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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장작귀선)

自公有花 2014. 10. 6. 13:43

"今臣戰船尙有十二隻"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부산항 곳곳에 기지를 틀고 땅에 짱밖힌 14만 대군을 수군으로 공격하라는 무지한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이 불가하다는 원균을 권율은 곤장까지쳐서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 넣게 되고(칠천량패전) 이순신 장군이 5년간 양성한 158척의 전함과 약 2만 여명의 병사들을 이억기 장군이 이끌다가 괘멸 되고 말았다.

이에 선조대왕은 수군을 폐하라고 지시를 한다...



1,임란왜란

고니시 선봉 15만 대군은 침략 20일 만에(원균 이순신방어)에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자 공주 포로가 되었으며,  선조 이하대신들 발빠르게 도망 행차 1년가까이 줄행랑 36계 뿐이었음에도 그렇게 무지한 조정이 백성들 도망 죄를 다스린다?

2,정유재란

 가토 선봉(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20일내 한양점령 약속 출병) 1월부터 7월 14일까지 부산포에서 14만 대군은 봉쇄당하고 조선땅 어디도 내주지 않음(배설 방어)기존 임진왜란에 울산 부산 남해안 일본군 주둔지 제외하고 추가로 내준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전장을 배설의 요구대로 해상에 10여회 이상 치르게 됨,

칠천량 패전 이후 9월부터 일본군의 육지 상륙을 허용한 결과 호남 대학살과 일본 교토의 대규모 학살로 인한 증거인 코무덤 발생 조선인구 급감(권율 방어실패) 조선 파괴공작이 실시되었다.

토요토미 사망으로 일본 내 권력다툼으로 종전 전쟁의 판정
1, 일본 ㅡ일본의 조선정벌은 실패, 조선파괴는 성공
2, 조선ㅡ침략방어는 성공, 내정 민생은 파괴당함
3, 명나라ㅡ일본 명나라 전쟁을 조선의 비용으로 조선에서 전장화하여 명나라 보호에는 성공,

부수적 효과 과도한 전비와 병졸들 전사로 민심이반현상으로 명나라 국가붕괴초래,



장작귀선의 출현[粧作龜船(맹)배설1551~1559]


 베세루노 장작귀선 전장 53.67미터, 폭 21.77미터로 백 개의 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면에 거북의 귀두 위에 대포 2발이 아래에 5발이 장착된 판자를 뒤집어썬 장갑선이였다. 쿠키 요시타카의 세계최고의 전함의 배가 되는 거대한 전함이 나타나 마구 600여척의 함대를 아작 내고 있었다. 만일 그 베세루의 장작귀선 앞에서 대포를 맞는 날에는 바로 사망이였다. 측면에는 양측에 각각 12발의 대포가 장착되어 불을 뿜었다. 그 크기는 쿠키 요시타카의 칠병포를 장착한 배들의 약 두배 정도로 추정된다. 


"오~ 베세루! 자신도 모르게 ‘가메 베세루’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조선수군의 입안에 일본군이 있는 것과 같았다. 일본군들이 저항하자 조선의 장작귀선들에 승선한 조선수군들 함성이 들렸다. 장작귀선의 뚜겅이 열리는가 하는 사이에 무수한 화살들이 내리꽃혔다."(명량 왜곡과 진실 본문 중)



조선의 장작궈선 전함(맹선)들이 크기의 규모나 화포를 안전하게 장착 약 2km 사거리를 유지하여 세계최강의 해군임에는 분명했었다. 세계 물정에 빠식했던 일본의 토요토미가 스페인과 맥시코까지 부하들을 보내 선박기술을 배우게 하였듯이 배설의 맹선 '배세루ㅡ우주선'은 칠천량 패전에서 가장 큰 나포대상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야스쿠니 신사에 그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대영제국의 해군들이 세계를 제패하기 한 세대 이전에 배설은 이미 이러한 선박을 건조했음에도 선조들이 영국이나 스페인처럼 세계 바깥세천자총통과 지자총통 2km에 달하는 사거리를 가진 장거리 화포와 현자총통(玄字銃)과 로켓 신기전(神機箭), 폭발형 포탄인 진천뢰(震天雷)를 발사하는 대완구(大碗口) 등의 무기를 장작귀선에 탑재 시켰었다.


철갑선에 이러한 무기를 다량 장치하면 부력을 이기지 못하고 수군들과 함께 자침될 것이다. 실지 원균장군이 많은 판옥선을 자침시킨 것으로 실록은 전하는데 배설장군의 전함은 규모면에서 세계최강 이었었다.상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전공다툼으로 바톤처치를 씩은 배 12척을 주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고종과 왕후 배설 장군 해원식(억울함을 푸는 제사),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고종 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꺼져가는 조선국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19년 #)






