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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뛰어난 영웅 이순신

自公有花 2014. 9. 6. 19:06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이 는 사실과 다르다.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과 전함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전멸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무공뿐만 아니라 권모술수 정치에 뛰어난 영웅이였습니다.




7월 23일 백의종군 하든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0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패잔선을  보니 거의 반파 상태로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고 무기 실탄이 거의 소진 된 상태였었습니다.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경상우도수사가 있음에도 절도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약 2.000명을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1, 이순신은 천운의 정치군인

럭비공 풋볼 튀듯이 백의종군 대죄인이 수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나라걱정이든 배설은 8월 3일 원수부가 보낸 사령장을 무시하고 숙배를 거부한다. 군권을 넘길 수 없다. 이순신은 혀를 내두러면서 아무말도 못한다. 왜냐면 이순신이 지휘하든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함선은 모두 전멸했고 배설의 전함수리에도 한푼도 보태 준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린다.선조는 이순신의 잔병을  배설경상우도수군에 합류하라고 지시하자, 이와 같이 12척의 전함이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배설이 도주하여 노량에 이르렀다는 암시를 하고 있음, (8.9)


 

2, 어란진해전[1597년8월26일]

배설은 이순신의 사령장이 도착한 이후에도 전함의 실질 지휘권을 행사 했다. 이순신은 배설과 함께 조력했고 드디어 8월 26일 배설함대가 어란진에서 왜의 정탐선 8척을 격침 시킨다. 12척의 함대가 뿜는 화력에 8척이 전소되고 나머지 배들이 도주한다. 배설은 평소 주장한 전략을 실전에 보여주었다. 이렇게 하는거다. 조정에 실망했다면 적극적으로 나라를 위해 해전을 가르켰을 것이다. 웅천 전투에서 왜선 600척을 부순 경험을 전수한다.

 

3, 이순신은 조정에 승전보고서를 올린다.

어란진 승전은 왜의 수군들에게 서해 진출을 더욱 고심하게 만든다. 전공을 독차지한 이순신에 대해 배설은 실망하게되어 병세는 급격히 나빠진다. 그간 전투의 누적된 피로도 함께했다. 


 


 

8월 18일

이순신은 배설을 휘어잡기 위해 배설의 수행비서(영리)에게 함대의 배설 장군기를 문제삼아 군율을 어겼다면서 끌어다가 곤장을 치게 하는데 이것은 배설장군에 대한 시위였다.

 

 "이순신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배설은 9월 2일 이순신에게 병치료차 귀향을 고지하자 이순신 잘 됐다는 듯이 허락 한다.배설은 이순신의 권모술수앞에 도망자 패장으로 모함된 것이다. 이순신도 절박해서 그랬을 것이다.

전쟁중이라 영내가 가장 안전하고 전국토가 유린된 시기였다. 적군이 사방이 있었기에 나가 돌아 다녀 봤자 죽기 딱이였다. 그래서 허락 했을 것이다. 가긴 어딜가,  바람 좀쉬고 돌아오겠지 이순신은 쉽게 허락했다.


 8월23일 이순신은 토사곽란으로 고통을 겪는다.


명량해전,9월16일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이순신의 배와 2마장(800m) 떨어진 곳에서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수군이 전멸하고 사기를 잃은 상태로 왜적 선단과 가까이 가지 않았다. 단 한사람, 이순신 장군만은 죽기를 각오하고 백병전을 하려고 800m 적진 을 향해 진군북을 치고 있었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칠천포해전에 대패한 조선 수군 패잔병들이 노량진으로 퇴각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자 백성들은 술렁이며 배설함대에 원근의 지원이 쇄도 하면서 온갖유언비어 속에 배설의 패전 함대는  조선의 꺼져가는 등불 같은 것이였다. 왕과 조정은 민심을 읽어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면 되었지만 살육전의 중심엔 도망할 곳 없는 백성들의 목숨을 노리는 국제전쟁이 있었다.


