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화합을 강조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동서 화합만이 나라의 부흥의 근원이다>
동서 양가(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국가에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로 후손들에게 가정과 국가 화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다.
배설귀향과 탈영시비 실록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배설장군의 귀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패장으로서 배설장군은 글을 남기지 않앗기에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으로 살펴 본다.
8월 18일 배설의 영리를 곤장을 치조해서 배설장군을 경계했다. (경상도 군종은 하루에 한명씩 목을쳐야 한다)당시는 지역감정이 없었기에 경상우도수군을 지칭한 말로 봐야함 배설의 독주에 불만이 있어보임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8월 19일 3도수군절도사 취임삭을 했다. (배설장군은 어명인 숙배를 거부했다. 이순신과 제장들만 숙배를 했다. 배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오만하고 잘난채 하는 모습이 ~) 전쟁 공포증에 걸린 장수치고는 이상하잖아?
9월 2일 이순신장군이 배설의 귀향 소장을 병치료차 허락했다.(전투준비 완료를 했음)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 3일 배설이 성주 본가에 갔는데 선산 배골 주위의 배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쁘다.
당시의 해병대인 수군의 편제를 보면 경상우도 수사 또는 첨사가 야전군사령관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절도사나 도원수는 실질 지배권이 없었다.(배설이 행편의 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불만이있다)
따라서 백의 종군하든 이순신의 죄는 무죄가 난게 아니였다.
어떻게든 비상국면에서 이순신장군은 공을 세워야 할 절박한 상황에있었다.
전남 해남 진도일대 와
화개장터에 구전들 중에 '대장도 싫소 졸병도 실소 고향으로 가려오'라는 노래가 있다. 왕조시대에 왕권을 뒤엎을 수 있는 대장을 내려 놓은 장수가 조선조에는 단 한사람도 없기에 배설장군의 구전이라 볼수 있다.
배설의 탈영시비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3월 논공행상에서 동인조정에서 이며 선조실록을 '수정하면서 여정이 모두 배설장군의 역모 모반죄로 방형을 좋아 했는데 경상감사 한준겸만이 배설의 장례를 지내 파직상소에 대한 기록' 배설장군에 대한 시기와 질시가 전쟁끝나고 본격화 했음을 보여주고 선조는 역모를 할 우려가 있다고 한점이다.
경상우도수사 작전반경이 경상도 전역인데 경상도 선산땅으로 병치료 가는 것을 공문으로 허락까지 받았다. 그럼 공문 허락 내용을 원수부나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탈영으로 몰았다는 것은 당시 필요했다면, 그렇다치고 역모로 모는건 뭐냐 말이다? 탈영이네 도주네 해서 처형당한게 아니라는 점이다.
난중일기 기록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
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8월12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이순신장군이 배설의 귀향 소장을 병치료차 허락했다.(전투준비 완료를 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하고 무조건 남하를 명령했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전투를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장군의 유문.
排泄将軍の(遺文)セルの 1599年 3月 6日
<夕日(夕陽)のドアの外に道は東西(東西)に分かれていた>
- 東西 -
夕陽 之 門
路 東西
兩家 之 好
萬福 之 源
<東西和合だけが国の復興の源である>
東西両家(兩家之好萬福之源)という句である。
現在もこの文句は、宗家の子孫価のアーカイブされた魂ことよく保存されている。同人とソが調和しなければなら国に満腹に来る意味に解釈する。激しい党争をなぞらえ書いた市区に子孫に家庭国和合の重要性を悟らせて与え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배설이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の全滅ではなく、艦砲で打撃を加えて防御を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の意志を折っ撤退させようと風シンスギルと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ず者、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を負わせた。羽柴秀勝の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が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적군을 죽인 장수는 단연 이순신 장군이다. 기록 대로라면 약 158.000명의 적군을 사살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명량 노량 해전에서 약 6만 명을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전세계에 전무 후무한 전공을 올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이 난중일기에 기록 되어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전란 속에서 장군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든 시기에 배설은 관료들이 치부와 승진을 위한 수탈을 막아보고자 '부정부패 척결'을 상주하여(선산부사로 좌천된 사이 진주주민 6만명이 학살되었다.)왕조의 장수가 아니라 의병으로 백성의 장수로 일생을 마쳤었다. 이순신 장군처럼 일본군을 대량 사살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나 임진왜란에서 백성들을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 숫자로 말하면 단연 1등에 비교불가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운명하고 6년 만에 선조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묘지장산은 조선 왕조 전무후무한 6.000만 평을 하사받았다.(주회20리)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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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검,청록진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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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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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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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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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장군의 귀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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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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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꽃다운 35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배 즙(裵 楫) 1564년(명종19)에 태어남.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장군은 부친 서암(書巖公) 배덕문(裵德文,贈吏曹判書)선생이다. 성산 배씨(星山裵氏) 진사 공파의 17세(世)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배덕문이 의병을 일으켜 왜장 黑甸句의 목을 벨 때에 공도 참여하였고, 개산진의 싸움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쳐하는 곳)로 부터 선무사(宣撫使)에 제수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조방장으로써 백씨 설(경상우도 수군절도사)과 함께 한산도에서 대승하고 노량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난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 때 공은 비분강개하여 호령하기를 "바다의 기운을 맑게 할 수만 있다면,이 한목숨 미련없이 바치리라".하고 적진을 종횡무진 유린타가 유탄을 맞아 순절 하였으니 향년 35세였다.