3, 구국의 정신 배설 본받기(고종)의 노력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

일본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전체가 배설이란 이름에 대한 컴플렉스로 영국인 토마스를 죽게 만들고 민 왕후마저 무참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민황후는 궁전의 곤녕전과 복도로 딸린 옥호루에서 자살됐다. 사바틴이 목격한 궁녀들의 봉변,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가 목격한 민황후 봉변 장면, 고종이 거처하던 침소인 곤녕전으로 일본 낭인 오카모도 등이 황제의 침전 용상 우측에서 황제와 순종에게 황후의 거처를 심문하면서 민황후가 양녀로 삼았던 겁에 질린 일본인 소가의 딸을 끌고 와서 민황후 를 묻고 한 여인을 심문하자 고종이 용상쪽에서 신경을 곤두 세우고 완력으로 향하자 오카모토등이 황제의 용포를 잡아 제지하다 용포가 찢어지자 어께를 눌러앉혀 위협을 한다. 순종 태자가 호통치자 상투를 잡아 벽에 내동댕이치고 칼등으로 목을 후려처 기절시키는데 후일 순종이 승하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낭인들은 궁녀들을 하나하나 폭행하며 옷을 모두 벗기고 애기를 낳은 왕후임을 국부 검사를 하고 황후냐고 일일이 심문한다. 의심가는 상궁 몇 명의 가슴을 칼로 베고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에 러시아 미국 청나라가 항의하자 일본은 민왕후시해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공사 외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잠시 구치하고 검찰이 조사하여 살인죄의 범죄혐의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석방돼었다. 민왕후와 궁녀들이 일본법으로는 모두 자살로 처리 되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은 약 39세 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黒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하시바 히데카츠의 황금부채에 黑田孝高의 黑田句沈이 弟, 종문에 황금부채 )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1595년 1597년 배설이경상 우도 수사로 재직하면서 거북선 제작을 순조롭게 하는데 비해 경상좌도 수사 배홍립이 능력이 딸린다는 점을 밝히고 힜다. 따라서 왕조실록을 토대로 해석해보면 거북선이 통일된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병영 고을마다 편리한 곳에서 제작하게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설이 칠천량에서 구해낸 장작귀선도 이 때 만들어진 대형전함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 뿐 아니라 모든 병영에 거북선이 제작되었는데, 규모가 적은 판옥선위에 갑판구조라고 보여진다.(이순신장군진영은 60~70명 규모의 판옥선에 갑판을 쒸움)

 

 

 

1597년 7월 23일 이순신의 장계에서 배설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약 200명이라고 밝힌 점, 대부분 조선의 거북선은 규모가 60~70명선의 기존의 판옥선에 지붕과 귀두를 설치하고 대포를 장착한 것으로 최대 승선인원이 130명 이내이다. 그리고 병영마다 형식적으로 한 두대 정도 보유하여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 어려웠다. 반면 배설의 장작귀선은 나주의 목수들이 대거 동원되어 아예 새로 배를 건조 했다. 그 규모가 가히 놀라울 정도로 약 200명 승선한다는 점은 이순신장군이 밝힌 장계에 나와있다.

 

 

임진왜란을 총지휘하고 성주성과 진주성 까지 시찰한 黑田孝高가 돌아가서 만든 귀갑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구로다 요시타카가 배설의 활동에 매우 놀라고 돌아 갔다면, 당연히 배설의 전함인 장작귀선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를 제작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龜甲車(장작귀선에서 모방)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등의 설계에도 黑田孝高가 직접 참여했다. 침략을 위한 일본의 공성전용 병기입니다. 관(棺) 모양으로 만든 큰 궤 속에 돌 등 무거운 것을 채우고, 잘 부서지지 않게 생우피(生牛皮)로 여러 겹을 싸서 사륜거(四輪車)에 얹은 것이다. 갑주(甲胄)를 입은 무사가 이것을 끌고 성을 공격하였다.

사람이 들어갈만한 수레 위에 철판을 깔아놓은 형태, 이 안에 들어가서 성문까지 이동하면 성벽위로부터 날아오는 끓는 물이나 화살, 동맹이 등에 보호 받을 수 있었다. 중국 충차와는 다르게 그냥 보병 수송용 수레였습니다.


 

 

 

黑田孝高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등의 설계에도 참여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귀갑차를 살펴보면 과거 일본의 공성전병기와 다른 점이 세가지가 있다.

1, 철판으로 깔아 놓았다는 점(괘짝 속에돌과 흙을 넣음)

2, 생 우피로 를 여러겹 감쌓다는 점,

3, 甲胄를 입은 무사들이 동원되었다는 점,


 

 

 

 

보통 조선의 판옥선의 세배정도의 크기에다 두꺼운 장작으로 갑판을 덥고 그 위에 화전을 피하기위해 철판과 병사들의 갑옷을 펼쳐 우피와 함께 지붕에 쒸웠다는 자연스런 이해가 된다. 멀리서 보면 철갑선으로 보이는 것이나, 갑주를 원료로 우피등이 썩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화전을 방지하기위한 장대에서 물을 퍼서 수시로 뿌려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근접해서 장작귀선을 관찰 했다고 보여진다. 조선해역전도에서 보듯이 경상우도 수군의 장작귀선은 귀두에서 대포가 나오지 않고 귀두 위쪽 갑판부분에 두발의 대포가 보인다. 그리고 귀두도 배의 아래 중간 부분에 돌기형으로 녹청색으로 나와 있어 기능이 없다. 단지 상징성과 시각적인 효과 뿐이다.

확대한 장작귀선의 전면부 그림이다. 측면은 단순히장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날카로운 칼이 보인다.

그림 좌측에 장작귀선의 모습이보인다. 일본 수군의 주요 전투 형태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 : 적의 배에 뛰어들어 무기를 들고 싸움)에 대비하여 개발된 돌격 군함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가 그려져 있고,(우피나 갑주의 크기만 함) 그 위에는 날카로운 못과 같은 것들이 꽂혀져 있어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좌측에 조금 보이는 배가 장작귀선이다. 그림처럼 대포가 위에 있고, 거북돌기는 아래에 상징적으로 있어 거북 머리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지 않다.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외 다수의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



거북선 (粧作龜船) 심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とよとみひでよし))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1592년 부터 1598년까지 7년 간 벌어진 7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을 일으킨 주범, 당시 중국의 명(明朝) 나라를 정벌하고 인도까지 정벌한다는 죽을때까지 그 야욕을 버리지 않았던 인물, 일본에서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せんごくじだい)) 를 평정하고 일본을 최초로 통일 하였으며, 노부나가(織田信長 (おだのぶなが)),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とくがわ いえやす) 와 함께 일본의 3대 영웅중 한 사람, 

 

