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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손 삼별초

自公有花 2014. 10. 8. 07:58

삼별초군과 배중손

배중손은 1270-1273년 원 침략군과 사대망국사상에 물젖은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용감성을 발휘한 고려의 군사지휘관이며 애국자로 배중손의 가문과 출생에 대해서는 「고려사」에는 부당하게도 ‘역적’으로 찍혀있으나 배씨 종문에서는 중시조로 유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제주도와 대마도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몽골과 맞서며, 진도로 천도를 하고 궁궐을 축조하여 몽골군을 유인하여 진도 명량 벽파진에서 수장시키고자 했으며, 실제 몽골 배 1천여 척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배중손은 ‘역적’이 아니라 원 침략군을 반대하는 의로운 싸움에 목숨 걸고 나선 삼별초군의 유능한 지휘자였습니다. 당시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장성했던 원 침략자들은 어리석게도 고려를 먹어보려고 여섯 차례나 대군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고려군민의 단합된 힘은 그때마다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라의 정세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1260년 원의 지지 밑에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원종은 1269년 말 원나라를 방문하여 자기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하려는 목적 밑에 무신집권자들의 제거를 지원하는 군대파견을 요청하는 매국배족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1270년 5월 원종은 귀국에 앞서 관리들을 보내어 수도를 개경으로 옮길 자기의 결심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애국적 군민들은 그들과는 한길을 갈 수가 없어 반기를 들고 나섰습니다.

 

 

“우리는 목이 달아날지언정 독립 고려국으로서 원에 피로써 항쟁해 나설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결심이고 선언이었습니다.

수도를 지키던 기본무력인 삼별초군은 이렇게 압제자들과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 결연히 일떠섰습니다.

삼별초는 3개의 별초부대인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가리킨 것으로서 별초란 특별히 선발된 군대라는 뜻입니다.

 

별초군의 출현은 고려병제 상에서의 하나의 큰 변화였습니다. 12~13세기에 걸쳐 부병제도가 문란해지면서 그 징모와 체계적인 지방군의 보충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부병제도는 기본 틀거지만 남게 되고 전쟁에 동원되는 군대는 그때그때 징발되는 초모 병으로 해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사시에 싸움을 보장하기 위해 날랜 군인들을 따로 뽑아 선봉부대를 꾸렸는데 이 부대가 바로 별초군인 것입니다.

 

삼별초군이 꾸려지게 된 경위에 대하여 「고려사」 병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처음에 최우는 국내에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들을 모아서 밤마다 순찰시켜 폭행을 금지했는데 이것을 ‘야별초’라고 불렀다. 그 후에 도적이 각도에서 일어나자 별초군을 나누어 파견하여 이를 잡도록 했는데 이 별초군의 수가 너무 많아져 마침내 좌, 우 별초로 나누게 되었다. 또 고려 사람으로서 원에서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을 모아 한 개 부대를 조직하여 ‘신의군’이라 했는데 이것을 삼별초라고 했다.”

 

지방군과는 달리 삼별초는 중앙상비군의 주력이었습니다. 「고려사」에도 있는 바와 같이 이 시기 농민전쟁이 벌어지는 데 당황한 집권자들은 힘이 세고 날랜 자들을 뽑아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순찰을 시키곤 했습니다. 그 후 이것이 점차로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어졌고 신의군까지 생기면서 삼별초로 된 것입니다.

삼별초는 어디까지나 나라의 상비무력이기는 하지만 주로 피압박인민들의 출신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 원나라 침략군을 반대하는 무신들의 세력이 침투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편에 서서 원수 놈들을 반대하여 싸울 수 있었습니다.

 

국왕 원종은 개경으로 들어가 통치배들을 반대하는 백성들의 항전기세가 높아지자 그들의 반란이 두려워 강화도에 졸개들을 보내어 삼별초의 해산을 선포하고 그 명단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아니, 우리 삼별초 명부는 왜 뺏어가는 것일까?”

“아마 우리 명부를 저 원 침략자들에게 넘겨주어 장차 우리를 도륙할 작정인가부네.”

“이제는 이래도 죽는 목숨이요, 저래도 죽는 목숨이다. 그렇다, 싸우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 그 앞장에 선 사람이 바로 배중손이었습니다.

 

저 멀리 파도는 거세차게 밀려오는데 군사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는 금시 불꽃이 튀어나올 듯 싶었습니다.

“장차 원 침략군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모조리 살해하려고 하니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저 격구장(무예를 연습하는 장소)으로 모이라.”

그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군사들과 백성들을 싸움에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배중손은 무기고를 열어 군사들을 무장시켰으며 무서워서 배를 타고 도망치는 관리들과 비겁한 자들을 단호히 그 자리에서 징벌해버렸습니다.

배중손은 순식간에 강화도 전역을 차지했으며 인민들을 묶어세우고 군사들은 필요한 부문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꾸렸으며 줄기찬 항전을 벌려나갔습니다.

 

삼별초와 함께 나선 백성들은 배중손의 지휘 밑에 항전개시 3일만인 6월 3일 강화도를 떠나 조건이 유리한 진도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배중손은 삼별초 군인들과 백성들 앞에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저 썩어 빠진 조정을 따라 육지로 나가서 침략자들의 노예로 되는 길이 있고 또 한 길은 멀리 섬 속으로 들어가 비록 일생을 고생으로 넘길망정 독립 고려국을 지켜 적들과 맞서 항쟁하는 길이다. 그러니 우리와 뜻을 같이 하려는 사람들은 이리로 와서 저 배를 타라!

 

강화도를 떠나는 것은 물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원종을 비롯한 개경정부가 원 침략자들과 결탁해 나선 조건에서 이 섬에 그냥 눌러있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것은 원 침략자들의 손에 이미 우리의 비밀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경정부를 40리밖에 두고서는 우리 내부에 어떤 동요와 불안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그 대신 진도로 말하면 개경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거기는 물살이 급한 울돌목(명랑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어 원 침략자들과 관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매우 유리한 곳이다. 또한 진도를 거점으로 고려 남해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육지 인민들을 싸움에 불러일으키면서 땅과 바다를 활무대로 하여 싸운다면 그 어떤 원수도 우리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가슴에 피가 끓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가족들과 함께 배에 오르라!”

 

그의 피 끓는 외침은 삼별초 군인들의 젊은 심장들을 높뛰게 했고 바다를 끓게 했습니다.

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배에 올랐고 섬에 살던 의기있는 사람들은 가족들과 재물을 걷어 싣고 주저 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배 장군을 따라가자!”

“거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다.”

