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裵楔)이,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출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정유일기Ⅱ’ 8월 12일자)
裵楔(배설)
絺之六世孫
父德文嘉靖癸丑登文科官至司宰正
娶武人白巨鰍女嘉靖辛亥生楔
有勇力善屬文十餘歲從父在蔚山郡
兵使張弼武知有將帥才勸令投筆
登萬曆癸未武科
壬辰從防禦使趙儆儆敗走楔乃招集鄕兵斬䤋無數
以勞陞拜陜川郡守
遷東萊縣令釜山僉使晉州牧使有去思碑
乙未拜右道水軍節度使
忤元帥權慄貶知密陽善山
丁酉復爲水使
會賊將平行長行間誘我以爲淸正可圖
諸將皆信之楔知見欺屢言其詐元帥不聽使統制使元均領船出洋果大敗
楔獨率所部循海而右泊于羅州舍舟下陸
元帥以臨機退縮請罪于朝有惜其才者勸姑匿以圖後功
軍威縣監李奎文卽同鄕石交也
往投之奎文執報殺之
其糾合義兵也鄭仁弘方負一世重望
楔獨言仁弘將必爲大奸竟不與同事
撫循士卒得其死力
西厓完平二相國皆推許之性簡傲不肯媚於上將
遂以此遇禍後伸其冤復其爵
子尙龍尙虎進士以孝友聞
배설(1551~1599)은
배치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배덕문인데, 가정 계축(155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재정에 이르렀다.
무인 백거추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 신해(1551)년에 설을 낳았다.
그는 용력이 있으면서 문장도 잘 지었다. 10여 세에 아버지를 따라 울산군에 있었다.
병사 장필무가 장수의 재목인 줄 알고 권하여 붓을 던지게 하였다.
만력 계미(1583)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1592)년에 방어사 조경을 따랐는데,
조경이 패주하자 배설이 바로 향병을 불러모아 왜적을 무수히 베었다.
노고의 보답으로 승진되어 합천군수가 되었다.
그러다가 동래현령, 부산첨사, 진주목사로 옮겼다. 거사비가 있다.
을미(1595)년에 우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원수 권율에게 거슬려 좌천되어 밀양과 선산의 수령이 되었다.
정유(1597)년에 다시 수사가 되었다.
그때 왜적의 장수 평행장이 간첩을 보내어
우리를 꾀어서 가등청정은 도모할만하다 하였다.
여러 장수가 모두 그 말을 믿었으나,
배설은 속는 줄 알고 여러 차례 그들이 속인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원수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통제사 원균으로 하여금 전선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게 하였다.
과연 크게 패하였다.
배설은 홀로 소속된 부하를 거느리고 바다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서
나주에 배를 댄 후,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원수가 중요한 때에 도망쳐나와 움츠렸다는 이유로 조정에 죄를 청하였다.
그 재주를 아끼는 자가 있어서, "잠시 숨어서 후일의 공로를 도모하라"고 권하였다.
군위현감 이규문은 동향의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거기에 가서 투신하니, 이규문이 잡아 보고하여 죽였다.
의병을 규합할 적에 정인홍이 바야흐로 일세의 중망을 업고 있었다.
배설은 홀로 "인홍은 장차 반드시 크게 간악한 사람이 될 것이다"하고 ,
더불어 함께 일하지 않았다.
사졸들을 어루만져 주어 그들이 사력을 다하였다.
서애 유성룡과 완평군 이원익 두 상국이 모두 그를 미루어 인정하였다.
그는 성품이 간단하고 오만하여 , 상급의 장수에게 아첨하려고 하지 않았다.
드디어 이 때문에 화를 만났다. 나중에 그 원통함이 풀렸고, 관작도 회복되었다.
아들은 배상룡과 진사 배상호인데, 효성과 우애로 알려졌다.
李奎文
登武科官至水軍節度使
以捕告裵楔陞堂上
鄕人病之爲之語曰
李樹着梨花蓋
梨與裵方言同故也
居吾道宗前村
이규문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배설을 포고함으로써 당상관에 올랐다.
고향(성주) 사람들이 그 행위를 흠잡는 말이 전해져 오는 바
<오얏나무(이규문)는 살게 되고, 배꽃(배설)은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배나무-梨(리)와 성-배(裵)는 방언으로 풀면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오도종 앞 동네에 살았다.
배설(裵楔)에 대하여 (출처: 한국학사전)
생몰년 : 1551-1599
시대 : 조선
분야 : 항일/국방 > 무신 > 무신
배설(裵楔)에 대하여
배설(裵楔)
1551년(명종 6)∼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한(仲閑). 사재감정(司宰監正) 덕룡(德龍)의 아들이다.
1583년(선조 16) 별시무과에 급제하여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군수가 되었는데,
의병장 김면(金沔)이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하여
개령(開寧)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응원군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여 아군이 크게 불리하였다.
부산첨사·진주목사·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중이던 왜적선 600여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로 하여금 수백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였다.
