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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당시 왜군들 후덜덜 떨게한 맹장배설이 후세에 간첩되다.

自公有花 2014. 9. 13. 17:11

왜군들을 후덜덜 떨게한 맹장 배설이 후세에 간첩 찌질이로 누명쒸우는 후손들,,,,영화로 돈벌면 된다고 간첩으로 조작하고 악당으로 몰았네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은 55세 권율은 58세 배설은 47세 였구요,

배설은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임진왜란으로 의병을 시작해서 경상우수사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무과에 계속 떨어지고 나중 과장에서 말을 타고 시험치다 다리가 부러지죠,(조선에서 최초로 다리부러지고 합격)

요행이 유성룡이,,,,,,,, 해서 늦게 관직을 출발하죠,

 

 

 

 

 

이순신이 5년간 먼저 전라좌수사를 해먹고 삼도 수군통제사가 됩니다. 이에 원균이 자기 아래사람을 임명했다고 싸움이 되어 어쩌 저쩌 하다가 원균이 복귀하고 이순신이 파면 사형수신세로 압송되죠

 

이때 배설은 가장 촉망받는장수군에 들어 선조와 서인인 원균에 의해 경상우도수사로 차출됩니다. 이에 배설은

배설의 "부산항 상륙 전 왜군 격멸, 또는 심해 유인격파"를 요구했는데, 이순신이 파면된데 앙심을 품었는지,  권율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원균과 선조는 배설을 중용했거든요,

이는 반대로 동인들 유성룡 비서실장겸 영의정, 참모총장  권율, 국가안전부장겸검찰총장 이원익으로 부터 배설이 견제를 받게 됩니다.  꼼작 못하죠 정보도 않주죠 단신 도망다닌다. 그러죠 지금처럼 핸드폰있었다면 다들 사형됬을거예요,^^

 

 

칠천량해전서 조선수군이 폭삭망하죠, 

사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중과부적이 였죠, 

칠천량해전을 패전이라며,

이들은 배설의 구국적 작전을 왕에게 비밀로 하고 이순신을 파견하여

이순신장군의 8.19일 군사 쿠데타를 하게 됩니다.  

 

 

배설은 군권을 넘기고 귀향을 요청하자, 8.30일 허가를 공문으로 줍니다.

이에 배설은 송별회를 하고 9.2일 귀향길에 오릅니다.

9.2일 병영을 나가자 마자 군부는 탈영보고를 해버립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죠,

이들은 임금을 속이고 있었거든요,

배설이 야전군사령관이라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거든요,(왕이 알게되면 모두 3족이 멸함)

 

배설을 탈영병 도주병으로 왕에게 보고하기에 이르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구요,

전쟁전문가 배설은 이왕 귀향길에 일본군 시마즈 요시로 적장의 막사를 급습해서 살려줍니다.

이로서 일본군은 배설을 존경하게 되고,,,,

 

 

이순신장군의 가족을 왜군들이 살해 햇듯이 당시는 왜군천지 였죠,

배설은 안전하게 귀향해서 병치료를 하다가 전쟁 끝나자,

민심이 흉흉하고 배설의 명망이높아지자 도주와 역모로 몰려 참수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조선 도공 십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조선과 명나라에서 가장 무서워 한 장수가 시마즈 요시하라 입니다.

이 군대가 진격하면 조선군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요

 

배설이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사라집니다.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출병이 차일피일 이순신장군처럼 미루어지죠

 

 

 

 

일본의 도쿠가와 나이다이진 이에야스 히데요시가 편성한 16군(조선출병 예비군) 중 일본에 남았던 영주로 조선 출병을 은근히 반대하고 시마즈 요시히로등의 영향을 받아 끝내 조선출병을 하지 않았죠,

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미쓰나리가 서쪽 오사카에서 영주를 끌어 모으자 군사를 4방면으로 나누어 회군한 뒤 서군을 격파,

에도 막부를 열어 일본과 조선간에는 수백년간의 평화가 찾아 오게 한 주인공입니다.

 

 

 

배설장군에게 하마터면 수장될 뻔한 가토 기요마시와 배설장군에게 목이 달아 날 뻔한 시마즈 요시히로(鳥律義弘) 아들 시마즈 이에히사(도진가구)시마즈 요시하라가 풍신수길에게 철군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출병 제16 군 보충대에 철군요청서를 보냅니다 (부산 상륙전에 수장될 것이라는 배설장군 이야기가 붙여지죠) 이에야스가 적극 조선 출병을 거부하여 풍신수길의 수하 미쓰나리와 일본내전이 발발하고 배설장군을 흠모하든 철군파 군대들이 승리 했습니다.