일본 해군 장교 고가사가 쓴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 기록에 따르면, 강 같은 좁은 곳에서만 쓰였을뿐 해전에서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출처: moawiz.com 신문자료)아고라,

 

1904년, 일본해군장교인 고가사가 쓴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를 보면 일본의 거북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귀갑선 제7도 그림' 흡사 럭비볼처럼 보이는데요. 앞 뒤는 생선머리 모양으로 좀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지요. 우리 거북선과는 다르게 생겼는데요.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중 그렇다면 이 일본 거북배는 관련기록 어떻게 된 것일까요? 기록에 따르면 "거북선은 조선의 장수, 이순신이 창조한 것으로서 도요또미히데요시의 수군이 당시 이 배 때문에 크게 대패함으로써 즉시 흉내내서 만들었다"라는 것입니다. -'귀갑선 제7도 그림'

 

 

 

 

한국: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일본: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 중국과 대만: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之役), 만력의 역(萬曆之役)/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만력동정(萬曆東征), 임진왜화(壬辰倭禍)


 

 

 

4) 임진왜란 후의 나대용의 상소

1606년(선조 39) 나대용이 창선(柶船: 승무원 42명의 쾌속 무장선)의 효용을 상소하는 가운데, “… 거북선이 비록 싸움에 이로우나 사부(射夫, 사격수)와 격군(格軍, 노를 젓는 수부) 등의 수가 판옥선의 125인보다 적지 아니하고…” 라는 내용이 있어, 창제귀선의 최대승선인원이 100인 이하 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임진년 12월 10일자 장계에는 “한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합하여 130여 명의 군사를…”이라는 언급이 있다.

 

 

 

6) 명나라에 통지된 을미년의 수군현황

을미년(1595) 명나라에 수군현황을 통지하는 내용 속에 거북선의 보유 척수도 명시되고 있다. 즉,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 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哨探船) 65척을 거느리고….” (《事大文軌 권 12》).

이상의 기록으로 창제귀선의 체제와 주요기능에 관계되는 것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크기는 주력전함인 판옥선의 크기와 같다.

② 뱃머리에 용두(龍頭)를 설치하여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를 쏘았다. 또 사각(射角)의 조정이 가능하였다(仰放玄字…)

③ 거북의 등처럼 만든 귀배판(龜背板)에는 철첨(쇠송곳)을 꽂아 적병의 등선(登船)을 막았다.

④ 포혈(砲穴)은 좌우 각 현(舷)에 6개, 용두에 1개, 선미(船尾)에 1개가 있어 모두 14문이 사용되고 있다.

⑤ 포의 종류로는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의 각종 총통을 장비하여, 실전에서는 탄환 이외에도 대전(大箭)을 많이 발사한 것 같다.

⑥ 즉 철갑(鐵甲)을 하여 많은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도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고려선전기>에 의하면 임진년의 거북선은 3척이었다. 《나주목지 羅州牧志》의 “나대용이 임진년 난리를 당하자 이충무공을 좇아 거북선 세척을 꾸몄다.”라는 사실과 상통된다. 그러나 을미년(1595)의 거북선은 모두 5척인 것이다.

승무원의 수는 당시의 판옥선에 준하여 125∼130인 정도이다.

⑨ 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였다. 전투에 임할 때는, 돛을 보호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돛대를 눕히고, 노(櫓)만으로 추진한 것 같다.

 

 

 

 

 이순신 장군 창제귀선

 

(2) 거북선의 철장갑

창제귀선에 대한 원전이 계승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이 철갑을 입힌 배라고 하는 이른바 철갑전설(鐵甲傳說)은 임진왜란 이후 꾸준히 전승되었다. 그리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국내외에 널리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전설 그 자체도 구승적 사료(口承的史料)로서 중요하지만, 거북선의 철갑은 당시의 실전상을 신중히 살펴본다면 과학적으로 수긍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서와 같이 거북선은 적선들의 집중공격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배였다. 특히, 가공할 왜적의 화공(火攻)과 화술(火術)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철갑을 이용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철장갑이 쇠송곳만을 귀배판에 꽂았다면 화공에는 더없이 불리한 것이다. 물론, 거북선이 다소의 사상자를 기록한 것은 사실이나, 배가 가진 원래의 기능과 활동력을 상실한 일은 없었다.

 

한편 철갑에 대한 당시의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건축된 남대문이나 남한산성의 성문 등 여러 도성과 산성에 현존하는 성문의 철갑비(鐵甲扉)는 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단조로 만든 2∼3㎜ 두께의 장방형 철엽(鐵葉)을 목판 위에 비늘모양으로 입힌 성문의 철갑문짝이다. 이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실용화된 통형(筒型) 화기의 성능에 따라 창과 방패의 대비에서 관례화된 철갑방패의 기본양식과 같은 것이다. 철갑문의 제조공법은 거북선의 철갑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철갑전설을 비롯하여 귀선철갑에 관계되는 현존 사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전적 전승으로서의 철갑전설

전설은 과거의 복원을 위한 유익한 사료인 것이다. 철갑귀선을 비롯하여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강강술래’, 행주산성싸움에서의 ‘행주치마’, 곽재우(郭再祐)의 ‘홍의장군’ 등, 임진왜란이 낳은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전승될 것이다.

 

철갑전설은 필경 철갑을 직접 만든 대장간의 대장장이들과 해전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회고담에서 비롯되어 구전으로 전승된 대중의 전설이며, 동시에 대중의 정설(定說)이었음을 특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설의 성립에 대한 이와 같은 확신은 이 ‘전설’이 임진왜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년의 전승경력을 지닌 원천성 있는 전설로서, 결코 최근 한말 이후의 외래문헌의 영향에 의하여 유발된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철갑전설 자체의 발단과 유래에 깊이 유의한 바 있는 언더우드(Underwood,H.H., 元漢慶)는 1934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Korean Boats and Ships〉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2)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구전적 철갑전설의 성립과 그 명맥을 같이하는 회화적 사료 한 점이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입지름 10.8㎝, 몸지름 20.3㎝, 밑지름 9.5㎝, 높이 16.7㎝의 작은 조선 중기(17세기 초반) 청백항아리에 북화풍의 강한 필치로 철갑귀선 한 척이 그려져 있다.

