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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배설 이순신장군 미스터리해부1

自公有花 2014. 9. 20. 11:17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4~1599.1] 일본의 침략,

선조 24년(1591) 일본에 간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귀국했다. [10개월 일본기행]《국조보감》

 

 

1, 통신사 황윤길(정사)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왜국의 사신 평조신 등과 함께 오면서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선조가 불러 보고 하문하니,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상이 하문했다.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는가?”

 

황윤길이 아뢰었다.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김성일이 아뢰었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황윤길의 말마다 김성일은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했다. [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모두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 라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동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황윤길의 말을 따르는 것은 모두 서인이란 이유로 배척했다.(출처:선조수정실록)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ㅡ배설 ㅡ(출처:선조실록)라고하자 이억기 최호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7.15,21;00시경)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

'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함쳤다(원균은 배설보다 11년차 위의 주장이다)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억기 최호등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우린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했다. 원균의 삼도수군이 칠천량 해협에 지쳐서 쉬자고 할 때,


배설은 안된다, 심해로 나가 바다에서 쉬어야 한다면서~~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2, 이여송의 원병(유정, 동일원,양호)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지금의 랴오닝 성[遼寧省] 톄링 현[鐵嶺縣]) 사람이다.임란시 원병으로 출병 1593년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격파했으나, 벽제관(碧蹄館)에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에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뒤 화의를 위주로 사태를 수습하고 그해말에 귀국했다.그 다음해 요동총관이된 이여송은  토만의 반란군과 대적하다 요동서 전사함

 

3, 왜군의 투입규모와 날짜,(세키부네, 아다케, 약 2,000척 +)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の海戦に対して本格的に論ずるのに先立って日本水軍の規模を把握して見る事にする.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派兵された日本軍の規模は陸軍 15万名余水軍 9200人だ多くの日本資料で紹介するある.

 

 

 

裵楔"ベッセル

 

 

 

倭軍を編成

1582年の本能寺の変で織田信長(1534-82)が倒れた後、倭国の支配者となった豊臣秀吉(1536-98)は、次なる目標とし て「明」の征服を決意。十分な海軍力を持たない秀吉は、1586年から 2000隻の船の建造を始めました。1587年には朝鮮軍の強さを測るため、26隻からなる襲撃部隊を朝鮮南岸に派遣し、朝鮮軍は問題にならないと結論づ けていましたが、朝鮮半島を通り陸路「明」に侵攻する計画を立て、そのために李氏朝鮮を倭国に服属させる交渉を側近の小西行長(?-1600)と対馬の宗 義智(1568-1615)に命令。当時、「明」の冊封体制下にあった朝鮮との交渉が決裂すると、1591/8月に秀吉は「唐入り」を宣言し、一番隊から 九番隊までの9軍団総勢15万8000人からなる朝鮮出兵の軍勢を編成し、大阪城から名護屋城(現・佐賀県唐津市鎮西町名護屋)の前線司令部に旧暦 4/25に出ばりました。

 

 

倭軍을 편성

1582년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1534-82)가 넘어진 후, 야마토국의 지배자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98)는, 다음의 목표로서「명」의 정복을 결의, 

 이미 히데요시는, 1586년부터 2,000척의 배의 건조를 시작 1587년에는 조선군의 힘을 측정하기 위해, 26척으로 구성된 습격 부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조선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 을 내었다. (文禄の役)을 준비하기 위해 병력,병참수송을 위해서 2000척의 배를 준비했다

 

 한반도를 통해 육로로「명」에 침공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위해 조선을 야마토국에 복속시키는 교섭을 측근의 고니시유키나가(?-1600)와 대마도의 宗 義智(1568-1615)에 명령.당시 , 「명」의 책봉 체제하에 있던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하면, 1591/8월에 히데요시는「당방문」을 선언해, 제일 대로부터 9번대까지의 9 군단 총원 15만 8000명 정도의 한국 출병의 군세를 편성해, 오사카성으로부터 나고야성(현・사가현 카라츠시 친제이쵸 나고야)의 전선 사령부에 음력4/25에 출했다.

 

 

일본의 정예 수군은 3차례의 상륙중에서 3번째로 부산포에 접안한다.

이때 동원된 수군이 10,000여명이며 1차와 2차에 동원 되었던 수군과는 별개이다.

水軍総督은 九鬼嘉隆였다.

日本の精鋭水軍は 3回の上陸の中で 3番目に釜山浦に接岸する.

この時動員された水軍が 10000人余りで 1次と 2次に動員された水軍とは別個だ.

水軍総督は 九鬼嘉隆だった.

 

 

 

九鬼嘉隆

秀吉の朝鮮出兵に際し、水軍総督の命を賜り、金団扇および茜の吹貫(ふきぬき)に金瓢箪の馬印を賜る。

 大小の船数515艘と艘帥1500余人(『浅野家文書』によれば1000人)を率いて肥州名護屋(佐賀県)に赴き、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구키 요시타카

히데요시의 한국 출병에 즈음해, 수군총독으로 명을 받아, 금 부채 및 천의 취관(비단나무)에 금 표주박의 馬印을 받는다.

 

대소의 선 515척과 副將 1,500 여이명(「아사노가 문서」에 의하면 1,000명)을 인솔해 히슈 나고야(사가현)로 향해 가,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참조, 일본 달력과 조선 달력이 다름으로 날짜차이가 있음) [출처:天正記]아고라

 

'조선출병  일본 졸병들은 이순신은 모르고, 대포를 장치한 철갑선 그러니 거북선만 알았다. 장수들은 거북선으로는 바닷길을 절대로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졸병들은 거북선에 의해 바닷길이 막혀 자신들이 독안의 쥐가 되고 만다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래서는 일본 군의 장수들이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더욱이 풍신수길이 죽자 왜장들도 조선에서 죽을까 두려워했다.

 

 

5,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6,칠천량해전 다대포(웅천)

 1597.7.8~11사이에 수차 적선 600여척과 피아간 부산 일대에서 교전이 있었고, 양측이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본은 부산일대의 거의 모든 전함들이 결집 조선 수군을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부산해전 6.19 안골포 가덕도 전투포함)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기타 왜군 본대 왜군 약 10만병 력/ 조선수군 1만여 병력 조선수군 전사 약 6,000명 추정 일본측 미상

 

조선 수군(원균) 총 투입된 병선이 약 200척으로 판옥선 척당 승선인원이 60명 정도 총병력 1만여명, 배설의 전함 판옥선 40여척과 장작귀선 12척 약 5.000명, 전라좌수사 이억기 약60여척 5천병력,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 승선인원이 200명) 판옥선은 60명 정원으로 왜선 5척이 사면을 둘러싸고 200명이 기어 오르면 손을 쓸 수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군은 뒷통수에 칼을 맞아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균은 육지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장작귀선을 선두로 하는 배설이 선봉에 설 수밖에 없음, 일본의 세키부네와 아케다를 제앞 하기 위함임,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다.(적군은 더 많은 손실이 있었음) 조선전역해역전도의 그림 상황,설명

 

결과, 수적으로 역부족인 상태에서 전쟁이 되지 않음, 조선수군 단독으로 일본 침략군들을 저지하려고 한 뜻있고, 가치 있는 전투임에도 당연한 패전을 동인들은 서인을 몰아내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전쟁피해를 부풀려서 대처하고 이순신과 권율이 군권을 잡음, 권율이 기획 명령을 내린 전투로 자신이 책임을 모면하기위해 전쟁결과마저 왜곡했음, 따라서 전투패배후 이순신과 권율의 전투를 살펴보기로함,  

 

1)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이순신과 권율이 군권을 장악함,

2)명량대첩[]   1597년9월 18일 (선조 30)에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함, 12척의 전함으로 330척의 적함을 격침시키고, 왜군   18,000명 (노량 해전 6만명)을 격멸한 세계적인 대승으로 일본 도고제독이 인정했다고 하는데 출처는 불확실함,

 

1597, 9, 2일 배설이 전함에서 내린 날, 귀향하고 2주 뒤인 16일 명량 대첩이 있었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장군은 세계사에 남을 왜군 해전에서 18,000명, 노량 해전 6만명을 격멸함,  그러나 그 상대인 와키자키 야스히로 휘하 전체 총병력이 1.500명이   일본에서 출병하였음, 또 2주만에 탄환을 조달한 기록이 전무함, 이순신장군이 23전에에 23승 격멸한 왜군의 수가 왜군전체 출병 수보다 많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함(영화 명량, 불멸의 이순신을 참조할 것)

 

 

7, 순천 왜교성 패전, [1598.9.19~11.19]

 왜성은 이순신장군을 흠모하시는 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라도 순천성은 삼면이 바다로 서쪽만 육지이다. 조명연합군은 약 5만 5천명, 소서행장 (고니시)왜군은 1만4천명이였다. 등자룡 진린 외 조선군 장수들(김완 이영남)이 대부분 등이 참여해서 패배했다.

 

 

사로병진작전,

1)순천왜성 조명연합군의 총공격,

조명연합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으로 3개 왜성을 동시 전면 공격하여 왜군을 섬멸하자는 작전은 세곳 모두 실패하고 왜군은 유유히 약탈한 재물 (포로)들을 싯고 철군을 종료했다. 1598년 8월 17일 후미성에서 풍신수길이 전쟁중 절명하자 5대로 (5봉행)이 철군을 결정하게 되자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 작전 울산성 사천성 순천성을 동시 공격하기로 했다.

 

1598년 9월 19일우의정 이덕형 도원수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서로군 총사령관 유정은 '조선군은 명나라 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명군의 모든 행동과 명령에 항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후 고니시에게 강화회담 요청공문 발송, '양 진영중간에서 호위병만 데리고 만나자, 나온다면 마중나가겠다' 하자 풍신수길 사망으로 고니시 동의함,

 

20일 고니시는 호위병10명으로 회담장으로 나옴,  이때 유정은 회담장 십여리에 음식을 즐비하게 하였으며, 회담장 양측에 장사들을 배치하고, 왕문헌에게 유정의 복장으로 위장, 백한남은 권율로 위장 전라순찰사 황산이 직접 고니시를 영접하게 명령하며,  비둘기 20마리로 고니시가 오면 날리라고 시킴, 이윽고 고니시 일행이 해룡창에 도착하자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명군들은 대포를 쏘아대고 매복병들이 튀어 나오자 고나시는 놀라 되돌아가는데  왜군들 기병 구원병이 튀어나와 실패함

 

21일 명군의 지원병1만5천명 도착 하고,  해남현감이  적진 공격 왜군 8명 사살 순천성 포위함 

22일 ~23일 유정은 조선군을 질책 서천만호 한산대장 홍주대장 금갑도만호 회령포 만호 외  조선군장수들 곤장7~15대씩 처결

 

30일 명군 수군 전함100여척 합세

10월2일 조명 연합군 총공세 반나절 도중 오하려 왜군들이 밧줄울 타고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 조명연합군 약1.000명 전사(조선수군 사로 첨사 황세득 이청일 외29명 전사)연합군 100보 후퇴

 

10월 2일 유정은 사천성의 악명높은 시마즈군을 봉쇄한 조명연합군이 중로군 동일원장군이 시마즈 요시라 왜군에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음,(울산성 가토 기요마사 조명연합군 동로군도 후일 패배함) 놀란 조명 연합군은 긴급히 순천왜교성 봉쇄를 풀고, 한밤중에 부유창방면으로 퇴각은 계속되어 9일까지 계속함(조선군 전사200명 부상 600명) 봉쇄기간중에도 왜군은 자유로이 돌아다니는가하면 총을 쏘아대기도 하고, 이 퇴각으로 군량미 3천석을 빼앗겼으며, 엄청난 무기들도 빼앗겼음, 이 군량미는 조선의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굶주리며 수래와 등짐으로 짊어지고 조달 했었든 것들였다.

 

고니시는 힌바탕에 가운데 붉은 그림을 그려넣은 깃발에 '부족한 군량미와 무기를 보내주어 대단히 감사하므니다' 라는 깃발을 길 곳 곳에 걸어 놓고 유유히 철수 했다. 조명연합군 전함 30여척이 격침되고 왜군도 40여척이 격침소실되었다. 시마즈는 사천성에서 많은 재물들(포로와 도공들)을 가지고 순천성과 합세 일본으로 돌아갔다.(출처:왜교진병일록1598) 이순신은 권율과 함께 수륙 합동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였으나 6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였다.

 

2)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일단 병력을 순천 왜교성 앞으로 보내 조선군이 다시 왜교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시마즈는 중로군 동일원장군과 조명연합군을 대파한 후 요시토모의 군대와 함께 300~5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으로 고니시를 구원하려고 했다.

 

이순신의 본군은 노량근처의 관음포에 매복해있었고 19일 새벽에 일본 수군이 노량에 진입하자 관음포에 매복한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해 노량해전이 시작되다. 시마즈는 이순신을 포위섬멸하려 했다. 고니시는 순천 왜교성을나서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앞을 가로막는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을 유유히 뚫고 나가는데도 순천왜교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후퇴했으며,  노량해전은 해가 뜰때까지도 계속 왜군들의 철군이 계속 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라의 철군하든 병졸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며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조명 연합수군은 많은 포로들을 싯고 퇴각하든 일본 고니시와 고위장교들이 먼저 떠난후 잔병들을 추격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 270명, 명군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이 사망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죽음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명나라 등자룡(鄧子龍)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출처:충무공전서).

 

결론, 칠천량 전투나 별반차이가 없는 패전임에도 동인들이  단지 보고서를 잘 만든것에 불과함을 알수 있음,

 

 

3) 제1차 울산성(도산성) 전투

날짜 1597년 음력 12월 23일 ~ 1598년 음력 1월 4일 병력 조선 1만1천여명 명 3만6천명  울산왜성 주둔군 1만6천명,

 

 

12월 23일 마침내 조명연합군의 총공세를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산성 바깥의 병영성, 언양성이 함락되었으며 가장 가까운 왜성인 서생포 왜성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도산성은 조명연합군의 그물같은 포위를 했다.  연합군 총사령관 양호는 전략을 변경하여 고사작전을 개시한다. 연합군은 성 주변의 우물을 모조리 묻어버리고 태화강의 물줄기를 빈틈없이 봉쇄했다.

 

 

가토와 일본군 성 안에 2만에 가까운 일본군에게 먹을 식량과 물이  없었다.  28일을 기점으로 연합군은 도산성 외성을 함락시키며 가토군을 몰아붙였고, 가토의 일본군은 좁은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결사항전을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자료 약6~8만에 달하는 대군)도산성으로 피항했다.

 

조명연합군도 일본 구원군과 맞서게 하였으나, 오랜 시일 전투를 치룬 연합군과 일본군의 대결은 일본군이 유리했다.  연합군 지휘부는 공성 포기와 퇴각을 결정, 10여 일에 걸친 전투는 최종적으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다.

 

 

4) 사천성패전,시마즈 요시로 일시:1598년(선조?)10월1일 

지휘관: 조·명연합군-董一元/ 일본-島津義弘 병력: 조·명연합군 수만인~200,000내외/ 일본-7,000내외 전과: 조.명연합군-30,000~80,000내외 사상자/ 일본-미상 약 4,000여명 사상,

 

1598년10월 조선의 사천에서 島津義弘이 이끄는 島津軍7천명이 명군의 장군 동일원이 이끄는 수만의 조·명연합군을 격퇴한 전투로서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설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명군의 수가 3만7천에서 20만까지, 명군의 사망자가 수천에서 8만이라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일본 측 기록>중국측 기록에 8만명 사망으로 되어 있어 이보다 피해가 큰 것으로 추정됨,  1598년 9월 말부터 10월초까지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小西軍), 사천왜성(島津軍), 울산왜성(加藤軍)에 대하여 동시에 공격을 개시,

 

동일원이 이끄는 20만이라 칭하는 조·명연합군이 사천왜성을 공격했고,  사천은 일본군의 策源地인 부산과 일본최좌익(조선의 서쪽)의 순천왜성, 남해왜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함락하면 서쪽에 있는 일본군과의 연락을 분단시킬 수 있었다. 사천에 주둔하였던 일본 병력은 島津義弘과 島津忠恒이 이끄는 島津軍7천뿐이었다. 宗軍과 立花軍이 援軍을 신청하였으나 義弘은 이 신청을 거절하고 島津家의 군세만으로 조ㆍ명의 대군을 맞아 격퇴하였다.