 

정유재란 때 지금의 비서실장정도의 권력자인 유성룡이하 동인들은 허위보고로 1만명의 조선 병사들을 적군의 총알받이로 수장시켰습니다. 전투다운 전투로 싸운 병사는 배설 휘하의 경상우도 수군 뿐이였고,  동인 조정 중신들은 일본과 내통 조선 수군이 일방 전멸하도록 허위보고와 임금을 기망했지 않나 보입니다. 

 

 

 

 

조선수군의 선봉대인 경상우도수군이 원균 사령관의 추원포 퇴각 육지 상륙을 거부한 배설장군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아무리 상관이라도 수군의 유리한 아이덴티티를 버리고 육지로 퇴각한다면 정예 특공대라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조선 수군이 대패 했지만, 

 일본군들에게는 대단한 층격을 준 것입니다.

드디어 조선 수군을 두려워 하게 만듭니다. 전쟁발발 6년만에 대등한 전투가 칠천량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칠천량 해전을 기획 명령을 내린 장수는 원균이 아니라 권율장군이였는데, 

 그는 쏙빠지고 원균이 패전의 책임을 짊어지고 전사했죠 만일 승리 했었다면 전공은 누가 차지했겠어요

 

 

 

 

오늘날 세월호 희생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도 되지 않고 있었다고, 

 하고 7시간 보고 여부로 세간에 말이 많은데요

 

칠천량해전 패전후 진도 앞 바다로 장장200키로를 작전한 배설이 였바꿔먹으려고 함대를 숨겼다고 하고, 

 7일간 보고를 은폐한 후 이순신이 거북선 12척을 찾있다고 보고 합니다.

 

 

 

 

 7시간 보고가 안된 것은 약과죠,

 해병대 사령관인 배설군대가 비서실장하고 참모총장격인 권율장군이 보고를 은폐했는데 장장 7일간입니다.

 

국회에서 특별법으로 조사도 못하고 있으니 알 수 없죠,

이순신과 유성룡 권율의 보고만 듣고 선조는 속았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 수립의 정신적 기초가 된 ☆조선의 훌륭한 무장 배설☆

조선에서는 도망자,  비겁자, 겁쟁이  배설☆ 두나라중 한 나라가 거짖이 있겠죠....

근데 이순신님은 도망갔다는데 일본에서는 시마즈요시라 진영을 단신 통과했다고 하니 이거 누구말이 맞는거예요?

 

 

 

 

병치료 귀향허가(난중일기) 8.30일 귀향 9.2일 탈영보고 9.2일 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 이순신이였었죠,

 병치료로 귀향한 배설이 돌아 올 수 없게 뒷통수 때린 것이죠,  나 같음 너무 좋아 꿈인지 생산지 허벅지를 꼬집어 보겠습니다.^^

 

 

사형수 대역죄인 백의종군  이순신이 전시 전장에 나타났다고,

 해병대 야전군 사령관이 품계도 동급인데 '예~예' 하나요,

 부하도 없는데요,

 달랑 구라쳐서 3도 수군절도사 품계도 배설과 동급인데요,

 그 취임식에 배설이 숙배 않한 것은 당연한 거죠?

 

난중일기에 배설이 숙배를 않했다 라고 적었는데요,

 이순신님이 자신에 신분을  깨닿지 못하고 계시네요,

 왜군들 쪽배나 쫏아 다니셔 전공세우려고 하고,

 세카부네 아다케  대형 적선은 피해다니시고,

 능력은 안되고,

임금은 쥑인다 그러고 참 힘드시겠네요(네, 않타깝네요)

 

그러니 공부하라 그랬잖아요

실력이 생고생에 목숨까지 위험한 고생이죠

 

 

 

 

 

 

 죄인과 사령관은 하늘과 땅차이 신분인데 말입니다.

요즘은 민주화라 인권이 있어 교도소에 사형수가 출소하면 장군들이 예예 한다지만,

 예전엔 아닌 걸로 압니다.

근데 명량영화 찍는 사람들 이순신 부하로 그리고 간첩처럼 몰아서 돈버느라 정신 없죠,, 이순신 장군님을 꼭 빼닮은 것인가요 뭔가요?

 

 

배설이 칠천량서 후퇴한 것을  도망이라 비겁하다 하구요, 칠천량서 수천명 전사의 죄를 묻겟대요?

근데 조선군과 명나라대군이 제대로 일본군하고 싸워나 봤나요?

사천성전투에서 연합군은 7천명 왜군을 만나 8만 명이  전사합니다. 조선군은 포함않은것 같습니다.

