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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과 배설장군의 누명

自公有花 2014. 9. 16. 19:07

임진왜란 420년 만에 조선 왕조실록 난중일기로 본 인간 이순신의 진면목, 배설장군에 대한 오해 이순신은 동급품계의 장군으로 군지휘권은 배설이 행사했음에도 '명량' 영화는 배설장군이 이순신의 부하로 그리고 있습니다.    

 

1,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했습니다.

 

 

 

 

 

 

 

 

김식의 보고와 선조와 대신들...

조선왕조실록 《선조 1597/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선조대왕과 신하들의 대책,

선조: 아니 척후병도 없었단 말인가? 장거리 운항으로 척후병도 없었다고 합니다.

선조: 하늘이 내린 재앙이니 어쩌 겠는가?

풍신수길이 바다를 제패해야 한다고 하더니 이를 어쩌나......

 

선조:충청이나 전라도에  남은 배가 한 두척이라도 없는가?

신하들: 없는 걸로 압니다.

선조: 그래 "누가 한산도 수군 본영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도 장수가 없는가?

 

이항복 병조판서에게, 그래도 살아남은 병력이 있는가 묻자,

이항복: 바다가 좁은 곳이라 살아 남은 병사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하면서 해도를 보여준다. 선조가 해도를 보면서 견내량 고성쪽으로 퇴각한 병사들이 매복군에게 당했단 말이지,

선조: 왜 경들은 아무 대책도 없는가?

 

신들은 아무 대책도 없어서 민망해서(동인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 있어니 기용하소서 마음속으로...)

이항복 병조판서: 넓은 바다라면 혹 살아 남을 수도 있는데 좁은 바다라 거의 매몰되고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유성룡이 알뢴다, 한산이 요충지 인데 필시 왜적에게 넘어 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해와 호남이 위험함을 아뢴다.

선조: 독촉한다 장수가 없단 말인가? 한산도를 .... 적에 손에 넘어 가면 안되는데,,,적군에 손에 넘어가기전에,,

윤두수 외 거의 모든 중신들이 아무 말도 못한다.

 

선조는 말한다, 견내량을 통해 한산도 수군본영으로 퇴각할 생각은 왜 못하나

한척의 병선 없이 당했다니 ㅡ

 

비변사와 전투상황실 유성룡 권율이외 : 원균은 춘원포로 도주하여 왜군에 포위되었고, 배설은 혼자 겨우 도망쳐 패잔병들인 수군을 수습하고 있아옵니다.

 

3도 수군과 장수들이 전멸하였으니 장수가 없아옵니다. 이제 이순신을 서둘러 3도 수군 절도사로 임명해서 수군을 수습하게 해야 한다는 유성룡의 주장이 있었고, 선조는 이순신이 믿을 수 없는 허위보고를 일쌈는다고 유성룡을 책망하면서,  경과 어릴적 친구라는데 사실인가?

유성룡 : 예 어릴적에 한 동네에 살았는데 명일에 그는 대장이 되는 것이 소원이였습니다.

 

 

2, 선조는 이순신을 믿지 못하여 죽이려다가 달리 방도가 없다는 유성룡의 의견으로 긴급히 임시로 이순신을 품계를 내려 3도수군 절도사 임명을 마지 못해 허락합니다.(배설과 품계가 같음) 

 

 

왕을 둘러산 조정에서  배설이 단신 도주하여 수군을 수습하는 것으로 보고하고, 동인 조정은 전공을 동인들이 독차지 하기 위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할 뿐 국난을 수습하려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백성들은 왜군에 살육되고, 명군에 치여죽고, 전쟁이란 조선군대의 군기 잡기에 목이 효수되고, 오직 권력을 잡아 선조실록의 수정에 수정을 통해서라도 권력을 잡고자하는 시대였습니다.

 

세월호참사 대처가 7시간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국회에서 난리죠, 칠천량 패전은 고의로 선조에게 10일간 보고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고, 역사 왜곡인 선조 실록 자체가 수정에 수정됩니다.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그러나 선조는 배설을 면직시키지 않고 전쟁 끝날때 까지 중용합니다.

 

 

4, 거북선 12척을 배설이 였바꿔 먹으려했다?

 군대를 접수하기 위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1597.7.23)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3도 수군절도사로 임명을 8월 3일 허락하면서 품계를 한계급 강등해서 경상우도수사 배설과 동급으로 임명하는 묘수를 부립니다. 이에 이순신(권율)은 후일 선조를 속인 것이 발각 될 것을 우려해서 배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라 보입니다.