 

이 청백철화귀선문항아리〔靑白鐵怜龜船紋壺〕는 1910년경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된 것으로, 부봉미술관(富峰美術館)의 관장 김형태(金炯泰)가 소장하다가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황불연기를 토하고 있는 용머리의 묘사가 특이하나, 그 해학적 표현이 회상적인 감회를 전해주는 듯 흥겹다.

 

이 귀선도는 심미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귀선구조의 각 부분을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철갑귀선은 철갑을 제외하고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그 면모를 판이하게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철갑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이 귀선도에 대한 사료성의 평가를 겸하여 우선 선체구조의 주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철갑선 지지자들은 흔히 일본 기록을 근거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임진왜란 해전 관련 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전체를 철로 요해한 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일본 측 기록이 바로 철갑선의 근거라는 것이다.  [고려선전기]의 철로 요해했다는 표현은 철침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을 주제로 한 조선 시대 문헌에 거북선의 개판을 철판으로 만들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다.

 

1898년 무렵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시대 [무기재고표]에는 거북선의 철덮개를 의미하는 귀선철개(龜船鐵蓋)라는 부품이 등장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서 이것이 거북선의 철갑을 지칭하는 것인지 불확실하고, 임진왜란 당대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아니어서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과 마찬가지로 철갑선 논쟁도 여전히 끝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1800년대 말 이래 무려 10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거북선 철갑선 논쟁이나 1970년대 이래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은 거북선의 정확한 형태를 복원해 내고자 하는 열망과 열정을 담은 채 지금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왜군이 부산상륙전에 수중전을 요구한 배설장군, 배설장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중전을 해야 한다고 거듭주장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3층구조 거북선’ 17세기 그림 발견… 제원 등 기록

기사입력 2004-08-18 21:55 | 최종수정 2004-08-18 21:55


 

[동아일보]

거북선 실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7세기경 고서화가 재미 기업가에 의해 16일 미국 뉴욕에서 공개됐다. 이 그림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되어 온 거북선 원형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가로 140cm, 세로 239cm의 크기로 2장의 비단 천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거북선 모양의 배 위에서 회의 중인 장수들과 소형 선박에서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들, 물건을 나르는 민간인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거북선 모양의 배는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 전서’에 대략적인 스케치 형태로 그려져 있는 2층 구조가 아니라 3층 구조로 돼 있어 눈길을 끈다. 또 왼쪽 하단에 육안 해독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바랜 서체로 거북선 제원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학계는 적외선 촬영을 통해 이 글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그림은 조지아대학에서 탄소동위원소 측정 기법으로 분석한 결과 최고 1640년대의 그림으로 추정됐다. 이 경우 임진왜란 후 거북선을 비롯한 당시 군선과 수군 장병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크다. 그림을 공개한 뉴욕 소재 서진무역 윤원영 사장은 지난해 1월 그림을 구입할 당시 원 소장자에게서 “1867년 일본 니가타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밝혔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출처:동아일보)

이순신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28필의 삼베로 돗을 단 창제귀선 1대 또는 3척이고, 승선인원이 90~130명의 2층구조였는데, 1597년7월16일 칠천량해전서 이억기 장군과 더불어 전소하였다. 전라 충청 보유 거북선 소형이고 전체가 3척에 불과 했으나 실용성이 떨어졌고,  칠천량해전서 전멸했다는 점이 분명하게 실록에 등장하기 때문에 명량 해전과 노량해전의 전함이 전라좌수영의 창제귀선이 아님은 분명하다. 전라좌수사 김억추장군의 현무공실기에서 배설의 장작귀선이라고 크게 우수한 전함이라고 하고 있다.

 

또 한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12척의 배설이 개조한 배가 중요함을 여러번 언급하고 있고, 난중일기 곳곳에도 이런 배라면 적군이 아무리 많이 와도 동심치말라는 자신감을 보이는 구절이 있다.


배설장군이 만든 대형 전함 12척 장작귀선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요즘 디젤엔진 같은 당시의 기계구조가 있었기에  430k를항해할 수 있었다.

 

(1) 이순신의 창제귀선
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1591년(선조 24) 2월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왜구의 내침을 미리 염려하여 본영을 비롯한 각 진(鎭)의 전쟁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배짓는 기술이 뛰어난 장수 나대용(羅大用) 등과 함께 돌격전선인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접근전과 백병전에 능한 왜병을 상대하기 위한 비책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1592년에 쓴 《난중일기》에서 “거북선에 사용할 범포(帆布: 돛을 만드는데 쓰는 베) 29필을 받았다(2월 8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3월 27일).”, “비로소 포범(布帆: 돛)을 만들었다(4월 11일).”, 그리고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아보았다(4월 12일).”고 하여, 거북선은 임진왜란 발발(4월 13일) 직전에 그 첫 모습을 바다 위에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창제귀선’의 설계나 체제에 관한 자세한 기술적 자료가 전란 후에 기록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여기저기 남아 있는 단편적인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그 모습과 특징을 대강 살펴보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거북선을 직접 체험 또는 곁에서 목격한 사람이 남긴 기록이나 공문서등, 소위 일차사료로 간주되는 거북선 관련 기사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임진년 이순신의 장계
이순신은 1592년(임진년) 6월 14일에 써올린 <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서 자기 자신이 제작한 귀선의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귀선의 실전상황을 역력히 기술하고 있다. 즉, 사천선창의 전황을 보고하는 대목에서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別制龜船). 앞에는 용머리(龍頭)를 설치하여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口放大砲), 등에는 쇠송곳을 심었으며(背植鐵첨),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되어, 비록 적선 수백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이 귀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天字砲)·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을 쏘게 한즉 산 위와 언덕 아래와 배를 지키는 세 군데의 왜적도 또한 비오듯이 철환을 함부로 쏘아…”하고,