배설은 웅천을 급습하여 잘 싸웠으나,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군량 200석, 전함 수십척을 상실하였다.
칠천해전(漆川海戰)의 초반전인 14, 15일 싸움에서 패한 뒤,
15일 저녁에 원균이 여러 장수를 소집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였으나,
배설은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퇴각할 것을 모의했다.
7월 16일 적의 대선단이 원균의 주력부대를 공격하여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배설은 전세를 관망하다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고 12척을 이끌고 도망쳤다.
한산도로 도망한 뒤 군사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이순신(李舜臣)이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뒤 한때 그의 지휘를 받았으나,
1597년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허가를 받은 뒤 도망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전국에 체포명령을 내렸으나 종적을 찾지 못하다가,
1599년 선산에서 권율(權慄)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참형되고
그의 아버지와 아들 상충(尙忠) 등은 모두 방면되었다.
그뒤 그가 쌓은 무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증손 석휘(碩徽)가 지은 《가범 家範》에 시조 2수가 전하는데,
선조 때의 시조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조선 시조문학사상 그 의의가 인정된다.
宣祖實錄, 燃藜室記述, 宣武原從功臣錄卷, 家範, 壬辰戰亂史(李炯錫, 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 1974). 〈宋正炫〉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배설은 주부(主簿)로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였으나, 황간, 추풍 등지에서 격전이 벌어져 조경 군대가 패전하자, 배설은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 하였다. 전투라고 다 같은 전투가 아니다. 중부주력군은 일본군의 허리이라면
그 후 성주성전투에서 의병장이 된 부친을 도와 (임시선봉장:가장을 맡음)용맹히 적진으로 나아가 부상진(扶桑鎭)전투에서 적장 흑전구침(黑甸句沈)의 목을 베었으며, 개산진(開山鎭)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다시 무계진(茂溪陣)까지 출정하여 적을 평정하였다.
선조 38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5월 22일(을해) 5번째기사
선전관 이춘영이 영남 왜적의 동향과 김성일·김면의 죽음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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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관(宣傳官) 이춘영(李春榮)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梁山)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우도의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우병사(右兵使) 김면(金沔)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金穎男)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 경기를 지나다 보니, 전야(田野)가 황폐해 있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날마다 통곡하면서 거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전란으로 전국적으로 굶주려 죽고 있어 의병의 수가 증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 군 약 22만이 들어와 소와 말을 사들여 모두 도살해 먹게 되어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인육을 뜯어먹고 명군이 토한 음식을 주워먹으려고 무라를 지워 다녔으며, 계사년에 기근이 빌생해서 전욤병이 창궐했다.
부상진전투 상황
일본 중부군에 맞서
옥천의병장 조헌,영규(승병장/공주)등이 금산이치에서 새잡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격멸하고자 진군하였으나
왜군에게패해 800여명이 전원이 전사하였다.(7백의총)
조헌을 지원하려고 고경명의병력도
합세하였다가 대패하여
고경명병력6.000여명이희생되었다. 금산 이치에서 6800명의 의병을 살육한 일본군들을 성주성 북쪽(부상현)을 합천군수의 1500병력으로 막으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당시는 배설이 합천군수도 아니였음)
김면휘하 거의 모든 의병들이 참여 1~3차례 왜군 중부군 주력 육군 약 20000명(가쓰라)과 의병 진영을 향한
세차례 공격 모두실패, 일본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의병들 전선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하자 왜장 흑전구침은 직접 말을 타고 추격 일본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개시하자 배설이 단기 필마로 흑전구침향해 돌진 흑전구침의 목을 베어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 의병 대량 살육을 막았음에도 전투의 패배가 배설 때문이라고 의병들은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조헌 영규 고경명군대는 일본군의 상대라기 보다 일방적인 살육에 가깝다. 설령 배설이 합천군수라해도 관병으로 2천으로 왜군을 막을 수도 없고, 합천군수도 아니였다. 이정도 병력은 경상 우도 모든 관군이 합세해도 막기어려운게 당시 실정이였다.(배설은 이순신이 아니다)
성주성 3차 전투의 탁월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4년(선조 27) 초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에서 배설은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당시 왜군들은 대장이 전사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였었다.
당시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이 전주성 탈환을 위해 움직이든 시기였다.
왜적이 부산포 일대에서 소란을 피우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잠시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를)로 발령 받는다. 부산첨사 시에는 왜군의 국경왕래를 차단하였으며, 동래부사 시에는 관할구역을 옛날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치적을 남겼다.