1610년(광해2)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되었다. 이같은 공의 사실이 경산지와 영지에 등재되어 있으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유허비를 세웠다.(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공의 선대는 신라의 금산가리부장 지타(祗沱)공을 득시조(得始祖)라고 하고, 고려 개국 공신 무열공(武烈公) 현경 (玄慶)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고려 3중 벽상공신 휘 위준(位俊)을 1세 시조로 기세(起世)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8백여 성상 30여 세대를 계대승손(繼代承孫)하고 있다. 5세인 흥안(興安) 부원군(仁慶)을 역임한 인경(仁慶)을 성산(星山) 배씨 득관조(得貫祖)로 모시고 있다.
현손 중 8세 진손(晋孫)은 공조판서이며, 그의 삼남 현(俔)은 진사공파 파조(派祖)이시다. 11세 치(絺)는 수군총병마사이고 청백리로 저명하였으며, 이 분의 아들 (萬戶) 윤후(允厚)는 장군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장군의 증조 맹성(孟成)은 부위(副尉)이시며, 조부 주(綢)는 참봉이시고, 부친은 의병장인 서암(書巖) 배덕문(裵德文)선생 이시다. 공의 부친 서암 공은 한성 서윤(漢城庶尹)을 거쳐 여러 고을의 수장을 두루 거치고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시다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공적을 세워 선무원종 이등 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1, 거북선과 백병전
칠천포 해전에서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은 배설장군을 도와 조방장으로 활약하다 칠천포해전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배설함대는 왜군적선들과 근접 또는 왜군들이 배설의 함대위로 기어 올라 왔고 조방장 배즙은 이들과 백병전으로 전사했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이 그림에 경상우도 수군이란 깃발이 국내에 전재 되면서 이순신의 깃발로"李" 로 조작 유통되고 있음(분명히 경상 우도수군깃발)
배즙 장군의 지휘 모습이 그려진 칠천량해전의 종군화
배즙 장군과 조선 경상 우도수군의 전사하고 남은 전멸전사 한 후 빈 배와 무기들의 모습(치열한 전투임을 보여줌)
조선 수군들이 일본 선단에 전혀 뒤지지 않는 전투 장면이고 왜군들 표정이 바짝 얼어 붙어 있음에도 조선수군들 기세가 대단함
이순신의 영화에 전투장면으로 고증되고 있으나 사실은 2007년 플래툰지에 경상우도 수군의 전투장면으로 확인되었음
왜군들은 중요 전투에만 종군화를 남겼다. 그러므로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의 그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내 동인들의 훈포장 전사로 추정된다.
배설의 함대 규모는 12척당 수군 200명 정도로 2.400여 명으로 추산 되고 배즙을 포함 전사자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설함대는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조총탄환이 비오듯이 온다 해도 전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명 거북선이란 소릴 듣는다. 갑판이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화전에 취약하고 근접전에 취약했다.