깔린게 백성이고 무조건 끌어다 쳐넣어 죽든 말든 누가 세지도 않습니다.

 

순천왜성 진린과 등자룡 이순신장군님 탈환하셨나요?

선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뭐니 뭐니 역적이네 도망이네 해도 그만한 장수가 없구나!~!

 

 

그래서

 선조는  宣武一等功臣 공신에 책록(이순신 배설 원균 권율) 

 선조임금은 살아 생전 배설장군이 이순신에게 모함 당한 사연을 알지 못하고 탈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배설이 참수된 이후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 1605년 배설장군을 宣武一等功臣(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으로서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역모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억울한 누명임을 입증하죠,

그러나 지금 임진왜란 420년이 지난 지금 난중일기와 왕조실록을 보십시요 

 

 

 

명량에서 진을 친 것은 배설이구요,  

호랑이 12마리가 좁은 해로를 막으면,  물소 330마리가  앞장서 나올 수 없죠,

앞에 나오면,  격침되는데 누가 서해로 갈 수 있나요.........

 

호남에 가장 먼저 조선수군 전멸을 알리고,  소개령을 내린 것도 배설이지요

왜군의 호남진출,  한양난입을 지연시키려고 얼마나 430킬로를 항해 했겠죠

 

호남분들 이숭신에 빠지신거 같은데요,

사실은 배설장군이 호남 지키신거를 모르시더라구요,

 이숭신께 훅가서 배설이 바톤처치 넘겨 줬다는거도 인정 않더라구요,

 

절대 명량대첩 같은거 하지마라고 당부했겠죠,

왜군은 수가 굉장하다 지키기만하면 된다.  그런거죠 이숭신이 (뒷 다마)골때릴줄은 몰랐겠구요

어째튼  명량대첩해서 영웅되셨죠, 

좋습니다. 정신적인 자산으로 만들자구요, 근데 왜 배설을 까냐구요?

 

아마 배설장군이 이순신의 입장이 되었더라고 해도 권율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그래 했을 것입니다.

 전쟁 준비없이 공을 세워야 하는 문신들의 붓끌씨 실록은 훌륭하죠, 누가 팬을 이기겠어요 420년간 누명쓰고 계신 배설장군이 않타깝네요,

 실력이 없는 장수들의 모함과 누명쒸우기도 실력은 실력이니까요,,,

 

 

 

 

1, 칠천량 웅천해전 1597년 7월 8일

1597년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에 있었습니다.)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선봉을 세워 배설의 전함 50여척( 5.000병력)이 급습했습니다.  

 

왜군이 수적 우세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이 불타고 잃었습니다.(적선은 약 30여척이 소실됨) 조선전역해전도는 이때 배설장군의 종군화로 확인되었습니다.

 

배설이 3명의 왜장들 길을 막고 600척의 적선과 접전할 때 원균의 3도 연합 수군이 전면전을 해줬어야 했습니다. 그게 아님 지원 사격이든 해상무력 시위라도 해줬어야죠

 

그랬더라면 칠천량서 기습도 받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배설 혼자 600척의 적진에 놔두고 구경만 한 조선 수군들의 심정과 공포심 이해는 됩니다.

 

배설이 3차례나 적진 돌파를 했다죠? 사실 왜장들이 깜작 놀랄이이죠 제는 뭐 믿고 저러냐고 겁나죠 야 제 상판대기 그려놔라 제 꼭 잡아라

 

원균의 적전 미스는 이미 이때 나왔구요 배설군대만 적진에 두고 퇴각하는 것을 봐도 전라좌수군 충청수군 전쟁준비 안된 것이죠

 

왜군들이 야 제 뭐냐 배설이라고 야 제 그려서 풍신수길에게 보내자 이게 종군화입니다. 보세요 전라좌수군 충청군 그림에 있냐구요

 

조선전역해전도를 보면은 조선 수군의 비겁함이 느껴져요 지근에 있든 3도 연합 수군은 뭐했어요 그게 다 전투도 못해보고 뚱됐잔아요 전멸말이죠

 

조선백성들이 도륙되고 있는데 배설이 공격하면 옆에서 응원이라도 해야죠 냉정하게 구경하고 놀랐겠죠 그러니 7월 14일 작전회의 때 배설만 심해로 유인하자고 하고 아무도 입 못열었죠

 

하기 싫은 전투니 칠천량 포구에 집결하고 있으니 배설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여차하면 육지로 튈 준비만 하고 있었으니 배설이 야 깊은 바다로 가자, 내가 저새꺄들 코털을 건드려놨으니 분명 때거리로 몰려 올거다. 고럼 심해에서 깨박내자~