군사들과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치며 배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천 여척의 배들은 복수의 눈물을 뿌리며 진도를 향해 고려서해의 거세찬 물결을 헤가르며 남으로 남으로 향했습니다.

 

봉건통치배들은 불안에 싸여 ‘추격부대’를 편성하여 파견했으나 그 위세에 눌리어 감히 범접도 못한 채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배중손은 삼별초군을 능숙하게 지휘하여 8월 19일 70여 일만에 드디어 진도까지 전군이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근거지를 옮긴 배중손은 줄기찬 활동을 벌려 나갔습니다.

 

그는 이 땅을 더욱 굳건히 지킬 결심으로 남해 가의 크고 작은 30여 개의 섬들을 일거에 틀어쥐었으며 자기들의 대오에 호응하는 육지 인민들로써 그 대열을 계속 늘여나갔습니다.

 

한편 민첩한 기동작전으로 진도에 근거지를 구축했으며 제주도를 함락하여 제2 근거지로 꾸리었습니다. 또한 전라도 장홍부로 쳐들어가 개경의 관군을 소멸해버리고 지휘관들을 포로한 후 많은 무기와 식량을 노획하여 가지고 돌아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11월 초에는 항전군을 이끌어 김방경의 관군과 원의 장수 아해가 거느린 1천여 명의 토벌군도 울돌 앞바다에서 완전히 격파해 버렸습니다.

 

배중손은 삼별초군의 기세를 돋우기 위해 오색 깃발을 만들어 여기저기에 날렸고 전함에는 사나운 짐승을 크게 그려 붙이도록 했습니다. 하기에 진도의 군민들은 너나없이 그를 존경했습니다.

“우리 배장군은 정말 생각이 트인 분이야. 이런 묘한 생각까지 해내는 걸 보면 하늘이 낸 사람이 분명해.”

“암, 그렇구 말구.”

군민들은 원 침략자들이 그 용대가리만 봐도 기절초풍할 것이라고 자기들의 지휘관을 자랑했습니다.

배중손은 수십 회의 전투마다 언제나 군사들의 앞장에 섰습니다. 그는 적 함선들을 포위 속에 몰아넣고 활과 포석으로 맹사격을 퍼부었으며 불살을 쏘아 적함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적의 갑판 위에 선참으로 뛰어올라 창과 칼을 휘둘러 적들을 무리 쓸어눕혔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싸움마당에 나타나면 바다 위에는 적의 시체와 깨어진 함선 조각들로 한 벌 쭉 덮여졌습니다.

배중손은 함선을 잘 위장하고 자연지리적 조건을 옳게 이용할 뿐아니라 수군과 육군의 배합작전을 잘 짜고 들었으며 특히 싸움 군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기에 싸움이 붙으면 영낙없이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도에서의 삼별초군의 항전이 날로 더 크게 벌어지자 당황한 침략자들은 1271년 3월 혼도를 우두머리로 하는 6,000여명의 군사들을 토벌에 내몰았습니다. 놈들은 싸움에 앞서 배중손에게 사람들을 파견했습니다.

“대장님, 이놈이 편지를 가지고 왔소이다.”

“어디 보자. 무슨 수작을 하는지.”

편지를 읽어내려 가던 배중손의 입가에 쓴 웃음이 비꼈습니다.

“이제라도 항복하면 죄과를 묻지 않겠다구. 높은 벼슬자리를 주겠다구. 하하하 이놈의 목을 쳐라.”

배중손의 기상은 금시 노한 바다와 같았습니다.

“삼촌, 저는 심부름을 왔을 뿐인데, 목숨만.”

편지를 들고 온 자는 대체로 배중손의 친척들이었습니다.

하건만 그는 사정을 몰랐습니다.

 

“누가 너더러 그런 심부름을 하라고 하더냐. 줏대 없는 놈, 당장 목을 쳐라.”

몇 번이나 사신을 들여보냈지만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배중손은 혼도의 부대를 일격에 소멸해버렸습니다.

하건만 싸움이 어려워지면 변절자들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렇게도 드센 공격으로 나라를 지켜나섰던 삼별초군은 아쉽게도 변절자의 밀고로 실패라는 쓰라린 참화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항전군 내부에 기어들었던 김지숙이란 놈이 삼별초군의 기본역량이 남해 연안에 진출한 틈을 타서 진도가 비어있다는 비밀을 적들에게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들은 1217년 5월 100여척의 함선에 수천의 군사를 세 개 방면으로 불의에 몰아 진도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배중손은 이에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섬에 남은 군사들을 재빨리 기동시켜 최후의 혈전을 벌려나갔습니다.

 

배중손은 비장한 결심 밑에 맹렬한 격전에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거느린 군사들인 노영희, 김통정에게 많은 인원과 무기들을 주어 섬의 좌우를 막도록 하고 자신은 적은 군사들을 데리고 여울목을 지켜 나섰습니다. 삼별초군의 싸움은 그야말로 결사전이었습니다.

 

바다에는 적의 배가 까맣게 덮였는데 이들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나갔습니다. 한쪽에서는 화포와 불화살을 날리고 또 한쪽에서는 적의 배에 뛰어올라 결사전을 벌렸습니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또 바다에 떨어지고 배들이 깨어지고 바다는 온통 불길 속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하건만 우세한 적을 막아내기가 힘겨웠습니다. 역량 상으로 대비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배중손은 온몸에 화살을 맞고 그만 쓰러졌습니다. 그는 마지막순간 군사들에게 이런 부탁을 남겼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진도를 지켜내야 한다. 나는 그대들을 믿는다. 사나이로 태어나 제 땅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조상들 앞에 무슨 체면이 있겠는가.”

그 후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결사전을 벌렸으며 김통정의 지휘 밑에 대오를 수습하여 80척의 함선을 이끌고 제주도로 항전 기지를 옮겼습니다. 그들은 제주도에 겹성을 쌓고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인민들을 동원하여 약 1년간이나 적을 견제해냈습니다.

 

그러나 침략자들과 손을 잡은 통치배들은 160여척의 전함과 1만여 명의 토벌군을 파견하여 제주도를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이 싸움에서 삼별초군은 끝까지 싸웠으나 적의 무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70여명은 산속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다가 모두 최후를 마쳤다고 합니다.