 

 

또 당포 선창의 해전실황에서는, “… 왜선은 판옥선(板屋船)만큼 큰 배 9척과 아울러 중소선 12척이 선창에 나누어 묵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큰 배 위에는 층루가 우뚝 솟고 높이는 서너 길이나 되며 밖에는 붉은 비단휘장을 쳤고, 사면에 ‘황자(黃字)’를 크게 썼으며 그 속에는 왜장이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日傘)을 세우고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먼저 거북선으로 곧장 층루선(層樓船) 밑으로 돌격한 후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윗쪽으로 쏘고(仰放), 또 천자, 지자포와 대장군전을 쏘고나서 들이받아 그 배를 깨뜨리고(撞破其船)…”라고 쓰고 있다.

2) 정랑 이분(李芬)의 행록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이 원균(元均)의 패전으로 귀선이 상실된 정유년(1597)에 본영에 와서 행정적인 업무에 종사하였으나, 귀선이 건재하였던 정유년 이전에도 작은아버지 이순신을 방문하고 있음을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적은 <행록 行錄> 속에는 ‘창제귀선’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즉, “공(충무공)이 수영에 있을 때 왜구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본영 및 소속 포구의 무기와 기계들을 수리, 정비하고 또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한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과 송곳(刀錐)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編茅)으로 송곳과 칼(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아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비려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6) 명나라에 통지된 을미년의 수군현황
을미년(1595) 명나라에 수군현황을 통지하는 내용 속에 거북선의 보유 척수도 명시되고 있다. 즉,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 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哨探船) 65척을 거느리고….” (《事大文軌 권 12》).

이상의 기록으로 창제귀선의 체제와 주요기능에 관계되는 것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거북선의 크기는 주력전함인 판옥선의 크기와 같다.
② 뱃머리에 용두(龍頭)를 설치하여 용의 입을 통하여 대포를 쏘았다. 또 사각(射角)의 조정이 가능하였다(仰放玄字…)
③ 거북의 등처럼 만든 귀배판(龜背板)에는 철첨(쇠송곳)을 꽂아 적병의 등선(登船)을 막았다.
④ 포혈(砲穴)은 좌우 각 현(舷)에 6개, 용두에 1개, 선미(船尾)에 1개가 있어 모두 14문이 사용되고 있다.
⑤ 포의 종류로는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의 각종 총통을 장비하여, 실전에서는 탄환 이외에도 대전(大箭)을 많이 발사한 것 같다.
⑥ 즉 철갑(鐵甲)을 하여 많은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도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⑦ <고려선전기>에 의하면 임진년의 거북선은 3척이었다. 《나주목지 羅州牧志》의 “나대용이 임진년 난리를 당하자 이충무공을 좇아 거북선 세척을 꾸몄다.”라는 사실과 상통된다. 그러나 을미년(1595)의 거북선은 모두 5척인 것이다.
⑧ 승무원의 수는 당시의 판옥선에 준하여 125∼130인 정도이다.
⑨ 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였다. 전투에 임할 때는, 돛을 보호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돛대를 눕히고, 노(櫓)만으로 추진한 것 같다.

 

 

 



(2) 거북선의 철장갑
창제귀선에 대한 원전이 계승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이 철갑을 입힌 배라고 하는 이른바 철갑전설(鐵甲傳說)은 임진왜란 이후 꾸준히 전승되었다. 그리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국내외에 널리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전설 그 자체도 구승적 사료(口承的史料)로서 중요하지만, 거북선의 철갑은 당시의 실전상을 신중히 살펴본다면 과학적으로 수긍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서와 같이 거북선은 적선들의 집중공격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배였다. 특히, 가공할 왜적의 화공(火攻)과 화술(火術)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철갑을 이용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철장갑이 쇠송곳만을 귀배판에 꽂았다면 화공에는 더없이 불리한 것이다. 물론, 거북선이 다소의 사상자를 기록한 것은 사실이나, 배가 가진 원래의 기능과 활동력을 상실한 일은 없었다.

 

 


한편 철갑에 대한 당시의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건축된 남대문이나 남한산성의 성문 등 여러 도성과 산성에 현존하는 성문의 철갑비(鐵甲扉)는 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단조로 만든 2∼3㎜ 두께의 장방형 철엽(鐵葉)을 목판 위에 비늘모양으로 입힌 성문의 철갑문짝이다. 이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실용화된 통형(筒型) 화기의 성능에 따라 창과 방패의 대비에서 관례화된 철갑방패의 기본양식과 같은 것이다. 철갑문의 제조공법은 거북선의 철갑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철갑전설을 비롯하여 귀선철갑에 관계되는 현존 사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전적 전승으로서의 철갑전설
전설은 과거의 복원을 위한 유익한 사료인 것이다. 철갑귀선을 비롯하여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강강술래’, 행주산성싸움에서의 ‘행주치마’, 곽재우(郭再祐)의 ‘홍의장군’ 등, 임진왜란이 낳은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전승될 것이다.