 

 

 

그 후 집결하여 철퇴한 연합군의 島津측에서는 [취한 수급이 3만, 벤 시체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島津義弘은 [鬼石蔓子]라 불리어 무서워했고, 그 武名이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전해졌다.

 

[繪本太閤記]의 기록

회본태합기에는 사천성(사천고성)을 수비한 것은 伊勢兵部少輔定正(貞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사천신성은 新塞城이라 했다. 또한 [鬼ㆍ島津]이 아니고 [?(파)ろしのしまんず] 라고 기술하고 있다. 명군의 병력은 4만여 이고, 島津軍의 병력은 義弘의 5천, 忠常의 1천, 伊勢兵部少輔定正의 3백 합계 6,300여명이고, 취한 명군의 수급은 3만 여로 기술하고 있다.

 

 

 

사천성의 전투에서 명군의 병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패전 측인 명의 기록에서 [전사자 약8만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전사자 8만인이라는 것은 세계사와 비교하여도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패전의 장수는 책임을 물어 처형되는 경우도 있어 전과는 과대히, 손해는 과소히 보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천전투에 앞서 8월18일 이미 豊臣秀吉이 사망했지만 이를 숨기고 10월 15일부로 일본군에게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島津家가 이 사천전투에서 명군을 격퇴함으로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탈출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한 11월18일의 노량해전에서 小西軍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이 전투를 세계전투 사에서도 비교될 만한 일본의 전설적인 승리의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10월2일, 董一元은 오전 6시30분경 사천왜성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오전 9시경 中路軍은 목책까지 진군하여 화살과 총탄을 우박처럼 발사했다. 드디어 中路軍의 一隊가 성문을 깨고 담을 넘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공격군의 200m 후방에 거치돼 있던 城門 파괴용 대포가 과열에 의해 파열하면서 그 불꽃이 날아가 화약상자에 옮겨 붙음으로써 연쇄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明兵들이 공세를 멈추고 도주하려고 했다.

 

기회를 포착한 왜병들이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돌격, 백병전에서는 예리한 일본도가 위력을 발휘,  主將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본대를 이끌고 달려 나와 도주하는 明軍을 추격, 中路軍의 선봉장 모국기는 敵의 主將 요시히로(島津義弘)까지 출성하자 성 안의 수비가 엷을 것으로 판단, 一枝軍(일지군)을 이끌고 바로 성문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가  시마즈 타다나가(島津忠長)가 100騎를 이끌고 사천왜성과 明兵 사이로 뛰어들었다.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 부대도 가세했다. 이때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 부대는 中路軍의 후미에 있던 輜重(치중)부대를 향해 화살과 철포를 발사했다. 後陣의 대소동에 놀란 모국기 부대는 사천읍성 방면으로 도주했다. 한편 董一元 직속의 4,500騎는 영춘왜성과 사천읍성 사이의 石橋(석교) 前面에 최후 방어선을 치고 전세의 逆戰(역전)을 꾀했다. 그러나 가와카미 히사토모(川上久智)의 부대가 달려 나와 中路軍은 붕괴되어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며 합천 삼가까지 수일을  도주했다. 

 

 

결론^^

칠천량해전이 결코 패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조선 판옥선들이 왜선 5척에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학살 된 점은 있으나, 기습에 다른 방도가 없었고, 이미 권율의 작전 실패로  포위된 상태에서 육지로 퇴각도 하나의 방법이 옳은 것이였음, 그냥 배에서 60여명이 200명을 당할 수 없고, 일방적인 살육이 되기 때문에 육지로 피항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 한 상황이였음,

 

  그러나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일본 군을 공격한 1597년 6월 부터  7.16일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 좌절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려주었음, 왜군 병사들에게 막대한 공포심을 조장한 가치 있는 전사이고, 순천왜성, 사천성, 울산성패전에 비해 매우 가치 있었든 전투였음은 일본측 자료가 말하고 있음,,,,,,^^  

 

 

 

 

 

 

 

3, 칠천해전(漆川海戰)

조선수군은 7월 8일 웅천전투에서 이기고  14, 15일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연거푸 패했다. 8월 20일 (음 7월8일) 일본의 후속 군병들이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 임진란 때 경상도에 진주하고 있든 2만 병력에 더해 14만 병력이 상륙을 마친 상태였다.   

 

칠천량해전 다대포(웅천) 1597.7.8~11사이에 수차 적선 600여척과 피아간 부산 일대에서 교전이 있었고 양측이 피해가 심했다. 이에 일본은 부산일대의 거의 모든 전함들이 결집 조선 수군을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

 

조선수군들은 여러차례 전투를 하면서 손실이 있었고,  추격에 쫒긴 조선함대가 15일 밤 9시경 칠천량해안에  도착했으나, 병졸들은 녹다운으로  지쳐 있었고,  원균은 밤늦게 휘하 제장들을 소집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팔을 걷어 부치며 큰 소리로'용맹을 낼 때는 내고, 겁낼 때는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긴요한 계책입니다 우리가 부산바다에서 기선을 잡지 못하여 군사들이 의기 소침하게 되었고 영등포에서 패하여 왜적의 기세를 돋구어 주어 적의 칼날이 박두 하였는데, 우리의 세력은 외롭고 약하며 용맹을 쓸 수 없으니 오늘은 겁내어 싸움을 회피 하는 전략이 지당합니다.' 칠천량은 수심도 엷고 수군운영이 어렵고 협소해서 병선을 심해로 이동해야 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여러차례의 부산포 (웅천)전투에서 지원사격이 부족한데 항의로 외로움을 토로하며, 수군들이  지쳐있으나 심해로 가서 진을 치자는 주장이다.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함쳤다

 

배설은 선전관 김식 최호 이억기 기타 제장들 앞에서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자 이억기 최완 이하 제장들이 한숨만 쉬었다.(원균이 가장 아끼고 항상 선봉에 세우든 배설의 참언보다 권율에 대한 분노가 더 했다.)

 

4,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억기 최완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헤어지면서 '우린 여기서 죽겠구나!'라고 했다.

 

이미 이때 왜군은 수일간의 추격에 약 1.000여 척의 부산 일대 거의 모든  왜군들이 서서히 칠천량을 수겹으로 에워 싸고 몰려들고 있었다. 이날은 짙은 안개와 이슬비로 가시거리가 짧았다.

 

 밤 늦게 왜선 5척이 손살 같이 조선군 영내를 휘젖고 다니면서 조선 전함 4척에 불을 지르고 손살 같이 쏘다녀도 조선 수군은 닺을 내렸기에 손을 쓸 수 없었고,  병졸들은 지쳐 잠들어 깨지 못해 4척이 전소 되었다. 이것은 부근으로 몰려 오는 왜군들에게 일종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 였었든 것이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병사들은 밤새 화재와 적선의 출몰로 고단해진 새벽녁이 동틀 무렵 신호탄 세발이 울리자 일제히 근접한 1.000여척의 함선들이 삼중의 포위망으로 밀고 들어와서 조선 전함 한척에 왜선 5~6척이 둘러싸고 돛을 눕혀 일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해로가 막혀 포위 된 상황에서 원균이 배를 버리고 춘원포로 육지 상륙을 명령했다. 배설은 원균의 명령을 거부하고 포위망(약 30여척 3.000명 병력 전사)을 뚫어라는 명령을 내린후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이억기와 최호가 전사하자 후퇴 명령을 내려서  서쪽과 반대쪽 동쪽으로 두방향으로 퇴각하게 된다.((실제는 견내량 7척과  5척 대열=탄환이 고갈됨)

 

원균은 권율의 군대가 육상에서 호응할 것으로 믿고 춘원포로 상륙하였으나 권율의 군대가 아니라 왜군들의 매복군에 전멸 당했다(동인들 허위 보고, 배설의 12척이 약 2.000명 그 외 김완 등등의 수천 명의 병사들이 살았고, ( 투입된 병선이 약 200척으로 판옥선 척당 승선인원이 60명 정도였으므로 이들이 추원포까지 길게 육지로 상륙하여 일본의 매복군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살아 남은 병력이 다수 있었고, 배설의 전함 판옥선 40여척과 약 3000명의 병사를 잃었고, 조선수군의 주력 판옥선 190여척 대부분이 소실되였다. 배설의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 승선인원이 2400명은 살아 남았고,

 

판옥선은 60명 정원으로 왜선 5척이 사면을 둘러싸고 200명이 기어 오르면 손을 쓸 수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군은 뒷통수에 칼을 맞아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균은 육지로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  권율이 기획하고 명령을 내린 칠천량 해전은 7월 16일 밤에 왜군들의 연합공격으로 대패합니다.

 

5, 조선왕조실록 《선조 090 30/07/22(신해)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대장이 달아나자 부하들과 수졸들이 모두 육지에 내려 흩어지고 춘원포구에 정박한 조선함대의 모든 빈배들 일본군에 의해 노획, 불타게 되었습니다.

 

 

 

6,((선조실록))

선조 : (김식의 장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수군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으니(궤멸당하였으니) 이제는 어찌할 길이 없다.

대신들이 마땅히 명나라 도독과 안찰의 아문으로 가서 이것을 보고해야 할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등지에는 혹시 남은 배가 있는지! 어찌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나.(좌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선조 : (목소리를 높여서)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이대로 두고 그저 아무 것도 아니할 셈인가! 그래,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랏일도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대신들:모두들 할 말이 없었다.

유성룡(영의정) : 감히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조 : 전부가 엎질러져 버렸다는 것은 천운(天運)이니까 어찌할 수가 없어! 원균은 죽었을망정 어찌 달리 사람이 없겠나. 그저 각 도의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할 뿐이야. 원균은 척후선도 배치하지 않았던가? 왜 한산도로 물러나서 지키지 않았을까?

 

선조는 ‘전선들을 수습해서 속히 수비해야 한다’ 고 했다.

유성룡 : 거의 한산에 가까이 오다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밤 9시쯤 적이 어둠을 타고 몰래 들어와서 갑자기 총포를 쏘고 우리 전함 4척에 불을 질렀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적들이 사면을 서너겹으로 에워쌌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해서 상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적이 먼저 올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은 손을 쓸 도리도 없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선조 : 한산도를 굳게 수비해서 범이 숲 속에 든 형세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너무 명령을 독촉해서 이 같이 패전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늘이 한 일이다. 이제 와서 말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야 있겠는가?

당연히 남은 배들을 수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수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항복(병조판서) :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속히 임명하고 그들을 시켜서 계획을 세우고 방비를 하도록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순신의 복권을 염두에 둔 발언)

 

 

선조 : 그래, 그 말이 옳다! 적의 수가 극히 많다니 애당초 바람에 표류했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고,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 것임이 분명하다. 한산의 형세는 아주 좋은 곳일 뿐더러 바다 길목을 끊어 막아 지키기에 적당한 곳인데, 거기를 내버리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렇게 되었다!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저 놈들이 6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명나라로부터 책봉한다는 문서 한 장을 받으려는 것 때문이겠는가.

 

그리고 또 적선들이 그 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사실인가?

김응남(좌의정) : 그러하옵니다.

김명원(형조판서) : 그것은 모르겠으나, 김식(선전관)의 말을 들으면 왜적들이 우리 배 위로 육박해 올라왔기 때문에 장수와 군졸들이 손 쓸 도리도 없이 모두 죽었다고 하옵니다.

 

 

정광적(좌승지) : 우리 군사는 다만 총 7자루밖에 쏘지 못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선조 : 평수길이 매양 말하기를, 먼저 우리 수군을 깨뜨린 뒤에라야 육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한다더니, 과연 그렇군!

노직(상호군) : 싸움에 병졸들이 겁을 내어 화살 하나 못 쏘았다고 하옵니다.

 

 

선조 :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의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통제사를 임명해서 곧 남은 배들을 거두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독부에 보고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명나라 천자에게 주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항복을 보고) 전군이 몽땅 다 깨졌나? 하지만 도망해서 산 자도 있겠지?

 

이항복 : 바다에서는 설사 패했다 하더라도 도망쳐 살아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좁은 목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황급히 상륙한 것이므로 아마도 전군이 다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선조 : (바다 지도를 꺼내 이항복에게 보이며) 물러나올 때에 미처 견내량까지는 오지 못하고 고성 땅에서 적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패한 것인가? 저리로 갔다면 한산으로 빠져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이리 오다가 그렇게 패했다는 것인가?

 

이항복 : 그러하옵니다.

유성룡 : 만일 한산을 잃어버린다면, 남해는 본래 중요한 길목인데, 그곳을 그만 적이 점령하고 만 것입니다.

선조 : 그럼 영의정(유성룡)은 남해를 걱정하는 것인가?

유성룡 : 어찌 남해만을 걱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조 : 이게 어찌 사람의 계책이 잘못되어서 그리 되었겠는가. 천명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김명원 : 만일 장수를 파견한다면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습니까?(남은 장수는 아순신 뿐)

 

이항복 : 오늘 할 일은 오직 여기(이순신복권 통제사 임명)에 있사옵니다.

선조 : 원균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더군! 남이공의 말을 들으니, 배설도 “비록 군법에 저촉되어 나 혼자 죽을망정 어찌 병졸들을 모두 죽을 땅에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던데......(배설...)

 

아닌 게 아니라 무슨 일이든 그때의 정세를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하는 법이다. 또 요해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것이 제일인데도 도원수(권율)가 원균을 독촉해서 이렇게 되었다!(배설이 옳았다는 심증)

 

 

이항복 : 적이 만약 광양과 순천으로 향하게 된다면 양원 혼자서 수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빨리 이순신을 복권시켜주소)

유성룡 : 명나라 군사도 이제는 믿고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배들을 거두어 강화 등지를 수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이순신 빼서 조센 끝났다)

 

윤두수(판중추부사) : 비록 남은 배가 있다손 치더라도 군졸을 얻기 어려울 테니 일단 통제사는 임명하지 말고 각 도 수령들에게 명령해서 그 고을 군사들을 거두어 모아 각자 제 고장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이순신은 아니다)

 

유성룡 : 혹시 명나라의 산동 수군이 나온다 하더라도,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반드시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명나라 안오니 선조 넌 개털됐다 빨랑 순신임명해라). (진린 도독의 함대가 조선으로 온 것도 이듬해 여름1598년 7월이었다.)

 

선조 : 명나라 군사가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적들이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만 나오면 왜적은 물러갈 거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자, 한가한 이야기나 하고 있어봐야 성패에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어서 대신들은 먼저 도독과 안찰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 수군을 수습하도록 하라. 이것 말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

내 말이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에 늘 우리 수군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이제 이 꼴을 보고 혹시 물러갈 염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항복 :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반드시 경솔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한산도는 적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는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라우도로 물러나서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조 : 글쎄,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제 만일 수군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남쪽 인심은 모두 놀라서 다시 대혼란에 빠져들 텐데, 어쩔 수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답답하다는 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적이 저절로 물러가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유성룡 : 혹시 남해와 진도를 수비하다가 정 안 되면 그 다음에는 근거를 아무데나 두어도 좋을 것이옵니다.

 

선조 : 근자에 모병에 있어 사졸(병력) 지원자가 한명도 없다고 한다.(민심 이반이 심함)

(국정에 임하는 대신들이 오직 이순신의 복직에만 매달려 대책 자체가 없으며 배설이 12척의 병선을 퇴각했음도 철처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선조가 직접 충청 전라에 한척의 전함도 없느냐고 물음에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조는 배설이 도주했다고 보고함에도 배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10, 세계일주를 한 콜럼버스가 놀라 자빠질 배설의 항해기록  

 아메리카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이탈리아의 탐험 항해가[1451년~1506. 5. 20] 'Christopher Columbus'도 놀라 자빠질 일 (국사)120명의 인원으로 12척의 전함을 장장 201킬로 노를 저어 이동은 불가능하다.