 

3년간에 걸쳐 고려서해와 남해 연안에서 침략자와 용감히 맞서 싸우던 삼별초군의 의로운 활동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삼별초군이 이처럼 대담하게 싸움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봉건통치배들과 침략자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던 백성들 속에서 나온 군대라는 것과 함께 중요한 바는 그 지휘관이었던 배중손의 애국심의 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삼별초군의 싸움은 고려인민들을 원수 격멸에로 불러일으켰고 통치배들과 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하기에 이란의 한 역사학자는 원의 침략이 있는 곳에서 나라를 고스란히 지켜낸 것은 오직 고려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출처:철인의소리 블로그)

 




人民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裴仲孫,[1270-1273] 元宗朝, 積官至將軍. 고려 삼별초 정권은 철처히 백성의 지지로 구성 유지되어야 했든 자주정권으로서 人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요즘과 같은 의미의 人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 정권이였다. 

배중손은 경주 배씨로서 진도군 임회면에서 평범하게 출생,  고려의 적관지 장군(참모총장)에 오른 인물로 몽고에 항복하려는 고려 조정에 반대하고 스스로 고난을 선택한 인물이다.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의 특수군대를 말한다. 1270-1273년까지 강화도 중심의 삼별초군이 몽고에 대항해 일으킨 의거 삼별초는 좌, 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부름. 삼별초는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都房)이나 마별초(馬別抄)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최우라는 당시 실세에 의해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송도 방범대인 야별초로 시작, 소속인원이 늘어나자 좌,우별초로 편성 신의군은 몽고군과의 전쟁 중에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이들로 조직 강화도로 옮긴 고려 조정에 대해 몽고가 항복을 종용  원종 임금과 문신들은 항복하고 1270. 5.27에 개경으로 환도,

 

무신은 반대, 삼별초는 반대세력에 가담 무신과 삼별초는 1270.6월 1일 몽고에 항쟁하기로 결의  지휘자인 배중손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추고 1,000여척의 배로 진도로 옮겨가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항몽투쟁 벌임 고려와 몽고연합군이 진도를 점령하자 김통정이 잔여 세력 이끌고 제주도로 옮겨 항파두리 성 쌓고 항거 1273년 4월 28일 여몽연합군 1만여명이 제주도에 상륙하고 삼별초는 패배 김통정과 70여명만 남은 삼별초군은 한라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매 죽었다.

 


고려시대 남경(현재 서울) 천도론을 주장했던 김위제(金謂 )은 남경 도읍지의 타당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사족으로 붙여놓고 있다. 즉 신라말 고려초의 9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의 2대 교조요, 풍수지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선승 도선(道詵)의 어록인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의 말을 빌려 “후대 현사(賢士, 어진 사람)가 사람의 수명을 판별하여 한강을 넘지 않으면, 만대(萬代)의 기세를 이을 것이요, 만약 강을 건너 제국(帝國)의 도읍을 세우면 한 자리가 분열되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지리라”라는 기록을 고려사 열전에 남겨놓았다.


  한강 이남에 도읍하면 나라가 둘로 나누어진다는 말은  역사의 기록인 것이다. 아울러 고려 숙종은 김위제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강 이북 오늘날 경복궁 북쪽 면악(面岳,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연흥전 궁궐을 짓고 남경을 경영하였다. 


그런데 고려 중기 몽골의 침략으로 부마국으로 전락되는 상황에서 고려 군사들은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하는데 반대하여 일군의 군사정변을 통하여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자주성을 바탕으로 몽골과 그 외세의존적인 고려왕실에 저항하고자 하였다. 이를 삼별초항쟁이라 하여 고려 무신들의 자주적인 저항정신을 교훈삼고 있는 것이다.


고려 왕조는 몽골 황실의 사위로서의 외세의존적인 문신이 세력을 얻게 되어 기존 무신정권이 붕괴 되었다, 즉, 외세인 몽골에 부역하는데 독자적인 군대나 무인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보호받는 피지배국으로의 전락에 대응해서 자주적으로 성립한 정권이 삼별초이다.  

 

 


삼별초의 성립과 구실
고려 삼별초는 1232년 최씨정권의 최우(崔瑀) 집권기에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 전 시기를 걸쳐 가장 강력한 전투 병력이었다.  좌우로 확대 편성되었고 급기야 몽고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온 자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이 합쳐진 부대였다. (삼별초는 몽고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했다.)


삼별초는 대몽항쟁의 주력부대로 활동, 고려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서 본토의 승천부(昇天府)로 갈 때 호위를 하는 등 수고경비대ㆍ친위대ㆍ특공대ㆍ경찰대ㆍ전위대(前衛隊)ㆍ편의대(便衣隊)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즉 삼별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방어 뿐만 아니라, 자주 섬을 나와 본토에서 몽고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고려사 병지에는 “권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기들을 보호하는 핵심부대로 삼아, 그들에게 녹봉을 후하게 주었다. 또 간혹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며, 죄인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에게 줌으로써 권신들이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어 김준은 최의를 죽이고, 임연은 김준을 죽였으며, 송송례는 임유무를 죽였으니, 이는 모두 삼별초의 힘에 의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강화도에서의 최씨정권 붕괴와 김(인)준정권 수립, 임연ㆍ임유무정권 성립 등 정변이 있을 때마다 삼별초의 군사력은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즉 고려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정무신들의 성립은 모두 삼별초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삼별초는 사병(私兵)과 공병(公兵)의 성격을 지닌 군사들이였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고종의 뒤를 이은 원종이 친몽정책으로 태도를 바꾸어 몽골에 굴복하자, 정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인들은 삼별초의 군사를 배경으로 개성으로 출륙환도(出陸還都)하는 것을 거부하고, 결전을 생각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270년 임유무가 살해되고 무신정권이 완전히 제거되자 원종은 몽골의 지시에 따라 개성으로 돌아와 왕정이 복고되었다.

 

몽골은 배후에서 왕실을 조정해 반몽골세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이때 고려정부는 삼별초의 저항을 선무하는 동시에 김지저를 강화도에 보내어 강압적으로 삼별초 해산을 명하고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고려정부가 삼별초 명부를 몽골에 넘겨주면 삼별초 군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더욱 크게 동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삼별초는 1270년 6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 노영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원종을 폐하고 승화후(承化侯, 고려 현종의 8대손)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각부 관원을 임명하였다. 즉 “앞으로 몽골군이 강화도로 쳐들어와 백성을 살육하려 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하는 자는 모두 구정으로 모여라. … 우리를 따라야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외치면서 강화도 백성의 민심이탈을 통제하면서 개경정부에 맞선 강화도의 새 정부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개경정부와 몽골연합군의 강화도 침공이 임박하자 민심이 동요되었다. 이에 배중손 일행은 새 정부를 수립한 3일 뒤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있는 귀족과 고관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삼별초군을 중심으로 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즉 강화 서북쪽 해안에 1천여 척의 배를 대고 군수품과 백성을 싣고 강화를 텅 빈 채로 남겨놓고 가을날에 진도에 닻을 내렸다.


