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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도 민초들이 원하는 민국을 세울때가 되었다

自公有花 2014. 10. 8. 04:56

홍여순(洪汝諄. 1547-1609)

홍여순이 유배지에서 죽었다. 홍여순은 음흉하고 교활하여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평생 부정한 방법으로 권세가에 붙어 남을 해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게다가 거리낌 없이 탐욕을 부리고 방종하여 집을 크게 짓고는 일반 주민들의 진기한 꽃, 이상한 나무까지 모두 빼앗아 가므로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귀(餓鬼)1)나 야차(夜叉)2)와 같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뿐이 아니라, 이홍로가 의주에서 올린 상소를 그와 공모하였으며, 경자년에 미쳐서는 은밀히 궁궐과 내통해 좋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어 임금(선조)과 동궁(광해) 사이에 불화를 일으킬 계획을 하였으니, 그 사이의 흉악하고 참혹한 짓은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아, 예로부터 신하로서 남의 나라를 흉악한 해독을 한 자가 많았으나 끝까지 자신을 보전한 자가 거의 없었고 보면,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화를 준다는 설이 과연 빈말이 아니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광해 1년2월10일(출처)

 

 

 

홍여순1547~1609본관은 南陽, 자는 士信, 1592년 임진란때 병조판서로 선조를 호종할때 평양에 이르러 난민들의 폭동으로 뼈가 부러졌다. 왜란이후 남이공, 김신국등과 함께 유성룡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나, 1599년 그의 대사헌 임명을 남이공이 반대하자 북인에서 분당하여 대북이라 칭했다.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탄핵받아 진도에 유배되어 이듬해 죽었다. 이원익에게 '이 사람을 쓰다가는 국가에 큰 화가 미치겠다'는 평을 들었다.(출처:한민족백과사전)

 

1600년 삭탈관직되어 1608년 진도에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무뢰배들에게 죽었다.





조정대신들과 권율, 이순신은 선조임금을 속였던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위해 배설의 제거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으나 원균외에는 다른 장수들은 죄가 없다는 결정이 내려진다- 칠천량해전후 최초 어전회의에서 패전의 책임은 권율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였으나 조정대신들과 권율은 죄인인 이순신을 통제사로 삼으면서 패전책임을 살아남은 배설에게 지우려고 했으나 결국 죄가 없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15971011일 배설장군은 탄핵을 받은후 한차례 113일에 선전관 이길원이 잡으려 하였으나 이순신을 만난후 다시 체포를 하려고 하지 않은 점과 연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 1598.12.23.(선조수정실록3번째기사)


모반을 염려하여 탄핵받음 - 홍여순

"선조에게 배설의 탄핵을 홍여순이 아뢰었다."

대저 명나라(중국군)장수들도 그래 말했는데,

혹여라도 종사에 배설이 불순하여 낭을 일으킨다면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는게 조정의 중론이고 보면..."

배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소문에 의하면 믿을 것은 아니지만, 나주에서 무뢰배들을 모으고 있다고하옵니다."

"그는 임금을 버린 죄인이다, 서둘러 추포하여 참형에 처하라,"

홍여순이 배설 탄핵을 요구하면서 대역죄를 꾸미고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고, 실제로 조선조정이 허약해서 배설이 만에 하나라도 난을 일으킨다면 이를 진압할 수 없음을 조정에서 논하고 있고, 홍여순이 자신이 말하면서

명나라의 장수들도 배설의 난을 걱정한다고 하였다.

나약한 선조는 불안을 느낀나머지 이것저것 생각도 않고 그말이 사실인지 여부도따지지 않고

처형명령을 먼저 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배설을 처형한 6년 만에 선조 스스로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복권하고 6.000만평방미터의 땅을 묘지로 하사했다.

조선조 건국한 태조에게 하사된 묘지보다도 큰 땅이 보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은 모함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반면 탄핵에 동조했던 홍여순과 정인홍등의 세력은 모두 탄핵하고 지금까지도 복권되지 못했다.



-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 군사들도 돌아감.

- 전쟁후에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짐.

- 전쟁중에 부하들과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두텁게 받아오던 배설장군이 다 시 장군으로 기용될 가능성이 있음.

- 배설장군이 기용되면 전쟁중 선조를 속였던 일들이 드러 날 것임을 염려 한 조정대신들이 무뢰배를 모은다는 소문만으로 탄핵함.