                               (사진출처:아고라토론방)

배설은 7월16일~23일 7일간 칠천량해전에 퇴각해서 남해안 일대 장장 약 430Km 백성들을 소개령을 내리고( 201km) 왜군의서해진출을 방어하기위해 작전함  , 배설이 전함 12척을 멸치잡이 하려고 숨겼다 또는 였바꿔먹으려고 하는 것을 이순신이 찾았다,는 것은 거짖말임 당시는 고물상이 없었음, 당시 어마어마한 전함을 숨길 수 없음 (나라를 위해 작전을 하는 배설장군의 전함과 병사들을빼앗고자 허위보고를 하고 이순신을 임명해야 한다고 임명장을 요구함)세계최초의 잠수함 거북선에 디젤엔진이 없었음,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1, 대역죄인 백의종군상태였든 이순신의 등장

권율에의해 [1597.7.23]대역죄인 백의종군 사형수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노량진(鷺梁津)으로 장장 201km를 기적적으로 항해하는 경상우도수군 배설의 12척의  군대의 움직임을 원수부로부터 정보를 받고 배설을 찾아왔습니다.  

 

 

1)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띠운다.  

[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5년간 장악했던 수군 약 5.000명과 전함 약 60척 모두가 이순신의 분신이라고 할 전라좌수사 이억기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서 전멸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최초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권율)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배설의 7일간의 청야작전과 남해안 일대 백성들 소개령을 철처히 비밀로 한 권율과 이순신은 첮 장계에서 배설이 전쟁 공포증이 있고 도주중이라고 선조를 기망하는 장계를 올려 권율과 이항복으로 하여금 자신을 복권 시켜 달라고 하고 있다.)

1. (경상우도수사 배설이 도주중에 있어 통제사로 이순신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장계를 올리고 배설장군이 도주하고 있다는 암시를 조정에 줌)

2.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약 2.000명의 병력이 진지를 구축하고 전함을 수리함을 얼추 보이는 식으로 이래 보고 한 것으로 보임)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배설의 전함이 한산도 수군 본영의 탄환을 다 털어 싫은 상태가 이럴정도임)

3)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권율막하에서 대역죄인 백의종군에서 풀려나서 임명장도 없이 긴급히 1597.7.23일 노량포로 배설을 찾아와서 첫장계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그리고 배설이 패잔병으로 전쟁공포증이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그러나 선조는 배설을 면직시키지 않고 전쟁 끝날때 까지 중용합니다.

 

 

4,) 거북선 12척을 배설이 였바꿔 먹으려했다?

 군대를 접수하기 위해 "배설이 숨겨둔 전함을 찾았다고" 보고 합니다.(1597.7.23) 이미 왕을 둘러싸고 왕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순신은 권율이 막하에 숨겨두고 배설의 전함을 빼앗으라고 보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동인들이 경상우도 수군의 보고를 은폐하고 칠천도 패배를 확대 보고하여 선조를 기망한 것이였습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을 3도 수군절도사로 임명을 8월 3일 허락하면서 품계를 한계급 강등해서 경상우도수사 배설과 동급으로 임명하는 묘수를 부립니다. 이에 이순신(권율)은 후일 선조를 속인 것이 발각 될 것을 우려해서 배설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라 보입니다.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정경운: 孤臺日錄)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멸치잡이 배로 팔아 먹으려 했다는 주장)

 

5) 배설의 귀향과 탈영보고서

이순신과 권율은 8월 30일 배설의 병가를 허가하고  9월 2일 귀향하자 마자 도망했다고(탈영보고) 합니다.   당시 수군수사인 배설과 백의종군 3도 수군절도사도사 이순신은 일계급 강등상태로 품계가 동일한데도 상관행세를 하고,  꼼수로 탈영보고를 해야 할 만큼 배설이 돌아 오지 못하게 합니다.(당시 탈영은 귀대시 군율로 참형당함)


권율과 유성룡은 (선조실록 칠천량해전 보고에서 선조가 아측 남은 배가 한척도 없느냐고 물었는데  한 척도 없이 전멸했다고 허위보를 했습니다. 이로서 배설의 12척군함과 병사를 지휘함이  뽀록날까 누명쒸워 진실을 은폐했던 것입니다.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조선군이 전사하고 남은 빈배)

 

이순선조 30/07/28(정사) / 권율이 진주 목사 나정언의 치보를 보고하고 조정의 처치를 요청하다

 

12, 권율(權慄)이 올린 서장은 다음과 같다.

“진주 목사(晋州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치보에 ‘신 출신(新出身) 정사헌(鄭思憲)과 이맹(李孟) 등이 주사가 궤멸되었다고 진고(進告)한 내용에 의하면

「통제사는 견내량(見乃梁)에서 하륙하였는데 무수한 적의 무리가 추격하였으니 해를 입었음이 분명하고, 전라 우수사·충청 수사·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과 안세희(安世熙),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응표(李應彪), 함평 현감(咸平縣監) 손경지(孫景祉), 별장(別將) 유해(柳海) 등은 혹 피살되었거나 익사하였고 그 나머지도 사망한 자가 부지 기수이다.

 

경상 우수사, 옥포(玉浦)·영등(永登)·안골(安骨)의 만호(萬戶)및 기타 선박 7척이 한산도로 향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권율은 매일 비변사를 통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음, 배설의 12척의 경상우도 병선을 보고하지 않고, 칠천량해전 12일 째인 이날도 각기 도주 한 것으로 보고함) 이순신으로 부터 23일 보고를 받은후 5일이 지난 시점

 

별장급 이상의 여러 장수들이 이와 같이 다수가 죽음을 당했으니 매우 참혹한 일입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의 회송문(回送文)에는 ‘배흥립 등의 생존 여부를 조속히 조사하여 만약 생존자가 있으면 전라 좌·우 수사와 충청 수영의 가장(假將)으로 차정(差定)하여 부임토록 하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사헌의 진고 내용과 같다면 가장으로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고, 양남(兩南)에는 지금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들도 차정하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살아 남은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통제사로 하겠는데 아무도 없으니 이순신을 임명해 달라는 허위보고 배설이 도망한 것은 맞으나 아직은 행방을 모른다고) 

 

사태가 이와 같이 시급한데도 적절하게 처치할 방도를 세울 수 없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정에서 시급히 조치하소서.”(권율은 사실은 이순신의 복권을 원하면서 아무나 살아남은자가 있다면  임명하자고 독촉하고 있다.)

 

 

 

 

 

 

 

 

13, 난중일기 기록 // 7월22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배설을 해병대 사령관 이순신은 백의종군죄인)

 

 8월2일/이 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배설이 전쟁공포증에 걸렸다는 허위보고를 한후 사령장을 기다림) 

 

 8월3일/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사실 선조는 부득히 이순신의 품계를 강등하여 임명하므로 배설과 동급이 됨에도 자신이 상관인 것처럼 비서실장 유성룡의 빽을 믿고 있음)

 

 8월12일/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그들 편에서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8월13일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 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8월17일 /장흥땅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군령과 군권이 배설에게 있어  자신에게 배를 보내지 않음을 말함)

 

 

 8월18일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 대므로 보지 않았다.

 

8월1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 낼 수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전쟁 공포증 걸린 장수가 잘난채 하겠는가, 배설은 이순신이 올린 허위장계를 모르고 있다)

 

 

 8월27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이 아니오 ”라고 하였다.

 

 8월28일 /새벽 여섯시 즘에 적선 8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 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8월30일 /저녁 나절에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속 뜻을 알고는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귀향)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뒷빡치기에 걸려 들었음)

 

9월 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 갔다.(권율에게 탈영보고= 전시 탈영은 군율에 의거 참형임) 

 

9월 15일 '꿈에 신선이 이래하면 이기고 저래하면진다고 현몽을 해줬다'는 기록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승리를 예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이 칠천포 포위망을 뚫고 나오고 명량해협에 진주한 이유를 알게 됐다는 암시이다.

 

 

9월 16일 명량대첩 이순신  '나는 장병들에게 조용히 타일러.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동심하지 말고 진격해 적을 쏘라 하고,' 오예~멋진군함이네요^^12척이니 12.000명 쯤 왜군들 막는것은 어렵지 않아요^^

 

11월3일

 배설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 곳으로 가지 않고(이순신은)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죄가 더 크다.(배설을 데릴러 가려다 그냥 왔다)

 

 

 

이순신의 일기 속에 등장하는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들은 이미 계산되고 계획 된 의도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기록 하였다는 하는 느낌이 든다. 이순신은 배설 장군을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당시 죄인의 신분인 이순신이 기록 한 것을 보면 꼭 경상우도통사 배설장군의 상관처럼 기록 하고 있다.

 

 경상우도통사와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관계는 엄연히 다름에도 유성룡 빽을 믿고, 조정에 "배설장군이 전쟁공포증이 있으니 교체해달라고 하여" 절도사 사령장을 받아서는 사소한 터집으로 배척하고 배설장군이 스스로 떠나게 뒷다마까고 있다. 동인조정은 선조실록을 수정에 수정까지 해가면서 철처히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 한다. 

 

 

1) 이순신은 천운의 정치군인

럭비공 풋볼 튀듯이 백의종군 대죄인이 수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나라걱정이든 배설은 8월 3일 원수부가 보낸 사령장을 무시하고 숙배를 거부한다. 군권을 넘길 수 없다. 이순신은 혀를 내두러면서 아무말도 못한다. 왜냐면 이순신이 지휘하든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함선은 모두 전멸했고 배설의 전함수리에도 한푼도 보태 준게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의 잔병을  배설경상우도수군에 합류하라고 지시하자,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비장한 결의가 담긴 장계를 올렸다. 이와 같이 12척의 전함이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을 뿐 아니라 배설이 도주하여 노량에 이르렀다는 암시를 하고 있음, (8.9)
 

14, 배설의 복권

1604년(선조 37) [선조실록(宣祖實錄)] 6월 25일자에는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기록, 무신으로는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 원균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선조는 재임 중 1605년 배설장군을 선무 원종 1등 공신에 책록함, 임란시의 공적과 함께 그에 대한 모반이라는 죄과에 대해서는 허위임을 입증하였다. 후에 병조 판서로 추종됨,

 

 

15, 배설장군이 해전에 투입된 계기,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왜군들이 부산상륙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도 이순신은 선조가 북쪽으로 토끼든 말든 한산도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왜군 14만이 출병하는 것을 지켜만 볼것 같은 상황에 왜군이 부산항에 상륙해버립니다.

 

부랴 부랴 이순신에게 속은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으로 대체 합니다. 선조와 원균은 배설에게 선봉을 맞기게 됩니다.  해적으로 양성된 왜군의 근접전에 패배합니다. 따라서 이건 아니다. 왜군을 유인해서 심해에서 함포로 작살 내자고 주장하지만, 권율이 이순신이 파직된데 앙심을 품고 원균을 다그쳐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1) 진주성 선산 등지에서 전쟁준비를 해왔고, 섬진강을 주무대로 배설장군은 경상우도 전함 장작귀선 12척의 건조에 사비를 투입했다는 기록도 있고, 나주의 나대용일가에 기술을 가져와서 전함을 건조했습니다.  배설이 양성한 병력이 최정예로 전란중에 충성심이 특별했습니다.

 

 

 

2)배설장군의 귀향(탈영으로 누명쒸움)

 풍신수길을 위해서 살육병기로 파병된 10만 왜군들과 시마즈 요시히로 가토 기요마사의 적진을 통과하고  왜장을 살해하지 않았다.  조선주둔군들에 영향을 끼쳐서 일본에 내전이 촉발 조선 진출 장수들 대부분과 풍신수길 일족이 멸족되었다. 조선야전군사령관이 대살육전을 앞두고 귀향했다.

 

 

3)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이 있음  배설이 사비(진주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 목수들이 장작귀선을 건조했다고 함,

 

 

4)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한 배설장군,(내전을 끝 내다)참고자료:엔하위키미러

배설은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부장 둘만 거느린 상태로 시마즈 요시히로의 본대와 맞닥뜨리나 그대로 강행돌파하여 지나가버리고, 포로로 잡힌 부장에게 사정을 들은 요시히로의 장남은 "'배설의 귀가'라, 훌륭한 무장이다!" 하며 부장을 풀어주고 그대로 고이 보내준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군이 보여준 '시마즈 가의 적본진 돌파'가 사실은 이날 배설의 돌파를 본받은 것이라는 사설이 붙었다.

 

 

16, 누명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주및 역모 모반혐의로 참수

병상에서 칠천포패전 책임에 대한 "月波亭" 이란 시를 남기고, 권율장군의 수하들에 선산땅에서 부친과 아들이 함께 추포되어 역모 모반죄로 부친과 아들은 방면되고  장군은 참수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배설장군의 참수에 경상도관찰사 경상감사 한준겸이 직접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군졸들을 동원 후하게 장례를 지내준다. 한준겸은 조정에서 파직될 것을 알면서 장사를 치르준 후 한준겸은 파직한다.  

 

 

'지평 윤홍이 경상 감사 한준겸과 대동 찰방 정묵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윤홍(尹宖)이 와서 아뢰기를, ‘배설(裵楔)은 방형(邦刑)을 받을 적에는 여정(輿情)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한준겸은 단지 인아(姻婭)라는 것 때문에 사대부의 장산(葬山)을 빼앗고 또 호상(護喪)하는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의 뼈를 완전히 묻도록 하였습니다'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으로 배설을 동인들은 왜적과 동일한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있으므로 당쟁으로 인한 시기 모함과 누명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준겸은?(1557-162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아버지는 판관(判官) 효윤(孝胤)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8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주서·전적 등을 역임했다. (출처:백과사전)

 

 

 

1) 일본을 후덜덜 떨게한 배설장군'조선의 훌륭한 무장 이므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조선 도공 십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조선과 명나라에서 가장 무서워 한 장수가 '시마즈 요시라' 입니다. 이 군대가 진격하면 조선군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악명이 높았는데요

 

배설이 귀향길에 시마즈 요시히라 부자의 목에 칼을 겨누고 사라집니다. 이에 시미즈 요시라는 풍신수길에게 철군 요청서를 보내 거절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철군을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로서 조선 출병 제 16군 보충대의 이에야스 군대의 출병이 차일피일 이순신장군처럼 미루어지죠

 

배설장군에게 하마터면 수장될 뻔한 가토 기요마시와 배설장군에게 목이 달아 날 뻔한 시마즈 요시하라가 풍신수길에게 철군요청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선출병 제16 군 보충대에 철군요청서를 보냅니다 (종군화와 부산 상륙 전에 수장될 것이라는 배설장군 이야기가 붙여지죠) 이에야스가 적극 조선 출병을 거부하여 풍신수길의 수하 미쓰나리와 일본내전이 발발하고 배설장군을 흠모하든 철군파 군대들이 승리 했습니다.

일본의 도쿠가와 나이다이진 이에야스는 일본에 남았던 영주로 조선 시마즈 요시히로등의 영향을 받아 끝내 조선출병을 하지 않았고, 왜군 철군을 적극 주장 히데요시 사후(마에다 도시이에마저 죽자)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됩니다. 결국 철군요청으로 쇄락해진 1599년 풍신수길은 절명합니다.

 

 

1)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ㅡ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ㅡ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絶命詩)

 풍신수길의 절명은 (亀)"ベッセル いたい....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이는 거북선과 경상우도 수군 裵楔이 얼마나 조선침략에 영향을 미친 것,  세키보네, 아다케, 보고, 등등의 자신들 전함 이름대신 지금도 일본에서는 선박회사들 이름이나 바다의 배들을  ベッセル 라고 사용하고 있다.) 당시 왜군 선박의 조선인들이 "배설 잡바라" 고 했다고함,  

 

 

 

17,유문으로 남긴 시조 '월파정' -東西-

묻지마라, 더물어 무럿하리, 강산도 반기는데 일부러 죽였겠느냐?

 

靑山(청산)아,

됴히 있던다

綠水ㅣ(녹수가) 다 반갑다

 

 

無情(무정)한 山水(산수)도

이다지 반갑거든

하물며) 有情(유정)한 님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엊그제 언제런지

이러로

져리 갈 제

 

月波亭(월파정) 발근달애

뉘술을 먹던게고

鎭江(진강)의 휘든는 버들이

어제런가 하여라.