삼별초군은 진도에 용장성(龍藏城)을 새로 쌓고 방위태세를 갖춘 다음 궁궐을 크게 조성하여 도성의 면모를 갖추었다. 나아가 인근의 남해ㆍ창선ㆍ거제 등 해안도서지방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내륙지방까지 세력권에 넣고 세수를 거두어들였다. 따라서 개경정부는 조운이 막혀 재정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삼별초의 저항에 고려정부는 김방경을 전라도추토사로 삼아 토벌을 명하였고. 몽골 원수 아해(阿海)가 이끄는 몽골군과 여몽연합군을 형성하여 삼별초군을 치게 하였다. 개전 초기에는 삼별초군의 기동력으로 연합군이 참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고려인으로 몽골군의 앞잡이가 되어 나타난 홍다구와 흔도( 都), 그리고 개경정부군 김방경의 연합군대에게 참패함으로써 1년만에 진도는 여몽연합군에게 넘어갔다.

 

몽고 고려 연합군은 결사항전하는 삼별초군을 쫓아 남녀 1만명과 전함 수백 척을 빼앗고, 진도에 있던 4천석의 양곡과 재물들을 약탈하여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살아남은 삼별초군사는 김통정 장군을 중심으로 진도 남도석성을 떠나 탐라(제주)로 들어가 항파두리성을 쌓고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본토를 자주 공격하여 경기 부천지역에 이르고, 남도의 세공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정벌을 위한 기지로 탐라를 중요시하여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1273년 연합군은 병선 160척과 1만의 병력으로 탐라에 상륙하여 총공격을 하니, 김통정을 비롯한 삼별초군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한라산 깊은 곳에 들어가 최후를 마쳤다. 이렇게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배중손, 원종조, 적관지장군.

배중손은 원종 때에 벼슬을 쌓아 장군에 이르렀다가 삼별초의 장군이 되었다.

배중손은 고려시대 적관대장군에 지위에 올랐든 인물로 당시 세계최강의 징기스칸 몽골과 대결하기 위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천도한 후 세계 최초로 인민의 나라를 표방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부족국가 형태의 국지전으로 영주들이 영속하는 형태에서 몽골과 대항할 통일국가를 요구하고 일본과 연합 몽골과 대항하고자 사신을 파견 설득했던 시대의 선각자였다.(적관대장군:참모총장 정도의 지위) 일본의 막부 정권을 가르키고 군사적인 고려의 우수한 문화를 보내어 일본 통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토요토미 시대에 일본은 남고려에 대한 의문을 기지고 우호적인 자세를 가진 이유도 이때문이었다.(남고려: 삼별초가 통치한 국가)

 

十一年, 復都開京, 榜示畫日, 趣令悉還, 三別抄, 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 入江華, 罷三別抄, 取其名籍還, 三別抄, 恐以名籍聞于蒙古, 益懷反心.

 

 

仲孫, 與夜別抄指諭廬永禧等, 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毬庭!”

 

 

 

*須臾國人大會, 或奔走四散爭舟渡江多溺死者.

 

 

三別抄, 禁人出入, 巡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범양반재주불하자, 실참지.” 문자개구이하, 기혹발선욕향개경자, 적승소정, 추사지,

皆不敢動, 城中人驚駭, 散匿林藪, 童稚婦女, 哭聲滿路.

개불감동, 성중인경해, 산닉림수, 동치부여, 곡성만로.

 

 

賊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적발김강고병기, 분여군졸, 영성고수.

적은 금강고의 무기를 군졸에게 나누어주고 성을 둘러 굳게 지켰다.

 

 

仲孫永禧, 領三別抄, 會市廊,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尙書左丞李

중손영희, 령삼별초, 회시랑, 핍승화후온위왕, 서치관부, 이대장군류존혁상서좌승이

信孫, 爲左右承宣.

신손, 위좌우승선.

중손과 영희는 삼별초를 거느리고 저자에 모여 승화 후 온을 넣어 왕으로 삼아 관부를 설치하고, 대장군 유존혁, 상서좌승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삼았다.

 

 

初, 賊謀作亂, 將軍李白起不應, 至是, 斬白起及蒙古所遣回回於街中, 將軍玄文奕妻․直

초, 적모작난, 장군이백기불응, 지시, 참백기급몽고소견회회어가중, 장군현문혁처․직

學鄭文鑑及其妻, 皆死之.

학정문감급기처, 개사지.

 

 

 

賊度不能守, 乃聚船艦, 悉載公私財貨及子女南下, 自仇浦, 至缸破江, 舳艫相接, 無慮

적도불능수, 내취선함, 실재공사재화급자여남하, 자구포, 지항파강, 축로상접, 무려

千餘艘.

천여소.

 

 

時百官, 咸出迎王, 其妻孥, 皆爲賊所掠, 痛哭聲振天地.

시백관, 함출영왕, 기처노, 개위적소략, 통곡성진천지.

 

 

 

前中書舍人李淑眞․郞將尹吉甫, 聚奴隷, 尾擊餘賊于仇浦, 斬五人, 至浮落山, 臨海耀

전중서사인이숙진․랑장윤길보, 취노례, 미격여적우구포, 참오인, 지부락산, 림해요

兵.

병.

 

 

賊望見恟懼, 以爲蒙古兵已至, 遂遁, 淑眞, 與郞中田文胤等, 封府庫, 使人守之, 無賴者

적망견흉구, 이위몽고병이지, 수둔, 숙진, 여랑중전문윤등, 봉부고, 사인수지, 무뢰자

不得盜.

불득도.

 

 

 

 

 

 

初, 守司空致仕李甫․判太史局事安邦悅․上將軍池桂芳․大將軍姜渭輔․將軍金之淑․大將軍

초, 수사공치사이보․판태사국사안방열․상장군지계방․대장군강위보․장군김지숙․대장군

致仕宋肅․少卿任宏, 皆陷賊中, 及賊敗, 甫․桂芳被殺, 渭輔․之淑․肅․宏, 得免歸朝, 信孫隨

치사송숙․소경임굉, 개함적중, 급적패, 보․계방피살, 위보․지숙․숙․굉, 득면귀조, 신손수

賊, 欲向耽羅, 中路而還.

적, 욕향탐라, 중로이환.