 

전공을 세워 출세하고자 하는 외국군과 부패하고 탐욕스런 관군이 백성들의 하나뿐인 목숨을 탈취하고자 혈안이 되어 전란을 부채질하였고 의지 할곳 없는 백성들에겐 일부 조선군 진영을 "시체굴" "귀신소굴"이라 칭했을 정도 이다. 이항복은 한산도 이순신의 진영을 "귀신소굴" 이라고 말했으니 조선군장수들의 기세와 오만함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 수 있고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려는 부대는 의병뿐이 였다.

 

 

당시 배설함대는 왜군들보다 배가 크고 높아 왜선들이 가까이 와서 밧줄을 타고 들어 오기전에는 안전했다. 왜선들은 함포라는게 없었고 조총을 빗발처럼 퍼부었지만 두꺼운 송판으로 갑판을 둘러싼 조선수군함대가 가장 안전한곳 이였다.

 

 

노량 명량 해협은 물쌀이세어 200여 수군이 노를 저어 진군한 후 일시에 파도에 떠내려 가면서 왜선들에 함포를 쏘아대는데 반해 왜선들은 엄청난 해류에 떠내려 갈때 우왕좌왕 배를 유지하기도 벅찾고  조선수군의 함포사격의 명중율이 높아 위협자체로 조총을 비오듯 쏘아대도 꿈적 않는 배설의 12척 함대는 6.25때 침략군의 탱크 10배 정도였다고 보면된다.

 

5, 거북선이 피해야 할 것은 근접전뿐,

배설의 함대운영으로 전공을 독차지 하고 싶어 하는 이순신의 배설장군 영리를 끌어다 곤장까지 치게게 된 지휘권 분쟁을 해결하는 길은 장군은 하야 뿐이라는 결심을 하고 수하 장수들에게 단단히 이순신이 전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을 경계 또 경계할 것을 지시하고 귀향을 하게 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진군 명령을 내려도 함대가 진군하지 않아 혼자 진군했다는 대목이 이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순신은 함대의 객과 같이 전권을 회복한 것은 노량해전에서 퇴각하는 적군의 후미에서 함포를 쏘아 댔든 것으로 수군의 지휘자들은 퇴각하는 적선들을 바라보며 전쟁의 끝에서 부모형제의 원수를 갑고자 모든 화력을 마음 놓고 퍼부었겠죠, 

 

 

 이미 전쟁이 끝났다는데 이순신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으며 7년 전쟁으로 죽으간 동료들을 떠 올리며 미친듯이 퇴각하는 적에게 공세를 취했을 것은 맞으나 근접 백병전은 할 수 없었다. 퇴각하는 적이라 하나 여전히 왜군은 강했고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6, 왜군들의 철군향수 

극도의 긴장으로 대치된 전선 언제라도 불을 뿜으면 엄청난 살육전이 되는 상태였다. 왜군도 조선군도 서로를 피하고 싶은 상태에서 배설 대장군의 귀향소문은 왜군들에게 고향과 부모 가족들 생각에 잠기게 했다. 어쩌면 돌아 갈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왜군 진영을 한 없이 슬프게 만들었다.

 

비록 적장이지만 그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풍신수길은 니쁜놈이고 사지에 군데를 내몰고 있다. 이런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 조선수군대장이 귀향했으니 이제 왜군들도 전쟁을 마쳐 집으로 돌아가서 죽어야 겠다는 기대감을 불어 넣었다. 이런 전쟁은 아니다!  

 

9월2일 부관 두명을 거느리고 배에서 내린 배설 장군은 한 필의 말을 타고 삼엄한 왜군 시마즈 요시히로  진영을 통과하게 된다. 왜장들은 허를 찔려 조선군이 언제라도 적장을 암살 시해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 시마즈 요시히로는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왜장막사를 통과 해서 배설대장군이 귀향했다는 소문은 왜군 진영 전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가뜩이나 무자비한 대살육전이 싫튼 왜군들 틈에 이소문은  센세이션을 읽으킨다. 조선땅에서 살아서 돌아가기 힘들어진 것은 왜군이나 왜장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을 위한 전쟁 살육을 위한 살육에 왜군들도 몸서리 치든차에 적장이 그것도 조선 수군대장이 귀향했다는 소식은 왜장들에게 어떻게든 귀국해야 겠다는 향수병을 자극하게 된다.