 


철갑전설은 필경 철갑을 직접 만든 대장간의 대장장이들과 해전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회고담에서 비롯되어 구전으로 전승된 대중의 전설이며, 동시에 대중의 정설(定說)이었음을 특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설의 성립에 대한 이와 같은 확신은 이 ‘전설’이 임진왜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년의 전승경력을 지닌 원천성 있는 전설로서, 결코 최근 한말 이후의 외래문헌의 영향에 의하여 유발된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철갑전설 자체의 발단과 유래에 깊이 유의한 바 있는 언더우드(Underwood,H.H., 元漢慶)는 1934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Korean Boats and Ships〉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그러한 철갑전설을 창작해 낸다는 것은 철갑 그 자체를 발명하는 것만큼이나 비범한 재주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 이 전설은 아주 최근의 것이 아니다. 대원군 시절, 프랑스의 원정이 예상되었을 때, 한 불운한 관리가 그 독재군주로부터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절망적인 불안 속에서 명실상부한 철갑선을 만들기 위한 시도에 그의 모든 재물을 소비하였으나, 그 철갑선은 비정하게도 뜨기를 거부하였다.……”

또한, 저자는 이 관리가 이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 연희전문학교 교수의 친척이었음을 밝히고 있어, 위의 내용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즉, 1860년대 천주교도들의 처형에 이어 서양 선박들이 근해에 출몰할 무렵, 대원군은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불운한 관리가 겪은 ‘철갑선 건조의 하명사건’은 철갑전설의 유래를 최소한 120년 이전으로 소급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한편, 구전내용이 후일의 기록으로 옮겨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문필을 향유한 상층사회의 관심 여하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구전에 대한 기록적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는, 그 구전 자체의 구승경력조차도 쉽게 추적할 도리가 없다.

 


철갑전설 성립에 대한 논의는, 그 발단이 한말 개화기보다도 훨씬 앞선다는 사실의 확인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상의 구전적 철갑전설의 보이지 않은 전승경력에 연관하여 다음에 제시될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龜船紋圖)가 전설의 끊임없는 명맥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구전적 철갑전설의 성립과 그 명맥을 같이하는 회화적 사료 한 점이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입지름 10.8㎝, 몸지름 20.3㎝, 밑지름 9.5㎝, 높이 16.7㎝의 작은 조선 중기(17세기 초반) 청백항아리에 북화풍의 강한 필치로 철갑귀선 한 척이 그려져 있다.

 


이 청백철화귀선문항아리〔靑白鐵怜龜船紋壺〕는 1910년경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된 것으로, 부봉미술관(富峰美術館)의 관장 김형태(金炯泰)가 소장하다가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황불연기를 토하고 있는 용머리의 묘사가 특이하나, 그 해학적 표현이 회상적인 감회를 전해주는 듯 흥겹다.


이 귀선도는 심미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귀선구조의 각 부분을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철갑귀선은 철갑을 제외하고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그 면모를 판이하게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철갑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이 귀선도에 대한 사료성의 평가를 겸하여 우선 선체구조의 주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3) 고려선전기의 거북선
현존하는 사료로서 거북선의 철갑에 관련된 기록으로는 임진년에 도노오카가 남긴 이 〈고려선전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저자는 왜의 수군에 종군하여 이순신 함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연전연패하는 왜수군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임진년 7월 10일(倭曆 7월 9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에서 번갈아 달려드는 3척의 거북선을 지척에서 목격하고, “……큰 배 중에 3척은 장님배이며, 철로 요해(要害)하여……”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음미해야 할 문구가 바로 “철로 요해하여(鐵ニテ要害シ)”이다. 이는 해당 구절에 대한 구어문체인 “鐵でおおわれており”(桑田忠親, 山岡莊八監修, 日本の戰史 5, 1965)에 준하여서 “철로 덮여 있고”라고 옮기면 적합할 것이다. 아울러 원문의 뜻을 따라 “철판을 입혀 방비하였다.”는 뜻으로 새겨 마땅한 것이다.
이로부터 240년 뒤인 1831년에 일본의 ≪정한위략 征韓偉略≫은 거북선에 관하여 〈고려선전기〉를 인용, “……적선 중에는 온통 철로 장비한 배가 있어, 우리의 포로써는 상하게 할 수가 없었다.……”(川口長孺, 征韓偉略 卷之二, 水藩彰考館, 天保二年, 1831)라는 해설을 가미하고 있다. 하지만 ≪정한위략≫은 1차사료 즉, 원천사료가 아니다.

(4) 경상좌수사의 인갑기록

〈인갑기록 鱗甲記錄〉은 1748년(영조 24)에 작성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장계 초본에 나오는 내용으로, 거북선의 철갑을 뜻하는 내용이 국내 기록으로는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서는 문장에 정정한 곳이 없어 장계 초본이라기보다 보관용으로 정서한 필사본이라 함이 더 적합할 것이다. 아뢰는 사람이 ‘慶尙左道水軍節度使臣李謹’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당시의 경상좌수사인 이언섭(李彦燮)으로 밝혀져 있다. 한편, 이 귀중한 사료가 240년간 보존되어 온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 경상좌수사의 장계는 거북선에 대한 건의문인데, 거북선과 누선(樓船)을 비교하여 거북선이 전술적으로 뛰어남을 거듭 지적하고, 또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공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누선을 거북선으로 대치할 것을 극구 주청하고 있다. 거북선에 관계되는 주요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①“인갑으로 덮개를 하고〔鱗甲爲蓋〕 그 안을 넓혔으며, 굽은 나무로 가슴을 꾸미고, 가파르고 뾰족하여 가볍고 날래니, 외양은 신령한 거북이 물 위를 달려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누선과 비교한다면 그 빠르고 둔함이 하늘과 땅의 판이함으로나 비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 인갑이 있어서 시석(矢石)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에 군사와 기계(무기)를 감추어서 재주를 떨치며 부딪쳐 나아감에 빠르기가 육군의 갑마(甲馬)와 같으니, 그것으로 선봉을 삼아 파도가 도도한 가운데로 달리어 공격하며 나는 듯이 쳐들어 간다면 실로 막강한 이기(利器)이온바, 수군이 믿는 바는 오로지 이 전함인데……”