 

 

邦, 悅當還都時, 卜于奉恩寺太祖眞, 得半存半亡之兆, 以謂亡者, 出陸者也, 存者, 隨

방, 열당환도시, 복우봉은사태조진, 득반존반망지조, 이위망자, 출륙자야, 존자, 수

三別抄入海者也, 乃隨賊南下, 說賊曰: “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之讖, 於此驗矣.”

삼별초입해자야, 내수적남하, 설적왈: “룡손십이진, 향남작제경지참, 어차험의.”

遂爲謀主, 及賊敗, 抽身將謁方慶, 兵士擊殺之.

수위모주, 급적패, 추신장알방경, 병사격살지.

당초 안방열은 환도할 때를 당하여 봉은사 태조 진영에 점하여 반존반망이란 점괘를 얻어서 말하되,

" 망할 자는 육지로 나간 자요, 살아 남을 자는 삼별초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자"라고 해석하고 적을 따라 남하하였다. 적에게 이르기를 용손 열둘이 다 남으로 향하여 황제가 거처하는 서울을 만든다는 예언에 이어서 증명하리라" 하고 마침내 모사(謀士)가 되었다가 적이 패하자 몸을 빼어 장차 방경을 베려 하는 것을 병사가 쳐죽였다.

 

 

存奕, 據南海縣, 剽掠沿海, 聞賊遁入耽羅, 亦以八十餘艘從之.

존혁, 거남해현, 표략연해, 문적둔입탐라, 역이팔십여소종지.

존혁은 남해현에 머물면서 연해를 노략질하다가 적이 도망하여 탐라에 들어감을 듣고, 또한 80여 척으로 이를 따라갔다.

 

 

 

十四年, 又命方慶討之, 方慶與忻都等, 進攻之, 賊大潰, 通精率七十餘人, 遁入山中,

십사년, 우명방경토지, 방경여흔도등, 진공지, 적대궤, 통정솔칠십여인, 둔입산중,

縊死, 耽羅遂平.

액사, 탐라수평.

 

 

 

 

 


 


 

고려삼별초(승화후 온)정권의 항몽전투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을 제압하였으며, 신속히 제주도까지 점령하여 통치했다.

  

삼별초정권의 수립에 당황한 것은 개경의 원종 조정이었다. 당시 이를 진압할 병력조차 없었던 개경 조정 은 몽고에 원군을 요청하여 1270년 11월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 앞바다에 진출하 였으나 진도 입구 울둘목에서 삼별초군이 반격으로 해상전투에서 여몽 연합군은 대패하였다.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을 맞아 수차의 전투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방심하게 되었다.

 

이듬해 1271년 5월, 삼별 초군 중 상당수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다는 정보를 얻은 개경의 정부군과 몽고군은 기습적으로 세방향으로 진도에 상륙,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삼별초군이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사이도 없이 진도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였다.

 

진도를 잃고 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지도자로 하여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1272년부터 삼별초군은 다시 활동을 제개하여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273년 2월 여몽연합 군 1만여 명이 제주의 삼별초군을 포위, 공격하여 삼별초를 섬멸하고 27년간 일본 원정기지인 기마병 사육장으로 만들었다.

 

 

 

1, 고려조정의 몽고 지배에 굴복함에 대응해서 人民(백성)들의 조직적인 항거와 한반도 최초의 백성들의 정권이다. (人民이라는 단어도 최초 사용함)

2, 몽고의 일본 침략을 저지하기위해 일본과 연합하려든 해상세력이 주도한 정권이다. 따라서 몽고의 일본정벌이 지연되고 실패하게 했다.

3, 삼별초의 백성들 스스로 수립한 정권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려의 영토가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고, 고려의 백성들이 다른 정벌에 동원되지 못하게 했다.

4,남해안 최초의 고려삼별초정권의 수도로 입지했었다.

  특히 일본 정벌에 동원하려든 고려 사람들이 항몽전으로 동원되지 못했다. 일본이 고스란히 보호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삼별초의 제주도 점령과 서해 도서 해상세력 장악이였다. 만일, 삼별초가 해상세력을 결집 항거하지 않았다면 고려의 해상세력은 일본정벌에 동원될 자원이였었다. 

 

 삼별초는 멸망한 고려를 대체한 정권이였고,  내륙 각지에서도 인정받은 자주적인 정권으로서 진도는 1년간 고려삼별초 정부의 수도 였으며, 제주도를 점령하여 제 2의 항몽지로 개척하여 여몽 연합군을 상대로 수차례의 내륙과 해상 전투에서 승리하므로 백성들로부터 고려조정보다 막강한 정부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서남해안 해상세력의 거의 모든 세력을 수중에 넣고 몽고와 항전하였으며, 배중손은 일본과 연합 대응하려고 했으므로 고려 일본의 연합이 성사되기 이전에 여 몽 연합군의 빠른 기습공격으로 뜻을 펴지 못하고 용장산성에서 전사했다. 한반도 정권에서 최초로 대륙의 침략에 저항  일본과 연합하려고 했든 세력이다.

 

삼별초정권은 배중손이하 주도 세력이 여몽 연합군의 기습전에 전사하므로 실패하게 되었다. 김통정이하 잔여세력이 제주로 옮겨 항전을 거듭하여 일본정벌에 막대한 차질을 주었고, 몽고의 일본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든 가장 큰 이유가 삼별초 때문이였다.  일본이 통일제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었고, 인민을 소중히 해야한다는 사상과 무기 개발같은 단초를 당시 미개한 일본 부족들에게 전달한 인물입니다.

 

 

 


 

 

배중손 장군, 일본인은 우리 후손 이라며 일본인 대량 학살을 막은 인물

배중손 [裵仲孫] ∼1271(원종 12).고려 후기의 장군.