20. 159936. (선조수정실록 5번째기사)

배설장군 처형

- 무뢰배를 모은다는 소문의 죄로 체포된 배설장군은 이미 죄가 없다는 정유년 칠천량해전의 책임을 씌워서 재판 절차도 없이 처형함.

- 여기서 배설장군의 부친의 이름은 배덕문을 배덕룡으로 아들의 이름인 배상룡은 배상충으로 부친과 아들의 이름 뒷글짜를 다르게 적고 있음은 배설장군의 처형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음.

21. 배설장군의 장례를 도운 경상감사

-배설장군의 장례를 장군의 례로 호상한 경상감사 한준겸을 탄핵을 받았으나 파직되지 않았다.

22. 배설을 무함한 정인홍과 홍여순

-홍여순은 배설 탄핵후 유배지 진도에서 백성들의 손에 맞아 죽음.

- 정인홍은 88세에 참수되었으며 후일 신원되지 못하여 아직도 죄인임.(출처:배윤호)









이제 왕국을 허물고 민국을 세울때가 되었다.

(중략)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을 주제로 삼은 ‘칠천량해전’의 공원이고 전시관이다 보니까 전쟁의 끔찍함과 패전의 더욱 끔찍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재로 이 열녀도를 호출한 셈이다.



어떻게 해서 열녀가 되었을까



열녀도에 나오는 내용은 이렇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거기 나오는 한문과 한글 기록을 토대로 대충 지금 우리말로 바꾸어 보았다.



효자는 허벅지 살을 베어 어버이한테 먹이면 될 수 있었고 충신은 난리를 피해 서울을 떠나는 임금을 업고 걷기만 해도 되었다. 하지만 열녀는 이처럼 목숨을 바쳐야 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의 일부를 바쳐서는 될 수 없는 것이 열녀였다.







김씨 머리가 끊어지다(金氏斷頭)



“김씨는 영흥부 사람이니 유학(幼學) 김윤흡의 아내라 임진왜란에 도적의 무리가 문득 그 집에 이르러 더럽히고자(욕보이고자) 하거늘 김씨가 아이를 안고 거부하여 따르지 않으니 도적이 머리를 베고 가니 죽은 얼굴이 산 것처럼 아이를 품고 앉았더라.”



원씨 대나무를 붙잡다(元氏拏竹)



“원씨는 장수현 사람이니 박이항의 아내라 그 지아비를 따라 왜적을 피하더니 도적이 문득 이르러 원씨가 두 딸을 거느리고 실대(면죽綿竹) 사이에 숨었더니 도적이 먼저 둘째딸을 잡아 더럽히고자 하여 흰 칼날을 휘두르며 협박하거늘 따르지 않았고 맏딸을 잡아 목을 베는 형상으로 겁을 주거늘 어머니와 딸이 서로 더불어 나무를 움켜쥐고 발분하여 꾸짖기를 더욱 모질게 하였더니 도적이 크게 화가 나서 끄집어내니 원씨는 한 손으로 아이를 붙들고 한 손으로 대나무를 붙잡아 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도 굽히지 않으니 도적이 먼저 두 딸을 죽이고 다음에 원씨에게 미치니 목숨이 이미 끊어졌어도 손이 대나무를 놓지 않더라.”







유씨 목 잘려 죽다(柳氏斬殺)



“유씨는 영평현 사람이니 유영의 딸이고 유학 유윤정의 아내라 왜적이 그 아비와 지아비를 죽이고 유씨를 더럽히고자 하거늘 유씨 말하기를 아비와 지아비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 무엇 하랴 하고 굳게 거스르며 따르지 않으니 도적이 노끈으로 손을 매어 앞으로 이끌고 뒤로 모니 유씨 말하기를 비록 죽어도 결연히 너를 따르지 않으리라 하고 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으니 도적이 목을 잘라 죽이더라.”



박씨 목을 매다(朴氏結項)



“박씨는 장성현 사람이니 참봉 김중총의 아내라 지아비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제사를 정성들여 극진히 하고 늙은 시어미를 효양(孝養)하더니 왜구의 난리에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젖먹이 아이를 안고 수풀 사이에 숨어 엎드렸더니 도적이 먼저 시어머니를 죽이고 박씨를 끌어내어 협박하여 앞세워 가려 하거늘 박씨 굳이 거부하며 따르지 않고 소리를 크게 하여 꾸짖고 삼(麻)실 노끈으로 목을 매어 죽다.”