이순신 보고서에도 노량포구에서 보니 전함수리를 하는데 척당 90명 정도로 보인다고 했으므로 오견상 보이는 병력도 1.000명이 넘고 나머지 병력은 선상수리를 한 것으로 보아 배설의 병력은 2.000여 명으로 봄이 타당하다.(전공을 축소하려든 도인조정기록)
이순신보고서에 눈에 보이는 병력이라고 한점이고 대체로 항구에 정박하여 수리하고 있는 배에 승선 병력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순신 미화를 위해 배설의 잔병이 120명이라는 교과서 내용은 말도 안됀다.전함은 시스템으로 가동되므로 장장 201키로를 120명이 운항했다면 배설은 남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보다 유능한 세계적인 선장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순신이 대역죄인 백의종군하든 (1597년7월 23일자 보고서) 1060명 가량의 병력이라했음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칠천포해전에서 한산도 청야작전까지 감안하면 배설함대는 장당 430km를 운행한 것이 되는데 디젤엔진이 있는 페리호도 아닌데 척당10명서 노를 저어 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싸웠으나 왜군 수적인 우세로 전멸가까운
패전을 했다. 그러나 왜군 입장에서 보면 전왜군이 삼중포위망이 뚫렸다는 사실과 배설함대 경상우도 함대가 유유히 퇴각했으므로 승리치곤 꺼림칙하다. 또 왜군이 속수무책으로 8척이 격침소실 되고 수십척의 배들이 파괴되었다.
삼중 해상포위망을 깨트리고 나온 배설의 함대가 가장전쟁준비가 잘된 상태였기에 8척의 왜군 주력함대를 격침소실 시켰으며 왜군에 가한 충격은 상당했으리라는 것 침몰되진 안았으나 파손시킨 적함은 3십척 이상되 었으리라는 것이다.
배설함대는 탄략이 부족해서 쏘아 댈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했다. 여기서 퇴각에 있어서도 동쪽 해상로로 6척이 서똑쪽해상로로 6척이 나누어 퇴각하여 탄환이 떨어진 전함이 앞서고 탄환이 있는 전함이 뒤에서 호위하면서 퇴각하므로 적함이 추격시 협공이 가능 하게 퇴각해서 한상도 수군 본영으로 .안전하게 퇴각 한 것은 높이 평가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칠천포 전투에는 패했지만 왜의 수군이 연합 기습공격으로 얻은 실익은 없다는 점이다. 조선군 총사령관은 육지로 나가서 매복 육군에게 공도 빼앗기고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수군 주력함대는 만만찮은 매운 맛을 보여줬으므로 왜군은 추격을 하지 못한다.
역으로 생각해서 칠천포에 포위된 포위망을 깨트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며 깨트러진 왜군의 피해는 적지 안았다.
풍신수길은 잔병까지 괴멸시키라고 하지만 함포를 장착한 배설함대의 가공할 무기와 빠른 기동력 높은 갑판 이런 함대의 우수함에다 배설이 깊은 수심에서 전투를 하자고 한점으로 왜의 수군은 앞서 나서지 못한다. 앞서 나서다간 함포의 사격을 받으면 대장선이라해도 상어의 밥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2, 신에게는 12척의 거북선이 있아옵니다.
오직 잡을 수 있는 것은 근접해서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거나 불화살로 소실 시키는 이외엔 대책이 없다
조총을 비오듯 쏘아대도 배설함대 인에는 한발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12척이라고는 해도 가공할 화력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신에게는 아직 배 열두 척이 남아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왜 그러면 격침에서 8척이 자주 등장하는가? 배설함대 8척에만 함포가 장팍되고 나머지 4척은 다른 용도가 있었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배설함대가 30척의 적선을 격침시텼다고 한다면 적어도 4회에 걸친 진격과 퇴각이 있는 교전이라야 한다.더욱이 수백척의 함선을 격침시켰다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명향 영화처럼 백병전을 하게 되면 거북선함대의 승율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난중일기에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진격명령에 다른 함선이 겁먹어 따르지 안는다고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함대의 지휘관들이 나름 이순신의 근접전투를 견제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치의 밀림도 없는 당당한 조선수군들의 용맹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당시는 이와 유사한 흑백의 그림들이 왜군들 내부에 돌림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 출병 제 16군의 조선출병 거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됨
3,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사진 자료출처: 다음아고라)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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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검,청록진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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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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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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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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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장군의 귀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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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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