 

 

 

이 시조에 관한 진 동혁 교수의 해설을 들어 본다.

“ 배설은 노래한다. 한때 웅천해전에서 왜선 600여 척을 섬멸하였던 맹장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칠천포(자저 주) 해전에서는 적에게 참패를 당했다. 긴 물속 생활로 온몸은 병이 들었고, 패전의 치욕으로 마음도 스산하다. 여기서 진강이란 섬진강을 말하고 나주의 목수들이 장작귀선을 건조한 곳으로 추정된다.

 

 

동서 화합을 강조한 배설장군

 

패장 배설장군의 유문(遺文)

<석양(夕陽)의 문 밖의 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 졌다>

 

-東西-

夕陽之門

路東西

兩家之好

萬福之源

 

<동서 화합만이 나라의 부흥의 근원이다>

동서 양가(兩家之好 萬福之源)이라는 글귀이다.

현재도 이 글귀는 종손 가의 보관된 혼함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인과 서인이 화합하여야 국가에 만복이 온다는 뜻으로 해석 한다. 패장으로서 한편의 시조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극심한 당쟁을 빗대어 쓴 시구이다.

 

 

7, 칠천량해전의 영웅 배즙(裵 楫)처절한 전사,

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꽃다운 35세로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왜군의 삼중포위망을 뚫다가 전사(배설장군의 동생)

 

 

배 즙(裵 楫) 1564년(명종19)에 태어남.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으로 배덕문의 3남이다.

공은 기국이 넓고 뛰어났으며 용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풍을 몸에 익혔으며 학문에 전념하여 경서와 사기에 통달 하였다.

1590년(선조23)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습독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말하기를 "지방 고을에서 이와 같이 빼어난 인걸이 배출되리라고는 미쳐 생각지도 못했다".라고 했으며 다시 사직(司直)에 제수 되었다.

 

 

8, 임진왜란

선조  임금은 무조건 도망, 백성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고, 백성들이 적 치하에 고통받는다 이런 개념이 없었지요. 그러니 적치하에 부역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고, 왜군은 전공을 세우려 목도베고 코도베고 귀도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내서 훈장먹고자 합니다. 선조는 도망에 있어 달인이고 로간 뺨칩니다. 도망에 달인이였습니다. 

 

 

도망자 도망정권답게 은폐에 선수이고 비열하게 위험인물을을 숙청하지요, 뻑하면 백성들 부역자로 몰아서 효수하고  엄청 센 군율로  참수합니다. 명나라 군들은 외국 여행온 점령군 행세 하면서 얘들도 목가지 확보경쟁을 합니다. 관군들도 포상 전공을 다투고 허위보고를 많이들 합니다.

 

 

9, 정유재란 1597년 3월 1일 (음1월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망다니는 조선 왕을 잡지 못하자 항복 받기 위해  충청,전라,경상도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살육한 후 일본 서도의 주민들을 이주하여 살게 하라는  명령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의 가장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18, 배설장군에 대한 자료

 




 



강강술래,월파군은 원수들 목을 자르다.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장군 [1]


 


칠천포해전의 영웅 배즙


 




 


 

 


배즙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임진왜란 [9]

 


 

 

 

 

월파정月波亭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것과 같았다.

(출처 케이넨의 일기)[ 일본 규슈의 우스키성 성주의 의무관]

 

 

19, 예수가 12제자가 있었다면,  12척의 전함이 조선을 살렸습니다.

20, 7일의 기적, 칠천량해전을 수습하고 430km를 백성들을 살리려 대피시킵니다. 

21, 악명 높은 왜장들을 단기필마로 제앞해서 철군으로 일본 내전을 촉발시킵니다.

22,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으로 왔을 때, 그를 품고 단신 쿠데타를 포용했습니다.

 

 

출처: 선조실록, 고도일지, 난중일기,백과사전, 블로그게시판, 아고라, 지식인, 일본측자료, 기타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출처: 조선전역해전도 칠천량해전 경상우도수군 전투 )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남겼다” 라는 기록외 다수의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이순신이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다름)

 

 

거북선 (粧作龜船)

일명:거북선으로 알려져 일본군들을 벌벌 떨게한 대형전함으로 승선이원이 약200명에 이르는 조선 명나라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함으로 '조선전역해전'도 그림처럼 통일된 거북선 문양이 대거 설치되어 있고, 날카로운 킬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보기만해도 공포심을 조장함, 당시 명나라 일본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우리나라 주력함대인 판옥선과 동일하게 약 5~60명선이였고 크기도 비슷하였음, 최근 12척의 병선이 120명으로 201킬로를 항해한 것이 불가사의하여 당시 디젤엔진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철갑선에다 잠수함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 명량일대에 해저 탐사를 현재도 계속하고 있음(학계와 문화계)

 

거북선 (粧作龜船) 심볼 요즘 CI과 동일함 420년전에 브랜드를 가진 전함이라 믿으지지 않음,

거북선 (粧作龜船)방패

 

 

 

 

 

3, 왜군의 투입규모와 날짜, (임란과 정명가도는 생략)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の海戦に対して本格的に論ずるのに先立って日本水軍の規模を把握して見る事にする.

壬辰の乱(文禄の役) 当時派兵された日本軍の規模は陸軍 15万名余水軍 9200人だ多くの日本資料で紹介するある.

 

 

倭軍を編成

1582年の本能寺の変で織田信長(1534-82)が倒れた後、倭国の支配者となった豊臣秀吉(1536-98)は、次なる目標とし て「明」の征服を決意。十分な海軍力を持たない秀吉は、1586年から 2000隻の船の建造を始めました。1587年には朝鮮軍の強さを測るため、26隻からなる襲撃部隊を朝鮮南岸に派遣し、朝鮮軍は問題にならないと結論づ けていましたが、朝鮮半島を通り陸路「明」に侵攻する計画を立て、そのために李氏朝鮮を倭国に服属させる交渉を側近の小西行長(?-1600)と対馬の宗 義智(1568-1615)に命令。当時、「明」の冊封体制下にあった朝鮮との交渉が決裂すると、1591/8月に秀吉は「唐入り」を宣言し、一番隊から 九番隊までの9軍団総勢15万8000人からなる朝鮮出兵の軍勢を編成し、大阪城から名護屋城(現・佐賀県唐津市鎮西町名護屋)の前線司令部に旧暦 4/25に出ばりました。

 

 

倭軍을 편성

1582년의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1534-82)가 넘어진 후, 야마토국의 지배자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98)는, 다음의 목표로서「명」의 정복을 결의, 

 이미 히데요시는, 1586년부터 2,000척의 배의 건조를 시작 1587년에는 조선군의 힘을 측정하기 위해, 26척으로 구성된 습격 부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조선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 을 내었다. (文禄の役)을 준비하기 위해 병력,병참수송을 위해서 2000척의 배를 준비했다

 

 한반도를 통해 육로로「명」에 침공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위해 조선을 야마토국에 복속시키는 교섭을 측근의 고니시유키나가(?-1600)와 대마도의 宗 義智(1568-1615)에 명령.당시 , 「명」의 책봉 체제하에 있던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하면, 1591/8월에 히데요시는「당방문」을 선언해, 제일 대로부터 9번대까지의 9 군단 총원 15만 8000명 정도의 한국 출병의 군세를 편성해, 오사카성으로부터 나고야성(현・사가현 카라츠시 친제이쵸 나고야)의 전선 사령부에 음력4/25에 출했다.

 

 

임진왜란 직전 다시 선박 건조 명령이 추가로 하달된다.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

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軍隊輸送のため天正19年(1591)正月20日諸国に船舶の準備を命じた。その内容は

 1.東は常陸より南海を経て四国,九州に至る海に沿うた国々,北は秋田酒田より中国に至る,その国の高10万石について大船2艘ずつ用意すべきこと。

 2.水手は浦々の家100軒について10人ずつ出させその手その手の大船に用い,若し余りの水手があれば大阪に来るべきこと

 3.直轄地は高10万石について大船3艘,中船5艘ずつ作るべきこと。

군대 수송을 위해 덴쇼(연호) 19년(1591) 정월 20일 제국에 선박의 준비를 명했다.그 내용은

 1.동쪽은 히타치에서 남해를 거쳐 시코쿠, 큐슈에 이르는 바다에 연해 있는 나라들, 북쪽은 아키타 사카타에서 중국에 이르는, 그 나라의 10만석당 큰 배 2척씩 준비 해야 할것.

 2.뱃사공은 포구의 집 100채당 10명씩 내게 한다. 그 손 그 손의 큰 배를 이용한다.약간 남는 뱃사공이 있으면 오사카에 와야 할 일

 3.직할지는 10만석당 큰 배 3척, 중선 5척씩 만들어야 할 일.

 

 대선은 널리 알려진 安宅船이다.

1586년 2.000척의 선박과 별도로 100척 이상씩의 安宅船과 関船이 준비되었다.

ここで言う大船は広く知られた 安宅船だ.

1586年 2000艘の船舶と別に 100艘以上ずつの 安宅船と 関船が用意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別冊歴史読本『海の戦国史』「李舜臣率いる無敵の李朝水軍」(小林則子)八十九頁より、秀吉水軍の編成について。典拠は示されてない。

舟手の編成は、次のように十将のもとに合計一万二百人であった。

 

九鬼嘉隆 千五百人

藤堂高虎 二千人

脇坂安治 千五百人

加藤嘉明 七百五十人

来島兄弟(通総·通之) 七百人

 

これら主力の五人に加えて、

菅野正影(菅の正陰) 二百五十人

桑山重勝 壱千人

桑山小伝次 壱千人

堀内氏善 八百五十人

若杉伝三郎 六百五十人

 

前記には「菅野正影(菅ノ正陰)二百五十人」とあるのは、『天正記』には父菅平右衛門達長の名が記されている。また合計人数が次の『天正記』より千人多い のは、桑山重勝·桑山小伝次が夫々千名計二千の兵力とされているが、『天正記』では、桑山藤太·桑山小伝次の二人で千名とされているため。

전기에는「칸노 마사카게 2백오십인」이라고 있는 것은, 「덴쇼기」에는 父菅平右衛門達長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또 합계 인원수가 다음의「덴쇼기」보다 천명 많은 것은, 쿠와노야마중승·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이 각각천명계 2천의 병력으로 되어 있지만, 「덴쇼기」에서는, 쿠와노야마등태·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의 둘이서 천명으로 되어 있다.

『天正記』に記載されたように、淡路岩屋を基地とする菅水軍は菅平右衛門が統率者であった。「田中論文」によれば、文禄元年(1592)七月十七日付と推定される次の秀吉朱印状により、菅平右衛門と子息の和泉·若狭·権之佐の四名は、警固船奉行に任命された。

「덴쇼기」에 기재된 것처럼, 淡路岩屋을 기지로 하는 관수군은 스가다이라 우에몬이 통솔자였다.「타나카 논문」에 의하면, 문녹원년(1592) 7월 17 일자로 추정되는 다음의 히데요시 주인장에 의해, 스가다이라 우에몬과 자식 이즈미·와카사·권지좌의 4명은, 경고선봉행에 임명되었다.

 

 

4, 일본 정규 전함을 운용하는 수군의 규모가 9.000여명이였다.(웅천전투에는 육상병력이 10만명 포함 11만명이 해전에 유사시 투입가능했다.) 小田原의 반란에는 20.000여명의 히데요시의 수군이 참전하고 있다. 일본 내전에서도 20.000명 이상의 수군(북조군 제외)이 투입되었고, 2.000척의 선박을 운용 2000척이 모두 関船이라고 가정하면 2000*50 = 10.0000 십만명의 병력이 필요하게 된다.

日本の研究者たちは日本水軍の規模が 9000人余りだ粘り強く主張するあり韓国の一部学者もここに同調するようにする.

小田原の反乱には 20000人余りの秀吉の水軍が参戦するある..

日本内戦でも 20000人以上の水軍이 投入されたが 10000人の水軍が投入されたということは変ではないか?

2000艘の船舶を運用しようとすれば何人の水軍が必要だか?

2000艘が皆 関船船だと仮定すれば 2000*50 = 100000 おおよそ十万人の兵力が必要になる.

2000艘の船舶が皆動員されたと思うことができないので一応詳しいことは後に延ばしたところで.

 

 

小田原의 반란에 동원된 일본 수군

小田原の反乱に動員された日本水軍

 

九鬼嘉隆(志摩・鳥羽城主) 一千五百

加藤嘉明(淡路・知志城主) 六百

菅 達長(淡路・客将) 二百三十

脇坂安治(淡路・洲本城主) 一千三百

来島通総(伊代・来島城主) 五百

長宗我部元親(土佐・岡豊城主) 二千五百

羽柴秀長(大和・郡山城主) 一千五百

宇喜多秀家(備前・岡山城主) 一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의 병력이 임진왜란에 제외되어 있다.

毛利輝元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자.

以上のリストをよく見れば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の水軍兵力が壬辰の乱に除かれるある.

毛利輝元に対して少しよく見る移ろう.

 

毛利輝元

文禄元年(1592年)から始まる秀吉の2度の朝鮮出兵にも、主力軍として兵3万を派遣した。これらの功績から慶長2年(1597年)、秀吉より五大老に任じられた。慶長3年(1598年)8月、豊臣秀吉死去の際、臨終間近の秀吉に、遺児の豊臣秀頼の補佐を託された。

모리 데루모토/ 문녹원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히데요시의 2차례의 한국 출병에도, 주력군으로서 군사 3만을 파견했다.이러한 공적으로부터 게이쵸 2년(1597년), 히데요시로 부터 오대로에 임명되었다.게이쵸 3년(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때, 임종 직전의 히데요시에, 유아의 토요토미히데요리의 보좌를 맡게 되었다.

 

毛利水軍

天正20年(1592年)から始まる、文禄・慶長の役でも、毛利水軍は朝鮮へ渡海するために主力として駆り出され、九鬼水軍や来島村上水 軍、塩飽水軍を主力とする豊臣水軍や、坊津水軍を主力とする島津水軍とともに、兵站や海上輸送を担い、李舜臣らの朝鮮水軍と海戦を行った。

모우리수군/덴쇼(연호) 20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문녹・게이쵸의 역에서도, 모우리수군은 조선에 항해하기 위해서 주력으로 해 끌려가 쿠키수군이来島村上수군, 염포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도요토미수군이나, 방진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시마즈수군과 함께, 병참이나 해상운송을 담당하고, 이순신등의 조선수군과 해전을 실시했다.

 

毛利水軍이 임진왜란에 투입된 경과를 설명하는 글에서 여러 수군이 나열되고 있지만 島津水軍의 존재가 새롭게 등장한다.

毛利水軍が壬辰の乱に投入された頃とを説明する文で多くの水軍が羅列されるあるが 島津水軍の存在が新しく登場する.

 

 

 3차례에 나누어 일본의 병력이 상륙하게 된다.

朝鮮を侵攻するために何艘の船が動員されただろうか?

大きく 3回に分ける日本の兵力が上陸するようになる.

 

4月12日    4月1日に小西行長・宗義智率いる第一陣が朝鮮半島へ出兵したのを皮切りに、名護屋を出発した諸隊は壱岐・対馬を経て、釜山浦に上陸。

4月 17日     加藤清正・鍋島直茂・相良頼房の第二軍、釜山浦に上陸。黒田長政・大友吉統の第三軍、毛利吉成等の第四軍、四月十二日、名護屋を出発し、一番隊から四日遅れて四月十七日に朝鮮釜山浦(プサンポ)に上陸

4月27日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等、船団七百艘にて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4월 12일    4월 1일에 고니시유키나가・교의지가 인솔하는 제일진이 한반도에 출병한 것을 시작으로, 나고야를 출발한 제대는 이키・대마도를 거치고, 부산포에 상륙.