1594년 가을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되어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사를 바르게 하고 온 고을을 내내 평안케하여 평판이 높았다. 그러다 1594년(선조 28) 왜적의 발호로 남해안 일대가 매우 소란하자 서애 유성룡선생은 공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한다.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 자문을 보내는 일과 몇 가지 인사 문제를 논하다
“부하(部下)에 발탁할 만 한 자는 없는가?”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쓸 만한 사람이고, 배설(裵楔)도 우도 병사(右道兵使)로 삼을 만합니다.”하였다
칠천량 해전을 기획 입안 한 장수가 권율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륙한 대규모 왜군을 바다에서 공격하라는 것은 내시의 전략이 아니였을까? 삼척동자도 이런 무모하고 현장을 모르는 공격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권율이 기획한 것이 사실이라면 권율은 장수는 크녕 군관정도의 인물, 조선의 명장들을 사지로 몰은 국가파탄의 무능한 장수임을 여실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왜군이 새를 잡는 조총을 들고 다닌다든 1593년 정월 명나라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수는 22600명 장수는 약 200명 정도이나 실전에서 의병장들이 대거 사망하고 의병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명목만 유지하게 된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부원수(水軍節度使兼副元帥)로 발령 받는다. 장군은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군정을 바로 세워 군의 사기를 높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완평 이원익(李元翼) 선생이 공을 일컬어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높이 칭송하였다.
1597년(선조 30) 선산부사 재임 중 다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발령을 받아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6~7월 초 다대포해전 영등포햐전 가덕도해전 등등 부산포 약 10여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 참여했다.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김면은 만석지기 유생으로 임진란으로 쫄닥 망하게 되자 고령에서 봉기하여 의병도대장에 오른 인물이다. 그 아래 곽재우(좌장:의령)정인홍 (우장:합천) 기타 그의 대부분의병장들이 휘하에 있었고, 심지어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경상도관찰사) 그 아래에 있었으며 약1년간 맹활약을 하다 사망하였다..따라서 배설이 주부로서 의병에 참여하여 적장의 목을 벤 것은 대단히 무예가 특출 했음을 알 수 있다.
성주성은 대구 - 구미 - 선산 - 상주 - 문경- 조령 또는 대구 - 구미 - 금산(김천) - 추풍령을 잇는 일본군 주보급로를 지키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이 성을 탈환하면 일본군의 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도 대군을 주둔시켜 놓고 있었다.
원래 성주성의 점령부대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제 9군이었는데, 8월 11일자로 제 7군의 모리 테루모토 휘하 부장 가쓰라 모토쓰나 1만 병력과 교대하여 경상우도(右道)일대 일본군이 모두 집결하여 총 2만명이 넘었다.
김성일은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이 성주를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체찰사인 정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하여, 운봉과 구례의 관군 5천여 명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순에서 기병한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이 합세하여 관군의 지원군과 기존 병력을 합하자 총병력이 2만여 명에 육박했다.
정인홍과 김면은 8월 21일을 주둔지를 출발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성주성 남쪽으로 진출한 다음, 8월 22일부터 운제(雲梯), 비루(飛樓), 충차(衝車) 등 공성기구를 마련하여 대대적으로 성주성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개령에 있든 일본 모리의 증원군은 곧장 의병군의 측후방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의병군은 곧 대열이 무너지고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찬 채 후퇴했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정인홍, 김면 의병군은 한달쯤 뒤이 9월 11일 다시 성주성 공략에 나섰다.
11일 아침부터 공성기구인 우네와 충차등을 준비하는 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부상현을 넘은 일본군의 증원이 의병군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추어 성 안의 일본군도 성을 나와 협공하였다.
혼전 중에 정인홍으 별장 손승의가 조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또다시 패주하며 2차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3차 공격은 석달 뒤인 12월 7일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12월 김면은 경상 의병 도대장, 정인홍은 경상 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두 사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 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각각 넘어와 개령과 고령 방면에서 활동하며 김면, 정인홍 의병군과 연락하며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12월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 전라 의병 연합군은 8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의병들의 피해가 너무 심해져 결국 14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과라면 배설의 적장의 목을 벤 것 뿐이였다.
3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튼 일본군은 왜장 흑전구침의 전사로 1593년 1월 15일 밤 성문을 열고 철수하여 개령의 본대와 합류하여 선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조선 의병군은 성주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은 부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문경 - 조령 - 충주 - 용인 - 서울을 잇는 외길 육로 보급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성주성 공략의 선봉에 섰던 의병장 김면은 의병군을 일으킨 뒤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 차례등 대소 전투 40여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처자가 문전걸식을 하였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끝내는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 11일 금릉군 하리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시에서 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다 죽은 대장부의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只知有國 不知有身(지금까지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한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
출처 : 들꽃사랑
동인 김성일 유성룡 정여립 이외 약 2.000여명으로 호남동부권을 중심하는 세력으로 1589년 (선조 23년) 정여립 모반사건인 기축옥사로 약 1.000명이 옥사하는 조선시대 최대 사화가 정철에의 주도로 이루어졋다. 그후 살아 남은 유성룡 김성일 동인세력은 서인 출신 원균이 패배함을 기회로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철은 기축옥사후 1592년 건저의 사건으로 몰락하고 서인세력은 다시 소외되고 동인인 이원익 유성룡은 남인세력으로 분화 군력을 유지하고 북인세력은 완전 고사되었다
참고로 정철 이이 이황은 서인계열의 세력이다.