 

9월 15일 이순신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켜 주었다.

 

 7, 살육을 위한 살육전화

조선 백성들의 분노와 공포심은 높아져 언제 어디서든 공격받게된 왜군들에게 전후 전공이 보장되 않게 되었음에도 살육전을 독촉받게 되자 전쟁회의론이 퍙배해졌다. 배설정군처럼 우리도 자신의 고향 영지에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죽었으면 좋겠다.  전선은 누가 얼마를 살육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어젠다가 되어버린다.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1.000척의 왜군 함대의 공격으로 생지옥으로 변한 칠천량해전에서 삼중의 포위망을 뚫고 살아남은 장수가 '배설장군' 으로 오늘날 위중한 시기에 본받아야 할 장수이다. 절대 불리한 상황을 뚫고 나오는 구국정신과 다른 장수에게 군권을 넘기고 미련없이 귀향하는 것은 본받을 만하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스님]

 

 

칠천량해전은 왜군 10만과 함대 천오백여 척을 조선수군 1만 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으로 장수들은 출전을 망설였고 원균은 수적 열세 때문에 육전을 하려고 했다.  조정은 왜군과 육지에서는 전투이 상대가 안되니 해전으로 백병전을 해서 전멸 당하여 왜군에 피해를 입혀라는 것이였다.

 

 

동인조정과 선조는 조선수군이 전멸하든 말든 부산으로 밀려오는 10만 왜군을 육전은 안되니 해병대가 막으라는 것이였다.

왜군에 타격을 입히고 전멸하면 명나라 군졸들이 지켜주리라는 망상 때문이였다. 명군은 조선왕조를 지키려 출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침공을 막기위해 조선군이 가능한 처절한 전투로 왜군들에게 피해를 입혀주길 바랬다.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안았다.(기동력 함포 전함의 크기를 이용 하자는 것)결국 배설장군은 장작귀선에서 일기를 집필 하다가 전쟁이 종전하면서 강강천과 손조방 0 '三分斬死'  나누어 졌다.

 

전공을 세우길 학수 고대하든 이순신은 왜군의 부산 상륙까지 중요한 시점에 출병을 하지 않고 숨어 있었고,  그야 말로 귀신소굴 소릴 듣고도 적을 제앞 할 수단과 방법을 찾지 못 했다. 따라서 자신의 분신인 이억기를 대신 출병시켰으나 전멸을 하고 말았다.

 

칠천량을 해전을 앞두고 동인조정(유성룡)은 이순신을 체포 압송하여 권율막하에 둔다. 칠천량 해전에 전멸이 예측되자 이순신을 빼돌리고 이순신의 분신인 이억기로 대리 출전을 시키게 했다.(모양은 죄인으로 짜고 친 것으로 선조는 동인조정에 끌려다녔다)

 

배설은 왜군의 전멸이 아니라 함포로 타격을 입혀 방어를 하자는 것이였다. 어떻게든 왜군의 의지를 꺽어 철군시키려 풍신수길과 싸우고 있었기에 전멸을 할 수 없었다.

 

칠천량 패전후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첮 장계가 '배설은 패전으로 전쟁공포증에 걸려있다.'면서 사실상 해임할 것을 음해했으나 선조는 배설장군을 경상우도통사에 이순신을 절도사에 임명한 것만 봐도 배설장군이 얼마나 뛰어난 장수 였는지 알 수 있다.

 

배설장군은 왜군의 대장군 선단과 병력 수송선을 저지하려 했었다. 칠천포 해전에서도 도도와 가토의 장군선단을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고, 배에 기어 오른 원수인 왜군의 수급을 수없이 직접 '월파검'으로 베었다.

 

동인조정은 재주는 배설장군이 부리고 공은 이순신이 챙기라는 것이였다.