②“이른바 거북선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을 하였고〔所謂龜船則不以爲樓以板爲蓋仍作鱗甲〕, ……노젓는 군사가 노를 젓는 데 편하여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어 바람을 맞아 물을 가름에 빠르기가 날랜 말과 같사온바……”

③“오호라! 저 전란(임진왜란)의 때에 충무공께서 왜구를 맞아 순식간에 충성으로 분발하여 상담의 고통으로 진력하매, 거북선을 처음 만들어 용감하게 승리하였으니, 후세의 변란을 다스리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충무공은)처음부터 끝까지가 참으로 병법을 아는 뛰어난 장수였는데, 혹시 사변이 일어나면 걱정 없이 나아가 진(陣)에 임하여 흉포한 적을 다스림에 있어, 빠르게 나아가 부딪쳐 쳐들어 감에 충무공이 만든 거북선의 전략에 부합되어야 할 것인즉, 진에 임하여 적을 무찌르는 용기가 비록 충무공의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지혜로움과는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외방의 진을 굳게 지키는 도리에 있어서는 결코 빠름을 버리고 둔함을 취할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장계는 위의 구절 외에도 같은 취지의 뜻을 거듭 강조하고, 끝으로 누선과 귀선의 제도를 별지에 도면으로 그려 비변사에 올린다고 쓰고, 거북선 건조에 대한 승인이 조속히 내려질 것을 강력하게 주청하고 있다. 위의 문장 속에는 그때부터 150년 전의 이순신과, 또 이순신의 창제귀선의 얼이 생생하게 부활되어 있다.


이 경상좌수사의 장계는 철갑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충무공전서≫의 출판(1795)보다 47년 전에 작성된 것이다. 책임감이 왕성한 후대의 한 수사(水使)가 자신이 비록 이순신의 지혜로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방법만은 반드시 계승되어야 할 것임을 아뢰는 대목은 심금을 울리듯 감동적이다.


이 기록에서 귀선철갑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②항의 첫 구절이다. 여기서 “이른바 거북선”의 ‘이른바’는 바로 ...... 그 특징이 유래된 바로 그러한 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것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목판으로 덮개〔背甲板〕를 하여, 그 위에 거듭 “인갑을 입혔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인갑’은 무엇인가? 이것은 쇠비늘 또는 놋쇠비늘을 비늘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낱말이다. ‘철갑’은 쇠로 만든 갑옷을 통칭하므로 ‘인갑’은 철갑 중에서도 그 구조가 비늘모양으로 만들어진 철갑의 일종이다.


따라서 거북선에 입혀진 철갑의 종류는 바로 ‘인갑’인 것이다. 즉 쇠비늘을 비늘모양으로 장착한 것이다. 쇠비늘은 대장간에서 단조(鍛造)된 철엽이며, 두께는 조선 철갑의 전형에 따라 2∼3㎜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철갑귀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

1862년 3월 9일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철갑선 모니터(Monitor)와 남군의 철갑선 메리맥(Merrimack)은 서로의 전세를 걸고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이 전투는 장갑선 사이의 싸움이었고 결국 에릭슨(Ericsson,J.)에 의해 창제된 모니터가 승리하여 북군의 전세가 크게 회복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이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은, 시대에는 부합되었으나 기술의 공백으로 실패를 면하지 못하였다.
모니터에 3년 앞선 1859년 진수된 프랑스의 글루아르(Gloire)는 현(舷)의 흘수(吃水) 부위에 12.2㎝, 상부 현판에는 11㎝ 두께의 철판을 장착함으로써 근대철갑선의 전조를 이루었으나, 이듬해인 1860년에 진수된 영국 최초의 철장(鐵裝) 주력선 워리어(Warrior)는 46㎝ 두께의 티크판에 11.4㎝ 두께의 철판을 입힘으로써 프랑스를 능가하였다.


미국의 모니터(1862)에 270년이나 앞선 소위 장갑전법의 비조(鼻祖)가 이미 우리 나라에 존재하였다. 목조전선시대(木造戰船時代)가 낳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즉 이순신에 의하여 창제된 철장 장갑선이 바로 그것이다. 해전사상 화포가 실용화된 이후 함대운동과 포격전을 주전법으로 한 근대식 해전의 특색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 것은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또한, 접전 때마다 선봉이 되어 전세 확립에 크게 이바지한 거북선은 장갑전법의 선구로서, 속도와 기동성이 주력전선인 판옥선(항해시 약 7노트)보다 앞서는 이른바 장갑돌격선이었다.


한편, 일반 전선도 관심 여하에 따라 주요 부위에 대한 철판의 장착이 수시로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분의 〈행록〉에 “적은 배를 쇠로 싸고 젖은 솜으로 가리었는데……”라 하였듯이 이미 임진왜란 초기의 해전에서 왜선 중에 철로 방어한 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인 방어의 보강은 장갑선으로서의 철갑은 아니며, 당초 장갑선의 목적으로 고안된 거북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왜군의 별칭에 따라 장님배로 기록된 거북선은 ‘밖에서는 배 안을 엿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장갑선이며, 교전 때는 물론 평소의 항해 때라도 승무원이 배갑판 밖으로 나올 기회는 돛의 조작 등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승무원의 불편함이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거북모양을 본떠서 만든 철저한 갑각형장갑(甲殼型裝甲)이다. 거북선의 철장은 귀배판의 철갑과 철첨뿐만이 아니라, 포혈 주변의 패판도 적절히 보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요된 철의 양은 척당 9t 정도로, 특히 선고(船高)가 낮은 거북선의 경우, 배의 안정성에는 무리가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체제와 위력이 종종 몽충(蒙衝)의 이름으로 상징된 것은 흥미있는 비유라 하겠다. 몽충은 소의 생가죽을 등에 덮어 보강하고, 양편에 노젓는 구멍을 내었으며, 전후좌우에는 활과 창을 사용할 구멍을 내어서 적이 가까이 올 수 없게 한 고대 중국의 맹렬한 돌격선의 이름이다(通典).