 

 

5, 배설의 귀향과 탈영보고서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배설의 병가를 허가하고  9월 2일 탈영보고를 합니다.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도사 이순신은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못하게 탈영보고를 합니다.(당시 탈영은 귀대시 군율로 참형당함)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 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6, 난중일기 기록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

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8월12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상관인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입니다.

 

8, 칠천량해전 실제 전황ㅡ

선조가 한산도로 퇴각하여 수군본영을 수습할 장수가 없느냐고 묻고 있을때에 배설은 약 5.000여명의 병력과 약 50척의 전함으로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고자 교전을 통해 40여척의 병선을 일고 약 3.000명의 병력이 전사하면서 적선 8척을 격침시키고 견내량을 통해 정확히 5척 대열과 7척 대열을 유지 한채 동로로 서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왜적함대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여 통과하여 한산도 수군 본영에 도착하는 "청야작전"을 시행 했습니다.

 

 

왜군들의 추격을 염려한 배설은 무기와 탄약을 모두 충진하고 한산도 주민들을 긴급히 육지로 대피시킨다. 그리고 수군본영과 무기고등의 시설을 소각하고 남해로 퇴각(동인들은 도주라함)

 

그후 얼마 안되어 왜군들이 난입하여 미처 대피하지 못한 한산도 주민들의 대학살이 시행되었습니다.

선조임금이 그토록 한산도를 걱정할 때 배설은 선조임금이 조정에서 걱정하든 그 시간에 한산도 소개령을 내리고 무기를 회수하는 '청야작전'을 감했했습니다.

 

조정에서 임금스스로 수군이 한산도로 퇴각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말하고 울부짖을 당시 배설은 이미 선조임금이 시키지 않아도 그런 역할을 하고 남해로 퇴각하여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고자 진도 울똘목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왜군들은 주민들을 악랄하게 입에 담을 수 없도록 남녀 노소 모두 학살 했습니다.(풍신수길이 점령지 주민을 모두 죽이고 일본 서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도록하라고 명했음)준비되지 않았든  결국 권율의 잘 못된 전투 기획과 명령으로 조선 수군은 190척의 전함이 격침되고 불타고 수군 1만여명이 전멸하였습니다.

 

 

배설 잔여 병력이  퇴각하여 청야 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조선 조정에서 누구도 바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그토록 원하든 국가 걱정을 하는데도 누구도 사실을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배설은 수 없이 탄환을 보내달라는 전보를 올리고,

왜군의 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장장 초인적인 약 430km의 작전이 펼쳐지고 전투 준비를 하는데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차출되어 원균의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왕에게 보고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순신이 숨겨둔 전함을 크게 호통쳐서 찾았다고 조정에 보고함)대형 전함이 장난감입니까? 

 

 

8, 선조는  宣武一等功臣 공신에 책록(이순신 배설 원균 권율) 

 선조임금은 살아 생전 배설장군이 이순신에게 모함 당한 사연을 알지 못하고 탈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배설이 참수된 이후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 1605년 배설장군을 宣武一等功臣(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으로서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역모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억울한 누명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이순신 원균 권율 배설이 나란히 1등 공신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임진왜란 400년이 지난 지금 난중일기와 왕조실록을 보십시요  아마 배설장군이 이순신의 입장이 되었더라고 해도 권율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그래 했을 것입니다. 전쟁 준비없이 공을 세워야 하는  실력이 없는 장수들의 모함과 누명쒸우기도 실력은 실력이니까요,,,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월파정月波亭

 

 

1, 칠천량 웅천해전 1597년 7월 8일

1597년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습니다.)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선봉을 세워 배설의 전함 50여척( 5.000병력)이 급습했습니다.  왜군이 수적 우세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이 불타고 잃었습니다.(적선은 약 30여척이 소실됨) 조선전역해전도는 이때 배설장군의 종군화로 확인되었습니다.