 

원균이 새벽에 적선 천려척이 오니 춘원포로 배를 버리고 퇴각하라는데 배설이 그걸 따라야 합니까 그건 도망입니다. 왕명도 어기자고 한 배설이 육지로 튀는 원균을 따라야 하나요

 

교전을 선택하죠 그리고 50척의 전함 거의 다 읽죠

의리 없는 조선 수군들이 전멸하죠 배설이 안구해주고 혼자 살았냐구요 적진에 있을 때 그들은 구해줬나요

 

나같으면 조선 수군 때려버리고 싶네요 말안듯죠 의리 없죠,

 죽은 후에도 배설을 혼자 도망 쳐 살았다고 두고 두고 욕먹이고 그러죠

 

 

칠천량 바다가 어캐 생긴지도 모르는 사람들 포위하니 도망쳤다 하는데요,

 남북이 꽉힌 바다에요 다른 장수들은 왜 도망치지 못했겠어요 춘원포(고성)로 도망친 원균장군은 왜 죽었냐구요

 

칠천량은 앞뒤가 막힌 곳이예요 갇혀 있다구요 동서로 1000여척의 왜군이 삼중포위망이예요 밀리면 곧 죽습니다.

 그러니 뚫죠 교전명령내리죠

 

600척 적선 속으로도 돌진 했든 배설인데 포위망 깨는 것이 힘들었겠죠 뉴굴 돌볼 입장 아니죠

 

뭐 랬어요 왜군들 부산항에 상륙전에 깨자고 그래 얘기 해도 않듯고 칠천량 피항하자니 지쳣대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쳐 쉰답니다.

 

배설이 총사령관이 아닌게 원통했갰죠 근데 진도 앞 바다까지 장장 430킬로를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비상상황인데,

 이숭신이 와서 배를 주웠다고 합니다.

 

이제 나라는 끝나겠네요 야 공세우려지 말고 지키기만해라 앞에 나서는 배들만 함포로 때리고 지키기만하라고 나 집에 가서 쉬어야 겠다 군대 넘겨주려니 제발 뒷통수만 치지마라 ~

나이로 보면 8년 위의 흥아죠,

흥아  나 집에 가는 길에 왜놈들 손좀봐줄 일 있은께 ~믿고 병영을더나자 마자 탈영보고입니까?

 

 

 

 

 

 

 

일본군의 잔학상이 극도로 악랄 할 때, 

 배설장군은 가토 기요 마시와 도도 다카라 시마즈 요시라 왜장 들에게 엄청난 무서움울 보여 줍니다.(일본기록)

 

 

 

무를 숭상하든 왜군들이 조선에서 배설장군을 무서워 합니다.

 그리고 존경까지 하게 됩니다.

당시 전국토가 유린되어 이순신의 가족들이 왜군에게 학살 되었든 시절입니다.

배설이 얼마나 유명한 맹장이였는지는 일본 내전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일본에 까지 침략국 장군들로부터 존경받든 용맹이,

 죽어 후세에 후손들에 의해 도망자로 간첩으로 찌질이로 되었습니다.

 

배설없는 이순신 장군의 대첩 가능합니까,

이순신 없이도 선조에게 발탁되었든 배설장군 이였습니다.

침략군 3명의 장수와 600척의 왜선단에 50척의 수군으로 공격을 가하자 이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조선해역전도를 그려 당시룰 기록해 둡니다.

 

 

이순신 미화 좋습니다 대찬성합니다. 그런대 대부분의 미화 스토리들이 배설장군의 기록이라는 사실에 배설장군이 얼마나 억울 하겠습니까ㅡ외국에 영화가 수출되어 조국의 한국인들이 비하되지 않겠습니까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꽃다운 35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배 즙(裵 楫) 1564년(명종19)에 태어남.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1, 거북선과 백병전

 


칠천포 해전에서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은 배설장군을 도와 조방장으로 활약하다 칠천포해전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배설함대는 왜군적선들과 근접 또는 왜군들이 배설의 함대위로 기어 올라 왔고 조방장 배즙은 이들과 백병전으로 전사했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설의 함대 규모는 12척당 수군 200명 정도로 2.400여 명으로 추산 되고 배즙을 포함 전사자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설함대는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조총탄환이 비오듯이 온다 해도 전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명 거북선이란 소릴 듣는다. 갑판이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화전에 취약하고 근접전에 취약했다.