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으로 수령으로 추대되어 승화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시중이란 직책으로 진도로 천도하여 몽골군을 유인하고자 시도하고 제주도와 대마도를 근거지로 기지를 건설하고 진도 명량 벽파진에서 몽골 백만 대군 수장 계획을 수립하고 몽골군을 수장시키고 중원으로 진출하기위해 일본 80개의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시도했었으나 고려첩자에 의해 명량 벽파진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배씨 종문은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三別抄のヘッダー長寿。序盤(西班)の将軍として三別抄の有力な指揮官であったわけでデモン抗争(對蒙抗爭)が続く間、受領に推戴された人物である。全羅道・慶尚道の住民との距離開京のグァンノがこれに呼応して同調した。開京では我慢情事(參知政事)新辞典(申思佺)を全羅道土ジョクサ(全羅道討賊使)に任命して討伐にしたが、成果はなかった。また、検討は単独では進歩の三別抄を征伐する能力がなかったので、モンゴルと連合して攻略したが、いずれも失敗した。
ベジュン手は市販の名で日本全域に写真を派遣してモンゴル軍と考慮日本が同盟して抗戦に参加することを要求した。しかし、日本はそれぞれ表側の混乱で統一されていなかったのベジュンソンは日本の統一を求めてうモン連合軍の活動を阻止しようと済州島モンゴル基地を数回占拠破壊し、進歩鳴梁で百万の大軍を収蔵させようと試みたし、モンゴル軍の日本人の大量虐殺を防ぐことした。

 

 

 三別抄のヘッダー長寿。序盤(西班)の将軍として三別抄の有力な指揮官であったわけでデモン抗争(對蒙抗爭)が続く間、受領に推戴された人物である。全羅道・慶尚道の住民との距離開京のグァンノがこれに呼応して同調した。開京では我慢情事(參知政事)新辞典(申思佺)を全羅道土ジョクサ(全羅道討賊使)に任命して討伐にしたが、成果はなかった。また、検討は単独では進歩の三別抄を征伐する能力がなかったので、モンゴルと連合して攻略したが、いずれも失敗した。


南考慮(開京以南)を立てて首都を江華島で震度に移しモンゴル軍を誘引して鳴梁して炉を用い首長せた後、中盤に進出しようと、日本の80カ国に使者を送って検討日本は同盟を主張した。


80カ国に競うかどうかを検討の子孫が建てた国(日本)に統一を政府に中原大陸勢力に共同対応を要求したベジュンソンの影響で、日本の統一がされたという主張日本は先祖の国が中原大陸に迫害受ける認識を持っていたたことは事実である。



世界初の人民のための検討を主張した。日本と南考慮(ベジュンソン)連合してモンゴルに対抗して中原大陸を図るしようという主張、実際モンゴルの済州基地を数回占拠日本の侵略を挫折させた。 




 

고려의 항몽유적지인 남도산성의 모습입니다.  고려의 삼별초가 몽고군을 몰살시키겠다고 항거한 진도입니다. 진도자체가 물살이 유속이 빠르고 기온은 내륙보다 따듯한 곳입니다.

 

몽고군수장 계획을 세운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는 실패 했으나  훗날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의 해전대첩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곳이 되었습니다.  울돌목이란 진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말합니다. 그만큼 물길이 사방 파도가 센 곳입니다.

이번 진도 세월호는 진도 남단항구 쪽 조도 앞입니다. 반대로 울돌목 이순신장군의 승전지는 북쪽 육지와 진도가 연결된 곳이고

남도 산성은 진도의 남쪽 조도와 진도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지점 깊숙히 있습니다.

 

 

 

 진도 방파제 모습이구요, 앞에 조도가 병풍처럼 가리워져 있는데요,

본래 이곳은 다른 지역과 달리 물살이 세차고 파도도 많은 곳입니다. 따라서 진도항은 오목하게 세맨트로 되어 있고,

조도나 그 앞들의 섬들에는 파도가 세차고 바위섬들입니다.  

 

진도항의 석양은 파도와 물소리로 깊은 바다 임을 알려줍니다.

 


 



일본 NHK TV 가 본 진도





지난해 KBS'역사스페셜'을 연출한 최영민이 진도에 와서 한 말이 생각난다.

"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가 있었습니다."


"강화, 제주, 그리고 삼별초에 관련된 우리 다큐멘터리는 선생님의 소설 예고편이 될 것입니다."




'진도에 또하나의 고려가 있었다.'



KBS 연출자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1989년 일본 [역사탄생]잉란 프로그램에서 '수수께끼의 고문서'란 제목으로 삼별초에 대하여 지적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진도에 와 있던 삼별초군이 일본 가마쿠라 막부에 외교문서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 외교문서는 [문영 8년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蔣不審條條]라는 문서로 동경대학교 자료편찬실에서 찾은 것이다.

일본 중앙대학교 이시이 마시토시 교수는 이 문서는 1271년 고려가 보낸 외교문서로서 1268년에 보낸 [문영 5년 고려첩장]과

비교해 다른 문제점을 분석한 보고서로 보고있다.

문영 5년에 보낸 문서에는 몽고 연호인 지원至元을 쓰고있으며 몽고왕을 칭찬하면서 일본이 몽고에 굴복하기를 권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3년 후 문영 8년에 고려 조정이 보낸 같은 이름의 고려첩장에는 고려 조정이 진도로 도읍을 옮겼으며 몽고는 다른나라의 사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의 지원을 청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국의 정통국이라 자처한 진도의 삼별초 왕국이 보낸 문서로 본다는 것이다.

NHK TV 방송 [역사탄생]의 '수수께끼 고문서' 의 취재 작가를 맡았던 이시이 마시토시는 몽고의 일본 내습을 막아준 것은

신풍神風, 가미가제라는 폭풍만이 아니고 삼별초의 몽고에 대한 항거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견해를 말한다.

<아사히신문> 사가 펴낸 [몽고내습]에서 일본인 작가 야마다 도모히코는 진도와 제주에서 3년 간 저항한 삼별초는 단순한 반역군대가 아니라 당시의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 주역이었으며 일본을 구한 은인이라 말하고 있다.

특히 야마다는 NHK TV 방송후 TV 방영 뒷이야기를 쓴 책에서 삼별초 군대는 단순한 애국집단이 아니라 민중에 의한 공화국을 꿈꾼집단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그 증거로 신분증명서 견인 도적圖籍을 불태우고 계층이 없는 민중의 군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진도에 온 삼별초군은 새로운 왕을 모시고 고려의 정통 왕국이란 긍지를 가지고 일본에 원조를 청하면서, 몽고의 일본 정벌을 경계하라는 문서를 보냈다고 보아진다.



삼별초는 진도정부만이 정통고려라고 명명(命名)했다.

일본 동경대학 사료편찬소에 보관 중인 진도정부의 외교문서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가 그 증거로

남아있다.

1989년 일본 NHK는 다큐멘터리 역사탄생<수수께끼의 괴문서>에서 고려첩장불심조조는 진도정부 삼별초가 보낸

외교문서라 밝히고 1268년 개경에서 보낸 외교문서와 1271년 진도에서 외교문서가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면서 두 문서를 비교 분석했다.

 

<1268년 개경에서 보낸 외교문서>

하나, 몽고와 군신지예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몽고 황제의 덕을 높이 치하하고 있다.

둘, 몽고의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1271년 진도정부의 외교문서>

하나, 몽고를 짐승의 무리라고 하거나 몽고는 동정심도 없고, 몽고 풍습을 오랑캐의 습속으로 표기 외교문서로는

매우 강력한 문구를 사용했다.

