로막아 관사와 성문을 열어주지 안고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하고(이순신미화에 차용)그런 진주성이 왜군을 막아 처절한 전투를 했다는 것은 역사의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설이 남긴 선정은 진주시민들이 하나로 뭉치게 했다는 점과 이순신에게 인계한 수군이 처절히 싸웠다는 것은 임란당시 배설의 휘하에 충심이 특별한 점이고 덕망이 높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 배설 이였고 그는 목숨에 연연할 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쟁은 전란 중에도 있었습니다.

 

왕은 왕답지 않게 도망다니고 장수들은 당쟁과 파벌에 줄써기 하고 전란 중에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높았든 배설장군은 이순신에게 곤장 맞고 죽을 뻔한 부장만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일제시대라면 영화명량에 뭐라하지 못했을 것이나 왕명도 어기면서 나라를 구한 충신에게 누명까지 쒸우는 문회인들이 무뢰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13 문화 예술의 사실존중의무

전쟁은 7년간 진행되고 조선군장수들은 일부이긴 하지만 조선군 패잔병들의 목을 배어 전공을 허위보고하기 예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자신의 병사를 구타해서 사망하면 자살로 허위보고해서 승진하는 장군들과 같았습니다.

 

왜군은 두려워하면서 조선 패잔병이나 난민의 목을 베어 쉽게 전공을 세웠든 당시 세태에 백성들이 배설을 흠모하는 것은 의병장출신으로 백성들과 부하를 아꼈습니다. 이순신도 명량해전에 배설을 찾으며 한탄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 만이 조선의 장수이고 나머지 이순신 부하들과 백성은 사람도 아닌 무저리들이고 이순신이 나라를 지켰으니,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왜구들 역사왜곡을 받아쓰기 수준입니다.

 

이순신은 죽고 없으니 나라는 일본에 침략은 당연하고 식민지는 당연하다는 논리를 비판없이 대중에게 쇄뇌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판검사 지도층들은 이순신 같은 지도적 위치에 있습니다. 뇌물이나 먹고 성히롱에 미친 상태로 잘못된 판단을 하는 지도자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사실왜곡의 무리한 설정으로 영화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왜곡으로 돈을 버는 것이나 ☆부정부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도자 한명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지만 세월호사고의 유병언 회장의 전권비리가 문제되었듯이 우민화는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이순신을 펌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왜곡이 이러하다면 다른 부분의 왜곡도 상당하게 될 것을 좋게 볼수 만 없습니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왕명 거부는 곧 죽음 이였습니다.지금의 시민들과는 다른 천하고 더럽게 여겨지든 아무 힌없는 백성들의 자식인 병사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구하려 했던 용맹은 알아야 합니다.

 문화 예술이 사실을 기초로도 얼마든지 흥행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칠천량해전에서 3중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적선들과 교전 8척의 적함을 전소시키고 전함12대를 구해내어 거의 반파 상태로 언제 적선이 들이 닥칠지 모르고 (퇴각명령은 대역죄인 )므로 물살이 세고 깊은 진도 세월호가 침몰했든 맹골수로가 있는 명량까지 장장 200km를 항해합니다. (도망이라는 소릴들음)배설이 전함을 부산부근에 두었더라면 왕명에 따라 그곳에서 전투를 해야하고 그래되면 승산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파도가 쉴세 없는 먕량 진도 앞 바다에 진을 치므로 배설은 파도에 시달려 병이 듭니다. 도주하면 간단한 일을 왜군을 잘 파악한 배설이 노량과 명량에서 해전을 할 수밖에 없도록(세월호가 침몰했던부근) 울돌목이 있는 부근에 진을 치고 전투준비를 하다 병이 듭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장군도 파견되어 얼마 안되 병을 자주 앍습니다..그만큼 바다가 거치른 곳으로 퇴각해서 야위고 쇄락해 진 배설장군에게 읽어버린 동료장군들과 병사들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삼남의 백성들은 칠천량패전으로 절망속에 통곡의 땅이 되었으니 그의 마음인들 온전할 수 없었겠습니다. 도망간 조선수군 12척의 패잔병을 잡겠다고 왜군 연헙함대는 333척이나 동원 하여 전멸시키려고합니다.

 

장군의 말년은 슬슬하고 외로운 병마와의 귀향이였으며  전쟁이 끝나고 전공다툼으로 벌어진 역모죄로 참수 됩니다. 그러나 경상도관찰사 한겸직이 파직을 각오하고 시신을 수습 장례를 치루어 줍니다.(실제 경상도관찰사 한겸직은 파직됨) 죽음에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장군,(내전을 끝 내다)참고자료:엔하위키미러

배설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배설에 감명받은 왜장의 대승)

서기 1600년(케이쵸慶長 5년) 음력 9월 15일에 일본 미노 국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 현 후와군 세키가하라마치)에서 벌어진 전투. 일본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모리 테루모토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 간 내전이 귀결된 결전이다. 이 전투에서 승자에게는 향후 260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권한이, 패자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력규모도 양군 총합 17만 명을 웃도는데다가 향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큰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가 진행된 시간은 고작 3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는 동군과 서군 간 벌어진 일련의 내전행위를 총칭하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며, 전투는 중앙뿐만 아니라 도호쿠, 호쿠리쿠, 큐슈 등 일본 전국에서 벌어졌다.


 

전투 결과 이에야스가 승리하여 향후 에도 막부가 수립되었고 조선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호전되는데다가 여러 다이묘들이 실각하거나 전봉되는 등의 정치적 의미는 대단히 크고 중요하다. 세키가하라 합전(合戰), 동서합전이라고도 부른다. 워낙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라서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세키가하라'라고 하면 일종의 '중대한 승부처'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 사건 등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쓰인다. 창작물에서도 가끔 "여기가 우리의 세키가하라야!"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시기적으로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종전한지 2년만에 일어난 일이라 임진왜란 때 조선에 주둔했던 왜군 수장들도 다수 참전했다.[1] 고니시와 가토처럼 임진왜란 때도 서로 반목하고 경쟁하곤 했지만 이제는 진짜 적이 된 것이다. (출처:엔하키미러)





배설의 귀향

오랜 전쟁으로 왜군들은 지쳐 있었다. 전쟁이란 것이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지루하게 병영을 지키는 것이 대부분으로 일본 풍신수길이 독전을 촉구해서 진주성백성 6만명 대학살로 왜군도 약 2만여 병력이 살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전쟁이 이전과는 다르게 살육전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풍신수길은 전라도에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해 전라도 침략을 명령한다. 이로 촉발된 칠천포 전투에서 조방장 배즙이 전사한다.배설의 함대는 조총난사에 대비하여 두꺼운 송판으로 둘러 싸여 총탄이 들어오지 못하지만 왜선이 서너척씩 둘러싸고 줄을 걸어 기어 오르는 백병전에 취약했던 것이다. 명량해전에서 보듯이( 사상자가 2명)

 

전세는 점차 악랄해지고 극악해 진다. 칠펀포 전투도 그 중하나였다. 전쟁이 살육전화 하고 있었다. 이런 엄중한 사태에 배설은 노량진에 전함을 매달고 수리를 해서 해전을 준비한다. 그런대 뜻 밖에도 권율은 왕명을 어겨 압송된 이순신을 절도사로 파견하였다.