 

이순신 보고서에도 노량포구에서 보니 전함수리를 하는데 척당 90명 정도로 보인다고 했으므로 오견상 보이는 병력도 1.000명이 넘고 나머지 병력은 선상수리를 한 것으로 보아 배설의 병력은 2.000여 명으로 봄이 타당하다.(전공을 축소하려든 도인조정기록)

이순신보고서에 눈에 보이는 병력이라고 한점이고 대체로 항구에 정박하여 수리하고 있는 배에 승선 병력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순신 미화를 위해 배설의 잔병이 120명이라는 교과서 내용은 말도 안됀다.전함은 시스템으로 가동되므로 장장 201키로를 120명이 운항했다면 배설은 남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보다 유능한 세계적인 선장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순신이 대역죄인 백의종군하든 (1597년7월 23일자 보고서) 1060명 가량의 병력이라했음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칠천포해전에서 한산도 청야작전까지 감안하면 배설함대는 장당 430km를 운행한 것이 되는데 디젤엔진이 있는 페리호도 아닌데 척당10명서 노를 저어 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싸웠으나 왜군 수적인 우세로 전멸가까운

패전을 했다. 그러나 왜군 입장에서 보면 전왜군이 삼중포위망이 뚫렸다는 사실과 배설함대 경상우도 함대가 유유히 퇴각했으므로 승리치곤 꺼림칙하다. 또 왜군이 속수무책으로 8척이 격침소실 되고 수십척의 배들이 파괴되었다.

 

삼중 해상포위망을 깨트리고 나온 배설의 함대가 가장전쟁준비가 잘된 상태였기에 8척의 왜군 주력함대를 격침소실 시켰으며 왜군에 가한 충격은 상당했으리라는 것 침몰되진 안았으나 파손시킨 적함은 3십척 이상되 었으리라는 것이다.

 

배설함대는 탄략이 부족해서 쏘아 댈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했다. 여기서 퇴각에 있어서도 동쪽 해상로로 6척이 서똑쪽해상로로 6척이 나누어 퇴각하여 탄환이 떨어진 전함이 앞서고 탄환이 있는 전함이 뒤에서 호위하면서 퇴각하므로 적함이 추격시 협공이 가능 하게 퇴각해서 한상도 수군 본영으로 .안전하게 퇴각 한 것은 높이 평가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칠천포 전투에는 패했지만 왜의 수군이 연합 기습공격으로 얻은 실익은 없다는 점이다. 조선군 총사령관은 육지로 나가서 매복 육군에게 공도 빼앗기고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수군 주력함대는 만만찮은 매운 맛을 보여줬으므로 왜군은 추격을 하지 못한다.

 

역으로 생각해서 칠천포에 포위된 포위망을 깨트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며 깨트러진 왜군의 피해는 적지 안았다.

 

 

풍신수길은 잔병까지 괴멸시키라고 하지만 함포를 장착한 배설함대의 가공할 무기와 빠른 기동력 높은 갑판 이런 함대의 우수함에다 배설이 깊은 수심에서 전투를 하자고 한점으로 왜의 수군은 앞서 나서지 못한다. 앞서 나서다간 함포의 사격을 받으면 대장선이라해도 상어의 밥이 되는 것은 분명했다.

 

 

 

2, 신에게는 12척의 거북선이 있아옵니다.

오직 잡을 수 있는 것은 근접해서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거나 불화살로 소실 시키는 이외엔 대책이 없다

조총을 비오듯 쏘아대도 배설함대 인에는 한발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12척이라고는 해도 가공할 화력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신에게는 아직 배 열두 척이 남아 있으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왜 그러면 격침에서 8척이 자주 등장하는가? 배설함대 8척에만 함포가 장팍되고 나머지 4척은 다른 용도가 있었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배설함대가 30척의 적선을 격침시텼다고 한다면 적어도 4회에 걸친 진격과 퇴각이 있는 교전이라야 한다.더욱이 수백척의 함선을 격침시켰다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

 

명향 영화처럼 백병전을 하게 되면 거북선함대의 승율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난중일기에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진격명령에 다른 함선이 겁먹어 따르지 안는다고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순신이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함대의 지휘관들이 나름 이순신의 근접전투를 견제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치의 밀림도 없는 당당한 조선수군들의 용맹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당시는 이와 유사한 흑백의 그림들이 왜군들 내부에 돌림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 출병 제 16군의 조선출병 거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됨

3, 칠천해전(漆川海戰)

7월 8일 웅천전투에서 이기고  14, 15일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연거푸 패했다. 8월 20일 (음 7월8일) 일본의 후속 군병들이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 임진란 때 경상도에 진주하고 있든 2만 병력에 더해 14만 병력이 상륙을 마친 상태였다.   