조선수군전멸은 10만 왜군이 서해로 군산 해망포나 제물포로 바로 진격해서 대규모 살육으로 조선이 항복하게 하려고 했기에 배설은 조정의 전멸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서해 해로인 '울똘목'으로 430km를 기아 상태에서 왜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진을 꾸린다.

 

도주하는 배설장군 일행치고는 너무도 어렵게 도주한다고 봐야한다. 그냥 세월호 선장처럼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면 그만임에도 천신만고의 전투준비를 하면서 조선백성의 대살육을 저지하고자 전투준비를 한 것이였다.(이순신이 장계를 몰랐음)

 

칠천포에서 보름날 밤에 전멸하고 남은 패잔군, 피항하는 월파군들(칠천포패전군)을 향해 백성들이 산봉우리에서 솟불을 지피면서'강강술래'왜치면 수군들은 '명량포'하거나 '노량포'또는 '울똘목'이라고 답해서 항로를 가르켜주고 낮에는 전함을 수리하고 밤에는 항해했었다.

 

 

우리가 10만 대군에 바다에서 적군에 포위 됐다고 할 때 아무리 장군이라고는 해도 두렵지 않겠는가?

칠천량해전에서 최호의 충청군은 배추밭의 "굼뱅이 한마리가 수천마리의 개미에게 잡혀 뜻기 듯이" 왜군들이 새까맣게 충청수군 배에 올라 도륙당하였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같은 명장도 제한몸 돌보기 힘들게 탈출함에도 중원대륙과 한반도에서 만년 역사에 이러한 대규포 포위망을 부대단위로 둟고 퇴각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세월호 침몰 때 승객들이 제 한몸 서로 빠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욕하지만, 과연 그 런 사태에서 제 한몸 보존하기도 쉽지 않은게 사람이다. 6.25 전쟁 때 국군들이 퇴각하든 것이나, 칠천량 바다에서 3중 포위망은 빈틈이 없고 육지에는 매복군 철처히 포위했든 칠천량 해전이다.

 

이순신의 분신인 이억기 군 전라 좌수영 약 5,000여 명 병력의  전멸은 불가항력 이였다. 

전함을 몰고 적장의 선단을 격침시키면서 조선수군을 지켜낸 배설장군은 그 공으로 역적에다 간첩으로까지 후세에서 욕을 먹는다. 과연 이순신 이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명량 영화는 무엇을 우리사회에 줄 것인가. 부정부패, 모함, 당쟁, 철면피가 승리하는 사회, 장군들을 모함하고 욕하는 '난종일기'야 말로 패륜이요 해악의 문서 아니겠는가? 

 

 

 

 

 

옳지 않은 왕명,

칠천포 패장 배설은 '월파정' 시 한수 만 남긴다. 대장부 중에 대장부 월파군의 대장군답지 않은가?

 

근세에 일본제국주의 도고제독이 이순신을 흠모 했다고 하지만 도고야 말로 우리를 식민지배한 원수였다. 

칠천포 해전은 온당한 왕명이 아니였다. 현지 사정도 모르든 조정의 무능이 였으며 이순신의 분신이라 볼 수 있든 이억기 장군은 화염속에 왜군들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원 수장되고 말았음만 봐도 알 수있다.

 

배설장군은 왜군을 수중전으로 충분히 방어 할 수 있다고 부산항에 도착하기 전에 적군과 전투를 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건의 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칠천포 해전에서 개같이 죽지 않은 것을 원망하는 동인들 조정의 한계였다. 나라가 왜군들 앞에 풍전등화이니 그래 죽을 수 없어 당연히 죽었어야 할 해전에서 살아남았기에 원망을 받았다.

 

 

울똘목에서 왜군의 대량학살을 막고자 천신만고 끝에 수백리를 항해해서 노량포에서 전투준비를 하는 장군을 이순신은 패장으로 도주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공포증에 걸렸다'고 전쟁터의 장수로서 할수 없는 모함과 조정과 장군을 이간하고 경상우도 병력과 전함을 털도뽑지 않고 냉큼 빼앗고자 하였다.