 

이순신에게 군권을 넘기기엔 너무도 위중한 현실이 였을 것이다. 평소 그의말대로 명량 노량해전을 준비하든 상태였기에 더욱 군권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조선은 끝이구나 생각 되어 분 노 했을 것이다. 기어코 조정이 나러를 말아먹는 구나!

 

때가 어느때 칠천량 해전 부산 해전에서 14.000명 의 수군이 살상된 중차대한 시기이고 이제 왜군이 전라도 대학살령이 떨어진 시기이므로 군권을 넘기지 못했다.

 

1, 이순신은 천운의 정치군인

럭비공 풋볼 튀듯이 백의종군 대죄인이 수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나라걱정이든 배설은 8월 3일 원수부가 보낸 사령장을 무시하고 숙배를 거부한다. 군권을 넘길 수 없다. 이순신은 혀를 내두러면서 아무말도 못한다. 왜냐면 이순신이 지휘하든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함선은 모두 전멸했고 배설의 전함수리에도 한푼도 보태 준게 없었기 때문이다.


8월9일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린다.선조는 이순신의 잔병을  배설경상우도수군에 합류하라고 지시하자, 이와 같이 12척의 전함이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


 

2, 어란진해전[1597년8월26일]

배설은 이순신의 사령장이 도착한 이후에도 전함의 실질 지휘권을 행사 했다. 이순신은 배설과 함께 조력했고 드디어 8월 26일 배설함대가 어란진에서 왜의 정탐선 8척을 격침 시킨다. 12척의 함대가 뿜는 화력에 8척이 전소되고 나머지 배들이 도주한다. 배설은 평소 주장한 전략을 실전에 보여주었다. 이렇게 하는거다. 조정에 실망했다면 적극적으로 나라를 위해 해전을 가르켰을 것이다. 웅천 전투에서 왜선 600척을 부순 경험을 전수한다.

 

3, 이순신은 조정에 승전보고서를 올린다.

어란진 승전은 왜의 수군들에게 서해 진출을 더욱 고심하게 만든다. 전공을 독차지한 이순신에 대해 배설은 실망하게되어 병세는 급격히 나빠진다. 그간 전투의 누적된 피로도 함께했다. 


 


 

8월 18일

이순신은 배설을 휘어잡기 위해 배설의 수행비서(영리)에게 함대의 배설 장군기를 문제삼아 군율을 어겼다면서 끌어다가 곤장을 치게 하는데 이것은 배설장군에 대한 시위였다.

 

배설은 완전히 무력해져서 수행비서를 데리고 귀향할 것을 결심한다. 배설은 조정도 실코 흠모 하든 진주백성은 전멸했고 애착도 꿈도 없었다.  "이순신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배설은 9월 2일 이순신에게 병치료차 귀향을 고지하자 이순신 잘 됐다는 듯이 허락 한다.

 

전쟁중이라 영내가 가장 안전하고 전국토가 유린된 시기였다. 적군이 사방이 있었기에 나가 돌아 다녀 봤자 죽기 딱이였다. 그래서 허락 했을 것이다. 가긴 어딜가,  바람 좀쉬고 돌아오겠지 이순신은 쉽게 허락했다.


 8월23일 이순신은 토사곽란으로 고통을 겪는다.


명량해전,9월16일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이순신의 배와 2마장(800m) 떨어진 곳에서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수군이 전멸하고 사기를 잃은 상태로 왜적 선단과 가까이 가지 않았다. 단 한사람, 이순신 장군만은 죽기를 각오하고 백병전을 하려고 800m 적진 을 향해 진군북을 치고 있었다.

 

4, 구국일념의 의병장들과 귀신소굴

관군들은 대부분 부패 자체였던 혼란한 시기에 백성들은 조정이나 관료들을 불신하였든 시기에 진주성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하여 백성들로하여 애국심을 고취했던 배설장군이였다.

 

백성들은 전란통에 조선군 진영을 '시체굴' '귀신소굴' 이라며 피해 다니든 시절에 의병장들은 백성들의 구세주 였었고 의병장들은 명예도 부귀도 원하지 않고 구국에 일념뿐이였다.

 

칠천포해전에 대패한 조선 수군 패잔병들이 노량진으로 퇴각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자 백성들은 술렁이며 배설함대에 원근의 지원이 쇄도 하면서 온갖유언비어 속에 배설의 패전 함대는  조선의 꺼져가는 등불 같은 것이였다.

 

왕과 조정은 민심을 읽어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면 되었지만 살육전의 중심엔 도망할 곳 없는 백성들의 목숨을 노리는 국제전쟁이 있었다.

 

전공을 세워 출세하고자 하는 외국군과 부패하고 탐욕스런 관군이 백성들의 하나뿐인 목숨을 탈취하고자 혈안이 되어 전란을 부채질하였고 의지 할곳 없는 백성들에겐 일부 조선군 진영을 "시체굴" "귀신소굴"이라 칭했을 정도 이다.

 

이항복은 한산도 이순신의 진영을 "귀신소굴" 이라고 말했으니 조선군장수들의 기세와 오만함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 수 있고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려는 부대는 의병뿐이 였다.

 

 

당시 배설함대는 왜군들보다 배가 크고 높아 왜선들이 가까이 와서 밧줄을 타고 들어 오기전에는 안전했다. 왜선들은 함포라는게 없었고 조총을 빗발처럼 퍼부었지만 두꺼운 송판으로 갑판을 둘러싼 조선수군함대가 가장 안전한곳 이였다.

 

 

노량 명량 해협은 물쌀이세어 200여 수군이 노를 저어 진군한 후 일시에 파도에 떠내려 가면서 왜선들에 함포를 쏘아대는데 반해 왜선들은 엄청난 해류에 떠내려 갈때 우왕좌왕 배를 유지하기도 벅찾고  조선수군의 함포사격의 명중율이 높아 위협자체로 조총을 비오듯 쏘아대도 꿈적 않는 배설의 12척 함대는 6.25때 침략군의 탱크 10배 정도였다고 보면된다.