 

칠천량해전 다대포(웅천) 1597.7.8~11사이에 수차 적선 600여척과 피아간 부산 일대에서 교전이 있었고 양측이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본은 부산일대의 거의 모든 전함들이 결집 조선 수군을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

 

조선수군들은 여러차례 전투를 하면서 손실이 있었고,  추격에 쫒긴 조선함대가 15일 밤 9시경 칠천량해안에  도착했으나, 병졸들은 녹다운으로  지쳐 있었고,  원균은 밤늦게 휘하 제장들을 소집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함쳤다

 

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자 이억기 최완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4,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억기 최완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우린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했다.

 

이미 이때 왜군은 수일간의 추격에 약 1.000여 척의 부산 일대 거의 모든  왜군들이 서서히 칠천량을 수겹으로 에워 싸고 몰려들고 있었다. 이날은 짙은 안개와 이슬비로 가시거리가 짧았다.

 

 밤 늦게 왜선 5척이 손살 같이 조선군 영내를 휘젖고 다니면서 조선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손살 같이 쏘다녀도 조선 수군은 닺을 내렸기에 손을 쓸 수 없었고,  병졸들은 지쳐 잠들어 깨지 못해 4척이 전소 되었다. 이것은 부근으로 몰려 오는 왜군들에게 일종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 였었든 것이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병사들은 밤새 화재와 적선의 출몰로 고단해진 새벽녁이 동틀 무렵 신호탄 세발이 울리자 일제히 근접한 1.000여척의 함선들이 삼중의 포위망으로 밀고 들어와서 조선 전함 한척에 왜선 5~6척이 둘러싸고 돛을 눕혀 일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해로가 막혀 포위 된 상황에서 원균이 배를 버리고 춘원포로 육지 상륙을 명령했다. 배설은 원균의 명령을 거부하고 포위망(약 30여척 3.000명 병력 전사)을 뚫어라는 명령을 내린후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이억기와 최호가 전사하자 후퇴 명령을 내려서  서쪽과 반대쪽 동쪽으로 두방향으로 퇴각하게 된다.((실제는 견내량 7척과  5척 대열=탄환이 고갈됨)

 

원균은 권율의 군대가 육상에서 호응할 것으로 믿고 춘원포로 상륙하였으나 권율의 군대가 아니라 왜군들의 매복군에 전멸 당했다(동인들 허위 보고, 배설의 12척이 약 2.000명 그 외 김완 등등의 수천 명의 병사들이 살았고, ( 투입된 병선이 약 200척으로 판옥선 척당 승선인원이 60명 정도였으므로 이들이 추원포까지 길게 육지로 상륙하여 일본의 매복군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 남은 병력이 다수 있었고, 배설의 전함 판옥선 40여척과 약 2400명의 병사를 읽었고, 조선수군의 주력 판옥선 190여척 대부분이 소실되였다. 배설의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 승선인원이 200명은 살아 남고, 판옥선은 60명 정원으로 왜선 5척이 사면을 둘러싸고 200명이 기어 오르면 손을 쓸 수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군은 뒷통수에 칼을 맞아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균은 육지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5, 조선왕조실록 《선조 090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6,((선조실록))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대신들: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유성룡(영의정) : 감히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다.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서너겹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남은 장수는 아순신 뿐)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이순신복권 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배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배설이 옳았다는 심증)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조센 끝났다)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순신은 아니다)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명나라 안오니 선조 넌 개털됐다 빨랑 순신임명해라).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선조 : 근자에 모병에 있어 사졸(병력) 지원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민심 이반이 심함)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이 오직 이순신의 복직에만 매달려 대책 자체가 없으며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퇴각했음도 철처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직접 충청 전라에 한척의 전함도 없느냐고 물음에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조는 배설이 도주했다고 보고함에도 배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10,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함  ,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 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는 것은 거짖말임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음, 당시 어마어마한 전함을 숨길 수 없음 (나라를 위해 작전을 하는 배설장군의 전함과 병사들을빼앗고자 허위보고를 하고 이순신을 임명해야 한다고 임명장을 요구함)세계최초의 잠수함 거북선에 디젤엔진이 없었음,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1, 대역죄인 백의종군상태였든 이순신의 등장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배설을 찾아왔습니다.  

 

 

1)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배설의 7일간의 청야작전과 남해안 일대 백성들 소개령을 철처히 비밀로 한 권율과 이순신은 첮 장계에서 배설이 전쟁 공포증이 있고 도주중이라고 선조를 기망하는 장계를 올려 권율과 이항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권 시켜 달라고 하고 있다.)

