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학의반란.(이몽학~1596년)
왕족서얼출신으로 홍산현구룡사람이다.
아버지에게쫓겨나 충청,전라도지방을돌아다녔다.
임진왜란때 한현의부하로들어가 그와함께반란을계획하였다.
동갑회를조직하여 의병을모아 홍산(부여),청양,대흥등을차례로점령하고,
홍성(홍주)까지 장악하였다.
한현은 이몽학과함께 이시발(李時發)휘하에서 호서지방의병의 조련을담당하는명령을받았으나,
공주공산성축조와 공산성청야작전전투에불만을품었다.
청야작전으로 공주관민들의집과 논밭의작물을모두태워버리고,
공산성으로들어가서 청야작전을벌이라는 도원수권율의명령에불복하여
김경창,이구,장후재,김팽종(사노비),승려능운등과함께 홍산쌍방축에모여
난을일으켰다.
더군다나 관리,토호들의 지나친과세 은결(隱結)의횡포가극심하였다.
은결은 화전과같은것이다.
실제로경작하고있으나 토지대장에서빠진토지를말한다.
부정부패한관리들은 이런 은결토지에도과세하여 횡포가심한데다가,
관민들은 공주공산성축조에끌려가부역을해야만하였다.
게다가 공주인근 공산성주변마을의집과농작물을모두태워없애버리자
관민들의분노는 극에달하였다.
이당시 의병조직개편으로 모든의병들은 김덕령휘하로재편되는시기였다.
1594년4월 충용장에오른 김덕령은 모든의병을 자신의휘하에둔다는
조선정부의개편이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의병조직은 각자 따로놀았다.
공주민들을 공산성에모두쓸어넣고 왜군과의전투를치루기로결정하고
공주민들을 공산성으로 강제로들어가게만들자,
한현,이몽학등은 홍산(부여)로가서 의병700여명을모아 반란을일으켰다.
1594년7월6일 홍산현감 윤영현을붙잡아 관인도장을빼앗은후 임천군으로쳐들어가
군수박진국을포박하였다.
7월7일에는 정산현을점령하고,8일에는 청양,9일에는 대흥을함락시켰다.
이과정에서 강제징세에시달리던 군민들이가세하여 수천명으로늘어났다.
7월10일 홍주성(홍성)으로진격하였다.
홍주목사 홍가신은 시간을벌기위하여 가신이었던,
주관속,이희수,신수를이몽학군에게보내어 거짓으로항복하게하고,
그사이에 인근수령들에게 구원을요청하였다.
충청순찰사 신경행,최호,박동선,황응성등과함께 홍주성으로가 이몽학군과
대치하였다.
대치하는동안 도원수권율,충청도병마절도사 이시언,중군장 이간등이 홍주로향하였다.
이때 판관 윤계가 10여명을이끌고 야밤에 이몽학군진영으로들어가 총포를쏜다음
이몽학의머리를베어오면 큰상을주겠다고하였다.
김경창,임억명,태척등이 이몽학을살해하고목을베자 이몽학군이
일시에흩어져버리자 관군은추격전을벌여 봉기민들을학살하였다.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명을모병하여 이몽학군과합세하려하였으나,
관군의공격을받고패주하다가잡혀 서울로압송당하여
선조의친국을받고 처형당하였다.
이때 처형된봉기민은 33명에달했으며 지방에서는 100명이처형당했다.
환현의친국과정에서 김덕령,홍계남,최담령,곽재우,고언백등이공모했다는이야기가나와
김덕령은 고문끝에죽고말았다.
김덕령은 훗날 무고를당했음이밝혀져 신원되었으나,
민란수습과정에서 호서지방에서 반도를색출하면서 민란후에도
조정에대한반감과불만이많아지게되었다.
전세가불리해지자 그의부하 김경창,임억명,태척등이 이몽학의목을베어
조정에바치자,
김경창,임억명은 이공으로 1등공신 종2품에해당하는가선대부의작위를받았다.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신경행,임득의는3등공신에책봉되었다.
한현은서얼출신으로 공주공산성청야작전을거부하였다.
이당시 조선정부는 도원수권율에의해 공주공산성에서 청야작전을감행할계획을세우고있었다.
의병을모은 이몽학은 공주성민들의집과논밭을모두불태우고
공주성으로들어가라고하자 반발을하게되었다.
모든 백성들의 농작물을태워버리고 공주 공산성에쓸어넣고는 왜군과싸우려하였다.
대포와 조총으로무장한 왜군과의싸움에서 고대시대나있을법한 성곽위주의전투를
벌이려하니 백성들이들어가지않으려하였고 불만이터져나왔다.
이미 행주대첩,진주대첩,진주2차전투등에서 오랜동안써먹은수법이라
왜군에게 통하지않을시기였다.
백성들을 희생양으로삼으려하자 이몽학등이반란을일으켜 공산성주변 읍군을점령하고
대항한사건이었다.
이사건으로 공주민들은 전멸당하지않고 현재까지도 살아있는것이다.
이것을회유하여 김덕령휘하에넣고 진주성으로데리고가려했던
김덕령의병장에게 감사해야한다.
부족해진의병을모으기위해 김덕령은 의병총대장으로서 이들을회유하여
자기휘하에넣으려고했던것이다.
의병장 곽재우도 진주성사수를거부하고
유격전략을택한이유로 평생 초야에묻혀살아야했던것이다.