완벽한 장갑선인 이순신의 거북선은 세계 역사에서 최초의 시도였으나, 국부적으로 철판을 이용하여 방비를 보강한 사례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1585년 네덜란드 안트워프(Antwerp)의 공략 당시 부분적으로 철판을 붙여놓았으나 좌초되어 노획된 피니스 벨리스(Finis Bellis)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 밖에도 1578년 갑판 위의 망루 부분을 철로써 방비한 구키의 아다케형(安宅型) 군선, 1370년 원나라에서 뱃머리를 철로 싼 류영충(廖永忠)의 군선, 그리고 1203년 남송 때 현측(舷側)을 철로 보강한 진세보(秦世輔)의 수소차륜식(水搔車輪式) 해골선(海結船) 등이 있다(J. 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1971).


진세보의 해골선만 하더라도, 석궁(石弓)·투석기(投石機) 및 투탄기(投彈機), 그리고 화창을 장비한 배이므로 개방된 발사공간의 확보가 불가피하였다.


장갑선의 역사를 일괄한다면, 시석시대(矢石時代)에 탄생한 중국의 몽충, 화포의 실용화시대에 고안된 이순신의 거북선, 그리고 근대적 장갑선으로 성공을 거둔 미국의 모니터를 같은 계보에 특기하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북선의 역사적 의의는 어디까지나 이순신의 승리에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판옥선의 크기와 승선인원

한국 전통 배의 경우 배 밑판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을뿐, 다른 규격은 배마다 약간식의 편차가 있다. 특히, 판옥선의 각 부분 치수가 누락없이 완벽하게 기록된 사료는 없다.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 크기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광해군대 (1608~1623)의 판옥선 배밑판 크기 기록은 남아있다.

 

이때의 크기는 배밑판(저판,본판)의 길이①를 기준으로 소선이 47.5~50자(尺), 중선이 55자, 대선이 70자이다. 배의 구조상 배밑판 길이는 배 전체 길이보다는 짧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한다면 배밑판 70자의 대선을 기준으로 선체길이②는 대략 80~90자, 전체 배 길이③는 대략 90~110자(약 28~34m) 정도 되었을 것이다. 물론, 파(把) 단위법을 영조척으로 환산하고 이를 다시 미터법으로 환산해서, 현호는 추정수치를 대입했으므로, 28~34m라는 길이는 단순한 참고 수치에 불과한 것이다. 말을 잘 타지 못했든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기전 대부분의 군경력을 육군에서 보냈을뿐, 수군에서 복무한 것은 1580년 6월~1582년 1월 사이 (약 18개월)뿐이다.

 

 

  • 1595년에는 비변사에서 건의하기를 거북선이야말로 해전에서의 승리에 요긴한 것이고 적이 가장 꺼리는 것이라고 보고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의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거북선은 판옥선이 사수와 격군의 125명 정도를 수용하는 데 비해 적게 수용되기 때문에 주로 각 영에 1척씩만을 배치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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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억기, 최호, 전라 충청 수군이 7.16일 전멸하고 60~130명선의 전함이 모두 소실된 후 배설의 전함이 정원이 이순신이  200명 승선 인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마 이것이 웅천 600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었든 주 무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북선 장작귀선에 대한 결론.

    당시 거북선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일본의 조총을 막아내기 위해 고안된 전함으로 각 병영마다 제작하고 있었다. 명령인 만큼 대충 하는 척 하여 판옥선에다 나름 의 지붕을 쉬운 것이므로 승선인원이 100명이하이다. 그러나 배설의 장작귀선은 진주성 목사당시 부터 고안 제작된 대규모의 전함 승선200명 이였다고 보여진다. 왕조실록에도 배설이 전쟁준비나 일을 못한다고 한 점이없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대규모 전함을 나주의 목수들(무뢰배)과 진주 주민이합동으로 건조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배설장군은 1595년과 1597년 두번에 걸쳐 경상 우도수사로 발령받았다. 경상우도 수사 이전에도 진주성 목사로서 지속적으로 장작귀선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순신장군이 장계에 배 12척에 대단히 충격받아 자신감을 보인 점과 이순신장군이 제작한 창제귀선은 규모가 작은데 반해 승선인원이 200명이라는 것은 보통 당시의 거북선에 비해 세배정도 된다. 가히 충격적인 규모이다.

     

     

    또 한 명량대첩 후에 이순신의 오른팔인 김억추장군이 배설의 전함때문에 승리했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김억추장군의 전함보다 규모가 월등히 큰 규모의 장작귀선의 출현임을 기록하고있다. 보통의 배라면 그렇게 기록을 남길 이유도 없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당시 동양의 최고의책사였음에 장작귀선을 모방 귀갑차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장작귀선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이며 동시에 함포를 갖춘 세계최초의 전함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장작귀선은 대형 타원형 반잠수정으로 3층 구조로 기존의 배와는 확연히 다른모양이고, 오히려 UFO 와 비슷하게 생겼다.   일본측 관측자료를 보면 거의 원반형에 가깝다.  이는 당시  선박건조 기술을 고려할 때 최고의 부력을 가용하려면 당연히 원형에 가깝게  반잠수함이 되므로 배설장군이 칠천량의 물목이 얕틈을 걱정한 이유를 알 수 있고,  심해에 주둔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알수 있다.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의 실패를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물어, 미워한 만큼 임진왜란의 모든 성패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실패 였고, 절대적인 영향은 장작귀선 거북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