곽재우는 경상의병 좌장으로 활동하여 그 공적으로 1575년 진주목사에 까지 임명된 명장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주성을 버리고 2000여먕과 함께 화왕산으로 들어가 이곳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의병들이 왜군의 상대가 안되었음 보여준다. 그 후 진주성목사로서 계모의 호상을 핑계로 울진으 귀향하였다. (왜군이 만만하면 진주목사인 그가 성을버리고 귀향했겠는가)
1.배설이 이순신부하였나?
아니다.
이순신과 배설은 품계가 같은 동급장수로 배설은 야전군사령관 (이순신은 사형수와 같았다.
2.이순신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나?
아니다.
배설은 왕명에 따른 남해안 소개령을 430킬로작전했고 대형전함 12척은 장난감숨기듯이 할 수 없다.
3.배설이 명량대첩에서 안위의 화살맞아 죽었나?
아니다.
병피료차 대학병원이 없어 집으로 8.30일 공문을 받아 9.2일 배에서 내렸고 이순신은 탈영보고를 했다
4. 이순신의 통제사 임명은 선조가 했나?
아니다.
7.23일 배설이 1060명의 병력과 12척의 전함이 있음을 권율에게 보고했다. 선조는 배설을 통제사로 임명하려고 하자 이순신이 120명의 잔병으로 전쟁 공포증으로 배설이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5.권율의 1597.7.28일자 보고서 칠천량서 살아남은 장수를 통제사로 하자는 보고대로 라면 배설이 통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살아만 있다면 선조는 통제사로 하겠다고 했다.
이순신과 권율 유성룡은 배설이 전쟁공포증을 과대 보고하고 단신 도주했다고 속였다.
선조는 하는 수 없어 이순신을 배설과 동급인 통제사로 8월 이 한참지나 사령장을 내린다. 군사적으로 8.19 쿠데타의 성공이라 한다.
권율 유성룡은 전쟁 앞에 군권을 놓지 않으려고 선조를 철처히 기망했다. 이순신의 7.23 보고를 왕에게 숨기고 허위 장계를 7.28 올려 이순신의 복직시키고 배설을 제거하는 군사반란이 성공했다.
결론. 이순신의 활약은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유성룡 권율의 과대망상적 소설이다. 그러한 전투가 없고 왜군은 육지를 점령하려고 했지 바다를 놓고 싸운적이 없다. 노량 해전 또한 왜군들 철수로 조선인들을 대량 나포해서 끌고 가든 수송선단을 12퍽서 추격해서 격침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교통사고 나서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순경과 가해자 몆명이 짜고 한사람에게게 피해자를 가해자 만든 누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순신이 영룽리 된 것은 1895년 알본의 정한론 침략자들의 우상화로 시작되었다. 역사 왜곡은 일본에 의해서 인데 명향영화는 한술 더해 조선은 이순신만 없었으면 일본이 되었을 나라라고 주장하는 시각에서 시작되어 배설이 악당으로 나온더.
배설 경상 우수사 신재공 (愼齋公) 배 설(裵楔) 1551년(명종 6)∼1599(선조 32). 배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선조임금의 차출로 원균 부대의 최고 선봉에 투입된 장수 였으나, 왜군들이 장거리 침략인 부산항에 상륙하기 전에(수심이 깊은 곳) 격멸해야 한다는 작전을 주장했으나 끝내 조정(원수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
1, 의병장인 부친을 따라 군공을 세웠고,
합천, 진주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시에는 두 차례의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별시무과에 급제해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2, 무관으로 입신,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 임진년(선조 25년) 4월 14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군수가 되었고, 부산첨사, 진주목사, 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선봉을 세워 약 50여 척과 병사 약5,000명 으로 약 600여척의 적함과 수 만명의 적들을 공격하였다. 조선해역 전도는 이 전투장면으로 확인되고 있다.(플래툰)
3, 칠천해전(漆川海戰)
7월 8일 웅천전투에서 이기고 14, 15일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연거푸 패했다. 8월 20일 (음 7월8일) 일본의 후속 군병들이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 임진란 때 경상도에 진주하고 있든 2만 병력에 더해 14만 병력이 상륙을 마친 상태였다.
칠천량해전 다대포(웅천) 1597.7.8~11사이에 수차 적선 600여척과 피아간 부산 일대에서 교전이 있었고 양측이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본은 부산일대의 거의 모든 전함들이 결집 조선 수군을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
조선수군들은 여러차례 전투를 하면서 손실이 있었고, 추격에 쫒긴 조선함대가 15일 밤 9시경 칠천량해안에 도착했으나, 병졸들은 녹다운으로 지쳐 있었고, 원균은 밤늦게 휘하 제장들을 소집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 #39;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39;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 #39;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 #39;고함쳤다
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자 이억기 최완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4,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억기 최완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 #39;우린 여기서 죽겠구나!& #39;라고 했다.