둘, 몽고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

셋, 진도정부야말로 정통의 고려임을 말하는 것으로 고려첩장이라 이름붙인 문서를 보내고 고려왕조의 정통성이

진도로 계승되고 있음을 말했다.

넷, 몽고 침략의 위기적 상황을 일본과 공동으로 타개해 나갈 것을 소망하고 있었다.

이것은 삼별초 진도정부가 자주적 정통 진도에 또 하나 고려를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역사가들에 의하여 주동자인 배중손을 반역전(反逆傳)에 넣고 <삼별초의 난>으로 기록했으나

1977년 이후 삼별초 호국정신이 재평가되면서 <삼별초의 항쟁>으로 기록되었다.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여 속국이 되지 않기 위한 삼별초의 봉기를 반란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6.진도 고려왕국 삼별초의 패망

 

몽고의 쿠빌라이는 삼별초를 섬멸한 후 일본을 공략 동아시아로 세력을 넓히는데 혈안이되어 삼별초를 압박해

들어왔지만 삼별초의 세력을 꺾지 못했다.

삼별초는 몇 차례 승전보를 울린 전적으로 의기충천하여 방심하기 시작했고 몽고군을 얕잡아 보았다.

그틈을 노려 여몽연합군이 결성되어 전함을 다수 확보하고 무기와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여 중, 좌, 우익으로

나뉘어 진도를 공략했다.

고려 김방경과 몽고 흔도는 중군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벽파진을 공격했고, 몽고 장수 홍다구가 거느린 좌군은

노루목쪽으로 상륙 지막리 오산리 방면을 거쳐 두시난골로 접어들어 용장성의 뒤편 골짜기로 진격했다.

고려 김석(金錫)과 몽고 장수 고을마가 거느린 우군은 군칙기미로 상륙하여 용장성 동쪽 난곡으로 진격하였다.

삼별초는 숫자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화포로 무장한 연합군의 급작스런 기습작전에 밀려 패주했다.

왕 온(溫)은 패주하던 중 지금의 왕무덤재 일대에서 추격부대에 잡혀 참살당하고 김통정은 금갑포에서

제주도로 향했다.

진도 아녀자, 궁녀, 관아에서 부리던 종 등은 몽고군에 잡혀가느니 죽음을 택한다며 돈지벌 큰 둠벙에 몸을

던졌다.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몽고는 군사가 부족하니 문무관 산직과 백정, 잡색 및 승려까지 검열하여 충당하라.” 하였다.

“또한 고려정부 4품관 이상 집에서는 종1명씩 내어 김방경, 흔도, 홍다구 등과 함께 진도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처음 관군이 자주 적과 싸워 이기지 못하니 적이 업신여겨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관군이 협공작전으로 냅다 치니 적이 처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삼별초 관련 중요 인물

 

배중손(裵仲孫)

고려 무인 정권 말기의 장군으로서 삼별초 대몽항전 봉기의 주도자.

<고려사>에는 반역자로 기록되어 있다.

배중손의 출생지를 진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사>에 “역적들의 고향이었던 상주, 청주, 진도 등의 고을 이름을 격하시킬 것을 청하였다.”는 기록과

고려 때 진도군 임회현의 토착 성씨가 배씨였다는 점이다.


 

김통정(金通精) 강화도에서는 강화 교동 출신으로 구전되고 있다.

대몽항전 당시 장수로 삼별초에 합류했다.

진도가 여몽연합군에 패하자 삼별초 잔류군을 이끌고 제주로 들어가서 항파두리 성을 쌓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자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도에는 김통정을 특출한 장수로 묘사된 설화가 많이 있다.

 

왕온(溫)

고려 후기 왕족으로 영녕공 준(永寧公 綧)의 맏형이다.

삼별초의 장수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진도 삼별초가 패망한 뒤 아들 환(桓)과 함께 참살되었다.

의신면 침계리(도지정 기념물 제126호) 왕의 무덤 옆에는 그가 타고 가던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이 있다.

 

유존혁(劉存奕)

삼별초의 세력이 진도로 옮길 때 함께 내려와서 남해현을 거점으로 웅거하다가 삼별초가 제주도로 갈 때

배 80여척을 끌고 갔다.

 

박천주(朴天澍)

삼별초 회유라는 명분으로 몽고 서찰을 들고 진도 벽파에서 배중손등을 만났다.

삼별초는 몽고의 회유서찰을 던져버리고 몽고 사신을 억류했다.

박천주는 살아 돌아가서 조서를 받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김방경

고려 후기의 삼별초 진압에 공을 세웠던 무장이다.

몽고의 일본 원정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며 몽고를 들락거리면서 몽고로부터 큰 벼슬과 상을 받았다.

 

홍다구

고종 때 몽고에 투항하여 몽고의 고려 침략을 도왔던 홍복원의 아들로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몽고의

충신 노릇을 한 자.

진도와 제주도에서 삼별초 진압을 선두 지휘한 몽고의 앞잡이로써 훈장을 받았고 몽고의 벼슬에 올랐다.

몽고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국인 고려에 온갖 행패를 부렸다.

 

백성과 장군들의 노래

 

아~ 진도는 또 하나 고려였네.

이 땅을 지켜온 이름 모를 사람들

아직도 들리는 저들의 함성.

 

동백꽃 피고 해당화 피는

살기 좋은 오토강산.

자자손손 번창하여 천년만년 살고지고

자자손손 번창하여 천년만년 살고지고.

 

용맹한 군사들이여 늠름한 군사들이여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가 지키고 우리가 살리세.

기름진 이 땅과 저 푸른 바다와

사시사철 변화하는 산과 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이 나라를 지키자.

 

이 땅에 동이 튼다, 새 날이 온다.

오랑캐를 물리치고 새 고려를 세우자.

낫 들고 일어나세, 호미 들고 일어나세

우리 백성 힘을 모아 새 나라를 만드세

아~ 진도는 또 하나 고려였네.

 

국악 오페라 “구국의 고려전사, 삼별초”중 백성과 장군들의 노래

 

<위의 글들은 용장산성 충혼탑 비(碑)에  세겨진 글로 소설가 곽의진 선생님의 글입니다.







2007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개최된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탐라와 유구왕국>(7월17일~8월26일)이란 전시회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키나와에서 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수막새 기와 두 쪽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 유물은 이미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닌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고 결정적으로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암기와에서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 명문이 확인된 것이니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13세기 고려 명문 기와! 이 기와가 고려 삼별초 군이 쌓은 진도 용장산성 출토 기와와 같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에 집단적인 이주가 있었다? 이주를 할 수밖에 없는 특수 집단이다?