4월 17일     가토 기요마사・鍋島直茂・相良頼房의 제2군, 부산포에 상륙.쿠로다 나가마사・오오토모 요시무네의 제3군, 모우리 요시나리등의 제4군, 4월 12일, 나고야를 출발해, 제일 대로부터 4일 지각해 4월 17일에 조선 부산포에 상륙

4월 27 일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등 , 선단 7백척으로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

 

 

 

3차례의 일본군 상륙을 분석,

첫번째  小西行長의 1군이 4월1일 출발 12일에 상륙

두번째  2,3,4군 4월12일 名護屋출발 17일 상륙

세번째  나머지 군이 4월12일 名護屋출발 27일 상륙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日本軍上陸を分析して見れば

一番目 小西行長の 1軍が 4月1日出発 12日に上陸

二番目 2,3,4軍 4月12日 名護屋出発 17日上陸

三番目残り軍が 4月12日 名護屋出発 27日上陸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일본군의 부산상륙은 병력 수송선이 부산과 名護屋를 왕복하면서 수송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선박을 이용 상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각에 동원된 선박은 500척 이상의 규모였으므로 최하 1,500여척으로 이에 동원된 수군은 최하 5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いじめなので,日本軍の釜山上陸は兵力輸送船が釜山と 名護屋を往復しながら輸送したのではないそれぞれ他の船舶を載せる上陸したことを分かる. それぞれに動員された船舶は 500尺以上の規模だったから最下 1500余隻でここに動員された水軍は最下 50,000人にのぼることで推算される.

 

 

 

일본의 정예 수군은 3차례의 상륙중에서 3번째로 부산포에 접안한다.

이때 동원된 수군이 10,000여명이며 1차와 2차에 동원 되었던 수군과는 별개이다.

水軍総督은 九鬼嘉隆였다.

日本の精鋭水軍は 3回の上陸の中で 3番目に釜山浦に接岸する.

この時動員された水軍が 10000人余りで 1次と 2次に動員された水軍とは別個だ.

水軍総督は 九鬼嘉隆だった.

 

 

 

九鬼嘉隆

秀吉の朝鮮出兵に際し、水軍総督の命を賜り、金団扇および茜の吹貫(ふきぬき)に金瓢箪の馬印を賜る。

 大小の船数515艘と艘帥1500余人(『浅野家文書』によれば1000人)を率いて肥州名護屋(佐賀県)に赴き、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구키 요시타카

히데요시의 한국 출병에 즈음해, 수군총독으로 명을 받아, 금 부채 및 천의 취관(비단나무)에 금 표주박의 馬印을 받는다.

 

대소의 선 515척과 副將 1,500 여이명(「아사노가 문서」에 의하면 1,000명)을 인솔해 히슈 나고야(사가현)로 향해 가,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참조, 일본 달력과 조선 달력이 다름으로 날짜차이가 있음) [출처:天正記]아고라

거북선 (粧作龜船) 조선군들이 사방 에워싼 왜군들에게 살육당하는장면,

거북선 (粧作龜船) 조선수군 판옥선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  거북선에 승선한 사람은 보이지 않으나 판옥선들은 백병전을 하고 있음,

 

판옥선은 임진왜란중 각 해전에서 일본의 수군과 대등한 조선의 주력함대 였다.  옥포해전,당포해전,한산해전,부산해전 등 주요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이었다. 그때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底板) 길이 50~55척, 탑승인원 60명정도 였다. 후에 점점 규모가 크지는 경향을 보였다. 칠천량해전에 동원된 조선 수군 약 200척은 전함당 약 50명이 탑승한 것으로 전체 병력 약 1만명이 투입되었다.   약 12~척의 장작귀선(거북선)이 투입되었고 승선 인원은 척당 약 200여명으로 상당히 규모가 큰 전함이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 다시 선박 건조 명령이 추가로 하달된다.

壬辰の乱(文禄の役)を準備するために兵力,兵站輸送のために 2000艘の船を準備したと言う.

2000艘の船が皆建造したかはわからないが不足さがあったのか壬辰の乱直前また船舶建造命令が下逹される.

 

軍隊輸送のため天正19年(1591)正月20日諸国に船舶の準備を命じた。その内容は

 1.東は常陸より南海を経て四国,九州に至る海に沿うた国々,北は秋田酒田より中国に至る,その国の高10万石について大船2艘ずつ用意すべきこと。

 2.水手は浦々の家100軒について10人ずつ出させその手その手の大船に用い,若し余りの水手があれば大阪に来るべきこと

 3.直轄地は高10万石について大船3艘,中船5艘ずつ作るべきこと。

군대 수송을 위해 덴쇼(연호) 19년(1591) 정월 20일 제국에 선박의 준비를 명했다.그 내용은

 1.동쪽은 히타치에서 남해를 거쳐 시코쿠, 큐슈에 이르는 바다에 연해 있는 나라들, 북쪽은 아키타 사카타에서 중국에 이르는, 그 나라의 10만석당 큰 배 2척씩 준비 해야 할것.

 2.뱃사공은 포구의 집 100채당 10명씩 내게 한다. 그 손 그 손의 큰 배를 이용한다.약간 남는 뱃사공이 있으면 오사카에 와야 할 일

 3.직할지는 10만석당 큰 배 3척, 중선 5척씩 만들어야 할 일.

 

 대선은 널리 알려진 安宅船이다.

1586년 2.000척의 선박과 별도로 100척 이상씩의 安宅船과 関船이 준비되었다.

ここで言う大船は広く知られた 安宅船だ.

1586年 2000艘の船舶と別に 100艘以上ずつの 安宅船と 関船が用意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別冊歴史読本『海の戦国史』「李舜臣率いる無敵の李朝水軍」(小林則子)八十九頁より、秀吉水軍の編成について。典拠は示されてない。

舟手の編成は、次のように十将のもとに合計一万二百人であった。

 

九鬼嘉隆 千五百人

藤堂高虎 二千人

脇坂安治 千五百人

加藤嘉明 七百五十人

来島兄弟(通総·通之) 七百人

 

これら主力の五人に加えて、

菅野正影(菅の正陰) 二百五十人

桑山重勝 壱千人

桑山小伝次 壱千人

堀内氏善 八百五十人

若杉伝三郎 六百五十人

 

前記には「菅野正影(菅ノ正陰)二百五十人」とあるのは、『天正記』には父菅平右衛門達長の名が記されている。また合計人数が次の『天正記』より千人多い のは、桑山重勝·桑山小伝次が夫々千名計二千の兵力とされているが、『天正記』では、桑山藤太·桑山小伝次の二人で千名とされているため。

전기에는「칸노 마사카게 2백오십인」이라고 있는 것은, 「덴쇼기」에는 父菅平右衛門達長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또 합계 인원수가 다음의「덴쇼기」보다 천명 많은 것은, 쿠와노야마중승·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이 각각천명계 2천의 병력으로 되어 있지만, 「덴쇼기」에서는, 쿠와노야마등태·쿠와노야마 소전다음의 둘이서 천명으로 되어 있다.

『天正記』に記載されたように、淡路岩屋を基地とする菅水軍は菅平右衛門が統率者であった。「田中論文」によれば、文禄元年(1592)七月十七日付と推定される次の秀吉朱印状により、菅平右衛門と子息の和泉·若狭·権之佐の四名は、警固船奉行に任命された。

「덴쇼기」에 기재된 것처럼, 淡路岩屋을 기지로 하는 관수군은 스가다이라 우에몬이 통솔자였다.「타나카 논문」에 의하면, 문녹원년(1592) 7월 17 일자로 추정되는 다음의 히데요시 주인장에 의해, 스가다이라 우에몬과 자식 이즈미·와카사·권지좌의 4명은, 경고선봉행에 임명되었다.

 

 

4, 일본 정규 전함을 운용하는 수군의 규모가 9.000여명이였다.(웅천전투에는 육상병력이 10만명 포함 11만명이 해전에 유사시 투입가능했다.) 小田原의 반란에는 20.000여명의 히데요시의 수군이 참전하고 있다. 일본 내전에서도 20.000명 이상의 수군(북조군 제외)이 투입되었고, 2.000척의 선박을 운용 2000척이 모두 関船이라고 가정하면 2000*50 = 10.0000 십만명의 병력이 필요하게 된다.

日本の研究者たちは日本水軍の規模が 9000人余りだ粘り強く主張するあり韓国の一部学者もここに同調するようにする.

小田原の反乱には 20000人余りの秀吉の水軍が参戦するある..

日本内戦でも 20000人以上の水軍이 投入されたが 10000人の水軍が投入されたということは変ではないか?

2000艘の船舶を運用しようとすれば何人の水軍が必要だか?

2000艘が皆 関船船だと仮定すれば 2000*50 = 100000 おおよそ十万人の兵力が必要になる.

2000艘の船舶が皆動員されたと思うことができないので一応詳しいことは後に延ばしたところで.

 

 

小田原의 반란에 동원된 일본 수군

小田原の反乱に動員された日本水軍

 

九鬼嘉隆(志摩・鳥羽城主) 一千五百

加藤嘉明(淡路・知志城主) 六百

菅 達長(淡路・客将) 二百三十

脇坂安治(淡路・洲本城主) 一千三百

来島通総(伊代・来島城主) 五百

長宗我部元親(土佐・岡豊城主) 二千五百

羽柴秀長(大和・郡山城主) 一千五百

宇喜多秀家(備前・岡山城主) 一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의 병력이 임진왜란에 제외되어 있다.

毛利輝元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고 넘어가자.

以上のリストをよく見れば 毛利輝元(安芸・吉田城主) 五千の水軍兵力が壬辰の乱に除かれるある.

毛利輝元に対して少しよく見る移ろう.

 

毛利輝元

文禄元年(1592年)から始まる秀吉の2度の朝鮮出兵にも、主力軍として兵3万を派遣した。これらの功績から慶長2年(1597年)、秀吉より五大老に任じられた。慶長3年(1598年)8月、豊臣秀吉死去の際、臨終間近の秀吉に、遺児の豊臣秀頼の補佐を託された。

모리 데루모토/ 문녹원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히데요시의 2차례의 한국 출병에도, 주력군으로서 군사 3만을 파견했다.이러한 공적으로부터 게이쵸 2년(1597년), 히데요시로 부터 오대로에 임명되었다.게이쵸 3년(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때, 임종 직전의 히데요시에, 유아의 토요토미히데요리의 보좌를 맡게 되었다.

 

毛利水軍

天正20年(1592年)から始まる、文禄・慶長の役でも、毛利水軍は朝鮮へ渡海するために主力として駆り出され、九鬼水軍や来島村上水 軍、塩飽水軍を主力とする豊臣水軍や、坊津水軍を主力とする島津水軍とともに、兵站や海上輸送を担い、李舜臣らの朝鮮水軍と海戦を行った。

모우리수군/덴쇼(연호) 20년(1592년)부터 시작되는, 문녹・게이쵸의 역에서도, 모우리수군은 조선에 항해하기 위해서 주력으로 해 끌려가 쿠키수군이来島村上수군, 염포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도요토미수군이나, 방진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시마즈수군과 함께, 병참이나 해상운송을 담당하고, 이순신등의 조선수군과 해전을 실시했다.

 

毛利水軍이 임진왜란에 투입된 경과를 설명하는 글에서 여러 수군이 나열되고 있지만 島津水軍의 존재가 새롭게 등장한다.

毛利水軍が壬辰の乱に投入された頃とを説明する文で多くの水軍が羅列されるあるが 島津水軍の存在が新しく登場する.

 

 

 3차례에 나누어 일본의 병력이 상륙하게 된다.

朝鮮を侵攻するために何艘の船が動員されただろうか?

大きく 3回に分ける日本の兵力が上陸するようになる.

 

4月12日    4月1日に小西行長・宗義智率いる第一陣が朝鮮半島へ出兵したのを皮切りに、名護屋を出発した諸隊は壱岐・対馬を経て、釜山浦に上陸。

4月 17日     加藤清正・鍋島直茂・相良頼房の第二軍、釜山浦に上陸。黒田長政・大友吉統の第三軍、毛利吉成等の第四軍、四月十二日、名護屋を出発し、一番隊から四日遅れて四月十七日に朝鮮釜山浦(プサンポ)に上陸

4月27日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等、船団七百艘にて4月12日に肥州浦を出航、4月27日に朝鮮半島南端釜山(ぷさん)に入港。

4월 12일    4월 1일에 고니시유키나가・교의지가 인솔하는 제일진이 한반도에 출병한 것을 시작으로, 나고야를 출발한 제대는 이키・대마도를 거치고, 부산포에 상륙.

4월 17일     가토 기요마사・鍋島直茂・相良頼房의 제2군, 부산포에 상륙.쿠로다 나가마사・오오토모 요시무네의 제3군, 모우리 요시나리등의 제4군, 4월 12일, 나고야를 출발해, 제일 대로부터 4일 지각해 4월 17일에 조선 부산포에 상륙

4월 27 일  加藤嘉明・脇坂安治・桑山重勝・藤堂高虎등 , 선단 7백척으로  4월 12일에 히슈포를 출항, 4월 27일에 한반도 남단 부산에 입항.

 

 

 

3차례의 일본군 상륙을 분석,

첫번째  小西行長의 1군이 4월1일 출발 12일에 상륙

두번째  2,3,4군 4월12일 名護屋출발 17일 상륙

세번째  나머지 군이 4월12일 名護屋출발 27일 상륙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日本軍上陸を分析して見れば

一番目 小西行長の 1軍が 4月1日出発 12日に上陸

二番目 2,3,4軍 4月12日 名護屋出発 17日上陸

三番目残り軍が 4月12日 名護屋出発 27日上陸し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일본군의 부산상륙은 병력 수송선이 부산과 名護屋를 왕복하면서 수송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선박을 이용 상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각에 동원된 선박은 500척 이상의 규모였으므로 최하 1,500여척으로 이에 동원된 수군은 최하 5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いじめなので,日本軍の釜山上陸は兵力輸送船が釜山と 名護屋を往復しながら輸送したのではないそれぞれ他の船舶を載せる上陸したことを分かる. それぞれに動員された船舶は 500尺以上の規模だったから最下 1500余隻でここに動員された水軍は最下 50,000人にのぼることで推算される.(marichnn님의 블로그)

 

 

 

 

 

 

 

세키부네(일본어: 関船)는 아타케부네보다 작은 중형의 전투함이며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주력 전투 함선이다. 이를 관선으로 부르는데, 관선(세끼부네)은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군선(보통 노수가 40개 이상)으로서 요즈음의 순양함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 대체적인 크기는 배 길이 기준 36~69.5척 정도였는데 임란 당시에는 대략 36척 정도였다.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앞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선수재가 특징이고, 보통 노는 30~60개 정도로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하나씩 젓는 그다지 큰 배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선들은 대개 조선 군선보다 크기가 비슷했고, 이에 조선 수군이 매우 불리 했다. 때문에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기간중에 세키부네의 규모가 커져서 조선 조정에서 걱정하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정유재란 때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에 비해 장작귀선은 장작으로 된 단단한 상자 안에 격군과 전투원(사부를 제외한 포병)들을 몰아넣어 보호하는 것이 중요한 키포인트였다. 일본도 이러 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전시라 급조 하기 어려웠다. [출처백과사전]

 

 

거북선 "ベッセル

 

 

배설 경상 우수사 신재공 (愼齋公) 배 설(裵楔) 1551년(명종 6)∼1599(선조 32). 배설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1, 의병장인 부친을 따라 군공을 세웠고,  

합천, 진주 등 여러 고을의 수장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시에는 두 차례의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별시무과에 급제해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선조임금의 차출로 원균 부대의 최고 선봉에 투입된 장수 였으나, 왜군들이 장거리 침략인 부산항에 상륙하기 전에(수심이 깊은 곳) 격멸해야 한다는 작전을 주장했으나 끝내 조정(원수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

 

 

2, 무관으로 입신,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 임진년(선조 25년) 4월 14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남정(南征)하다, 조경이 황간·추풍에서 패하자 향병을 규합, 왜적과 대항하였다. 곧 합천군수가 되었고, 부산첨사, 진주목사, 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았다.