이미 이때 왜군은 수일간의 추격에 약 1.000여 척의 부산 일대 거의 모든 왜군들이 서서히 칠천량을 수겹으로 에워 싸고 몰려들고 있었다. 이날은 짙은 안개와 이슬비로 가시거리가 짧았다.
밤 늦게 왜선 5척이 손살 같이 조선군 영내를 휘젖고 다니면서 조선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손살 같이 쏘다녀도 조선 수군은 닺을 내렸기에 손을 쓸 수 없었고, 병졸들은 지쳐 잠들어 깨지 못해 4척이 전소 되었다. 이것은 부근으로 몰려 오는 왜군들에게 일종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 였었든 것이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병사들은 밤새 화재와 적선의 출몰로 고단해진 새벽녁이 동틀 무렵 신호탄 세발이 울리자 일제히 근접한 1.000여척의 함선들이 삼중의 포위망으로 밀고 들어와서 조선 전함 한척에 왜선 5~6척이 둘러싸고 돛을 눕혀 일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해로가 막혀 포위 된 상황에서 원균이 배를 버리고 춘원포로 육지 상륙을 명령했다. 배설은 원균의 명령을 거부하고 포위망(약 30여척 3.000명 병력 전사)을 뚫어라는 명령을 내린후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이억기와 최호가 전사하자 후퇴 명령을 내려서 서쪽과 반대쪽 동쪽으로 두방향으로 퇴각하게 된다.((실제는 견내량 7척과 5척 대열=탄환이 고갈됨)
원균은 권율의 군대가 육상에서 호응할 것으로 믿고 춘원포로 상륙하였으나 권율의 군대가 아니라 왜군들의 매복군에 전멸 당했습니다.
결론,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5, 조선왕조실록 《선조 090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6,((선조실록))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대신들: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유성룡(영의정) : 감히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다.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서너겹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남은 장수는 아순신 뿐)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이순신복권 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배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배설이 옳았다는 심증)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조센 끝났다)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순신은 아니다)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명나라 안오니 선조 넌 개털됐다 빨랑 순신임명해라).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선조 : 근자에 모병에 있어 사졸(병력) 지원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민심 이반이 심함)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이 오직 이순신의 복직에만 매달려 대책 자체가 없으며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퇴각했음도 철처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직접 충청 전라에 한척의 전함도 없느냐고 물음에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조는 배설이 도주했다고 보고함에도 배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10,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자빠진 배설의 항해기록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함 ,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 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는 것은 거짖말임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음, 당시 어마어마한 전함을 숨길 수 없음 (나라를 위해 작전을 하는 배설장군의 전함과 병사들을빼앗고자 허위보고를 하고 이순신을 임명해야 한다고 임명장을 요구함)세계최초의 잠수함 거북선에 디젤엔진이 없었음,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1, 대역죄인 백의종군상태였든 이순신의 등장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배설을 찾아왔습니다.
1)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배설의 7일간의 청야작전과 남해안 일대 백성들 소개령을 철처히 비밀로 한 권율과 이순신은 첮 장계에서 배설이 전쟁 공포증이 있고 도주중이라고 선조를 기망하는 장계를 올려 권율과 이항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권 시켜 달라고 하고 있다.)
1. (경상우도수사 배설이 도주중에 있어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약 2.000명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전함을 수리함을 얼추 보이는 식으로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배설의 전함이 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 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그러나 선조는 배설을 면직시키지 않고 전쟁 끝날때 까지 중용합니다.
4,) 거북선 12척을 배설이 였바꿔 먹으려했다?
군대를 접수하기 위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1597.7.23)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3도 수군절도사로 임명을 8월 3일 허락하면서 품계를 한계급 강등해서 경상우도수사 배설과 동급으로 임명하는 묘수를 부립니다. 이에 이순신(권율)은 후일 선조를 속인 것이 발각 될 것을 우려해서 배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라 보입니다.
5) 배설의 귀향과 탈영보고서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배설의 병가를 허가하고 9월 2일 귀향하자 마자 도망했다고(탈영보고) 합니다.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도사 이순신은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못하게 합니다.(당시 탈영은 귀대시 군율로 참형당함)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 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조선군이 전사하고 남은 빈배)
이순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12,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晋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권율은 매일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배설의 12척의 경상우도병선이 아니라 각기 도주 한것으로 보고함)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살아 남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통제사로 하겠는데 아무도 없으니 이순신을 임명해 달라는 허위보고 배설이 도망한 것은 맞으나 아직은 행방을 모른다고)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권율은 사실은 이순신의 복권을 원하면서 아무나 살아남은자가 있다면 임명하자고 독촉하고 있다.)