 

5, 거북선이 피해야 할 것은 근접전뿐,

배설의 함대운영으로 전공을 독차지 하고 싶어 하는 이순신의 배설장군 영리를 끌어다 곤장까지 치게게 된 지휘권 분쟁을 해결하는 길은 장군은 하야 뿐이라는 결심을 하고 수하 장수들에게 단단히 이순신이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을 경계 또 경계할 것을 지시하고 귀향을 하게 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진군 명령을 내려도 함대가 진군하지 않아 혼자 진군했다는 대목이 이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순신은 함대의 객과 같이 전권을 회복한 것은 노량해전에서 퇴각하는 적군의 후미에서 함포를 쏘아 댔든 것으로 수군의 지휘자들은 퇴각하는 적선들을 바라보며 전쟁의 끝에서 부모형제의 원수를 갑고자 모든 화력을 마음 놓고 퍼부으며 울었을 것이다.

 이미 전쟁이 끝났다.

퇴각하는 적이라 하나 여전히 왜군은 강했고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6, 왜군들의 철군향수 

극도의 긴장으로 대치된 전선 언제라도 불을 뿜으면 엄청난 살육전이 되는 상태였다. 왜군도 조선군도 서로를 피하고 싶은 상태에서 배설 대장군의 귀향소문은 왜군들에게 고향과 부모 가족들 생각에 잠기게 했다. 어쩌면 돌아 갈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왜군 진영을 한 없이 슬프게 만들었다.

 

비록 적장이지만 그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풍신수길은 니쁜놈이고 사지에 군데를 내몰고 있다. 이런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 조선수군대장이 귀향했으니 이제 왜군들도 전쟁을 마쳐 집으로 돌아가서 죽어야 겠다는 기대감을 불어 넣었다. 이런 전쟁은 아니다!  

 

9월2일 부관 두명을 거느리고 배에서 내린 배설 장군은 한 필의 말을 타고 삼엄한 왜군 시마즈 요시히로  진영을 통과하게 된다. 왜장들은 허를 찔려 조선군이 언제라도 적장을 암살 시해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 시마즈 요시히로는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왜장은 원균의 뒤를 이은 배설 3도 수군총사령관이 막사를 찾아 온 나가보니 이미 저만치 먼지를 읽으키며 사라지는 배설장군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시마즈 장군은 자신의 목을 만져본다. 부관 두명을 장군은 잡아서 보니 이런 병사들은 이제 잡아봐야 아무짝에도 소용 없었다.  

부관들로부터 배설장군이 군권을놓고 고향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왜장은 크게 감명을 받는다. 시 총사령관이다 마음만 먹으면 왜장 목 하나쯤은 그냥 거둘 수 있었을텐데~왜장은 부관들을 풀어준다.


 

전선의 긴장은 높았지만 막상 전쟁에 지친 왜군들은 배설장군이 적장의 막사를 향해 부관을 거느리고 닸아와도 아무도 제지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그만큼 왜군들도 설마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지쳐있었고 자신들 목숨하나 보전 하는 것 외엔 관심이 없었다.

 

 

적장이지만 한없이 부럽게 흠모하게 되고 왜군들의 소원은 귀향이라는 것이다. 조선땅에서 원귀가 될 수 밖에 없는 자신들 처지를 돌아 보는 왜장들과 왜군들은 완전히 전의를 읽게 된다.

 

그들의 로망은 전공도 아니고 부귀명예도 아닌 오직 배설대장군 같은 휴머니즘 멋진 귀향이였다. 단기 필마로 돌아가는 조선수군 대장군의 소문에 왜군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 배설장군을 부러워하는 이런 현상이 전선을 종전으로 내몰고 있었다.  왜군들은 안저나 서나 배설장군의 귀향을 얘기 하면서 철군 희망을 말하고 왜장들도 그렇했다.  평화의 소중함을 깨우친 것이다.  

 

왜장막사를 통과 해서 배설대장군이 귀향했다는 소문은 왜군 진영 전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가뜩이나 무자비한 대살육전이 싫튼 왜군들 틈에 이소문은  센세이션을 읽으킨다. 조선땅에서 살아서 돌아가기 힘들어진 것은 왜군이나 왜장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을 위한 전쟁 살육을 위한 살육에 왜군들도 몸서리 치든차에 적장이 그것도 조선 수군대장이 귀향했다는 소식은 왜장들에게 어떻게든 귀국해야 겠다는 향수병을 자극하게 된다.


 

9월 15일 이순신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켜 주었다.

 

 7, 살육을 위한 살육전화

조선 백성들의 분노와 공포심은 높아져 언제 어디서든 공격받게된 왜군들에게 전후 전공이 보장되 않게 되었음에도 살육전을 독촉받게 되자 전쟁회의론이 퍙배해졌다. 배설정군처럼 우리도 자신의 고향 영지에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죽었으면 좋겠다.  전선은 누가 얼마를 살육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어젠다가 되어버린다.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8, 경상 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위상,  

조선 수군은 지금의 해군과는 다른 특수전 병력을 말한다. 특전사 해병대 UDT 와 같은 최정예 병사들로 원균의 육전을 비하하지만, 이들은 육전을 잘 할 수 있는 최정예 병력이였기에 육지로 퇴각한 것이 크게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당시 전시 통사란 육군과 지방수령을 통할 하는 그야말로 막강한 군권으로 조정대신들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권력이고 도관찰사 관군과 의병 삼남의 백성모두를 통할 하는 것으로 정규병력만 약 3~4만을 지휘하는 야전군 총사령관을 말한다.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휘하 병력은 대략 5.000 정도였으나 지방 관군까지 약 4만 이상의 관군 통수권이 있고, 장군도로 언제든지 왕명을 집행하여 도원수 다음의 서열이다. 전시 왕보다 막강한 병력으로 야전군지휘관인  삼도통사들은 영의정 좌의정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성계처럼 마음만 먹으면 이순신 원균 배설장군은 언제든지 조정을 장악하고 왕조를 세울 수 있었든 전란의 시기임으로 선조는 매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균 배설 이순신 장군들은 충신중에 충신이였든 것이다.

 

 

​1.500척의 왜군 함대의 공격으로 생지옥으로 변한 칠천량해전에서 삼중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은 장수가 '배설장군' 으로 오늘날 위중한 시기에 본받아야 할 장수이다. 절대 불리한 상황을 뚫고 나오는 구국정신과 다른 장수에게 군권을 넘기고 미련없이 귀향하는 것은 본받을 만하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스님]

 

 

칠천량해전은 왜군 10만과 함대 천오백여 척을 조선수군 1만 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으로 장수들은 출전을 망설였고 원균은 수적 열세 때문에 육전을 하려고 했다.  조정은 왜군과 육지에서는 전투이 상대가 안되니 해전으로 백병전을 해서 전멸 당하여 왜군에 피해를 입혀라는 것이였다.

 

 

동인조정과 선조는 조선수군이 전멸하든 말든 부산으로 밀려오는 10만 왜군을 육전은 안되니 해병대가 막으라는 것이였다.