 

1597년 다시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8일 부산에 정박 중이던 왜적선 600여 척이 웅천을 거쳐 가덕도로 향하려 하자,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 본영에서 배설에게 선봉을 세워 약 50여 척과 병사 약5,000명 으로 약 600여척의 적함과 수 만명의 적들을 공격하였다. 조선해역 전도는 이 전투장면으로 확인되고 있다.(플래툰)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왜진)

1592년4월13일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침략을 막고자 조경의 군대가 추풍령방어전에서 패배하자 추풍령을 근거지로 설(배설)은 추풍령 김천일대에서 향병을 모아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3일 한양이 점령되고 왕이 북쪽으로 정처없이 몽진하므로 나라의 주인이 없는 외적치하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배설은 계속 저항했는데, (왜장이 묻기를 '김천 들녁에 밤 만되면 들판에 무수한 횃불이 보이는데 무엇이냐고 묻자, 설(배설)이 부하들을 훈련하고 부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첩자가 말해주니 왜장 모리 테루모토가 이미 나라가 없어졌는데 무슨 부대가 필요하냐고 웃었다는 것으로 모리 테루모토는 침략군중에 가장  대규모의 부대를 파견하고 일본군 측에 가장 높은 장수 임에도 왜란 이후 모든 영지를 몰수 당하고 평민으로 강등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패잔병들이 몰려 들어 7월에는 기병 약 1500명의 부대가 적치하(성주)에서 저항 수위를 높여 나가는 중에 7월 7일 하시바 히데카츠(구로다 요시타카)일행이 한양행차 중에 수차례의 접전을 벌여 부상진에서 구로다 요시타카의 하도1점을 빼았으며 구로다 구침을 척살하고 그 수급을 베고 하시바 히데카츠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중상을 입혔고, (약 20여명의 왜장을 척살했다는 주장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200여명 이상 전사하였다)

하시바 히데카츠가 서울행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배씨 종문이 보관하고 있는 세루 장군이 하시바 히데카츠(표주막 문양의 황금부채)를 빼앗고 갈비뼈 하나를 획득 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의 (下刀)와  동생 구로다 분신을 척살하고 획득한 구로다 가문의 칼 두 점, 



1차 진주성 전투(출처:명량 왜곡과 진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로 쪽으로 가고 하시바 히데카츠는 남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설의부대가 계속 추격하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서울에 도착하여 북상한 군대들을 '세루'를 추격하게 하는데 공식 기록에  9월 26일 북상한 일본군 선봉대를 남하시켜 의병을 소탕(배설을 추격)하게 하였다.


북진한 서울의 군대가 진주성까지 추격하고 김면(배설)의 군대가 부상한 하시바 히데카츠를 쫒는 과정에서 10월 3일경 창원부근에 이러른 가고시마 군대와 5일 경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군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대장과  모리 테루모토 휘하의 왜군은 진주성 부근에 대치하게 되고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주성 1차 전투는 경상우병사 유숭인 사천현감 등등 경남 관군들까지 가세하여 진주성 동문 밖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일본군이 분대규모의 병력이 대문짝같은 것들로 방패를 쌈아 접근 한 후 조총을 쏘앗기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상 남도의 병력과 장수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10월 6일 모두 전멸하였다.

유숭인 장군은 경상우병사로 촉망받아서 곧 판서(장관)나 영의증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유망한 장군으로 일본군 침략으로 휘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진주성에(조총이 새잡는 총이 아니라는 사실:군사적 지식제공) 합류하고자 했으나 김시민이 거부했다. 당시는 부하가 없는 장수는 지휘권이 없었는데 원균이 배가   몇척 없다고 설움 받았듯이 유숭인도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김시민은 냉정하게 성아래서 유숭인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식량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진주성은 외롭게 적에 포위되어 농성에 들어 갔으나, 당시 진주성에 책임자가 없어 김성일이 김시민을 임시로 진주 목사로 임명했기에 김시민은 자신에 상관들인 경상 남도 수령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주성 안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적에게 포위 된다면 위험해서 동문쪽에서 외곽 전투를 하게 되었다.   




김면이 경상의병대장에 임명되어 설(배설)은 김면휘하의 의병으로 분류되었으나 독자적으로 도깨비방패를 갖춘 기병으로 하시바 히데카츠부대를 추격하는 과정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심에 있었든 인물이다. 진주성 전투 당시는 임시 합천군수로 정인홍의 의병과 함께 했는데, 정인홍이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문중에서 알려져있다.



진주 외곽전투에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배설 장군의 아들 등암)의 응원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모든 경상우도 지역을 보존하였고, 일본 침략군이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부상진 전투와 지례전투 개산진 전투에 성주성을 탈환하므로 경상 우도를 적으로부터 탈환한 것이고, 허리가 잘린 일본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배설의 군대는 적이 퇴각하면 추격하고 적이 진격하면 후퇴하는 고도의 기동력과 방패를 가지고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주성 전투중에는 적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기병들이 횄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진주성 외곽에서 외곽으로 부대들이 이동하고 적에 식량부대를 급습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수차례의  공성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이유로  식량이 고갈 된 상태에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9일 아침에 왜군들은 개산아비(기름종이 사갓을 쓰고 수건으로 마스크를 한 염쟁이:김해 사람들)들을 각부대에 대기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승리하면 모두 코를 배어 염장하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고, 성안에 어린이와 노인들이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공포가 성을 휩쓸었는 중에 이날 대공세로 김시민이 중상으로 스러졌다.


설(배설)은 사태가 위중함을 직감하고 전면적인 9일 낮부터 설(배설)의 부대와 곽재우(배설의 장남 등암 자장) 부대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 배후를 위협하고자 하자 일본군은 전군이 설의 부대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설의 부대와 전면적 전투도중에 설(배설)에게 적의 지휘부의 식량을 탈취 당하고 많은 병력 손실만 입었을 뿐이었다.


배설의 기병 군대가 일본군 외곽에서 9일 밤 자정부터 적의 지휘부에 불을 놓아 적진이 불길에 휩싸이자 놀란 적들이 철군하기 시작해서 새벽녂까지 공세가 지속된 후에 이른 새벽에 대사지를 통해 배설이 진주성에 입성했을때 이미 주민들과 관군들은 식량이 고갈되어 굶주리고 낮빛이 변한 상태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설의 부대는 기아 상태의 주민들을 독려하고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진주성 안에 설(배설)의 깃발과 방패가 보이자 놀란  일본군은 앞다퉈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이 물러난 이후에 많은 의병들이 계속해서 진주성에 들어 왔다.

배설이 식량을 반입하고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주통로 였던 대사지는 삼한 시대에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임에도 일제 식민지배시기 1935년 매립을 시작하여 1936년 10월 9일 일본인 읍장인 (山下)야마시다에 의해 매립 준공한 후  진주경찰서와 진주 제1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가 세워져 현재는 대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고 모든 민가를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비가 오면 너희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 9일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배설)군사를 만나 진주로 전진하니, 피란하는 남녀들이 “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9일 일본군은 설(배설)의 부대에 전면 공격을 가했고 한 편 진주성 포위망을 조이면서 개산 아비(介山父) 들이 9일 대거 등장 염을 준비하는 일본군 모습에 진주성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극도의 공포로 병사들은 굶주려 있었다. 


다음날 대공세를 막기위해 밤 자정무렵부터 설의 기병대가 적장에 막사와 건초 병참 진에 불를 놓아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서는 혼란을 틈타 북문을 열고 진주성에 설(배설 합천군사)이 입성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최덕량과 군관 이눌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겨우 수습했다.

진주성 안에는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고 조약돌 하나도 식량 한톨도 남은게 없었다.


마침내 다응날 일본군은 배설의 부대가 진주성위에 보이자 앞다투어 진열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김해 거제방향으로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거제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지휘부가 기습으로 식량이 털리고 장수들 막사가 불탓으며 일본군은 전쟁 총 잭임자인 하시바 히데카츠가 거제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서로 살려고 10 일부터  모든 포위망을 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주대첩,

임진왜란을 총지휘하던 하시바 히게카츠가 조선을 영지로 받아 한양행 도중에 성주성에서 의병 세루 부대와 전투도중 중상을 입고 칠천도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배설이 계속 추격하자 진주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을 영지로 받은 하시바 히데카츠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는데 진주성 대첩 중에 하시바 히데 카츠가 칠천도에서 끝내 사망하고 말았는데 배설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해준 갈비뼈 상실 상처부위가  덧나서라고 한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에서 침략군 지휘부가 괴멸된 상태에서 조선군이 최초로 수성(守成)에 성공한 전투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전투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은 북장대(서장대라는 주장도 있음)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가고시마 군대로부터 큰 부상을 당했고, 김시민이 사망하자 김시민 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개수하고 병간호를 하고 있던  배설이 김시민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에 진주 목사로 제수 되었다. 


배설의 군대가 모리 테루모토의 7군 적본진을 방패 기병대로 통과하고 하시바 히데카츠의(10월5일 저녁 칠천도에서 사망) 부상병들을 추격하여 진주성 전투 중에는 진주 외곽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왜군을 압박하다가 진주성에 양식이 떨어져 패색이 짙진 6만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배설의 기병대가 입성하여 지원하여 진주성 대첩의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기병 방패부대로 유명했던 '세루'에 놀란 일본 대군을 철 수 시켰다.


 이에 실제 진주성을 장악한 배설에게 28일 선조는 다시 진주목사로 제수 하였다.


우연히 진주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시키는했지만 진주 외곽 전투에서 배설에게 패배한 왜군들은 배설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자 철 수 한 것이다.  배설이 진주성이 안정을 되찾을 무렵,  왜군들은 강화회담을 하면서 부산포에서 울산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성을 쌓고 촌락 집을 개축해서생활 근거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다시 배설장군을 부산 첨절제사 겸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적들의 활동을 와해하려고 차출 하였다.


진주성 대첩에서 일본군에 포위된채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 있을 긴박한 순간에 진주외곽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일본군 식량까지  탈취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김시민장군을 대신해서 진주성을 장악했었음에도 배설이 세도가나 만석지기가 아니였기에 의병 대장에 오르지 못하고 무주 공산이 된 진주목사에 제수되었었다. 이미 배설이 진주성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에 있었다. 


진주목사로 제수되자, 혜청이란 식량 창고를 만들과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을 구휼하면서 몽진하는 조정에 부정부패를 일신해야 한다는 '시무상주'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조정 대신들(권율)이 배설을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으로 전출 시키게 된다. 배설이 선산부사로 좌천 된 이후 일어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6만여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진주성 대첩에 민관의 협동을 위해 노력한 배설의 치적이 비문에 남았었다.


"선산부사로 좌천되어서도 배설은 사명대사를 비롯한 백성들을 모아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무기를 만들과 길쌈과 농사를 짖게하였다. 배설이 선산부사 금오산별장이 되어 사명대사를 참모로 등요하여 부관으로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개축하는데 성심을 다하게하니,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미숭산성(美崇山城), 부산산성(釜山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천생산 배틀산성 을 수축하게하고 촌락을 만들어 길삼과 농업을 하게하고 보호하였으며," 


 금오산성에 혜창을 만들어 식량을 백성들에게 배풀었는데 배설이 역모로 몰려 희생된 이후에도 사명대사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동포들을 구해왔다.(주장인 배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데요? 진주성 대첩 "의병들이 진주성을 구했다?"의병이 누구 누구냐고요? 왜? 이름을 기록하면 포상 달라고 할까봐, 관료들 지들끼리 해먹자고 그래 기록하고 죽으면, 무명용사라며 이름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당시에 배설이 이름만 남긴 것만 봐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봅시다.

김시민은 전투가 있기 1주 전까지만 해도 감사 김수의 지시로 진주성을 버리고 거창의 김면 군 진영에서 설과 합류하였는데, 김성일의 지시로 진주성에 들어왔다.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난중잡록 임진 5월 20일) 관병은 3800명이고 주민 수만명이 모두 전투에 참여했다.

 

참전의병 곽재우, 심대승을, 김면,김선을, 정인홍( 김준민)배설, 최강,이달,조응도, 정유경 3,000여 명,기타 의병들 약 10000 명

결국 경상우도병사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전사했다. 의병 대장이란 요즘의 민방위 반장 또는 시민단체 장과  비슷한 조직으로 명예직으로 정식 관리가 아니므로 월급이나 봉토를 을 수 없는 봉사 조직이어서 낮은 직책의 관리(철밥통)라도 서로 가고자 했는데 진주 목사를 당시 의병 대장들이 차지하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제1차 진주성 대첩이 승리했으니 포상이 내려집니다.

네, 이름도 없는 설(합천군수)이 진주 목사로 제수 됩니다. 약 6만여 주민과 의병들이 모두 함께 싸운 전투에서 이름도 없는 배설이 진주 목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에 등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관리 위주로 정리되는 폐해때문에 실제 전투 상보가 자세한게 없습니다. 지금 관청에서 만드는 보고서처럼 당시에도 전혀 전쟁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은 장군들의 종군기가 곧 역사입니다. 아주 사실적이고 지형과 시간까지 기록이 남았는데, 우리나라는 참여한 의병 모두는 무명용사로 처리 됩니다. 그리고 기록은 관청에서 엉터리로 기록 됩니다.  위에 등장 인물들 순서로 보시면 배설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모든 진주주민이 길을 막고 함께하자고 그랬습니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 #39;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39; 6편 권 6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그림 글 출처:문화일보 김시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일대기를 그린 18세기 일본의 장편소설 ‘에혼다이코기(繪本太閤記)’ 6편 권 6에는 그림이 실려 있다. 거대한 배와 뗏목 수준에 불과한 작은 배(일본)가 싸우는 장면. 책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에도(江戶)시대 일본인들이 듣고 또 읽고 상상한 조선수군의 ‘난공불락’ 배는 거북이보다 지네에 가까웠던 모양, 조선군의 거함의 위압감이 묘한 통쾌함을 준다.)





선조실록,


“김응서(金應瑞)의 병이 위중하니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도록 마땅히 전지를 하셔야 합니다. 선거이(宣居怡)가 차차로 부임한 뒤에 내려간다면 그 기간이 너무 멀고, 또 들으니 배설(裴楔)은 수질(水疾)이 있어서 주사(舟師)의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이 있으면 주사에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선각이 아뢰기를,
“선전관(宣傳官) 조광익(趙光翼)이 도원수의 처소에서 와서 말하기를 ‘배설이 부임하려고 하는데 진주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러 주기를 원하여 성을 나가지 못하게 하니, 도원수도 난처하게 생각하여 선거이로 하여금 막하에 와서 있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김응서는 병이 위중하여 군사의 일을 보살필 수 없으니, 우선 곽재우(郭再祐)로 대신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이에 대한 전지를 속히 내려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하라.”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배설은 이미 수사(水使)가 되었으니 즉시 부임해야 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차단당하여 성을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 같은 말이 조정에 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조실록> (출처: 명량 왜곡과 진실 미출판부분 공개자료)


선조와 대신들이 승진이랍시고 다른데로 보내니,  백성들이 못 가게 막았다는 건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것.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진주성 전투로 함락되었다가 일본군이 철수한 후 되찾은 곳인만큼 피해도 크고 민심도 흉흉해졌을 곳에서 백성들이 "더 머무럴 주세요."라 했다는 건 꽤나 능력발휘를 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원균 장군이 자신에 배가 두세척밖에 없다고 얼마나 이순싱장군에게 까인지 아실 겁니다. 칠천량 그날도 통제사 원균 장군이 직속 지휘한 배는 몆척 안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의종군한 이순싱 장군님에게 12척 넘겨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상상이 안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 끝나는 날까지 배설장군의 동생 배즙 장군이 이순싱의 조방장으로 경상 우도수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장군님이 전사했다는 난중일기 보심 전사자만 홀로 2층에 남겨 두고 모든 부하들 기라졸들 마저 떠나버립니다. 실질적으로 수군을 지휘한 장수가 배즙 장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군님의 명령은 받았다고 보입니다.


 

 

 

 

 

 

 

 

도깨비방패 とうす (토재비 방패)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복수 하겠다고 전쟁을 잃으켰습니다.