칠천포 해전에서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은 배설장군을 도와 조방장으로 활약하다 칠천포해전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설장군의 웅천전투 600척의 왜군을 상대로 50여척으로 1597년 7월 8일 왜장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이 그림에 경상우도 수군이란 깃발이 국내에 전재 되면서 이순신의 깃발로"李" 로 조작 유통되고 있음(분명히 경상 우도수군깃발) 

 배즙 장군의 전사 와 지휘 모습이 그려진 칠천량해전의 종군화

배즙 장군과 조선 경상 우도수군의 전사하고 남은 전멸전사 한 후 빈 배와 무기들의 모습(치열한 전투임을 보여줌) 

 조선 수군들이 일본 선단에 전혀 뒤지지 않는 전투 장면이고 왜군들 표정이 바짝 얼어 붙어 있음에도 조선수군들 기세가 대단함

이순신의 영화에 전투장면으로 고증되고 있으나 사실은 2007년 플래툰지에 경상우도 수군의 전투장면으로 확인되었음

왜군들은 중요 전투에만 종군화를 남겼다. 그러므로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의 그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내 동인들의 훈포장 전사로 추정된다.

 

 

 

 

배설의 함대 규모는 12척당 수군 200명 정도로 2.400여 명으로 추산 되고 배즙을 포함 전사자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배설함대는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조총탄환이 비오듯이 온다 해도 전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명 거북선이란 소릴 듣는다. 갑판이 두꺼운 송판으로 감싸져 있어 화전에 취약하고 근접전에 취약했다.

 

이순신 보고서에도 노량포구에서 보니 전함수리를 하는데 척당 90명 정도로 보인다고 했으므로 오견상 보이는 병력도 1.000명이 넘고 나머지 병력은 선상수리를 한 것으로 보아 배설의 병력은 2.000여 명으로 봄이 타당하다.(전공을 축소하려든 도인조정기록)

이순신보고서에 눈에 보이는 병력이라고 한점이고 대체로 항구에 정박하여 수리하고 있는 배에 승선 병력이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순신 미화를 위해 배설의 잔병이 120명이라는 교과서 내용은 말도 안됀다.전함은 시스템으로 가동되므로 장장 201키로를 120명이 운항했다면 배설은 남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보다 유능한 세계적인 선장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순신이 대역죄인 백의종군하든 (1597년7월 23일자 보고서) 1060명 가량의 병력이라했음 

 

배즙장군의 실제 전투장면 (일본 종군화 조선전역해전도)경상 우도수군이라는 깃발이 있다. 불멸의 이순신 영화 고증의 자료로 활용되었으나 경상우도수군의 전투장면이다. 특히 배설의 '장작귀선'이 등장하므로 확실히 경상우도 배설군대의 전투장면이다. (당시조선수군들은 대부분 단순 판옥선임)


 

칠천포해전에서 한산도 청야작전까지 감안하면 배설함대는 장당 430km를 운행한 것이 되는데 디젤엔진이 있는 페리호도 아닌데 척당10명서 노를 저어 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싸웠으나 왜군 수적인 우세로 전멸가까운

패전을 했다. 그러나 왜군 입장에서 보면 전왜군이 삼중포위망이 뚫렸다는 사실과 배설함대 경상우도 함대가 유유히 퇴각했으므로 승리치곤 꺼림칙하다. 또 왜군이 속수무책으로 8척이 격침소실 되고 수십척의 배들이 파괴되었다.

 

삼중 해상포위망을 깨트리고 나온 배설의 함대가 가장전쟁준비가 잘된 상태였기에 8척의 왜군 주력함대를 격침소실 시켰으며 왜군에 가한 충격은 상당했으리라는 것 침몰되진 안았으나 파손시킨 적함은 3십척 이상되 었으리라는 것이다.

 

배설함대는 탄략이 부족해서 쏘아 댈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했다. 여기서 퇴각에 있어서도 동쪽 해상로로 6척이 서똑쪽해상로로 6척이 나누어 퇴각하여 탄환이 떨어진 전함이 앞서고 탄환이 있는 전함이 뒤에서 호위하면서 퇴각하므로 적함이 추격시 협공이 가능 하게 퇴각해서 한상도 수군 본영으로 .안전하게 퇴각 한 것은 높이 평가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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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군을 배신한 캐릭터로 그려졌던 배설 장군의 후손들이 역사를 왜곡했다며 영화 관계자들을 고소했다. 지난 15일 배설 장군의 후손 경주 배씨 문중의 비...

  • 4시간전 | 세계일보 | 미디어다음

    일본 혐한세력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 15일 배설 장군의 후손들은 영화와 소설 '명량'이 배설에 대한 허위사실을 적시해 사자의 명예훼손과 후...

  • 3시간전 | OSEN | 미디어다음

    [OSEN=김경주 기자] 영화 '명량' 측이 극 중 인물인 배설 장군을 왜곡했다는 주장에 대해 이번주 내로 대응에 나설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명량'의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