1. (경상우도수사 배설이 도주중에 있어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약 2.000명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전함을 수리함을 얼추 보이는 식으로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배설의 전함이 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 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그러나 선조는 배설을 면직시키지 않고 전쟁 끝날때 까지 중용합니다.

 

 

4,) 거북선 12척을 배설이 였바꿔 먹으려했다?

 군대를 접수하기 위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1597.7.23)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3도 수군절도사로 임명을 8월 3일 허락하면서 품계를 한계급 강등해서 경상우도수사 배설과 동급으로 임명하는 묘수를 부립니다. 이에 이순신(권율)은 후일 선조를 속인 것이 발각 될 것을 우려해서 배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라 보입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

 

5) 배설의 귀향과 탈영보고서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배설의 병가를 허가하고  9월 2일 귀향하자 마자 도망했다고(탈영보고) 합니다.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도사 이순신은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못하게 합니다.(당시 탈영은 귀대시 군율로 참형당함)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 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조선군이 전사하고 남은 빈배)

 

이순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12,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晋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권율은 매일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음, 배설의 12척의 경상우도 병선을 보고하지 않고, 칠천량해전 12일 째인 이날도 각기 도주 한 것으로 보고함) 이순신으로 부터 23일 보고를 받은후 5일이 지난 시점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살아 남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통제사로 하겠는데 아무도 없으니 이순신을 임명해 달라는 허위보고 배설이 도망한 것은 맞으나 아직은 행방을 모른다고)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권율은 사실은 이순신의 복권을 원하면서 아무나 살아남은자가 있다면  임명하자고 독촉하고 있다.)

 

 

 

 

 

 

 

 

13, 난중일기 기록 //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사실 선조는 부득히 이순신의 품계를 강등하여 임명하므로 배설과 동급이 됨에도 자신이 상관인 것처럼 비서실장 유성룡의 빽을 믿고 있음)

 

 8월12일/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뒷빡치기에 걸려 들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권율에게 탈영보고= 전시 탈영은 군율에 의거 참형임)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이순신은)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배설을 데릴러 가려다 그냥 왔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1) 이순신은 천운의 정치군인

럭비공 풋볼 튀듯이 백의종군 대죄인이 수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나라걱정이든 배설은 8월 3일 원수부가 보낸 사령장을 무시하고 숙배를 거부한다. 군권을 넘길 수 없다. 이순신은 혀를 내두러면서 아무말도 못한다. 왜냐면 이순신이 지휘하든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함선은 모두 전멸했고 배설의 전함수리에도 한푼도 보태 준게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의 잔병을  배설경상우도수군에 합류하라고 지시하자,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렸다. 이와 같이 12척의 전함이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배설이 도주하여 노량에 이르렀다는 암시를 하고 있음, (8.9)
 

14,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15, 배설장군이 해전에 투입된 계기,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군들이 부산상륙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도 이순신은 선조가 북쪽으로 토끼든 말든 한산도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왜군 14만이 출병하는 것을 지켜만 볼것 같은 상황에 왜군이 부산항에 상륙해버립니다.

 

부랴 부랴 이순신에게 속은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으로 대체 합니다. 선조와 원균은 배설에게 선봉을 맞기게 됩니다.  해적으로 양성된 왜군의 근접전에 패배합니다. 따라서 이건 아니다. 왜군을 유인해서 심해에서 함포로 작살 내자고 주장하지만, 권율이 이순신이 파직된데 앙심을 품고 원균을 다그쳐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1) 진주성 선산 등지에서 전쟁준비를 해왔고, 섬진강을 주무대로 배설장군은 경상우도 전함 장작귀선 12척의 건조에 사비를 투입했다는 기록도 있고, 나주의 나대용일가에 기술을 가져와서 전함을 건조했습니다.  배설이 양성한 병력이 최정예로 전란중에 충성심이 특별했습니다.

 

 

 

2)배설장군의 귀향(탈영으로 누명쒸움)

 풍신수길을 위해서 살육병기로 파병된 10만 왜군들과 시마즈 요시히로 가토 기요마사의 적진을 통과하고  왜장을 살해하지 않았다.  조선주둔군들에 영향을 끼쳐서 일본에 내전이 촉발 조선 진출 장수들 대부분과 풍신수길 일족이 멸족되었다. 조선야전군사령관이 대살육전을 앞두고 귀향했다.