왜군에 타격을 입히고 전멸하면 명나라 군졸들이 지켜주리라는 망상 때문이였다. 명군은 조선왕조를 지키려 출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침공을 막기위해 조선군이 가능한 처절한 전투로 왜군들에게 피해를 입혀주길 바랬다.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안았다.(기동력 함포 전함의 크기를 이용 하자는 것)결국 배설장군은 장작귀선에서 일기를 집필 하고 전쟁이 종전하면서 강강천과 손조방에 '三分斬死' 삼도에 나누어 졌다.

 

전공을 세우길 학수 고대하든 이순신은 왜군의 부산 상륙까지 중요한 시점에 출병을 하지 않고 숨어 있었고,  그야 말로 귀신소굴 소릴 듣고도 적을 제앞 할 수단과 방법을 찾지 못 했다. 따라서 자신의 분신인 이억기를 대신 출병시켰으나 전멸을 하고 말았다.

 

칠천량을 해전을 앞두고 동인조정(유성룡)은 이순신을 체포 압송하여 권율막하에 둔다. 칠천량 해전에 전멸이 예측되자 이순신을 빼돌리고 이순신의 분신인 이억기로 대리 출전을 시키게 했다.(모양은 죄인으로 짜고 친 것으로 선조는 동인조정에 끌려다녔다)

 

배설은 왜군의 전멸이 아니라 함포로 타격을 입혀 방어를 하자는 것이였다. 어떻게든 왜군의 의지를 꺽어 철군시키려 풍신수길과 싸우고 있었기에 전멸을 할 수 없었다.

 

칠천량 패전후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첮 장계가 '배설은 패전으로 전쟁공포증에 걸려있다.'면서 사실상 해임할 것을 음해했으나 선조는 배설장군을 경상우도통사에 이순신을 절도사에 임명한 것만 봐도 배설장군이 얼마나 뛰어난 장수 였는지 알 수 있다.

 

배설장군은 왜군의 대장군 선단과 병력 수송선을 저지하려 했었다. 칠천포 해전에서도 도도와 가토의 장군선단을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고, 배에 기어 오른 원수인 왜군의 수급을 수없이 직접 '월파검'으로 베었다.

 

동인조정은 재주는 배설장군이 부리고 공은 이순신이 챙기라는 것이였다. 칠천포 해전에서 장군의 목숨을 구한 것은 천행이였었다.

 

조선수군전멸은 10만 왜군이 서해로 군산 해망포나 제물포로 바로 진격해서 대규모 살육으로 조선이 항복하게 하려고 했기에 배설은 조정의 전멸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서해 해로인 '울똘목'으로 430km를 기아 상태에서 왜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진을 꾸린다.

 

도주하는 배설장군 일행치고는 너무도 어렵게 도주한다고 봐야한다. 그냥 세월호 선장처럼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면 그만임에도 천신만고의 전투준비를 하면서 조선백성의 대살육을 저지하고자 전투준비를 한 것이였다.(이순신이 모함 장계를 올렸음)

 

칠천포에서 보름날 밤에 전멸하고 남은 패잔군, 피항하는 월파군들(칠천포패전군)을 향해 백성들이 산봉우리에서 솟불을 지피면서'강강술래'왜치면 수군들은 '명량포'하거나 '노량포'또는 '울똘목'이라고 답해서 항로를 가르켜주고 낮에는 전함을 수리하고 밤에는 항해했었다.

 

 

우리가 10만 대군에 바다에서 적군에 포위 됐다고 할 때 아무리 장군이라고는 해도 두렵지 않겠는가?

칠천량해전에서 최호의 충청군은 배추밭의 "굼뱅이 한마리가 수천마리의 개미에게 잡혀 뜻기 듯이" 왜군들이 새까맣게 충청수군 배에 올라 도륙당하였다.적벽대전에서 조조같은 명장도 제한몸 돌보기 힘들게 탈출함에도 중원대륙과 한반도에서 만년 역사에 이러한 대규포 포위망을 부대단위로 둟고 퇴각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세월호 침몰 때 승객들이 제 한몸 서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욕하지만, 과연 그 런 사태에서 제 한몸 보존하기도 쉽지 않은게 사람이다. 6.25 전쟁 때 국군들이 퇴각하든 것이나, 칠천량 바다에서 3중 포위망은 빈틈이 없고 육지에는 매복군 철처히 포위했든 칠천량 해전 살아서 나온 것 만도 기적이다.

 

이순신의 분신인 이억기 군 전라 좌수영 약 5,000여 명 병력의  전멸은 불가항력 이였다. 

전함을 몰고 적장의 선단을 격침시키면서 조선수군을 지켜낸 배설장군은 그 공으로 역적에다 간첩으로까지 후세에서 욕을 먹는다. 과연 이순신 이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명량 영화는 무엇을 우리사회에 줄 것인가. 부정부패, 모함, 당쟁, 철면피가 승리하는 사회, 장군들을 모함하고 욕하는 '난종일기'야 말로 패륜이요 해악의 문서 아니겠는가? 얼마나 많은 장군들을 패망하게 했던 것인가, 

 

옳지 않은 왕명,

칠천포 패장 배설은 '월파정' 시 한수 만 남긴다. 대장부 중에 대장부 월파군의 대장군답지 않은가?

 

근세에 일본제국주의 도고제독이 이순신을 흠모 했다고 하지만 도고야 말로 우리를 식민지배한 원수였다.

 

칠천포 해전은 온당한 왕명이 아니였다. 현지 사정도 모르든 조정의 무능이 였으며 이순신의 분신이라 볼 수 있든 이억기 장군은 화염속에 왜군들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원 수장되고 말았음만 봐도 알 수있다.

 

배설장군은 왜군을 수중전으로 충분히 방어 할 수 있다고 부산항에 도착하기 전에 적군과 전투를 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건의 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칠천포 해전에서 개같이 죽지 않은 것을 원망하는 동인들 조정의 한계였다. 나라가 왜군들 앞에 풍전등화이니 그래 죽을 수 없어 당연히 죽었어야 할 해전에서 살아남았기에 원망을 받았다.

 

 

울똘목에서 왜군의 대량학살을 막고자 천신만고 끝에 수백리를 항해해서 노량포에서 전투준비를 하는 장군을 이순신은 패장으로 도주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공포증에 걸렸다'고 전쟁터의 장수로서 할수 없는 모함과 조정과 장군을 이간하고 경상우도 병력과 전함을 털도뽑지 않고 냉큼 빼앗고자 하였다.

 

 

나라의 풍전등화 앞에서 장군들이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함에도 배설장군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한후 귀향하므로 종전카드를 목숨과 바꾸어 조선에서 대학살을 막으려 했다.