13, 난중일기 기록 //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사실 선조는 부득히 이순신의 품계를 강등하여 임명하므로 배설과 동급이 됨에도 자신이 상관인 것처럼 비서실장 유성룡의 빽을 믿고 있음)
8월12일/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뒷빡치기에 걸려 들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권율에게 탈영보고= 전시 탈영은 군율에 의거 참형임)
9월 15일 & #39;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 #39;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 #39;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39;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이순신은)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배설을 데릴러 가려다 그냥 왔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1) 이순신은 천운의 정치군인
럭비공 풋볼 튀듯이 백의종군 대죄인이 수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나라걱정이든 배설은 8월 3일 원수부가 보낸 사령장을 무시하고 숙배를 거부한다. 군권을 넘길 수 없다. 이순신은 혀를 내두러면서 아무말도 못한다. 왜냐면 이순신이 지휘하든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함선은 모두 전멸했고 배설의 전함수리에도 한푼도 보태 준게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의 잔병을 배설경상우도수군에 합류하라고 지시하자,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렸다. 이와 같이 12척의 전함이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배설이 도주하여 노량에 이르렀다는 암시를 하고 있음, (8.9)
14,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15, 배설장군이 해전에 투입된 계기,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군들이 부산상륙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도 이순신은 선조가 북쪽으로 토끼든 말든 한산도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왜군 14만이 출병하는 것을 지켜만 볼것 같은 상황에 왜군이 부산항에 상륙해버립니다.
부랴 부랴 이순신에게 속은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으로 대체 합니다. 선조와 원균은 배설에게 선봉을 맞기게 됩니다. 해적으로 양성된 왜군의 근접전에 패배합니다. 따라서 이건 아니다. 왜군을 유인해서 심해에서 함포로 작살 내자고 주장하지만, 권율이 이순신이 파직된데 앙심을 품고 원균을 다그쳐 일을 그르치고말앗습니다.
1) 진주성 선산 등지에서 전쟁준비를 해왔고, 섬진강을 주무대로 배설장군은 경상우도 전함 장작귀선 12척의 건조에 사비를 투입했다는 기록도 있고, 나주의 나대용일가에 기술을 가져와서 전함을 건조했습니다. 배설이 양성한 병력이 최정예로 전란중에 충성심이 특별했습니다.
2)배설장군의 귀향(탈영으로 누명쒸움)
풍신수길을 위해서 살육병기로 파병된 10만 왜군들과 시마즈 요시히로 가토 기요마사의 적진을 통과하고 왜장을 살해하지 않았다. 조선주둔군들에 영향을 끼쳐서 일본에 내전이 촉발 조선 진출 장수들 대부분과 풍신수길 일족이 멸족되었다. 조선야전군총사령관이 대살육전을 앞두고 귀향했다.
3)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4)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장군,(내전을 끝 내다)참고자료:엔하위키미러
배설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 #39;배설의 귀가& #39;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 #39;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 #39;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16, 누명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주및 역모 모반혐의로 참수
병상에서 칠천포패전 책임에 대한 "月波亭" 이란 시를 남기고, 권율장군의 수하들에 선산땅에서 부친과 아들이 함께 추포되어 역모 모반죄로 부친과 아들은 방면되고 장군은 참수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배설장군의 참수에 경상도관찰사 경상감사 한준겸이 직접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군졸들을 동원 후하게 장례를 지내준다. 한준겸은 조정에서 파직될 것을 알면서 장사를 치르준 후 한준겸은 파직한다.
& #39;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39;
한준겸은?(1557-162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아버지는 판관(判官) 효윤(孝胤)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주서·전적 등을 역임했다. (출처:백과사전)
1) 일본을 후덜덜 떨게한 배설장군& #39;조선의 훌륭한 무장 이므니다& #39;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조선 도공 십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조선과 명나라에서 가장 무서워 한 장수가 시마즈 요시하라 입니다. 이 군대가 진격하면 조선군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요
배설이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사라집니다.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출병이 차일피일 이순신장군처럼 미루어지죠
배설장군에게 하마터면 수장될 뻔한 가토 기요마시와 배설장군에게 목이 달아 날 뻔한 시마즈 요시하라가 풍신수길에게 철군요청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출병 제16 군 보충대에 철군요청서를 보냅니다 (종군화와 부산 상륙 전에 수장될 것이라는 배설장군 이야기가 붙여지죠) 이에야스가 적극 조선 출병을 거부하여 풍신수길의 수하 미쓰나리와 일본내전이 발발하고 배설장군을 흠모하든 철군파 군대들이 승리 했습니다.
일본의 도쿠가와 나이다이진 이에야스 히데요시가 편성한 16군(조선출병 예비군) 중 일본에 남았던 영주로 조선 출병을 은근히 반대하고 시마즈 요시히로등의 영향을 받아 끝내 조선출병을 하지 않았고, 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결국 철군요청으로 쇄락해진 1599년 풍신수길은 절명합니다.
