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은 매제사돈 이항복으로인해 임진왜란때 도승지를, 훗날 영의정이 되었다
권율 출생 : 1537년/ 사망 : 1599년 /약력 : 1587년 전라도 도사/1591년 의주목사/1588년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1596년 충청도 순찰사, 도원수
권율은 영의정 권철의 아들 본관은 안동이고 태어난 곳은 강화 또는 필운동으로 알려져 있고 어린시절은 필운동 일대에 살았다. 권율은 1582년에 46세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면서 조정에 출사, 의주목사로 부임 받아 얼마 않있다가 부정부패분제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 임진년 조,일 전쟁이 발발하자 광주목사로 곽영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용인에서 왜군과 교전했으나 패전하였다.
이에 권율은 광주로 되돌아가 남원에서 1천여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북진하여 금산군 이치에서 조헌과 고경명의 군대가 전멸하고 남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쫒으면서 서울로 들어 오면서 전라도 순찰사에 승진 하고 정병 8천명을 인솔 병마절도사로 승진 선거이 장군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서울로 진격 했다.
서울로 오는 도중 남하하는 왜군의 공격을 수차 받았으나 이를 격퇴 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593년 권율은 병력을 나누어 선거이 장군에게 시흥 금주산에 진을치게 한 후
2천8백여명의 병력으로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서 주둔하였다. 이 때 3만의 대군의 왜군을 행주삱성에서 대파하였다하는데 그 숫자가 24000명에 이르는 전과를 보고 햇다. 이것이 바로 국사에서 말하는 "행주대첩" 이다.
행주대첩의 무공을 인정받아 권율은 도원수에 승진하였으나, 수시로 백성들인 도망병을 즉결처분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 되었다가 이후 한성판윤에 재기용도면서 다시금 관직에 오르게 되는데,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재차 도원수에 제수 되었다. 이로 볼때 권율은 조정에 보고 없이 도망병 또는 군문의 죄를 물어 효수를 많이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시의 중요성에 비추어 한번 실수로 파직 당했다고 하긴 그렇다.
1597년 이른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장수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왜군과 대치했으나, 명나라 장수 양호와 도주한바 있고, 순천 왜교성에서도 7일간 도주 한 바 있다. 그러나 아군임으로 도주부분은 퇴각으로 명명함이 바람직 하다. (참고 순천왜교성전투,사천성전투)
종전이 되자 권율은 1599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서 권율은 예순셋의 일기로 사망 했다.
권율이 과거시험에 임한건 그의 나이 무려 마흔여섯살때로 당시 평균수명이 50세정도로 보면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관속에 들어 갈 나이에 과거를 통과한 것이다.
보통 사대부의 자제들이 스무살을 전후로 해서 응과하는 당시의 세태에 비추어볼때 권율의 출사는 상당히 늦다.
권율은 서울 장안의 한량으로 꽤 이름이 있었는데 영의정아버지 덕택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었음에도 늦은 나이로 과거를 통해 당당히 관직에 출사했다. 이때 인사 담당이 사돈인 매제 이항복이 였다.
선조 28년 1595년 2월 8일 신해 6번째기사,
이헌국이 아뢰기를,,"도원수 권율은 대궐 밖을 전제해야 하는데, 임기 응변하는 일은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매양 품명(명령받는 일)하는 것으로 규칙을 삼으니, 남족지방의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제찰사를 반드시 내려보내 진압하고 모든 일을 재결토록해야 할 것이며,... 배설이 배성들에게 만류당하여 경상우도수사에 부임하지 못 할리가 없습니다."선조에게 아뢰다.
선조29년 2월16일 판서 김우웅 시무를 논함, 상차,
"장수가 많으면 명령이 나오는 곳이 많아 제장과 열읍이 일정하게 다르는 곳이 없게 되니, 이것이 끝내 패망하게 되는 원인입니다.(주역) 만약에 별도로 대장을 두어 군부를 총괄하게 한다면 곽재우 배설 같은 사람이 적임자 일 것입니다.