 

물론 왕조를 유지하려는 조정과 권력을 유지 하려는 동인들의 침소봉대 전공다툼에 공헌하지 않고 귀향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배설장군보다 서열이 낮고 백의 종군하든 대죄인인 이순신을 절도사로 파견하여 장군의 재주만을 이용하려는 조정과 병력과 전함을 뺏으려는 불편부당한 타락한 처사에 구국의 일념으로 할 도리를 다한 후 종전카드로 귀향했다.(배설의 귀향참조)

 

 

왜군의 철군러시(대장군의 귀향과 졸병의 탈영)

먼저 귀향을 실천하여 보이므로 적군들이 무도한 대살육을 내린 풍신수길에게 저항하고 반기를 들게 시범을 몸소 보여주었다. 비굴하게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대장군 다운 목숨을 조정에 바치는 귀향으로 침략군들이 풍신수길에게 칼을 겨누게 하므로서 대역을 깨닫게 했다.

 

무언의 고도의 정치행위인 "귀향"으로 장군에게 영향받고 깨달음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 등등에 의해 풍신수길은 패망하고 그의 일가와 토요토미히로요리를 비롯한 조선침략 원흉들 십만여 적군들의 씨를 말리게 했다.

 

당쟁과 부정한 정쟁의 와중에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대살육을 방어 하는데 음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순신과 김시민을 영웅이 되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장군은 귀향했다.

 

행주 산성에서 퇴각하는 적군을 방어한 도원수 권율은 퇴각하는 엄청난 왜군을 전멸한(수백명 살상) 것이냥, 전공을 포장했기에 배설장군에게 과도한 컴플렉스가 있었다.

 

 

 

해병대 사령관인 최정예 부대의 사령관이든 배설장군이 간악무도한 적진을 돌파하며 에헴하든 시대에 하사관도 일등병도 이등병도 아닌 이름 없는 백성으로 귀향 한 것이다.

 

전공을 세우려고 조선에 출병한 왜장들에겐 가히 핵폭탄급 충격으로 철군 요청 러시를 불러 온다. 허구 많은 길을 두고 적진을 돌파하므로서 왜군들의 신상을 위협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풍신수길의 심장를 뚫는 반전)

 

풍신수길이 조선백성들을 살육하고 백성들과 전투했다면 배설은 풍신수길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후일 풍신수길과 그를 따르든 조선 침략장수들을 세키가하라합전에서 씨를 말리게 했고 풍신수길의 일족들의 배를 가른 것이다. 

 

 

 모함과 음해하는 탐욕스런 장수들의 공격 속에서도 조선 백성이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도록 배설장군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 했던 것이다. 장군을 음해하든 수많은 동인들의 공격에도 단 한마디도 원망이 없었다.(난중일기와 비교가 안되는 처신) 

 

 

국난을 수습하고자 하는 장군은 부정한 왕명에 맞서고 당쟁의 산물인 정치군인들의 전공다툼을 거부하고 왜군철군과 일본 내전을 촉발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인 귀향을 실천해 보이므로 마지막 목숨 하나도 값지게 나라에 받쳐 '동서'라는 화합만이 만복에 근원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경상도 군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에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보전된다"(난종일기)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므로써 조선 수군은 전멸된다. 경상도 우도통사 배설장군이 장작귀선 12척으로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노량포로 들어 오므로써 이순신 장군이 해전사에 남을 명량해전이 성립된다. (전라도와 한양의 대학살이 저지됨)만일 다른 곳으로 배설이 갔었다면 조선은 일본이 되었을지도 모름,,,,,

 

“칠전량 해전에서 사람단위가 아니라 배 단위로 부대단위로 탈출한 것은 배설장군의 경상 우수영 소속으로 이순신은 배설이 이끌고 온 12척의 선단으로 경상우도수군으로 (다 된 밥에 숫가락 놓은 격이 아니고 무엇이랴) 명량해전에 임했다. 

 

명량해전 당시 병력이 경상우수영 병력만으로 구성됐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12척에 장작귀선을 가동할 수 있을 전문 병력과 포병이 있었을 것은 틀림 없고, 배설장군이 장장 약 430K를 항해해서 "울똘목"을 향해 항해 했는데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조선의 두왕자를 왜군에 넘겨주고 작위를 받은 것은 전주출신 국경인이다.)

국난시기에 토적(土賊)과 가왜(왜옷을 입고 도적질하는 적들)는 본질상 차이가 없다.

왜에 부역한 자(부왜자)들은 경상도 만이 아니라 전라도 외에도 전국적으로 있었다.

아래는 그 예다.

 

 

“선조 수정실록 27년 12월 1일

호남·영남·기전(畿甸)의 토적(土賊)을 소탕

병란이 일어난 이후로 토적들이 험지(險地)를 점거하고 도발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부터 남원

회문산(回文山), 장성(長城) 노령(蘆嶺) 등 수십 개 군(郡)의 산골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적괴(賊魁)인 김희(金希)·강대수(姜大水)·고파(高波) 등이 나누어 점거하고 서로 내응하였으므로

관군(官軍)이 토벌에 나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제군(諸君)의 병력이 사방에서

모여 수색 토벌하니 적들이 점차 해산하였으며, 관군이 끝까지 추격하여 주살(誅殺)하자 이에 평정되었다.

 

경기의 경우는 적괴(賊魁) 현몽(玄夢)이 광주(廣州)·이천(利川)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고, 이능(李能)이

양주(楊州)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하였으나 오래도록 평정하지 못했었다. 이에

비변사가 변응성(邊應星)을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성영(成泳)을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삼은 뒤 서로 죽이고

투항하도록 현상금으로 모집했는데, 이능이 먼저 자기의 무리에게 죽음을 당했다. 현몽이 가장 사나웠는데

그의 무리는 항복하거나 흩어졌지만, 현몽은 도망하여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3일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전라도)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 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 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 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선조 30년 11월 12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기를,

“해남(海南)•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무안(務安)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적에게 붙어

사족(士族)의 피난처를 일일이 가르쳐 주어, 거의 다 살륙되었습니다. 해남(海南)의 노직 향리(老職鄕吏)

송원봉(宋元鳳)과 가속 서리(假屬書吏) 김신웅(金信雄) 등은 혹은 좌수(座首)라느니 혹은 별감(別監)

이라느니 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살륙하였으며, ”

 

 

"경상도 장졸에 대한 비판의 경우 원균에 대한 비판을 하는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경상우수영 수군을 비판하는 시각이 드러날 때가 있고 경상도 장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 사례는 전무하다.  원균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경기도 지역이 고향이다. "

이순신의 친구인 류성룡은  동인이었고, 원균을 지지하고 후원한 세력은 서인이였다.

 

“선조 수정 30년 8월1일

적이 안음(安陰)의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다. 현감 곽준(郭逡)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서생포에서 서쪽으로 전라도로 들어와 행장과 함께 남원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원수 이하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였다.”