이 의문에서 떠오르는 것은 삼별초와 이들의 집단이주이다. 그동안 우리는 삼별초 최후에 대해「고려사」의 내용을 의심해 왔다. 즉, 지금까지 교과서는 삼별초가 800여년 전 몽골 침략군에 끝까지 싸우다 1271년 진도에서 배중손이 진압되고, 잔여 세력이 제주도로 갔으나 1273년 김통적 세력마저 소탕되어 진압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가슴 속에 지녀 온 삼별초란 누구인가? 민족의 전사, 야습(夜襲)·복병(伏兵)·협격(俠擊)의 빨치산 역사 원조, 고려 무장 사병집단이 아닌가? 이런 삼별초군이 진압당하여 흔적도 없이 섬멸되었다? 이는 믿기지 않는 기록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유년(1273)에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군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이 된다. 표류기록을 통해 추정하면 제주도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다. 동서로 1000㎞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 떨어져 있다.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 이 뱃길을 이 시기에 건너가 새로운 삶을 꾸렸을 집단은 바로 삼별초군이 아닐 수 없다.

주목되는 것은 삼별초군의 조력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구스쿠라 같은 큰 성의 축성과 비로소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구도 적고 범위가 작은 섬에서 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사실은 축성술과 전쟁술에 능한 외부 세력에 자극을 받은 결과로 본다. 왜냐하면 유구국의 역사 시대는 800년부터라고는 하나 류구국 사서에 나오는 왕조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3세기 이전에는 이런 기반이 미약했다는 것으로. 자극을 준 이들과 기술을 전해준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바로 삼별초군이라는 것이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주민들은 이곳을 아리랑고개라고 부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이 서린 언덕이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2015-02-11


삼별초군의 오키나와 이주, 이는 우리 역사에서 보여지는 극적인 엑소더스(Exodus)요, 디아스포라(Diaspora)이다. 엑소더스나 디아스포라는 분노(憤怒)와 한(恨)의 분출이니, 진도와 제주의 역사나 삼별초의 존재는 섬나라로, 본토와 격리된 섬의 운명, 오키나와의 운명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로 간 삼별초군의 인적구성은 어떠한가? 삼별초는 무신들의 사병으로 시작되어 고려-몽골 전쟁이 끝나 대몽강화(對蒙講和)가 이뤄지자 조정에 의한 해체 위기에 원나라에 입조하고 돌아 온 원종이 마치 몽고군이 파견한 식민지 담당 총독처럼 행세하는 것에 반발하여 배중손을 우두머리로 하여 몽골(원나라)과 고려 왕조에 대항하였다. 삼별초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왕족 승화후 온(昇化候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 일부 노비와 개경으로 가지 않은 귀족들이 참여하여 1000여 함선을 징발, 진도(珍島)로 가 용장산에 행궁을 마련하고 산성을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민중들의 호응도 있었다. 경상도 밀성(밀양)의 군민들이 봉기하여 수령을 죽이고 진도 정부에 호응하였고, 개경에서는 관노가 일어나 다루가치와 고려 고위관리를 죽이고 진도 정부에 투항하였으며, 경기도 대부도(大部島) 주민들은 몽고인 6인을 죽이고 진도 정부와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진도 정부’가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자 멀고 가까운 여러 지방의 관원들이 진도에 들어가 고려황제 온을 알현하려고할 정도였다

이후 3년간 항쟁하다 배중손과 승화후 온이 남도석성에서 전사했다. 이로써 김통정이 우두머리가 되어 제주도로 가 1273년까지 고려·몽골 연합군과 항전하다 일본정벌 정책을 준비한 1만여 여·몽 연합군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크게 패했다. 항파두리 북쪽 바굼지(破軍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3년 간의 대몽항쟁은 외세 침략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한 호국 항쟁의 영웅적 활동이었다. 각 계층의 사람들이 대열에 참여했고, 대다수가 저항의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제주에서 진압되었다 해도 이들의 성향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잔족 세력의 최후와 처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는 완전한 진압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이주의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삼별초군의 오키나와 집단이주는 축성술과 전투술과 기와 제작술 뿐만 아니라 아라리도 전파시켰을 것이다.    

(출처:뉴시스 국제)[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

    기사등록  최종수정 일시 [2015-02-16 16:21:29]


 

당시 세계를 지배한 징키스칸의 몽골 세력과 맞서 고려인들이 일본정벌 소모품으로 또는 유라사아 대륙 정벌 소모품으로 끌려가지 않게 하고자 싸운 자주의 백성들의 항거, 삼별초의 세력은 진도와 제주도를 중심으로 남해도 거제도와 마산, 김해, 동래 등 남해안 일대로 뻗쳤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조세를 싣고 개경으로 향하던 조운선은 종종 삼별초에게 물건들을 빼앗았으며, 스스호 자주적으로 일본에 국서와 사신을 보내는 등등 해상 왕국을 부활 시켰습니다. 몽골의 속국인 고려 정부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몽골도 고려에 이어 일본을 공략하려던 계획을 빈번하게 좌절 되고 일본 정벌 기지가 파괴되거나 실행에 옮길 수 없게 됐습니다.



수차례의 몽골군 공격이 진도 벽파진에서 몽골군이 대패를 하게 되었고, 몽골의 군대는 모두 죽고 혼도 몽골 장군만 혼자 살아서 돌아가는 실패때문에  드디어 고려 몽골 연합군이 편성 됩니디다.


 이로 인해 고려가 몽골의 속국에서 변방의 나라 대접을 받게되고 일본 정벌에 동원될 몽골인에 의한 직접 인력징발 기회를 벗어 나게 됩니다.  고려의 김방경 장군을 위시한 1만 2000여 명의 여몽 연합군은 3 군으로 나뉘어 불시에 삼별초 근거지를 공격했습니다.



배중손 삼별초 정권이 일본에 무기와 기술 그리고 대륙의 막강한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이 여러 나라로 분열된 상태를 하나의 구심체로 통일 되어 삼별초와 연합해야 한다고 일본 각국에 보낸 문서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배중손 삼별초 정권은 승화후 온이 왕으로  삼별초 무인 정권이 막부로 권한을 행사하는 이원 집정제를 형성했었고, 일본에서 막부 정권이 형성 시키고 일본 통일과 일본 이라는 나라가 형성되는데 크다란 자극을 주었고, 폐쇄적이든 일본 사회에 더 큰 대륙이 존재함을 깨우쳐주는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