1)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17,유문으로 남긴 시조 & #39;월파정& #39; -東西-
묻지마라, 더물어 무럿하리, 강산도 반기는데 일부러 죽였겠느냐?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동서 화합을 강조한 배설장군
패장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동서 화합만이 나라의 부흥의 근원이다>
동서 양가(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국가에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패장으로서 한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이다.
7, 칠천량해전의 영웅 배즙(裵 楫)처절한 전사,
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꽃다운 35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배 즙(裵 楫) 1564년(명종19)에 태어남.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8, 임진왜란
선조 임금은 무조건 도망, 백성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고, 백성들이 적 치하에 고통받는다 이런 개념이 없었지요. 그러니 적치하에 부역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고, 왜군은 전공을 세우려 목도베고 코도베고 귀도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내서 훈장먹고자 합니다. 선조는 도망에 있어 달인이고 로간 뺨칩니다. 도망에 달인이였습니다.
도망자 도망정권답게 은폐에 선수이고 비열하게 위험인물을을 숙청하지요, 뻑하면 백성들 부역자로 몰아서 효수하고 엄청 센 군율로 참수합니다. 명나라 군들은 외국 여행온 점령군 행세 하면서 얘들도 목가지 확보경쟁을 합니다. 관군들도 포상 전공을 다투고 허위보고를 많이들 합니다.
9,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의 가장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18, 배설장군에 대한 자료
일본에서 용맹으로 존경받은 배설 [1]
부산포 웅천해전과 배설장군 [1]
이순신장군과 배설장군의 누명
명량대첩 3대 허구성 [1]
이순신의 3대 거짓말,지록위마
이순신의 권모술수를 배워라! [3]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월파검,청록진충도,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종전 (자료출처: 아고라, 백과사전, 선조실록, 왕조실록,난중일기, 엔하 위키미러 기타)
배설장군의 귀향 [2]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묻지마라,일부러 죽엿겠느냐? 세월호특별법 역사에서 지혜를
군인숭배사상, 이순신의 실체, 역사연구
월파정月波亭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9, 예수가 12제자가 있었다면, 12척의 전함이 조선을 살렸습니다.
20, 7일의 기적, 칠천량해전을 수습하고 430km를 백성들을 살리려 대피시킵니다.
21, 악명 높은 왜장들을 단기필마로 제앞해서 철군으로 일본 내전을 촉발시킵니다.
22,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으로 왔을 때, 그를 품고 단신 쿠데타를 용인했습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출처: 조선전역해전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 수립의 정신적 기초가 된 ☆조선의 훌륭한 무장 배설☆ 도망자 비겁자 배설☆ 두나라중 한 나라가 거짖이 있겠죠
병치료 귀향허가(난중일기) 8.30일 귀향 9.2일 탈영보고 9.2일 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 이순신이였었죠 병치료로 귀향한 배설이 돌아 올 수 없게 뒷통수 때린 것이죠 나같음 너무 좋아 꿈인지 생산지 허벅지를 꼬집어 봤겠죠
사형수 대역죄인 백의종군 이순신이 전시 전장에 나타났다고 해병대 야전군 사령관이 품계도 동급인데 예~예 하나요 부하도 없는데요 달랑 구라쳐서 3도 수군절도사 품계도 배설과 동급인데요 그 취임식에 배설이 숙배 않한 것운 당연한거죠
난중일기에 배설이 숙배를 않했다 라고 적었는데요 이순신이 잘 못 자신에 위치를 깨닿지 못하고 계시네요 왜군들 쪽배나 쫏아 다니셔 전공세우려고 하고 세카부네 대형 적선은 피해다니시고 능력은 안되고 임금은 쥑인다 그러고 참 힘드시네요
죄인과 사령관은 하늘과 땅차이 신분인데 말입니다 요즘은 민주화라 인권이 있어 교도소에 사형수가 출소하면 장군들이 예예 한다지만 예전엔 아닌 걸로 압니다. 근데 명량영화 찍는 사람들 이순신 부하로 그리고 간첩처럼 몰아서 돈버느라 정신 없죠
선조는 宣武一等功臣 공신에 책록(이순신 배설 원균 권율)
선조임금은 살아 생전 배설장군이 이순신에게 모함 당한 사연을 알지 못하고 탈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배설이 참수된 이후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명기 1605년 배설장군을 宣武一等功臣(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으로서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역모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억울한 누명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이순신 배설 권율 원균이 나란히 1등 공신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임진왜란 400년이 지난 지금 난중일기와 왕조실록을 보십시요
명량에서 진을 친 것은 배설이구요 호랑이 12마리가 좁은 해로를 막으면 물소 330마라가 앞장서 나올 수 없죠 앞에 나오면 격침되는데 누가 서해로 갈 수 있나요
호남에 가장먼저 조선수군 전멸을 알리고 소개령을 내린 것도 배설이지요 왜군의 호남진출을 한양난입을 지연시키려고 했겠죠
호남분들 이숭신에 빠지신거 같은데요 사실은 배설장군이 호남 지키신거를 모르시더라구요 이숭신께 바톤처치 넘겨 줬죠
절대 명량대첩 같은거 하지마라고 당부했겠죠 왜군은 수가 굉장하다 지키기만하면 된다 그런거죠 이숭신이 뒷 다마까듯이 명량대첩해서 영웅되셨죠
아마 배설장군이 이순신의 입장이 되었더라고 해도 권율의 입장이 되었더라도 그래 했을 것입니다. 전쟁 준비없이 공을 세워야 하는 실력이 없는 장수들의 모함과 누명쒸우기도 실력은 실력이니까요,,,
1, 칠천량 웅천해전 1597년 7월 8일
1597년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에 있었습니다.)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선봉을 세워 배설의 전함 50여척( 5.000병력)이 급습했습니다.