 

“선조 30년 8월 21일

그런데 남원은 우리 나라 군민(軍民)이 모두 흩어져 도망함으로써 중국 장수로 하여금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혼자서 지키게 하다가 함락당하였습니다. 전주는 흉적이 아직 경내에 이르지 않았으니,

부윤 박경신(朴慶新)은 지극한 정성으로 군민을 개유하여 죽음으로써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겁을 먹어 도망할 계책만 생각하여,

 

“선조 30년 정유 9월6일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 박명현(朴名賢)이 치계(馳啓)하였다.

이달 2일에 적병이 금산(錦山)으로부터 회덕(懷德)·임천(林川)·한산(韓山) 등지에 침입하여 이곳 저곳에 가득 차 불지르고 약탈하였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이 군사를 가장 먼저 일으켰으나 과반수가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며, 이시언(李時彦) 및 신이 거느린 병사들은 모두 내포(內浦) 사람으로서 임천과 한산의 변을 듣고 역시 모두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니,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스럽습니다.”

 

“선조30년 9월 18일

충청 관찰사 정윤우(丁允祐)가 장계(狀啓)하였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의 치보(馳報) 내에 ‘왜적이 보은(報恩)과 직산(稷山) 등처를

침범해 와서 가득 진(陣)을 치고서 중국 병사와 대치해 있다. 내포(內浦) 각 고을에도 모두

왜적이 잔뜩 찼는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졸들은 모두 좌도(江道)로 피난하여 수풀 사이에 숨어버렸으므로 불러 모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변보(邊報)가 통하지 못하고, 또 수령(守令)

등이 간 곳도 까마득히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대장군의 칼에는 '청록진충도'靑綠忠刀'라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수술이 달려 한층 위엄이 있었다.

칠천포패전이후 장군은 부관에게 이 장군도를 자칭 "月波劍'이라 지칭했다. (구전의 이순신과 배설이야기)

 

 

1, 月波劍

1597년 7월 15일 칠천포에서 도도다카도라 (1556.2.16~1630.11.9) 가토 기요마사 (1562.7.25~1611.8.2) 와키쟈카 야스히루 3대 연합 수군에 포위 기습공격을 받게 되자 배설의 함대는 가토 기요마사 도도 다카도라의 왜군 주력 부대의 포위망을 벗어 나고자 장군진영을  향해 전투를 했다.

 

최호 충청수군들은 겹겹이 도도 다카도라의 왜군에 포위되어 '한마리의 군뱅이가 수만의 개미들에 물리듯'이 왜군들이 선상모두에 새카맣게 몰려 조선 수군을 살상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전라좌수사 이억기가 와키자카 야스히루의 공격을 받아 함대가 불길에 휩싸여 전멸하고 전사하므로 이순신이 1591년부터 전라좌수사로 5년간 한산도에서 양성한 병력이 1597년7월15일 전멸하고 전함도 모두 격침 소실되는 것을 지켜 본 배설장군은 포위망을 뚫고 퇴각명령을 내린다.

 

왜군이 조선수군을 에워싸고 백병전과 화전을 하고 있었기에 분하지만 근접전을 한다면 배설함대는 화전으로 전멸을 피할 수 없어 퇴각했다.(조선함대는 조총을 대비해서 두꺼운 송판으로 갑판을 감쌋기에 불화살에 무방비로 위험했음)

 

와키쟈카 야스하루 수군의 화전으로 칠천포 밤하늘이 시뻘겋게 물들고 배설함대도 화전을 피하느라 전투가 될 수 없었다.왜군이 불 화살공격으로 나왔기에 퇴각하지 않으면 충청 전라 수군처럼 싸우지 못하고 병사들이 몰살할 상황이였다.

 

 

짧은 순간에 충청 전라 수군은 불길에 휩싸였고 경상 우도 수군은 포위망을 뚫고자 도도 가토 지휘부와 교전을 하고 있는 급박한 순간이였다. 역시 대장군 원균답게 화염에 휩싸인 전함에서 대장기를 바다에 던지고  육지로 탈출하게 하므로 조선 수군들은 왜군들을 한명이라도 더 베고 장렬히 전사할 수 있었다.

 

전라 좌수군은 평소 백성들에게 '귀신소굴'로 불릴만큼 백성들이 두려워 했던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는 수군임에도 칠천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함과 함께 화염에 불타고 일부는 바다에 뛰어내려 수장되고 말았다.

 

너무도 안타까운 칠천포 해전이고 칠천포를 끼고 원균대장군을 좌우로 전라 충청수군, 바다 쪽을 경상우도 수군이 배치되어있었는데 순식간에 왜군들의 삼중포위 기습공격이였다.

 

경상 우도군은 적군의 신호탄이  떨어지자 가장 먼저 왜군의 공격을 받았고,  왜군의 포위망을 깨트리는데 집중하는 사이 아군은 왜군의 수에 놀라 포구로 밀려가고 말았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는 사이에 왜군의 포위망은 끝없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물밀듯 밀려 들었다.

 

경상 우도 수군은 삼삼오오 개미처럼 달려드는 왜군을 떨쳐내고 도도군의 장군기를 에워산 함대에 함포공격을 하여 바다 깁숙히 추격해서 6척의 전함이 정면승부를 벌였고, 6척은 도도의 수군 지휘부를 향해 돌진했는데 적군은 서너척의 함선들이 에워싸고 줄을 걸고 왜군들이 기어 올라 오고 있었기에 백병전을 서너차례하고서야 함포를 다잡을 만큼 급박했다.

 

 

2, 원수,

배설 대장군은 장군도를 빼어 들어"도원수 이놈" "원수"라고 외치며 기어 오르는 왜군의 목을 자르고 또 잘랐다. 부관들은 왜군의 수급이 눈을 끔벅거리는 것을 바다에 던지는 것도 힘겨워 했다.  얼마나 전투가 되었을까,  칠천포를 바라보니 조선수군이 육지로 퇴각하고 배들은 화염에 시뻘걷게 불타고 있었다.

 

 

3, 울똘목

 

칠천포 퇴각으로 경상 우도 수군은 배설장군을 떠나지 않게된다. 패전시 군사들이 흩어짐에도 오히려 수군 지원자들이 천명에 이르럴 만큼 백성들이 몰려왔으나 식량이 없어 돌려보냈다.

 

 

 

장군이 칠천포 해전이후 '청야작전'까지 장장 430km 항해해서 노량포에 배를 매달기까지 줄 곳 바다넘어 산마루에는 보름달이 항로를 따라왔고,

 

 

'항몽전에서 중손장군은 100만 몽고군을 울돌목에서 수장하겠다 했거늘 십만 왜군을 울똘목에서 수장시키지 못하랴!' 왜군에게 한양을 내줄 수 없으니, "어서 빨리 울돌목으로 가자!" 병사들은 울똘목으로 가면 쌀밥과 고깃국이 나오는 신천지가 있는줄 생각했다.  청야작전후 명량해협을 항해하는 조선수군은 기아 상태에서도 "울똘목" 이상향으로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장군의 "월파검"은 장군의 손에서 한시도 떠나지 안았다.