도원수권율,충청병마절도사 이시언,이간장군등의실책이아니었나판단된다.
이사건으로 선조는 의병들을의심하기시작하였고,
관군으로까지확대되는계기가되었다.
그래서 이순신을견제하기위하여 원균을 전면에내세우게되었던것이다.
충청순찰사로오른 신경행을주목할필요가있다.
신경행은 한때 김덕령이이끄는전라의병휘하에서 왜군과싸웠다.
의병을지휘하는 지휘권자는 김덕령이었고,
모두 호남인들구성되어있었다.
여기에 빌붙어서 전투에참가한 신경행은실권이없었다.
훗날 한현의친국과정에서 신경행은 김덕령을엮어죽게만들었다.
조선정부에서는 김덕령에게 모든의병을 김덕령휘하에둔다는
명령을하달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잘통제가되지않았다.
의병병력을인수하러 충청도로갔다가 신경행의공작에
말려든것이다.
이몽학의반란이일어나자 신경행은
김덕령을엮을생각을해냈던것이 분명하다.
김덕령은 자신의휘에배속되었던 윤근수의종이탈영하자,
그의아비를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빼달라고하자 청탁을거절하였고 그의아비를취조하다
죽게만들었다.
이일로 김덕령은 윤근수의원한을사게된다.
윤근수는 서인의거두 윤두수의친동생이다.
요즘 윤두수의작품이 많이발견되고있다.
그래서 모종의세력에의해 윤두수의업적을 거꾸로 칭송하고나오는세력이있다.
그의작품을 뻥튀기하려는움직임인것이다.
같은성리학자라고하여도
이상주의적성리학자가있고 현실주의적성리학자가있다.
탁상머리에앉아서 입으로만외치는 이상주의적성리학자들때문에
죄없이죽어간 의병들이있었다.
김덕령은 대표적인의병장이었다.
왜군이침공했을때는 과감하게 이상주의적성리학은버려야산다.
전쟁중에도 그런사조를들이댄다는것은
그당시 기득권의안일함에젖어서 헤어나지못하고있었다는반증이다.
자기친동생 윤근수의종놈하나가 탈영한것을감추기위해
김덕령과수많은 의병장들을죽여야했는지 되묻고싶어진다.
정치적살인으로이어진 서인세력의집권야욕은
비판받아야마땅할것이다.
송강정철자신도 1591년 이산해의배후책동으로 왕의뜻을거스르고,
주색에빠져 국사를그르쳤다는상소가빗발쳐,명주,진주,강계등으로 유배생활을하였다.
그는 강화관찰사로 명나라에다녀오다가
1593년강화도에서 생을마감하였다.
강화도에는 김천일,처영스님,김덕령,황진,권율등
고경명휘하부대였던전라의병병력을 김천일이 전라의병총대장 창의사가되어
주둔하면서 한강하구로거슬러올라가는 왜군을막기위해
주둔하고있었다.
곤장을 쳤다” (계사년 6월 18일)난중일기
이순신은 엄격한 상사였다. 병선을 수리하지 않은 군관들을 잡아다 곤장을 쳤다.
이웃집 개에게 피해를 끼친 토병도 곤장을 쳤다.
술병을 훔치다 붙잡힌 종도 곤장을 쳤다.
심지어 그 앞에서 “오만을 떨다가” 곤장 70대를 맞은 수군도 있었다.
전시에 기강을 잡기 위해서는 지엄한 군율이 필요했다.
도망갔다 잡혀 온 군사들이나 여러 차례 양식을 훔친 자, 소를 훔쳐가면서 왜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자들은 가차 없이 목을 베어 효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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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구타로 죽어가는 병사들로 난리인데요
이순신장군님은 백성들도 가차없이 목을 쳐버리므로 주민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답니다.
당시는 아버지가 이순신 장군에게 효수되면 그 가족들이 굉장히 감사하고 고맙다고 했나 봅니다.(먹을게 없어 겠죠)
이순신장군은 엄격하고 무지 군기가 세어 전라좌수영은 이름 그대로 귀신소굴이라 불리웠다는 이항복 병조판서의 기록이있어요
이순신장군이 파직되자 이억기가 전라좌수영에 오르고 원균이 3도 수군 통제사가 되어 칠천량해전에 약 60여 척의 전함과 약5000명의 전라좌수영 병사가 출전해서 7월 16일 제대로 전투도 못하고 전멸합니다. 군기 세다고 이기는 게 아닙니다.
요즈음 전방에 군기잡는다고 임병장탈영사건 윤일병구타 사망사건 경기도지사 아들연루 군폭행사건 이순신 장군처럼 엄격한 군율 세우겠다는 것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휘관 명령에 무조건 복종이 전멸을 불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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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장군은 무지 느슨한 군기임에도 전쟁마지막까지 군인들이 용감히 싸웁니다.
일본 종군화에 보면 조선 배설경상우도 수군들 얼굴이 밝고 용맹합니다 왜군들이 후덜덜 떱니다. 군대서 아이들 잡는다고 이기는 군대 절대 아닙니다. 세상이 바꿔었어요 구타없는 군대가 되어 막강 군인이 되길 바라구요
담배 금연으로 국민 건강지텨 주시려는 마음에 온 국민이 감사해야 겠습니다. 또 유병언 자살때 보여준 돈다발이 너무 풀린 현금 약 6조원이 회수 될거라 고 긍정론이 상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