왜군이 수적 우세로 전투에서 패배하고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이 불타고 잃었습니다.(적선은 약 30여척이 소실됨) 조선전역해전도는 이때 배설장군의 종군화로 확인되었습니다.
배설이 3명의 왜장들 길을 막고 600척의 적선과 접전할 때 원균의 3도 연합 수군이 전면전을 해줬어야 했습니다. 그게 아님 지원 사격이든 해상무력 시위라도 해줬어야죠
그랬더라면 칠천량서 기습도 받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배설 혼자 600척의 적진에 놔두고 구경만 한 조선 수군들의 심정과 공포심 이해는 됩니다.
배설이 3차례나 적진 돌파를 했다죠? 사실 왜장들이 깜작 놀랄이이죠 제는 뭐 믿고 저러냐고 겁나죠 야 제 상판대기 그려놔라 제 꼭 잡아라
원균의 적전 미스는 이미 이때 나왔구요 배설군대만 적진에 두고 퇴각하는 것을 봐도 전라좌수군 충청수군 전쟁준비 안된 것이죠
왜군들이 야 제 뭐냐 배설이라고 야 제 그려서 풍신수길에게 보내자 이게 종군화입니다. 보세요 전라좌수군 충청군 그림에 있냐구요
조선전역해전도를 보면은 조선 수군의 비겁함이 느껴져요 지근에 있든 3도 연합 수군은 뭐했어요 그게 다 전투도 못해보고 뚱됐잔아요 전멸말이죠
조선백성들이 도륙되고 있는데 배설이 공격하면 옆에서 응원이라도 해야죠 냉정하게 구경하고 놀랐겠죠 그러니 7월 14일 작전회의 때 배설만 심해로 유인하자고 하고 아무도 입 못열었죠
하기 싫은 전투니 칠천량 포구에 집결하고 있으니 배설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여차하면 육지로 튈 준비만 하고 있었으니 배설이 야 깊은 바다로 가자, 내가 저새꺄들 코털을 건드려놨으니 분명 때거리로 몰려 올거다. 고럼 심해에서 깨박내자~
원균이 새벽에 적선 천려척이 오니 춘원포로 배를 버리고 퇴각하라는데 배설이 그걸 따라야 합니까 그건 도망입니다. 왕명도 어기자고 한 배설이 육지로 튀는 원균을 따라야 하나요
교전을 선택하죠 그리고 50척의 전함 거의 다 읽죠
의리 없는 조선 수군들이 전멸하죠 배설이 안구해주고 혼자 살았냐구요 적진에 있을 때 그들은 구해줬나요
나같으면 조선 수군 때려버리고 싶네요 말안듯죠 의리 없죠 죽은 후에도 배설을 혼자 도망 쳐 살았다고 두고 두고 욕먹이고 그러죠
칠천량 바다가 어캐 생긴지도 모르는 사람들 포위하니 도망쳤다 하는데요 남북이 꽉힌 바다에요 다른 장수들은 왜 도망치지 못했겠어요 춘원포(고성)로 도망친 원균장군은 왜 죽었냐구요
칠천량은 앞뒤가 막힌 곳이예요 갇혀 있다구요 동서로 1000여척의 왜군이 삼중포위망이예요 밀리면 곧 죽습니다 그러니 뚫죠 교전명령내리죠
600척 적선 속으로도 돌진 했든 배설인데 포위망 깨는 것이 힘들었겠죠 뉴굴 돌볼 입장 아니죠
뭐 랬어요 왜군들 부산항에 상륙전에 깨자고 그래 얘기 해도 않듯고 칠천량 피항하자니 지쳣대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쳐 쉰답니다.
배설이 총사령관이 아닌게 원통했갰죠 근데 진도 앞 바다까지 장장 430킬로를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비상상황인데 이숭신이 와서 배를 주웠다고 합니다.
이제 나라는 끝나겠네요 야 공세우려지 말고 지키기만해라 앞에 나서는 배들만 함포로 때리고 지키기만하라고 나 집에 가서 쉬어야 겠다 군대 넘겨주려니 제발 뒷통수만 치지마라 ~나이로 보면 8년 위의 흥아죠 나 집에 가는 길에 왜놈들 손좀봐줄 일 있은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