 

히미한 여명 속에서도 가는 곳마다 산 봉우리엔 백성들이 횃불을 밝히며 때로 모여 '强强술래'를 외치고 있었다.(힘내라 힘내라  지고 이겨라,라는 뜻으로 백성들이 대피하여 기회를 보라고 응전하였다.  왕은 전투를 요구했으나 이미 백성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백성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경상 우도군의 마지막 남은 함대가 수리되어 전투를 재기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실제 등대역할을 자처했다.

 

4,강강 술래

 

칠천포~ 진해만 ~통영~ 자란만~ 삼천포 ~남해보리암~ 여수 돌산~보성만~ 완도 ~해남~ 명량 노량진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은 산 봉우리에서 왜군의 추격을 망을 보아주었고 '강강술래'를 외쳤다.

 

벌교에서 꼬막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때도 산 봉우리엔 난민들이 '강강술래' 를 외치며 적이 없다는 것을 신호해 주었고,

 10만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고 장장430km를 기아상태의 수군들이 배설장군이 외치는 "울돌목"만을 생각하면서 항해를 한 것이다.

 

동인 조정은 쌀 한톨 무기하나 지원하지 않았고 '어명'이라는 전투출병 교지 종이 한장으로 수만은 조선군이 불타고 수장되지 안았든가.

 

 

오직 동인들이 차지한 조정 중신들과 사관들만 경상 우도수군 배설장군이 전멸하기를 바랫었다. 이들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전사하지 안은 배설장군을 끝 없이 시기하고 모함했다.

 

 

와카쟈카 야스히로는 퇴각한 조선 경상우도 수군을 추격하지 않는다.

육지에서 조총 앞에 조선군은 왜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왜군 1천명이 진격하면 조선군 1만명이 도주하고 패전하였다. 허세 좋은 관군이 전투가 벌어지면 도망치기 바쁜 상황에서 그래도  마지막 남은 경상 우도 수군은 태풍 앞에 꺼져가는 등불 이였다.

 

삼남의 백성들은 신분 고하를 떠나 십만 왜군의 발을 묶어 주기를 간절히 바래는 "강강술래"를 외치는 절박함을 보고 수군들은 지친 상태에서도 용기를 얻고 울기도 했다. 전사해도 아무런 후회 없을 만큼 칠천포에서 장렬히 싸웠고, 다시 밤을 틈타 명량으로 향하는 기아 상태의 경상 우도수군에게는 백성들의 응원이 칠천포에서 부터 명량해협에 이르기까지 있었다.

 

 

때는 1597년 7월 보름 지나 칠천포 패전이후 한산도 본영 귀환후 명량해협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이 산 봉우리 곳 곳에서 횃불을 밝히며 '강강술래'를 외치며 패전한 마지막 남은 조선 수군을 자신에 아들들이 타고 있는 것인냥 기리고 응원해주고 있었다.

 

술래잡기에서 "강해져라" "힘내라" 라는 소리가 바다를 항해하는  경상 우도 수군들에게까지 들렸다. 칠천포 전투가 끝나고 지치고 기아상태의 수군들은 백성들로부터 물자를 뺏거나 징발 할 수 없었다.그래서 그들은 벌교에서 꼬막을 잡아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다.

 

조선수군은 기아 상태에서도 힘내어 노를 저어 노량포구까지 도달 한 것이다.

경상 우도수군이 노량포에 도착하여 수리를 하고 있을 때인 7월(23)하순에 이순신과 젊은 장교 서너명이 나타나서 함대의 상황을 둘러 본 후 ('배설은 전쟁공포증에 걸려있다"는 비겁한 도망자라는 뜻으로 해임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린 줄도 모르고) 배설장군은 전의를 다짐하지만, 놀란 조정은 배설을 지휘권에서 배제하고 이순신에게 3도 수군절제사에 사령장을 7월23일자로 소급해서 8월3일 도착시킨다.

 

8월 3일 이순신이 사령장을 보여준다.

격노한 배설은 언제라도 목을 벨듯이 '월파검'을 들어보이며

'그래서 어쩌라구?'

사령장이 왔다고 ....

뭐라 그랬소?

경상 우도통사에서 해임된게 아니요

3도 수군은 장군이 지휘하고,  나는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하겠소.

이순신은 배설장군 해임사령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임금이 내린 장군도는 그자체로 어명이라 여차하여 목이 날아 갈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8월 3일 이순은 사령장을 받았으나 배설장군의 기세에 꺽여  아무 말도 못하고 뜸을 들이다 8월 15일 이분과 이완이 이순신 장군에게 합류하자 취임식은 8월19일에 거행 한다.

 

배설의 기세에 이순은 2주 동안 혀를 내두런다.

여차해서 배설의 '월파검' 맛을 볼 수 없지 않은가?

 

'굴러들어 온 돌이 밖힌 돌 빼낸다지만' 3도 수군이 어디있소?

경상우도 수군뿐이고 수장에서 해임된게 아니요 할 땐 '월파검'의 떨리는 소리마저 요란했다.

8월(18) 하순

이순신은 배설장군에 대한 지휘;권 이양을 요구하는 무언의 시위로 영리(수행비서)에게 사소한 이유로 곤장을 선물한다.

 

이순신은 '어란진승전' 이후 난중일기에 배설의 기세가 가히 오만방자하고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고 기록해 둔다. 

이순신은 왕명이라며 기어코 숙배식을 거행 한다.

8월 19일 숙배식에서 배설은 숙배를 거부하고 이순신만 절한다.(왕명을 거부하는 배설이 전쟁공포증에 있다고 거짖장계를 올린 이순신)

 

 

 

배설장군은 대노하여 숙배식을 거부할 뿐 아니라 조정의 처사에 분노해서 경상 우도통사 해임장이 오기 전엔 통수권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순신은 혀를 차면서 지휘권 승계를 받지 못하고 배설장군에게 지시하고, 배설장군이 수군에게 지시하는 방식으로 절충이 이루어진다.(난중일기)

 

이순신은 조정에서 배설 파면장을 기다려도 파면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영오지 않는다.

난중일기에도 배설장군에게 지시하는 내용이있고,  배설의 위세는 대단해서 불쾌 했다는 기록이 있다.

 



 

 

8월 26일 경상우도 수군은 '어란진 승전'을 하다.  (8월 26일 경상우도 수군은 어란진에서 정찰왜선 8척을 격침시킨다.)