만주를 우량하를 점령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역관으로부터 '오랑캐'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란카이인들과 한 판 싸워 일본의 용맹함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고 침공을 했는데, 구로다 요시타카로부터 (1592년 9월 중순) 하시바 히데카츠와 전국의 뛰어난 일본 무사 24기사들이 모두 설(세루)에게 부상진에서 참극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가토 기요마사는 '세루를 만나면 포수 100여 명을 장전시켜 한꺼번에 쏘아서 조선호랑이(세루)를 날려버렷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가토의 만주 정벌견해를 일축하고 무조건 남하를 명령했다.

이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세루는 토재비(토스..) 방패를 휴대하고 기병으로 일본군 부대 30보 가까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공수를 하여 일본군 꼬리에 붙은 지네와 같다면서 일본군 부대 좌측에붙었다가 우측에 붙고 부대에 후미에 바짝붙어 15시간 넘는 지구전을 감행하는 설(세루)의 부대에 무계진에서는 수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일본군은 양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세루부대는 그야 말로 조선의 호랑이같이 혹여 일본군 장수가 튀어 나가면 설(배설)이 바로 베어버린다.




 가장 먼저 중국 만주까지 진출한 가토로서는 자신에 공이 무너지는 상태보다도 구로다 요시타카의 설명을 듣고 마냥 만주로 진격했다가 닥칠 식량보급문제 때문에 먼저 남하하여 설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말 그대로라면 세루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삼손같은 무서운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에 심복 가토 상월이 배설에게 당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명령에 따르기로 하고 적극 세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루토스(せるとうす)"방패의 재료 나무의 거대한 옹이 입니다.




성주에는 지세와 풍수로 드러누운 자세를 보이는데, 성주 왕버들(천연기념물403호) 군락 숲을 보시면 와룡매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왜군들이 왕버들은 뽑아가지 않아서 지금도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루며 모양을 유지하는데 비해 성주군 수륜면 일대의 매화원에는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히다테와 마사무네 등등의 일본군 약탈로 매화나무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배설 장군의 도깨비 방패, とうす

          

"세루토스(せるとうす)"위에 왕버들 나무의 옹이를 이용하여 만든 전통적 도깨비문양의 방패의 모습으로 보기처럼 총알이 뚤지 못할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적치하에 고통받는 향병들을 규합한 이유는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군을 양성하였다는 점이 조선의 세루부대의 특징이다. 향병이란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병사들로 전투가 힘드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적을 물리치면 승리감도 맛보게 해주기 위해 훈련도 지구력이 필요한 장시간 김천 벌판에서 밤마다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적과 실제 조우해서도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근접 전투를 하는 것이 세루 부대의 특징이 보인다.


이로 인해 적들은 지쳐 도주하려고 해도 계속 따라붙어 공세를 취하기 때문에 굶주려야 했는데, 식량을 털어내면 전투가 중단되는 것을 알고는 세루부대가 나타나면 아예 식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일본 장수들의 영이 써지 않았다고한다. 


일본 통일 과정에서도 보통 전투는 몇시간 내에 끝나고 조선 정벌 중에도 대부분 전투가 몇 시간내에 끝났었다. 그러나 세루의 부대와의 전투는 보통 15시간 동안의 혈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200만 병력은 120만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전투에서 신속하게 참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군이 그러하리라는 안이한 인식으로 성주 부상진에서 조선왕으로 봉한 하시바 히데카츠(제9군 대장)가 설의 부대를 추격하다가 대 참극을 빚게 된 것이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이 공격해 왔다.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



일본군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전투를 경험,

채격이나 신장이 우수한 조선인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지구전에 일본군들이 배설을 가장 피하고 싶어 한 이유가 바로 성실하고 끈기를 가진 전투때문 이었다. 배설 군대의 전투적 장기지구전과 근접 전투 특징이 외계인 또는 우주인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헌에서 조선 최강의 장수로 등장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려는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는 이름의 용맹한 거인 장군,   특히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조선인 중에서도 불패(不敗)의 장군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에 나타나는 용맹한 조선인들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적군이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200여 년간 문학이었던 오제 호안(小?甫庵)의 『다이코기(太閤記)』『에이리 다이코기(繪入太閤記)』, 임진왜란 관련 문헌 『에혼 조선군기(繪本朝鮮軍記)』,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혼 조선정벌기(繪本朝鮮征伐記)』





 









배설 장군이 동인 조정으로부터 탄핵된 후 남긴 시조.

경상도 대량 학살을 막아낸 것은 배설 장군과 의병들의 활약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고도의 첩보전인 칠천량 패전으로 호남의 대량 학살을 막기위해 청야 전술을 시행하면서 끝내 탄핵으로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당시 심경을 읊은 시조이다.



月波亭(月パジョ1597年09月02日)

靑山(清算)ああ、
デョヒていただ
綠水ㅣ(ノクスが)だうれしい


無情(無情)した山水(算数)も
 
あるかうれしいば
 
ましてや)有情(油井)した様だニルロムスムハリオ。
一昨日いつ突進
 
このように
 
ジョリ行く第

月波亭(月パジョン)発根ダルエ
 
ヌィスルを食べた警固
鎭江(錦江)の輝ドゥンヌン編みが
 
昨日ロンガせよ。

排泄は歌、

熊川海戦で倭船600隻を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しかし、その次の閑山島海戦では、敵に惨敗をした。

長い水中生活に全身は病気が聞いて、

敗戦の屈辱に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周りを見回してみると、

青い山々が屏風のように取り囲んでいる。変わらない。

「清算ああよくあったのか?」「青いムルア君嬉しいね。」

世界はそのように暖かくしていがないから海を駆け巡るた盲腸の胸がどうして火に燃えて真っ黒に足かせとなり、か運賃。



晋州城で恨みを、

加藤、小西  ソソヘンジャン、ドードーダッカドラ、九鬼嘉隆, 島津義弘 水軍を抜いて鹿児島薩摩の部隊を撃破した熊川海戦がようにね
義明と決戦がで殺すことができたが、腕だけを要求した。?
殺すことあったが、
羽柴秀勝が思い出し生かし見た。


壬辰倭乱侵略を停止し、

朝鮮、日本の友好同盟を認識させようと
川岸に青い柳の、友と酒一杯交わしたその時遥かある。ただし柳が、

その葉であり、茎がディッキー精子で月光立ちこめ酒を交わしていたことが、

まるで昨日のであるよう考慮される姉。


戦争を終わらせ者、黒田吉高伊達政宗羽柴秀勝それら浮上させ、返し送信は、

豊臣秀吉が長寿が負傷したままに侵略を主張することを報告侵略を停止を心を持つようにしようと常であった。
。徳川ヒダて義昭を殺すことができる場で九死に一生の機会を与えた。

しかし、戦争は終わらず陰謀と謀略で弾劾されて病気の治療のために帰郷する必要が常であった.




排泄は、日本軍全滅ではなく、艦砲打撃を加えて防御し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何とか日本軍意志折っ撤退させようとシンスギル戦っていたしたがって、日本の兵士たちを無害、日本軍長寿の酒宴負傷負わせた羽柴秀勝肋骨黒田吉高マー事務はい義明殺さなかった戦国時代の日本での障害者一般的になることがなかった


일본 교토의 코무덤은 수십만명의 코가 묻혀 있고, 오까야마현(岡山縣) 비젠시 야산에 묻힌 2만여명의 코무덤이 400여년만에 발견되었듯이 일본 전국에 코무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정유재란 호남인의 희생이있었다. 




 


한민족의 위대한 인물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전혀 믿지 않는 풍토는 현실과 너무도 괴리된 전쟁 신화를 주장하는 미화때문에 이순신장군의 본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은 않타깝다. 명량과 같은 영화로 인해 전세계인의 조롱거리로 만든 것은 너무 않타깝지만, 지금부터라도 정신론에서 벗어나 진실을 밝혀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야하고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세대교체 관점에서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의 등시켜 국가 미래동력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 눈에는 배세루 조선 수군의 배가 한번 물리면 죽는 지네를 닮은 것으로 극한 공포로 그리고 있다. 분명히 창제귀선과는 모양이 확실하게 다르지만, 김억추 장군이 말하는 장작 귀선의 모습 그대로 장작을 덧대인 대형 함선모양 이다.


排泄歌うかつて熊川海戦で倭船600全滅させていた盲腸である調整奸臣スパイ内筒朝鮮軍買わ運転してチルチョン海戦では、敵に惨敗喫した長い水中生活全身病気が聞いて、敗戦屈辱心もうすらぞくぞくである

배세루 우주선의 모습




조선 초기 일본측 남해 거제 현령을 이문욱이 임명된 것은 조선의 건국 당시 이성계의 왜적 토벌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로 왕위에 오르면서 왜구들에게 거제 남해 대마도 등지의 섬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하고 조선인을 공도 사업으로 무인도로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문욱은 양반에 자손이 아니어서 개똥이라고 불리는 노비총각이었다가 남해 거제현령이 되면서 비로소 당시 흔한 이씨로 이문욱으로 활동하다가 고니시 밑으로 들어가면서 남도에 손씨가 양반이므로 손문욱이 되었는데 소싯적에는 개산이라 불렸다는 일설도 있고, 김해에 손문욱의 아들 개산이 있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순전히 개똥이가 부산 바다를 건너가서 토요토미가 이름을 물으니 개똥이라고 하지 않고 개똥이가 부산으로 왔다고 개산이라고 둘러대었다는 일설도 있다.


손문욱은 왜군의 밀정노릇을 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처음으로 절충장군이 되었으므로 일본측으로 부터 장수에 임명된 적이 없는 손문욱은 소싯적 양반 자제가 서당에 갈때 책보를 들고 따라다닌 노비로 추정되는 이유로   글을 알고 있었다는 점때문에 토요토미에게 발탁된 인물이다.

 개산아비라는 것은 소서행장 즉 고니시라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그는 많은 조선인을 첩자로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손문욱. "소싯적에" 일본군에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는 덕분에 도요토미 가까이서 지내며 "양아들" 소리를 듣다가 도요토미 암살 자객들 500명이 난입할 때 큰 공을 세웠지만, 일본인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부산으로 다시 넘어왔고,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한테 귀순의사를 밝혔으니 이때가 정유재란이 터졌던 1597년 4월 25일, 미리 활약하던 요시라와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과 같은 시기에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인구가 부족함을 한탄하며,일본인 여자들은 남자들이 요구하면 지휘고하를 불문하고 그씨를 받아 소중하게 키워라는 칙령을 발포한 인물인데, 후궁을 범했다고 질투할 인물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의문투텅이인 이런 인물을 1598년 9월 23일에 이 손문욱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미 그 전에 칠천량해전 당시 뿐만 아니라 노량 해전을 실지 지휘했고 당시 조정으로부터 절충 장군으로 제수 되었다. 조선군 배세루 부대의 대패에는 요시라와 손문욱 같은 첩자들이 조선군 수뇌부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조실록』 초반에는 손문욱이라는 이름은 없고 이문욱(李文彧)으로 나온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문욱은 임진년에 포로로 잡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아들이 되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총애를 받았으나 도요토미 희데요시의 첩과 간통을 하여 쫓겨났다. 그 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이 되어 남해 현감이 되었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6월 조선에 귀순하여 이순신(李舜臣)의 부하가 되었다. 이듬해 11월 2일 이순신의 명령으로 명나라 제독인 진린(陳璘)의 진영에 들어가 순천왜성을 공략할 계책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선조실록』에는 이때부터 비로소 손문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손문욱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때 옆을 지켰고, 뒤이어 조선군을 지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첨사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6월, 사명 대사(四溟大師)와 함께 탐적사(耽謫使)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오는 등 전쟁 후 두 나라가 강화 회담을 맺고 국교를 재개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11월에는 쓰시마[對馬島]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橘智正]을 영접하기 위해 박대근과 함께 부산에 파견되었다. 그 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617년(광해군 9) 11월 광해군(光海君)의 폐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조 실록 선조 30년 4월 25일조에는 이문욱이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 관백(關伯) 수길이 재주를 시험해보고는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수길(豊信秀吉)을 시해하려는 무리을 막아낸 공으로, 더욱 수길의 총애을 받으니 시기하는 무리가 생겨 났으며, 수길은 이문욱을 행장(小西行長)의 부장으로 삼고 공을 세우고 돌아 오라고 하며 부산으로 보냈다. 이후 그는 왜군 진영에서 나와 이순신 휘하에 들어 갔다고 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가 보낸 밀정들을 권율을 통해 적극 활용한 것으로 나와있다.




선조 30년 6월 2일조에는 선조가 “이문욱은 누구의 아들인가?”라 물었더니 신하들은 “알 수 없습니다.”라 말했다. 선조 30년 6월 18일조에 신하가 임금에게 말하길 “이문욱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불러오면 왜군과 상대하기 매우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체로 조선 조정은 왜군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문욱을 필요로 하여 그를 끌어들였다는 내용이다.


일부 다큐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거제도을 다스리는 호장으로 봉분되었다는 내용도 있어, 선조 31년 9월 23일조에 전라도 방어사 원신(元愼)이 보고에 따르면“남해의 적에 빌붙었던 유학(幼學) 이문욱이 적의 진중으로부터 나와 적정을 알려 왔습니다.”고 하였다. 즉 이문욱을 이순신 수하에 있던 남해 왜적 출신이라는 손문욱과 동일한 인물로 묘사된다.











선조 31년 11월 27일조에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보고에 관한 사관의 논(論)에 “이순신이 가슴에 적 탄을 맞아 운명할 때 그의 아들이 곡을 하려 하는데, 이문욱이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내용도 손문욱과 동일하다는 정황 판단이 가능한 부분이다.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書狀)에, 경북 청도에서 사로잡혀 갔다는 이문욱(李文彧)이 같이 사로잡혀 간 박계생(朴啓生), 또는 김계생(朴啓生)이라는 사람을 시켜 비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사로잡힌 연유와 왜군의 형세를 물었더니, 김계생이 답하기를 ‘소싯적에 어느 중을 따라 경산(慶山)의 마암산(馬巖山)에 있었고, 변란이 발생하여 이문욱과 부산포(釜山浦) 왜진(倭陣)에서 서로 만나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문욱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서 관백(關白) 수길이 재주를 시험해 보고 양아들로 삼고 국성(國姓)을 주었다. 여기서 국성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국(國)씨인지, 손(孫)씨을 주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 무렵 김계생은 고니시 유키나카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성을 박씨로 바꾼다. 왜 바뀌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도 우시수길(羽柴秀吉)이 풍신수길로 바뀌는 사례가 있었는데, 비슷한 경우인지는 알수 없다. 이문욱은 관두왜(館頭倭)가 반역을 저질러 풍신수길(豊臣秀吉秀吉)이 거처하는 곳으로 난입하자, 몸을 날려 왜적 백여명을 죽이고 수길을 구해냈다. 이 공으로 이문욱은 수길의 총애을 받게 되고, 관두왜(館頭倭)의 잔당에게 시달리게 되는데, 국성을 받았다고도 한다.



이문욱은 손문욱이 된 것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다. 당시 항왜들의 귀환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출신이 드러나지 않는 김, 이, 박 같은 성씨로 창성하거나 그들이 사는 지역 호족 성씨로 창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부산과 인접한 밀양에는 고대 부터 경주계 손씨와 일직(안동) 손씨들의 살고 있었다. 따라서 경상남도에서 손씨는 흔한 성씨였으므로 이문욱이 손씨로 창성하였다는 비정이 가능하다. 또는 이문욱이 관백(關白)에게 국성을 받았다고 하므로 그때 손씨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반대로 본래 손씨 였는데 일본에서 이씨가 되어 한국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 거제도, 대마도는 본래 삼한 시대 가야 지역으로 가야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백제인들도 드나들었으며, 7세기 이후에는 신라인들도 살았다. 대마도가 일본 영토로 귀속된 시점은 고려 중엽으로 이 시기에 왜인들이 많아져서 언어도 일본화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한국 영토였다. 공민왕 때 왜인들이 김해, 안동에 침입하여 노략질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대마도에서 거제도, 김해를 통해 들어왔다. 일부 다큐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 일본 조정으로부터 거제도을 다스리는 호장으로 봉분되었다는 내용도 있어, 일본 조정이 대마도는 물론 거제도까지 지배력을 행사하여 그 곳에 주민들이 일본 조정의 통치 아래 놓였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왜인들이 경상도을 노략질한 역사가 1700년 정도 되기 때문에 경상도에는 고대 부터 왜인들이 많이 있었고, 이문욱, 김계생이 왜인의 부장이 되어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점을 본다면 본래 한국인 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정유재란 이후에 일부 왜인들이 선조에게 김씨 성을 사성 받았고, 만여명은 북방 경비에 나아가서 북한에도 김해 김씨가 생겨 난다. 따라서 이문욱(손문욱)도 본래 성이 없다가 차후에 창성, 또는 사성 했다는 정황 판단도 가능하다.


