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이 성립되기 어려운 3가지 사실
1,조선수군이 함포 포병 전문 전투병입니다.
1597년 9월 2일 배설장군이 귀향하고 2주만에 명량대첩에 바다에 뜨있는 적선을 명중시킬 포병이 급조될 수 없습니다. 이순신이 육군의 잔병을 모았다 해도 2주만에 함포를 전문으로 해전에서 명중시킬 수 없다는 분명한 것입니다.
2,임진왜란 내내 왜군과 정면 승부를 벌인 적이 없었다.
대역죄인에 백의 종군에서 3도 수군의 전멸을 틈타 수군절도사로 복귀를 하였기에 이순신의 품계는 한계급 강등된 절도사로 임시임명되어 배설과 품계가 같았고(배설의 상관처럼 난중일기는 잘못된 것임)군 통수권이 온전히 회복된 것이 아님에 전함12척을 가동 해전을 통솔 할 수 있느냐 입니다. 낙하산 지휘관이 적진 돌파를 명령해서 따르겠느냐 입니다.
더군다나 이순신 장군은 지난 5년간 왜적과 정면 승부를 벌인적이 없든 장수가 하루 아침에 정면 승부를 했다. 믿기어렵죠
3, 왜군의 서해 진출 이유가 없었다.
왜군이 조선수군 12척의 전함을 격파하려고 330척의 전함을 동원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군이 부산포에 들어 온 것은 조선침략 때문인데 진도앞바다에서 병력 손실을 위한 전투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군은 서해로 한양과 서해 도서 병력진출이 목적이 였기에 배설이 진도 명량에 진지를 구축해서 대규모의 병력을 서해 출병을 방어하는 목적이였습니다. 그냥 지키고 만 있으도 왜군 장수들이 해상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위험을 선택 않는 것으로 조선 수군이 명목상 지휘자의 교체로 대규모 해전을 한다는 것은 이해 되기 어렵습니다.
이역만리 통솔되어 온 왜군들이 자신들의 전부인 병력을 조선수군이 방어하는 해상으로 이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해로의 위험이 있다면 안전한 육로로 출병하면 돠는 것이고 시간적 완급은 크게 비중을 차지 하지 않습니다.(제해권의 개념이 없고 육지전체가 왜군수중)
영화 불멸의 이순신과 명량이 히트했는데요 이순신장군님의 전투장면이 조선전역해전도를 기초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이그림은 왜군의 종군화가들의 초화를 근거로 후일 채색화로 칠천량 해전의 배설장군 전투장면 이라는 사실입니다.
도도 다카라나 야자스키 같은 왜군들 장수는 본국에 보고할 전투장면을 그리게 했음애도 명량대첩의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너무도 이례적입니다. 패전이라 해도 기록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또 선조실록에도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군이 330척의 수송선단이 빠른 항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조선수군이 명량에 진지를 구축하고 호시탐탐 참략을 막으므로 서해 진출을 포기하고 육상으로 전환하고 퇴각한다 이런 것은 가능합니다. 서해진출을 위한 시험교전 같은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왜군이 서해바다에서 해전을 위한 해전을 해서 풍신수길이 무엇을 보상해 줄 까요
배설 같은 명장이 50척의 전함과 약 5.000명의 수군을 권율의 작전실패로 칠천량 백병전에서 대부분 손실하고 마지막 남은 2.000여명의 병사를 백병전에 투입하여 괴멸 당하려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군의 서해 항로의 길목을 차단하면 왜군은 서해진출이 어려워 지는 것인데 구태여 적의 대형함대와 교전을 하려 하는가 입니다. 더구나 이미 부산을 통해 왜군이 육지를 뒤덥고 있는 상황에 해전을 위한 해전을 한다는게 이유가 안됩니다. 왜군이 이순신 장군을 영웅만들려고 명향해전을 할만큼 이유가 있을까요?
4, 당시 1.500발 이상의 탄환 조달이 불가능하다.
칠천량해전서 퇴각해서 서해 진출을 억제하려든 배설 경상우도 수군이 탄약과 실탄이 부족해서 퇴각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므로 전시 300발의 최소 5배인 1.500발의 포탄이 조달 될 수가 없습니다. 미사일이 아닌 포병들이 백발백중 명중했다고 해도 믿기 어렵습니다.(선조도 알지 못하는 전투)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육로가 뚫린 상태에서 굳이 수군이 방어하는 항로를 통과하기위한 대규모 희생을 선택할 이유가 있나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12척의 병선으로 백병전을 하기에도 부족합니다..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으로서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역모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누명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이순신은 후일1895년 정한론의 등장으로 성웅 됨)
이순신 배설 권율 원균이 1등 공신에 책록되는데 배설은 역모 모반죄를 덮어 쓴 후 누명을 벗고 1등공신에 오른 유일한 장수입니다.
사실 선조임금 당시 배설은 동인들의 허위 보고와 전공다툼에 희생되고 이순신의 탈영보고로 도망자로 누명을 쓰고 전쟁 공포증환자로 모함 받은 상태 였습니다. 배설의 무공에 시기한 동인 사관들의 비아냥이 선조 수정실록에 기록 된 사실이 정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조정 중신중에 업적을 기록하는 실록에 유독 이미 참수된 장군을 비아냥거리고 도망자로 기록한 것이 정상입니까? 그렇게 사관들과 선조가 할일 없었을까요? 선조를 비웃는 간신들의 권력 암투의 연장으로 봅니다.
8월30일(난중일기)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난중일기)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
이순신이 병치료를 허락하여 부관2명과 배설이 귀향을 허락한 후 하루만에 배설이 도망갔다고 보고한다. 계획된 경상우도 수군 털도 뽑지 않고 빼앗기 쿠데타입니다.
선조의 총애를받든 배설을 죽이기 위한 이순신의 권모술수에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인 경상우도 수군이 부산상륙전에 적군을 격멸하려든 계획은 부셧졎지만 왜군의 대량 수송선단의 서해 진출은 막겠다는 일념으로 430km를 항해해서 진지를 구축한 배설장군 부대가 방어에 주력하고 정찰병이나 시험교전을 해서 적을 격퇴한다 이겠습니다.
배설장군이 명량에 진지를 구축한 이유와 목적에 완전 이탈하는 조선과 왜군간의 한 일 해상전투를 할 이유가 있느냐 입니다. 이순신장군님의 영웅화 찬성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사지에서 대역죄인 백의 종군장수로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은 이해 됩니다.
그렇다고 당시 선암자인 배설장군을 문화영화에서 찌질이로 그려서 수출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장수가 왜적의 간첩이라는 일본 우상화 영화로 이순신 장군 하나만 없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당연했다는 인식이 빛나리라 생각됩니까,
전란의 전투중심에서 치열한 권력 암투가 있었고 이순신장군과 그 일파인 동인(권율장군)들이 선조의 총애를 받든 배설장군에 대한 질시와 누명쒸우기 속에서도 많은 병사와 유능한 이순신장군을 믿고 귀향길에 오른 배설장군을 추한 한국인으로 그린 영화는 잘 못된 문화 인식입니다.
[Daum블로그]
하늘나라로 간 아이들..
.비운의 배설세월호특별법
http://m.blog.daum.net/boq545/11808297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능한 상태에서 기적을 이루어낸 명량대첩이 자랑수럽고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