 

어란진 전투에서 징소리와 퉁소 소리에 놀란 왜군 정찰선 8척을 명중시켜 격침했다. 조선 수군은 승리에 모두 기쁘했다. 이 전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깃발을 흔든 장수들도 너무 기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5, 김억추장군들에게 군권을 넘기다. 

'장군이 알다시피 경상 우도 12척의 전함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건조한 것이요'

 

'동인 조정이 전공을 세우고자 눈이 멀었고, 어린 순신장군이 공에 목말라 하니 언제적에게 전함을 읽게 될지 모르오'

 

'백병전과 화전을 피해 함포로 왜적을 격침해야 하오'

 

이순신장군 함에는  대장기 두개와 북을 넘겼으니 군권은 장군이 맡아주시오, 심신 당부한다.

장군 전쟁중에 적군 앞에서 자화자찬의 일기를 꾸미는 장수는 처음보았소,  후일 영웅이 되실 장수이니 장군이 지켜주어야 겠소,

 

전쟁이 끝나면 자화자찬 '난종일기'는 막을 내릴 것이요,

 

장군은 하야를 밣히며 순신이 후일 성웅이 될 제목이니 전함에 지휘권을 맏겨 전사하거나 전함을 소실시키지 않토록 밀명을 내린다.

 

어린 아해 명령을 듣는 척하고선 수군 작전은 김억추에게 명한다. 이순신에게는 신나게 칠 북과 깃발 두개를 장군영에 곶아 주었다. 이로서 이완과 이분은 명량 노량 해전 내내 장군기를 흔들 수 있었다.  이장군은 난중에도 수시로 쓸 난중일기가 유일한 유히거리로 있었다.

 

경상우도의 수군은 나름 지휘권과 신호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운명이 장군에게 달렸소'

'칠천포에서 전사하는 쉬운 길을 두고 나라의 존망과 서벌 대학살이 염려되어 퇴각명령을 내린 것을 잊지마시오'

 

 

귀향 송별식 9월 2일

이순신에게 병치료를 허락 받은 배설장군은 비단 도포를 입고 평소 하지 않든 목도리를 휘날리며, 부관 한명과 수행비서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힌 후에 제장과 9명의 부관들에게 모주 술을 한잔 씩 따라 주고 '월파검'을 차고 단기필마에 올라 귀향길에 오른다.

 

9월 3일 배설장군은 일본군 '시마즈 요시히로' 진영 적장의 막사를 향해 꺼리낌없이 돌파한다.

적장의 막사에 이르기까지 왜군은 아무도 제지할 엄두를 못낸다. 워낙 당당해서 앞길을 막으면 언제라도 단칼에 '월파검'에 베일 듯한 태도는 장비가 '청룡은월도'를 치켜들고 나아가는 모습에 비해 부족 함이 없는 당당함에 넉을 읽고 왜군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길을 비켜나게 된다.

 

시마즈 요시히로 왜장과 아들은 이런 배설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른다.

이윽고 적장 막사 앞에서 부관을 두고 배설의 말은 큰소리로 울면서 그 대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먼지를 읽으키며 통과해서 사라진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는 넉을 읽고 순간적인 상황에 당황하다 요시히로 부자는 서로 '요시히로 내목이 붙어 있는가?'부관을 추포하여 영문을 물어본 후 '배설장군 귀향 ~정말 훌륭하다' 감명을 받은 요시히로는 감사의 뜻으로 부관들을 풀어 고이 보낸다. 

그리고 철군요청서를 풍신수길에게 뛰우게 된다.

 

 

선산 배골에 도착한 배설장군은 앞 마당의 큰 배나무 아래에서 경삼감사의 영접을 받았는데 감사가 난중에 '장군 어인일이요'하고 묻자 배설장군이 말한다. "전쟁은 끝났소"

조선이 전쟁에서 이겼소, 이제 곧 왜군들은 철군하게 될 것이요,

경삼감사의 시국걱정 앞에 장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전쟁은 끝났소,  종전 절차만 남았소,

그러니 군인이 할일이 무었이 있겠소?

'귀향해서 병치료나 하여 조정(동인들)에 목을 진상 하여야 해야 겠소,' 

 '병든 목을 나라에 바칠 수 없어 귀향해서 치료하여 조정에 바치려하오,'

 

 

장군의 말을 들은 경상감사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무말도 못하고 경상감사는 고개만 끄덕였다.(경상감사는 군문을 나서자 마자 탈영보고가 된것을 알았다)

밤은 깊어 달도 어두운데,  오랜 고목의 배나무 아래 백마의 모습만 햐얕게 보이고 스산히 낙엽만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말이 필요할까?

선 산 땅 고향으로 선비 배설은 무거운 대장군을 이렇게 내려 놓고 훌훌 날아갈 듯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백마의 방울소리와 찌르르기 소리가  간혹 가을이 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전쟁은  1598년 끝났다. 풍신수길은 지치고 병들어 병사한다.

 이로서 조선의 백성들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은 백성들이 승리 했으나 조정에는 전공 다툼으로 혼란했다. 배설장군의 군공을 인정하면 진주성 대첩과 명량대첩 노량해전까지 동인들의 전공은 여지  없이 무너져야만했다.  동인들과 사관들은 배설의 공을 하나의 붓으로 깍고 또 깍은 후에 역모 모반죄로 추포 하기에 이르른다. 아해의 '난종일기'에 대장군이 탈영을 했다는 기록 때문이였다.

 

이윽고 '난종일기' 에 배설이 도주 했다는 내용을 문제삼아 역모 모반죄로 참수 하기로 한다. 이에 추포되어 장군은...

 

6,역모 모반 누명으로 참수

선조 실록은 1599년(선조 32) 3월 6일 공이 처형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군은 향년 49세를 일기로 ‘도망과 모반’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되기에 이른다 참수된다. 낙하산을 즐겨 타는 동인들은 전쟁은 할 줄 몰랐으나,  전공을 차지하는데는 선수중에 선수 였다. 그들이 전쟁을 유발했기에 더욱 그랬다.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에 영향받아 구국에 일념으로 최선을 다한 배설장군은 1599년 3월 6일  강원도 오죽헌이 있는 이율곡사당을 향해 삼배를 올린후 참수대에 올라 참수 된다. 아들과 아버지가 이를 지켜 보고 일가친척들이 지켜보지만 역모죄라 3족이 멸하는 중죄라서 아무도 시신을 수습치 못하였다. 

 

7,경상관찰사 장례

 

경상감사 한준겸이 시신을 거두어 사대부의 의례로 장례를 지내준다.

비록 동인들에게 역모 모반죄로 참수되지만 경상감사의 영으로 대장군의 예로 영면 한 것이다.

 

놀란 조정은 경상감사 한준겸을 탄핵하고 파직을 강행한다.

 

패장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양가(兩家)의 좋은 인연이 만복의 근원이다>(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혼인하여야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패장으로서 한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