선조실록, 광해군 일기에는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한 사람이 이문욱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식(李植, 1584∼1647)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 1 월 1일조에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고 절명하였고, 조카 이완이 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문욱(손문욱)의 자리는 이완(李莞)으로 바뀌었다.




이식(李植)이 작성한 충무공 시장(諡狀)에도 충무공이 죽자 조카 완(莞)이 그 사실을 숨기고 기를 들고 독전하였다 하였으나 손문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순신의 신도비문에도 손문욱이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선무원종공신록권에 주부(종6품) 이완은 3등 공신으로 책록 되었는데, 이문욱의 관한 기록은 누락되었다. 충무공의 최후를 지켜보고 계속 독전을 한 장군을 선조실록(광해군 때 편찬)에서는 이문욱(손문욱)이라 하는데 선조수정실록(인조대왕 때 편찬)과 충무공의 시장, 신도비문 그리고 국사사전 등에는 이완이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일기(인조대왕 때 편찬) 광해군 9년(1617) 11월 25일조 인목대비 폐비 문제에 관하여 손문욱이 동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목대비 폐비는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으로 그에 연루된 인사들은 숙청되고, 동조한 멸문되었다. 손문욱은 항왜 출신이라는 모호한 의심을 갖게 하는 인물이므로 더욱 가혹하게 역사에서 공적이 삭제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공적은 이완으로 교체하여 정설로 삼아 현대에 전하였으나, 선조실록, 등 몇몇 사서는 그 내용을 수정하지 못하여, 광해군 일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일치 하지 않게 되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18일조 도원수 권율(權慄)의 보고에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다, 선무원종공신록권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손문욱은 2등 공신으로 책록 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선조실록과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왜의 사정을 잘 아는 이문욱(손문욱)은 왕명에 의해 대마도를 다녀오고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다녀와 대왜(對倭)교섭에 큰 역할을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일부 수정되기는 하였으나, 거의 모든 기록에서 이문욱(손문욱)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마무리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분명히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어찌 되었던 왜인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반면 이순신이 죽고 그 군을 이문욱(손문욱)이 지휘할 때 송희립, 등 이순신 휘하 장수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문욱은 다른 장수하고 사이가 별로 안좋았던 것이다.



모호한 부분은 관백(關伯)이 의도적으로 이문욱(손문욱)을 부산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김계생이라는 사람도 이미 고시니 유키나카에 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용순(李用淳)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이문욱의 출신도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만약, 이문욱이 수길의 밀정으로 조선에 들어와 조선, 일본 조정을 오가며 생활하던 이중간첩이라면 그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 ? ~ 1598년)는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통역관이다. 조선 측 기록에는 요시라(要矢羅)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 출신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부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이중간첩 행위를 했으며, 《선조실록》에서 1595년 ~ 1597년 사이에 그 이름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최종적으로는 일본군에게 완전히 포섭되어 1597년(선조 30년) 음력 2월 고니시의 지령을 받고 김응서에게 고니시와 가토의 사이가 나쁘니 가토만 잡으면 된다는 허위정보를 흘려 이순신이 파직되게 만들었다.


이후 1598년 음력 9월에 대마도 측에서 요시라를 사신으로 삼아 한양으로 파견했는데, 칠천량 전투로 인해 이미 요시라에게 이를 갈고 있던 조선측에서는 요시라를 냉큼 잡아다 요동으로 압송하였고, 명나라로 끌려간 요시라는 그곳에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요시라가 이중간첩이었다 하나 정식으로 서임된 외교관격이었기에 일본측에선 왜 요시라를 돌려보내지 않냐고 항의했고, 조선의 비변사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주둔한 탓에 조선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어 요시라를 비롯한 사신단을 명나라로 보냈고, 그 이후 우리는 소식을 알 수 없다고 둘러댔다. 이후 일본측에서도 별로 가치가 크지 않은 인물인 요시라의 행방에 대해 더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었고, 요시라는 행방불명 처리되었다. (출처: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손문욱은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참전, 이순신이 전사하자 임기응변으로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붙인 다음 자신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북을 치며 평상시와 다름없이 군사들을 지휘, 독전(督戰)함으로써 마침내 승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이미 끈 나 도주하는 적을 북을 치던 안치던 전쟁이 끝났는데, 슬데럾는 뻘짓이 아닌가?


1604년 승장(僧將) 유정(惟政)과 함께 일본에 들어가 임진왜란의 사태수습에 공을 세우고 조선인 포로 3,000여명을 이끌고 돌아온 뒤, 2년 뒤 서장관(書狀官)으로 대마도(對馬島)에 파견되어 전란의 뒤처리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관직은 부장(部將)·만호(萬戶)·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출처:한민족향토백과사전-이충무공전서)



요시라 1596년 12월 조선에 들어와 경상우병사 金應瑞(김응서)의 軍門에는 첩자 요시라(要時羅)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要時羅는 가토오의 갈등 상황과 그의 渡海(도해) 일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흘리면서 함대를 출동시켜 가토오를 해상에서 잡으라고 권했다. 당시 요시라의 말 대로 조선 수군이 움직였다면 충분히 가토를 잡을 수 있었고 정유재란이 쉽게 중단 되었을 것이고, 호남인의 대량학살 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동인들은 너무 머리가 좋아서 이간계니 뭐니 하는데 당시 이순신을 일본에서 전혀 경계하지 않았으며 조선군자체를 핫바지 정도로 인식한 상태에서 이순신을 파직시키기 위해 요시라가 허위 정보를 준 것이 라는 주장자체가 스스로 교활의 극치속에 빠져든 문신들의 세계를 엿볼수 있다. 요시라의 말대로 가토는 예정대로 행로마저 일치하게 들어왔다.지래 허위첩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宣祖는 “지금, 가토오(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격노했다. 후대에 와서 보면 역시 그래도 선조가 가장 영명했구나 하고 알 수 있다.

1597년 1월21일, 宣祖는 備忘記(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을 붙들어 국문하고 元均(원균)을 통제사로 삼을 것을 備邊司(비변사)에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것은 2월25일 전후로 추정된다. 그 시기에 신임 통제사 원균과 이순신이 인수인계 절차를 마쳤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1차 문초에서 고문까지 받으며 1개월 넘게 옥살이를 했다. 이순신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만약 곧은 大臣 鄭琢(정탁)의 강직한 반대 상소가 없었다면 이순신은  2차 문초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다.


요시라는 정확한 정보를 조선에 주고 도선에 귀화하기 위해 관직까지 요구했으나 이순신이 파작된데 앙심을 품은 동인 조정에서 중국으로 보내 처형시켜 버렸다.  그만큼 이순신에 걸고 있는 동인 조정 중신들의 피해 의식이 일국의 정식 사신마저 처형할 정도로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 잡혀있었다고 보여진다. 전쟁을 끝내려는 일본측 무장들의 정보를 무조건 이간계로 본 것이다.


4월1일, 이순신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白衣從軍(백의종군)의 길에 올랐다. 南下하던 중 모친상을 당했지만, 상례도 치르지 못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不俱戴天(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난중 일기와 여러 기록에서 첩자들이 많은 청어 7천 두루미와 또는 만은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전쟁 중에 조선인의 머리와 바꾼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니시는 임란 종전 후 2년도 못 돼 내란의 와중에서 가토를 주살 하려 조선에 내통한 죄로 치욕스런 참수형을 당했다. 아무도 소서행장을 구원하는 일본에 장수가 없었다. 이순신 전함에서 밀정 역할을 한 손문욱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권율의 보호속에 절충 장군에 올랐으며  손문욱 만이 고니시 소서의 죽음을 애통해 한 것이리라!.  


1594년(선조 27)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행한 수륙 합동작전으로, 3회의 전투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永登浦)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기문포 해전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아군 함선 50여 척, 일본 수군 함선 117척이 서로 대치 적선 2척을 격파했다고 주장하나 일본측은 자신들이 승리한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회담 중에 장문포 공격에 일본군은 전투 종반까지 무대응 전술로 일관하여 결국 10월 8일 조선군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좌의정 윤두수 권율과 원균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 수륙합동 작전이 적군1명 투항으로 성과없이 끝나자 대간들은 명조의 눈치를 보고 윤두수(원균)를 일제히 탄핵한다. 선조는 윤두수를 좌의정 겸 삼도체찰사에서 해임하는 대신 판중추부사로 좌천하다.

1594년 11월,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이 전투에서 사도의 전선이 재차 진행된 공격에 불타고 사후선 3척이 실종됐으나 보고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일본 기록과도 일치하는데 후쿠시마 미사노리가 승전했다는 주장)이에 조정은 이순신 등에 책임을 물었다.


고성현령 조응도의 배(140명 탑승)가 요시라 부하의 배에 다가가자 왜병들은 조선 현령을 얼마나 우습게 봤던지 조응도의 배로 20여 명이 뛰어들어 조선군들의 목을 모두 베어 버린 사건이다.

휴전 중에 DMZ 에서 나무 베러 온 일본군에게 불시의 기습으로 조선 수군 고성 현령 조응도는 일본군  칼을 맞고 물에 떨어져 전사했다는 내용이다. 3 .18 장계를 보면 원균에게 책임을 권율이 묻는 내용은 조선군을 공격한 요시라의 군대는 비무장 나뭇꾼들이었다며 원균을 탄핵해야 한다는 것으로 고성 현령이 개죽음 당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민간인들이 나무하러 기문포까지 왔다는 동인 군부의 시각과 서인인 원균의 이해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유성룡은 적극 이순신을 비호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럼에도 격노한 선조의 9월 3일 밀지가 도착하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 원균뿐 아니라 이순신 김덕령 곽재우까지도 고성 현령 조응도의 전사 사건을 꾸짖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9월 초3일[무인]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했지만, 3년 동안 해상에 있어 그럴 리가 만무하다..' 죽기로 싸웠으나 전과가 없다.



난중일기를 보면 조선 수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일본의 나뭇꾼들에게도 등선육박전에서는 상대가 안됨을 자인하고 있다.


원균은 일본 첩자들이 조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장계를 무시하고 기문포에서 요시라의 부하들을 사살해버렸었다. 이에 요시라는 조정에(권율) 항의 하는데 내용은 “조선국 첨지중추부사(朝鮮國僉知中樞府事) 요시라(要時羅)의 하인이 나무를 베어 올 일로 옥포 경내로 가니 금하지 말라는 것으로 서명하여 보냈는데, 조선 병선은 통문을 무시하고서 이들을 유인해 모두 죽였으며, 또 죽도의 왜 32명을 조선 주사가 선상으로 초치하여 술을 접대하며 거짓 후대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전혀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안심하고 배를 타고 돌아올 때 조선의 여러 배들이 불시에 포를 쏘아 죽도의 왜를 다 죽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는 원균을 탄핵하는 내용이다.

왜장의 항의문을 권율이 올린 장계, 

“며칠 전에 우리 진중 오도선(五島船) 1척에 수인 15명이 타고서 거제도에 가서 나무를 베어 돌아올 때 조선 주사가 배를 탈취하였는데 그 배가 지금 어디에 가서 있는지 알 수 없고, 또 김해 진중의 대선 1척에 수인 32명이 타고서 나무를 베러 갔을 때 수인을 다 살해하고 배까지 빼앗았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습니까.”

고니시 소서행장의 부장인 요시라가 조선국 '첨지중추부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경남 일대에서 벌목과 수산을 하였고, 이당시 손문욱이 남해군의 일본측 현감으로 있었으니 남해군과 경남 부산 일대가 조선이 장악한 곳과 일본이 장악 통치한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조정이 유성룡- 이덕형- 권율 -김응서- 요시라- 손문욱 고니시의 핫라인 수준을 넘어 남해안을 일본에 제공하고 편의를 봐주고 있었는데, 윤두수 원균이 이를 깨트린데 대한 응징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러한 조정의 역학 관계 속에서 배설은 두번에 걸쳐 경상수사를 받아들인 것도 해전으로 적에 맞서면 조선군의 많은 희생은 있겠지만 왜군을 바다에서 막으므로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과 삼천리 금수강산에 뿌려질 전화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경상 우수사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 당사국 입장에서 조선은 자주권을 상실하고 있어 명나라의 관원들 특히 각 장수들에게 상시로 출입할 수 있는 명나라에서 내린 '표하관'이란 직책은 전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를 맘대로 넘나들 수 있는 일종의 전시 사신과 같은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宣修 29卷, 28年(1595 乙未 / 명 만력(萬曆) 23年) 12月 1日(己亥) 3번째기사 ○胡遊擊遣票下官金希允, 招諭建州胡人。 時, 建夷兵衆漸盛, 又屯兵于近邊牛皮山, 西邊大懼。 李德馨獻議, 請于胡大受, 差官往諭其酋, 使勿侵擾。(秀卿)·삼로(三老), 호는 만정(晩亭)이다. 정유 재란 때 중군 부총병(中軍副總兵) 도독첨사(都督僉使)로서 경리표하관(經理票下官)이 되어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와서 천안 부근 청산(靑山)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등의 공을 세웠다"



손묵욱은 일본에 자진해서 대마도주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밀점한 관계를 맺게되고 대마도주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부역하였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남해 현령(일본측)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쟁 중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노량해전을 대신 지휘한 후 노량해전의 전공으로 2등공신으로 인정받아 절충장군에 승품되었다.


배설 장군의 동생 배즙 조방장이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손문욱이 수군을 지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의 곁에서 수군을 지휘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배즙장군(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에 손문욱이 표하관의 자격으로 수군을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즙,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의금부와 훈련원의 지사에 추증) 


배즙(裵 楫)명종 19년 탄생(1564~1599.7.16) 꽃다운 35세로 노량해전에 장렬한 전사(배설장군의 동생베설 장군을 대신해서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들어 경상 우도수군의 실질지휘자로 전사함으로써 명량 노량해전사는 영원히 비밀에 뭍히고 말았다.

 


                               배즙(裵 楫)장군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 숭조대에 유허비가 있고, 묘소는 경북 고령군 노2리 명곡 서우재에 있다.






소서비와 손문욱은 일본 장수들과 명나라 장수들 사이를 전쟁을 중단시키기위한 특별한 (토요토미와 명의 만력제)임무? 마음대로 다닌 매우 고급 정보를 소유한 민물들이기에 역사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들의 역할을 비밀로 감추려고 하고 있다.



김해사람으로서 일찍부터 적에 붙어서 적의 함성(陷城)에 협력하였던 개산은 김해 출신 남해현령를 역임한 이문욱의 아들을 지칭한다는 임진왜란당시 일본군의 조선정벌 진격에 죽은 조선인의 코를 베거나 목을 자르는 일을 맏아서 해준 것으로 일본에  많은 도움을 준 조선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유재란 당시 손문욱이란 이름으로 조선측에 협조하여 무사히 일본군이 돌아가게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배세루(거함맹선)을 나포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가서 배를 연구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에는 '배세루 맹선'(장작귀선)이 보존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의 전언이 계속 전해지고 있다.



ㄱㅣ록처럼 조선 수군들은 원균 이순신 이억기 최호 모두 잘 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원체 적군에 수가 많으니 싸워서 진 것일뿐이다.


철충 장군 손문욱, 왜장 소서비, 고니시의 부장 요시라, 화해 사신 심유경,이들은 동북아시아의 전화를 적극적으로 막으려고고 일본 중국 조선을 넘나던  당시의 전화를 막기위해 목숨을 내걸고 뛰었든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