 

 

나라의 풍전등화 앞에서 장군들이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함에도 배설장군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한후 귀향하므로 종전카드를 목숨과 바꾸어 조선에서 대학살을 막으려 했다. 물론 왕조를 유지하려는 조정과 권력을 유지 하려는 동인들의 침소봉대 전공다툼에 공헌하지 않고 귀향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배설장군보다 서열이 낮고 백의 종군하든 대죄인인 이순신을 절도사로 파견하여 장군의 재주만을 이용하려는 조정과 병력과 전함을 뺏으려는 불편부당한 타락한 처사에 구국의 일념으로 할 도리를 다한 후 종전카드로 귀향했다.(배설의 귀향참조)

 

 

왜군의 철군러시(대장군의 귀향과 졸병의 탈영)

먼저 귀향을 실천하여 보이므로 적군들이 무도한 대살육을 내린 풍신수길에게 저항하고 반기를 들게 시범을 몸소 보여주었다. 비굴하게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대장군 다운 목숨을 조정에 바치는 귀향으로 침략군들이 풍신수길에게 칼을 겨누게 하므로서 대역을 깨닫게 했다.

 

무언의 고도의 정치행위인 "귀향"으로 장군에게 영향받고 깨달음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 등등에 의해 풍신수길은 패망하고 그의 일가와 토요토미히로요리를 비롯한 조선침략 원흉들 십만여 적군들의 씨를 말리게 했다.

 

당쟁과 부정한 정쟁의 와중에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대살육을 방어 하는데 음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순신과 김시민을 영웅이 되도록 다리를 놓아주고 장군은 귀향했다.

 

행주 산성에서 퇴각하는 적군을 방어한 도원수 권율은 퇴각하는 엄청난 왜군을 전멸한(수백명 살상을 수만명살상으로 허위) 것이냥, 전공을 포장했기에 배설장군에게 과도한 컴플렉스가 있었다.

 

 

 

해병대 사령관인 최정예 부대의 사령관이든 배설장군이 간악무도한 적진을 돌파하며 에헴하든 시대에 하사관도 일등병도 이등병도 아닌 이름 없는 백성으로 귀향 한 것이다.

 

전공을 세우려고 조선에 출병한 왜장들에겐 가히 핵폭탄급 충격으로 철군 요청 러시를 불러 온다. 허구 많은 길을 두고 적진을 돌파하므로서 왜군들의 신상을 위협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풍신수길의 심장를 뚫는 반전) 풍신수길이 조선백성들을 살육하고 백성들과 전투했다면 배설은 풍신수길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후일 풍신수길과 그를 따르든 조선 침략장수들을 세키가하라합전에서 씨를 말리게 했고 풍신수길의 일족들의 배를 가른 것이다. 

 

 

 모함과 음해하는 탐욕스런 장수들의 공격 속에서도 조선 백성이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도록 배설장군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 했던 것이다. 장군을 음해하든 수많은 동인들의 공격에도 단 한마디도 원망이 없었다.(난중일기와 비교가 안되는 처신) 

 

 

국난을 수습하고자 하는 장군은 부정한 왕명에 맞서고 당쟁의 산물인 정치군인들의 전공다툼을 거부하고 왜군철군과 일본 내전을 촉발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인 귀향을 실천해 보이므로 마지막 목숨 하나도 값지게 나라에 받쳐 '동서'라는 화합만이 만복에 근원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경상도 군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에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보전된다"(난종일기) 

 

 

 

이순신의 모함으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므로써 조선 수군은 전멸된다. 경상도 우도통사 배설장군이 장작귀선 12척으로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노량포로 들어 오므로써 이순신 장군이 해전사에 남을 명량해전이 성립된다. (전라도와 한양의 대학살이 저지됨)만일 다른 곳으로 배설이 갔었다면.... 조선은 일본이 되었을지도,,,,,

 

“칠전량 해전에서 사람단위가 아니라 배 단위로 부대단위로 탈출한 것은 배설장군의 경상 우수영 소속으로 이순신은 배설이 이끌고 온 12척의 선단으로 경상우도수군으로 (다 된 밥에 숫가락 놓은 격이 아니고 무엇이랴) 명량해전에 임했다. 