소사 물에 몸을 던지다(召史投水)



“하 소사(소사는 과부를 점잖게 이르는 말)는 단성현 사람이니 서얼(庶孼=첩이 양인이면 그 아들이 서자가 되고 천민이면 그 아들이 얼자가 된다.) 이유해의 아내라 왜구의 난리에 가위를 차고 그 집사람한테 이르기를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죽을 것이니 비록 주검 쌓인 가운데 있을지라도 (찾는) 일로써 보람을 삼으라 하더니 홀로 왜적을 만나 어미와 형제가 흩어져 수풀에 숨었더니 소사 먼저 잡힘을 입어(당해) 화(禍)가 일가(一家)에 미칠까 두려워 도적으로 하여금 골어귀(谷口)에서 5리 남짓 나오게 하여 장차 강을 건널 때 자식을 업고 물에 뛰어들어 죽다.”



이씨 눈알을 뽑히다(李氏穿眼)



“이씨는 선산부 사람이니 충순위 송진성의 아내라 왜란을 만나 시어머니를 업고 산에 들어가 숨었더니 하루는 도적이 오기에 이씨가 베를 베어내서 머리와 낯을 감싸니 도적이 그 낯을 보려고 하는데 이씨가 거스르기를 더욱 굳게 하니 도적이 칼로 그 두 눈을 뽑아내어도 오히려 도적을 꾸짖고 굽히지 않았는데 도적이 어지러이 베고 찌르고 가니라.”







주씨 스스로 목을 매다(朱氏自縊)



“주씨는 함흥부 사람이니 참봉 문오의 아내라 그 때 왜놈의 도적이 성에 가득하였거늘 문오가 아들 덕교·선교·명교와 더불어 의병에 들기를 꾀하였더니 도적이 이를 알아채고 부자를 묶어 놓고 마디마디 베었으니 주씨 통곡하며 이르되 내 남편 내 아들이 다 도적에게 죽었으니 내 홀로 살면 천지간에 한 죄인이라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따라 죽으니라.”



안씨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다(安氏肢解)



“안씨는 충주 사람이니 유학 김응신의 아내라 왜적에게 잡힌 바 되어 속여서 말하기를 내 집 보화를 산골에 감추어 두었으니 청하건대 거두어 가져다가 따르리라 하고 그 남편 무덤 앞에 이르러 손으로 무덤의 풀을 헤치며 이르되 내 양인(良人)의 ○○○○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리오 차라리 피는 무덤 위에 적시고 넋은 지하로 따라가리라 하고 힘써 거부하고 따르지 않으니 도적이 팔다리를 (몸에서) 잘라버리고 가니라.”



왕국과 민국은 어떻게 다를까?



열녀도는 전쟁의 끔찍함과 패전의 더욱

(글출처:김환주)이제 왕국을 허물고 민국을 세울때가 되었다.


국난을 극복하는데 혼신을 다한 충신을 역모로 모함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조선왕조에서

임진왜란 전쟁사에서 실질적으로 최초의 승전이라해도 무방할 성주성 부상진 전투에서 하시바히데카츠의 군대를 괴멸시키고 조선의병들이 무계진까지 추적했으며, 진주성까지 이어진 경상도 탈환의 전투는 진주성에서 마지막 일전을 겨루다가 진주 사천 합천 동래 부산을 차례로 수복하는데 있어 배설이 가장 중요한 전투에 선봉에 있었고, 부산첨사가 되어 부산을 수복했음에도 그만한 공이면 전장에 내보내지 않아도 됨에도 선조는 배설에게 경상수사를 맏겨서 정유재란에 대비하고자 했었다.


수사 자리는 원균과 이순신의 알력 동인과 서인의 알력 왕족과 권신 유성룡의 알력이 있는 정치적인 자리였었다. 그럼에도 배설은 장작귀선이란 화포를 장착한 장작귀선 25척을 건조해서 정유재란에 대비하였었다. 말로만 문서로만 공적을 올리던 시절에 실질적으로 장비를 최신화한 배설은 일본군 수중괴멸이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칠천량에서 패배하고 말았었다.


모함을 했던 조정의 문신들인 홍여순이 조선왕조 내내 복권되지 못하고 있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할까?

이제 조선왕조에서 복권되지 못한 사람들도 역사에서 배우고 복권시켜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민국을 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