 

 

3)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진주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 목수들이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4)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장군,(내전을 끝 내다)참고자료:엔하위키미러

배설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16, 누명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주및 역모 모반혐의로 참수

병상에서 칠천포패전 책임에 대한 "月波亭" 이란 시를 남기고, 권율장군의 수하들에 선산땅에서 부친과 아들이 함께 추포되어 역모 모반죄로 부친과 아들은 방면되고  장군은 참수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배설장군의 참수에 경상도관찰사 경상감사 한준겸이 직접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군졸들을 동원 후하게 장례를 지내준다. 한준겸은 조정에서 파직될 것을 알면서 장사를 치르준 후 한준겸은 파직한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당쟁과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준겸은?(1557-162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아버지는 판관(判官) 효윤(孝胤)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주서·전적 등을 역임했다. (출처:백과사전)

 

 

 

1) 일본을 후덜덜 떨게한 배설장군'조선의 훌륭한 무장 이므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조선 도공 십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조선과 명나라에서 가장 무서워 한 장수가 '시마즈 요시라' 입니다. 이 군대가 진격하면 조선군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요

 

배설이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사라집니다.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출병이 차일피일 이순신장군처럼 미루어지죠

 

배설장군에게 하마터면 수장될 뻔한 가토 기요마시와 배설장군에게 목이 달아 날 뻔한 시마즈 요시하라가 풍신수길에게 철군요청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출병 제16 군 보충대에 철군요청서를 보냅니다 (종군화와 부산 상륙 전에 수장될 것이라는 배설장군 이야기가 붙여지죠) 이에야스가 적극 조선 출병을 거부하여 풍신수길의 수하 미쓰나리와 일본내전이 발발하고 배설장군을 흠모하든 철군파 군대들이 승리 했습니다.

일본의 도쿠가와 나이다이진 이에야스는 일본에 남았던 영주로 조선 시마즈 요시히로등의 영향을 받아 끝내 조선출병을 하지 않았고, 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결국 철군요청으로 쇄락해진 1599년 풍신수길은 절명합니다.

 

 

1)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풍신수길의 절명은 (亀)"ベッセル いたい....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이는 거북선과 경상우도 수군 裵楔이 얼마나 조선점령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세키보네, 아다케, 보고, 등등의 자신들 전함이름대신 지금도 일본에서는 선박회사들 이름이나 바다의 배들을  ベッセル 라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17,유문으로 남긴 시조 '월파정' -東西-

묻지마라, 더물어 무럿하리, 강산도 반기는데 일부러 죽였겠느냐?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여기서 진강이란 섬진강을 말하고 나주의 목수들이 장작귀선을 건조한 곳으로 추정된다.

 

 

 

 

 

 

 

 

 

 

동서 화합을 강조한 배설장군

 

패장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동서 화합만이 나라의 부흥의 근원이다>

동서 양가(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국가에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패장으로서 한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이다.

 

 

7, 칠천량해전의 영웅 배즙(裵 楫)처절한 전사,

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꽃다운 35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배 즙(裵 楫) 1564년(명종19)에 태어남.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8, 임진왜란

선조  임금은 무조건 도망, 백성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고, 백성들이 적 치하에 고통받는다 이런 개념이 없었지요. 그러니 적치하에 부역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고, 왜군은 전공을 세우려 목도베고 코도베고 귀도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내서 훈장먹고자 합니다. 선조는 도망에 있어 달인이고 로간 뺨칩니다. 도망에 달인이였습니다. 

 

 

도망자 도망정권답게 은폐에 선수이고 비열하게 위험인물을을 숙청하지요, 뻑하면 백성들 부역자로 몰아서 효수하고  엄청 센 군율로  참수합니다. 명나라 군들은 외국 여행온 점령군 행세 하면서 얘들도 목가지 확보경쟁을 합니다. 관군들도 포상 전공을 다투고 허위보고를 많이들 합니다.

 

 

 

 

 

 

9,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의 가장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3,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사진 자료출처: 다음아고라)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월파정月波亭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월파정月波亭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이 그림에 경상우도 수군이란 깃발이 국내에 전재 되면서 이순신의 깃발로"李" 로 조작 유통되고 있음(분명히 경상 우도수군깃발) 

 배즙 장군의 지휘 모습이 그려진 칠천량해전의 종군화

배즙 장군과 조선 경상 우도수군의 전사하고 남은 전멸전사 한 후 빈 배와 무기들의 모습(치열한 전투임을 보여줌) 

 조선 수군들이 일본 선단에 전혀 뒤지지 않는 전투 장면이고 왜군들 표정이 바짝 얼어 붙어 있음에도 조선수군들 기세가 대단함

이순신의 영화에 전투장면으로 고증되고 있으나 사실은 2007년 플래툰지에 경상우도 수군의 전투장면으로 확인되었음

왜군들은 중요 전투에만 종군화를 남겼다. 그러므로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의 그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내 동인들의 훈포장 전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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