 

명량해전 당시 병력이 경상우수영 병력만으로 구성됐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12척에 장작귀선을 가동할 수 있을 전문 병력이 있었을 것은 틀림 없고, 배설장군이 장장 약 430K를 항해해서 "울똘목"을 향해 항해 했는데~ 결국 이순신의 모함으로 군권을 넘기게 되자 "귀향" 카드로 마지막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은퇴를 귀향한다.



 

6,역모 모반 누명으로 참수

선조 실록은 1599년(선조 32) 3월 6일 공이 처형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군은 향년 49세를 일기로 ‘도망과 모반’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되기에 이른다 참수된다. 낙하산을 즐겨 타는 동인들은 전쟁은 할 줄 몰랐으나,  전공을 차지하는데는 선수중에 선수 였다. 그들이 전쟁을 유발했기에 더욱 그랬다.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에 영향받아 구국에 일념으로 최선을 다한 배설장군은 1599년 3월 6일  강원도 오죽헌이 있는 이율곡사당을 향해 삼배를 올린후 참수대에 올라 참수 된다. 아들과 아버지가 이를 지켜보지만 역모죄라 3족이 멸하는 중죄라서 아무도 시신을 수습치 못하였다. 

 

7,경상관찰사 장례

 

경상감사 한준겸이 시신을 거두어 사대부의 의례로 장례를 지내준다.

비록 동인들에게 역모 모반죄로 참수되지만 경상감사의 영으로 대장군의 예로 영면 한 것이다.

 

놀란 조정은 경상감사 한준겸을 탄핵하고 파직을 강행한다.

 

 

 

 

 

 

 

 

 

 

패장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양가(兩家)의 좋은 인연이 만복의 근원이다>(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패장으로서 한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이다. 동서 화합만이 만복의 국가 번영의 근간이라는 뜻이다.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월파정月波亭

 


배즙(1560~1599)꽃다운 39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1, 거북선과 백병전

칠천포 해전에서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은 배설장군을 도와 조방장으로 활약하다 칠천포해전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배설함대는 왜군적선들과 근접 또는 왜군들이 배설의 함대위로 기어 올라 왔고 조방장 배즙은 이들과 백병전으로 전사했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이 그림에 경상우도 수군이란 깃발이 국내에 전재 되면서 이순신의 깃발로"李" 로 조작 유통되고 있음(분명히 경상 우도수군깃발) 

 배즙 장군의 지휘 모습이 그려진 칠천량해전의 종군화

배즙 장군과 조선 경상 우도수군의 전사하고 남은 전멸전사 한 후 빈 배와 무기들의 모습(치열한 전투임을 보여줌) 

 조선 수군들이 일본 선단에 전혀 뒤지지 않는 전투 장면이고 왜군들 표정이 바짝 얼어 붙어 있음에도 조선수군들 기세가 대단함

이순신의 영화에 전투장면으로 고증되고 있으나 사실은 2007년 플래툰지에 경상우도 수군의 전투장면으로 확인되었음

왜군들은 중요 전투에만 종군화를 남겼다. 그러므로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의 그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내 동인들의 훈포장 전사로 추정된다.

 

 

 

 

배설의 함대 규모는 12척당 수군 200명 정도로 2.400여 명으로 추산 되고 배즙을 포함 전사자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설함대는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조총탄환이 비오듯이 온다 해도 전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명 거북선이란 소릴 듣는다. 갑판이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화전에 취약하고 근접전에 취약했다.

 

이순신 보고서에도 노량포구에서 보니 전함수리를 하는데 척당 90명 정도로 보인다고 했으므로 오견상 보이는 병력도 1.000명이 넘고 나머지 병력은 선상수리를 한 것으로 보아 배설의 병력은 2.000여 명으로 봄이 타당하다.(전공을 축소하려든 도인조정기록)

이순신보고서에 눈에 보이는 병력이라고 한점이고 대체로 항구에 정박하여 수리하고 있는 배에 승선 병력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순신 미화를 위해 배설의 잔병이 120명이라는 교과서 내용은 말도 안됌,  전함은 시스템으로 가동되므로 장장 201키로를 120명이 운항했다면 배설은 남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보다 유능한 세계적인 선장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순신이 대역죄인 백의종군하든 (1597년7월 23일자 보고서) 1060명 가량의 병력이라했음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칠천포해전에서 한산도 청야작전까지 감안하면 배설함대는 장당 430km를 운행한 것이 되는데 디젤엔진이 있는 페리호도 아닌데 척당10명서 노를 저어 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싸웠으나 왜군 수적인 우세로 전멸가까운

패전을 했다. 그러나 왜군 입장에서 보면 전왜군이 삼중포위망이 뚫렸다는 사실과 배설함대 경상우도 함대가 유유히 퇴각했으므로 승리치곤 꺼림칙하다. 또 왜군이 속수무책으로 8척이 격침소실 되고 수십척의 배들이 파괴되었다.

 

삼중 해상포위망을 깨트리고 나온 배설의 함대가 가장전쟁준비가 잘된 상태였기에 8척의 왜군 주력함대를 격침소실 시켰으며 왜군에 가한 충격은 상당했으리라는 것 침몰되진 안았으나 파손시킨 적함은 3십척 이상되 었으리라는 것이다.

 

배설함대는 탄략이 부족해서 쏘아 댈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했다. 여기서 퇴각에 있어서도 동쪽 해상로로 6척이 서똑쪽해상로로 6척이 나누어 퇴각하여 탄환이 떨어진 전함이 앞서고 탄환이 있는 전함이 뒤에서 호위하면서 퇴각하므로 적함이 추격시 협공이 가능 하게 퇴각해서 한상도 수군 본영으로 .안전하게 퇴각 한 것은 높이 평가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칠천포 전투에는 패했지만 왜의 수군이 연합 기습공격으로 얻은 실익은 없다는 점이다. 조선군 총사령관은 육지로 나가서 매복 육군에게 공도 빼앗기고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수군 주력함대는 만만찮은 매운 맛을 보여줬으므로 왜군은 추격을 하지 못한다.

 

역으로 생각해서 칠천포에 포위된 포위망을 깨트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며 깨트러진 왜군의 피해는 적지 안았다.

 

 

풍신수길은 잔병까지 괴멸시키라고 하지만 함포를 장착한 배설함대의 가공할 무기와 빠른 기동력 높은 갑판 이런 함대의 우수함에다 배설이 깊은 수심에서 전투를 하자고 한점으로 왜의 수군은 앞서 나서지 못한다. 앞서 나서다간 함포의 사격을 받으면 대장선이라해도 상어의 밥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2, 신에게는 12척의 거북선이 있아옵니다.

오직 잡을 수 있는 것은 근접해서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거나 불화살로 소실 시키는 이외엔 대책이 없다

조총을 비오듯 쏘아대도 배설함대 인에는 한발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12척이라고는 해도 가공할 화력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신에게는 아직 배 열두 척이 남아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왜 그러면 격침에서 8척이 자주 등장하는가? 배설함대 8척에만 함포가 장팍되고 나머지 4척은 다른 용도가 있었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배설함대가 30척의 적선을 격침시텼다고 한다면 적어도 4회에 걸친 진격과 퇴각이 있는 교전이라야 한다.더욱이 수백척의 함선을 격침시켰다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명향 영화처럼 백병전을 하게 되면 거북선함대의 승율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난중일기에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진격명령에 다른 함선이 겁먹어 따르지 안는다고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함대의 지휘관들이 나름 이순신의 근접전투를 견제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치의 밀림도 없는 당당한 조선수군들의 용맹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당시는 이와 유사한 흑백의 그림들이 왜군들 내부에 돌림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 출병 제 16군의 조선출병 거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됨

 

3,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사진 자료출처: 다음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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